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몬 폰 우트레히트.
유럽의 한 항구 도시에는 이런 이름의 거리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도시의 시민 중
그 인물이 누구이며
왜 기억되어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단다.
그는 오직
어떤 남자의 처형을 명령했던 사람으로만
알려져 있을 뿐이란다.
클라우스 슈토르테베커.
역시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한데 이 이름이 하늘 아래 어떤 곳에서는
수백 곡의 노래와 이야기 속에
여전히 살아 있다고 한다.
그는 누구인가.
엘베강의 해적.
무력으로 북대서양과 발트해의 상권을 장악한
한자 동맹에 반기를 든 남자.
세금과 채찍, 밧줄 같은 것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며
폭동을 일으킨 후,
배 한 척을 차지해 자유의 깃발을 달고 항해를 시작한 남자.
1392년 슈토르테베커의 부하들은
자기네 행동 강령을
한 신부에게 받아적게 했다.
내용인즉
인간은 행복을 누리기 위해 신의 선택을 받았고
행복만이 그 어떤 고통도 참아낼 수 있는 생명력을 준다는 것.
그때부터 그들은
<생명력의 형제>라고 불리면서 한자동맹을 괴롭혔다.
그들은 재물을 가득 실은 배를 공격한 후,
전리품의 반을
발트해 연안에 사는 인근 주민들에게 나눠 주었다.
당시 가난한 사람들은
슈토르테베커와 <생명력의 형제>들을 축복처럼 기다렸다.
그들은 엘베강의 모든 요지들을 샅샅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몇 년간 잘 피해 다녔다.
당연히 그렇듯 한자 동맹은 해적에게 현상금을 걸었고
선장 10여 명은 해적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1400년 어느 봄날 아침,
해적과 그의 부하 백여 명의 처형식을 관전하기 위해
<악마의 다리> 옆에 한자 동맹 전원이 모였다.
당시 시장이 힘찬 목소리로 참형을 선포했다.
첫 처형자는 말단 선원이어야 했다.
부하들의 죽음을 지켜보는 게 슈토르테베커에게 내려진 형벌의 일부였다.
이때 붉은 수염을 기른 해적이 말했다.
"내가 첫 번째가 되고 싶소.
그게 다가 아니오. 시장,
이 진풍경을 더 흥미진진하게 하기 위해
한 가지 거래를 제안하겠소."
"뭐냐."
시장이 말했다.
"나는 서서 참수형을 당하겠소.
그래서 내 머리가 바닥으로 굴러 떨어진 후,
내가 한 발을 내디딜 때마다
내 부하들을 한 명씩 살려 주시오."
군중 한 명이 '엘베강의 해적, 만세'라고 외치자
시장은 해적이 만용을 부리는 거라 확신하고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날카로운 칼날이
아침 공기를 가르며 해적의 목덜미로 들어가
턱수염이 있는 쪽으로 나왔다.
머리가 다리 기둥이 있는 곳으로 굴러 떨어졌다.
모든 사람들이 놀라서 지켜보는 가운데,
참수형을 당한 해적은 쓰러지기 전에 열두 발짝을 떼었다.
그로부터 600년이 지난 1999년 7월 첫 주,
그 도시, 함부르그의 경찰은
백 번째로 거리의 이름을 바꾸려고 시도한 젊은이
몇 명을 구속했다.
그들은 <클라우스 슈토르테베커 거리>라는
하얀 글씨가 적힌 길쭉한 파란색 스티커를,
시몬 폰 우트레히트 시장의 이름이 적힌 철판 위에 붙이다가 잡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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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루이스 세풀베다에게서 들은 이야기이다.
그는 자기 아이들이 이 이야기를 아주 좋아하며
언젠가 손자들에게도
이 이야기를 들려줄 날이 올 거라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삶이 짧고 허망한 건 확실하지만,
자존심과 용기가
삶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는 것 역시 확실하다.
생명력은
우리가 살면서 부딪히는 함정과 불행을
견딜 만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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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더 지난 아침,
이 이야기가 또 생각났다.
조금 다른 각도에서,
약간의 피비린내와 함께.
어렸을 적
목을 설 잘린 닭이 달아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퍼드덕거리며 외갓집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을 지나 우물터까지 갔던가,
동구나무까지 갔던가.
모가지를 덜렁거리며.
사람에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는
차마 생각지 못했다.
슈토르테베커의 제안은
용기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실제 광경은 상상만 해도 참혹하다.
목이 잘린 몸뚱아리가 열두 발짝을 걷다니,
그건 정말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니고......
그걸 제안한 사람이나
그걸 허락한 사람이나
사람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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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에는 알다시피 왕이 잠들어 있다.
그가 죽은 지 천 년이 지났건만 지금도 사람들이 찾아온다.
어떨 때는 하루 수십 대씩 관광버스가 밀려든다.
사람들은 무엇을 보러 왔다가
무엇을 보고 가는 것일까.
그 바로 몇 발짝 떨어진 곳에 연못이 하나 있다.
동학 난리 때 송장 열여덟 구가 던져졌던 논배미이다.
지금은 연꽃이 피는 연못으로 바뀌었다.
그곳을 찾는 사람은 거의 없다.
관광버스는 코앞까지 오지만
무령왕릉만 들여다보고 휙 떠난다.
무령왕은 이름이라도 있지만
그때 죽은 사람들은 지금도 이름을 찾지 못하였다.
왕은 예나 다름없이 높은 언덕에서 내려다보고 있다.
송장 열여덟 구는 여전히 낮은 곳에 엎드려 있다.
엘베강의 해적이
당시 조선에 태어났더라면
송장배미에 던져졌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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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장배미에서 4킬로미터쯤 떨어진 곳,
공주에서 금강을 끼고
대전으로 가는 옛길에서
오른쪽으로 조금 들어앉은 중동골 마을 어귀,
그곳엔
그 마을 사람들이 살구배미라고 부르는
산자락이 있다.
나물 캐고 꼴 베기 좋았음직한 야트막한 산자락 살구배미엔
지금도 지나가던 구름이 멈춰 서성일 것만 같다.
1950년 7월 2일,
이곳에서 600여 명이 처형되었다.
엄밀히 말하면 처형은 아니다.
처형이란 재판을 거쳐
형을 언도받고 나서야 이루어지는 것.
그러니 처형이라 부르는 건 옳지 않다.
무어라 부를 수 있을까.
이것을.
이른 아침부터 저물녘까지
포승줄에 손목이 엮인 사람들이
트럭에 태워져 쉴 새 없이 실려 왔다.
이어서 터지는 총 쏘는 소리.
그날 살구쟁이 하늘은
종일 트럭 소리와 총소리에 두들겨 맞느라
멍이 들었고
말없는 땅은
말이 되지 못한 비명을
덮어 쓰느라
숨이 막혔을 것이다.
하필이면 그날 아침
콩밭을 매러 살구배미에 나갔던
마을 아낙네가 그 광경을 보았다.
혼비백산하였을 것은 당연지사.
놀란 중에도 간신히 정신을 수습하여
집으로 돌아가려고 허둥대는데,
총을 든 경찰이 공포탄을 발사하며
꼼짝 말고 엎드리라고,
손가락이라도 까딱하면 쏴 버리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아낙은 콩밭에 죽은듯 엎어졌다.
총소리가 귓속을 파고 들어와
몸 속에서 탕 탕 울려퍼졌다.
점심 때에야
기다시피 하며 집으로 돌아온 아낙은
그날로 정신을 놓았다.
첫아이를 임신 중이었던 아낙은
결국 피를 쏟고 말았으며
그해 겨울에 세상을 떴다.
그날 트럭에 실려와
총을 맞고 죽은 사람들은
바로 며칠 전 보도연맹원 소집에
응했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정말
그렇게 죽을죄를 지었는지
나는 모른다.
해방 후의 격변기에
식민지 사회와는 다른
새로운 사회를 꿈꾸었던 것이,
너 나 없이 미래의 청사진을 그려 보던
그 백가쟁명의 시대에
자기가 그리고 싶은 꿈 하나를 간직했다는 것이
그렇게 죽어가야 할 만큼 큰 죄였는지
나는 모른다.
꿈꾸는 자만이 아니라
꿈꾸는 자와 가까웠다는 이유로,
심지어
꿈꾸는 자들의 명단에 들었다는 이유로
살구쟁이에서 죽어 간 사람들.
이들 중 누군가가
만약 엘베강의 해적 슈토르테베커의
이야기를 알았더라면
그를 부러워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들 중 누군가도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
자기 아닌 다른 사람의 안위와 생사를
엘베강의 해적 못지않게
걱정하였을 수 있고
자존을 지키며
숨졌을지도 모르는데
그들에게는
해적이 그랬던 것과 같이
그런 것을 남길 만한 시간도, 공간도
허용되지 않았다.
세월이 또 훌쩍 지난 지금,
이들의 흔적을 그나마
발견할 수 있는 곳은
"수백 명의 사람들이
이유도 모른 채 죽어갔다"라든가
"경찰의 착각으로
억울하게 죽었다"라는 따위의
헐겁고 흐릿한 문장들과
그 행간들 속에서이다.
이들은 수백 명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을 뿐
이름자도 제대로 남기지 못했다.
당연한지도 모른다.
아닌지도 모른다.
(2007. 2. 8 + 2009. 3. 4.)
2009. 홍차 |
첫댓글 ................. ^^*
()^^*
공주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군요..... 눈을 닫고 귀를 막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그래서는 안 되는 많은 일들! 비명에 가신 님들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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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재무구득 임난무구면을 좌우명으로 살아왔던 둘째 숙부께서 비슷한 날짜에 돌아가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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