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철저하게 쇄국정책을 시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유로운 기독교 포교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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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펜젤러가 도착했던 인천항과 신축된 대불호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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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불구하고, 조선에 기독교를 전파시키려는 노력은 상당 기간에 걸쳐 있어왔다.
그리해서 조선 주변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선교사들은 직접적인 전도보다는 성서의 번역과 그 보급을 통해 조선 선교를 실현하려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게 됐고, 이러한 성서 번역 사업은 선교사들이 조선어로 된 성경으로 전도 사업에 종사할 수 있었기에 보다 원활한 선교를 가능케 했다.
또한 조선어 성경은 보다 빠른 시일 내에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질 수 있었기에, 성서 자체에 대한 권위와 가치를 확인시켜 주는 계기가 됐다.
인천은 이미 천주교 신도를 중심으로 한 자생적인 신앙공동체가 형성된 바가 있었고, 그런 토대 위에 개신교가 들어와 정착하고 있었다.
1882년 미국과의 수교로 조선에는 최초로 서양 국가의 공사관이 개설됐고, 서양인이 공식적으로 상주하게 됐다.
물론 미국과의 조약문에서 기독교 선교를 보장하는 조항은 없었지만 이 조약으로 인해 선교 개시에 대한 새로운 기운이 몰려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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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렌별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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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 서양인 선교사가 공식적으로 입국한 시기는 1885년이나, 이전 1884년 6월에도 미국 감리교 선교사인 맥클레이(Robert S. Maclay)가 입국했다.
그렇지만 이때는 본격적인 전도를 목적으로 온 것이 아니라 재일본 감리교 선교회의 대표자로서 조선에서의 선교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입국한 것이었다.
이때 맥클레이는 고종에게서 학교와 병원에 국한한 선교사업을 할 수 있는 윤허를 받았다.
이어 9월에는 미국 장로교 선교부가 역시 선교의 가능성을 조사하기 위해 미국 상하이주재 의료선교사로 일하고 있던 알렌(Horace N. Allen)을 조선에 파견했다.
알렌은 선교사라는 신분을 드러내지는 않고 미국 공사관 공의(公醫) 직함으로 활동했다.
조선에서의 대내외적인 선교 상황은 점차로 호전됐고, 전도 활동의 여건도 성숙됐다.
포교권이 승인되기 이전부터 외국인들은 개항장에서의 신앙의 자유를 인정받고 있었기 때문에 개항장에는 일찍부터 기독교와 일본 종교들이 들어오게 됐다.
일본계 종교는 주로 자국민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으나 기독교는 애초부터 조선 포교를 목적으로 했기 때문에 점차 한국인 사회에 전파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리해서 조선에서의 선교에 주목하고 있었던 미국 장로교와 미국 북감리교 본부에서는 본격적으로 조선 선교를 결정하고,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와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를 파견하게 됐다. 이때가 1885년 4월 5일 부활절 날이었으며, 조선에 기독교 선교사가 공식적으로 입국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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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仁川內里敎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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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들은 동시에 입항은 했지만, 동시에 서울로 들어가지는 못했다.
당시 조선의 정치는 갑신정변으로 인해 개혁-보수파 간 갈등이 심각해지고 정정(政情)이 불안했기 때문에 미국정부는 자국민을 보호할 필요성에서 이들의 입경을 강력하게 반대했던 것이다.
특히 아펜젤러는 부인과 함께 입국한 관계로 입경(入京)을 극구 만류했고, 미국 공사 푸트(Foote)도 정치적 상황이 좋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입경하지 말고 제물포항에 머물러 있는 것이 좋다는 서신을 보냈다. 결국 언더우드의 입경은 용인했지만, 임신한 부인과 함께 온 아펜젤러의 경우는 신변의 위험으로 인해 4월 10일 일본 나가사키로 돌아갔다.
이어 약 한 달 후인 5월 1일 감리교의 의료선교사인 스크랜톤(W. B. Scranton)이 모친과 함께 입국했고, 또 한 달 보름 후에는 장로교의 선교사인 헤론(J.W.Heron)이 선교를 목적으로 입국했다.
이들은 모두 새로운 개항지인 인천 제물포항을 통해 입국했고, 교육사업과 의료사업을 통해 조심스럽게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제물포항을 통해 조선에 입국한 최초의 선교사라는 영예를 차지한 아펜젤러는 일본으로 돌아갔다가 6월 20일 다시 제물포항을 통해 입국했고, 7월 7일 제물포항에 아펜젤러의 짐이 도착했다.
그리고 짐속에서 올갠을 꺼내 ‘만복의 근원 하나님’을 연주함으로 한국에서의 첫 감리교 찬송이 울려 퍼지는 역사적 사건을 만들었다. 이후 7월 29일 서울로 들어갔다.
이때 아펜젤러는 제물포에서 한국어 습득과 학교 및 선교사업을 구상했다.
그리고 제물포 사람들을 조심스럽게 살피면서 선교전략을 구체적으로 세워나갔다.
서양인에 대한 나쁜 감정이 없다는 점, 천주교의 직접 선교에 대한 반감으로 기독교에 관한 편견을 갖고 있다는 점 등을 체득했다.
또한 양반계층 중심의 유교사회에 대한 문제점을 인식하고 이를 교육을 통해서 타파하겠다는 사명감을 갖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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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창기 예배당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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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펜젤러가 일본에서 돌아와 서울로 들어가기까지 한 달 동안 제물포에 체류하던 기간이, 한국 감리교 내지는 한국 개신교사에서 매우 중요한 기간으로 평가되고 있다.
1922년 신홍식(申洪植) 목사가 편집한 『인천내리교회역사』에 따르면, 내리교회(內里敎會)는 1885년에 처음 시작했다고 기록돼 있고 이에 근거해 한국 최초의 교회는 바로 내리교회라고 주장하는 것도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에 입성한 아펜셀러는 1887년 노병일을 파송해 본격적인 제물포 선교를 시작했다.
그리고 청국조계에 있던 2채의 초가집을 팔아 현재의 내리교회 위치에 회당기지를 사고 6칸을 건축했다.
노병일이 전도를 시작한 지 7개월 만의 일이었다.
또한 1890년대부터는 올링거 목사가 인천 선교를 위해 서울과 인천을 왕래하며 예배를 인도했다.
1891년 6월 제7차 한국선교회에서 굿셀(Bishop Daniel A. Goodsell)은 아펜셀러를 인천거점 내리교회의 관리자로 임명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미감리회 한국선교회에서 서울의 정동 이외 새로운 선교지로서 제물포 거점(Chemulpo charge)을 인정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아펜젤러 목사를 이은 내리교회 초창기 선교사는 존스(George H. Jones; 한국명 조원시) 목사다.
그는 1888년 5월 약관 20세 나이로 선교사로 내한해 약 5년간 배재학당에서 교편도 잡고 문서출판 사업도 하다가 1892년부터 내리교회를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펼쳤다. 아펜젤러가 선교의 터를 닦았다면 조원시 목사는 그 터 위에 전도와 교육 전반에 걸쳐 괄목할 만한 업적을 쌓았다.
그는 1892년 한국 최초 초등교육기관인 영화학교를 개설했고 강화, 연안, 해주, 남양 지방에 전도를 시작했다. 1894년에는 한국인 자력으로 교회당을 건축 봉헌했으며 한국 최초의 신학회를 조직해 이동 신학교를 개설했다.
1901년 성탄절에는 내동 현 위치에 십자가형 벽돌 예배당을 지었고 교인 다수가 하와이로 이민함에 따라 홍승하 전도사를 하와이에 파송하기도 했다.
한국 교회 찬송가 보급에도 공헌한 그는 그 후 서울에서 신학월보를 창간하고 The Korea Review를 편집 발간했고 서울 YMCA 창립에 공헌했다. <※ 자료제공=인천시 역사자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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