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소포박見素抱樸이 무슨 뜻일까?
견소포박見素抱樸 소사과욕少私寡欲
노자老子 19장에 나오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대강 어렴풋이 알겠지만 확실하지 않다는 의견에 공감합니다. 두 마디 가운데 앞부분인 견소포박見素抱樸이 무슨 뜻인지 잘 와 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에 비해 뒷부분인 소사과욕少私寡欲의 풀이는 쉽습니다. 사사로움을 적게 하고 욕심을 덜어낸다는 뜻이라 알기 쉬운 듯 합니다. 그래서 반쯤은 알겠는데 반쯤은 모르겠다는 느낌이 오는 것 같습니다.
흔히 지도자의 덕목으로 무사무욕無私無欲을 말합니다. 지도자는 공인으로서 늘 사사로움이 없이 공평해야 되고 욕심이 없어서 무엇을 탐하거나 집착함이 없는 빈 마음으로 만사를 처리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무사무욕은 누구나 아는 말 같지만 실제로 그 뜻을 실천하는 지도자를 만나기는 어렵습니다. 이로 보아서 아는 것과 실천하는 일이 따로인 것을 알겠습니다. 그래서 유학자들은 아는 일과 실천하는 일이 어떤 관계인지 따졌습니다. 어떤 사람은 선지후행설을 말하기도 하고 또는 지행병진설을 말하기도 하고 양명은 지행합일설을 말하기도 했습니다. 불교에서도 비슷한 논쟁으로 돈오점수설과 돈오돈수설이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안다고 해도 그 안다는 게 무엇인지 또 논란이 되는 것입니다. 양명은 안다고 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그것은 아는 게 아니라 했습니다. 즉 앎의 차원을 달리 정의했습니다. 노자도 안다고 하면 아는 게 아니고 오히려 모른다고 하는 게 아는 거라 했습니다.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도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통상 우리는 안다고 하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일은 또 다른 공부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사무욕을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만 실천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실천이 안 되는 이유를 아직 앎이 확실치 않다는 데서 찾기도 하고 의지 박약에서 찾기도 합니다. 빛에서 힘이 나오는 것도 사실이고 힘에서 빛이 나는 것도 사실입니다. 알아야 한다. 알아야 할 수 있다는 말도 됩니다. 해봐야 안다. 실천이 되어야 그게 아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말은 이렇게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을 다 같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해 보는 만큼 더 알게 되고, 아는 만큼 더 실천할 수 있다는 뜻이니다. 그래서 공자도 학이시습이라 했습니다. 배우고 실천하며 익히는 두 가지 공부 방법입니다. 그래서 남이 알 수 없는 경지까지 도달해야 군자라 했습니다. 우리는 그런 군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역사에서 남이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무사무욕의 경지에 이른 지도자로 이순신 장군 같은 분을 내세울 수 있다는 게 자랑스럽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무사무욕을 말하는 정치인도 거의 없지만 말로는 정의와 민주 복지를 외치며 실제론 오직 자기와 가족 밖에는 모르고 돈과 출세를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모습을 흔히 보게 되는데 그런 사람은 군자는 커녕 소인도 못 되는 것입니다.
노자는 도덕경 전반에 걸쳐 성인의 덕목으로 무사와 무욕을 말했는데 19장인 여기서는 무사무욕無私無欲이 아니라 소사과욕少私寡欲을 말합니다. 즉 무사무욕이 성인이라면 소사과욕은 우리 보통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덕목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사로움을 줄이고 욕심을 덜어내라. 보다 밝고 정의로운 세상을 위해서 우리 모두가 힘써야 할 덕목으로 소사과욕少私寡欲은 손색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으로 그친다면 이 또한 공염불에 지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지도자가 무사무욕이라야 백성들이나 시민들을 향하여 사사로움을 줄이고 욕심을 적게 가지라고 한다면 호소력이 있겠지만 사욕편정으로 탐욕스런 모습을 보이는 지도자가 백성들에게 허리띠를 졸라매라고 한다면 누가 그 말을 듣겠습니까?
그래서 노자가 소사과욕少私寡欲을 말하는 전제로서 견소포박見素抱樸을 말하지 않았을까 짐작해 봅니다. 견소포박, 글자대로 풀이하면 볼 견見, 흴 소素, 품에 안을 포抱, 통나무 박樸, 그러니까 흰 바탕을 보고 통나무같은 순박함을 품어 안았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희다는 말도 상징이고 통나무라는 말도 상징이라 그 뜻을 알기 어렵습니다. 볼 견見을 또 드러낼 현으로 풀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도올 김용옥선생은 “흰바탕을 드러내고 통나무를 껴안아라. 사사로움을 줄이고 욕심을 적게하라.”고 풀이했습니다.
그런데 도올의 풀이를 아무리 읽어도 그 뜻이 와 닿지 않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흰 바탕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깨끗한 세계요 밝은 세계요 순수한 세계를 말하는 것이지 화려하거나 어둡거나 어지러운 것은 아니겠지요. 더구나 이어지는 통나무를 껴안아라 하는 것을 보면 소박하고 순박하며 원초적 생명력의 세계라는 것을 알 것 같습니다. 그런데 도올선생의 강의와 그 모습을 보면 순박하거나 수수하기 보다는 화려하고 웅장하고 거창하고 꾸밈이 많아서 어지럽다는 느낌 마저 듭니다. 흰 바탕이 아니라 무지개빛 영롱한 화려함을 추구하는 듯 싶고 순박한 통나무를 껴안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거인을 우러러 보는 듯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철학자들의 현란한 지식과 말솜씨에 별로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그 풀이에 공감도 되지 않아서 홀로 고민을 해봅니다. 즉 노자나 장자의 세계도 성인의 가르침으로 여기며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에서 그 뜻을 찾아보려 애쓰는 가운데 제 마음에 와 닿는 풀이가 떠오르면 남이 뭐라 하건 내 나름으로 만족하며 삽니다.
노자가 19장에서 마지막에 견소포박見素抱樸 소사과욕少私寡欲을 제시하면서 앞선 말을 보충하기 위함이라 했습니다. 즉 어떻게 하면 백성들에게 이로운 세상이 될까, 어떻게 해야 세상의 인심이 후덕해져서 서로 존경하고 사랑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물건을 훔치고 생명을 빼앗는 일이 없어질 수 있을까, 이런 종교 문화 경제 세 가지의 문제점을 해결하는 방안이 무엇일까 설명했습니다. 그 처방이란 성직자와 지식인들이 백성을 억압하는 일을 그만 두게 하는 것, 형식적 도덕과 윤리를 강요하는 관습적 억압을 그만 두게 하는 것, 교묘한 기술로 기묘하고 사치스런 물건을 만들어 이익을 추구하여 백성을 착취하는 사업을 그만두게 하는 것, 이렇게 셋을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것들을 법으로 만들 수는 없지 않는가, 즉 이것들이 근본 처방이 될 수는 없지 않겠는가 회의하는 말끝에 덧붙여서 하는 말이 견소포박見素抱樸 소사과욕少私寡欲이라 했습니다. 즉 지도자들이 견소포박하면 백성들이 저절로 소사과욕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말로 끝맺은 것은 아닐까 생각하고 풀어봅니다.
이것의 사례로 저는 예수님과 삭개오의 만남을 들어서 풀어보고 싶습니다. 즉 예수님이 여리고 성을 지나다가 세리장인 삭개오를 만났는데 예수님과 삭개오의 만남이 곧 견소포박見素抱樸의 사건이라 여기며 풀어봅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를 지나가시다가 삭개오를 쳐다보며 그 마음에 들어있는 순수한 마음의 바탕을 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뽕나무에 올라가서 내려다 보고 있는 삭개오에게 “삭개오야, 바로 내려오너라. 오늘 내가 너희 집에서 머물러야겠다.” 하셨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즉시 내려와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남들이 다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하며 무시하던 삭개오였지만 예수님은 그 마음에 숨어있는 소박하고 순박한 영혼을 보시고 그를 품어 안으신 것입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라 해도 마찬가지라 하겠습니다. 즉 삭개오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그 영혼의 밝은 빛을 보고 생명의 원천인 예수님의 품에 안긴 것이 또한 견소포박見素抱樸이라 하겠습니다. 삭개오는 진리요 영혼의 빛인 그 흰 빛이 그리워 뽕나무 위로 올라갔으며 예수님은 뽕나무같은 그 순박한 삭개오의 마음을 보고 그를 통나무처럼 안아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삭개오를 품었을 때 예수님도 통나무요 삭개오도 통나무가 되었습니다. 즉 하나의 생명이 된 것입니다.
그러자 즉시 죽었던 삭개오의 영혼이 되살아 났습니다. 삭개오는 벅찬 기쁨으로 말했습니다.
“주님, 여기 보세요. 저는 지금 이 순간 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내놓았습니다. 그리고 내가 만일 누군가에게 속여 빼앗은 것이 있다면 네배로 갚겠습니다.”
즉 삭개오가 보여준 것이 소사과욕少私寡欲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시키신 것도 아닌데 저절로 소사과욕이 된 것입니다. 자기 식구만 생각하던 사사로움을 넘어 가난한 사람들을 한 형제로 여기게 되는 것이 소사요 그들을 위해서 재산의 절반을 내놓은 것이 욕심을 덜어내는 과욕입니다. 토색질한 것이 있다면 네 배로 갚겠다고 한 것 역시 소사과욕이라 하겠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견소포박見素抱樸의 사랑을 베푸시니까 그 사랑을 받은 삭개오는 저절로 소사과욕少私寡欲의 사랑이 되었습니다. 이런 신앙의 힘이라야 모든 세상 문제의 원천적 해결책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앎과 실천이 둘로 나뉘어 위선자로 살아가는 바리새인의 윤리 도덕적인 수준이 아니라 참 생명의 빛이 빛나는 견소포박見素抱樸의 믿음과 사랑의 세계, 그것을 추구하자는 것이 우리의 신앙이라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저절로 소사과욕으로 변화가 되는 그 견소포박見素抱樸의 사건은 오늘도 이 땅의 어디에선가 일어나고 있음을 믿으며 우리도 소망을 갖습니다. 또 우리가 서로서로 견소포박의 만남이 될 때 우리는 또한 저절로 소사과욕이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도 품어봅니다. 상대의 마음에 있는 순수한 영혼의 빛을 볼 수 있고, 또 온전한 생명으로 포옹하여 하나가 될 수 있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아름답게 변화될 것인가. 우리 만남이 껍데기의 만남인 피상교皮相交가 아니라 진리를 보고 온전한 생명으로 하나가 되는 견소포박見素抱樸의 참사랑이 되기를 꿈꾸는 오늘입니다.
2023. 2. 5. 평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