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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읍 임랑리 해변에 있는 해수욕장이다. 옛부터 월내해수욕장과 함께 임을랑포라 하였다. 임을랑포라는 지명은 주된 성책이 있는 갯가라는 뜻으로 임책(任柵)의 옛말이다.
차성팔경의 하나이다. 백설 같은 백사장이 1킬로 넘게 넓게 깔려 있고 남쪽에는 임랑천의 맑은 물이 백사장을 가로질러 바다속에 잠긴다.
백사장 주변은 노송이 큰 가지를 펴고 병풍처럼 푸른 숲을 이루고 있다. 근래에 관광객이 제법 붐비고 있지마는 아직은 호젓하고 조용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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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광산 계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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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장안사
찾아가는길 : 기장시장에서 9번 마을버스이용 장안사 하차(20분소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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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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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시사철 계곡의 경치가 좋아서 옛 사람들이 금수동이라 불렸다는 곳. 계곡 아래 쪽 입구에는 아직도 바위에 새겨진 금수동이란 글자가 선연한데, 길을 내면서 이 바위를 훼손하지 않으려고 우회하느라 급커브 길을 만들면서까지 지켜온 이름이다.
장안사 계곡이라 통칭하는 이곳 불광산은, 봄에는 철쭉이 만발하고, 여름에는 시원한 계곡이, 가을에는 단풍이 좋고, 겨울에는 벌거숭이 나무숲이 장관이라 휴일이면 관광객들로 붐빈다.
장안사를 지나 척판암과 백년암 쪽으로 오르면 시멘트로 포장된 길 양옆으로 울창한 활렵수림이 하늘을 덮고 서서 시원한 나무 그늘을 만들어 준다. 백년암을 끼고 돌면 본격적으로 흙과 풀을 밟으며 등산할 수 있는 숲길이 이어지는데, 키 큰 나무들이 숲속터널을 만들어 준다.
불광산은 숲이 울창하고 활렵수림이라 등산로 대부분이 이처럼 나무터널이 많아 향긋하고 시원한 나무그늘을 산책하는 기분으로 산길을 오를 수 있다.
장안사를 왼쪽으로 돌아 오르면 폭 넓은 계곡 양옆으로 소나무 숲 아래 평평하게 다져진 공터가 많아 자리를 펴고 즐기는 사람들이 평일에도 제법 눈에 띈다.
장안사를 중심으로 불광산 왼쪽편은 산길보다는 계곡이 좋다. 하류에서 산꼭대기 상류까지 이어지는 계곡은 금강산 계곡과 같은 장관은 못 돼도, 아기자기하면서 아름답고 운치있는 풍경이 우리 나라 어디에 내 놓아도 빠지지 않는다.
졸졸졸 시냇물처럼 흐르다 넓다란 실내 수영장을 만들어 놓기도 하고 폭포처럼 떨어져 작은 소를 만들기도 하면서 양옆에 가지를 늘이고 선 활렵수림과 어울린 모습이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 듯하다.
그런데 이 계곡을 따라 산꼭대기까지는 올라갈 수 없다.계곡 물위로 또 산길 위로 민간인 출입을 통제하는 군부대 표지판과 철조망이 쳐져 있기 때문이다. 이곳은 지난 71년부터 군부대 폐탄처리장으로 사용돼 와 폐탄처리장 16㎡가 민간인 통제구역으로 지정돼 있다. 그래서 이 폭파장 아래의 계곡에는 물고기가 전혀 살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폭파장을 지나면 사정은 영 딴판이다. 거울처럼 맑고 얼음처럼 차가운 계곡 물에는 깨끗한 물에만 산다는 조래고동과 비단개구리, 가재, 피래미 등등 온갖 생물이 손에 잡힐 듯 헤엄쳐 다닌다. 계곡에서 조금 벗어나 산길로 오르면 산딸기, 어름, 계피, 두릅, 도토리 등등 온갖 산열매와 산나물이 지천으로 자라 있고 산토끼, 다람쥐, 너구리, 꿩, 노루 같은 짐승도 어울려 살고 있다.
등산코스로 각광받고 있는 산으로 장안사를 비롯한 인근 3개 사찰(장안사, 백련사, 척판암)의 뒷산이며 장안천(박지천)의 상류로서경관이 수려하여 등산객들의 이용이 날로 증대되고 있는 산이다. 최근 불광산∼대운산∼삼각산∼웅상으로 연결되는 등산로가 개발되어 많은 등산객이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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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사람들은 이곳 임랑천의 맑은 물에서 낮에는 천렵을 하고 놀다가 병풍처럼 펼쳐진 송림 위에 달이 떠오르면 님과 함께 조각배를 타고 달구경을 하면서 뱃놀이를 즐겼다.
동산에 달이 뜨고, 임랑천에 달이 있고, 천파만파 잔잔한 물결 속에 수천수만의 달이 잠기고, 백사장에 달빛이 서리고 님의 얼굴이 달덩이 같고 내 마음이 달과 같다 하였다. 그래서 옛부터 이곳의 월출경을 차성팔경의 하나로 손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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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학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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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기장읍 죽성리 북쪽 해안에 있는 동산
찾아가는길 : 죽성초등학교에서 하차130m지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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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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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 윤선도가 기장에서 7년간이나 긴 유배생활을 한 것도, 그리고 이곳에서 견회요와 우휴요 등 주옥같은 시 여섯수를 남긴 것 역시 아는 사람이 극히 드물다.
조선시대 정철 박인로와 함께 3대가인으로 시조문학의 최고봉을 이룬 윤선도는 30대인 1616년 당시 국사를 마음대로 주물고 전횡 하던 영의정 등의 죄상을 밝히는 상소문을 올린 것이 화가 되어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되었다. 경원에서 1년을 보낸 뒤 고산은 다시 기장으로 이배되었다.
유배생활에 들어간 고산은 백사장 건너에 있는 송도를 '황학대'라 이름짓고서 이곳을 매일 찾았다.수십그루의 노송에 쌓여 있는 황학대는 옛날 신선이 황학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는 중국 양자강하류에 있으면서 이태백 도연명 등 많은 시객들이 찾아 놀던 황학루에 비교 했었다.
고산은 이곳에서 갈매기와 파도소리를 벗삼아 한많은 시름을 달래곤 했다. 아무튼 죽성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고산은 많은 서적들을 어렵게 구해 탐독했으며 여가 를 이용, 마을뒤에 있는 봉대산에 올라 약초를 캐어 병마에 시달리는 죽성사람들을 보살피 곤 했는데 이곳 사람들은 고산을 서울에서 온 의원님이라 불렀다고 여태껏 구전되어 오고 있다.
377년전 고산이 이곳에 유배되어 올때는 초가 몇채와 아름다운 백사장 그리고 죽성천에서 내려오는 맑은 강물이 해수와 어울렸고 그 옆에는 부엉산이 있어 부엉이의 울음소리는 천길 만길 낯설은 땅에 던져져 있는 고산의 서린 마음을 더욱 안타깝게 했으리라.
이 황학대에 자생하고 있는 30여그루의 해송이 지난 95년 수해로 뿌리가 뽑히는 등 피해를 입어 뿌리 기능 상실, 수세쇠약과 각종 병충해 발생 등으로 고사직전의 위기에 처했었다. 이 에 따라 우리군에서는 1천만원의 예산을 확보해 엽면시비 살포, 영양제 수간 주사 등 소나무 살리기에 온 힘을 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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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랑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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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기장읍 동암리
찾아가는길 :용궁사(수산진흥원) 입구에서 하차 250m지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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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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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양살이라 하지만 오히려 신선이 노는 봉래산을 가까이 두고 있다. 이 사람은 이조참의(현 내무부국장급)에서 여기에 왔노라. 시랑대란 석자를 푸른바위에 새겨 천추의 긴 세월동안 남아 있게 하리라.
동해남부연안에서 제일 명승지로 알려진 기장읍 동암리 시랑대 높다란 바위에 각자된 권적 기장현감의 시문이다. 권적은 영조9년(1733년)에 기장현감으로 좌천되었는데 시간이 날때마 다 이곳을 찾았다고 한다.
파도가 흰거품을 물고 밀려올 때 마다 조개들이 부엌에서 아낙네들이 쌀씻는 소리와 같고 그 위를 나는 오색 찬란한 비오리가 춤을 추는가하면 노송 우거진 절벽을 찾는 달빛은 과히 인간세상에서 보기 드문 절경이었다.
그래서 권적은 속인들이 부르던 원앙대를 고려때 이조참의격인 시랑의 벼슬을 따 시랑대로 이름을 바꾸고 바위에 시를 남겼다. 얼마나 경치가 좋았길래 멀리 중국에서도 해동국 조선의 시랑대를 못보고 죽으면 한이 된다고 했을까.
시랑대를 운잡아 많은 한시가 나타나 있다. 그러나 시랑대 바위에 새겨진 한시는 겨우 두문 뿐이고 나머지는 최근들어 거의 파손되었다. 1960년도 들어 구들장용으로 시랑대의 바위를 마구잡이로 캐내고 도로 개설 등으로 바위가 많이 파손되 버렸다.
그때 시랑대의 바위를 훼손한 사람들이 화를 당하거나 곤욕을 치렀가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는데 아무튼 조상들의 얼 이 담긴 유서깊은 시랑대를 망가뜨린 것은 우리들에게 두고두고 한스럽고 아쉬운 일이라 하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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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궁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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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기장읍 시랑리 416-3 번지
찾아가는길 : 181번 버스를 타고 용궁사(수산진흥원)입구에서 하차 250m 지점 - 해동여객(주) 181번(기장군청↔대변↔해운대역↔동삼아파트↔수영2교↔광안리↔수영R ↔감포천복개로↔동방오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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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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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바다 속으로 들어가듯 아래로 뻗은 석등 계단을 108칸 내려가면 파도가 부서지는 기암절벽 위에 동해를 바라보며 고즈넉히 자리잡은 용궁사 사찰이 해송 사이로 보인다.
불이문이라 새겨진 반월교에 서서 발 밑에 철썩대는 검푸른 바닷물에 잠시 넋을 놓다 뒤따라오는 관광객들에 밀려 경내에 들어선다. 바다로 내달릴 듯 돌출된 곳에 부처님 진신 사리탑이 서있고 그 뒤로 여의주를 물고 금방 승천할 듯 꿈틀거리는 용상이 놓여있다.
대웅전을 돌아 뒤쪽으로 오르면 33자 높이의 해수관음 입상이 동해를 바라보며 서서 참배객들을 맞는다. 대개의 사찰이 산중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용궁사는 이름 그대로 검푸른 바닷물이 발 아래서 넘실대는 동해 바닷가에 자리한 수상법당이다.
바다와 산이 절경을 이루고 기암절벽에 부딪치는 파도와 가슴이 탁 트이는 수평선, 그래서 이곳은 사찰이기에 앞서 관광지로 많은 이들이 찾고 있다. 전국 각지에서 단체관광 코스로 빼놓지 않고 용궁사를 찾고 있으며 특히 일본인 관광객은 20∼30명 단위로 하루 2∼3팀이 찾을 만큼 인기다.
용궁사를 찾은 일본인들은 이곳에서 바라다 보이는 동해바다의 아름다움에 감탄사를 연발한다고 한다. 요즘에는 부산시의 상해거리 조성 등 중국인 관광객 유치 정책에 힘입어 중국인 관광객도 많이 늘고 있다.
황홀경에 빠질 만큼 아름답다는 아침 해돋이 광경을 보기 위해 새해가 되면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용궁사. 기장군으로 들어서는 첫 관문에 위치해 빼어난 자연경관으로 관광객을 불러들이는 용궁사는 관광기장의 미래를 예견해 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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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적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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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내리692번지
찾아가는길 : 기장읍 내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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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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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구한 역사를 가진 본 안적사는 신라 30대 문무왕 원년 불기1205년 (서기 661년) 에 원효조사와 의상조사께서 수도의 길을 찾아 명산을 순방하여 정진에 전념하던 시절, 이곳 동해가 훤히 바라보이는 장산기슭을 지나갈 때 숲속에서 난데없는 꾀꼬리 떼들이 모여 날아와 두 스님의 앞을 가로 막으며 어깨와 팔에 안겨 평화롭게 보이는 것을 보고 이곳이 보통 상시로운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원효조사께서는 지금의 안적사터에 가람을 세웠으니 이것이 처음 안적사가 창건된 것으로 개산조(開山租)가 원효조사(元曉租師)이시다.
어느날 두 스님을 똑같은 시각에 공부를 시작하여 누구든지 먼저 오도(悟道)를 하게 되면 만나자고 맹세하고 조금 떨어진 곳에 토굴을 지어 피나는 정진의 세월을 보낸 두 스님은 성불에 입문하신 어느 날 의상조사께 천녀(天女)가 나타나 천공을 매일 올리게 되었다.
자랑하고 싶은 마음으로 원효조사를 청하여 천공(天供)을 같이 하려는데 천녀가 나타나질 않아 원효조사께서는 기다리다 그냥 처소로 돌아가신 뒤에 천녀가 천공을 가지고 나타났다. 의상조사는 심히 천녀를 나무라니 천녀가 하는 말인즉, 이곳 가람주위에 화광(火光)이 가득차 들어 올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때 의상조사는 원효조사의 신통으로 의상조사의 교만한 마음을 알고 금강삼매화(金剛三昧火)를 놓으신 것이다.
의상조사는 원효조사의 도력이 자기보다 훤씬 높다는 것을 알고 교만하지 않고 원효조사를 사형(師兄)으로 정중히 모시었으며 이곳에 수선실(修禪室)을 넓혀 큰 가람을 신축하여 금강삼매론경등일심법계(金剛三昧論經等一心法界)의 진리를 후학에게 설파, 지도하셨으며 신라의 온 국민에게 화엄사상을 역설하시여 구국정신을 고취시켜 삼국통일에 근간을 이루었다.
그뒤 꾀꼬리떼들이 길을 막았다하여 산명(山名)을 앵림산(鶯林山)이라 하고 이곳에서 정진수도하여 안심입명(安心立命)의 경지를 요달하여 적멸상(寂滅相)을 통관하시었다하여 사명(寺名)을 안적사(安寂寺)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원효조사께서 창건하신뒤 전국에서 수선납자(修禪衲子)들이 구름모이듯 하여 남방수선제일 도량(南方修禪第一道場)으로 그 이름이 사해(四海)에 높아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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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장향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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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교리 62번지일대, 교리초등학교 북쪽에 위치한다.
찾아가는길 :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교리 교리 초등학교에서 200m이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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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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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기장향교는 영조 34년(1769)에 세워진 당시 관립학교다. 성내에 있던 향교를 광해군 9년(1617)에 현북3리로 옮겼으며 영조 34년(1769)에 지금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서울에는 성균관이 있어 대학의 구실을 한 반면 지방에는 향교를 지어 지역의 문화를 교화하고 유생에게 소학, 사서오경을 교육하였으며 성균관과 마찬가지로 문묘를 모셨던 곳이다.
또 향교는 당시 국고에서 지급하는 학전이라는 재원으로 운영되었는데 학전을 관리하던 사람을 전교로 하여 따로 두었으며, 교관으로 교수와 종9품에 해당하는 훈도와 학장이 있었다.
대성전을 비롯해서 신삼문, 명륜당, 동재, 서재, 풍화루, 세심문 등 7동의 건물이 있다. 외삼문은 솟을 3문으로 세심문이란 편액이 있고, 세심문 안에는 중층 팔작 지붕의 풍화루가 있으며, 명륜당 좌우에는 동·서재가 있다. 건물을 경사지에 배치하고 외삼문 안에는 명륜당을 두고 내삼문 안에는 대성전을 배치하여 전학후묘의 배치 형식을 따르고 있는데 경내 건물들은 조선후기 이후에 중건한 것으로 추정된다.
대성전에는 공자를 중심으로 하여 4성을 배향하고 있고 동무와 서무는 중국의 저명한 유현 4분과 우리 나라의 유현 18분 등 27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매년 음력 2월과 8월 초정일(初丁日)에 유림들에 의해 석전대제가 봉행되고 있다.
건물 구조는 입구인 세심문은 맛배지붕에 3간이고 풍화루는 주심포계의 팔작지붕에 정면 3간, 측면 2간의 2층 건물이다. 명륜당은 정면 3간, 측면 2간의 주심포계 맛배지붕에 목조와가이고 대성전은 주심포계 맛배지붕에 정면 3간, 측면 2간이다.
향교는 애당초 유림들의 국립 중등교육기관으로 출발하였으나 조선후기로 들어서면서 유생을 교육하는 기능보다 민간에 도덕적, 예양적 향풍을 수립하는 일에 힘썼다고 전하고 있다.
기장향교에서는 우리의 전통윤리와 미풍양속을 어린 세대에 교육하여 건전한 가치관과 예의범절을 함양시키기 위하여 매년 여름방학을 이용해 청소년 대상으로 "향교충효교실"을 운영해 오고 있다. 1983년 7월 20일 경상남도 지정 유형문화재 제 215호로 지정되어 있다가 1995년 3월 1일 부산광역시로 편입되면서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 39호로 재지정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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