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고향을 찾아서] 서울 절두산 순교성지 (상)
피로써 신앙 지킨 '순교 1번지' 절두산(切頭山)
(사진설명)
1.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수천명의 순교자를 낳은 절두산에 세워진 절두산 순교 성지 전경.
2. 신자들이 순교박물관 성당에서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고 있다.
3. 방문객들이 절두산 순교박물관에 전시된 전시물을 둘러보는 있다.
우리 말로야 별 뜻 없는 산 이름처럼 들리지만 한자(漢字)를 풀이해보면 섬뜩하지 않을 수 없다. '머리를 자르는 산'이라니… 무슨 곡절이 있길래 그토록 꿈자리 사나운 이름이 붙었을까.
서울에서 88도로나 강북 강변도로를 타고 김포공항으로 가다 보면 강북쪽으로 당산철교와 맞닿아 있는 절두산 순교성지는 원래 땅 모양이 누에 머리와 닮았다고 하여 잠두봉(蠶頭峰)이라 불리던 곳이다. 지금이야 온갖 건물과 다리로 뒤덮혀 상상조차 하기 힘들지만 150여년 전만 해도 이곳은 전국 각지에서 쌀과 어물과 채소를 싣고 서울로 올라오는 배가 정박하던 교통 중심지였고, 풍경이 뛰어나 많은 풍류객들과 문인들이 뱃놀이를 즐기며 시를 읊었던 명승지였다.
그랬던 잠두봉이 절두산이라는 비극의 이름을 얻게 된 것은 한국 천주교회사상 마지막이었으며 동시에 가장 많은 순교자를 낳은 병인박해(1866년)를 기해서다. 로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가 두 차례 침입해 잠두봉 일대를 점령하는 사태(병인양요, 丙寅洋擾)가 일어난 후 조정은 이곳을 천주교인들을 처형하는 사형 집행터로 택하게 된다. 교통과 군사 요충지인 이곳이 서양세력에 의해 더럽혀진 것이 천주교인들 때문이니 천주교인들의 피로써 이곳의 오욕을 씻겠다는 뜻이었다.
그해 10월 황해도 사람 이의송(프란치스코) 일가족이 처음으로 순교한 이래 김증은·박영래·최수·김진구 등이 줄줄이 이곳에서 죽임을 당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잠두봉에서 순교했는지는 적게는 수천명에서 많게는 만여명에 달할 것이라고 추정만 할 뿐이다. 그렇게 많은 무명 순교자들이 처절한 죽음을 맞은 병인박해가 끝난 다음 이곳 이름은 잠두봉에서 절두산으로 바뀌었다.
지금이야 순교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고 바뀐 이름으로 미뤄 짐작만 할 뿐이지만 죽음에 이르는 피맺힌 절규와 목숨을 바쳐서라도 신앙을 지키겠다는 순교자들의 거룩한 넋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한국교회 대표 성지가 바로 절두산 순교성지인 것이다.
순교자들의 절절한 숨결이 밴 절두산에 지금의 순교박물관이 들어선 것은 지금부터 37년 전인 1967년의 일이다. '절두산 치명터를 확보하자'는 호소문을 발표하면서 각계각층의 협조와 관심을 구하던 한국 천주교 순교자현양회가 1956년 마침내 절두산 순교터를 매입하고 62년 순교기념탑을 세운 데 이어 66년 순교박물관을 착공, 67년에 축복식을 가졌다.
절두산 순교성지가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성지로 떠오르며 순례객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는 데는 순교박물관이 기여한 공이 절대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혜화동성당을 설계한 건축가 이희태(요한, 1925∼81년)씨가 설계한 순교박물관은 현대 교회 건축사에 한 획을 그은 걸작이라는 게 관계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평가. 세계 건축대회에서 은상을 수상하기도 한 순교박물관은 순교정신을 상징적으로 잘 드러내는 동시에 한국 고유의 전통미를 한껏 살렸다는 극찬을 받았다.
절두산과 한강변이라는 자연적 배경과 조화를 이뤄 건립된 순교박물관은 본관(3층, 325평)과 성당(99평) 그리고 종탑(25평)으로 이뤄졌다. 옛 초가집 지붕처럼 포물선을 그리며 미끄러져 내린 추녀, 조상들이 쓰던 갓 모양의 성당, 순교자들의 목에 채워졌던 목칼을 상징하는 구멍뚫린 수직 벽 등 건물을 구성하는 하나하나가 순례객들에게 옛 정취를 불러일으키면서 포근한 정감에 젖어들게 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특히 성당은 제단에서 성찬과 말씀이 반사되어 바깥 세계로 퍼져나가는 부챗살 형태로, 다른 성당에서는 느낄 수 없는 독특한 조형미를 자랑한다.
순교박물관은 또한 당대 성미술 거장들의 역량이 총결집된 '교회미술의 보고(寶庫)'나 마찬가지다. 조각가 김세중(프란치스코)씨가 제작한 종탑 순교자상과 대리석 제대, 감실을 비롯해 서양화가 윤명노(아우구스티노)씨의 박물관 모자이크 '순교', 조각가 최의순(요안 비안네)씨가 제작한 성당 안 '십자가의 길 14처', 한국추상화단의 선구자였던 서양화가 정창섭(암브로시오)씨가 그린 대작 '순교자', 최종태(요셉)씨의 작품 '순교자를 위한 기념상' 등이 절두산 순교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는 대표적 교회 성미술 작품들이다. 교회 미술에 관한 한 절두산 순교박물관은 양과 질 모든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같은 건축미와 성미술이 한데 어우러져 아름다운 자태를 맘껏 뽐낸 결과 절두산 순교성지는 순례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명소가 된지 오래다. 성지에서 만난 최정윤(안젤라, 서울 목동본당)씨는 "성지가 집에서 가깝기도 하지만 분위기가 좋고 또 기도하고픈 마음이 절로 들어서 적어도 1주일에 한두번은 이곳을 꼭 찾게 된다"면서 아직까지 절두산 성지에 와보지 못한 신자가 있다면 꼭 한번 와볼 것을 권했다.
<평화신문, 제757호(2004년 1월 18일), 남정률 기자>
[믿음의 고향을 찾아서] 서울 절두산 순교성지 (하)
교회 문화와 예술의 장으로 발돋움
(사진설명)
1. 성당 제대 바로 아래 지하에 있는 성해실에서 신자들이 기도하고 있다. 이곳에는 순교자 유해 28위가 안치돼 있다.
2. 절두산 순교성지 박물관 2층에 있는 '전통 인형으로 빚은 한국천주교회사' 전시실. 한국 교회사 주요 12장면을 인형으로 재현했다.
절두산 순교성지를 구석구석 살펴볼 차례다.
교회사의 생생한 현장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이라면 본관 2층과 3층에 있는 박물관부터 둘러보는 것이 좋겠다. 소장품은 서적류 1250여점, 교회 사적지 유물 750여점, 민속품 150여점, 사진류 290여점 등 모두 3000여점.
주요 전시물을 꼽아보면 상재상서(上宰相書) 한문 필사본, 김대건 성인 친필 서한, 노기남 주교 선임 교황 교서, 중국 강희(康熙)·건륭(乾隆) 황제 친필 족자, 여사울·개촌리 출토 유물, 정약용이 그린 산수화, 안중근 의사 유품 등 어느 것 하나 귀하지 않은 소장품이 없다. 귀에 익숙한 인물들 유품도 유품이거니와 박해시대 이름 모를 신자들의 애절한 신앙이 묻어있는 유품들이 주는 감동 또한 만만찮다. 박해 때 순교한 선조들이 남긴 녹슬고 이끼 낀 묵주 하나를 보면서 그들의 애절한 신앙을 느낄 수 있는 순례객이라면 박물관을 돌아보는 데 시간을 충분히 잡아야 한다. 하나하나 눈여겨보다 보면 하루 해가 짧게 느껴질 것이다.
박물관은 지난해 좀더 쾌적한 관람을 위해 바닥과 벽면을 새로 꾸미고 진열장을 교체하는 등 대대적 수리를 거쳐 새롭게 단장했다. 그래서 지금은 여느 현대적 박물관 못지않은 세련된 분위기를 자랑한다.
박물관을 관람할 때 빼놓지 말아야 할 곳이 2층에 있는 '전통 인형으로 빚은 한국천주교회사' 전시실이다. 이벽 세례, 명례방 신앙집회, 김대건 사제 서품, 최양업 신부 선교활동 등 교회사 주요 12장면을 인형으로 재현한 이곳은 순교자들 삶과 신앙을 좀더 실제적으로 엿보게 하는 생동감을 지녔다. 어린 자녀를 동반한 부모라면 가장 먼저 들르길 권한다. 일단 재미를 느끼게 한 다음 나머지 전시실을 둘러본다면 '빨리 나가자'는 아이들 성화에서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박물관은 매일(월요일 제외)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문을 열며, 입장료는 1000원이다.
박물관을 도느라 뻐근해진 다리도 쉴 겸 성당으로 가보자. 성당은 기도하고픈 마음이 절로 들만큼 아늑하며 미적 감각 또한 뛰어나다. 순교박물관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는 사람은 성당 제대 바로 아래 지하에 성인들 유해를 모신 성해실이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그냥 지나치기 쉽다. 하지만 신자라면 반드시 거쳐야 할 곳이 바로 성해실. 제대 오른편에 나 있는 계단을 통해 지하로 내려가면 28위 순교성인 유해를 모신 성해실이 눈에 들어온다.
1967년 성당이 건립될 당시 처음 안치된 유해는 남종삼·베르뇌 장 주교·다블뤼 안 주교·이영희·최경환 등 1984년 한국천주교회 창설 200주년 기념식 때 성인품에 오른 병인박해와 기해박해 순교자 16위다. 이후 김성우·이명서·황석두·이윤일 성인 등 유해를 추가함으로써 지금의 28위가 됐다. 유해는 순교 날짜 순서로 배치하고, 윗줄 6처는 비워둔 상태다. 나중에 순교자들이 시성되면 모실 자리다. 성해실에는 성인들의 처절한 순교정신을 기억하며 기도하는 신자들이 끊이지 않는다. 부모없는 자식 없다고, 교회 초석을 놓은 그분들께 감사하고 기도하는 것은 신자로서 당연한 도리가 아닐까.
박물관과 성당, 성해실을 한바퀴 돌아본 다음 성지 광장으로 내려오면 한가운데 우뚝 선 김대건 성인 동상이 순례객을 맞는다. 성지가 강변에 자리잡아 광장 앞으로 툭 트인 한강을 내려다보며 감상하는 맛도 괜찮다. 일반인들에게 천주교 성지가 아닌 쉼터로 소개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멋진 경관이 일품이다.
신자라면 김대건 성인 동상을 중심으로 동그랗게 나 있는 14처를 따라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는 것도 이곳을 찾은 큰 의미일 게다. 이곳 14처에는 150여년 전 이곳에서 순교한 신앙선조들이 바쳤을 옛 성로선공(聖路善功, '십자가의 길' 옛 이름) 기도문을 각 처마다 오늘날 기도문과 함께 실은 것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뎨이쳐 예수 십자가를 지심이라/ 제2처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심을 묵상합시다….' 이곳에서 순교한 이들과 함께 바치는 십자가의 길 기도, 평소와는 다른 감동에 젖게 한다.
절두산 순교성지는 현재 다양한 변화를 모색하는 중이다. 신자들이 좀더 가벼운 발걸음으로 찾을 수 있는 친근한 성지가 되도록 하겠다는 것이 지난해 12월 부임한 김용화 주임신부의 포부. 신자들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수동적 자세에서 벗어나 다양한 프로그램을 실시함으로써 신자들을 적극 유치(?)하겠다는 것이다. 김 신부는 "어린이, 노인 등 여러 계층의 기호에 부합하는 프로그램과 행사를 개발해 성지 영역을 확대해나가는 한편 성지가 교회 문화와 예술의 장이 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전철 2호선 합정역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는 절두산 순교성지. 춥다고 집에서만 뒹굴고 있는 아이들 손을 잡고 바람도 쐴 겸 교회사 공부도 할 겸 한번 찾아가보자. 손자를 맞는 할머니처럼 하늘나라 순교자들이 두팔 벌려 반겨줄 것이다.
<평화신문, 제758호(2004년 2월 1일), 남정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