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춤을 출 때까지… 소녀의 슈즈는 쉬는 날이 없었다
일본 교토 시내에서 차로 두 시간은 더 들어가야 만날 수 있는 작은 도시 ‘마이즈루’. 그곳에 ‘발레’를 무척 사랑하는 한국인 소녀가 살고 있었다. 소녀는 매일같이 꿈을 꿨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춤을 추는 발레리나가 되는 꿈을. 열 살, 열다섯 살, 스무 살…. 소녀의 발레슈즈는 하루도 쉬는 날이 없었다. 그리고 꿈은 마침내 이뤄졌다. 일본 무용계의 주역 발레리나 그리고 한국을 대표하는 국립발레단의 수석 무용수로. 최태지 국립발레단장(52세)의 얘기다. 요즘 그는 또다시 꿈을 꾸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 ‘국립발레학교’ 를 세우겠다는 것이다. 어릴 적 소녀의 설레는 눈빛 그대로 그가 ‘두 번째 꿈’ 얘길 들려줬다.
▲말괄량이 소녀, 발레를 만나다
난 2남 2녀 중 막내였어요. 위로 오빠 둘, 언니가 하나 있었죠. 부모님은 언니·오빠겐 공부, 운동 등 이것저것 많이 시키셨지만 막내인 내겐 예외였어요. 그저 잘 놀고 건강하게 자라길 바라셨죠.
덕분에 무척 자유로운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어요. 대단한 개구쟁이에 말괄량이였어요. 유치원 다닐 무렵부터 집 앞 영화관에서 혼자 영화를 보곤 했어요. 너무 어려 영화 내용은 깊이 이해할 수 없었지만, 오드리 헵번이나 비비안 리 같은 여배우들을 보며 ‘아름다움’ 에 대해 조금씩 눈을 뜨기 시작했어요.
초등학교 3학년 때였어요. 어머니가 언니와 날 도시에 하나뿐인 무용연구소로 데려가셨어요. ‘발레’ 란 걸 가르쳐주는 곳이라고 했어요. 예쁘고 세련된 선생님이 우릴 맞아주셨어요. 영화 속 여배우들처럼 아름다운 모습이었죠. 발레의 뜻도 몰랐지만 왠지 발레를 하면 선생님처럼 멋있어질 것 같았어요.
정말 열심히 발레를 배웠어요. 발레 선생님도 놀랄 정도였죠. 공부·피아노·플루트는 언니보다 못했지만 발레 실력만큼은 언니를 훌쩍 뛰어넘었어요. 태어나 처음으로 칭찬도 받았죠. 예쁜 발레복을 입고 거울 앞에서 춤을 추면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황홀했어요. 선생님이 좋아 무작정 시작한 발레였지만 결국 발레 자체의 매력에 흠뻑 빠지게 됐답니다.
▲여행 가방에 발레의 꿈을 싣고
발레를 배운 뒤 매년 봄·여름방학만 되면 커다란 가방에 짐을 쌌어요. 도쿄에 있는 무용연구소 본부로 합숙 훈련을 떠나기 위해서였죠.
합숙 훈련엔 나 말고도 오사카·교토 등 다른 도시에서 발레를 배우는 많은 친구가 참가했어요. 그들을 만나면서 자극을 많이 받았죠. 그래서 합숙을 다녀온 후엔 더 열심히 연습에 매달렸어요. 레슨이 없는 날에도 혼자 연습실을 지켰어요. ‘내일은 이런 춤을 춰야지’ ‘이런 동작을 연습해봐야지’ 하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했죠.
나중엔 방학 때뿐 아니라 주말에도 도쿄로 향했어요. 비행기나 기차를 타고 혼자 도쿄까지 가서 수업을 받고 돌아오곤 했죠. 힘든 줄도 몰랐어요. 내겐 더없이 행복한 여행이었거든요. 집에 돌아온 후엔 다음번 도쿄 훈련 계획부터 세웠으니까요.
공부도 열심히 했어요. 부모님이 발레를 못하게 할까 봐서요. 그러다 보니 학창시절 친구들과는 많이 어울리지 못했어요. 외롭기도 했지만 하는 수 없었죠. 도쿄 친구들만큼 발레 수준을 높여야겠단 생각에 잠시도 쉴 수 없었어요. 남들이 미련하다고 할 만큼 열심히 했어요. 그 정도로 발레가 좋았어요.
▲ ‘오오타니 야스에’ 에서 ‘최태지’ 로
사실 자라면서 내가 한국인이란 걸 깊이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어요. 일본 땅에서 태어나 일본말을 썼고 일본인 사이에서 ‘오오타니 야스에’ 로 불리며 살아왔으니까요. 그런 내가 ‘한국인’ 임을 깨닫게 된 결정적 사건이 있었답니다.
대학 3학년 때였어요. 일본 문화성에서 매년 발레 장학생을 뽑아 외국 유학을 보내줬는데, 발레협회 선생님이 날 장학생으로 추천해주셨어요. 국비로 프랑스 유학을 가게 된다니…. 정말 기뻤죠. 그런데 확정 직전 그만 떨어지고 말았어요. 국적이 ‘일본’ 이 아닌 ‘한국’이란 게 탈락 이유였죠. 그때 깨달았어요. ‘아, 내가 한국인이구나!’ 왠지 가슴이 두근거렸어요. 돌이켜보면 그때 장학생이 되지 않은 게 오히려 다행스럽게 느껴집니다. 그 일이 없었다면 지금 이 자리의 나도 없을 테니까요.
결국 자비를 들여 프랑스 유학을 다녀왔어요. 다시 일본으로 돌아왔더니 주변에서 그러더군요. 한국에 ‘국립발레단’ 이란 게 있다고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저절로 끌렸어요. 그게 인연이 돼 국립발레단 무대에 서게 됐고 1987년 국립발레단 정식 단원으로 활동하며 한국에 뿌리를 내리게 됐어요.
▲ ‘국립발레학교’ 가 생기는 그날까지
1996년부터 6년간 국립발레단장을 지내며 가슴속에 새로운 꿈이 자라기 시작했어요. 2008년 다시 발레단을 맡으면서부턴 그 꿈을 현실로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이 섰지요. 우리나라에 ‘국립발레학교’ 를 만들겠다는 것. 그게 내 새로운 꿈입니다.
국립발레단이 있으면서도 발레학교 하나 없는 나라는 우리나라뿐이란 사실, 몰랐죠? 세계적으로 유명한 발레단이 존재하는 건 재능 있는 아이들을 어릴때부터 뽑아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발레 학교가 있기 때문이에요. 한국 발레는 이미 세계적 수준에 올랐지만 더 발전하려면 반드시 국립발레학교가 필요합니다.
기숙사가 있는 곳에서 발레를 배우며 일반 중·고등학교 교과과정도 똑같이 공부할 수 있는 발레학교를 세우고 싶어요. 그렇게 되면 비싼 사교육비 때문에 발레를 포기하는 아이들도 없겠죠? 재능 있는 아이들은 더 빨리 무대에 설 수 있을 테고요. 또 발레를 배우다가 너무 살이 찌거나 키가 자라지 않아 발레를 그만둬야 하는 아이들도 좌절하지 않고 일반 대학교로 진학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에요. 발레뿐 아니라 음악이나 연극과 같은 다양한 예술도 가르치면 좋을 것 같아요. 요즘 난 그런 생각만으로도 배가 부르고 행복해진답니다.
>>최태지 단장은…
1959년 일본 교토에서 태어나 열살 때인 1968년 가이타니 발레 아카데미에 입문해 1980년까지 무용수로 활동했다. 1982년 프랑스 프랑게티 발레 아카데미와 1987년 미국 조프리 발레 스쿨을 각각 수료했다. 1987년 한국으로 와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지도위원 등으로 활약했다. 1996년엔 국립발레단 사상 최연소 단장에 임명, ‘해설이 있는 발레’ 등을 선보이며 발레의 대중화에 앞장섰다. 현재 국립발레단 단장 겸 국립발레단 부설 발레아카데미 교장으로 근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