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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한민국해군동지회중앙회 원문보기 글쓴이: 해군동지회
전쟁영웅 김영옥‥그는 세계가 자랑하는 한국인이었다 |
written by. 정호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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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조선 | 기사입력 2005-08-18 13:53
총알도 피해간 불사조 ‘무적신화’ 로 적진 돌진
김영옥이 참가한 첫 전투는 1943년 9월 이탈리아 나폴리 남쪽의 작은 해안도시 살레르노에 상륙한 연합군이 로마를 향해 진격하는 과정에서였다. 그의 나이 24살. 그가 속한 100대대는 뉴욕을 출발해 2주일간의 항해 끝에 북아프리카 오란에 도착해 이탈리아 전선 총사령관 마크 클라크 중장이 이끄는 미5군 6군단 산하 34사단 133연대에 배치됐다. 아프리카로 건너오는 배 안에서 심한 배멀미를 앓으면서 ‘첫 전투가 벌어질 때 나는 과연 어떨까? 나중에 평생을 두고 수치스럽게 생각할, 비겁한 행동을 하지는 않을까’라고 끊임없이 반문했다.
그는 “60여년 전 이탈리아 시골에서의 첫 전투가 신비스런 경험이었다”고 회상한다. “탱크 포탄이 터지고 포성이 들려오는 방향에서 독일군 탱크를 보는 그 혼돈의 순간에 모든 주변 상황이 한눈에 들어와 차분히 정리됐다. 이와 함께 마치 전생에서 지금과 똑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고 해법도 알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 때문인지 최소한의 공포도 없었고 극도로 냉철해졌다.”
전장 한복판에서 드러난 그의 이런 면모는 키 173㎝의 평범한 체구의 동양인이 이후 숱한 전투에서 탁월한 전투능력을 보여주는 바탕이 됐다. 여러 차례 전투를 치르면서 그는 철모 대신 털모자를 쓰는 게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당시 미군 규정상 전장에서 철모를 벗어서는 안됐지만(위반시 1회 약 50달러 벌금), “철모가 번거롭다”며 털모자를 쓰고 빗발치는 총탄 사이를 누비는 그에게는 예외였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면 어떤 식으로든 죽는다’는 생각으로 참호도 파지 않고 맨땅에서 자는 기벽(奇癖)도 갖고 있었다.
그는 이미 장교후보생 교육을 받을 때부터 탁월한 독도법(讀圖法)과 방향감각 능력을 보였다. 그는 “지도를 보면 머릿속에 실제 지형이 그대로 그려졌고, 처음 가는 곳이라도 일단 지도를 본 후에는 상상한 그대로 실제 지형이 펼쳐졌다”고 말했다. ‘커널 김’의 신화는 이런 능력을 바탕으로 쌓이기 시작했다.
◆ 2차대전 ◆
■■로마 해방전쟁
1943년 9월 로마의 외항(外港)인 안지오 상륙작전에 성공한 연합군은 북쪽에서 보강 병력이 대거 내려와 안지오를 포위한 독일군과 장기 대치상태에 빠졌다. 로마 해방을 목전에 둔 연합군으로서는 독일군이 북이탈리아에서 불러들인 정예 탱크사단을 어디에 배치해두고 있느냐를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연합군의 주공(主攻) 루트를 독일군이 정확히 예측하고 탱크사단을 매복시켰다면 만사는 물거품이 될 상황이었다.
이듬해 5월이 되자 클라크 사령관은 노르망디 상륙작전(1944년 6월)을 의식해 적정(敵情) 파악을 다그쳤다. 김영옥 중위가 속한 34사단도 안지오 전투에 합류, ‘독일군 포로를 생포해 적정을 파악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당시 100대대 정보참모를 맡고있던 그는 대대장 싱글스 중령에게 포로생포 작전을 자원했다. 수색대조차 수차례 포로생포에 실패했던 터라 “미친 소리”라는 말을 들었지만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는 적의 허를 찌르고자 했다. 극소수 인원으로 밤에 적진으로 침투해 적당한 장소에 매복해 있다가 낮에 움직인다면 승산은 있다고 판단했다. 그의 계획은 ‘승인 불가’라는 딱지가 붙어 34사단 본부, 6군단 본부를 거쳐 5군 사령부까지 올라갔고 군사령부는 “자살행위라는 것을 알면서도 반드시 결행하겠다면 굳이 말리지는 않겠다”고 회신했다.
이 광경을 망원경으로 지켜보던 연합군 수뇌부는 마치 영화장면과 같은 포로 생포 소식에 광분했다. 클라크 사령관은 직접 전화를 걸어 “특별무공훈장을 수여하겠다”고 했다. 클라크 사령관은 훈장 수여식 때 부관의 계급장을 떼 그에게 즉석에서 대위 계급장을 달아줬다. 그의 포로생포 작전은 UPI 종군기자를 통해 세계로 타전됐다. 연합군은 그가 잡아온 포로로부터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5월 23일 ‘버펄로 작전’이라는 총공격을 개시했고,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개시되기 이틀 전인 6월 4일 로마에 입성했다.
“그와 있으면 죽음도 피해간다”
■■‘사무라이 김’의 전투
미국 본토에서 훈련을 할 때 한국계라는 이유로 일본계 사병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던 김영옥 소위가 실제 전투에서 부대원의 신뢰를 얻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살레르노에 상륙해 치른 첫 전투에서부터 B중대 2소대장이었던 그는 중대장과 맞섰다. 그는 중대장의 명령이 떨어지기 전에 계곡을 가로질러 독일군의 기관총 진지를 공격했고, 중대장과는 다른 전진 루트를 고집했다. 지형지세에 대한 동물적인 감각으로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내린 결정이었지만 상관으로부터는 미움을 살 행동이었다. 하지만 전투결과는 그의 판단대로였고, 그는 부하들로부터 신뢰를 쌓기 시작했다.
상륙 2개월여인 1943년 11월 산타마리아 올리베토에 있는 600고지 전투를 치른 뒤 부하들은 그를 ‘사무라이 김’이라고 부르며 존경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 전투에서 2개 분대를 이끌고 기관총 진지 수개를 수류탄 공격으로 박살내고 독일군을 포로로 잡는 등 괄목할 전과를 올렸다. 허벅지에 총탄이 박히는 첫 부상을 입고 첫 훈장인 은성무공훈장을 받은 것도 이 전투에서였다.
그가 대대 정보참모로 발령받은 1944년 1월 무렵 100대대는 첫 동계전투인 몬테 카지노 전투에서 엄청난 희생을 입었다. 2주일 반 만에 잔여병력의 90%를 잃을 정도였다. 특히 몇 차례 전투에서 그의 목숨을 구해줬던 다케바 부소대장 등 많은 전우들이 옆에서 죽어갔다. 이 전투 이후 ‘영(Young)과 함께 있으면 죽음도 피해간다’는 믿음이 부대원 사이에 퍼져나갔지만 그는 거꾸로 심한 자책감에 시달렸다. 전우들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만일 이 전쟁에서 살아남는다면 남은 평생을 내가 속한 사회를 보다 나은 곳으로 만드는 일에 바치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불사조 같던 그도 1944년 10월 프랑스 동북부 산악지대 비퐁텐 전투에서 목숨을 잃을 뻔했다. 당시 100대대는 인근 브뤼에르 해방전투에서 기력을 소진한 상태였으나 사단장의 무모한 전진 명령에 내몰리다 적에게 완전히 포위당했고, 그는 적의 기관총탄 3발을 맞았다. 그는 들것에 실려 퇴각하다 적의 포위망에 갇혀 포로로 잡힐 뻔했다. 하지만 다른 전우들과 달리 항복을 거부하고 필사적으로 기어서 포위망을 빠져나왔다. 그러나 피를 너무 많이 흘리고 상처 부위가 썩어 목숨이 위태로웠다. 심장을 향해 몸이 식어들어오는 생사의 고비를 살겠다는 의지로 넘긴 끝에 페니실린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그는 1944년 6월 치러진 벨베데레 전투부터 작전장교의 능력을 보이기 시작했다. 전통적으로 미 보병대대는 2개 중대를 병렬로 포진시켜 공격하고 나머지 1개 중대는 예비중대로 뒤를 받치는 게 관례지만, 그는 지형에 맞지 않는 이 방식을 과감히 버리고 3개 중대를 동시에 작전에 투입했다. 이후 치른 사세타 전투에서도 그는 교과서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대대 공격에 군단과 군사령부의 포병 지원을 요청하는 과감한 작전을 펼쳤다. 치밀한 작전과 강력한 화력 지원을 앞세운 공격은 이후 그의 장기가 됐다.
‘가짜 도강 작전’으로 피사 무혈입성
■■피사 해방전쟁
피사 해방전도 김영옥의 작전 능력이 돋보인 전투였다. 로마를 함락하고 북상하던 연합군이 피사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이탈리아 반도를 가로지르는 아르노강을 건너야 했다. 대대 작전참모로 도강(渡江)작전을 짜는 데 골몰하던 그는 ‘가짜 도강’을 핵심으로 한 허허실실(虛虛實實) 작전을 짰다. 인류의 문화유산을 간직한 피사에 대한 직접 공격 없이 강을 건너자는 게 핵심이었고, 로마 해방 후 독일군의 야포 수와 폭격 강도가 줄어들고 있다는 점을 꿰뚫은 작전이었다. 작전의 요지는 디데이(D-day) 나흘 전 가짜 도강작전을 한 번 하고 그로부터 이틀 후 같은 장소 같은 시각에 가짜 작전을 한 번 더 한 뒤 바로 다음 날 같은 장소 같은 시각에 진짜 작전에 돌입한다는 것이었다.
작전은 그의 예상대로 맞아떨어졌다. 탱크 30대를 동원한 1차 가짜 도강작전에 독일군은 엄청난 포격을 가했다. 이틀 후 2차 작전이 실시되자 독일군의 포격 강도가 눈에 띄게 줄었다. 9월 1일 막상 진짜 작전이 실시됐을 때 독일군은 이번에도 가짜라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포탄이 바닥났는지 단 한 발의 포격이나 총격도 가해오지 않았다. 부대는 도강작전이 시작된 지 불과 30분 만에 선두가 이미 아르노강을 건너고 있었다. 미군의 도강을 막지못한 독일군은 피사를 버리고 철수했고 연합군은 텅빈 피사에 아무 저항 없이 입성할 수 있었다.
◆ 한국전쟁 ◆
제대후 한국전 소식에 다시 사선으로
1945년 4월 그가 휴가차 LA로 돌아왔을 때 LA타임스는 그와 어머니가 만나는 사진과 함께 ‘전쟁영웅의 귀환’이라는 큼지막한 기사를 실었다. 그는 유럽으로 돌아가다가 독일군의 항복(5월 8일)으로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정보장교로 남아달라는 펜타곤의 요청을 뿌리치고 1946년 명예 제대를 했다.
그는 군대에서 모은 3000달러로 당시로서는 생소한 ‘코인 론드리’(빨래방) 사업을 시작했고 사업은 날로 번창했다. 하지만 사업은 오래 가지 못했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소식을 듣자마자 그는 ‘부모의 나라’를 돕기 위해 다시 사선(死線)으로 향했다.
그가 한국에 도착한 1951년 3월은 1·4 후퇴 직후였다. 그가 배치된 유엔군 9군단 산하 미 육군 7사단은 흥남철수로 사지(死地)에서 빠져나와 다시 북진을 준비 중이었다. 1952년 9월 한국을 떠날 때까지 1년6개월간 전투에 참가했지만 유럽 전선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빡빡한 전투를 치렀다. 또 가장 큰 부상을 입은 것도 한국에서였다.
적진 앞에서 도망치는 국군 돌려세워
■■소양강 전투
김영옥 대위는 7사단에 부임하자마자 ‘베니대 그룹’(흥남철수 때 7사단과 함께 북한을 탈출한 민간인들로 구성된 유격대)을 이끌고 정찰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고 곧 31연대 정보참모로 발령이 났다.
2차대전에서 발휘했던 그의 대담함이 요구되는 상황은 우연히 찾아왔다. 1951년 4월, 31연대는 소양강을 건너 중공군과 장기 대치하던 17연대와 교대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하지만 31연대가 소양강을 건너자마자 공산군의 제1차 춘계 공세가 시작됐고, 유엔군과 한국군은 다시 소양강을 건너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전방의 한국군이 무질서하게 후퇴하자 그는 맥카프리 연대장으로부터 인제군 개운동 계곡에 있는 다리를 지키라는 임무를 받았다. 일제 때 세워진 이 자그마한 다리는 유엔군과 한국군의 철수를 보장할 전략 요충지였다. 이 다리가 적의 수중에 떨어지면 소양강을 건너야 하는 모든 부대가 엄청난 희생을 낼 상황이었다. 홀로 남은 그에게는 탱크 1개 소대(5대)가 보내졌다. ‘최소한 몇 시간은 적을 지연시켜야 아군이 소양강 남쪽으로 무사히 후퇴할 수 있다’는 지시였지만 이미 전방의 한국군 3사단과 5사단이 중공군의 공세에 무너져 마구 후퇴하고 있는 긴급 상황이었다.
황당한 명령이었지만 그는 탱크 다섯 대를 다리 남쪽 공터에 일렬로 배치한 뒤 다리 앞에 버티고 섰다. 포성과 함께 적이 코앞에 다가오는 상황에서 탱크 5대 앞에 혼자 버티고 선 한국계 미군 장교의 모습은 기이했다. 하지만 그의 이런 침착하고 당돌한 행동은 허겁지겁 후퇴하던 한국군을 되돌려세우는 효과를 발휘했다. 150명 정도의 한국군이 후퇴를 멈추고 탱크 뒤로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결국 적은 합동 방어진지가 효과적으로 구축된 것으로 판단했는지 다리 쪽으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한국군과 유엔군은 별다른 피해 없이 후퇴할 수 있었다.
유엔군 최선봉, 연전연승 ‘무적의 부대’
■■역사상 첫 유색인 대대장
그는 한국에 부임한 지 7개월 만인 1951년 10월 31연대 1대대장으로 부임했다. 소령진급은 9월에 있었다. 그의 대대장 부임은 미군 역사상 ‘큰 사건’이었다. 2차대전 때까지만 해도 ‘백인만이 실전에서 중대급 이상을 지휘할 수 있다’는 뿌리깊은 인종편견이 있던 미군의 전통 아래 아시아계가 전쟁 한가운데서 전투부대 대대장이 됐기 때문이었다. 실제 김영옥은 미군 역사상 첫 소수인종 출신 전투부대장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그가 실질적인 대대장 역할을 한 것은 훨씬 전부터였다. 그의 능력을 눈여겨보던 맥카프리 연대장은 연대 정보참모인 그에게 곧 작전참모 역할까지 맡겼고, 5월 23일부터는 실전 경험이 없던 대대장을 교체하고 그에게 대대지휘까지 맡겼다. ‘대위 계급으로는 대대장을 맡을 수 없다’는 규정이 있었지만 명목상의 대대장을 두고 실질적인 지휘는 그가 맡는 편법까지 동원됐다.
그가 1대대를 맡았을 때 병사들 사이에는 패배감이 만연해 있었다. 북진하다 함경도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을 맞아 연대장까지 잃으며 궤멸되다시피 했던 31연대에는 ‘장진호 신드롬’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중공군에 대한 공포감이 가득 차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런 상태를 그대로 놓아둘 사람이 아니었다.
이후에도 그는 부대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서라면 무모한 짓도 서슴지 않았다. 금병산 전투에서는 총탄이 빗발치는 능선을 팔짱을 낀 채 왔다갔다 했다. 산봉우리에서 중공군이 쏘아대는 총탄에 겁먹은 병사들이 머리를 처박고 적군을 보지도 않은 채 총을 쏘는 것을 교정해주기 위해서였다. 병사들 사이에서 “너무 위험하다”는 아우성이 터져나왔지만 그는 “나를 보라. 괜찮지 않으냐”고 했다. 결국 머리를 내밀고 총을 쏜 미군에게 중공군은 쫓겨갔다. 이 전투에서 그의 군복에 난 총탄 구멍만 세 개였다.
현재의 남이섬 인근에서 벌어진 금대리 전투 때는 적진 30㎞를 4시간만에 관통하는 야간행군을 시도해 승리를 낚았다. 중공군은 적군의 대대병력이 사전포격도 없이 자신들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다 밤을 새워 달려온 그의 부대에 일격을 당하고 패했다.
그의 리더십 아래 면모를 일신한 1대대는 연전연승을 거듭하면서 ‘무적의 부대’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1대대를 앞세운 31연대는 중공군의 마지막 총공세를 저지한 유엔군의 재반격을 인도하는 견인차가 됐는데, 5월 27일 유엔군이 전 전선에서 일제히 38선을 다시 넘었을 때 선두로 돌파한 보병부대가 1대대였다.
그의 탁월한 전투 지휘능력은 전황도로도 증명된다. 그가 1대대 지휘를 맡은 5월 23일 작전 전황도에는 1대대가 다른 부대와 같은 선상에 있지만 1주일 후인 5월 31일 전황도에는 1대대가 혼자서 삐죽이 화천 이북까지 진격해 유엔군 9군단의 최선봉이 됐다. 이후 6월의 전황도에도 중부전선의 가장 선두에 그의 부대가 있었다. 중부전선이 북으로 치솟아 지금의 휴전선 모양이 만들어진 데는 그의 역할이 컸던 셈이다.
그가 평강-철원-금화로 연결되는 철의 삼각지대에 들어가 오인포격을 당한 것도 빠른 진격속도 때문이었다. 그의 부대는 화천 인근 541고지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휴식을 취하다가 아군의 오인 포격으로 대대본부가 쑥대밭이 되는 참사를 겪었다. 이 사고로 그는 오른쪽 무릎을 파편이 관통하고, 왼쪽 다리 발목이 파편에 맞는 중상을 입었다.
일본 오사카로 후송돼 다리 절단의 위기를 넘긴 그는 부상에서 어느 정도 회복되자 ‘본국으로 돌아가라’는 권고를 뿌리치고 8월 27일 다시 전선에 복귀했다. 그리곤 그 해 10월 정식으로 1대대장에 부임했다. 교착상태에 빠진 한국 전선을 지키던 그는 신임 연대장 모세스 대령이 병사들의 목숨을 담보로 의미없는 전투를 계속하자 1952년 9월 한국을 떠났다.
2차대전과 한국전쟁의 전설, 86세 노병 김영옥 미 육군 대령
그의 피엔 뜨거운 조국이 흐르고 있다 | ||||||||||
김영옥(86) 옹은 지난 7월 12일 미국 LA에 있는 시더스 사이나이 병원에 입원했다. 지난 6월에 이어 방광암 2차 수술을 받기 위해서였다. 숱한 전쟁터를 누빈 무쇠 같은 몸이지만 전장(戰場)의 상처와 세월의 무게는 노병(老兵)을 놓아두지 않았다.
한국전 때 부상으로 수술 40차례
하지만 상처투성이인 80대 노병(老兵)의 몸은 그의 범상치 않은 삶을 보여주는 흔적이다. 김영옥이 누구인가. 신문을 꼼꼼히 읽는 사람을 제외하면 우리나라에 그의 이름 석자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그의 이력을 잠깐만 더듬어봐도 그의 범상치 않은 삶을 엿볼 수 있다.
‘미 육군 예비역 대령, 미 역사상 미 육군 전투대대를 지휘한 첫 소수인종 장교, 2차대전 당시 연합군의 로마 해방을 앞당긴 주역, 미 대통령 부대 표창을 두 차례 받은 전설적 일본계 부대(100대대)를 이끈 장교, 한국전쟁에서 무패의 신화를 남긴 미 육군 7사단 31연대 1대대장, 미국·프랑스·이탈리아 정부로부터 20여개의 무공훈장 수여….’
‘커널(colonel·대령) 김’은 미국인들에게 ‘미국의 전사(戰史)를 새로 쓰게 한 위대한 군인’으로 각인돼 있다. 프랑스 동북부 브뤼에르 지방 등 그가 2차대전 당시 독일군으로부터 해방시킨 지역에서는 ‘카피텐 김(김 대위)’이라는 동양인 장교의 이름이 아직도 전설처럼 떠돌고 있다. 또 한국전쟁 당시의 ‘김영옥 소령’은 그가 거두고 보살핀 수백 명 전쟁고아들로부터 평생의 은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佛, 레지옹 도뇌르 훈장 수여
2차대전과 한국전쟁이라는 20세기의 가장 처참한 전쟁을 온몸으로 뚫고 온 그는 자유민주주의의 방파제 역할을 하는 데 삶을 던졌다. 한번은 파시스트 독재로부터, 또 한번은 공산주의 독재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느라 사선(死線)을 넘나들었다. 2차대전 종전 60주년, 한국전쟁 휴전 52주년을 맞은 지금도 그의 삶은 각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프랑스 정부는 지난 2월 60년 전 그의 공적을 재평가해 프랑스 최고 무공훈장인 레지옹 도뇌르를 수여하기도 했다.
“100% 한국인…프라이드 갖고 살아”
그는 한국전 참전을 결정했던 심경에 대해 “한국계로서 아버지의 나라를 조금이라도 돕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도, 미국 시민으로서 미국이 한국에 진 빚을 조금이라도 갚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도 한국으로 가서 직접 총을 들고 싸우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미국 정부가 소위 ‘애치슨 라인’을 설정, 한국을 극동방위선에서 제외한 것이 북한의 남한 침공을 유발한 원인이 되었고, 그래서 미국은 한국인에게 빚을 졌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미국인이면서 왜 한국을 사랑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평소 “나는 100% 한국인이며, 100% 미국인”이라고 답한다. 미국과 한국이라는 두 개의 조국을 갖고 있다는 말이고, 코리안 아메리칸으로서 차별을 겪으며 살아온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신념을 강조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는 “코리안이라는 아이덴티티(identity)와 프라이드(pride)를 갖고 평생을 살았다”고 한다.
한국전쟁 종료와 함께 한국을 떠났던 그는 1960년대 미군 군사고문단 일원으로 다시 한국을 찾았고 전쟁의 상처에서 벗어나 잿더미에서 발돋움하려는 조국의 모습을 봤다. 이후 1970년대의 경제발전을 지켜보면서 그는 “한국에서 피흘린 것에 대해 남다른 감회를 느꼈다”고 말했다.
헐벗고 굶주린 아이들 보며 눈물
그는 “단기간에 걸쳐 공산군과 유엔군이 번갈아 점령을 했기 때문에 한국전쟁에서 민간인이 겪은 고초는 2차대전 당시 이탈리아나 프랑스의 경우보다 더 심했다”고 말한다. 그는 “한국전 당시 북한강 지역에서 작전을 하다가 피란을 떠나지 않은 한 노인과 얘기할 기회가 있어 ‘이곳 주민은 공산주의를 지지합니까, 아니면 민주주의를 지지합니까’라고 물은 적이 있다”며 “그 노인 얘기가 ‘우리는 들풀이오. 어제는 소가 밟고 지나가더니 오늘은 말이 밟고 지나가는군. 소에게 밟히든, 말에게 밟히든 들풀에게는 마찬가지오’라고 해서 그날 이후 한국을 떠날 때까지 주민에게 어느 쪽을 지지하는지 결코 다시 묻지 않았다”고 말했다.
미국에 살면서도 한국 관련 뉴스를 꼼꼼히 챙기는 그는 한반도를 둘러싼 북핵 문제도 지혜롭게 풀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는 “북핵 문제가 상당히 걱정스럽지만 전쟁이 재발되어서는 안된다”며 “미국의 대북 정책이 전쟁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가정하면 안된다”고 충고했다. 대북 문제에 관한 한 DJ 정부 이후의 햇볕정책 지지론자다.
그가 조국의 땅을 처음 밟은 것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3월이었다. 그는 전방의 7사단을 찾아가기 위해 부산역에 들렀을 때의 일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눈 덮인 부산역은 1000명은 족히 넘어 보이는 아이들로 가득했는데 사내아이 계집아이 할 것 없이 추위에 옷이라곤 러닝 셔츠나 걸쳤을 정도고 온몸에는 땟물이 흘렀다. 아이들은 기차를 향해 손을 내밀기도 하고 석탄을 구하기 위해 기차 밑을 기어다니기도 했다. 그러다가 새로 도착한 미군이 역 안으로 들어서면 떼를 지어 쫓아와 먹을 것을 구걸하곤 했다.”
그는 열차에 오르자 전투식량인 시레이션 더미에서 자기 몫을 꺼내 아이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객실에 있던 25~30명 가량의 미군 장교에게 호소했다. “여러분, 나는 육군 17연대로 가는 대위 김영옥입니다. 미국에서 태어난 한국인 2세지요. 지금 저 밖에 헐벗고 굶주린 아이들이 우리만 쳐다보고 있습니다.…여기 쌓여있는 시레이션은 여러분들 것입니다. 한두끼쯤 배불리 먹지 않아도 죽지 않습니다. 한 사람 앞에 깡통 한두 개씩만 빼고 나머지를 내게 주십시오. 아이들에게 주겠습니다.”
2차대전 당시 이탈리아 전선에서 담배 다섯 개비에 몸을 파는 여자도 보고, 잘려나간 팔다리를 부여잡고 어머니를 찾으며 울부짖는 병사도 본 그였지만 “2차대전과 한국전쟁을 통틀어 전쟁과 관련해 내가 기억하는 가장 참담한 순간은 그때였다”고 한다. 그는 “내 평생 그렇게 많이 울어본 것은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고 말했다.
부대원 도움받아 고아원 후원
전장에서의 부상 후유증으로 1972년 샌프란시스코의 군병원에서 대령으로 전역한 그는 이후 민간인 신분으로 돌아와서도 LA 한인사회를 위해 다양한 봉사활동을 해왔다. 그는 한 달에 7500달러에 이르는 적지 않은 연금을 받지만 LA 새턴(saturn) 거리의 월세 1200달러짜리 아파트에 혼자 살며 최소한의 생활비를 제외한 나머지 돈을 사회봉사활동에 쓰고 있다. LA 한인사회에 대한 그의 헌신 때문에 많은 동포들이 그를 따르며 존경하고 있고, 투병생활을 하는 그를 걱정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한인권익단체 밑거름 만들어
그는 1978년부터 1988년까지 미국 최대의 자선단체인 유나이티드 웨이(United Way)의 LA 지부(chapter) 이사를 지냈다. 당시 미국은 정부 예산 삭감 바람이 거셌는데 그 와중에서도 그는 한인사회를 위한 많은 예산을 따냈다. 미국 최대의 한인 봉사단체로 성장한 한인 정신건강정보센터(KHEIR), 한인 2세들을 위한 한인청소년회관(KYCC), 한미연합회(KAC) 등의 권익보호단체들이 그의 지원 아래서 만들어졌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가 이러한 자신의 공적을 절대 알리는 일이 없다고 한다. 때문에 LA 한인사회의 발전에 기여했다고 스스로 떠벌리는 인사들에 의해 그의 공적이 가려져온 측면도 있다. 하지만 그는 불만이 없다. 그는 평소 “일을 할 때는 처음에 잘 디자인하고 토대를 닦아 다른 사람이 ‘내가 했다’고 자랑할 수 있게 하는 게 오히려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의 훈장 경력에서 아쉬운 점은 정작 그가 스스럼없이 조국으로 여기고 있는 한국으로부터는 아직 무공훈장 소식이 없다는 점이다. 한국전쟁에서 그는 중부전선을 책임지던 미 육군 7사단의 선봉부대를 맡아 불패의 신화를 이어가며 북쪽으로 60㎞를 치고올라가 현재의 휴전선을 긋는 데 기여를 했다. 이런 공적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해 아직 아무런 무공훈장도 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조국에 불만이 없다”고 말한다. 한우성씨는 “당초 일대기를 쓰자고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도 김 대령은 ‘자랑하고 싶은 인생이 아니다’며 취재를 거부했었다”며 “숱한 설득 끝에 ‘당신의 인생을 기록하는 게 한국을 위한 마지막 큰 봉사로 생각해 달라’는 말로 인터뷰를 성사시킬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일본인 사회에서도 전설로
그는 LA 한인사회뿐 아니라 일본인 사회로부터도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 그는 2차대전이 터진 후 입대할 때 ‘일본인’으로 분류돼 일본계 미국인으로 구성된 부대로 발령을 받았고, 이후 숱한 전쟁에서 일본계 미국인과 함께 사선을 넘나들었다. 미국으로 망명해 편의점을 운영하며 독립자금을 지원했던 부모로부터 “일본 아이들과는 놀지도 말고 일본 음식은 먹지도 말라”는 엄한 민족 교육을 받은 그로서는 무척이나 역설적인 일이지만, 그의 일본계 전우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던 그를 ‘사무라이 김’으로 부르며 존경했고, 지금도 그의 무공은 LA 일본사회에서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미국의 일본계 교육재단인 고 포 브로크(Go For Broke)재단은 그의 일대기를 담은 ‘잊혀진 용맹(Forgotten Valor)’이라는 영화를 만들어 LA 등지에서 상영하기도 했다.
그는 한국과 일본의 미래는 “나와 일본계 미국인과의 프렌드십(friendship) 같은 게 돼야 한다”고 강조하지만 일본의 잘못된 과거에 대해서는 간과할 수 없다는 입장도 분명하다. 그는 1999년 캘리포니아 주의회 의원인 마이클 혼다(현 연방 하원의원)가 2차대전 종군위안부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사과와 배상을 촉구하는 ‘정신대 결의안’(AJR 7)을 추진했을 때 지지의사를 분명히 했다. 당시 일본계 사회는 결의안을 저지하기 위해 반대 로비를 벌였지만 ‘2차대전 참전용사회’ 회장인 김 대령이 “반대하면 안된다”고 설득하자 “지지한다”는 입장으로 바뀌었다.
노병 김영옥. 그의 주목할 만한 삶은 뒤늦게나마 한국에서도 점차 인정받는 분위기다. 인천광역시는 최근 2007년 개관 예정인 이민사 박물관에 ‘김영옥 부스’를 설치하는 것을 고려 중이다. 이민 2세로서 조국을 빛낸 그의 업적과 인생을 영구전시해 알리겠다는 취지다. 그는 2003년 미국 이민 100년을 맞아 선정된 ‘이민영웅’에 문대양 하와이대법원장, 야구선수 박찬호 등과 함께 선정되기도 했다. 한우성씨는 “할리우드나 국내 관계자들이 김 대령에 대한 영화나 드라마를 만들자고 접촉해온다”고 말했다.
“한국의 미래를 낙관한다”고 말하는 그의 말년은 앞서 세상을 떠난 한 유명한 군인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Old soldiers never die, they just fade away.)”
■김영옥 연표
1919년 미국 LA에서 이민 1세대인 아버지 김순권과 어머니 노라(Nora) 고 사이에서 4남2녀 중 장남으로 출생
1936년 LA 벨몬트고등학교 졸업
1937년 LA 시립대학 입학
1938년 LA 시립대학 중퇴 후 프랭크 위긴스 국립 디젤엔진학교 입학
1941년 미 육군 사병으로 입대
1942년 조지아주 포트 베닝의 보병장교 후보생으로 선발(당시 유일한 유색인 후보생)
1943년 소위 임관 후 일본계 미국인 부대인 100대대 부임. 9월에 유럽 전선으로 파병돼 이탈리아 살레르노에 상륙. 이후 1945년 4월 본국 귀환 때까지 로마·피사 해방전투 등을 치름. 1944년 1월 중위, 6월 대위 진급
1946년 명예제대
1946~1950년 LA에서 세탁소 운영
1950년 9월 한국전 발발 소식을 듣고 재입대
1951년 3월 한국 도착. 이후 유엔군 9군단 산하 미 육군 7사단 31연대, 1대대에 부임해 구만산·탑골·청병산·금대리·노동리 전투 등을 치름. 1951년 9월 소령 진급, 10월 1대대장 부임
1952년 9월 한국을 떠남
1952~1956년 포트 베닝 보병학교 교관
1956~1959년 7사단 86연대 2대대장으로 독일 근무
1959년 중령 진급
1959~1963년 캔사스 포트 리브에서 교관
1963~1965년 미군 고문으로 한국 근무. 1965년 대령 진급
1965~1971년 유럽, 하와이 등지에서 근무
1971년 부상 후유증으로 입원
1972년 예비역 대령으로 전역
1978~1988년 미국 최대 자선단체인 유나이티드 웨이 LA 지부 이사로 근무
2000~2001년 ‘노근리 사건’ 진상 조사를 위한 외부전문가위원회 활동
미국의 두 번째 등급 무공훈장인 특별무공훈장, 프랑스 최고무공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이탈리아 최고무공훈장인 십자무공훈장 등 20여개의 무공훈장 받음. 2003년 한국의 국민훈장 모란장, KBS 해외동포상 수상 |
정장열 주간조선 기자(jrchung@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