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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계명 스크랩 목사안수와 믿음의 길(여성안수의 문제를 중심으로)
제자 추천 0 조회 62 14.10.24 15:2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목사안수와 믿음의 길

(여성안수의 문제를 중심으로)

평택성서교회 최영우 목사

 

 

서론

 

여성안수 문제에 대해 오늘의 교회가 직면한 상황은 다음과 같은 신문 기사를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다:

 

조지아 침례교 여성목사 금지 논란 재 점화 총회 측, 해당 교회 제명까지 검토 중

미국조지아침례교총회(GBC)에서 여성목사 인정 문제를 놓고 또 한 차례 논란이 일고 있다. 애틀랜타저널컨스티튜션(AJC)에 따르면 이번 논란은 애틀랜타 드루이드힐스침례교회에 2008년 미미 워커 목사(52)가 공동목사로 부임하면서 시작됐다. 2003년 목사 안수를 받은 미미 워커 목사는 필리핀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2008년부터 남편인 그래함 워커 목사와 함께 이 교회의 공동목사로 재임해 왔다. 여성목사를 인정하지 않는 GBC는 지난 16일 상임이사회를 열고 드루이드힐스교회를 침례교협의회에서 제명하기로 결정하고 오는 11월 연차총회에서 최종 확정하기로 했다. GBC드루이드힐스교회가 교단 헌법 21항에 규정된 협력 의무를, 여성목사를 공동목사로 재직케 함으로써 위반하고 있다고 지적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오는 11월 연차총회에서 드루이드힐스교회의 제명이 확정되면, 교회로부터 회비를 받지 않는 대신 교회의 대표자도 총회에 참석해 발언권을 행사할 수 없다. GBC는 테네시 주 내쉬빌에 본부를 두고 있는 남 침례교회의 41개 지부 중 하나로 산하에 3,600여 개의 교회가 활동하고 있다.

 

시대에 거스르는 결정, 물러나지 않겠다.” 주장

 

드루이드힐스교회의 미미 워커 목사

논란의 중심에 선 미미 워커 목사는 “GBC가 시대에 거스르는 결정을 내린 것 같다“1914년 세워진 이 교회를 떠날 생각이 전혀 없다고 의지를 확고히 했다. 공동목사이자 남편인 그래함 워커 목사도 “GBC가 드루이드힐스교회를 제명시킨다면 가만히 있지 않고 조치를 취하겠다.”고 말했다. GBC 총 디렉터 로버트 와이트 목사는 침례교는 신앙과 여성목사에 관한 조항을 철저히 따르고 있다고 말하며 목회자를 제외하고, 사역을 섬기는 여성에 대해서는 전혀 반대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드루이드힐스교회 교인 중에는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라는 반응도 있다. 6년째 교회를 섬기고 있는 짐 롸이트 씨는 미미 목사는 교회에서 큰일을 잘 감당해 내고 있다. GBC의 이런 결정은 굉장히 어리석은 것이다. 여성도 남성처럼 교회를 이끌 수 있다고 말했다. 킴벌리 찰스라는 교인도 멀지 않은 미래에는 여성도 목사로 인정받을 수 있게 하겠다.”며 워커 목사를 지지했다. 미미 워커 목사는 장로교나 감리교에서 여성들이 자유롭게 사역하는 것을 보고 있다. 여성들이 중심 역할을 감당하면서 질적으로도 향상된 사역을 해나가고 있다. 여성목사 인정 문제를 둘러싼 논란은 성경을 해석하는 시각이 다르기 때문이라며 갈라디아서 328(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말씀을 내세웠다. 에모리신학대학원 데이빗 키 디렉터(침례교연구프로그램)대부분 여성목사 인정을 하지 않을 경우, 디모데전서 212(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을 제시한다.”라며 나는 여성목사를 인정하지 않는 GBC 의견에 반대한다. 여성들이 사회적 측면에서 많은 일을 감당하는 만큼, 교회에서의 영향력도 커지게 됐다. 여성목사의 지위 향상이 GBC 현 리더십을 위협하는 요소로 작용했기 때문에 이 같은 결정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그는 예를 들어 드루이드힐스교회는 한 때 침례교를 대표하는 루이 뉴턴 목사가 이끌던 교회다. 50~60년 대 미스터 뱁티스트라고 불릴 정도로 유명했던 목회자 루이 뉴턴의 설교단을 잇는 목사가 여성이라는 사실은 침례교 자체에 큰 변화를 요구하는 일이다고 말했다. 30년 동안 여성목사 허용 여부와 싸워온 신디아 해일 목사(호프크리스천교회)는 현재 5,000명이 출석하는 대형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여성목사다. 그는 여성목사가 설교하는 것이 비성경적이라고 믿는 것은 끊이지 않는 교계 이슈이며, 우리 교인들이 늘 부딪히는 질문이기도 하다성경 구절을 인용하며 여성목사를 반대하지만, 역사적 측면으로 봤을 때 당시 여성이 남성과 동일한 위치가 아니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고 말했다.

 

GBC 소속 한인목회자들, “서로 존중하는 태도 필요

이에 GBC소속 한인목회자들의 의견을 들어봤다. GBC 한인선교사인 서 용남 목사(드림교회 담임)남 침례교 소속 모든 교회가 교단 적으로 여성목사를 인정하지 않고 있지만, 개교회적으로 여성을 권사로 세우거나, 목회자로 인정해 세우는 교회가 있기도 하다여성목사를 세우는 일을 놓고 논쟁을 하는 일은 어떤 것이 성경적인가라는 관점에서 보아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성경과는 다르나 내가 좋아서, 아니면 우리 교회에 좋으니까 라는 생각보다 무엇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지아한인침례교회협의회장인 김 상민 목사(훼이트빌침례교회)남 침례교단은 성경을 바탕으로 모든 규칙을 세우고, 철저히 이행해 나가는 교단이라며 개인적으로도 여성목사를 세우는 것을 반대한다. 성경이 말한 이외의 것을 임의로 해석해 변형시킬 수 없다. 여성목사안수를 성경은 허용하고 있지 않다고 힘주어 말했다. 서 목사는 또 침례교회의 특성은 교회를 구성하고 섬김에 있어 신약성경이 무엇을 말하는가에 가장 큰 비중을 두고 있다. 복음의 본질 문제가 아니라면 신약교회라는 인식을 가지고 서로를 존중하는 태도가 중요하며, 복음 증거와 영혼 구원을 위하여 협력하는 문제를 놓고 기도해야 해야 한다GBC 여성목사 인정 문제를 둘러싸고 야기될 수 있는 논란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서로를 존중하는 태도가 필요할 것이라고 피력했다. 오늘날 여성의 신분상승과 여성안수문제가 맞물려서 갑론을박을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진보뿐만 아니라 보수를 자처하는 크고 작은 교단들이 여성안수문제의 고민들에 관하여 이미 열고 가는 쪽으로 선택하고 있으며 그것이 여러 교단의 쟁점으로 가속도가 붙어가고 있다. 심지어는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하는 이들도 늘어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상의 기사는 오늘날의 교회가 여성의 신분이 사회적으로 많이 신장되었기에 사회변화의 흐름 속에서 여성의 리더십이 요구되고 있다는 측면과 여성 목사안수가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한 인본주의의 발상이며 하나님의 신권에 대한 도전이라는 비평적 측면이 공존하는 상황에 직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국 교회도 예외가 아닌데 예장의 합동, 고신, 고려, 개혁의 일부와 합신, 침례교단, 그 외에 다수의 보수교단들과 합동정통(백석)이 현재까지 여성안수를 불허하고 있고 기감, 기장, 통합, 피어선, 기하성, 기성, 그리고 그 외에 크고 작은 교단들 다수가 이미 여성 안수를 허용하고 있다. 이것은 교회(단체로서)가 오늘의 시대가 요구하는 요청들을 반드시 고려해야만 하며, 나아가 이일에 관한 명쾌하고도 정확한 신학적인 정리를 해야 하고, 매 목회자는 실질적 목회의 현장에서 어떠한 신앙의 답안을 제시해야 할 것인지를, 이 시대를 향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고민하고 정의하여 논란을 잠재우고 신앙인들의 짐을 덜어주어야 할 시점에 도달한 것을 의미한다.

 

신앙은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일을 순종하여 따르는 것인데 이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지 못해서는 안 된다. 혹 하나님께서 이제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신앙의 지식과 경험을 벗어난 방법으로 지시하실 지도 모르는 일이기에, 만에 하나라도 우리가 오해하고 있다면 이는 실로 낭패가 아닐 수 없다. 우리가 믿는 성경에서도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 사이에서 그러한 오해로 인한 갈등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어느 한쪽이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고 있을 수도 있으나 모두가 다 오해하고 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일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그러나 너무 신중하려다가 게으름과 방종으로 나타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성안수와 관련한 논의에는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전제하고 확인하여 그것으로부터 더 늦기 전에 논의가 시작되어야 할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어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관련한 다양한 토론과 논쟁의 장을 확인하여 본 결과로는 정직하게 하나님의 뜻을 묻고 확인하는 과정을 온전히 통과하지 못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저들의 생각과 주장들이 지금 이 시대를 향하시는 틀림없는 하나님의 뜻인지를 분명하게 확인하는 절차를 밟은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기게 하는 것이다.

 

개 교회주의를 존중하면서도 신앙노선은 자타가 인정하는 보수개혁주의의 자랑스러운 신앙흐름을 가지고 있는 한국성서선교회 산하 교회들과 교단을 표방하지 않는 초교파를 지향하는 한국성서대학교 내부에서는 정체성에 따라 여성안수 문제와 관련한 논의조차도 반겨하지 않거나, 여성안수와 관련한 논의는 그 논의 자체가 하나님께 불경스러운 일이며 비 신앙적이고 인본주의적인 생각이라는 믿음이 지배적인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우리 선교회가 가지고 있는 불허의 입장도 이제껏 그래왔던 것이라는 이유만으로는 정당성이 확보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이 시대에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 확인하여 세상과 교계에 제시해야 할 책임이 있다 할 것이다. 만에 하나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고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며, 더 나아가 우리 한국성서선교회를 통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심으로 한국교계와 세계교계를 향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밝히 전하도록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신지 여부도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는 쉽지 않은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다 함께 기도하고 논의함으로써 이 시대를 짊어지고 가야하는 교회의 사명에 하나님께서 무엇을 요청하고 계시는지를 선명하게 알고, 때를 따라서 말씀하시는 그 명령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가야 할 것이다. 때를 따라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행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을 거역함이 아니라고 누가 확신할 수 있을 것인가? 박윤선 목사님이 평소에 강조하시던 말씀이 있다. “성경을 모르면 목사도 별수 없이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자신도 모르게 하는 거짓말을 피할 수가 없다는 말씀일 것이다. 이 말이 우리들의 신앙양심에 각성제의 역할을 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는 믿음이 옳다고 주장하기에 앞서 서로를 충분히 이해하고 대변할 수 있는 사랑으로 합력해 나갈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하고 귀한 결정을 열매 맺을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이 일의 준비단계에서 우리들이 분명히 해야 할 일은 우리들의 싸움이 교회내부의 분쟁이 아니요,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사탄 마귀와의 영적전쟁이라는 사실이다. 더 나아가서 우리들의 논의에서 이 시대를 향하는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결과물을 찾는다면 이는 아직도 이일로 고민하고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뿐만 아니라 이미 시행하고 있는 교회들에게도 더 없이 좋은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시작해야 한다.

 

여성안수문제와 관련하여 발제자의 개인적인 의견을 먼저 밝혀두는 것이 진행 중에 생길 수 있는 오해의 소지를 방지해 줄 것으로 생각하여 개인의 의견을 먼저 밝히고자 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순종의 삶을 살지 않을 때면 다른 것들을 사용하셔서 그 일을 진행 하실 뿐 아니라 불순종한 자신의 백성들을 깨우시는 일을 병행하셨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볼 때, 오늘날의 목회자들과 현존하는 교회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그 답변이 될 만한 그림자를 발견할 수 있다고 본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오늘날 교회의 타락상이다. 이는 이미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며 그 타락의 정도가 점점 극에 달하고 있다. 이러한 교회의 현실은 교회 구성원들이 세상 가운데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담당하여 하나님의 현존하심을 증거하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뿜어내어 복음의 통로가 되어야 하는 교회의 직임을 뒤로하고 있음에 기인한다. 오히려 교회의 힘을 이용하여 세속적인 일에 유익을 취하려하므로 믿지 않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교회가 손가락질을 당하게 하고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목사가 되려는 자들도 자신들의 개인적인 욕망과 출세를 목적으로 안수를 받으려하는 흐름이 교회 안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사람들을 무분별하게 목사로 안수하여 세우므로 그런 목사들이 세상의 직업적인 길의 하나로 목회를 선택하며, 살아가는 모습 속에서 세상은 더 이상 저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바라볼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이는 세상적인 성공방법을 교회에 도입하여 자신들의 세력을 강화하고 확산시키려는 무분별한 노력의 산물이기도하다. 불법과 무자격이 서로의 필요에 따라 합작하여 만들어낸 결과이기도 한 것이다. 이 일은 우리들이 무관심한 동안에 이러한 결과들이 나타난 것이며 우리들의 책임도 공존하는 것이다.

 

여성안수의 문제와 관련하여 많은 이들이 이 일의 정당성을 성경에서 찾으려 애쓰고 있는 모습을 본다. 그러나 정작 성경은 이일에 선명한 답을 주고 있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찬/반의 성경을 대입하는 논리가 그 끝을 알 수 없도록 평행선을 달리고 있음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안수의 문제가 인간적인 차원에서 해결 될 일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그 이유는 이렇다. 만약에 여성이건 남성이건 불문하고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확실한 소명을 받았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하면 그 누가 이일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일에 있어서 소명의 진위여부는 하나님과 당사자 사이에서 하나님의 개입이 있을 것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그 이상은 인간의 영역이 아님을 우리는 겸허히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다. 만일 이 일에 누군가가 열정적으로 뛰어들어 하나님의 이름으로 심판하거나 정죄하려 든다면 그 일로 인한 하나님의 개입이 그에게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성안수와 관련하여 발생하는 모든 문제는 전적으로 개인에게 부여하시는 하나님의 소명여부에 달린 것으로 보인다. 본인이 거짓된 소명으로 안수를 받게 된 것이라면 그에 합당한 하나님의 개입하심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분명하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일에는 남·녀의 차별이 임의로 존재할 수 없다는 점도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지금까지의 역사적인 진행이 당연한 하나님의 뜻이므로 시대적인 상황과 변화에 따라 반응하지 않아야 한다는 입장과 시대적인 변화에 따른 효과적인 대응이 변화하는 시대의 요청에 반응하시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입장의 주장들이 팽팽하게 대치되고 있다.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고서 하는 주장인지를 상반하는 주장의 주체인 개개인이 하나님과 교회 앞에서 책임 있게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할 것이다. 이 일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선명하게 알고 따르는 준비된 자를 주의 일에 사용하시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뜻을 함부로 훼손한자들이 하나님의 일에 사용될 수 없으며 그 엄위하신 책망을 피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목사안수와 관련하여 우리믿음의 사람들이 선택해야 할 최선의 방법은 무엇인가? 현재 이 일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자신들이 하나님과 교회 앞에서 얼마나 정직하고 성실하게 선택하려고 하는가의 여부에 달려 있다. 우리는 목사안수와 관련한 우리의 직임에 최선을 다하고자함에 있어서, 첫 번째로, 목사안수의 전통이 어디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어떻게 계승되어 온 것인지를 알아야만 할 것이다. 그것이 오늘의 안수문제와 깊이 연결되어 있으며, 이 일에 대한 확인이 선행되어야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방향으로 문제를 풀어갈 기초를 확인하는 것이고 첫 단추를 여는 것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남녀를 구분하기에 앞서서 안수를 원하는 자가 진실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종임에 틀림이 없는가를 가려야만 할 것이다. 특별히 조심해야만 할 것은 우리의 눈에 비추인 그의 외적인 형상이 올바른 판단을 흐리게 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 영적인 판단에 지장을 주지 않아야만 한다는 점이다. 이렇게 할 때에 여성안수의 문제와 맞물리는 분쟁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그의 일을 맡기신 직임 자들에게 친히 역사하셔서 감동감화하시고 알게 하시는 은총이 하나님의 섭리를 가로막는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시리라는 사실을 우리는 믿음으로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면한 여성안수문제에 있어서 여성안수를 위한 신청을 인허하여 그의 소명여부를 판단할 것인가의 문제는 남겨지게 된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에 대한 허용여부는 어떤 방향으로 결정이 되든지 장차 우리 선교회에 세워질 하나님의 택하신 종들을 발굴함에 있어서 좀 더 면밀해지는 좋은 역할을 담당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있다. 이일은 목사안수에 있어서 한층 더 면밀하고도 선명한 소명을 안수대상자 개개인에게서 확인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현재와 같이 남성에 한하여 안수를 할 경우에도 이와 같은 검증과 확인절차는 보다 분명히 할 필요가 있고, 그 심사과정도 보다 깊은 성경연구와 교회역사의 연구로 보강하여 재고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와 아울러 이미 목사로서 안수를 받고 직임을 수행하고 있는 현직 목사들도 거룩한 고민을 공유해 볼 이유가 있다할 것이다. 이 일에 우리는 우리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직임에 대하여 거룩한 질문으로 묻고 답해보아야만 할 것이다. 또한 그에 따르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대하여 정직하고도 솔직하게 응답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도 아무문제가 없으리라고 기대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역에 귀하게 구분되어 사용되기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적인 현장에의 개입을 무시하거나 믿지 못하여 인위적인 방법을 선택하게 된다면 이일로 우리는 하나님의 책망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안수문제와 관련한 역사적인 소고를 통하여 우리들의 의견에 참신하고도 의미 있는 지평이 열리고 형성되기를 바라면서, 목사안수의 교회전승을 알아봄으로서 그에 따르는 좋은 선택에 도움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본론

 

1. 목사안수(Ordained Ministry)의 기원

 

A) 목사안수(Ordained Ministry)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땅에서 사역하신 것에 근거해서 이루어지는 교회 공동체의 모든 사역들 중에서 구별된 한 가지 사역을 말하는 것이다. 목사안수(Ordained Ministry)The Ministry of Jesus Christ에서 시작하여 the ministries of the apostles, 다음에는 the ministries of charisma으로, 그리고는 the ministries of believers와 함께 the ministry of ordained으로 나아가는 역사적 과정에서 형성된 교회의 사역 중 특수사역에 속한다. 그러나 오늘까지 다양한 교회전통에 따라서 그 본질과 직제를 달리하는 목사안수(Ordained Ministry)가 교회의 직제로서 자리 잡는 과정은 긴 역사와 더불어 다양한 전통을 거쳐 왔다. 그리고 아직도 다른 전통을 가진 교회공동체들 사이에 역사적으로나 신학적으로나, 직제 상으로 일치된 내용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목사안수(Ordained Ministry)에 관련한 사역의 본질과 기원, 그리고 조직과 명칭, 각 교회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입장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B) 목사안수(Ordained Ministry)와 그에 관계된 직제와 명칭들의 기원과 유래에 관한 지금까지의 연구는 역사적으로 두 가지이다.

1) 구약을 중심으로 하는 유대교와 synagogue적 전통. 2) 로마의 정치, 종교적 pagan collegia 전통에서 교회의 예전과 직제들이 발전해 왔다고 보는 것이다. Ministry에 해당하는 희랍어 디아코니아(diakonia)는 또 다른 희랍어 레이투르기아(leitourgia)와 함께 일반적인 service(봉사)를 표현하는 말이다. 여기에는 성직자와 평신도사역에 구별이 없었다.

 

C) 목사안수(Ordained Ministry)의 기원에 관한 역사적 재료들을 연대기적으로 고찰해 보는 것도 유익하다.

(1) The Didache(1st/2nd century, Syria);

16장으로 나누는 이 가장 초기의 문서의 15장에서 bishopdeacon의 임명에 관한 내용이 있다. 하르낙(Adolf v. Harnack)에 의하면 이 문서는 초기 charismatic 지도자들과 선출된 bishopdeacon들이 조화롭게 사역을 하다가 전자가 쇠퇴하고 후자가 교회의 직제로 변천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2) Didascalia Apostolorum(c. 230. Syria);

26장으로 나누는 가운데 4-11장에서 bishop의 의무와, 자격들을 다루고 있다. 저자도 bishop일 수 있는데 그는 기독교와 구약의 율법의 관계에서 교회직제에 관하여 설명하고 있다

(3) Apostolic Church Order(c. 300, Egypt);

이 작은 책자는 총 30장으로 되어 있는데 15-30에서 bishop, presbyter, deacon의 선출과 임명에 관한 규정을 담고 있다

(4) Apostolic Tradition(c. 215, Rome); 로마가톨릭의 주장근거

로마의 히폴리투스(Hippolytus of Rome)가 저자라고 추정되는 이 책자는 bishop, presbyter, deaconordination에 대한 지침과 그 예식에서 각각의 직분자를 위한 기도문을 담고 있다

 

D) 신약성서교회에서는 바울에게서도 마찬가지로 charismaministries 사이의 구별이 없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공동체의 사역자들에게 신분적으로 사도계승(succession/ diadoche)을 한다는 개념도 없었다. 다만 있었다면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역의 연속성(continuity/ 딤후 2:2..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이 있었다.

 

E) A.D. 96년경에 고린도교회에 분란이 일어났다. 그때에 로마의 bishop이었던 클레멘트(Clement)가 편지를 보내서 분열을 해결하려고 했다. “이렇게 초청받지 않은 다른 지역의 지도자가 한 교회의 문제에 관여하는 것은 로마교회와 고린도교회 사이에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이것은 또한 지역 교회들이 상호협동적(collegiality)이었다는 것과 bishop(주교/감독)이 가지고 있는 사도들로부터의 계승(succession)’에 근접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편지에서 클레멘트는 liturgical order라는 개념을 구약의 대제사장을 bishop으로, 레위인을 deacon과 비교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 고대의 제사장(priests/i`ereij)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초대교회에서는 히에류스(i`ereu,j)는 말을 중세기 로마교회에서 말하는 주교 다음의 presbyters/신부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된 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Hirereus”는 베드로전서 2:9의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뜻에 따라 모든 평신도(라오스<lao,j>)사용했기 때문이다.

 

F) 신약성서를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첫 번 예수를 따른 무리들(follower)에게 있어서는 예수의 사역을 본받아 하는 service/ministry가 우선이었지 'order/ordo', 즉 신분상의 status에 대해서는 문제의식조차 없었다고 할 수 있다. ‘Order’라는 말은 언제나 어떤 조직이나 기구 또는 사회나 국가에서 필요한 직제, 직분, 또는 위치 등을 의미했다. 그리고 여기에서 파생한 ‘to ordain’이라는 원래 뜻은 손을 내밀어 투표하는 것을 가르쳤다.

Ordo는 로마의 세습적인 원로원 의원을 지칭할 때에 사용했던 용어로 이렇게 세속적으로 사용되었던 ‘ordo’, ‘order’에서 ordination, 목사안수(Ordained Ministry)라는 용어가 교회 공동체의 제도 안에 자라잡기 시작했다. 이것은 교회 공동체가 사회적 구조와 같은 구조를 가지기 시작하면서 2세기경부터 ‘order’(In the Latin speaking churches)라는 말로 주로 status를 지시했고 그 신분에 임하는 예식으로 ‘cheirothesia’ (laying on of hands, in the Greek speaking churches)라는 의식과 더불어 등장하기 시작했다. 여기 200년경에 이르러 ‘Apostolic Tradition’에서 bishop, priest, deacon을 위한 ordination service안수례와 함께 교회의 예전으로 등장한다. 가톨릭에서는 ‘Ordinatio means incorporation into an Ordo’로 보아서 신분상의 특권으로 자리매김을 한다.

 

 

2. 목사안수(Ordained Ministry)의 번역 문제

 

목사안수/목사 안수식이라고 흔히 번역되어 사용하는데 번역상의 주의가 필요하다. 교회에서 흔히 말하는 안수(문자 그대로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는 일)하는 것과 ordination service에서 예전의 일환으로 행하는 안수(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는 일)는 그 형식에 있어서는 같은 행위이지만 그 의미는 다르게 이해되어야 한다.

 

A) 가톨릭교회에서는 ordination service는 단순한 예식이 아니고 성례전(sacrament)이다.

가톨릭교회의 예전으로는 ordinand안수례를 통하여 어떤 직분에 installation 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새로운 차원의 ‘order’에 들어가는 신분상의 차이를 가지는 것이다. 가톨릭교회는 안수례를 행함으로 ordinand에게 일반적인 질서나 직제나 직분의 위치에 놓는 것이 아니라 ‘divine order’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영역에 속하도록 하는 것이다. ‘divine order’‘natural order’에 반해서 ‘supernatural order’를 의미한다. 이것은 존재론적으로 특수한 ‘status’를 가진다는 뜻이다. 가톨릭교회에서 주장하는 ‘divine order’ ‘status’라는 뜻으로 Ordination service서품식(敍品式)’으로 번역하여 사용하고 있다.

 

B) 개신교회 전통에서는 Ordination service라는 같은 단어를 사용하면서 목사 안수식으로 통상 번역하여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목사를 세우는 ordination은 단순한 안수예식이 아니다. 목사안수(按手) 예식(ordination service)에서 행하는 안수(按手)(the laying on of hands)는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는 형식은 같지만 다른 예식에서 행하는 안수례의 내용과 의미가 다르기 때문에 안수목회/ 안수식이라는 말에 문제가 있다. 여기서 안수라는 말은 분명히 교회 안에서 행하는 단순한 ‘laying on of hands’와는 구별되는 것이다. 물론 목사 안수식에서도 ‘laying on of hands’라는 예전을 행하고 있다. Ordination service는 단순한 안수례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개신교 전통에서는 목사 안수식을 대신해 단순한 안수례와 구별되는 적절한 용어를 찾을 필요는 있다. ‘교직안수라고 번역하기도 하는데 역시 안수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가톨릭교회에서 사용하는 사제서품식(Ordination service)을 대신하여 개신교회에서는 목사 서품식 아니면 목사 서임(敍任)(Ordination service/ not the installation service)으로 명명하는 것은 어떨지 제안해 본다.

 

 

3. Ordination service에서 행하는 안수(the laying on of the hands)’의 의미

 

앞서 보았듯이 Ordination Service에서 행하는 안수는 교회공동체 안에서 행하는 목회적 안수(ministerial meaning of the laying on of hands)와 다른 신학적 뜻을 가지고 있다.

 

A) 성서로 살피는 the laying on of the hands

구약에서는,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여 그 직무와 그에 필요한 영적인 능력을 위임하는 것에서 볼 수 있다(31:7-8). 제사장들을 성별(consecrate)할 때와 레위인을 성별할 때에 안수(8:10)하는 전통이 있다. 신약에서는, 바울서신에서는 ordination에 대한 언급이 없다. 대신 카리스마타에 따른 여러 가지 사역(ministry/service)과 그에 대한 laying on of hands가 있을 뿐이다.

목회서신에서는, 직제신학이 등장한다(위의 책) 디모데전서 4:14 장로의 회에서 안수(laying on of hands) 디모데후서 1:6 바울의 안수(laying on of hands) (Hans Kueng)에 의하면 장로의 회에서라는 말은 공동체적인 규칙에 의한 것이고 바울사도에 의한 것은 사도적 계약이 적용되는 것으로 볼 수 있음(582) 히브리서 신학은 그리스도께서 구약의 대제사장직을 성취했고, 이로써 구약전통의 제사직과 그 예물을 폐지시켰다고 보고 있다(8-9).

목회적인 일반적인 안수(laying on of the hands)에 대해서는, 구약에서는 제사에 드릴 제물에 안수하는 것(8:14 등등), 환자와 축복을 위해 특별한 경우에 안수하며 기도하는 것(19:13 등등) 경우에 행했다.

 

B) Ordination service에서 행하는 안수례의 의미:

1) Sign of empowerment of the Spirit 2) Setting apart by an authorized person 3) Continuation of the apostolic witness and Jesus Christ in the church ministry 거기에서 손을 머리에 얹고 기도하는 것은 성령을 통하여 초월적 능력이 전가된다는 성서적/역사적 제스처(gesture)이다.

 

 

4. 목사안수(Ordained Ministry)와 만인 제사장직(priesthood of all believers)

 

오늘날에 와서는 개신교회에서는 목사안수(Ordained Ministry)를 가톨릭교회의 전통과 달리 목회사역을 일종의professionalism 보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목회를 전문직이라고 하는 것은 신학적으로는 타당하지 않다. 방편적으로 생각해서 목사안수(Ordained Ministry)professional service로 본다면 만인 제사장직은 general service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언제나 목사안수(Ordained Ministry)도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여러 가지 ministry/service 중의 한 가지 ministry일 뿐이다 그리고 목사안수(Ordained Ministry)와 만인 제사장직은 서로 상충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역을 교회와 세상에서 이루어 나감에 있어서 서로를 온전하게 세우는 것이다

 

 

5. 가톨릭교회의 목사안수(Ordained Ministry)에 대한 이해

 

가톨릭교회는 목사안수(Ordained Ministry)를 역사적으로는 monepiscopacy로 집중하고 교의학적인 측면에서 발전시켜 나갔다면 개신교회는 보다 성서학적인 측면에서 다루었다. 이런 차원에서 개신교회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목사 안수식(Service of Ordination)과 가톨릭교회가 사용하는 서품식(Service of Ordination)은 그 용어는 같지만 그 뜻에는 신학적 차이가 엄존하고 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Ordination7가지 sacraments의 하나로(Sacramentum ordinis) 보고 나아가 이러한 가톨릭의 신학에 동의하지 않는 다른 전통을 가진 교회의 ordination은 그 효력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가톨릭 신학자인 E. Schillebeeckx는 이러한 교회의 공적인 입장에 반대하고 가톨릭교회가 ordinand에게 주어진다고 주장하는 성품때문에 그들을 특수한 지위에 놓고 다른 전통의 ordinand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잘못이라고 한다. 그는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사역을 감당하는 다른 교회전통의 office의 효능도 같이 인정할 것을 주장한다.

 

A) 신학적 의미와 그 차이

우리가 우선 물어야 할 질문은 이런 것이다. Ordination service를 통하여 안수를 받는 것이 1) Status/ to be in the Divine Order(존재론적) - 로마 가톨릭인가 아니면 2) Servicen/ to be in the Office of Church(기능론적)인가 하는 것이다. - 개신교. 바로 여기에 가톨릭교회와 개신교교회 사이에 ordination에 대한 기본적이고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ordained minister를 존재론적으로 이해하고 종교개혁 전통에서는 다른 사역을 위해 봉사하는 기능론적으로 접근한다. 개신교 전통에서 어떤 교파를 막론하고 Order는 물론 Office라는 말로도 안수 받은 자신을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Ordain을 통해서 가톨릭은 새로운 Status에 들어간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종교개혁 전통에서는 교회사역에 임명되는 Office가 된다고 한다. 그러나 재세례파(Anabaptist)를 시작으로 하는 자유교회전통에서는 원칙적으로 ordination은 오직 하나 ordination of all believers(초기 마틴 루터<M. Luther>의 이해를 중심으로 해서)이며 교회의 모든 사역은 하나의 기능(function)으로 본다.

 

B) The question of ‘character delibilis’ in the Catholic Church

가톨릭교회에서는 Holy Order의 성례전을 받은 사람은 신적인 질서에 들어가 있어 되풀이 되지 않고 또 지워지지 않는 영적인 특성(the indelible spiritual character)이 수여되어 특별한 존재가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기에 한번 divine order에 들어간 사람은 “ordination과 관계된 임무와 기능에서 면제되거나 금지를 당하였다고 하더라도 그는 다시는 평신도의 신분으로 되돌아 갈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ordination을 통하여 각인된 특성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그가 Ordination day에 받은 소명과 사명은 영속한다.” ‘character’라는 말은 어거스틴(Augustine)이 처음 사용하였는데 그는 이 말로 그는 처음부터 성직자가 교회의 직분에 참여할 때에 주어지는 특별한 성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받는 세례의 효능을 말하면서 inviolabilis(불멸의 표징)이라고 사용한 것이다. 어거스틴은 당시에 문제였던 Donatist들과의 논쟁에서 세례가 비 가톨릭교회에서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졌다면 그 세례의 효능도 지워지지 않는 것이라고 보았고 이러한 사도적 신앙의 불멸성이 Ordination 시에도 같은 것이라고 보았다. 후에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이러한 어거스틴의 가르침을 ordination에 있어서 ordinand에게 주어지는 여러 가지 특권 중에 첫 번째 자리로 올려놓았다. character로 인하여 ordinand 는 교회의 college of office의 일원이 되며 더욱 중요한 것은 그는 교회공동체와 달리 특별한 방법으로 언제나 주님의 편에 서게 된다고 보았다. 아퀴나스에 의하면 이것이 ordinand에게 가장 중요한 본질이라고 했다. A.D. 1313년의 플로렌스 공의회(Florence Counci)lA.D. 1609년의 트렌트 공의회(Trent Council)에서 이 ‘character’ordinand의 영혼에 주어진 불멸의 성품으로 교리화 되었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칼 라너(Karl Rahner)‘character indelibilis’서품을 다시 되풀이할 수 없다는 뜻으로 해석하여 그 차이점을 드러내고 있다

 

C) 개신교 전통에서는 목사안수(Ordained Ministry)에 사역하는 사람일지라도 ordained minister라는 그 사람의 성품이 신적 차원으로 변하거나 자신이 우월성이나 특수성을 가지거나 그 신분을 보장 받는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루터는 물론 칼 바르트(Karl Barth)bishop의 사도계승과 관련하여 이 ‘character delibilis’을 비판한다. 바르트는 ordination을 통하여 받는 직분을 행함에 있어 어떻게 그러한 character가 한 인간에게 어떤 경우에도 불구하고 평생토록 가능하며 영원한 것이 되는가를 물으면서 그것은 하나님과 말씀을 탈 인간화시키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라고 한다. 나아가 바르트는 성직자는 그 인격 때문이(character indelibilis)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역 안에 놓여있는 그의 office 때문에 그 직임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Hans Kueng)에 따르면 바울의 공동체에서는 어떤 ordination service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사도행전과 목회서신과는 달리 바울서신에서는 ordination이라는 말이 전혀 언급되고 있지 않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보자면 목사안수(Ordained Ministry)도 그 근원에 있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뿌리를 둘 때에 가치와 권위가 주어지는 것이지 ordinand의 성품과 신분이 다르기 때문에 공동체의 목회를 대신하거나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교회의 모든 사역은 물론, 목사안수(Ordained Ministry)도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의 사역을 본받는 것이다. 그리고 그 ordinand와 그의 ministry의 권위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연유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는 아버지에게서 연유한다(28:18). 그러므로 목회자 자신에게서는 그 신분상으로나 특성상으로나 목회자로서의 권위와 계승을 스스로에게서 나오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6. The Service of Ordination

 

Ordination service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기독교 전통에서는 특정한 교인이 안수를 받고 특별한 봉사를 위한 전권을 위임 받아 파송되는 것을 의미한다. J. Behm (Die Handauflegung im Urchristientum)E. Lohse (Die Ordination im Sp?tjudentum und im Neuen Testament)의 연구결과, 기독교의 ordination service는 유대교 랍비의 ordination를 모델로 하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Ordination service에서 행하는 laying on of handsconsecrate하는 기도의 내용과 제도는 유대교전통과 유대 기독교에서 유래했다. Ordination이란 그 직무 수행자가 직무상의 은사를 갖추었음을 공적으로 정당화시키는 의식이다. 그러나 성서적 교회공동체에서는 이런 것이 모든 직분자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니고 선교사적인 교회 개척이나 교회 지도의 직분이나 보조 봉사를 하는 직분에게만 주어졌다. 개신교 전통에 의하면 이 안수예식이 어떤 특정한 전통이나 형식으로 행해지든 그것은 단순히 공동체성이 수여하는 official character일 뿐이다. 이것은 indelible character와는 완전히 구별되는 것이다.

 

 

7. 사도계승과 목사안수(Ordained Ministry)

 

A) 목사안수(Ordained Ministry)에 있어서 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 사이를 갈라놓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character의 문제와 더불어 사도계승에 관한 이해이다. 가톨릭교회는 교회의 목사안수(Ordained Ministry)의 직제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셨고, 베드로를 수위로 하는 사도들에게 전승되고, 그것은 후에 감독/주교에 이어지고, 특별히 로마의 bishop에게 계승되었고, 로마의 bishop이나 그가 위임한 동료 bishop들이 안수함으로 사제에게 이어지는 사도계승을 주장했다. 서방교회가 동방 정교회와 멀어지면서 정치적인 형편과 더불어 로마의 주교는 베드로의 교회에 대한 수위권이 그들에게 전승되고 로마의 주교가 모든 주교의 으뜸이 되고, 후에 교황제도로 발전하면서 사도계승, 즉 로마의 주교와 그에 의해서 성별된(consecrated) 주교에 의해서만 목사안수(Ordained Ministry)ordinand의 사역이 전승되고 권위가 주어진다고 주장했다.

 

B) 이에 비하여 동방교회는 이미 형성되어 있는 5개의 총대주교구(예루살렘<Jerudalem>, 안디옥<Antioch>,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로마<Rome>)의 총대주교의 권위가 모두 동등하다고 주장했고 결코 로마주교의 수위성을 인정하지 않았다(정치적으로 유리한 조건-황제가 없는 교구로서 정치적인 권위도 함께 가질 수 있었다-을 가졌던 로마의 주교가 점차로 우위를 차지함). 후일에 영국성공회는 종교개혁을 단행하여 교황직과 그 권위를 부정하면서도 여전히 교황의 임명을 받은 가톨릭교회의 bishoppriest가 그대로 성직자가 되어 그 권위로 사제서품을 행함으로 사도계승을 이어 간다고 주장하고 현대에 와서 교황청에서도 이 점을 인정하면서 영국 성공회와 화해를 이루었다. 가톨릭교회와 성공회에서는 교구의 bishop과 더불어 적어도 3명 이상의 주교가 참석하여 거행하는 서품식에서의 서품이 사도계승과 성직의 권위를 가진다고 주장한다. 이것 역시 목사안수(Ordained Ministry)ordination service에 대한 교의학적 접근이지 성서적/역사적 전승이라고 보기 어렵다.

C) 가톨릭 신학자이면서 개혁적인 큉에 의하면 사도계승이란 이러한 성직자들의 성품과 신분의 계승이 아니라 사도들의 교회와 목회의 특색이 계속된다는 것이지 개인에게 수여되어 전승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는 계속하여 말하기를 사도직 자체는 사도의 죽음과 더불어 소멸되고 그 사역의 과제만 남아서 사도계승이란 사도직의 계승이 아니라 사도적 사역/봉사/파송의 계승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마찬가지로 베드로의 수위성을 로마주교/교황이 계승한다는 것도 베드로의 사역(Petrine ministry)을 계승한다는 것이지 베드로의 직위(Petrine office)를 계승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신약을 통해서 살필 때에 사도들은 자신들의 후임 사도들을 세우지 않았다는데 근거한다. 큉에 따르면 전체로서의 사도직은 유일회적이며 반복될 수 없다. 사도의 진정한 후계자는 교회직무의 문제요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복종하는 가운데 사도들의 후계자가 된다. 예수의 12제자를 사도라고 부르는 것은 누가복음 6:13에 비로소 등장한다. 이것은 누가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전승에서 나온 신학적 가치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리고 신약시대에는 12제자 아닌 사람도 사도라고 불려졌다. 그러나 사도직의 유일회성을 감안할 때에 사도는 교회 위에존재한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도들도 궁극적으로 교회의 주인이 아니라 종이 되어야 한다.

 

 

8. Roman Catholic 전통에서 Ordination Service 및 목사안수(Ordained Ministry)의 발전

 

A) 가톨릭교회는 카리스마타와 성례전(서품예식 포함)을 의식적으로 구분했다. 유세비우스 이후에 성직자를 사제(priest)(히에류스<i`ereu,j> in Greek, sacerdos in Latin)’로 부르는 것이 확립되었지 그 이전에는 이 말이 성직자를 지칭하는 말로 등장하지 않았다. 이러한 성직계급이나 성직자란 말은 신약에서는 사용되지 않았고 5세기 이후 디오니시오스 아레오파기타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중세에 이르러 성찬식을 집례 하는 목사안수(Ordained Ministry)primarily sacrament로 정립되면서 성직자가 특수한 지위와 자격, 그리고 권위를 가지는 것으로 발전되었다.

 

B) 서방교회가 로마를 중심으로 발전하면서 베드로의 수위권을 가진 로마의 주교가 모든 교회에 대한 수위권을 가진다는 신학으로 발전하면서 세 가지 order, Episcopal ordinationfullness of the sacrament of Holy Orders, Ordination of priestsco-workers of the bishops, ordination of deaconsin order to serve로 구별되었고 bishop이 목사안수(Ordained Ministry)를 주관하는 직분으로 정착되었다n 그리고 Ordination service에서 주관하는 bishop뿐만 아니라 예식에 참여한 모든 bishop들과 priest들이 새로 서품 받는 사제에게 안수한다. 이는 priestbishop을 도와 함께 목사안수(Ordained Ministry)를 이끌어 나가는 표시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신약 교회와 초대 교회역사에서는 Monepiscopacy가 행사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collegiate ministry로 운영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bishop은 다른 직분자들에게 대하여 지배관계를 가지고 권위를 행사하는 것은 아니었다. 바울에 따르면(고전 12:29 이하) 그 누구도 모든 은사를 독점할 수 없다. 전제주의적인 감독직은 바울서신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Bishop이라는 단어는 신약에 5회 사용(벧전 2:25/그리스도에게 적용; 1:1; 행전 20:28; 딤전 3:2; 디도 1:7) Bishop은 후대에는 목자라는 말과 동어의로 사용되었다. 개신교회의 목사라는 직분에는 bishop과 목자라는 두 개념이 녹아있다고 보아야 한다.

 

 

9. 종교개혁전통에서 보는 목사안수(Ordained Ministry)

 

A) Lutheran Church: 루터교 신학에 의하면 ordination은 가톨릭교회가 주장하듯이 신적인 질서(divina ordinatio)가 아니고 교회의 의식(ceremony)이다. 그리고 회중이 목사나 bishop을 선출한다. 루터교회를 위시한 개신교 주류에서는 ordination을 통하여 가톨릭교회와 달리 사제에게는 지워지지 않는 성품이 주어진다(character indelibilis)는 것과 천사도 심지어 성모 마리아에게도 주어지지 않는 미사를 통하여 성체를 축성할 수 있고 산 자와 죽은 자를 위하여 희생 제사를 드릴 수 있는 권위를 가진다는 것을 부정한다. 그러면서도 루터교회 안에서도 가톨릭교회적인 성향을 가지고 안수목회자의 ordinationdivine ordinance로 규정짓는 잘못을 범하는 신학자들이 있음을 경계한다. 목사안수(Ordained Ministry)는 모든 다른 ministry 위에 있는 특별한 영적인 직제가 아니다. 그것은 office of service이다. 그리고 사제/주교(감독)가 있는 곳에 교회가 있는 것이 아니고 교회가 있는 곳에 사제/주교(감독)가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루터는 나아가 천주교회가 안수를 통하여 사제에게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특성을 준다는 것을 배격하고 회중이 목회자를 선출하기도 하고 파직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진다고 했다. 만인 제사론과 안수목회는 서로에게 부정적인 관계를 가진 교회역사가 있었다. 그러나 루터에 이르러 이 관계는 서로에게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즉 목사안수(Ordained Ministry)는 만인 제사직 중에 교회에 있는 하나의 office라는 것이다. “루터는 독일귀족에게 고함(Address to the Christian Nobility 1520)”에서 priestlay person의 차이는 하나님 앞에서 직분(office)의 차이이지 신분(status)의 차이가 아니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루터도 ordinand를 세우는 데는 가톨릭교회의 bishop들이 루터파 교회의 후보자들에게 안수를 거부함으로 1525년 죠지 뢰러(George Roerer)ordained 했다. 1535년에 선제후 존 프레드릭(John Frederick)의 이름으로 성직안수에 관한 법령이 나왔고 루터는 그 사이에 많은 안수례를 거행하였다.이는 존 웨슬리(John Wesley)의 감리교 운동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이 일어났다. 웨슬리는 성서적 초대교회에서는 bishoppresbyter가 하나의 직분이었음을 강조하면서 자신이 ordination service를 주관하였다. 루터교회의 Ordination service에서도 가톨릭과 같이 모든 presbyter들이 머리에 손을 얹어 안수례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이점에서 다른 개신교회에서는 여러 가지 외적인 요소가 있겠지만 목사안수(Ordained Ministry)의 계승이라는 관점에서 먼저 안수 받은 목사들이 안수례에 참여하도록 하는 것을 다시 시행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리고 이 예식은 성찬예식 안에서 거행하였으며 회중들도 이에 참여하도록 함으로 만인 사제설과 ordained office와의 연대감을 드러내도록 하였다. 루터를 시작으로 하는 개신교 전통에서는 모든 Christian들의 vocationChristian office 구별하였다:

a. Office is in the church

b. Vocation is to be God's person in the world.

 

B) Reformed Church: CalvinOrdination service에서 안수례를 히브리전통에서 온 것으로 보고 디모데전서 4:14, 디모데후서 1:6에서 바울은 장로회가 아닌 ordination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했다. 칼빈은 가톨릭교회의 7가지 order를 그리스도에게 연결시키는 전통을 비판했다; door keeper - 성전을 정결케 하심(2:15; 21:12.; 10:7). reader - 회당에서 이사야서를 읽으심(4:17). exorcist - 병자를 고치심(7:32-33 ). acolyte - 나를 믿는 자는 어두움에 행하지 않는다(8:12). subdeacon - 제자들의 발을 씻김(13:4-5). deacon - 최후의 만찬 때에 빵과 포도주를 돌림(26:26). priest - 십자가에서 자신을 드림(27:50; 5:2) 그리고 칼빈 역시 priestpresbyter를 같이 보면서 sacrament of order를 비판했다.

 

C) Free Church전통: 재세례파(Anabaptist)/자유교회/회중교회/좌파교회 전통에서는 ordained minister와 그 ministry는 전적으로 회중의 권리에 속한다. 회중이 minister를 세우고 또 폐기한다. 여기에는 Order는 물론 Office도 적용되지 않으면서 계승과 권위도 자연스럽게 제거되었다. 여기에는 그 전에 받았던 목사안수(Ordained Ministry)라는 개념은 원칙적으로 이해되거나 수용하기 어렵다. 거기에는 회중과 공동체의 목회의 한 부분으로서 목사안수(Ordained Ministry)가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ministryminister는 교회 안에 있는 여러 가지 사역 중에서 하나의 기능(function)일뿐이다. 그리고 엄밀한 의미에서 ordination service는 사라지고 installation service가 존재할 뿐이다.

 

 

10. 목사안수(Ordained Ministry)의 다양한 이해와 발전

 

역사적으로 보면 목사안수(Ordained Ministry)에 대한 성서 해석에서도 다양했고, 교회론의 다양한 이해와 그리고 교회 공동체가 성장하고 발전하면서 다양한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역사적 변형을 겪어왔다. 이런 다양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공통적인 이해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이어가기 위해서 교회 공동체에 목사안수(Ordained Ministry)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성격과 기능과 직제에 대해서는 상이한 발전을 거듭해 왔다. W.C.C.Faith and Order 위원회에서 나온 1982년의 문서에서는 다양한 종교개혁 전통에서 공동의 이해를 추구하는 노력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들 사이에 상반된 이해와 전통은 그대로 상존하고 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모든 교단이 채택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 도 있다는 것을 아쉽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11. 오늘에서 보는 목사안수(Ordained Ministry) - 필요성과 권위

 

A)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신학적으로 살펴본 목사안수(Ordained Ministry)ordination service에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고 또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음을 본다. 가톨릭과 개신교 전통 그리고 free church 전통에서 목사안수(Ordained Ministry)와 그 직임에 관해서 다른 견해와 전통을 지금까지 지켜오고 있다. 가톨릭에서는 prieststatus를 중심으로 하여 그를 Ordo/Order에 올려놓는다. 개신교에서는 pastorministry를 중심으로 하여 그를 Office의 직임에 놓는다. 자유교회에는 ministerfunction을 중심으로 하여 그를 lay person과 구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전통에서나 Ordained minister는 내적인 소명(성령에 의한 하나님의 부르심)과 외적인 공인(교회공동체의 과정과 인정)을 거쳐서 ministry에 들어가는 이들을 가르친다.

 

B) 현대에 들어와 가톨릭교회는 bishop, priest, deaconordination을 통일된 ordination으로 보고, priestdeaconordination 때에 bishop과 그 계승자들에게 순명을 서약하도록 했다. 그리고 모든 bishop은 새 bishop에게 안수하고 모든 priestbishop과 함께 새 presbyter들에게 안수하도록 하였다. 성공회도 가톨릭과 함께 보조를 맞추었다. 미국의 Lutheran church 에서도 Orders for the Installation of a Bishop, the Ordination of a Pastor, the Consecration or the Setting Apart of a Deacon으로 통일시키도록 했다. 미국의 감리교회는 성공회의 예전을 많이 따라 개정하였고 다만 안수례는 consecration prayer를 할 때에 진행하는 것이 달랐다.

 

C) ordained minister와 그 목회가 필요한가 하는 문제는 ministries of all believers가 왜 세상에 필요한가 하는 문제와 떠날 수 없다. 교회가 세상을 위하여 존재할 때에 이 두 가지 목회는 유기적이다. 그러나 여기서 교회와 세상을 이분화 하여 교회에서는 Ordained minister가 세상에서는 all believers들이 사역하는 영역이라고 규정지어서는 안 된다. 교회의 사역에서도 이 두 가지 사역은 함께 일하고 세상의 사역에서도 함께 일한다. 오히려 교회가 세상을 위하여 존재하는 한 ordained minister와 그 ministry도 궁극적으로, 본질적으로 세상을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셔서 그 사역을 행하셨던 것에 근거하여 목사안수(Ordained Ministry)가 존재한다면 목사안수(Ordained Ministry)도 근본적으로는 세상에서 세상을 위한 사역이 되어야 한다. 이점이 개신교 목사안수(Ordained Ministry)에서 강조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개신교회의 ordained minister와 그 ministry도 형식에 있어서는 다를지 모르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가톨릭교회적으로 변질되기 때문이다.

 

D) 가톨릭교회에서는 제2차 바티칸(Vatican)공의회 이후에도 공식적으로는 여전히 ordination serviceHoly Order라고 지칭한다.그리고 다른 교회 전통에서 행하는 ordination의 효력을 부정한다. 그러면서도 Orthodox 교회전통의 ordination은 인정한다. 그러나 그 안에서도 동방 Orthodox교회가 수도사들과 bishop들에게는 독신제를 적용하고 교회의 목회사역자들에게는 결혼을 허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목사안수(Ordained Ministry)가 교회의 중심이요 그 존립의 근거가 된다는 것을 되풀이 하는 것이다. 많은 비판적인 천주교신학자들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목사안수(Ordained Ministry)에 대한 공식적인 입장에서는 여전히 옛 전통을 고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쉴레빅(Schillebeekcx)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Vatican council)의 정신을 따라볼 때에 가톨릭교회가 Character Delibilis를 내세워 다른 교회 전통에서 행하는 office의 효능을 거부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나아가 사도적 신앙을 계승하는 한 다른 전통에서 행하는 ordination에 대해서 그 효력을 인정해야 할 것이라고 본다.

 

E) 목사안수(Ordained Ministry)는 모든 사역을 위한(for)’ 것이지 다른 사역 위에(above)’에 있는 것은 아니다. 목사안수(Ordained Ministry)는 모든 사역을 도우라고(help)’존재하는 것이지 다른 사역을 지배(govern)’ 하라고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목회자의 권위를 논한다면 바로 여기에서 찾아야 한다. 교황이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교회와 그 직분에 대한 베드로의 수위권을 가지고 행사하는 교회만이 참된 교회라는 주장 아래 성직자의 권위를 존재론적으로 세워 놓았다. 이것은 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의 일치에 큰 장애가 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 개신교회의 목사들도 목사로서의 권위를 가시적인데 두고 싶어 하는 유혹이 언제나 있었다. 우리의 ordained minister로서의 권위는 사도계승에 있는 것도 아니고 ordination service때에 받는다는 지워지지 않는 특성(character indeliblilis)을 가지는 신분상의 특권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office가 우리에게 어떤 특권을 부여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ordained minister로서의 권위는 오로지 사도 적 사역에 충실하고 공동체 안에서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백성을 양육하는 것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도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목사안수(Ordained Ministry)가 필요한 존재이유요 근거인 것이다. 이것을 벗어나면 우리는 가톨릭교회의 교회 론과 그 성직자의 계급에 우리자신을 내면적으로 종속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종교개혁전통과 신앙에 어긋나는 것이다. 오늘도 목사안수(Ordained Ministry)는 필요하다. 그러나 그 필요성은 그 직책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의 사역에 봉사하는데 있다.

위의 논고를 통하여 교회의 목사안수의 역사를 고찰해보았다. 역사에 나타난 목사안수의 흐름을 고려해 볼 때 우리는 안수와 관련한 일이 성경해석의 문제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목사안수의 역사적인 전통이 과연 성경말씀을 근거하여 출발하였는가 하는 사실이다. 교회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목사안수의 시작은 신앙공동체의 요청에 의하여 공동체의 리더십으로서 가르치고 교회를 바르게 세우기 위하여 세워진 것이지 성경이 명령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초대교회의 교회전통과 모범에 따르면 현재의 목사안수제도에 문제가 있다는 것도 쉽게 이해 할 수 있다. 초대교회는 교회공동체의 요청에 의해 교회의 리더십으로서의 목사안수가 필요하였고, 이들 공동체의 요청에 의해 목사안수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런데 현재의 목사안수는 공동체의 요청에 의하여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먼저 목사안수를 받은 자들이 그들의 교회 구성원들을 모으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다시 말해 교회 공동체의 필요와 요청에 의한 리더십으로서의 목사안수가 아닌 개인적인 소명으로부터 목사안수가 이루어지고 있으므로 이일이 교회공동체의 필요에 의한 요청과는 그 시작을 달리하는 목사안수란 것이다.

 

 

결론

 

우리가 또 한 가지 고민해야 할 내용은 그 당시의 교회공동체들이 왜 남성들만 목사안수를 허용했는가하는 것이다. 그리고 목사안수에 있어서 현재는 여성안수를 허용해도 되는가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가 정작 고민하고 논의해야 할 일은 목사안수과정에서 그 대상자가 확실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한 안수 받으려 하는가를 분별해야 하는 것이며 신실하고 온전케 구비된 자인가를 분별해야 하는 일이다(초대교회의 모범을 따르자면 교회공동체의 승인이 있어야한다). 이 과정에서 인간적인 생각들이 배제되고 신실하고 심도 깊은 논의와 하나님의 입장에서서 숙고하는 평가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묻는 기도로서 그 뜻을 분명히 알고 순종한다면 우리 인간의 영역에서 해야 할 기본적인 직임을 소홀히 하지 않은 것이 될 것이며 하나님과 교회공동체에 부끄럽지 않은 청지기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여성안수와 관련하여서도 우리들이 놓치지 않아야 할 사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교회를 위하여 그를 부르셨는가하는 부르심 여부가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재확인하면서 남성들의 목사안수 문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남성들만 안수를 받아 세워지던 이제까지의 교회역사에 과연 신실하고 구비되어 온전한 자들만이 선택되어 왔던가? 역사는 그렇지 못했다는 사실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인간들의 실수가 존재했었고 그 일로 인해 교회에는 여러 가지의 부작용이 드러나기도 한 것이다. 근래에 와서는 더더욱 목회자의 위상이 곤두박질쳐서 얼굴을 들고 다니기도 조심스런 위기의 교회소식들이 넘쳐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여성안수문제는 보수적인 입장에서는 더욱 조심스러워지고 진보적인 입장에서는 오히려 이러한 현실을 꼬집으면서 여성의 리더십이 효과적이며 시대적인 요청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믿음 안에서 우리는 어떠한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일까?

 

이야기를 처음으로 되돌려 볼 필요가 있다. 안수문제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불가침의 영역과 우리들이 판단할 수 있도록 허용된 부분이 있다. 우리는 이 부분에 관하여 최선을 다하여 확인하고 감독하는 일이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가 목사안수를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보다 폭 넓고 깊이 있게 연구하여야만 할 것이다. 개인적인 찬/반의 입장을 넘어서 교단을 초월하고 보다 더 전문화된 신학체계로 연구하여 정리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하여 범 교단적인 논의가 지속적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이며 이 일에는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는 서로의 노력이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미 여성안수를 시작하였다하여 재고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주장하거나 이제까지 그랬던 것으로 인하여 재고의 여지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찾아내는 일에 도움이 될 수 없다.

 

서로의 주장에 좀 더 깊이 관심을 기울이고 상대는 왜 그러한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는 것인지를, 이해하고 품을 수 있는 상호존중의 사랑어린 동질감과 신앙의 배려로부터 출발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출발은 우리들로 하여 더욱 다양한 정보를 만나게 할 것이며 이로써 더욱 풍성하고 면밀한 연구의 토대를 이루는 일에 유익을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의 논의에 있어서 자신의 주장을 절대로 양보하거나 철회할 수 없다는 전제조건을 가지고 대화를 시작한다는 것은 피차에 시간낭비 이상의 아무런 유익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상호간의 의견에 최선을 다하고 인간의 노력과 연구로서 넘어설 수 없는 나머지의 일은 기도로서 하나님께 맡겨드리고 하나님의 영역에 감히 도전해서는 안 될 것이다. 현재 진행되는 모든 역사의 현장 속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실존의 믿음이 우리 믿음의 사람들 모두에게 공유되고 있기 때문이다.

 

목사로 안수를 받아 교회의 청지기로 세워지는 일은 세상에서 군림하는 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세상에 나아가 저들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 나라로서의 교회공동체를 바르게 세우는 일이며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십자가를 지는 삶으로 들어가는 일일 것이다. 이일에 앞서 목회자로 세움 받기를 원하는 자들은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1:10)”고 하시는 주의 말씀을 기억하여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진실 되고 정직하게 자신의 길을 선택해야만 할 것이다. 이 일은 자신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이 달려있는, 창조주 하나님의 자기백성들을 택하고 세우시는 구원의 역사에 함께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함부로 하나님의 뜻을 단정 지어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단지 그분이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우리에게는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를 주의 깊게 들어야 할 것이다.

 

누구를 부르시는가? 누구를 세우시는가? 누구를 보내시는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일을 성취하려 하실 때면 그의 종을 선택하셔서 부르시고, 그가 일을 수행할 수 있도록 세우시며, 또한 그를 세상에 보내셔서 자신의 일을 성취하신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이는 그 누구도 하나님의 사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세우심이 없이는 그 누구도 하나님의 부여하시는 능력을 힘입을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보내심이 없이는 그 누구도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빛을 드러낼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주의 백성들과 주의 종들은 저들에게 능력을 부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며 그것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존재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자들은 저희의 갈 길로 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를 어느 누가 거부할 수 있을 것인가? 부르심을 받지 못한 자가 어떻게 그 길을 갈 수 있을 것인가? 목사로 안수를 받아 세워지기를 원하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의 부르심에 관한 거부할 수 없는 증거가 있어야만 후회가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경계함으로서 자신과 교회에 인증되어 선택하여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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