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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대청호오백리길 8구간(선비 길)
여행일 : ‘22. 11. 19(토)
소재지 : 충북 옥천군 군북면·옥천읍 일원
여행코스 : 추소리 느티나무(절골)→환평재→생약자원관리센터→환평리 갈림길→이지당→서화천 생태습지→보오마을→옥천폐기물처리장→이평마을→석결마을→돌거리고개(거리/시간 : 13㎞/ 실제는 14.42km를 3시간 5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1980년 대청댐이 완공되면서 조성된 대청호(大淸湖)는 ‘전국 3대 호수’ 중 하나로 2개 광역(대전·충북)과 5개 기초(대전 대덕구·동구, 청주시·보은군·옥천군) 자치단체에 걸쳐 있으며, 둘레만도 무려 ‘500리’나 된다. 이 호수 위로 해발고도 200-300m의 야산과 수목이 펼쳐지는데, 그 야산과 호숫가·자연부락·소하천·옛길 등을 둘레길로 이은 다음 ‘대청호 오백리길(220km을 21개 구간으로 나누었다)’이란 이름으로 포장해 세상에 내놓았다. 오늘은 여덟 번째 구간인 ‘선비길(13km)’을 걷는다. 이 구간은 대청호의 상류인 서화천의 아름다운 풍광을 눈에 담는다는 것이 장점이다. 하지만 많은 곳에서 인도가 따로 없는 포장도로를 걸어야한다는 단점도 있다.
▼ 들머리는 ‘추소리 느티나무’(옥천군 군북면 추소리)
경부고속도로 대전 TG를 빠져나오자마자 좌회전, 비래서로와 신상로를 잇따라 타고 군북면소재지(옥천군)까지 온다. 초입의 삼거리에서 소재지인 이백리로 들어오지 말고 ‘환산로’로 갈아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추소리(절골)에 이르게 된다. 고갯마루에 걸터앉은 ‘둥그나무’가 8구간의 들머리이다. 나무 아래엔 여지없이 돌탑이 웅장하게 서 있었다. 마을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마음이 한가득 담긴 ‘서낭당’이다.
▼ 대청호, 아니 상류인 서화천의 아름다운 풍광을 실컷 눈에 담을 수 있는 구간이다. 특히 초반부인 추소리 ‘부소담악’과 중반부 지오리에서 만나는 호안절벽은 대청호 제일의 절경으로 꼽는데 모자람이 없다. 거기다 ‘이지당’이라는 보물까지 가슴에 담았으니 이 아니 멋진가. 하지만 이 구간도 도로(인도가 따로 없다)를 걸어야하는 단점을 벗어나지 못했다. 오백리길 표식(이정표·팻말·리본 등)이 거의 없다는 점도 6·7구간과 같았다. 걷는 내내 지자체의 무관심에 대해 불평했던 이유이다.
▼ ‘둥그나무’ 아래서 길을 나선다. 초입의 ‘동학정(동학혁명과 관련된 지명으로 추정되는데 어디를 지칭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빗돌을 지나자, 돌장승이 마을 수문장이라도 되는 양 떡하니 버티고 있다. 하지만 환영한다는 듯 선한 표정으로 길손을 맞는다.
▼ 잠시 후 ‘부소담악’으로 들어가는 길이 나뉜다. 400m 거리의 ‘추소정’까지 데크 탐방로가 놓여있다.
▼ 추소리 쪽 황톳길로 들어서자 대청호가 그 속살을 드러낸다. 그리고는 완벽하지는 않지만 ‘부소담악(芙沼潭岳)’의 빼어난 풍광이 눈앞에 펼쳐진다. 예로부터 ‘숨은 병풍’이라 불리었고, 이름 그대로 금강변을 따라 기암이 병풍처럼 펼쳐진 ‘부소무니’의 선경이다.
▼ 잔물결 하나 일지 않는 대청호는 진짜배기 명경이다. 물빛은 거울처럼 맑아 데칼코마니처럼 숲과 산을 비추고, 말갈기를 쏙 빼다 닮은 모래언덕은 하얀 억새꽃으로 한껏 멋을 부린 채 호수를 향해 내닫는다.
▼ 탐방로는 ‘추소리 마을광장(실은 주차장이다)’에서 대청호와 헤어진다. 그리고는 ‘추소리(楸沼)’로 들어간다. 추소리는 자연마을 몇 개를 합쳐 새로운 마을을 만들면서 추동(楸洞)과 부소(扶沼)에서 한자씩 취한 지명이라고 한다. 부소는 ‘부수머리(또는 부소머리)’의 옛말을 한자화 한 것인데, 마을 앞 바위지대로 서화천이 뱀같이 굽이치면서 아름다운 경관을 만들고, 물이 고여 못(沼)을 이룬다는 뜻을 지녔단다.
▼ 겨울 호반은 한산했다. 대청호 물살을 힘차게 가르던 보트들은 배를 허옇게 드러낸 채 따뜻한 봄날이 돌아오기를 하염없이 기다린다. 그렇다고 상상의 나래까지 포기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작은 배 하나 띄워놓고 우암 송시열이 느꼈을 풍류를 맛본다.
▼ 주차장을 지나면서 길은 살짝 오르막으로 변한다. 그리고는 추소리 고샅길을 지나 환산의 산허리를 에돌아가는 ‘환산로(2차선 도로)’로 연결된다.
▼ 추소경로당 맞은편에는 이 마을 출신 소설가 유승규(1921-1993)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고향에서 직접 농사지으며 채득한 경험을 바탕으로 농촌 사회의 질곡을 글로 풀어냈다면서, 이무영과 함께 농민문학의 꽃을 피운 소설가로 소개하고 있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15분. 오르막길이 끝나면서 ‘환평로’로 올라섰다. 군내버스가 다니는 2차선 도로다. 탐방로는 왼편(옥천방면)으로 방향을 트는데, 일렬로 늘어선 가로수는 변함없이 벚나무다. 대전에서 시작된 ‘세상에서 가장 긴 벚꽃길’을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모양이다.
▼ 버스정류장(추소리) 옆에는 ‘추소마을’이 문화유씨 세거지(世居地)임을 알리는 빗돌과 함께 ‘향혼비’를 세워놓았다. 추소팔경으로까지 꼽혔던 빼어난 경관들이 대청호 속으로 잠긴데 대한 아쉬움을 담았으리라. 그런데 ‘소소소금강(笑沼小金剛)’이란 저 시비의 정체는 대체 뭘까? ‘布德 150년 입추’라는 글귀로 보아 어느 천도교도가 지은 모양인데...
▼ 환산 등산로의 들머리(담장을 따라 오솔길이 나있다)가 되어주는 ‘좋은 기도동산’은 ‘Paul&Daniel Christian School’을 겸하는 모양이다. 기독교 교육중심의 대안학교라고 한다.
▼ 5분 남짓 걸어 ‘환평재’에 닿았다. 오백리길은 계속해서 도로(환산길)를 따른다. 하지만 선두대장의 방향표시지는 왼편으로 난 임도를 가리킨다. 핸드폰에 다운받아 놓은 트랙도 같은 방향을 지시한다. 선두대장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 이정표는 이 길을 ‘달빛산책로’로 표시하고 있었다.
▼ 잠시 후 올라선 능선에선 ‘환산’을 조망할 수 있었다. 예로부터 환산(옛 이름은 고리산)은 군사요충지였다. 백제의 왕자 여장이 쌓았다는 고리산성의 성터가 아직도 남아있다.
▼ ‘달빛산책로’로의 진입은 잘못된 선택이었다. 낭만적인 이름(달빛산책로)과는 달리 길이 무척 험했기 때문이다. 웃자란 잡초와 잡목이 길을 가로막는 데다, 가파른 내리막 구간에는 참나무 낙엽까지 수북이 쌓였다. 덕분에 난 엉덩방아를 두 번이나 찧고 말았다.
▼ 악전고투를 치루고 난 뒤에야 ‘환평리’ 들녘으로 내려설 수 있었다. 이후부터는 논두렁밭두렁을 뒤뚱뒤뚱 걷는다. 양팔을 춤추듯이 휘저으며 가는 앞사람을 바라보는 재미가 나름 쏠쏠하다. 평균대만큼이나 비좁으니 중심 잡는 게 어디 그리 쉽겠는가.
▼ ‘서화천’으로 이어지는 ‘강변산책로’를 만나기도 했다. 소슬바람에 춤추고 있는 억새가 예뻤지만 다녀오는 것까지는 사양하기로 했다. 이지당을 지나면서부터는 내내 서화천과 함께 하게 됨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서화천을 벗어난 오백리길은 이제 ‘환평마을’로 향한다. 뒷산인 고리산의 전설이 전해지는 마을이다. 고리산엔 배를 매는 큰 고리가 있는데 과거 큰 비가 내려 여기에 배를 자주 묶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비가 올 때마다 고리에 가장 가까운 ‘고무실(나중에 고리실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환평마을이 되었다)’을 찾았단다.
▼ 환평리 들녘을 걷다가 언덕으로 올라서자 신식 건물이 하나 나온다(오는 도중 환평리로 올라가는 길과 헤어졌다).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운영하는 ‘국가생약자원관리센터’다. 황기며 울금이며 맥문동이며 다양한 약초들이 재배되고 있단다.
▼ 오백리길 옥천구간은 길 찾기가 힘들다는 게 특징이다. 마을길·들길·산길을 걸으며 수많은 갈림길을 만나지만, 그중 이정표가 세워진 곳은 5%도 채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 흔한 리본까지도 매달려 있지 않으니 어찌 길을 찾을 수 있겠는가. 둘로도 모자라 세 갈래(직진이 올바른 방향)로 나뉘는 ‘생약자원관리센터’도 오백리길 표식은 찾아볼 수 없었다. GPX 트랙을 미리 받아놓지 않았더라면 낭패를 볼 뻔했다.
▼ 옥천만 해도 따뜻한 남쪽 나라인가 보다. 들녘의 김장용 무·배추가 아직도 푸른 걸 보면 말이다. 무서리에 시들기라도 할까봐 김장을 마쳐버린 홍천의 내 농장과는 딴 세상이다.
▼ 생약자원관리센터에서 12분(트레킹을 시작한지 55분). 오백리길은 다시 ‘환산로’로 올라선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을 실감한 지점이기도 하다. 다운 받아놓은 GPX 트랙이 벼랑에 가까운 반대편 산비탈로 내려가라 했기 때문이다. 자칫 미끄러지기라도 할 경우 큰 부상을 입을 텐데도 말이다. 파일을 만든 이는 초능력자였을지도 모르겠다.
▼ 트랙을 무시한 채 환산로를 따라 걸었다. ‘안전’, 둘레길 여행자들이 지켜야 할 가장 큰 덕목 중 하나가 아니겠는가.
▼ 5분쯤 더 걸어 만난 ‘환평리 갈림길’, 모처럼 나타난 이정표(이지당 1㎞/ 부소담악 4㎞)가 반갑기 이를 데 없다. 이곳은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오백리길이 360도에 가깝게 방향을 틀면서 도로와 헤어지기 때문이다.
▼ 잠시 후 아까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맸던 지점의 아래를 지나간다. 위험을 무릅쓰고 내려왔더라면 1분이면 닿을 거리다.
▼ ‘못 간다고 전해라’로 대변되는 이애란의 ‘백세인생’을 떠올리게 만드는 저 문구는 대체 뭐란 말인가. 쓰레기에 얼마나 몸살을 앓았으면 저런 현수막까지 내걸었겠는가. 그렇다면 나는 어땠을까? 한번쯤 뒤돌아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 드넓은 인삼포(人蔘圃)가 눈길을 끄는 이 구간도 갈림길을 여럿 만난다. 그러니 좌회전·우회전 등의 진행 방향을 거론하는 건 무의미하다. 나처럼 GPX 트랙을 미리 다운받아 놓지 않은 사람들은 선두대장의 방향표시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 ‘환평리 갈림길’에서 15분(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15분), 서화천(옥천에서는 ‘소옥천’이라 부르기도 한단다)에 내려서니 ‘이지당(二止堂, 보물 제2107호)’이 얼굴을 내민다. 조선시대 중엽 인근 옥각리에 살던 김(金)·이(李)·조(趙)·안(安)의 4문중이 합작해서 세운 서당이다. 이후 퇴락된 것을 1901년 이 서당을 세웠던 4문중에서 재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 서화천을 바라보며 석축기단 위에 지어진 건물은 정면 6칸, 측면 1칸이다. 일렬로 서있어서 마치 하나의 건물처럼 보이지만, 본채 1동, 누각건물 1동으로 돼있다. 위로 오르는 사다리도 놓여있는데, 중층의 누를 덧붙여 지은 이런 형태는 찾아보기 힘든 경우라 그 가치가 더 높다고 한다.
▼ 마루에는 각신서당(覺新書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각신동’이라는 마을 앞의 서당이라는 뜻으로 이곳에서 후학을 가르쳤던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조헌(趙憲, 1544-1592)이 직접 썼다고 한다. 호인 중봉(重峯)으로 더 알려진 그는 임진왜란 때 1,700여 명의 의병을 규합해 영규대사의 승병과 함께 청주를 수복하는 공을 세웠다. 그러나 금산싸움에서 700명의 의병과 함께 순국했다.
▼ 먼저 도착해 있던 집사람이 반가워 카메라부터 들이댔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이지당(二止堂)’의 현판을 배경 삼았다. 이지당은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시전(詩傳)의 ‘고산앙지 경행행지(高山仰止 景行行止)’에서 따왔다고 한다. ‘산이 높으면 우러러 보지 않을 수 없고 큰 행실은 그칠 수 없다’라는 뜻의 문구에서 끝의 두 ‘지(止)’자를 따 새로운 이름으로 삼았다.
▼ 이지당으로 들어가는 초입은 멋진 바위가 줄을 잇는다. 그 바위에 ‘이지당 중봉선생유상지소(二止堂 重峯先生遊賞之所)’라 새겨져 있었다. ‘우재선생서(尤齊先生書)’라는 글씨도 보이는데, 우재는 송시열의 또 다른 호라고 한다. 우암이 ‘이지당(二止堂)’이란 이름을 지어주고 남긴 글씨란다.
▼ 서화천 위로 놓인 다리(이지당교)를 건너 트레킹을 이어간다. 다리 건너에서 만난 ‘옥천자전거길’ 안내판은 이후부터 자전거와 공존해야 함을 알려준다.
▼ 다리를 건너 도로로 올라선다. 그리고는 천변도로를 따라 하류로 내려간다(반대편은 4번 국도로 연결된다). 언제부턴가 도로명이 ‘옥각로’로 바뀌어 있다.
▼ 맞은편 도로에서 바라본 ‘이지당’. 바위 반 흙 반의 벼랑을 여덟 폭 병풍삼은 이지당은 서화천을 앞마당 삼았다. 개울에서 흐르는 물소리, 잎사귀를 때리는 빗소리로 심신을 안정시키며 공부하기에 딱 좋은 장소라 하겠다. 공부에 몰두하다가 머리라도 지끈해지면 마루로 나와 그 소리들을 벗 삼아 휴식을 취하지 않았을까?
▼ 반대편에는 ‘서화천’의 생태하천 복원공사(각신지구)가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2만평쯤 되는 하천부지에 인공습지를 조성하는 중이란다. 여행객들을 끌어들이려는지 탐방로와 정자, 벤치 등도 함께 만들고 있었다.
▼ 이지당에서 10분. 오백리길은 도로를 따라 고개를 넘는다. 하지만 나는 GPX 트랙이 지시하는 대로 둑길로 내려섰다. 그리고 꼭꼭 숨어있던 비경을 만났다. 산태극수태극이 기묘한 아름다움으로 펼쳐지는데, 이런 풍경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어디 그리 흔하겠는가.
▼ 바위절벽을 끼고 도는 감입곡류(嵌入曲流)는 언제 봐도 신비롭다.
▼ 눈의 호사를 누리며 10분쯤 걷자 ‘서화천 생태습지’에 닿는다. 4만7천 평(습지만도 1만 평이 넘는단다)이나 되는 ‘지오리’ 일대 하천부지에 수질정화를 위한 습지를 조성해놓았다. 하수종말처리장에서 처리된 처리수를 다시 정화하고, 빗물과 함께 유입되는 비점 오염물질을 정화해 ‘소옥천(서하천의 하류)’으로 방류하는 시스템이란다. 소옥천의 물은 침강지와 깊은 습지, 얕은 습지, 생태침강지 등을 거치면서 식재된 식물의 수질정화를 통해 깨끗한 물로 다시 태어나 하천으로 되돌아간다.
▼ 생태습지는 관광지 냄새를 물씬 풍긴다. 호수를 연상시키는 연못들 사이사이를 누비는 탐방로는 물론이고, 조망 데크에 분수까지 갖췄다. 휴게시설과 체험장도 있단다. 거기다 노랑꽃창포와 부들·노랑어리연꽃·갈대·수련 등 수질정화 기능이 뛰어난 수변 및 수생식물까지 심었다니 어련하겠는가.
▼ 범위가 하도 넓은 탓에 생태습지를 한눈에 담을 수는 없다. 그래도 꼭 담고 싶다면 남쪽 끄트머리(용목마을 앞)에 있는 ‘조류 관찰대’를 추천한다. 길게 놓인 계단이 다소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이에 대한 보상은 의외로 크기 때문이다.
▼ 데크 계단을 오르면 팔각정을 만난다. 정자 앞 난간에는 조류 관찰용 망원경이 마련되어 있다. 습지를 찾아오는 철새들이 놀래지 않게 하려는 배려일 것이다. 하지만 관광지에 가까운 습지에서 노니는 철새들이라면, 사람 몇 지나간다고 해서 놀랄 일도 없을 것이다.
▼ 때를 잘못 맞춘 탓인지 철새는 눈에 띄지 않았다. 대신 드넓은 생태습지가 일목요연하게 펼쳐진다. 저 습지는 수질개선이라는 본연의 임무 외에도 인근 주민들에게 소득까지 늘려준단다. 임금을 주고 제초작업 등을 부탁한다니 두 마리의 토끼를 한꺼번에 잡은 셈이다.
▼ 다시 길을 나선다. 이번에는 ‘지오2길’을 따라 ‘보오마을’로 간다. 왼쪽 옆구리에 서화천을 매달고 가는 모양새라고 보면 되겠다. 참! 이 구간은 상습 침수지역이기도 하다. 대청호의 수위가 올라가면 자동으로 물에 잠기게 된단다. 그래선지 초입에 차단기를 설치하고, 침수가 될 경우 도로를 막겠다는 ‘통행금지’ 팻말을 붙여놓았다.
▼ 습지에서 정화된 물이 내려가는 길목은 강태공의 차지였다. 아니 이 부근의 서화천변은 온통 강태공들이 타고 온 차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대청호의 수위가 오르면 몰려드는 물고기 떼를 따라 낚시꾼들이 떼를 지어 모여든다나? 그러다보니 쓰레기 관련 민원도 함께 늘어났고, 2021년부터는 낚시를 금지하고 있다던데...
▼ 냇물을 걸상 삼은 저 ‘옥천천 수질측정소’는 대청호의 수질오염 방지를 위한 시설이란다. 서화천의 수질을 상시적으로 측정·감시해오고 있다나? 아무튼 오백리길은 저 측정소를 마지막으로 대청호(서화천)와 헤어져 내륙으로 파고든다.
▼ 조류관찰대에서 15분, ‘보오마을(’보골‘ 또는 ’복골‘로도 불린다)’에 이른다. 조그마한 산촌이지만 첫인상이 무척 좋아 보이는 마을이다. 마을이 온통 꽃으로 뒤덮여 있었기 때문이다. 조그만 터라도 있을라치면 어김없이 꽃밭을 만들어놓은 덕분이다. 경로당 앞에 정자를 지어 나그네들에게 쉼터까지 제공하고 있었다.
▼ 골목길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담벼락에 벽화를 그려 넣었는가 하면. 돌 축대사이사이도 꽃을 심어 풍치를 더했다. 하지만 이 마을은 장마가 길어지기라도 하면 육지 속의 섬이 되어버리는 오지마을이기도 하다. 대청호가 만수위가 되면 마을 진입로가 물에 잠겨버리기 때문이다. 이 마을의 유일한 교통수단인 시내버스도 함께 끊겨 버림은 물론이다.
▼ 고샅길을 올라가니 비석에 시 한 편을 새겨놓았다. 류재길 씨의 ‘대청호야 돌려다오’라는 시로 대청호가 삼켜버린 풍경에 대한 그리움과 마을의 정취를 노래하고 있다. <봄이 오면 냇물 따라 천렵하는 노래소리, 어두우면 아낙네들 땀 내리는 첨벙소리>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 설레지 않는가.
▼ 고샅길을 지나 마을 뒤로 나간다. 오백리길은 이제 ‘이평1길(2차선 도로)’이 지나가는 산등성이(아래 사진의 둑처럼 보이는 부분)를 향해 나아간다.
▼ 잠시 후 만나는 ‘소류지(沼溜地)’는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길이 둘로 나뉘는데도 오백리길의 표식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소류지를 오른편에 끼고 직진하면 된다. 길이 훤하게 뚫려있는 왼쪽(아스팔트로 포장까지 되어 있다)에 홀리지 말 일이다.
▼ 조금 전 거론했던 산자락에 이르자 길을 ‘갈 지(之)’자를 쓰면서 위로 올라간다. 하지만 금방이면 끝나니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아니 눈앞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경에 취하다보면 오르막길이라는 것까지 깜빡 잊어버릴 것이다.
▼ 집사람의 부지런한 손길은 오늘도 멈출 줄 모른다. 서방님께 하나라도 더 먹이고 싶어 하는 그녀의 눈에 나물이 들어왔으니 어찌 그냥 지나치겠는가. ‘달래장’으로 변한 저 달래는 내일 아침 곱창김과 함께 밥상으로 올라올 것이다. 아까 이지당에서 나를 기다리며 캤다는 냉이는 국으로 끓여져 있을 것이고.
▼ ‘이평리’로 연결되는 차도(이평1길)로 올라섰다. 보오마을에서 이곳까지는 0.75km, 하지만 나물을 캐는 집사람과 보조를 맞추느라 20분이나 걸렸다. 참! 도로와 만나는 지점에 이정표(이평리 2.5㎞/ 이지당 4㎞)가 세워져 있다는 걸 깜빡 잊을 뻔했다. 그러나 이름표(보골 갈림길)가 무색하게도 ‘보골’로 내려가는 방향표시는 매달려있지 않았다. 이후부터 오백리길은 차도를 따른다. 2차선 도로이지만 차량통행이 거의 없어 오가는 차량의 눈치를 볼 필요는 없다.
▼ 길이 편하면 눈이 바빠지는 법이다. 그러다가 꽃보다도 아름답다는 만추의 풍경을 만났다. 골짜기에 숨은 듯 들어앉은 ‘보오마을’이 붉은 옷으로 단장한 낙엽송 산자락과 함께 어우러지며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내는 것이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으로다.
▼ 이 일대는 토종식물이자 멸종위기식물인 ‘병아리풀’의 자생지란다. 한해살이인데다 8-9월에 꽃을 피운다니 꽃구경은커녕 풀 구경도 이미 물 건너간 셈. 관상용으로도 재배한다니 누구네 화단에서나 만날 볼 기회가 주어질라나?
▼ 달도 차면 기운다고 했던가? 힘겹게 고갯마루로 올라선 길은 다시 아래로 향한다. 그런데 이게 만만찮은 눈요깃거리가 된다. 지형지물을 살려가며 길은 냈는지 도로가 만들어내는 곡선미가 제법 아름답다.
▼ 깊은 계곡에는 대규모 ‘폐기물종합처리장’이 들어섰다. 쓰레기 매립지와 소각시설로 이루어졌다는데, 저 ‘소각시설’이 낭비로 여겨지는 이유는 대체 뭘까? 쓰레기 소각으로 열을 얻어내는 시설을 오랫동안 봐왔던 기억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근처에 산다는 이유로 열 공급을 무료로 받았음은 물론이고, 아파트관리비도 소각장에서 내주었었는데...
▼ 한가로운 도로를 여유롭게 걷기를 30분. 7구간 때 만났던 ‘이평리(梨坪里)’와 같은 이름의 동네가 나타나는 게 아닌가. 아니 ‘같은 듯 같지 않은’ 마을이다. 대청호에 물이 차면서 마을이 졸지에 둘로 나뉘어버렸고, 이젠 대청호를 사이에 두고 목메어 바라보는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 이평리 앞에서 다시 ‘서화천’을 만났다. 그런데 이게 몸집을 확 불린 것이 아까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서화천이 금강에 합류되는 지점에 가까워졌다는 얘기일 것이다. 금강이 흘러가는 길목에 댐을 만들면서 대청호가 생긴 것이고...
▼ 또 다른 호숫가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도로변에 걸린 현수막은 ‘반딧불이 서식처 복원공사’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려준다. 맞다. 올 봄엔가 홍수터라는 대청호반에 생물서식처인 둠벙과 생태습지 등을 조성 수변식생을 복원하겠다는 기사가 뜨기도 했었다. 이평리 일대는 반딧불이 3종을 비롯한 멸종위기 야생생물과 청정지표종·희귀종이 서식하고 있단다. 하지만 생태계 교란종이 확산되면서 개체수가 확 줄어들었단다.
▼ 공사는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개체수를 늘려가고 있는 생태계 교란종을 제거하고, 생태복원 깃대종(늦반딧불이, 꼬리명주나비 등)의 서식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공사이다. 반딧불이를 테마로 한 생태관광지로 개발하려는 목적도 있을 것이다.
▼ 오백리길은 막바지를 향해 내닫는다. 하지만 그 끝을 쉽게 내주고 싶지 않은 듯, 높이가 130m쯤 되는 고갯마루를 넘어가란다. 체력은 이미 바닥으로 떨어졌는데...
▼ 이평마을에서 15분, 고개를 넘자 이번에는 ‘석결(石結)’마을이 얼굴을 내민다. 뭐 볼게 있어 그 먼 길을 왔냐는 할머니들의 자가용은 신식이었다. 유모차를 밀고 다니던 분들이 언제부턴가 자신만을 위해 제작된 자가용을 몰고 다닌다. 편의성과 안전성을 모두 갖췄으니 모터가 없는 수동이라고 해서 뭐가 문제겠는가. 내리막길에서는 브레이크를 잡고, 걷다가 지치면 안락한 의자에 앉아 잠시 쉬면 그만이다. 마실 것? 의자 아래에 짐칸을 배치했으니 ‘걱정아 물러가라’이다.
▼ 석결마을에서 더 넓어진 대청호를 만났다. 서화천을 따라오던 오백길이 어느덧 금강 본류에 이르렀다는 증거일 것이다.
▼ 몇 걸음 더 걸어 만난 모퉁이에는 작은 공원이 들어서 있었다. 정자에는 오백리길 표지판을 붙여놓았다. 이곳까지 걸어오느라 지쳤을 나그네들에게 다리품이라도 풀고 가라는 배려일지도 모르겠다.
▼ 하지만 게으른 지자체는 만들지만 알았지 정비하는 건 잊었나보다. 선비길(8구간)의 명물로 꼽히는 장승이 온전치를 못한 걸 보면 말이다. ‘대청호 보전하세’를 여읜 ‘금강인 어절씨구’만이 외롭게 서있다.
▼ 날머리인 ‘돌거리고개’를 향해 길을 재촉했다. 하지만 고갯마루로 올라가지는 못했다. 날머리를 200m쯤 앞둔 지점에서 선두대장의 방향표시지가 ‘대청댐광장(실은 부유쓰레기 적치장이다)’을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돌거리고개에는 주차할만한 장소가 없다나?
▼ 날머리는 ‘돌거리고개’(옥천군 군북면 석호리)
때문에 돌거리고개까지는 산악회 버스로 이동했다. 석호길(진걸마을에서 옥천으로 나가는 도로)과 우리가 걸어온 ‘석호1길’이 만나는 삼거리가 8구간의 종점이다. 아무튼 오늘은 14.42km를 3시간 50분에 걸었다. 나물을 뜯는 집사람에게 보조를 맞추느라 조금 더디게 걸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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