정말정말정말 오랜만에 완독.
국회의사당을 중심으로? 동고서저 형태의 빌딩 구성이나 서울 재계발의 역사가 1966년 존슨 대통령 환영, 86 아시안게임이나 88 서울올림픽 등 외국인에게 보이기 위한 계기로 사실상 시작했다고 이해함.
그렇게 박정희 서거 직전까지의 서울의 발전상에 대해서 나옴.
윤중로 등 여의도 발전사가 많이 언급되었던 듯(책을 워낙 오래 붙잡고 있었더니;;;)
신격호가 일본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책에서는 한국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건너간 재일교포로 나옴. 나중에 일본으로 귀화를 한 건가... 외국자금 투자로도, 국내인 투자로도 적용되는 마법의 독재시절.
강북을 막고 강남으로 유도하던 그 시절.
그렇게 서울은 발전했다.
31. 1945년 8월 15일, 광복 당시의 우리나라 토목·건축기술 수준은 형편이 없었다. 일제가 인재를 키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940년대에 들어서는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에도 토목과가 생겼지만광복이 될 때까지 단 한 명도 졸업생을 배출하지 않고 있었다. 조선인 재학생은 모두 합쳐도 5~6명에 불과했다.
32. 제2한강교는 우리나라 기술진에 의해서 이루어진 최초의 대형구조물이었다.
78. 여의도시범아파트단지는 / 중앙공급식 난방은 국내 최초로 고입되었고, 도시가스는 동부이촌동에 이어 국내에서 두번째, 공동구도 국내 최초, 엘리베이터가 달린 고층아파트도 국내최초였다.
80. 1969년에 기공식을 거행한 국회의사당이 준공된 것은 1975년 8월 15일이었다. 섬의 서쪽 끝이 메워진 동시에 여의도동 1번지가 탄생한 것이었다. 한국방송공사(KBS)가 준공된 것은 1976년이었고, 동양방송(현 KBS 제2방송국)은 1980년에, 문화방송 여의도스튜디오는 1982년에 준공되었다. 서울방속이 개국된 것은 1991년이었다.
119. 이때 정부가 계획한 환영인원은 학생 100만, 시민 155만, 공무원 20만 명 등 모두 275만 명이었다. 그리고 존슨이 도착하는 31일은 월요일이었지만 오후시간은 학교 ·관청 ·은행 ·회사 등 모든 기관이 임시휴무하기로 국무회의에서 결정했다. 이 날 정확히 얼마나 많은 인원이 동원되었는지 알 수 없다. 200만 명이 넘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1966년 당시 2백만 명이라는 숫자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첫째, 그 당시 서울시민의 총수가 350만 명밖에 안 되었다. 고속도로는 착공도 되지 않았으니 지방 거주민을 관광버스로 동원해올 수는 없었다. 향토예비군도 민방위대도 생겨나기 이전이었다.(1970~80년대의 인원동원은 예비군 ·민방위대의 연간 의무화된 훈련시간에 편입시켜 대량차출이 가능했다). 국민학교에서 고등학교에 이르는 각급 학교 학생 전체가 동원되었고 공무원 ·회사원, 통 ·반장도 동원되었다. 재향군인회 ·반공연맹 등 각종 친여적 단체, 부인단체도 동원되었다.
그저 동원된 것만이 아니었다. 각급 학생들은 존슨의 얼굴을 닮은 만화를 그려서 그것을 들고 흔들라고 했다. 만화의 물결을 헤치면서 김포가도-제1한강교-시청 앞에 당도하라는 것이었다. 5만 장의 포슽, 11개의 대형아치, 19개의 대형탑, 7개의 현판, 9개의 대형플래카드 등. 정부도 미쳤고 350만 서울시민도 미쳐 있었다......
122. 존슨 방한 뉴스를 가장 빨리 TV화면에 담기 위해서는 일본 위성통신망을 전세내야 했다. 서울에서 녹화한 것을 전세기 또는 여객기로 일본에 보내 일본 인공위성을 이용하여 미국 ·유럽에 보내는 방법이었다.
132. 일정한 지구의 도시기능을 회복시키거나 새로운 기능으로 전화시키기 위하여 실시하는 도시계획사업을 'ㄱ재개발사업'이라고 정의한 데 이어 재개발사업계획의 결정, 시행요건과 시행계획, 관리처분계획, 청산 등에 관한 절차가 규정되고 있다.
138. 한국인의 중국인에 대한 편견은 주로 일본인이 심어주고 간 것이지만, 통일신라시대 이후로 1천 년 이상 계쇡된 종주국 ·종속국 관계에 대한 반발심도 있었고 국민간의 습속의 차이에도 원인이 있었다.
139. 1950년 대 이후 한국내의 중국어는 거의 북경관어로 통일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소공동은 1950년대 이후 서울 화교세력의 중심이 되어 있었다.
141. 한국전쟁 후인 1953년 2월 14일에 실시된 제1차 개혁은 100원을 1환으로 하는 개혁이었다. 그리고 5 ·16군사쿠데타가 일어난 다음해인 1962년 6월 10일에 제2차 개혁이 실시되었다. 이 2차 개혁으로 종전까지의 10환이 1원이 되었다. / 2차 개혁은 중국인들이 장롱 속에 감추어 놓ㄴ은 거액의 현찰을 찾아내는 것이 목적의 하나였다고 한다. / 통화개혁의 결과로 드러난 중국인의 경제력은 별로 대단치 않았다.
162. 모든 재개발사업은 지구지정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168. 이 여행에서 그들은, 첫째 국민경제의 발전에 따라 도시는 재개발되어야 한다. 둘째, 도시개발은 20층 이상 40~50층에 달하는 고층화로 추진되어야 한다. 셋째, 재개발사업은 자기들과 같은 중소상인들이 관여할 일이 결코 아니다를 체득하고 돌아왔다.
170. 중구 태평로 2가 23번지를 주소지로 한 프라자호텔이 정식으로 개관한 것은 1976년 10월 1일이었다. / 서울 도심부 재개발사업 제 1호라는 점에 더 큰 존재가치를 지니고 있다.
171. 보험회사라는 것은 남의 돈을 긁어모아 돈 굴리기를 하는 기업이다.
174. 한국을 대표하는 동서의 길 종로와 역시 한국을 대표하는 남북의 길 세종로가 만나는 지점이 '대한민국 서울특별히 종로구 종루 1가 1번지'이다. 이 장소가 바로 대한민국 제1번지인 것이다. / 권력가의 입장에 서면 보는 눈이 달라진다. 즉 경복궁자리, 일제 때는 조선총독부가 있던 자리인 세종로 1번지가 대한민국 1번지라고 보면 세종로와 종로가 만나는 자리는 세종로 142번지가 된다. '고종 즉위 40년 칭경기념비' 속칭 '비각'이 세종로 142-3에 위치하는 것은 경복궁-조선총독부가 세종로(광화문통) 1번지로 정해진 때문이었다.
177. 도심재개발은 바로 '사업'이어야 했다. 즉 그 일을 통하여 이윤이 생겨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재개발사업의 주체는 기업체이거나 혹은 개별기업인 공동참가를 원칙으로 하고 있다.
181.한국을 방문하는 카터의 입장에서는 한국에 가서 "휴전선을 돌아보았더니 미군의 철수는 시기상조라고 판단되었다"는 견해를 발표할 필요성이 있었다. 박 대통령 입장에서는 "한국이 대내외적으로 매우 어려운 처지에 있으니 어느 정도의 인권탄압은 관대히 봐달라"는 부탁을 하는 만남이었다.
192. 마침내 수평분할이 합의되었다. 지하 5층에서 지상 12층까지의 하반신은 세종로동 211번지 동아흥행(주)의 건물로 종로구에 속하게 되며, 지상 13층부터 20층까지의 상반신은 태평로 1가 68, 감리회유지재단의 건물로 중구에 속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 완전히 합의된 상태의 건축허가가 내린 것은 1989년 4월 15일이었고 1993년 1월 13일에 사업 완료되었다.(광화문 빌딩에 대하여)
207. 조선왕조 초기, 제3대 왕 태종은 둘째달 경정공주를 개국공신 조준의 아들 조대림에게 출가시키면서 아담한 집을 지어주었다. 이 집이 작은공주댁 또는 소공주댁으로 불려지면서 그 마을이름도 소공주동-소공동으로 불리게 되었다.
219. 장충단 공원의 동편, 송림이 우거진 절경의 자리에 '박문사'라는 일본식 사찰이 세워진 것은 1929년 말의 일이었다. / 경희궁 정문이었던 홍화문을 옮겨다 정문으로 하고 종류는 소공동 원구단에 있던 속고(돌북)의 누를 옮겨 달았따. 이토 히로부미의 명복을 비는 절을 지으면서 조선왕조 ·대한제국과 관계 있는 사적의 파괴를 자행했던 것이다.
228. 신격호는 1921년 11월 3일 경상남도 울주군/ 1922년 10월 4일생/ 당초의 생년월일은 1921년 10월 4일이었다. / 그가 일본에 건너갈 때 그의 이름은 시게미쓰 다케오였다. 1940년에 일제에 의해 강요된 이름다 '창씨개명'으로 신격호는 '시게미쓰 다케오'로 바뀌어 있었다.
233. 신격호가 국내에 투자하기 시작한 것은 1958년부터였다. (주)롯데와 롯데화학공업사를 설립하여 껌 ·캔디 ·스낵류 ·라면 등을 생산 ·판매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일국교가 정상화된 다음해인 1966년 11월 4일에 자본금 500만 원의 동방알루미늄공업(주)을 설립했다. / 1980년 이후부터는 롯데알미늄(주)이 되었다. 그리고 다음해인 1967년 4월 3일에 자본금 3천만 원의 롯데제과(주)를 설립하여 신격호가 사장, 유창순이 회장으로 취임했다. 일본에서 성장 발전해온 '롯데제과'의 본격적인 한국진출이었다.
234. 1960년대 말까지는 기본식량 자체가 부족한 시대였으니 부정식품이니 불량식품이니 하는 말도 거의 들리지 않았다. 큰 재래시장 구석에서는 아직도 '꿀꿀이죽'이라는 것이 팔리고 있었다. 음식점에서 팔다 남은 밥이나 반찬들을 한데 모아 큰 드럼통에 넣어서 끓인 것이 꿀꿀이죽이었고 지게꾼 같은 하층민은 이것 한 사발로 끼니를 때웠다.
239. 1970년 11월 13일, 이 날은 신격호에게 운명의 날이었다. 비록 롯데껌이 불량식품으로 판정이 되는 수모의 날이었지만 그날은 바로 한국에 '롯데재벌' 탄생이 결정되는 날이었던 것이다.
240. 그것은 당시의 신격호가 사실상 일본인과 다름없었고 일본 부인몸에서 난 두 아들이 자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재산의 거의가 당연히 일본에 귀속될 처지에 있었다.
240. 1994년 말 호텔롯데는 2017개의 객실을 갖춘 세계 10위권의 호텔로 성장했다.
277. 백화점이 최초로 생긴 것은 1852년 파리의 봉마르셰였다. 미국에는 1858년에 뉴욕 번화가에 메이시가 생겼으며 영국 런던에는 1863년에, 독일에는 1870년에 생겼다. 일본에서는 1904년에 도쿄 니혼바시에 생긴 미스코시가 처음이었다. 서울 충무로 1가에 미스코시 지점이 생긴 것은 1906년이었고, 조지아 ·미나카이 ·화신 등의 백화점이 있었다. 쇼핑센터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에서 자동차가 크게 보급되어 '주택의 교외화'가 진행된 데서 비롯되었다. 즉 교외의 주택단지 중심에 '다수의 소매점이 계획적으로 형성된 집합상가'가 그 시초였다. 1954년에 디트로이트 교외에 도시계획가 빅터 그루엔이 계획한 것이 최초였다고 한다.
277. 롯데백화점을 쇼핑센터라고 한다면 궁색하지만 명분은 세울 수가 있었다. 부랴부랴 '백화점 허가신청'이 '쇼핑센터 허가신청'으로바뀐다/ 그 명칭이야 어떻든 간에 외국법인이 백화점 영업을 할 수는 없었다. / 이 백화점이 들어서는 부분에 그동안에 외자도입법에 의해 면세조치된 여러 가지 세금을 다시 납부하고 신격호라는 한국인이 전액출자하는 내국법인을 새로 설립해야했다. / 내국법인 '롯데쇼핑 주식회사'가 설립된 것은 1979년 11월 15일이었다. 아직도 이 회사의 정식명칭은 '롯데쇼핑(주)' 그대로이니 생각해보면 우스운 일이다.
282. 박 대통령은 / 도박행위에 대해서는 용사하지 않았다. / 독박행위는 엄금한 대신에 여성 관계와 축재행위에는 비교적 관대한 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