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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롬비아 출신의 화가, 조각가. 보테로의 작품에 등장하는 육감적 인물과 '모나리자, 열두 살'처럼 문화적 아이콘을 장난스럽게 재해석한 작품으로 인해 '키치' 미술로 폄하되기도 하였다. 인간의 형상을 재미나고 즐겁게 표현한 바탕에는 사회에 대한 비평이 깔려 있다.
페르난도 보테로 [FERNANDO BOTERO] (501 위대한 화가, 2009. 8. 20., 마로니에북스)
콜럼비아의 화가. 메데린에서 출생. 마드리드의 산 페르난도 미술학교에서 배운 후, 피렌체에서 프레스코 기술을 습득. 인물을 주로 그리고 있으나, 크게 불어난 변형에 특징이 있다. 현대의 소박파라고 말할 화풍으로 경묘한 유머가 느껴진다. 1974년이후 뉴욕에 체류. 대표작은 『소녀』 (하노바 개인장) 등.
페르난도 보테로 [Fernando Botero] (미술대사전(인명편), 1998., 한국사전연구사)
1932년 콜롬비아 메델린(Medellin)에서 행상인 다비드 보테르의 3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투우사 양성학교를 나와 16세 때 메델린 미술연구소에서 개최한 그룹전에 두 점의 수채화를 출품한 것을 계기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1951년 콜롬비아의 수도 보고타로 이주하여 첫 개인전을 열었고, 그후 피렌체의 아카데미아 산마르코, 보고타의 국립미술대학에서 공부하였다.
1957년 미국 워싱턴에 있는 범미연맹(Pan American Union)에서 전시회를 열었고, 1969년에는 뉴욕현대미술관에서 부풀려진 이미지에 관한 전시회를 열었다.
1973년부터는 조각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작품의 배경은 고향 남미대륙으로 독재자, 탱고 댄서, 창녀, 아낙네 등이 등장한다. 소재로 삼은 인물이나 동물은 모두 실제보다 살찐 모습으로 그려지며, 작고 통통한 입과 옆으로 퍼진 눈으로 뚱뚱함이 더욱 강조된다.
마치 튜브에 바람을 넣은 것처럼 부풀려진 인물과 동물상, 독특한 양감이 드러나는 정물 등을 통해 특유의 유머감각과 남미의 정서를 표현하였고, 옛거장들의 걸작에서 소재와 방법을 차용하여 패러디한 독특한 작품들을 선보이기도 했다. 또 고대의 신화를 이용해 정치적 권위주의를 예리하게 고발하고, 현대 사회상을 풍자한 작품도 있다.
이처럼 개성적인 작품으로 1976년 파리비엔날레에서 주목받기 시작하여, 1992년에는 파리 샹젤리제 거리를 자신의 조각품으로 장식하는 야외조각전을 갖기도 했다. 1993년 뉴욕현대미술관에서 열린 〈20세기 라틴아메리카 예술가〉 전에 출품하였고 파크애버뉴에서 작품을 전시하기도 했다. 1996년에는 한국에서도 전시회를 가졌다.
주요 작품으로 모나리자를 패러디한 유화 《모나리자》(1977),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응용한 유화 《스페인 정복자의 자화상》(1986) 등과 조각작품으로 제우스가 유로파를 범하는 그리스 신화를 패러디한 브론즈 작품 《유로파의 강탈》(1992)이 있고, 그외 《창문 앞의 여자》(1990), 《담배 피우는 여인》 등이 있다.
출처:페르난도 보테로 [Fernando Botero] (두산백과)
(도판) 페르난도 보테로 , 앉아있는 여인, 212×197×192cm, 브론즈, 2002
콜롬비아 화가이자 조각가인 페르난도 보테로(87세)는 풍만한 양감을 통한 인체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남미의 정서를 대표하는 거장으로 평가받는다. 이탈리아 화가 안드레아 만테냐의 그림에 매료된 그는 인체를 풍만하고 묵직하게 그려낸다. 특히 서양 명작의 그림에서 인물을 풍선처럼 부풀리는 독특한 화풍이 압권이다.
남미의 피카소란 별명을 가진 페르난도 보테로(Fernando Botero)는 우울한 시대적 배경아래 콜롬비아 특유의 인간상을 나름의 형식으로 표현하였다.
그는 어떠한 미술 사조에도 휩쓸리지 않고 매우 독창적인 독자성을 구축한 작가이다.
그는 펜 드로잉으로 위험한 상황에 처한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고, 친구들과 메데인의 빼어난 경치를 그리기도 하였다. 오늘날까지 그의 모든 작품은 그곳 세계와 사람들에 대한 기억을 자양분으로 삼고 있다.
가난한 환경 속에서 아카데믹한 교육을 받은 적 없는 그는 스스로 독자적인 노력으로 자신의 작업세계를 구축하였을 뿐만 아니라 1952년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개최한 개인전에서 모든 작품이 팔려나가는 경이적 기록을 달성하였다.
사실은 모험심 강한 사진가 레오 마티스의 작업실에서 1951년에 이름 없는 젊은 화가 보테로의 유화, 수채화, 드로잉 25점을 전시했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이듬해 다시 개최하여 전 작품이 팔려나갈 만큼 완벽한 성공을 거두었다.
훗날 라틴 아메리카를 대표하는 화가가 될 것은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가 처음부터 터질 듯 풍만한 인체 볼륨을 표현한 것은 아니었다.
10대 후반부터 거장들의 작품을 혼자서 독학으로 공부하다가, 1952년 콜롬비아 국립도서관에서 열린 제9회 콜롬비아 살롱 전에서 2등을 하여 받은 상금으로 몇몇 친구들과 함께 유럽으로 떠나면서 부터이다.
4년간 유럽에 머물면서 미술관을 학교삼아 옛 거장들의 화법과 테크닉, 예술적 가치 등을 집중적으로 분석하여 습득하였다. 그는 작품의 주제보다는 스타일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시 추상회화가 대세를 이루던 시기였지만 그는 고전화가들의 작품에 커다란 열정을 보였다. 그는 당시의 주된 미술 경향과는 반대로 구상미술에 집중하여 고전적인 동시에 자신의 현시대를 표현하는 구상미술로 발전해 나갔다. ‘그는 인상파 이후의 현대미술에 대해 완전히 무관심 했고, 지오토, 마사초, 우첼로, 피에르 델라 프란체스카 등의 13-4세기와 그 뒤로 루벤스, 앵그르에게 끌린다.’ 뒤러와 루벤스를 지나면서, 벨라스케스와 만테냐, 조콩드에서 앵그르, 마네에서 보나르에 이르기까지 보테로는 많은 고전 작품들을 차용하여 보테르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특히 아래초에 있는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프레스코화의 능숙한 형태와 공간구성의 완벽함은 보테로가 회화작품을 판단하는 척도가 되었다.
피렌체에 머무는 동안 그린 그림을 귀국하여 국립도서관에서 전시하였으나 별다른 관심을 얻지 못했다. 이후 3년 뒤에 열린 미국 전시에서 ‘워싱턴 포스트’에 논의되었다.
그의 작품은 라틴 아메리카 감각을 나타낸 것으로 콜롬비아와 관련된 정신의 과장된 표현과 기괴한 특성 또는 고양된 실체를 표현한 것이다.
그림의 주제가 매우 독특한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 미술의 추세가 회화적 리듬과 인물과 공간의 관계 등은 추상주의의 범주 양식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추상이 범람하는 시기에 그는 미술관에서 연마한 독창적 구상 기법들을 굳건히 유지해 왔으며, 라틴 아메리카의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극도의 외로움과 궁핍 속에서 보낸 상태에서 그린 뉴욕의 그림들은 가장 아름다운 작품들에 속한다.
뉴욕에 거주하면서 추상표현주의의 영향을 받은 강렬한 터치의 그림을 그린다. 거친 필체로 추상표현주의의 영향을 받아 그린 〈모나리자 12세〉는 뉴욕현대미술관(MOMA)에 소장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그를 유명하게 만들기 시작한 계기는 1960-70년대 독일에서의 5차례 전시를 통해서였다.
그림 속의 인체들은 비례나 기법 면에서 자유로운 특징을 보인다. 자유로운 화법으로 조각적이고 생기 있는 감정을 불어넣었다. 보테로는 고요하고 느긋한 이런 유형의 인물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가 정한 원칙 중에서 개성과 감정과 불안 등을 제거했다. 그것은 보테로가 일상의 삶을 토대로 하기보다는 기억에 의존하여 작업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1963년 뉴욕에 작업실을 구하고 그곳에서 둥글고 부드러운 윤곽으로 둘러싸인 거대하고 정감 있는 인물들을 주제로 일련의 그림을 그렸다. 이 무렵의 보테로의 그림은 창백한 미묘한 색채를 선호하고 매끈한 제작과정과 형식적인 화법으로 변해간다. 자신만의 양식과 미학적 개념을 발견한 것이다. 당시 유행하던 팝아트와 달리 그의 작품은 초시간적이다.
조형미술과 민속예술에 영향을 미친 타자의 시선에 신경을 쓰지 않는 이러한 태도는 라틴 아메리카 회화에서 그 뿌리를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라틴 아메리카 미술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시기의 미술과 더불어 보테로 미술의 중요한 근원이 된다.
이러한 독자적 양식은 당대의 뉴욕 화단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으므로 대중들의 몰이해는 심각했다.
1964~1965년은 보테로에게 가장 중요한 해로 꼽힌다. 이시기에 그는 독창적인 회화 스타일, 즉 한껏 부풀어진 둥근 형태, 붓 자국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부드러운 처리, 극단적으로 과장된 볼륨 등 주제와 소재는 물론 미학 컨셉까지 완벽히 갖추게 되었다.
그의 조각은 완전히 개발되어진 독립적인 갈래인 반면, 그의 회화에 스며있는 3차원성에 대한 제시를 끊임없이 찾고 있는 자연스런 발로이다.
마치 어린아이의 몸 같은 익살스런 커다란 인물들은 풍만하고 살찐 모습으로 그림틀을 집어삼킬 듯이 과장되어 보인다.
그의 완전히 개인주의적이고 주관적인 작품은 시작부터 눈앞의 시대정신과 사조를 초월하였다. 그의 작업은 정치적 성향도 아니고, 이해가 되지 않거나 까다로운 것도 아니다.
1970년대 중반까지는 평범한 전근대 회화의 전통적 특색을 지닌다.
그가 유럽에서 배운 형을 단순화하여 요소에 대한 기교를 없애는 표현을 하게 된다. 많은 스타일과 다양한 유파들은 보테로의 조형적 기반을 제공하며 구체적인 볼륨을 실제 공간 안에 끼워 넣는다.
다른 작가의 작품을 변용하여 유연적인 이념을 보여주었으며 이러한 유연성은 개성적이고 풍자적 효과로 나타난다.
극도로 팽창된 부피감은 누구도 표현할 수 없는 조형의 신비감과 해학을 유발한다.
“그림을 관람할 때, 어디에서 그림을 보는 즐거움이 비롯되는지 아는 것은 중요하다. 내게는 풍만한 형태에서 풍겨 나오는 삶의 즐거움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형태의 풍만함을 만들어 내는 문제에 매달렸다.”
그의 작품에서 대중적인 인기의 비결은 첫 번째 볼륨에 충만한 독특한 스타일이고, 두 번째는 그림의 내용이 담고 있는 남미문화이다. 이 두 가지는 작품에서 유기적 결합을 이루며 남미 특유의 쾌활한 삶의 행복과 즐거움을 관능적으로 보여준다.
그가 추구한 것은 시각적 관능성이 아니라 조각 작품처럼 형태의 촉각적 관능성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간의 신체에 과도한 볼륨을 부여하였으며, 커다란 인체를 그려넣어 살아 숨 쉬는 생동감을 더하였으며 그림을 만져보고 싶은 촉각적 느낌을 유발한다.
보테로가 그린 그림들에서 인물의 표정은 없고 일괄적으로 인물은 그의 정물과 콜롬비아식 원형의 이미지와 같은 정신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보테로의 조각에서는 둥글둥글하며 관능적인 3차원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데, 그는 회화와 조각을 분리하여 별개로 보이길 원한다.
“그림은 사실의 환각을 주지만, 조각은 그 실재를 보여준다. 만약 내가 칼을 그리면 그것은 상상에 불과하지만 그것을 조각한다면 실재를 보여 준다”
보테로의 작품들은 주제별로 분류하자면 팽창된 인물상, 동물 조각, 정물 조각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팽창된 인물상은 그의 남성조각에서 작은 콧수염과 중절모를 쓰거나 담배를 피우는 라틴인의 신체적 특성에 의존한다.
1982년에 제작된 〈Generral〉은 군사적인 상이다. 하지만 그 모습은 자비로워 보인다. 그 장군은 큰 광장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거수경례를 하며 서있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1977년 〈작은 매춘부,Little Whore〉(도판 □)가 시선을 주면서 지나가는 남자들에게 자신의 몸을 자랑하고 있다. 로맨틱한 상상력으로 표현된 그녀의 핑크빛 허벅지와 종아리는 매력적이며 뻔뻔스럽기까지 한다. 행운을 잡기위해 도시에 상경한 시골 처녀 같으며, 초록빛 신발을 신은 모습은 더할 수 없는 매력이다.
여성의 몸에서는 생명에 대한 찬양과 풍만하고 관능적인 여성의 이미지로 커다란 가슴과 큰 엉덩이로 과장되게 표현하고 있다. 여성들의 포즈는 각기 다르며 포즈가 서로 다르며 그리스 작품에서 나오는 세 명의 여신들처럼 부드럽고 자유스러움을 표방하고 있다. 또한 루벤스의 그림에 나오는 볼륨 있는 여성성은 결국 보테로의 볼륨으로 바뀌는 것은 아닐까?
보테로는 주로 청동 작품으로 인체를 묘사하였지만, 에폭시와 돌 조각, 테라코타의 작업도 다소 있다. 청동 조각에 의한 강조된 팽팽한 표면은 풍만한 육체를 표현하기에 적합하였다.
보테로의 동물조각은 그가 아열대 지방에서 동물들과 함께 자랐기 때문에 동물에 대해 친숙하고 작품으로 표현하는 것은 당연하다.
동물 조각에서는 표면에 광택이 나는 표면처리를 하였다.
표현된 동물의 종류도 개, 닭, 고양이, 말, 뱀 등이 다양하다. 이러한 동물들은 극도로 팽창된 둥근 형태를 갖추고 있으므로 유순한 모습을 띄고 있다.
1981년에 제작한 〈말,Horse〉은 매달린 머리와 벌어진 입, 그리고 튀어나온 눈을 바라보면 사랑스러운 느낌이 든다. 그는 근본적으로 동물에 대한 애정과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 보테로는 동물에 대한 애정을 호소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자신의 개인사적인 세계와 통합되길 바라고 있다.
조각에서 정물을 다루는 것은 보기 쉬운 것은 아니지만, 북유럽의 미술사에서 거의 전반에 걸쳐서 찾아볼 수 있다.
보테로의 여성 누드들보다 더욱 감각적인 것은 정물이다. 역사적으로 화가들은 회화에 있어 순수한 기쁨을 만끽할 수 있었으므로 정물을 선호해 왔다.
정물을 그릴 때 그는 전통에서 가져올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져왔다. 여러 종류의 야채와 꽃들 중에서 콜롬비아를 대표하는 바나나와 수박, 파인애플을 선호했다.
‘많은 르네상스와 바로크의 이론가들은 미술에 있어서 주제 대상물의 서열에 대해 썼다. 미학의 구조 중 가장 낮은 단계에 과일과 꽃의 회화가 있다.’
하지만 20세기에 와서 작가들은 사물을 중요한 주제로 부각 시킨다.
보테로의 정물조각은 이러한 근대와 현대의 전통의 일부로 보여질 수 있겠지만 색다른 독창성을 지니고 있다. 그의 정물 조각은 부피와 중량을 느끼게 한다.
정물에 채색을 더하여 사물에 대한 사실성에 접근하고자 한 것도 특징적이다.
기억은 현실을 이상화하는 경향으로 인해 자칫 기만적일 수 있다. 가족의 초상화는 사회를 이루는 기본 단위로 남미인들의 신화와 관련된 매력적인 느낌을 준다.
남미의 중산층 가족과 사회적인 가족을 화폭에 옮긴다. 그의 그림은 고통과 긴장감은 발견할 수 없으며, 온화하고 자애로운 시선으로 표현되었다. 그것들은 언제나 비현실적이며 이상하게 얼어붙은 듯 굳어있다. 이 기억의 세계에서 우울과 동경은 광범위하게 퍼져있고, 향수와 실망감은 만연해 있다.
묘사된 행동들은 인사를 하려고 모자를 들고 있거나, 달리는 포즈를 잡거나, 삼륜차를 운전하거나, 바이올린을 연주하거나, 춤을 추거나, 방탕한 사창가를 그리거나, 그들은 행동은 화가의 요청에 따라 멈춘 듯한 모습이다.
매우 세심하게 정지된 모습으로 그린 그림은 우스꽝스럽게 보인다.
이처럼 인물들을 과일처럼 부동의 자세로 만드는 것은 그림을 보게 하기 위해서다.
형태를 과장하는 것은 단순화하거나 세부적인 생략을 하는 것이다.
커다란 인체의 몸에 비해 과일의 사물들은 너무 작다.
보테로의 그림 솜씨뿐만 아니라 그런 노력과 투박함에 매력을 느낀다. 이는 식민지 미술과 19세기 라틴 아메리카의 미술을 연상시키는 요소이다.
그들의 몸집이 거대해서 움직일 수 없을 것 같다. 살가죽은 풍만한 체구를 덮을 수 있도록 잔뜩 부풀어 있고, 벽은 빠듯이 닿아 있다.
보테로는 시대와 맞지 않는 방법으로 세밀한 방법으로 기초 작업과 유화 제작, 광택제 바르기 등의 기법을 숙달해 왔다. 처음에 그는 책을 통해 고전의 방식을 터득하려 노력하였다.
어느 정도 생활이 안정된 후에는 세계 각지를 여행하며, 작업을 하였고 오랫동안 해외에 머물렀다.
그는 주로 자기 성찰을 통해서 자신에게 정직하려는 의지를 통해 이런 표현법을 발견해 냈다. 보테로 미술의 내용과 형식은 매우 개성적이며, 개인적인 것이다.
처음부터 발견되지 않았지만, 결국 그는 새로운 미술을 창조해 냈다.
보테로의 여성 인물들은 모두 뚱뚱하고 어설프다. 터질 듯한 육감적인 살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에로틱하게 느껴지지 않으며 가까이 들여다봐야 여성의 가슴이 제대로 성장하지 못함과 치모가 작고 외소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성적 욕망이나 격정은 조금도 보이지 않고 자애로운 어머니로서 보호자의 역할을 자처한다.
그는 조각적인 가치와 색면에 정성을 쏟았다. 이러한 창조적인 팽창은 예술적이지만 사실적이지 않다.
보테로는 구상의 화가이지만, 사실주의 화가는 아니다. 그의 창조적 욕망과 미학적 이상은 부피와 형태감에 집중되어 있으며, 이러한 양식은 보테로가 자신만의 관점을 제시해 주는 것을 가능케 해준다.
조토와 라파엘로, 엘 그레코, 루벤스, 피카소 같은 화가들은 모두 과정 속의 무언가를 보여주기 위해 대상과 리얼리티를 변형시켰다. 중앙집중식 원근법이 아직 발견되지 않은 초창기에 활동한 지오토는 평평한 표면에 삼차원을 구현하기 위해 만져질 듯 구체적인 형태와 조형성을 추구했다. 뒤이어 루벤스는 종교적 황홀경을 그림에 도입하기 위해 살의 관능과 감각을 이용했다.
라틴 아메리카의 토속문화에서 뚱뚱함은 건강과 풍요를 상징하고 생의 기쁨처럼 긍정적인 의미와 연관 된다.
뚱뚱한 사람은 기분이 좋으며 감각적 즐거움이 있고, 좋은 성품을 의미한다.
결점 없는 순결함은 아름다움에 대한 견해와도 관련된 보테로의 주요 관심사였다.
그의 그림에서 그림자를 그리지 않는 것은 그 그림자가 색깔을 더 지저분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림들은 늘 광명 속에 노출되어 있고, 그림자는 최소한으로 존재한다. 빛이 외부에서 발원하지 않고 인체와 사물들이 지닌 색채에서 빛난다.
1963부터 보테로는 이미 조각을 실험적으로 시도하고 있었다. 브론즈를 뜨기 어려운 시기에는 합성수지와 톱밥을 사용하여 작업의 가능성을 보였다. 하지만 초기의 이러한 작업들은 많이 남아있지 않다.
10년 뒤 파리로 이주하여 경제적 안정과 함께 조각에 매진할 수 있었다. 특히 1980년대 초 돌 조각하기에 적합한 피에트라산타에 집과 작업장을 얻어 청동조각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현재 남아있는 200여점의 청동 조각들이 이곳 피에트라산타에서 창작되고 생산되었다. 보테로는 조각이 회화의 부가적 존재가 아니었다.
조각을 통해서 구상적이고 남미적인 형식적 원칙들을 삼차원의 물질적 현존이라는 관점에서 거대하게 확장된 볼륨으로 강조한다.
그의 조각은 고요하고 숭고하면서도 생략되고 유연한 형태를 지닌 초기 이집트 조각 같은 미술에서 영향을 받았다.
예를 들면, 보테로가 만든 거대한 여성 누드 조각상은 선사시대 다산을 상징하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를 연상할 수 있고, 기념비적인 동물 조각상에서는 고대 신전을 지키던 피라미드의 스핑크스를 떠올리게 한다. 서사적 요소가 배제된 조각은 숭고함과 함께 신화적 초시간성을 불러일으킨다.
헨리무어가 자신의 매끄러운 청동 조각을 제작했던 베르실리에세, 테스코니, 마리아니, 토마시 등의 주조공장에서 주물을 떠냈다.
이곳에서 일반 가정에 들어갈 만한 중간 크기의 조각과 더불어 수많은 기념비적인 청동 조각을 제작하게 되었다.
완벽할 정도로 매끈하게 제작된 청동 작품들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다운 고색을 발하며 진정 거장다운 솜씨를 보여준다. 단색조의 청동 조각이 실내의 미술관에 배치되었을 때에는 색체가 입혀진 조각보다 훨씬 깊은 안점감이 풍긴다.
규모가 큰 청동 조각들은 피렌체와 파리, 뉴욕을 순회하며 사람들의 마음을 매료시키며 감동을 선사해 오고 있다.
보테로의 조각들은 모두 밀접한 연관성을 갖추고 있다. 그의 의식 속에 존재하는 가공의 세계에 사물과 사람, 동물이 함께 존재하기 때문이다.
형식적 측면에서 한결 소박하고 절제되어 보이며 외형적으로 나타나는 모습도 마찬가지다. 그러한 이유로 보테로의 조각에서 보이는 과장되고 비현실적인 양식들은 더욱 분명하고 확실하게 다가온다.
뚱뚱한 조각상들은 인체의 형상적인 면보다 형태적인 면에서 한결 조각적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일화적인 내용을 더 위대한 정신성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보테로는 늘 고요한 미술을 찬양했다. 그것은 그에게 그리스 조각 같은 무한한 느낌을 주었다. 그의 그림은 서사적 내용이 담겨 있기도 하지만, 조각의 인물 표정은 얼어붙은 듯 굳어 있다. 이러한 특질은 인물들의 기념비성이나 그들이 점령하는 공간과 관계가 있다.
이러한 보테로의 기념비적인 조각들은 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으며 마드리드, 부에노스아이레스, 리스본, 피렌체 등지에 세워졌다.
콜롬비아에서 태어난 무명의 젊은 예술가의 과감한 도전과 열정이 어느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독창성을 만들어 냈으며, 세계로부터 인정은 받은 셈이다.
그의 작품에는 터질듯한 볼륨감과 몰개성적인 인물, 형식을 벗어난 비례, 대상이 가진 고유의 색 등이 잘 구현되어 있다.
먼저 보테로의 그림에는 다른 작가의 작품과 확연히 구별되는 터질 듯안 형태의 볼륨감이 있다.
미술이 주는 감각적인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강조한 그는 그것의 핵심적인 요소로 볼륨감에 주목하였는데, 평면의 캔버스가 가지고 있는 물리적인 한계를 극복하고 대상에 볼륨감을 표현하기 위해 선택한 것이 바로 형태의 팽창이다. 즉 그는 그림에서 소재의 형태를 단순화하고 팽창시킴으로써 볼륨감을 집중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 이렇게 형태를 왜곡했기 때문에 보테로의 그림에서는 제목, 장식, 옷 등에서만 인물들에 대한 약간의 정보를 알 수 있을 뿐 인물이 지닌 본래의 개성적 특징은 거의 생략되어 파악하기 어렵다. 이는 인물뿐 아니라 작품 속 대상들에게도 유사하게 적용되는데, 이렇게 작품 속 대상의 형태를 단순화하고 팽창시켜 볼륨감에 주목하도록 하여 감상자는 작품 속 특정 대상에만 시선이 머물지 않고 그림 전체에 구현된 볼륨감을 감상할 수 있게 됨으로써 감각적인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게 된다.
보테로는 그림을 그릴 때 사물과 인물 간의 비례, 인물과 인물간의 비례, 배경과 인물간의 비례 등을 자율적인 방식으로 표현하였다. 예를 들어 아이보다 큰 수박 조각, 남자에 비해 터무니없이 큰 여인, 인물과 비슷한 높이의 숲 등 실제의 세계와는 비례를 달리하여 구성함으로써 현실에서 존재하지는 않지만 그가 구현하고 싶은 세계를 자유롭게 표현하였다. 이러한 비례의 파괴로 인해 느껴지는 부조화에 대래 감상자는 보테로의 회화를 위트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또한 보테로는 대상이 가진 고유한 색을 분명하게 표현하고자 하였다. 그는 그림에 그림자가 표현되면, 그림자의 검은 색으로 인해 대상이 가진 고유의 색이 파괴되거나 모호하게 표현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림에 그림자를 거의 표현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색칠한 면 위에 또 색을 칠함으로써 새롭게 칠한 색과 이전의 칠한 색이 중첩되게 하여 색을 더 견고하고 명확하게 함으로써 대상의 고유한 색을 표현하였다. 이러한 특징을 지닌 보테로의 작품 중에는 거장들의 작품을 차용한 작품이 많다. 보테로가 거장의 작품을 차용한 이유는 그들의 권위나 명성을 끌어내리려 한 것이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작품을 차용함으로써 그들의 작품이 지닌 아름다움을 감상자가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이와 더불어 자신만의 독창적인 방법으로 재창조한 작품을 통해 거장들의 작품과 자신의 작품이 지닌 차이도 함께 강조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13살의 페르난도 보테로는 투우학교에 입학했지만 투우사가 되는 것보다는 투우사를 그리는 것에 더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왜 뚱뚱한 사람을 그리냐?”는 질문에 본인은 “저는 뚱뚱한 사람을 그리지 않습니다.”라고 답을 한다.
풍만한 양감을 통한 인체의 새로운 해석으로 남미의 정서를 대표하는 거장으로 평가받는다. 젊은 시절 이탈리아 화가 안드레아 만테냐의 ‘뚱뚱한 그림’에 매료된 그는 사람들의 모습을 풍만하고 묵직하게 그려낸다.
보테로는 미국이나 유럽의 미술 풍조를 따라가는 것에 반감을 느끼고 있었다. 또한 예술이 권위와 권력이 가진 오만, 부르주아 계층의 거만과 인간적이지 못한 사회 풍조를 경멸했다. 이와 함께 라틴문화에 자신의 예술혼을 쏟아 부어 특유의 멋과 맛을 그려내려 고심하던 그는 터질 듯한 양감, 말랑말랑한 부피감, 독특한 팽창감에서 그 대안을 보았다.
그는 뚱뚱한 사람을 그린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에게 중요한 건 '양감과 색채'이며 풍부한 양감표현을 위해 볼륨이 있을 뿐이란다. 또, 색채를 풍부히 사용하려면 그만큼 넉넉한 지면이 필요하다. 색을 적게 보여줄수록 작품이 더 다채로워진다는 그는 한 작품에 적은 수의 색으로 그것들을 혼합하여 표현한다. 그에게 있어 볼륨은 행복의 상징이며 건강과 긍정을 의미한다. 이것은 낙천적인 남미의 특성(풍만함, 건강, 부유, 즐거움)과 연결이 되어 있다.
지금은 이태리, 프랑스, 미국에 작업실을 두고 계절 따라 옮겨 다니며 열정을 쏟고 있다.
2009년 한국의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를 하면서 처음으로 한국에 입국하였다.
이후 2018년에 서울 청담동 유진갤러리에서 열린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