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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대(年代)로 살펴보는)
1)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의 주역으로 알려진 혜각 존자(慧覺尊者) 신미대사(信眉大師)는 1403~1480년, 태종 3년 충청도 영동군 용산면 상용리 오얏골에서 1402년 태종 2년 동시학(同侍學)을 역임하였고 1416년 태종 16년 무렵 옥구진 병마사(沃溝鎭兵馬使)를 지냈으며 1481년 성종 12년 6월 7일 증 영의정(贈領議政)을 지낸 부친 영산 김 씨(永山金氏) 김훈(金訓)과 모친 여흥 이 씨(驪興李氏) 사이에서 4남 2녀 중 장남(長男)으로 출생하셨으며 세속 이름은 김수성(金守省)으로 불려졌는데 세종시대 집현전(集賢殿) 학사(學士)였으며 1451년 문종 1년에 지영주 군사(知榮州郡事)를 지냈고 1464년 세조 10년 2월 28일 세조가 왕사(王師)이신 스승 신미대사를 친견하고자 속리산(俗離山)에 순행(巡行)을 하실 때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지냈으며 1472년 성종 3년 2월 7일 영산 부원군(永山府院君)에 오른 문량(文良) 김수온(金守溫)과 1453년 단종 1년 함길도 감련관(咸吉道監鍊官)을 지내고 1473년 성종 4년 안동부사(安東府使) 이조 참의(吏曹參議)와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지낸 김수화(金守和)와 1466년 세조 12년 행 사헌부 장령(行司憲府掌令)을 같은 해 12년 4월 18일 보은 현감(報恩縣監) 1473년 성종 4년 통정대부(通政大夫) 행 청주 목사(行淸州牧使)를 지낸 김수경(金守經)이 혜각 존자 신미대사의 친 아우들로 알려진 분 들입니다,
1466년 세조 12년 4월 18일 자, 이때 기록에 의하면 신미대사의 모친 여흥(驪興) 이 씨(李氏)와 아우 김수경(金守經)의 아내가 출가하여 여승(尼)이 되었다는 기록이 보이는 것으로 볼 때에 대사(大師)의 어머니가 노년에 불가(佛家)에 출가(出家)를 하여 비구니가(僧尼) 된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에게 신미대사가 태어난 고향이 충청도 영동군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록(實錄)의 다른 기록인 1416년 태종 16년 6월 10일 신미대사의 부친 김훈(金訓)이 조모(祖母)의 복(服)을 당해서 빈소(殯所)에 가지 않고 상경(上京)하여 몰래 인덕궁(仁德宮)에 출입하고 첩기(妾妓) 벽단단(碧團團)을 인연하여 잔치를 베풀고 의복(衣服)을 하사(下賜) 받았다는 죄를 물어 김훈(金訓)을 본향(本鄕) 영동현(永同縣)에 옮겨 안치(安置)하였다는 실록의 기록을 참고로 신미대사는 한양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다 이 무렵 영동현(永同縣)에 안치(安置)가 된 부친(父親) 김훈(金訓)을 따라서 충청도 영동으로 내려와 잠시 머물다 14세가 되는 이듬해인 1417년 조선 태종 17년 경기도 양주 천보산(天寶山) 회암사(檜巖寺) 함허득통(涵虛得通) 스님에게 입산 출가(出家)를 하신 것으로 보이고 있습니다,
득통 기화(得通己和,1376~1433) 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입산 출가하여 평생 도반(道伴)이며 세조시대 선종 판사(禪宗判事)를 역임한 묘각 수미(妙覺守眉) 선사(禪師)와 더불어 당시 대자암(大慈庵) 주지(住持) 직을 역임(歷任)하고 계셨던 함허(涵虛) 스님에게 경(經)과 율(律)을 배워 익혔으며 1424년~1430년 팔만대장경을(八萬大藏經)을 열람하다가 범서(梵書)로 된 원전(原典)을 보기 위하여 범어(梵語) *산스크리트Sanskrit* 를 공부하여 범서 경전(經典)을 대부분 열람(閱覽)을 하시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후에 신미(信眉)와 동문(同門) 수학(受學)을 하였던 도반(道伴) 수미(守眉)는 영동 반야사(般若寺)에 머리를 기르고 은거(隱居)를 하시던 벽계 정심(碧溪淨心) 선사(禪師)에게 나아가 임제선(臨濟禪)을 익혀 깨달음을 얻고서 벽계 정심(碧溪淨心)의 선법(禪法)을 전법(傳法)하고 세조조(世祖朝)에 이르러 선종 판사(禪宗判事)를 지내기도 하였습니다,
1464년 세조 10년 4월 13일 세조(世祖) 임금은 전라도 관찰사 성임(成任)에게 어서(御書)로 유시(諭示)를 전교(傳敎)하기를 “전 선종 판사(禪宗判事) 수미(守眉)는 잠저(潛邸) *대군시절* 때부터 구면(舊面)으로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하시면서 수미(守眉)를 위하여 성임(成任)에게 도갑사(道岬寺) 중창불사에 연화(緣化) *시주*를 돕게 하시니 묘각(妙覺) 수미 선사(守眉禪師)는 월출산(月出山) 도갑사(道岬寺)를 중건(重建) 하시고 이곳에서 열반(涅槃)을 하신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후대(後代)의 혹자(或者)들은 신미대사(信眉大師)와 수미 선사(守眉禪師)를 혼돈(混沌) 하기도 합니다,
혜각 존자(慧覺尊者) 신미대사(信眉大師)는 1433년 세종 15년 문경(聞慶) 봉암사(鳳巖寺)에서 주석하시다 열반(涅槃)을 하셨던 함허 득통(涵虛得通) 스님으로부터 선(禪)과 경(經)을 전수(傳受) 하신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전등 법맥(傳燈法脈)은 천축승(天竺僧) 지공 화상(指空和尙, ?~1363) 나옹혜근(懶翁惠勤,1320~1376)무학자초(無學自超,1327~1405) 함허 득통(涵虛得通.1376~1433) 수암 신미(秀巖信眉,1403~1480) 학조 등곡(學祖燈谷,1428~1514년)으로 전해져 왔던 양주 천보산(天寶山) 회암 산문(檜巖山門)의 법통(法統)을 전등(傳燈) 하신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대사(大師)께서 출가하신 6년 후인 1423년 세종 6년 4월 5일 고려(高麗) 시대부터 내려오던 불교(佛敎) 각각의 종파(宗派)였던 조계(曹溪) 천태(天台) 총지종(摠持宗)을 통합하여 선종(禪宗)으로 삼았으며 화엄(華嚴) 자은(慈恩) 중신(中神) 시흥종(始興宗)을 교종(敎宗)으로 삼아서 조선 불교를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으로 통합 관리하기에 이르렸는데 이때부터 조선은 불교를 배척하고 탄압을 본격적으로 실시가 되면서 승려들의 도성(都城) 출입을 제한(制限) 하였으며 승도(僧徒)들의 도첩(度牒) 제를 실시하고 불교(佛敎)에 귀위(歸依)를 하고자 출가하려던 승려들을 법령(法令)으로 제한하기도 하였습니다,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의 주역으로 알려진 혜각 존자(慧覺尊者) 신미대사(信眉大師)는 스승이셨던 함허 스님이 열반하신 이후 이듬해인 1434년부터 새로운 문자를 창제하기 시작하여 1438년 세종 20년 명(明) 정통(正統) 3년에 천불사(天佛寺)에서 소리 문자인 정음(正音)을 창제하여 정음(正音)으로 이루어진 불서(佛書) 원각 선종 석보(圓覺禪宗釋譜)를 저술하여 간행을 하셨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정통(正統) 3년에 천불사(天佛寺)에서 간행하였던 원각 선종 석보(圓覺禪宗釋譜)는 실록에 훈민정음(訓民正音)이 창제가 되었다고 발표하였던 1443년 12월 30일 보다 5년이 앞서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연으로 대사(大師)와 친분이 있었고 대사의 선사(先師)이신 함허 스님과 오랜 친분이 있었던 승려 출신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추천으로 세종(世宗)의 초빙(招聘)을 받아 집현전(集賢殿) 학사 자격으로 1443년~1446년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에 깊이 관여를 하셨는데 1464년 세조 10년 2월 28일 세조께서 속리산(俗離山)에 순행(巡行)을 하셨을 때 순행(巡行) 내력을 공조판서(工曹判書) 김수온(金守溫)에게 기록으로 남겨 복천사(福泉寺)에 역대(歷代) 유물로 전래하게 하였던 복천 보장록(福泉寶藏錄) 기록에 의하면 1445년 세종 27년 4월 5일 권제 정인지 안지 등이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10권을 지어 올렸는데 이 작업에 참여(參與)를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1446년 세종 28년 12월 2일 무렵 세종의 왕명(王命)을 받아 운악산(雲嶽山) 현등사(懸燈寺)에서 정음(正音)으로 석가모니 부처님 공덕(功德)을 찬탄한 찬불가(讚佛歌)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석가모니 부처님 일대기(一代記)로 알려지고 있는 석보상절(釋譜詳節)을 저술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1444년 세종 26년 2월 16일 세종대왕(世宗大王)의 왕명(王命)으로 동궁(東宮)과 진양 대군(晉陽大君) 안평 대군(安平大君)이 일을 관장하여 집현전 학사 최항(崔恒) 박팽년(朴彭年) 신숙주(申叔舟) 이선로(李善老) 이개(李塏) 강희안(姜希顔) 등에게 언문(諺文)으로 운회(韻會)를 번역하게 하였는데 4일 후인 1444년 세종 26년 2월 20일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 최만리(崔萬理) 직제학(直提學) 신석조(辛碩祖) 직전(直殿) 김문(金汶), 응교(應敎) 정창손(鄭昌孫) 부교리(副校理) 하위지(河緯之) 부수찬(副修撰) 송처검(宋處儉) 저작랑(著作郞) 조근(趙瑾) 등이 연맹으로 상소(上疏)를 올려 세종이 언문으로 운회(韻會)를 번역 하게 하였던 일을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 최만리(崔萬理)가 주동(主動)이 되어 언문 제작의 부당함에 대하여 여섯 가지 사유를 들어 반대를 아뢰니 집현전에서 더 이상 언문 제작을 위한 번역 작업을 하지 못하자 세종은 신미를 따로 만나 본인 대신 수양대군(首陽大君) 안평대군(安平大君)에게 이일을 협조토록 해줄 것이니 신미(信眉)와 학조(學祖) 학열(學悅) 다섯 명이 추진하도록 하시자, 신미대사와 일행들은 정음(正音)을 완성하는 작업과 번역하는 작업은 주로 대자암(大慈庵)이나 회암사(檜巖寺) 진관사(津寬寺) 흥천사(興天寺) 예빈시(禮賓寺) *궁중 빈객(賓客)의 연향(宴享)을 담당* 를 왔다 갔다 하면서 해인사(海印寺) 장경각(藏經閣)에서 법화경(法華經) 금강경(金剛經) 반야심경(般若心經) 지장경(地藏經) 등을 미리 간행을 하여 와서 토도 달아보고 번역도 하여 시험을 거친 후 완성이 되자 세종대왕께 보고를 하니 세종은 매우 기뻐하며 이때부터 집현전 학사들을 이 작업에 참여를 시켜서 학자들과 같이 깎고 다듬고 고치는 교정 작업을 하는 행식을 걸쳐 드디어 정음(正音)이 이루어지자 1446년 세종 28년 9월 29일 훈민정음(訓民正音)이 완성되어 세종께서 어제(御製)를 쓰시고 예조 판사(禮曹判書) 정인지(鄭麟趾)가 서문(序文)을 쓰고서 백성에게 반포(頒布)를 하시게 됩니다,
이때 세종의 왕명(王命)으로 운회(韻會)를 언문(諺文)으로 번역하게 하였던 작업은 훈민정음(訓民正音)을 반포(頒布) 하였던 1년 후(後) 1447년 세종 29년 9월 28일 우리에게 안평대군(安平大君)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로 널리 알려진 동국정운(東國正韻) 6권을 언해(諺解)를 하여 집현전 응교(集賢殿應敎) 신숙주(申叔舟)가 교지를 받들어 서문(序文)을 짓고 간행(刊行)을 하게 되는데 대사(大師)께서 이 작업 후면後面)에서 참여하신 것으로 전해지기도 하였습니다,
또 세조(世祖)가 백성들에게 훈민정음(訓民正音) 문자를 보급하기 위하여 불경(佛經)을 정음(正音)으로 번역하여 간행하고자 1461년 세조 7년 6월 16일 원각사(圓覺寺)에 설치하였던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불경(佛經) 번역사업을 신미대사께서 주도하셨는데 대사께서 번역을 하셨던 불경은 1456년 세조 2년 선종영가집(禪宗永嘉集) 1457년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언해를 하셨으며 신미대사의 전법 제자로 알려진 학조(學祖) 등곡 대사(燈谷大師)가 1449년 세종 31년 세조의 청(請)을 받아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석보상절(釋譜詳節)의 내용을 합하여 편찬하고 간행한 월인석보(月印釋譜) 초판본은 1459년 세조 5년 2월 김수온(金守溫)과 성임(成任)이 월인석보(月印釋譜)에 내용을 선사(繕寫) *부족한 점을 증보함* 하여 세조가 서문(序文)을 쓰고 월인석보(月印釋譜)를 재간행을 하게 되었으며 다시 1461년 세조 7년 범망경(梵網經)과 능엄경(楞嚴經)을 1462년 세조 8년 목판본 능엄경(楞嚴經)을 1463년 세조 9년 법화경(法華經)을 1464년 세조 10년 금강경(金剛經) 아미타경(阿彌陀經) 반야심경(般若心經) 선종영가집(禪宗永嘉集) 금강경 삼가(金剛經 三家解)를 언해하여 간행을 하셨습니다, 1464년 세조 10년 금강경(金剛經) 아미타경(阿彌陀經) 반야심경(般若心經) 선종영가집(禪宗永嘉集)을 언해(諺解)하여 다시 간행(刊行)을 하셨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1465년 세조 11년 4월 7일 원각사가 낙성되었을 때 원 각수 다라니경(圓覺修多羅了義經)을 언해하여 간행을 하였으며 1466년 세조 12년 신미대사 찬술로 사 법어(四法語)인 완산정 응선사(四法語) 시 몽산 법어(示蒙山法語) 동산 숭 장규 송자(東山崇藏主送子) 행각 법어(行脚法語) 고담 화상 법어(古潭和尙法語) 원각 오선 인 법어(元覺悟禪人,法語) 무자 십 절목(無字十節目) 휴휴 암주 좌선문 (休休庵主,坐禪文) 목우자 수심결(牧牛子修心訣)등 제자이신 학조(學祖) 스님과 더불어 25여 종의 불경(佛經)과 어록(語錄) 진언집(眞言集)을 정음(正音)으로 저술하거나 번역하는 작업에 참여하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또한 강원도(江原道) 오대산(五臺山) 상원사(上院寺)는 고려 왕 씨(王氏)를 위하여 수륙재(水陸齋) 모시던 사찰이었는데 1425년 세종 7년 12월 19일 상원사(上院寺)가 화재를 당하여 전각(殿閣)등이 화마로 소실이 되어 방치되고 있었는데 신미(信眉) 스님께서 화마로 불타버린 이 절을 중창하는 불사(佛事)를 하신다는 소식을 세조 임금께서 듣게 되자, 세조는 1464년 세조 10년 12월 18일 오대산(五臺山) 상원사(上院寺) 중창불사(重創佛事)를 권선(勸善)하는 불사(佛事) 모연문(募緣文)을 세조 임금과 혜각 존자(慧覺尊者) 신미대사께서 시주 문을 한문(漢文)으로 쓰시고 다시 훈민정음(訓民正音) 28자로 권선(勸善)을 하는 시주(施主) 모연문(募緣文) 내용을 집적 작성하여 쓰시고 권선문 문언을 남기셨는데 오대산(五臺山) 상원사(上院寺) 중창불사 권선 모연문은 신미대사와 세조 임금께서 집적 작성하시고 국왕(國王)의 옥새(玉璽)를 찍었으며 자성 왕후 윤 씨(慈聖王后,尹氏) 왕세자 휘(王世子,諱) 정 빈한 씨(正賓韓氏) 의숙 공주(懿淑公主) 정의 공주(貞懿公主)께서 수결(手決)을 하시고 인장(印章)을 찍어 남겼으며 효령대군 임영대군 영응대군 그리고 세조시대(世祖時代) 조정 군신(朝廷君臣)들과 팔도 관찰사(八道觀察使) 각 고을 수령들 직위(職位)와 직책(職責)등을 맡아보았던 230여 명이 오대산 상원사 중창불사에 시주(施主)를 하는 수결(手決)을 함께 남겼는데 이 자료는 세조시대(世祖時代) 당시 조선 조정(朝鮮朝廷)의 직위(職位)와 직책(職責)등을 맡아보던 이들의 명함(名銜)을 알 수 있었던 기록으로 중요한 문화적 가치와 역사적 가치가 있는 자료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대산(五臺山) 상원사(上院寺) 중창불사 권선 모연문은 1466년 세조 12년 세조의 둘째 따님이신 의숙 공주 부부가 오대산 상원사에 목조 문수동자 좌상(文殊童子坐像)을 만들어 모셨는데 1984년 국보 제221호 상원사 목조 문수동자 좌상(文殊童子坐像) 복장물(腹藏物) 속에서 상원사(上院寺) 중창불사 권선 모연문이 나오게 되었는데 이때 발견한 상원사(上院寺) 중창불사 권선 모연문은 1997년 1월 1일 국보(國寶) 제292호로 지정이 되어서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의 주역이셨던 혜각 존자(慧覺尊者) 신미대사(信眉大師)는 세종(世宗) 문종(文宗) 세조(世祖) 임금의 스승이었던 왕사(王師)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세종께서 신미대사(信眉大師)의 제수 하고자 하셨던 시호(諡號) 내용 중에 존자(尊者)란 칭호가 이를 증명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맹(孔孟)의 가르침과 유교(儒敎)의 성리학(性理學)을 국시(國是)로 정하고 불교(佛敎)를 탄압하고 배척하던 조선(朝鮮) 오백 년 불교사(佛敎史)에 승려 출신이 국왕(國王)이 제수(除授)한 시호(諡號) 중 존자(尊者)란 칭호로 불려졌던 승려는 신미대사와 더불어 역대(歷代)로 세 분의 승려가 더 계셨는데 세 분의 승려 중 먼저 우리에게 무학대사(無學大師) 알려진 스님은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조선(朝鮮)을 건국(建國)하는데 공(功)을 세 워던 관계로 태조 임금으로부터 1392년, 태조 1년 10월 9일 태조가 무학(無學)을 자신의 스승인 왕사(王師)로 삼았다가 다시 1410년 태종 10년 7월 12일 무학대사 사후(死後)에 상왕(上王)이신 태조가 무학을 존경하고 신뢰하여 태종에게 극력 청하여 왕사(王師)의 칭호인 묘엄 존자(妙嚴尊者)란 시호를 제수(除授) 하는 내용이 실록(實錄)에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또 1592년 선조 25년 음력 4월 14일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승병(僧兵)을 조직하여 의승군(義僧軍) 승병장(僧兵將)으로 임진왜란에 참전(參戰)하여 평양성(平壤城) 탈환과 한양성(漢陽城)을 수복(收復) 하는데 수많은 전공(戰功)을 세워 나라와 백성들을 병란(兵亂)의 위기에서 구했던 우리에게 서산대사(西山大師)로 널리 알려진 청허당(淸虛堂) 휴정 선사(休靜禪師)에게 선조(宣祖) 임금은 등계 보제 존자(登階普濟尊者)라 하는 시호를 제수하였으며 광해(光海) 임금 시대 사명당(四溟堂) 송운대사(松雲大師)에게 자통 홍제 존자(慈通弘濟尊者) 칭호로 불려졌는데 이들 세분 스님의 면면(面面)을 살펴볼 때에 세종대왕(世宗大王)께서 신미(信眉)에게 제수하고자 하였던 존자(尊者) 칭호가 주는 의미(意味)는 결코 단순한 의미를 내포한 칭호가 아닌 것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세종(世宗)이 작성(作成)하여 신미(信眉)에게 제수하고자 하였던 시호(諡號) 내용 중에 혜각 존자(慧覺尊者)로 불려던 왕사(王師) 의미의 칭호(稱號)와 *나라와 세상을 이롭게 하였다* 하는 우국 이세(祐國利世)란 칭호(稱號)가 주는 의미(意味)는 결코 단순한 의미가 함축(含蓄) 된 것이 아닌 것으로 이를 추정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까닥 에 세종이 존자(尊者)에게 제수하고자 하시었던 시호의 칭호에 우국 이세(祐國利世) *나라와 세상을 이롭게 하였다* 로 불려지는 칭호를 존자(尊者)에게 제수하고자 하셨던 세종의 숨겨진 깊은 의지(意志)는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 역사에 대사께서 정음(正音) 창제의 1등 공신(功臣)이었던 것을 시호에 밝히고자 하셨던 것으로 이를 추정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미의 시호 중 우국 이세(祐國利世) 칭호에 관련하여 이 칭호를 제수하는 것을 강력하게 반대하는 기록인 문종 즉위년 7월 17일 자 기록에 대사헌(大司憲) 이승손(李承孫)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신미의 직함 안에 우국 이세(祐國利世)의 칭호가 있는 것은 신 등이 더욱 놀라는 것입니다. 이 중이 무슨 임금을 보좌하고 백성에게 혜택을 준 공이 있습니까? 하면서 "이 존자(尊者)란 호도 칭할 수 없지마는, 우국 이세(祐國利世)의 명칭은 더욱 불가합니다. 밤낮으로 게을리하지 않고, 임금을 보좌하고 백성에게 혜택을 준 대신에게도 감히 이것으로 칭하지 못하는데, 함부로 늙은 간승(姦僧)에게 줄 수 있습니까? 신 등이 매양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분격함을 이기지 못합니다, 하였다는 실록의 기록은 세종이 신미에게 제수하고자 하였던 우국 이세(祐國利世) 칭호가 단순하지 않은 칭호인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세종(世宗) 임금이 제수하고자 하였던 대사(大師)의 시호(諡號)를 다시 주목해서 살펴보아야 할 부분은 선교종 도총섭(禪敎宗都摠攝)이란 칭호(稱號)입니다, 세종 임금은 세종 6년 4월 5일 고려(高麗) 시대부터 내려오던 불교(佛敎) 각각의 종파(宗派)였던 조계(曹溪) 천태(天台) 총지종(摠持宗)을 통합하여 선종(禪宗)으로 삼고 화엄(華嚴) 자은(慈恩) 중신(中神) 시흥종(始興宗)을 교종(敎宗)으로 삼아 조선 불교(佛敎)를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으로 통합하여 관리를 한 이래로 신미대사(信眉大師)를 조선불교 최고의 승직(僧職)이라 할 수 있는 선교종 도총섭(禪敎宗都摠攝)이란 승직(僧職)을 제수하셨는데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을 통솔하는 선교종 도총섭(禪敎宗都摠攝)이란 승직(僧職)을 생전(生前)에 최초로 제수를 받은 승려로서는 신미대사가 조선 불교사(佛敎史)에서 역대 처음이라는 사실은 세종대왕(世宗大王)께서 대사(大師)를 대단히 존중(尊重)하며 공경(恭敬)을 하셨던 것으로 이를 추정 할 수가 있다 하겠습니다,
1450년 문종 즉위년 7월 6일 문종 임금은 선왕(先王)이신 세종대왕께서 승하(昇遐)를 하시기 전에 신미(信眉)의 시호(諡號) 내용을 직접 작성(作成)을 하시고 동궁(東宮) 문종에게 제수(除授)를 하라고 유훈(遺訓)으로 일임(一任)을 하셨던 신미(信眉)의 시호(諡號)를 제수하게 되는데 제수한 시호는 선교종 도총섭(禪敎宗都摠攝) 밀전 정법(密傳正法) 비지 쌍운(悲智雙運) 우국 이세(祐國利世) 원융무애(圓融無礙) 혜각 존자(慧覺尊者)로 삼고, 금란지(金鸞紙)에 관교(官敎)를 써서 자초 폭(紫綃幅)으로 싸서 사람을 보내어 주었는데, 우리 국조(國朝) 이래로 이러한 승직(僧職)이 없었다. 임금이 이 직을 주고자 하여 일찍이 정부(政府)에 의논하고, 정부에서 순종하여 이의가 없으므로 마침내 봉작(封爵)하게 되었는데, 듣는 사람이 놀라지 않는 이가 없었다, 하는 기록이 실록(實錄)에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문종 임금께서 신미(信眉)에게 이러한 시호(諡號)를 제수하였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유생(儒生)들인 다수(多數)의 조정(朝廷) 대신(大臣)들인 우정언(右正言) 홍일동(洪逸童)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 박팽년(朴彭年) 집현전 수찬(集賢殿修撰) 유성원(柳誠源)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이승손(李承孫), 집의(執義) 어효첨(魚孝瞻) 장령(掌令) 신숙주(申叔舟) 장령(掌令) 하위지(河緯地) 지평(持平) 조안효(趙安孝) 등이 대사(大師)에게 시호를 제수함은 불가(不可) 하며 신미(信眉)에게 제수하였던 시호를 삭제하기를 강력하게 주장을 하자, 문종 임금은 신미에게 제수한 시호는 자신의 뜻이 아닌 선왕(先王)이신 세종(世宗)께서 정하신 것이었음을 밝히는 기록이 실록에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실록(實錄)의 기록인 1450년 문종 즉위년 7월 8일 경술 4번째 기사에 “장령(掌令) 하위지(河緯地)가 신미에게 승직(僧織)을 제수하는 것이 불가함을 아뢰었을 때 문종(文宗)이 장령(掌令) 하위지(河緯地)에게 이르기를 "신미(信眉)에 대한 칭호는 선왕(先王)께서 정하신 것이다. 다만 미령(未寧)하심으로 인하여 시행하지 못하였을 뿐이요, 내가 한 것이 아니다, 하시니 ”장령(掌令) 하위지(河緯地)가 다시 아뢰길 "신미에 대한 칭호는 비록 선왕의 뜻이라 하더라도 전하가 첫 정사 첫머리에 거행하시니, 바깥사람들이 누가 전하께서 신미(信眉)를 높이고 중하게 여긴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신미의 칭호는 선왕의 뜻 이매 이미 행하였으니 도로 빼앗을 수 있는가? 하였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으며 다시 문종 즉위년 7월 11일 장령(掌令) 하위지(河緯地)가 아뢰기를 "신미(信眉)의 호를 선왕(先王)께서 이미 정하고 시행하지 않은 것은 반드시 뜻이 있을 것입니다. 비록 이미 시행하였다 하더라도 전하는 마땅히 시행을 도로 거두어 주셔야 하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신미(信眉)는 선왕(先王)이 공경하신 중이니 관교(官敎)를 빼앗을 수 없다." 하였다는 기록이 실록(實錄)에 다시 보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세종대왕께서 승하(昇遐)를 하시기 전에 신미(信眉)의 시호(諡號) 칭호를 스스로 작성(作成) 하시고 문종에게 제수(除授) 할 것을 유훈(遺訓)으로 일임(一任)을 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문종(文宗)이 즉위하여 조정에(朝廷)에 나아가 첫 정사(政事)를 보는 첫머리에 신미에게 시호를 제수하였던 것을 알 수가 있었으며 비록 문종 임금께서 시호를 제수를 하였지만 신미(信眉)에 대한 칭호는 선왕께서 정하신 것이며 세종께서 다만 심신(心身)이 미령(未寧) 하심으로 인하여 시행을 하지 못하였던 것을 기록으로 알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종(文宗) 임금은 선왕(先王)이셨던 세종께서 자신에게 유훈(遺訓)으로 신미의 직첩을 제수하라고 지시를 하였던 일은 조정(朝廷)의 신하들이 신미의 직첩 제수는 부당
하므로 이를 삭제하거나 환수할 것을 문종 즉위년 7월 8일부터 시작하여 7월 9일, 7월 11일, 7월 12일, 7월 15일, 7월 16일, 7월 17일, 7월 18일, 7월 22일까지 줄기차게 간청을 하게 되자 신하들의 주청을 물리치지 못하고 드디어 문종 즉위년 8월 7일에 이르려 신미(信眉)의 칭호에 대한 직첩을 고쳐 내리게 되었는데 이때 직첩을 고쳐 내려던 기록이 실록의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으므로 이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450년 문종 즉위년 8월 7일 무인 3번째 기사에 “신미의 칭호를 고쳐 대조계 선교종 도총섭 밀전 정법 승양 조도 체용 일여 비지 쌍용 도생 이물 원융 무애 혜각 종사(大曹溪禪敎宗都總攝密傳正法承揚祖道體用一如悲智雙運度生利物圓融無礙惠覺宗師)로 삼았다고 하는 기록이 실록에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때 신미(信眉)의 시호를 새롭게 고쳐서 제수한 시호 명칭 중 선교종 도총섭(禪敎宗都摠攝)이란 칭호는 대조계 선교종 도총섭(大曹溪禪敎宗都總攝)으로 고쳤으며 우국 이세(祐國利世) *나라와 세상을 이롭게 하였다* 칭호는 도생 이물(度生利物) *중생을 이롭게 하였다* 이라고 하는 칭호로 고쳤으며 또한 왕의 스승이라고 하는 명칭인 존자(尊者) 칭호는 이를 삭제하고 대신 불교(佛敎)의 한 종파의 스승이라고 하는 조계(曹溪) 선교종(禪敎宗) 종사(宗師)로 신미(信眉)의 칭호를 폄하하여 고쳐 내리게 되는데 이러한 앞서의 실록의 기록으로 추정을 할 때 유생(儒生)들인 조정(朝廷)의 신하들은 선왕(先王)이신 세종께서 신미의 시호를 작성하시어 제수하고자 하였던 칭호를 끝없이 삭제하거나 환수를 주장하였던 사실을 추정할 때 이는 신미대사(信眉大師)가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의 1등 공신(功臣)이었다는 사실을 세종대왕(世宗大王)께서 신미에게 제수하고자 하였던 시호의 칭호 내용에서 그 뜻을 밝혀놓았기 때문에 이를 알고 있었던 조정의 신하들은 이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기 때문에 이를 극렬히 반대를 하였을 것으로 이를 추정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종 임금이 선왕(先王)이신 세종이 유훈(遺訓)으로 신미(信眉)에게 시호를 제수할 것을 자신에게 일임(一任)을 하셨던 신미대사의 시호는 신하들의 간청에 일부를 환수(還收)하여 고쳐 내려던 칭호(稱號)는 1453년 단종 1년 계유정난(癸酉靖難)을 통해 조선 7대 국왕(國王)에 오른 세조(世祖) 임금은 자신의 스승이셨던 혜각 존자(慧覺尊者) 신미대사(信眉大師)의 시호(諡號)를 선왕(先王)이신 세종의 유훈(遺訓)을 따라 다시 원안(原案)대로 복원(復元)을 하시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조대왕께서 승하(昇遐)를 하시기 4 개월 여 전인
1449년 세종 31년 12월 임금은 존자(尊者)께서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의 1등 공신(功臣) 이였음을 기리기 위하여 대사(大師)가 주석하시던 속리산(俗離山) 복천사(福泉寺)를 중창(重創)하는 불사(佛事)를 하시기 위하여 불사(佛事) 시주 문(施主文)인 복천사(福泉寺) 중수 보선 문(重修普善文)을 남기셨는데 보선 문(普善文) 내용과 불사(佛事) 시주인(施主人) 명단(名單)이 오늘날까지 복천사(福泉寺)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복천사(福泉寺) 중창불사 보선 문(普善文)
“공손히 생각하건대 성상(聖上)께서 지극한 덕을 품으사 크게 천명(天命)을 받으시니 바다에 싸움배가 끊어지고 백성의 살아감이 편안한지라, 아무튼 이 좋은 때를 만나서 어찌 크게 기뻐함이 없으리오, 뒤에서 돕는 공이 있어 섭리(攝理)하는 덕을 은밀히 비추실 때에 이로 말미암아 아미타(阿彌陀) 삼존(三尊)으로 사람 키 만한 부처를 만들고 또 불당(佛堂)을 수리하여 이에 안치(安置)해서 마침내 보고 듣는 자로 하여금 제 마음을 새롭게 하도록 하려 한 것이다,
또 이 절은 지경의 맑고 뛰어남이 모든 절에 첫 때이고 나라의 중심에 있어서 실로 삼한 정기(三韓精氣)가 모인 곳이다, 종실 원찰(宗室願刹)에 마땅하고 수륙도량(水陸道場)에 합당하므로 중수(重修)하여 성원(誠願)을 이루는 영원 축원(永遠祝願)의 장소로 삼고자 한다, 바라건대 모든 어진 이는 각각 적은 성의라도 희사(喜捨)하여 좋은 일을 조양(照揚)하게 할 것이며 임금의 만년(萬年)의 수(壽)를 누리게 하고 나라에 무궁한 아름다움이 있도록 하라, 화남(和南)하여 삼가 두리 우노라,
또한 당시 복천사(福泉寺) 중수 시주인 명단 기록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권선, 시주인(勸善,施主人) 효령대군(孝寧大君) 수양대군(首陽大君) 임영대군(臨瀛大君) 금성대군(錦城大君) 영응대군(永膺大君) 화의군(和義君) 계양군(桂陽君) 의창 군(義昌君) 한남군(漢南君 밀성군(密城君) 수춘군(壽春君) 익현 군(翼峴君) 영풍군(永豊君)이 부왕(父王)이신 세종의 뜻을 받들어 대사께서 주석하시던 속리산(俗離山) 복천사(福泉寺) 중창불사에 시주(施主)를 하셨던 것으로 보이는 기록이 남아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또한 세종은 신미가 주석하시던 복천사(福泉寺)에 삼존불(三尊佛)인 아미타불 관음 세지의 불상(佛像)을 조성하고 왕실(王室)의 수륙재(水陸齋)를 모시는 원찰(願刹)로 봉하셨는데 이는 역대로 공맹(孔孟)의 가르침을 국시로 정하고 불교를 배척하고 탄압하던 시대에 국왕(國王)이 직접 승려가 머물던 사찰을 중수하시기 위하여 시주(施主) 보선 문(普權門)을 남기셨던 전래는 역사적으로 찾아보기 어려운 보기 드문 기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실록(實錄)의 기록에 세종 임금께서 대사(大師)가 주석하시던 복천사(福泉寺) 중창불사에 관련한 기록이 전해지고 있기에 실록의 기록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문종실록 1451년 문종 1년 9월 5일 경자 4번째 기사에 “안평 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이 명을 받고 속리산(俗離山) 복천사(福泉寺)로 갔다. 대개 이곳에 중 신미(信眉)가 살고 있었는데 세종(世宗)께서 이 중을 위하여 중창(重創)하게 하여 그 공역이 이미 끝났기 때문에 가서 보도록 한 것이다. 하였다는 이 기록은 세종께서 신미가 주석하였던 속리산 복천사(福泉寺)를 중창하여 주시기 위하여 불사(佛事) 시주 문(施主文)인 복천사 중수 보선 문(重修普權門)을 남기신 유래는 역사적으로 실록(實錄)에서 증명이 된 중요한 의미가 있는 기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역사에 기록된 혜각 존자(慧覺尊者) 신미대사(信眉大師)와 관련된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기록인 1447년 세종 29년 6월 5일 병인 2번째 기사에 “수온(守溫)의 형이 출가(出家)하여 중이 되어 이름을 신미(信眉)라고 하였는데, 수양 대군(首陽大君) 이유(李瑈)와 안평 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이 심히 믿고 좋아하여, 신미(信眉)를 높은 자리에 앉게 하고 무릎 꿇어 앞에서 절하여 예절을 다하여 공양하였다, 하는 실록의 기록과 1450년 세종 32년 1월 26일 임인 1번째 기사에 ”임금의 병환이 나았는데도 정근(精勤)을 파하지 않고 그대로 크게 불사(佛事)를 일으켜, 중 신미(信眉)를 불러 침실 안으로 맞아들여 법사(法事)를 베풀게 하였는데, 높은 예절로써 대우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수양 대군(首陽大君) 이유(李瑈)와 안평 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은 이 무렵부터 신미를 스승으로 모셨던 것으로 추정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종께서 승하(昇遐)를 하시기 두 달 전에 침실 안으로 신미(信眉)를 맞아들여 법사(法事)를 크게 베풀게 하고서 신미를 높은 예절로써 대우하였다는 기록을 참고(參考)로 하면 혜각 존자(慧覺尊者) 신미(信眉) 스님은 세종대왕(世宗大王) 문종(文宗) 세조(世祖) 안평대군(安平大君)이 대사를 스승으로 모셨던 것을 실록의 기록으로 추정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실록(實錄)의 기록인 1450년 세종 32년 2월 17일 세종 임금이 영응 대군(永膺大君) 집 동별궁(東別宮)에서 훙(薨)하신 이후 문종(文宗) 임금은 1450년 문종 즉위년 2월 22일 대행 왕(大行王)이신 세종(世宗)의 극락왕생(極樂往生)을 기원하는 불교식 장례의식(葬禮儀式)인 49재(齋)중 대자사(大慈寺)에서 초재를 지내고 2월 29일 북한산(北漢山) 진관사(津寬寺)에서 2재(齋)를 3월 7일 3재(齋) 3월 14일 4재(齋) 3월 21일 5재(齋) 3월 28일 6재(齋)등 다섯 차례의 재(齋)를 진관사(津寬寺)에서 모셨으며 4월 6일 대행 왕 세종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49재(齋)중 마지막 칠칠재(七七齋)를 양주 회암사(檜巖寺)에서 법사(法事)를 봉행을 하였다고 실록에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세종대왕의 사후(死後) 극락왕생(極樂生)을 기원하는 49재(齋) 법사(法事) 대령(對靈)을 증명하는 법사(法師)를 신미대사께서 주관을 하셨던 것으로 추정을 할 수 있는데 이는 세종의 49재(齋)를 봉행하였던 사찰이 모두 신미대사와 관련이 되어 있는 사찰이었기에 세종대왕의 사후(死後) 극락왕생(極樂生)을 기원하는 49재(齋) 대령(對靈)을 중명(證明)하는 법사(法師) 승려는 왕사(王師)로 불리어지며 세종께서 존중하고 공경하였던 신미대사께서 주관을 하셨던 것으로 이를 추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실록(實錄)의 기록인 1450년 문종 즉위년 4월 10일 기사에 “임금이 대행 왕(大行王) 세종의 명복을 위하여 이금(泥金)을 사용하여 법화경(法華經) 7권, 범망경(梵網經) 2권, 능엄경(楞嚴經) 10권, 미타경(彌陀經) 1권, 관음경(觀音經) 1권, 지장경(地藏經) 3권, 참경(懺經) 10권, 십육관 경(十六觀經) 1권, 기신론(起信論) 1권 등 불경(佛經)을 베껴 쓰도록 하였으며 안평 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이 임금에게 아뢰어 대자암(大慈庵) 무량수전(無量壽殿)을 헐어 버리고 극락전(極樂殿)으로 새롭게 하면서 단청(丹靑)을 중국에 가서 구해 사고, 등롱(燈籠)의 채옥(彩玉)을 구워 만들어 사치하고 화려함을 더하여 대행 대왕(大行大王)의 추복(追福)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빔* 을 빌기 위하여 대자암(大慈庵)을 대왕의 원찰(願刹)로 삼았는데 이때 신미(信眉)의 설(說)로써 대궐 안에 공장(工匠)을 모아 불상(佛像)과 불경(佛經)을 이룩하는 불사를 주관 하셨다고 실록에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다시 실록(實錄)의 기록인 1468년 세조 14년 9월 8일 태상왕(太上王) 세조가 수강궁(壽康宮) 정침(正寢)에서 훙(薨)하게 되시자 1468년 예종 즉위년 9월 21일 5번째 기사에 ”이때 중 신미(信眉) 수미(守眉) 학열(學悅) 학조(學祖)등이 매양 빈전(殯殿)에서 법석(法席)을 파하면 물러가서 광 연루(廣延樓) 부용각(芙蓉閣)에 거처하였는데 공급이 매우 넉넉하였고, 무릇 불사(佛事)가 있으면 승지가 혹시 왕래하여 묻기도 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세조 임금이 훙(薨)하게 되시자 창덕궁(昌德宮) 광 연루(廣延樓) 부용각(芙蓉閣)에 거처(居處)를 하시면서 세조(世祖)의 운구(運柩)가 발인(發靷)을 하기 전(前) 극락왕생(極樂往生)을 기원하는 시다림(尸茶林) 법사(法事)를 신미(信眉) 수미(守眉) 학열(學悅) 학조(學祖) 스님들과 함께 주관을 하셨던 것으로 추정을 할 수 있으며 다시 1469년 예종 1년 6월 27일 세조의 비 정희왕후(貞熹王后) 윤 씨(尹氏)가 세조를 추모하고자 광릉(光陵)에 있는 세조의 능침(陵寢)을 보호하기 위해 옛 부터 있었던 운악사(雲岳寺) 자리에 남양주 봉선사(奉先寺)를 중창한 뒤 신미의 제자들이신 학열(學悅)과 학조(學祖)에게 명하여 가서 제도(制度)의 공졸(工拙)을 살펴보고, 그대로 머물게 하였다는 이러한 기록을 바탕으로 살펴볼 때 존자(尊者)께서는 세종 문종 세조 임금 시대 당대(當代) 왕실(王室)에 영향력이 파격적(破格的)이었던 것으로 추정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446년 세종 28년 5월 27일 갑오 2번째 실록의 기사에 “소헌 왕후(昭憲王后)가 세종 28년 3월 24일 수양 대군(首陽大君) 제택(第宅)에서 훙(薨)하신 이후(以後)에 왕후(王后)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수륙재(水陸齋)를 대자암(大慈菴)에서 베풀게 하였는데 수양(首陽) 안평(安平) 두 대군(大君)이 내왕하며 이 일을 감독하여 성녕 대군(誠寧大君)의 집에서 금(金)을 녹이어 경(經)을 쓰게 하여 대군(大君) 제군(諸君)이 모두 참예하고 2천여 명의 승도(僧徒)들을 크게 모아 경(經)을 대자암(大慈菴)에 이전하여 법석(法席)을 베풀었는데 이때 소윤(少尹) 정 효강(鄭孝康)이 신미(信眉)를 칭찬하여 말하기를 "우리 화상(和尙)은 비록 묘당(廟堂) *나라를 다스리는 의정부* 에 처하더라도 무슨 부족한 점이 있겠는가." 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세종시대(世宗時代) 승려였던 존자(尊者)께서는 조정(朝廷)에서 그의 존재와 영향력이 평범하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는 기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기록에 혜각 존자(慧覺尊者) 신미대사(信眉大師)와 관련된 기사 내용이 1446년 세종 28년 5월 27일 자 기록으로부터 시작하여 1497년 연산 3년 7월 17일 마지막 기록까지 6대 국왕(國王)에 걸쳐서 약 51년간 67회에 걸쳐서 실록(實錄)에 기사 내용이 기재가 되어 있는데 이는 공맹(孔孟)의 가르침을 숭상하며 불교를 탄압하고 배척하던 조선사(朝鮮史)에서 승려 출신 기록으로는 전무후무(前無後無)한 보기 드문 횟수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혜각 존자(慧覺尊者) 신미(信眉)와 더불어 실록(實錄)에 당대(當代) 조선불교 삼대화상(三大和尙)으로 불려던 학조(學祖) 학열(學悅) 스님을 상수제자(上首弟子)로 그리고 축휘(竺徽) 학미(學眉) 설준(雪俊) 사지(四智) 성민(性敏) 지혜(智慧) 행담(行湛) 스님이 존자(尊者)의 문중 대표 제자들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1473년 성종 4년 4월 15일 을해 2번째 실록(實錄)의 기사에 “병조(兵曹)에 전지(傳旨)하기를, "충청도 보은현(報恩縣) 복천사(福泉寺)에 내려간 중 신미(信眉)와 학열(學悅)에게 말을 주도록 하라." 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 무렵에 한양(漢陽) 도성(都城)을 떠나 역마(驛馬)를 타고서 속리산(俗離山)으로 돌아오신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듬해 71세 무렵인 1474년~1477년 강원도(江原道) 평해(平海) (현, 경북 울진) 백암산(白巖山)으로 주석처를 옮기시어 머무르신 것으로 보이며 다시 1478년~1479년 백암산(白巖山)을 떠나 양양(襄陽) 낙산사(落山寺)와 오대산(五臺山) 상원사(上院寺) 광릉(光陵) ·봉선사(奉先寺)에 잠시 머무르시다 원각사(圓覺寺)를 걸쳐 속리산(俗離山) 복천사(福泉寺)로 내려오시어 안거(安居)를 하시다가 1480년 성종 11년 5월 경 존자(尊者)께서는 복천사(福泉寺)에서 승랍(僧臘) 63세 세수(歲數) 77세에 열반(涅槃)을 하셨는데 출가 본사(出家本寺)는 양주(楊州) 회암사(檜巖寺) 선사(先師)는 함허 득통(涵虛得通) 법명(法名)은 신미(信眉) 법호(法號)는 수암당(秀巖當) 시호(諡號)는 선교종 도총섭(禪敎宗都摠攝) 밀전 정법(密傳正法) 비지쌍운(悲智雙運) 우국 이세(祐國利世) 원융무애(圓融無礙) 혜각 존자(慧覺尊者) 이셨으며 존자(尊者)의 법신(法身)을 다비를 하자 영롱한 사리(舍利)를 남기시니 1480년 8월 사리를 모신 부도(浮屠)를 제자이신 학조(學祖) 스님 부도(浮屠)와 함께 복천사(福泉寺) 경내지(境內地)에 나란히 모셔져 있으며 진영(眞影)은 복천사(福泉寺)와 법주사(法住寺) 사내(寺內)에 안치(安置)가 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훈민정음창제의 주역 혜긱존자 신미대사 선양회 사업단장
목계 만암,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