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봄비가 왔습니다. 우수가 코앞이라 생각하니, 불현듯 상수리나무 군락지가 그리워집니다. 양학동 등산로에 있는 곳 말입니다. 무엇에 홀린 듯, 나도 모르게 좋아하게 된 곳이지요. 내가 왜 상수리나무 군락지를 새로이 발견하고, 바라보게 되고 좋아하게 되었는지는 나도 잘 모릅니다. 굳이 말하라시면 살아있는 대자연의 마음, 나아가서는 우주마음 같은 것이 있어 나를 그 곳으로 불렀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애매한 말이 어디 있느냐고요? 그렇지요. 하지만, 어디 사람 사는 일들이 유한한 우리들의 언어로 다 똑 부러지게 표현할 수 있던가요. 그리고 보이는 것 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많다고 하는 주장도 있으니까요.
군락지의 상수리나무를 내가 처음 느끼기 시작한 날짜는 모르지만, 때는 기억이 납니다. 어느 봄 날, 혼자서 등산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긴 소나무 사이 길을 걷다가 어느 지점에서 하늘이 확 들어났습니다. ‘오른쪽으로 보면 영일만 바다가 보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나는 저절로 “오!”하고 탄성을 지르고 말았습니다. 그 곳엔 두 생명의 바다가 일렁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먼 뒤에 있는 하나는 짙푸른 영일만 생명의 바다요, 그 앞으로 다른 하나는 연두색 푸른 생명의 바다였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숱하게 보아온 봄 철 상수리나무의 새잎들이었지만, 그 날 본 상수리나무 잎들은 그 전의 그것과는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느낌으로, 의미로 내 마음을 황홀케 했지요.
따사한 봄볕을 온 몸으로 사랑하며, 상수리나무바다의 잎들은 일제히 새 생명을 뽐냈습니다. 열심히 일하고 노래하며, 춤추고 해를 향해 기도하며, 찬미하고 있었습니다. 땅 아래로 흐르는 생명수와 거기 녹아있는 생명의 성분들을 부지런히 빨아올리고, 공기 중의 탄산가스를 비롯하여 필요한 성분들을 열심히 흡수하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지요. 한 몸인 줄기와 가지와 꽃은 물론, 분신인 상수리에게 줄 영양분을 만드는 신비한 모습도 보이고, 힘찬 소리도 들리며, 향기로운 냄새도 나는 것만 같았습니다. 마치 살랑대는 잎들과 내가 하나가 된 듯, 그만 넋을 잃은 사람처럼 잠시 그 곳에 우두커니 서서, 그 아름다운 생명의 빛깔과 춤추는 모습에 취하였습니다. 줄기와 가지의 모세관을 통해 연록 잎사귀들로 흘러가는 물소리가, 어느 청아한 개울물 소리처럼 들리는 듯도 하였고요.
그대.
‘생명’에 대한 새로운 느낌이자, 발견이었습니다. 나는 생각했습니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생명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건가?”
“‘나’란 생명체는 이 생명으로 가득 찬 자연 안에서 어떤 역할로 왔으며, 어떤 의미를 가지고, 어디로 가는 것인가……?”
생명의 바다로 둘러싸인 연두색 상수리나무바다를 옆에 두고 걸으며 상념에 빠졌습니다. 어떤 과학자들은 말합니다. 최초의 생명은 바다 속에서 우연한 기회에 단백질이 합성되어 생겨나, 끊임없이 진화하여 오늘날과 같은 다양한 생태계가 된 것이라고. 어떤 종교는 말합니다. 생명과 만물은 전지전능한 신이 창조하였고, 특히 인간은 신의 모상을 본떠 창조하였기에, 우리는 그 창조주의 품에 쉬기까지는 한 순례자에 불과하다고. 또 어떤 종교는 말합니다. 생명과 만물이 어떻게 생겼는지 하는 것은 무의미하며, 단지 인간이 실존으로 삼라만상과 연을지어 살고 있고 그 생은 억겁으로 윤회하므로, 윤회의 틀을 벗어나 참 자아를 찾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라고.
이런 나를 아랑곳하지 않고, 생명의 상수리나무 잎들은 열심히 일하며 노래하고, 춤추며 태양을 찬미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이봐요. 벗이여! 무얼 그렇게 상념에 잡혀 있나요? 태어나 살다가 사라지는 삼라만상, 우주 모두가 생명이란 사실을 그대는 모르시나요? 그래서 만물은 서로 동기간이요, 친구랍니다!” 하는 아름다운 소리가 내 마음에 속삭이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그대.
나는 느꼈습니다. 마음을 그토록 끈질기게 잡고 있던 그 무엇이, 오래 묵은 체증이 사라지듯 후련해 옴을……. 마치도 안개 속을 걸어가는 순례자가, 안개가 걷히고 밝은 세상이 보이기 시작하는 곳을 만나는 것 같았지요. 진리를 향한 애절한 갈증이 풀리며, 생명에 대한 구도(求道)의 길이 나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기뻤습니다. 내 눈앞에 펼쳐져 있는 저 아름다운 상수리나무바다가 비로소 제 모습으로 보여 지기 시작하기에. 그러고 보니 내 앞에, 내 주위에 있는 일체의 모든 것이 생명이며, 또한 그 생명의 일부로서, 모두가 나와 같은 동기요 벗으로 일제히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 흙 한줌, 돌 한 개. 상쾌한 공기 한숨, 시원한 물 한 모금, 팔랑팔랑 날아오는 나비 한 마리와 온갖 곤충. 하늘 높이 떠 있는 종달새 한 마리와 온갖 동물들. 내 부모 친지들과 아내, 아이들과 모든 사람들, 보이지 않는 존재들, 그리고 우리들의 푸른 별 지구와 해와 달과 모든 별, 우주……. 이 모든 것이 나와 하나이며, 한 생명체란 이 신비롭고 기막힌 사실을, 나는 숨을 죽이고 온 몸의 전율과 함께 보고,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바라던 큰 자유를 얻은 기분이었습니다.
그대.
“진리가 그대를 자유롭게 하리라!”라고 한 말의 뜻이 비로소 느껴져 왔습니다. 참 기쁨이 무엇인지, 처음 알게 된 것도 같았습니다. 서로 안다는 것과, 서로 통한다는 것, 서로 사랑한다는 것, 그리고 서로 하나가 된다는 것……. 이런 모든 개념들이 새로운 의미로 한꺼번에 되살아나고 있었습니다. 고통이 왜 있고 필요한지, 고독이 왜 있어야 하는지. 사람이 왜 마음의 그릇을 언제나 비워놓고 있어야 하는지, 왜 다른 사람과 사물에 이르기까지 최소한 자기와 동격으로 인정해야 하는지. 무엇보다 마음속의 공격성과 폭력성을 왜 시급히 극복해야만 하는지 하는 것들을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분자나 원자 보다 더 작은, 사람이 그 크기를 모르는 극미(極微)의 세계 무한소(無限小)에서부터, 그 크기와 시간을 알 수 없는 광대한 우주, 무한대(無限大)의 세계까지 모두가 연관이 있는 한 가족이며, 바로 자기 자신이란 사실이, 저 연두색 푸른 생명의 상수리나무바다 물결을 타고 저절로 느껴 옴을 알았습니다.
그대….
연두색 푸른 상수리나무 잎들이 다시 일제히 일렁이며 춤추고, 박수치며 생명을 환호합니다! 그리하여, 나는 그대를 포함한 삼라만상을 가족이요, 동기이며, 분신으로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음을 다시 한 번 깨닫고 다짐합니다. 이 아름다운 상수리나무군락지 앞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