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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강해(46) 2023. 11. 8
압살롬의 비참한 죽음
삼하18:9-18
마하나임이란 성읍에 도착한 다윗은 자신을 따라온 군사들을 재편성하였습니다.
군대를 세 개의 부대로 나누어 한 부대는 요압에게, 한 부대는 아비새에게, 그리고 나머지 한 부대는 가드 사람 잇대에게 맡겼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같이 출전하고자 하였지만, 백성들은 “왕은 우리 만 명보다 중하다”라며 만류하였습니다. 결국, 다윗은 직접 출전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대신 모든 백성이 듣는 데서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한 가지 특별한 부탁을 합니다. 그것은 “나를 위하여 젊은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우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드디어 다윗의 군대와 압살롬의 군대가 한판 대결을 벌입니다. 그러나 숫자가 열세인 다윗의 군대는 '에브라임 수풀'로 압살롬의 군대를 유인합니다. 정면 대결을 피하고 게릴라 전술을 사용한 것입니다.
결과는 다윗의 군대의 압승이었습니다. 압살롬의 군대는 무려 이만 명이나 전사하였습니다.
<자랑거리가 도리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압살롬의 최후를 다룬 내용입니다.
9절 “압살롬이 다윗의 부하들과 마주치니라 압살롬이 노새를 탔는데 그 노새가 큰 상수리나무 번성한 가지 아래로 지날 때에 압살롬의 머리가 그 상수리나무에 걸리매 그가 공중과 그 땅 사이에 달리고 그가 탔던 노새는 그 아래로 빠져나간지라.”
압살롬은 깊은 숲속에서 홀로 떨어져 가다가 큰 상수리나무의 우거진 가지에 머리카락이 걸리고, 그 사이에 압살롬이 타고 가던 노새는 그 아래로 그냥 빠져나가는 바람에 (교수형을 당하는 것처럼) 압살롬만 공중에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압살롬은 자신이 자랑스럽게 여기던, 두 가지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첫 번째는 머리털입니다.
삼하14:25-26 “온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압살롬같이 아름다움으로 크게 칭찬받는 자가 없으니 그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음이라 그의 머리털이 무거우므로 연말마다 깎았으며 그의 머리털을 깎을 때에 그것을 달아본즉 그의 머리털이 왕의 저울로 이백 세겔이었더라.”
이 짧은 구절에 정수리까지 포함하면 머리카락 얘기가 4번이나 나옵니다. 고대 사회에서 긴 머리털은 힘과 권력, 그리고 존귀함의 상징이었습니다(오늘날도 부러움의 대상). 머리털이 무거워서 연말마다 깎았는데, 그 무게가 무려 200세겔, 곧 2.3kg이나 나갔다는 것입니다.
그의 머리털이 얼마나 풍성하고 멋졌으면 이렇게 구체적으로 기록까지 하고 있을까요? 압살롬은 잘생긴 외모와 이 풍성한 머리숱 덕분에 백성들에게 인기를 끌 수 있었고, 그만큼 반역에도 쉽게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칼로 일어선 자 칼로 망한다"는 말처럼, 머리칼로 일어선 압살롬은 머리칼로 망하게 생긴 것입니다. 그의 가장 큰 자랑거리요 사람들로부터 칭송받았던 그 머리털로 말미암아 생명을 빼앗길 위를 맞게 된 것입니다.
이솝 우화 이야기입니다. 멧돼지와 사슴이 한마을에 살고 있었습니다. 볼품없고 못생긴 멧돼지는 사슴의 아름다운 외모를 부러워했습니다. 쭉 뻗은 다리와 적당한 몸집에 왕관같이 잘 자란 뿔을 볼 때마다 멧돼지는 부러웠습니다.
멧돼지 외에도 사슴을 보면서 외모를 칭찬하는 다른 동물들이 많았습니다. 사슴은 칭찬을 받자 의기양양하여 왕관과 같은 뿔을 자랑스럽게 과시하면서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하며 지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평화로운 마을에 호랑이들이 쳐들어 왔습니다. 마을은 졸지에 아수라장으로 변해버렸고 모두 도망치기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못생긴 멧돼지는 익숙한 산길을 빠르게 달려 날렵하게 몸을 피했습니다. 작은 산토끼도 나무 사이를 요리조리 피해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사슴은 달랐습니다. 평지에서는 그의 쭉 뻗은 두 다리로 힘차게 도망칠 수 있었지만 두 마리의 호랑이에게 쫓겨 숲속으로 들어섰을 때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의 최고의 자랑거리인 잘생긴 뿔이 나뭇가지에 걸려 꼼짝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슴은 왕관 같은 뿔 때문에 그만 호랑이의 먹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오늘의 성경 본문 내용인 다윗왕의 아들 압살롬의 죽음 장면을 연상하게 합니다
압살롬이 자랑스럽게 여기던 또 하나는, 그가 타고 있던 노새입니다.
노새는 숫나귀와 암말을 이종 교배함으로써 태어난 잡종 동물입니다. 노새는 다윗 시대에는, 왕이나 왕족 또는 귀족들이나 타던 것이었습니다(13:29 “압살롬의 종들이 압살롬의 명령대로 암논에게 행하매 왕의 모든 아들들이 일어나 각기 노새를 타고 도망하니라.”, 왕상1:33). 구약성경은 다윗도 솔로몬도 노새를 탔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노새는 아무나 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압살롬은 다윗 왕처럼 노새를 타면서, 스스로 왕권을 과시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노새를 타고 가다가, 상수리나무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압살롬의 머리털이 상수리나무에 걸려, 압살롬이 대롱대롱 매달렸는데도, 노새는 그냥 제 갈 길을 가버립니다.
이처럼 압살롬은 자신이 가진 자랑거리 때문에, 결국 비극적으로 그의 삶을 마감하고 만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귀중한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땅 위에서 사람들이 자랑하는 것들이 사실을 그들을 구원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아니 오히려 파멸을 초래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에게 자랑할 만한 것을 말하라고 하면 많은 재물을 빠뜨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재물로는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습1:18, 약5:3). 오히려 구원에 이르는 것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재물은 사람으로 하여금 죄에 빠지게 하기 때문입니다(겔7:19). 그러므로 예수님은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매우 어렵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19:23~24).
또한, 외모의 탁월함도 마찬가지입니다. 남들보다 뛰어난 재능도 마찬가지입니다. 건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들이 잠시 우리 생활을 윤택하게 하고, 우월감을 가지고 살 수 있게 할지는 모르지만,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해 주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러한 세상적인 자랑거리들이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 방해 거리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성경의 가르침 중의 하나는 자신의 육신을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고전1:26~29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 하나님께서 미련하고, 약한 사람들을 들어 쓰시는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썩어질 것 자랑하지 말고, 오직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만 찬양하고, ‘그의 십자가만을 자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보고와 책망>
압살롬이 상수리나무에 매달린 모습을 그곳을 지나던 다윗의 부하들이 발견하였습니다.
10~11절 “한 사람이 보고 요압에게 알려 이르되 내가 보니 압살롬이 상수리나무에 달렸더이다 하니/ 11 요압이 그 알린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보고 어찌하여 당장에 쳐서 땅에 떨어뜨리지 아니하였느냐 내가 네게 은 열 개와 띠 하나를 주었으리라 하는지라.”
그는 요압에게로 달려가 이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이들은 아마도 요압에게 속한 부대원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압살롬이 하필이면 다른 부대가 아닌 요압의 부대에 걸린 것이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합니다. 이것도 우연이 아닌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은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셨기 때문입니다.
보고를 들은 요압은 보고한 병사에게 왜 보자마자 그 자리에서 압살롬을 쳐서 땅에 떨어뜨리지 않았느냐고 묻는데, 이것은 왜 그 자리에서 압살롬을 죽이지 않았느냐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치다’라는 단어 ‘나카’는 단순히 치는 것이 아니라 ‘죽이다’라는 의미로 종종 사용되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요압은 그 병사에게 만일 압살롬을 죽였다면 은 열 개와 띠 하나를 주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은 열 개와 띠 하나'는 전공(戰功)을 세운 군사들에게 주는 포상물입니다. '은 열 개'는 화폐라기보다는 군복에 다는 일종의 장식품 같은 것입니다. 또한 '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고라' 역시 허리에 두르는 군장(軍裝)으로서, 화려한 수가 놓인 일종의 장식품입니다(왕상2:5, 사3:24, 22:21). 따라서 요압이 제시한 포상물은 군인의 명예를 세워주는 훈장과도 같은 것입니다.
<발견한 자의 자기변호>
그러자 그 병사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12~13절 “그 사람이 요압에게 대답하되 내가 내 손에 은 천 개를 받는다 할지라도 나는 왕의 아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우리가 들었거니와 왕이 당신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삼가 누구든지 젊은 압살롬을 해하지 말라 하셨나이다/ 13 아무 일도 왕 앞에는 숨길 수 없나니 내가 만일 거역하여 그의 생명을 해하였더라면 당신도 나를 대적하였으리이다 하니.”
병사는 은 천 개를 준다 해도 자신은 왕의 아들에게 손을 대지 않을 것인데, 그 이유는 다윗 왕이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와 모든 사람들에게 압살롬의 목숨을 살려주라고 말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의 병사는 다윗의 명령에 온전히 충성하며 요압에게 다윗이 압살롬을 살려주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줍니다. 그에게는 은 열 개가 아니라 은 천 개보다도 다윗의 명령이 우선입니다. 그리고 설사 돈이 탐나서 압살롬을 죽인다고 하더라도 다윗이 결국은 모든 사실을 알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신은 반역자가 될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는 절대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요압에게 보고한 다윗의 신하는 정말로 다윗의 명령을 충실하게 지키는 인물이었습니다.
이 병사를 통해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범을 발견합니다. 그에게 있어, 최고의 명령권자는 다윗 왕입니다. 비록 직속 상관인 요압이 압살롬을 죽이라고 명령했을지라도 요압보다 상위자인 다윗 왕의 명령을 따랐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세상을 살면서 주위 사람으로부터 많은 요구를 받습니다. 가깝게는 가족과 친구로부터 시작하여 멀게는 직장과 동료와 상사 등,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직접적 명령의 형식을 띤 것부터 간접적인 기대와 부탁 등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는 중첩적인 수많은 요구가 주어지고 있으며, 이들은 때로는 서로 충동하기도 하고 모순되기도 합니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때 우리는 항상 근원으로 돌아가 하나님의 뜻을 기준으로 하여 판단해야 합니다. 최종적인 명령권자는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갈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롬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행5:29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벧전4:2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요압이 압살롬을 죽임>
하지만 요압은 부하의 말을 무시하고 압살롬이 매달린 곳으로 갑니다.
14~15절 “요압이 이르되 나는 너와 같이 지체할 수 없다 하고 손에 작은 창 셋을 가지고 가서 상수리나무 가운데서 아직 살아 있는 압살롬의 심장을 찌르니/ 15 요압의 무기를 든 청년 열 명이 압살롬을 에워싸고 쳐 죽이니라.”
요압은 작은 창 세 개를 들고 가서, 매달려 있는 압살롬의 심장을 찌릅니다. 그러자 요압의 호위대 열 명이 압살롬을 에워싸고 쳐죽입니다.
요압의 입장에서 압살롬은 자신의 군대장관 지위를 위태롭게 하는 인물입니다. 압살롬의 부대에서는 요압 대신에 요압의 사촌인 아마사가 군대장관이었습니다. 이것은 압살롬이 왕이 되면 요압은 압살롬의 왕국에서 실각하거나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압은 자신이 다윗과 화해시키기 위해서 다윗의 미움을 받을 각오를 하면서 데리고 온 압살롬이 자신을 배신하고 자신의 지위를 위태롭게 하는 것에 대해 참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만일 살려두면 압살롬이 언제 또다시 반역을 일으킬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한번 시도하여 거의 성공할 뻔하였고 시간이 지나 다윗이 점점 늙게 되면 아무래도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켜 왕이 될 확률이 높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설혹 반역을 일으키지 않더라도 압살롬은 첫째 아들이고 수완이 좋기 때문에 다윗이 죽은 뒤에 왕이 될 확률이 높습니다. 압살롬이 왕이 되면 압살롬의 왕궁에서 요압의 입지는 거의 없게 됩니다. 요압이 압살롬을 다윗에게로 데리고 왔을 때만 해도 자신이 압살롬의 후원자가 되어 다윗이 죽은 후에 압살롬을 자신의 손에 두고 뒤에서 조종하며 이스라엘의 최고 권력을 누리려 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의심이 신빙성 있는 것은 후에 다윗이 죽기도 전에 아도니야를 왕으로 추대하여 권력을 쥐려고 시도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현재 상황을 보면 이런 애초의 계획은 전혀 실현 가능성이 없고 오히려 압살롬이 자신에게 매우 위협이 되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요압은 기회가 생겼을 때 압살롬을 죽여버린 것입니다. 그는 왕명보다는 자신의 이익이 우선이며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선인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이전에도 다윗의 명령을 어기고 개인적으로 원수를 갚기 위해 아브넬을 죽인 적이 있습니다. 요압은 현재 다윗의 군대 장관이기 때문에 다윗도 자신을 함부로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이렇게 대놓고 다윗의 명령을 어긴 것입니다.
이런 요압의 모습은 다윗의 명령에 순종하던 다윗의 부하와 대조를 이룹니다. 요압은 자신의 이익에 영향을 주지 않는 경우에는 다윗에게 충성하지만, 자신의 이익과 다윗의 명령이 배치될 때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압은 다윗에게 가장 든든한 신하이자 가장 믿을 수 없는 신하이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여기서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압살롬을 호위하던 병사는 없었던 것일까요? 왜 아무도 압살롬을 상수리나무에서 내려올 수 있도록 도와주지 않았을까요? 아마도 주변에 도울 병사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그의 부하들이 압살롬을 호위하지 않고, 도망치기 바빴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모두 자기 살기 바빴던 것입니다.
이것은 압살롬 주의에 기회주의자들만 모여들었음을 의미합니다(다윗의 부하들과 대비 - “왕은 우리 만 명보다 중하다”). 즉 이해관계로 잠시 뭉쳐 있던 오합지졸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 간의 관계는 어떤 관계일까요? 사랑과 신뢰의 관계를 맺어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요13:34~3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베드로 역시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벧전1: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압살롬을 숲에 묻음>
압살롬을 죽인 요압은 숲속에 큰 구덩이를 파고 그곳에 던져 넣은 후 그곳에 거대한 돌무더기를 쌓아 무덤을 만듭니다.
16~17절 “요압이 나팔을 불어 백성들에게 그치게 하니 그들이 이스라엘을 추격하지 아니하고 돌아오니라/ 17 그들이 압살롬을 옮겨다가 수풀 가운데 큰 구멍에 그를 던지고 그 위에 매우 큰 돌무더기를 쌓으니라 온 이스라엘 무리가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니라.”
돌무더기는 저주받은 자의 무덤을 의미하는 것으로, 요압은 압살롬을 예루살렘에 있는 가족묘에 묻어주지 않고 돌무더기 무덤에 묻음으로 왕자가 아닌 반역자로 취급하였습니다. 여기서 매우 큰 돌무더기 무덤을 만든 이유는 백성들에게 경고를 주기 위한 것으로 누구든지 반역을 일으키면 이렇게 저주받은 자로 죽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신21:21). 그러므로 거대한 돌무더기는 반역자의 최후를 보여주는 상징물입니다(수7:26, 8:29).
이렇게 반란군의 왕이 죽자 요압은 반란군 쫓는 것을 멈춥니다. 그들의 왕이 사라졌기 때문에 더 이상 서로 전쟁하는 것이 무의미해졌기 때문입니다. 왕을 잃은 반란군은 모두 흩어져 각기 자신의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갑니다. 이렇게 반란군은 압살롬의 죽음으로 완전히 해체되었고 전쟁은 끝났습니다.
<압살롬의 비석>
마지막 18절은 압살롬의 비석에 관한 내용입니다.
18절 “압살롬이 살았을 때에 자기를 위하여 한 비석을 마련하여 세웠으니 이는 그가 자기 이름을 전할 아들이 내게 없다고 말하였음이더라 그러므로 자기 이름을 기념하여 그 비석에 이름을 붙였으며 그 비석이 왕의 골짜기에 있고 이제까지 그것을 압살롬의 기념비라 일컫더라.”
압살롬은 아들이 없이 자신의 이름이 땅에서 잊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자신의 이름을 기념하는 기념비를 왕의 골짜기에 세워놓았습니다. 이것은 14:27에서 언급된 압살롬의 세 아들이 어린 나이에 죽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압살롬이 얼마나 명예욕이 강한 사람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죽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이름이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비석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자기 이름이 세상에 길이 남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실제로 그 비석이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예루살렘 동남쪽에 위치한 기드론 골짜기의 동쪽 언덕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유대인들이 이곳을 지날 때마다 아버지를 배신 아들이라며 그 비석을 향해 돌을 던졌다고 합니다.
자신의 이름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 세운 기념비가 오히려 자신의 불명예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얻습니다. 사람이 이 땅에서 진정으로 높아지는 길은 스스로 높아지고자 몸부림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높여주실 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이 땅에서 존귀함을 얻으셨습니까? 스스로 높아지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스스로 낮아지셔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성육신하셔서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죽기까지 순종하셨기 때문입니다.
빌2:6~11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에,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23:12)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스스로 높이려고 애쓰지 말고, 도리어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의와 진리를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높여주십니다(벧전5:6).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자신의 탐욕을 위해 인륜과 천륜을 저버리고 불의한 방법으로 스스로 높아지려던 압살롬의 비참한 최후를 보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늘 겸손하고 낮은 곳에 처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친히 닦아 주시면서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요13:14)고 가르치신 것과 같이 늘 겸손히 섬기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기를”(빌1:20) 소망하였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가 드러나기를 소망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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