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 함월사 우룡스님 ③ (마지막)
박 희승 / 조계종 포교원 연구차장
善知識에게 듣는다 - 세번째
월간 법회와 설법은 수행과 교화의 본분사(本分事)에 정진하시는 선지식(善知識)의 수도(修道)와 전법(傳法) 이야기를 인터뷰하여 소개합니다. 이 선지식의 치열한 구도 교화기가 제방 스님들의 정진(精進)에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편집자 주>
질 문 : 스님이 법문하신 거나 인터뷰 하신 자료를 보면 스님께서 늘 선(禪)이 중심이고, 스님 일생에서 근본이 되어 왔다고 말씀을 하셨더군요. 그래서 송구합니다만, 화두는 어느 분에게 받으셨는지요 ?
우룡스님 : 은사인 고봉스님에게 “시심마(是甚?)= 이뭣꼬”를 받았어요. 그런데 앞서도 말했듯이 나는 화두 공부가 큰 진척이 없었어요. 그것은 화두가 고리가 맺혀야 되는데 안 맺혀서 늘 갈팡질팡 했지요. 그리고 주력하고 염불하다 체험한 것이 자꾸 생각나서 화두 공부가 진척이 없었어요.
젊은 시절 선방 이야기
질 문 : 그래도 선방을 많이 다니셨던데요 ? 그 얘기를 좀 해주시죠.
우룡스님 :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선방 다닌다고 무슨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또 강원 다닌다고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꾸준히 노력하는 그것뿐입니다. 그 길만이 최고에요. 달리 길이 없습니다. 어느 하나라도 지속적으로 놓지 말고 꾸준히 밀고 나가면 뭔가 소식이 옵니다. 안하면 체험할 수 없지요.
저는 통도사 극락암, 수덕사 정혜사, 동화사 금당선원, 직지사 천불선원, 쌍계사 서방장 선방 등등을 다녔습니다. 그 시절 선방 이야기야 며칠을 해도 끝이 없겠지만, 역시 금봉노스님이 수덕사 조실로 계실 때 생각이 나네요.
만공 노스님 열반 후에 수덕사에 산내파하고 산외파가 조실 문제 때문에 조금 갈등이 있었어요. 산외파에 대표자로는 고봉노스님이고, 산내파 쪽으로 봐서는 열반하신 벽초노스님 둥으로 해서 이쪽 계통이셨고, 그 파도가 일단 가라앉기 전에 금봉스님이 조실 자리에 계셨는데 주로 산문 밖에서 포교당하셨던 산외파에서는 긍정을 안 했지요.
그래서 수덕사 선방의 방함록 기록을 못할 때고 있었어요. 당시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금봉 노스님이 조실로 계시면서 사태가 심상치 않아서 잠깐 자리를 피해야 할 사건이 벌어졌거든요.
노스님이 벽초 노스님에게 “벽초! 이사를 가야 되겠는데 타고 가야 될 말이 없네.” 그러니까 벽초 노스님은 “말은 여기 있습니다마는, 타실 수가 있을지 모르겠네요.” 했어요.
벽초 노스님이 성이 마씨거든요. 옛날 어른들은 당장 쫓겨 가게 된 마당에도 그런 여유로운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을 만큼 그렇게 하셨는데 요새는 그런 여유가 없어진거 같아요….
질 문: 금봉스님이 그러시다가 해인사 조실로 가셨군요.
우룡스님: 그러시다가 해인사 조실로 겸해서 내려오셔서 한참 계시다가 열반하셨지요. 그 다음에 덕숭산 조실로 대를 이은 것이 전강노스님이셨지요. 금봉 노스님 열반 후에 그러니까 법맥 계통으로 보면 전부 만공스님 밑에 사형사제간 촌수인데 덕숭산 조실 체계를 치면 만공스님 후에 금봉스님, 금봉스님 후에 전강스님, 전강스님 후에 벽초 노스님으로 해서 원담 노스님으로 덕숭산 조실 법계를 보면 그렇게 되는 거지요.
질 문: 전등사 조실이셨던 서운스님 어록에 보니까 금봉스님 법을 굉장히 높이 보셨더라고요. “근대에 금봉스님만한 도인도 드물다” 하실 만큼….
우룡스님: 도인이고 도를 그렇게 좋아하시고 범어사에 그 스님을 평하기를 도를 좋아하시는 호도인(好道人)이다. 금봉스님이 만공노스님의 법제자가 될 때의 인연이 묘해요. ‘내가 늘 젊은 스님들께 이야기하면서도 옛 어른들은 말 한마디를 하셔도 이렇게 무섭게 따졌다.’ 그런 일화를 해주거든요. 요새 젊은이들처럼 마구잡이로 하는 게 아니라 옛날 노인들은 이렇게 말 한마디를 하는데도 이렇게 무서웠고 밑에 사람들 경책에도 이렇게 철두철미하게 무서웠습니다.
금봉 노스님이 본래 만공스님의 법제자가 아니거든요. 문경 대승사에서 출가 하셔서 공부를 하시고 공부를 마친 다음에도 만공스님 법제자가 안 되었습니다. 그래가지고 계시다가 중간에 덕숭산에 가서 공부하시면서 재미있는 계기가 있었어요.
금봉스님, 벽초스님 그때 박고봉스님 이런 쟁쟁한 전부 조실감인 분들이 같이 계셨어요. 용성스님, 만공스님 앞에 인가 받으시고 쟁쟁한 조실감인데 만공스님이 계시니까 수덕사 선방에 오셨지요. 하지만 하늘을 뚫고 땅을 깨뜨리는 기운이 있어서 기운 감당을 못하시는 거지요. 그러니까 오전 시간에 선방에 앉아 계시다가 점심공양을 하시고 나면 오후에 절 밑 주막집에 내려가서 전부가 술독을 밑바닥까지 비우시는 거예요. 그리고 오후 늦은 시간에 어떨 때는 밖에서 저녁을 드시고 들어가고 어떨 때는 조금 일찍 들어가면 절에서 저녁을 드시고 그게 일상생활이 되는 거지요. 밤하고 오전시간에 법당에 잠깐 앉아 계시다가 오후 시간에 완전히 비어버리는 거예요.
하루는 전부 선방을 비우고 내려갔다가 저녁을 밖에서 드시고 들어갔는데 선방 복판에 만공 노스님이 앉아 계셨다는 이야기예요. 그러니까 앞도 뒤도 모르고 떠들썩하게 들어갔다가 먼저 들어간 사람은 노장님한테 들켰으니까 나오지도 들어가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하고, 밖에 “영감 왔다. 영감 왔다. 조심해라.” 그랬는데 두 번째, 세 번째 들어가던 사람은 발만 디뎠다가 노스님한테 안 들켰으니까 도망와 버리고 밖으로 나와서 “영감 와서 앉았다.” 이렇게 된 거지요.
그런데 금봉스님이 들어간 거예요. 금봉스님이 들어가서 만공스님한테
“어! 만공! 너 왜 거기에 와서 앉았노? 그 자리는 조실 자리야 ! 너는 조씰이야. 그 자리에 앉을 자격이 없어” 그리고는 앉아 계신 만공스님 두 귀를 당긴 거예요. 앉았다가 귀를 당기니까 아프니까 노스님이 비명을 지르면서 네발로 기고 술을 한 잔 잡수셨으니까 숨이 갑갑하니까 조금 쉰다고 주춤하면 노스님이
“이 사람아 술 취했나 놓게 귀 떨어지네 놓게” 금봉스님이 당기면 “아야야 !” 비명을 지르면서 네 발로 따라가는 거지요.
금봉스님이 주춤하면 “이 사람아 놓게 귀 떨어지네 ! 이 사람아 술 취했나 놓게” 수덕사 선원 큰방을 세 바퀴를 돈 겁니다. 그래가지고 마지막에 선방 정면 큰문을 어간문이라고 하지요. 그 문에서 노장님 엉덩이를 발로 차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만공스님이 방에서 뜰로 툇마루로 떨어졌다가 밑에 마당까지 떨어진 거예요. 만공스님 그 무렵에 조실스님의 통이 얼마나 큰가요. 만공 노스님이 한마디 말도 안하고는 그대로 금선대에 내려가신 거예요. 근래 같으면 조실스님도 고함 바리바리 지르실 것이고 어디에서 못된 놈이 버르장머리 하며 호통할 것이고, 조실스님 상좌라는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때 전부다 만공스님의 상좌, 손자상좌, 조카상좌도 있으면서도 법문 거량이니까 말 한마디 안 하고 그대로 지켜봤고, 노장님 그렇게 당하면서 선방을 세 바퀴 돌 동안에 진심(嗔心) 하나 안내고 고함 한번 안 지르시고 그대로 따르시고 뒤에서 차버리니까 노장이 떨어졌다가 내려가 버린 거예요.
그 다음날 난리가 벌어진 거예요. 아침 공양 후에 “주현이 내려오라” 이렇게 된 거지요. 그때는 금봉스님이 아니고 주현스님이라 불렀어요. 노장님이 부르시니까 어떻게 해요. 장삼 걸치고 내려가서
“부르셨습니까? 공양 드셨습니까?” “그래, 밥 먹었나?” “네.” 딱 앉혀놓고 “어제 일을 기억을 하느냐? 기억을 못 하느냐?” 뭐라고 그래요.
기억 못한다 하면 끝나는 거예요. 그러면 너는 인간의 자격이 없으니까 공부할 자격이 없다고 돼버립니다. 인간의 양심이 없는 놈은 공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되거든요. 공부는 인간이 하는 것이지 인간 자격이 없는 놈은 공부할 자격이 없으니까 너는 가라로 끝나버립니다.
“어제 일을 기억을 하느냐? 못 하느냐?” “기억합니다.” “기억하느냐?” “기억합니다.” “이(理)로 그랬느냐? 사(事)로 그랬느냐?” 여기에 “이로 그랬습니다”, 하면 앞뒤를 모르는 놈이니까 꾸지람만 듣고 이론적으로 체계적으로 말만 듣지 두들겨 맞지 않은 거예요. 그런데 금봉스님 답이 "사로 그랬습니다." 이렇게 된 거예요.
사상으로 그랬다고 “어른에게 그런 버릇을 할 수 있느냐?” “잘못했습니다.” “분명히 잘못된 줄 아느냐?” “압니다. 잘못되었습니다.” 그러면 “어른에게 그따위 버르장머리를 했으니까 벌을 받아야 될 것 아니냐 ?”, “벌받겠습니다” “엉덩이 까라”
그래서 엎드려서 만공스님이 기운 세고 언제나 단소를 염주처럼 들고 다니셨는데 엉덩이를 치는데 한 차례에 엉덩이 피부가 30cm 찢어졌어요.
“올라가거라 ! 다시는 그따위 버릇을 하지 말아라.”
그래서 올라와서 금봉노스님이 한 40일을 화장실을 못갔어요. 화장실만 가면 터져 버리니까 약을 발라서 조금 아물면 화장실만 가면 터지니까 그러니까 곁에 계셨던 어른들이 전부 말도 한마디 한 줄 모르는 어리석은 놈이라고, 때린다고 “이로 그랬습니다.” 소리를 했으면 생각이 잘못 들었다고 꾸지람만 듣지 두들겨 맞지는 않는다, “사로 그랬습니다” 했으니까 사상으로 얻어 터졌다 이거예요.
그렇게들 말하는데 금봉스님은 “나는 너희들처럼 사기 치지는 않는다”고 말씀하셨답니다.
그게 결국은 금봉 노스님이 만공 노스님에게 입실제자로 연을 맺게 된 동기가 되어서 금봉스님이 만공스님의 법제자가 된 겁니다. 만공 노스님의 말씀이 그 제자가 그렇게 잘못된 것을 뻔히 알면서 이치적으로 이에 입각해서 그런 짓을 했느냐 사상에 입각해서 그 짓을 했느냐 이 꾸지람이 무섭다는 이야기예요.
그리고 큰방을 자기 밑에 공부하는 제자가 그런 짓을 해도 소리 한마디도 안 지르시고 화 안 내시고 세 바퀴 방을 돌 동안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대로 순응했다는 것은 근래 선지식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큰 통이지요. 그러니까 옛 어른들이 납자들을 다스릴 때 얼마나 신경을 써서 다스렸고 납자들에게 말 한마디를 해도 얼마나 무섭게 생각을 하셨는가가 표가 나는 거지요. 근래에는 찾아볼 수 없고 들을 수도 없는 어떻게 보면 굉장히 아름답기도 하고 흐뭇하고 무서운 대담이지요. 두 분의 일이 …
질 문: 대단히 교훈적인 이야기이고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스님! 금봉스님 이외에도 선지식으로 모셨던 분이 또 계십니까?
우룡스님: 금봉 노스님이 수덕사 조실로 계셨을 무렵에 송광사, 해인사에 8·15 해방 후에 한국의 승풍을 다시 고친다고 총
무원 사업으로 해인사에 모범 총림이라는 것을 했지요. 그때 총무원에서 선방 조실로 추천해서 모신 분이 효봉스님입니다. 그래서 그 무렵에는 효봉 노스님이 해인사 조실로 계셨고 법주사 쪽으로는 그때 문중이 결정 안 되었지만 전강 노스님께서 그 무렵 만행하신다고 밖에 나와서 계셨지요 아마….
저는 주로 통도사 경봉 노스님을 가까이에 모셨지요. 우리 스님인 고봉스님은 납자들을 자기 앞에서 눈에 불꽃이 튈만큼 무섭게 꾸지람을 하셨고 안 되면 몽둥이까지 치셨지요. 경봉 노스님은 평소에 그런 적이 없어요. 조용한 말씀으로 다루어 주셨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우리 스님 같은 불꽃이 튀는 그런 교육에 익어진 우리로서는 경봉스님 회상에서는 그만 맥이 풀어진 그런 상태가 되어서 큰 진전은 없었다고 생각이 돼요.
질 문: 그때 통도사 극락선원에는 몇 분이나 정진하셨는지요 ? 또 여러분이 같이 정진하다 보면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많을 듯한데 좀 들려주시죠.
우룡스님 : 극락암 선원은 결제철이 되면 거사님, 보살님들이 오시곤 했어요. 주로 비구들이 많았지만 거사님, 보살님도 계시고 해서 한 30~40명은 늘 계셨지요. 아마 어느 동안거 때에 종정을 지내신 혜암스님께서 입승하실 무렵인데 한 철을 용맹정진하자는 의견과 가행정진하자는 입장이 갈려 대중공사까지 한 일이 있었습니다.
입승이셨던 혜암스님께서 당신 체험으로 “장좌불와가 효력이 있다. 잘 것 없이 죽으라고 밤낮으로 용맹정진 하는 쪽으로 하자” 그런 의견을 내셨고, 지금 파계사에서 병이 드신 철웅스님 하고 몇 분은 “하루 종일 멍청하게 졸고 있는 것보다는 두 시간 또렷하게 자고 나머지 시간이라도 깨끗하게 앉아있는 가행정진이 낫다”라 주장을 하면서 그해 겨울에 조금 갈등이 있었지요. 그때 근일스님도 혜암스님과 마찬가지로 용맹정진으로 가자 그런 편이죠. 오래 가진 않았지만, 살림 중에 조금 이상한 충돌이 있었던 기억이 나네요. 다 공부를 잘하자는 얘기였죠.
선방이라고 하는 곳이 가끔 엉뚱한 사건이 벌어져요. 선방이라고 때가 묻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함께 모이면 80된 노인이나 5, 60된 사람이나 2, 30된 사람이나 똑같이 어린 아이처럼 되어가지고 장난이 모여 버려요. 그러다가 결과적으로 엉뚱한 쪽으로 날아갈 수도 있고요.
대구 동화사 선방에 철웅스님이 죽비를 잡고 있을 때 사건인데 여름 어느 날 점심 후 조금 앉아서 쉬는 사이인데 어떤 스님이 화장실 갔다 오더니
“화장실에 긴 짐승이 나왔다” 소리쳤어요. 그러자 “보자! 보자!” 하면서 대중들이 모였는데 거기서 시작도 밑도 끝도 없는 장난이 벌어진 거예요. “좋은 일이 생겼다, 서울 총무원장에게 보내자.” “이거 먹고 생각 고치라고 보내자.” “그래 보내자! 보내자!”
이게 아무 고의성도 없고 앞뒤도 없는 그런 장난이 벌어졌어요. 그때가 되면 나이 많고 젊고가 없어요. 앞도 뒤도 없이 재밌다고 좋다고 같이 동참해버리는 거고, 선방에서는 간혹 가다가 그런 장난이 아무 계획도 본성도 없는 장난이 벌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누군가 어디 가서 큰 분유통을 갖고 오는 사람이 있고, 그 분유통에 그 짐승을 넣고 뚜껑을 닫아 창호지로 봉하여 소포로 만들어 조계사에 보내게 되었어요.
동화사 선방 뱀소포 사건 이야기
질 문 : 조계사로 보내셨어요? 수좌들이 왜 그러셨어요? 무슨 이유가 있었을 것 같은데요?
우룡스님 : 어쨌든지 앞도 뒤도 없이 장난으로 벌어진 거지요. 고의성도 없고 화장실에 어떤 스님이 갔다 와서 화장실에 뱀 나왔다고 하는 통에 그런 장난이 벌어진 거지요. 소포로 만들고 편지를 썼는데 결국 철웅스님이 썼죠.
“다른 사람 말이라고 해서는 안 믿을 테니까 대구 대남한약방에 여동명 거사가 보낸 약이라고 하면 믿을 거다.” 그래서 대구 한약방에서 보낸 걸로 해서 조계사의 총무원장 스님 앞으로 보냈어요. 당시 총무원이 조계사 불교정화회관 건물에 있었죠. 회관에서 원장스님이 소포를 뜯어보니 뱀이 있었어요. 기겁을 하셨겠죠.
지금은 총무원장 하다가 멸빈 당한 의현스님이란 분이 당시에 재무부장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결재를 하러 갔다고 원장스님이 “대남한약방에서 나한테 산삼이라고 보냈는데 내가 보니까 뱀이다” 그러니까 의현스님이 “연이 없으면 그게 그렇게도 보인답니다. 제가 갖고 가서 시험해 볼께요.” 하고는 자기 방으로 가져 갔다고 합니다.
그 짐승이 한번 두 번 뚜껑을 열다보니까 기회만 노린 거지요. 그래가지고 그 스님이 자기 방에 가서 뚜껑을 여니까 뛰쳐나와 버린 거지요. 감당 못하고 기어 나와서 조계사 그 총무원 마루 밑으로 들어가고 이 사건이 확대되면서 누가 이런 짓을 했느냐 동화사 선방으로 문책이 내려오면서 선원 입승이었던 철웅스님에게 책임을 물어 징계위원회에서 공권정지 7년인가 중징계를 내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듯 선방이라는 데는 대중들이 한 데 모여 있으니 아무 계획도 없고 앞뒤도 없고 고의성도 없으면서 누군가가 말 한마디에 모두 “좋다, 좋다” 하여 사건이 벌어질 수 있는 데, 이런 자리가 선방이에요.
웃지 못할 사건이 또 생각이 나네요. 그게 몇 년도인지 모르겠어요. 극락암 선방 이야기인데 면 굵은 우동 그걸 선방스님들이 좋아해서 그 해 여름에 부산 신도님들로부터 대중공양이 자주 들어왔어요.
그러면 스님들이 좋아하시고 거의 2, 3일 걸러 공양시간에 국수를 잡수시고 맛있다고 미리 두세 그릇이나 받아 놓습니다. 선방에 앉았다가 한두 시간이 지나고 난 뒤에 끄집어내면 서로 뺏어 먹기 작전이 벌어지고 그 국수 그릇을 들고 도망가고 쫓아가고 꼭 아이들 같은 그런 장난이기도 했죠.
또 극락암에서 그 무렵, 저녁 7시에 입선(入禪)하면 8시 반이나 9시 되면 “국수 삶아먹자.” 합니다. 밤에 삶아 먹으면 배가 불러 앉아 있을 수가 없어 콩쿨대회가 벌어지는 거지요.
대회가 벌어지면 판치는 사람이 지금 통도사에 계시는 ㅇㅇ스님이죠. 이 분은 출가 전에 일부러 가수 되려고 남인수 판을 사다가 익히신 어른인데 노래를 잘 하셨죠. 또 지금 입적했습니다마는, 경봉 노스님 상좌 벽산스님이란 분은 마을에 계실 때 동네 대항 무슨 노래자랑 벌어지면 자기 동네가 우승을 못 하면 화가 나서 밥을 안 먹던 그런 어른이었는데, 이 어른은 재래식 춤, 그러니까 우리나라의 시골 농촌에서 추는 춤 같은 것을 잘 하셨죠.
그리고 총무원장 경선에 나가셨던 ㅇㅇ스님은 성량이 풍부해서 명곡 같은 외국 곡이나 가곡을 잘 하셨는데, 이런 분들이 판을 치는 겁니다. 그러면 큰방 노장님한테 누군가가 점수 따려고 고자질하는 사람이 있어요. 노장님이 날벼락이 떨어지는 거지요. ‘공부하러 온 거지 너희가 먹고 놀려고 하느냐.
그러면 차라리 집으로 가거라.’ 날벼락도 떨어지고 노장님은 큰방에 나오셔서 직접 공사를 하시는 게 아니고, 뒷방에 삼소굴에서 앉아서 그랬으니까 불려가는 것은 다른 대중은 안 가고 당신 상좌인 벽산스님이 불려가는 거지요. 실컷 꾸지람만 듣고 벽산스님이 오면서 하는 소리가 “그래도 대중인데 어쩌냐 대중 편에 서야지 내가 우짜노”하기도 했는데, 그런 일도 있었습니다. 선방이라고 하는 데가 딱딱한 정진만 하고 그런 것 같지만 때로는 그런 재미있는 장난도 벌어지고 그런 자리가 선방입니다
재가 공부인
문 : 스님 그때 혹시 재가자 중에 공부가 제법 된 분도 있었는지요?
우룡스님 : 진주 사람으로 안씨 성으로 법명이 일지(一指)라 하는 거사님이 계셨어요. 이 분은 한평생을 선방에 계셨어요. 40대부터 70대가 되도록 30년을 선원에만 다녔습니다. 극락암 선원에도 지내고, 오대산, 법주사 선원에도 계셨던 분입니다. 이 분은 말은 안 해도 공부 힘이 있으셔서 언제나 큰방에서 공양을 하고 큰방에서 같이 주무시고 정진을 꾸준히 같이 하셨는데 이런 분들은 스님들보다 정진도 무섭게 하셨고, 어떤 체험도 하신 어른인데도 표를 안 내셨지요. 하나에서 열까지 스님에게 미루시고 그러셨죠.
극락암 경봉 노스님이 해제철이 되면 글 한 마디씩 써내라 그래요. 해제 때 되면 늘 그걸 해서 당신이 이 사람이 공부를 얼마나 했는지 늘 저울질하시는데 그때 안거사님도 양보 없이 글을 적어 내시고 평소에 스님들하고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시치미 떼고 간혹 한마디 던져놓고도 “아이고, 실수했습니다.”
감추어 버리고 한평생 그렇게 지내셨지만 무서운 어른이었지요. 만사를 감추어놓고 젊은 스님들의 갖은 학대라고 해야 될까요? 그걸 웃음으로 받아넘기시면서 애써서 정진하신 분이 계셨어요. 그 외에도 더러 거사님이 있고 간혹 가다가 아는 소리 한마디씩 툭툭 던지시는 분들도 계시기는 했어요. 하지만 이런 분들은 주로 한번씩 왔다 갔다 했고 안 처사라는 이 분은 한 30년 한 선방으로만 도시고 그렇게 하신 어른이 계셨어요.
법기 강정진 거사와의 인연
질 문 : 요사이 법기 강정진 거사라는 분이 책을 내셨습니다. 혹시 얘기 들어보셨는지요 ?
우룡스님 : 저도 좀 알지요. 지금은 법기라 하는 모양인데 원래 정안인가, 정암이라 불렀어요(註:전에 강 정진 거사는 취암이라는 법명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단점도 있고 장점도 있어요. 그 분 밑에 다니는 사람은 심지어 부처님하고 육조스님 후대는 바른 안목을 가진 사람은 그 사람 하나 뿐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소리는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소리예요.
그러나 그 말 한마디 때문에 얼마나 오류를 만드는지 지금 그분에게서 서울대 졸업생 아홉 사람인가 ? 조계종에 들어왔을 거예요. 그 속에서 지금까지 전부 자기들끼리는 강거사만이 눈 밝은 사람이고 그 외 사람을 전부 무시하는 풍토가 생겨 이 사람들이 지금 정신을 못 차렸어요. 거기에서 세 사람인가 경전을 연구하는 강원에 와서 졸업했을 겁니다.
경 연구하는 사람들은 좁은 소리든지 자기들만의 고집이 옳다는 주장을 하지 않는데 몇몇 사람은 아직도 그 꿈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분의 지도방법이 어떤 면으로 봤을 때는 그 사람들에게 불교라는 것을 이해시키고 정진을 하도록 하는 것은 좋은데 결국 결실을 정확하게 못 맺고 오히려 잘못된 불교상식을 심었다는 점으로 봐서는 문제죠.
어쨌든 지금까지 당신들의 생각으로 부처님하고 육조스님까지도 그 사람들이 인가하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부처님하고 육조스님만이 바르게 깨우쳤지 나머지 사람 못 깨우쳤다는 소리는 부처님을 인가하고 육조스님을 인가하고 있다는 이야기예요. 그런 망발을 하고 산다는 겁니다.
내가 오대산에서 書狀 강의를 한 10일인가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오대산 월정사에서 내가 강의한 방이 전 대통령을 모시기 위해서 지었다는 방인데 전 대통령이 그쪽으로 오시지 않고 백담사 쪽으로 갔다는 얘기를 나중에 들었습니다. 거기에서 서장 강의를 하고 왔는데 그 후에 전화가 한번 왔었습니다.
“부산 강정진입니다.” 그러면서
“스님의 이야기를 잘 들었는데 스님이 왜 오매일여에 대해서는 말이 없습니까 ? 잠 깨었을 때나 잠잘 때나 화두가 한결 같다는 이야기는 왜 없습니까 ?”
내가 “공부한다고 하면 오매일여 체험 못하면 공부 아니지 않습니까 ? 오매일여면 체험하고 그 속에 사는 겁니다. 구태여 오매일여 따져서 뭐 합니까 ?”
내가 전화상으로 그렇게 대답을 한 적이 있어요. 그렇게 대답을 주고 받았고 얼굴도 마주치지 않았죠.
질 문: 오매일여 이야기를 전화로 한 것은 서장 강의를 들었다는 이야기가 되나요 ?
우룡스님: 아니요. 와서 들으신 건 아니고 테이프를 들으신 것 같아요. 근래에 드문 공부인이지요. 공부인일수록 당신 말 조심이 되어야 되는데 말이 너무 지나치니까, 스님들한테 미움의 대상이 되고 그런 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남의 이야기 듣지 말아라. 한국 중에게는 이야기 들을 중이 없어졌다. 중들의 말을 듣지 말아라. 중들 쳐다보지 말아라.” 주입하는 거 그런 점이 아주 커다란 잘못이라고 생각됩니다.
공부인은 <능엄경>의 50변마사(辨魔事)로 점검하기를
질 문 : 스님께서는 강원에서 10여년 이상 공부하셨고, 제방에서 강사도 하셨으니, 후학들에게 경 공부할 때 교훈이 될 이야기를 좀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우룡스님 : 화두를 하든 염불을 하든 주력을 하든 마음이라고 해야 될까요? 빛깔도 모양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그거 단속하고 그걸 주춧돌로 해서 살아야 되는 것이 중이에요. 그것만 명심하면 되지 다른 것이 있습니까, 어쨌든 말도 필요 없고 문자도 필요 없는 것을 기둥으로 삼아 사는데 늘 명심해야 되는 것은 <능엄경> 마지막 장에 “변마(辨魔)”라고 나오거든요.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을 오온(五蘊)이라고 하지요. 오온을 다시 세분해서 색의 10가지 수를 다 합하여 50가지의 마구니의 일 그래서 여기에 걸리면 전부가 마구니라는 이야기가 되는데 “50 변마사”라고 해요. 그것을 자주 보면서 내가 어디 잘못에 걸려있지 않는지 점검을 해야 된다는 것을 늘 생각합니다.
그런데 남방불교에 위빠사나 쪽으로 가면 자기가 매일 공부를 점검하고 또 면담하여 네가 어느 차원까지 도착을 했다, 그렇게 해서 매일 자기를 반성하고 점검을 할 수가 있어 자기 향상을 가늠할 수 있는데, 우리나라의 선방 쪽에 오면 그런 게 없어서 공부가 제자리걸음인지 앞으로 가는 건지 뒤돌아가는 건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한국 불교계에도 “선방 쪽에서는 위빠사나처럼 그런 제도든지 뭔가가 있었으면 좋겠다.” 하는 소리를 하는 분이 더러 있어요. 그래서 내가 경전을 가까이 하지 않으니까 그런 사건이 벌어진다, 남방 사람들은 철두철미하게 아함경이든지 경전 위주로 해서 경전상에 나타난 그걸 표준해가지고 향상을 점검하고 그러는데 한국 스님들은 경책을 너무 멀리한다,
50 변마사를 늘 가까이 하면서 반성하면 지금 내가 공부길이 바로 서고 있는가? 옆길 잘못된 길로 가고 있지 않는가? 다 점검이 되는데 경을 너무 멀리 한다는 소리입니다.
내가 늘 그 소리를 하면서 선방에 계신다고 하더라도 간혹 가다가는 경이라도 가까이 해서 봐야 될 거 아니냐? 거기에 다 나타나 있는 사건인데 이걸 모르고 남의 나라 쪽에서 한다고 하니까 그쪽 공부방법을 부러워하고 우리 공부방법을 부정하는 데, 그런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질 문: 그러면 <능엄경>에 나오는 “50 변마사” 항목을 잘 정리하면 하나의 지침이 되어서 강원이든 선원이든 율원이든 포교현장이든 지침을 할 수가 있겠네요.
우룡스님: 지금도 봉선사에 운허 노스님이 한글로 자세하게 알기 쉽게 풀이해서 강의해 놓은 능엄경이 있으니까 그걸로 자기 점검을 다 할 수 있는 거지요. 운허 노스님은 일반 신도들에게도 알기 쉽게 풀이를 해놓으셨어요. 그러니까 늘 염불을 하든 주력을 하든 화두를 하든 “50 변마사” 가까이 하고 있으면 내가 잘못된 길을 가는지, 아닌지를 점검할 수가 있습니다.
간경 수행의 방법
질 문: 간경(看經) 수행이 우리 나라 불교 역사로 보면 선종과 함께 양대 축으로 발전하여 왔는데 근래 저희 포교원이 불교 수행법 조사를 해보니까 의외로 간경 수행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정리가 안 되어 있는 느낌이 있더라고요.
우룡스님: 그게 한국불교의 단점이라고 보겠지요. 중국 불교에서는 능엄경 연구를 하면 한평생 능엄경만 연구하지 한국처럼 이 경전 쳐다보고 저 경전 쳐다보고 그게 아니에요. 중국 쪽에서는 일반적인 흐름을 보면 능엄경 강의를 하시는 스님은 한평생 능엄경만 하고 능엄경을 배우는 사람만 연구하는 사람만 거기에 모여서 연구하고 금강경 하신다 하면 금강경 하나만 강의하고 연구하고 거기에는 금강경만 연구하는 사람들만 모인 그런 체계 하에서 연구되었는데, 우린 그렇게 되지 못하고 이 경, 저 경 가르치니까 자기 자신이 정리를 못하고 종잡지 못하게 되고 그런 잘못도 생길 수도 있지요.
질 문: 스님께서 생각하시는 평소 간경수행 방법을 소개해 주십시오.
우룡스님: 늘 부탁하는 소리가 능엄경을 볼 때는 내가 아라한이 되어서 부처님하고 나하고 직접 문답하는 생각하고, 금강경을 쳐다볼 때는 내가 수보리가 되어서 부처님과 내가 직접 대화하는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경전을 2500년 전 석가님하고 수보리의 문답이라고 보면, 경전을 보는 보람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나에게 떨어지는 이익이 없습니다. 내가 바로 수보리가 되어 부처님에게 이 질문을 했다, 그 다음에 부처님의 질문이 나에게 떨어졌다, 내가 답으로 무슨 말을 해야 되는가, 이렇게 하면서 경을 봐야 됩니다.
경이라는 것은 관세음보살 보문품을 보면 경책을 거울로 해놓고 나를 자꾸 비추어가면서 그렇게 경을 봐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소득이 있지, 그냥 아까처럼 부처님하고 수보리하고의 대화다, 이렇게 하면 나에게 소득이 없습니다. 내가 바로 당사자가 되어 그 시간에 그 공간에 그 자리에 서서 직접 내가 이렇게 질문했다, 이런 입장에서 경을 봐야 소득이 있지 옛날 어른이 주고받은 이야기다, 이래가지고는 나에게 아무런 소득이 없다고 내가 늘 말합니다.
질 문: 좋은 말씀입니다. 반야심경도 마찬가지겠네요. “사리불아!” 하면 부처님이 나에게 하신 말씀으로 이해하고 그 사리불에 자기 이름을 넣어 이해하여 부처님이 나에게 해주신 말씀으로 들으면 자기를 돌아보고 마음공부에 향상이 틀림없이 있겠습니다. 그래서 “경을 거울로 해놓고 나를 자꾸 비추어 보라” 강조하시는 군요?
스님, 그런데 제가 몰라서 여쭙습니다만, 간경수행을 통해서 해오(解悟)는 물론 수행이 깊어져 증오(證悟)까지 가는 것은 당연히 가능한 일이지요? 그런데 선의 입장, 소위 최상승 수행법이라는 입장에서는 간경 수행이나 여타 수행법은 돌아가는 것이다, 이런 표현을 쓰는 분들이 있더라고요.
우룡스님 : 가장 어려운 것이 화두 정진법이지요. 그러니까 화두 수행자들에게 철두철미한 발보리심을 심어주려고 하면 흔들리지 않는 것을 심어주려고 하면 표현방법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화두정진이 어려우니까 염불 쪽으로든지 주력 쪽으로 자꾸 흐르고 후퇴할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그분들에게는 화두가 목숨이요. 생명입니다. 이 길만이 벗어나는 길이라고 강조를 안 할 수가 없지요. 수행방법 중에서 가장 어려운 수행방법이다,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기도란 무엇인가요?
질 문 : 스님 이것도 몰라서 여쭙는 건데요. 보통 참선, 기도, 염불, 주력, 간경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말할 때 “기도(祈禱)”라는 것은 불교에서 어떤 수행인지요?
우룡스님 : 주로 의타적인 수행방법이 기도겠지요.
질 문 : 가령 예를 들면요?
우룡스님 : 관세음보살님의 힘을 빌어서 깨우쳐 간다, 도움을 얻어서 깨우친다, 이런 방법이 주로 기도겠지요. 한데 내 체험으로는 그래요. 두 조각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가 되어야 된다. 주관, 객관이 하나가 되어야 되고, 부르는 내가 있고, 부처님이 따로 있으면 이것은 바르게 공부하는 방법이 아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체험하고 우리 신도들에게 주력을 시키든 염불을 시키든 기도를 시키든 주관, 객관이 조각이 나면 안 된다. 하나가 되어서 똘똘 뭉쳐서 그대로 전진해야지 주관, 객관을 나누면 공부가 흐트러지고 까딱하면 잘못된 길로 간다, 그렇게 부탁을 합니다.
질 문 : 저희들이 보통 말하는 기도라는 용어에 염불과 주력을 포함하는 것이죠?
우룡스님 : 그렇지요. 나는 이야기할 때 화두까지도 불교 전체의 수행방법을 기도라는 이름으로 표현을 해요. 그러니까 화두하는 사람은 화두대로 밀고 가는 것이고, 염불하는 사람은 염불대로 밀고 가는 것이고, 주력하는 사람은 주력대로 밀고 가는 것, 어쨌든 나는 수행 전체를 기도라는 의미로 “부지런히 기도하십시오. 부지런히 기도하십시오” 하는 표현 방법을 쓰되, 내 마음은 화두하는 사람은 화두대로 밀고 가는 거고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질 문 : 그러면 스님, 아까 기도를 의타적인 수행방법이라고 했을 때 “관세음보살” 염불 기도하는 거나 “옴마니반메훔” 주력하는 것 자체도 의타적인 수행방법인 것이네요?
우룡스님 : 간단히 기도라고 하는 것은 주로 의타적인 수행방법으로 봐야지요.
질 문 : 주력할 때 “옴마니반메훔” 하는 것은 뭔가요? 그 주력을 통해서 나의 정신을 집중시키는 것이 목적인 건가요? 삼매에 드는 것이 목적이죠? 거기는 의타적인 거라기보다는 주력의 힘을 빌어서 자기 자신이 삼매에 들어가기 때문에 의타적인 거라고 표현하는 건가요?
우룡스님 : 그렇지요. 그런데 주로 여태까지 기도라고 하면 전부 의타적인 거라고 생각을 하는데 나는 여기에서 주장하는 것은 의타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죽으나 사나 자력으로 가는 거라고 말하지요.
질 문 : 그것이 관세음보살이나 석가모니 부처님에게 부탁하고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관세음보살 내 자신이 그런 것을 방편을 빌어서 하나가 되는 주관과 객관이 하나가 되는 것이고, 주력도 마찬가지다, 이런 것을 말씀하시는 거지요?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게 기도법을 지도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자꾸 “관세음보살에게 기도해라” 하지 않습니까?
우룡스님 : 여태까지 풍속이 그렇고 해서…. 사람들 표현 방법이 그래서 일반 인식이 그렇게 되고 있습니다. 나는 여기에서는 절대 주관, 객관 그렇게 나누면 안 된다, 모두 하나로 뭉쳐가야 된다고 철저히 강조하지요.
질 문: 그렇게 된다면 이걸 그렇게 표현해도 될까요? 기도법이 의타적인 기도법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부처님의 법으로 가려면 주관과 객관이 나뉘지 않고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자기 자신이 향상이 될 수 있는 그런 기도로 가야 된다고, 그러한 운동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겠네요?
우룡스님: 운동까지는 모르겠고, 내가 “주력을 하건 염불을 하건 화두를 하건 절대 주관 객관이 나뉘어 지거나 의타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피를 토해도 내가 가면 되고, 한 걸음도 내가 가는 것이다”라는 것을 강조를 합니다.
질 문: 보통 정토신앙이나 정토기도 같은 것은 “나무아미타불” 해서 서방 극락에 또는 내생에 그렇게 태어나게 해달라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지 않습니까? 그러면 부처님 법으로 봤을 때는 그러한 방법이 방편일지는 몰라도 정법(正法)으로 본다면 조금 문제가….
우룡스님: 글쎄요…. 내려오면서 공부방법이 너무 일반사람이 못 알아들어서 옛 어른들이 표현하셨는지 몰라도 조금 두 조각이 나는 공부방법이 되고 있습니다.
질 문: 경허선사께서도 해인사 수선결사문 같은 것을 보면 방편으로 정토수행을 선과 동시 병행하라 하셨더군요.
우룡스님: 그런 어른들이 더러 계세요. 오대산에 한암 노스님이 한평생 그 시간엔 화두를 시키고 방선이라고 해서 선방에서 죽비 치고 마친 다음에는 늘 미타주력을 시켰다고 하거든요. 그러니까 이 시간에도 마음을 한 덩어리로 만들어가고 이 시간에도 풀어버리는 게 아니라, 이 시간에도 생각을 모아가도록 하는 그런 방법을 쓰신 것 같아요. 한암 노스님이 늘 평생을 아미타불을 하시고….
질 문: 아미타불요? 성철스님도 아비라 기도를 하라 하시고….
우룡스님: 그렇지요. 성철 노스님도 강조하시면서 능엄주라든지 노령에 와서는 아비라 기도 같은 것을 권하셨는데, 그러니까 안타까우니까 자꾸 모아라 흐트러지지 않도록 모아라, 그런 채찍질이겠지요.
질 문: 그게 이해가 안 된다 하시는 스님도 계시더라고요. 성철스님 같은 분이 참선을 강조하시고 질러가는 것이라 그렇게 강조하셨는데….
우룡스님: 그런데 당신께서도 화두를 하시면서 또 겉으로 능엄주를 하시면서 힘이 쉽게 모아지는 쪽이 아마 그 쪽이다는 것을 생각을 하신 것 같아요.
질 문: 풀이하자면 그런 게 아니겠느냐 볼 수 있다는 거지요. 스님 체험으로 봤을 때도 그런 것으로 봐도 되겠는지요? 우룡스님: 그렇지요.
질 문 : 그런 방편수행이 쉽게 삼매에 들 수 있고 공부의 힘을 얻게 하는 것이고….
우룡스님: 특히 결제 해제도 필요하고, 초하루?보름 조실스님들의 법문도 필요한데 어떻든 정해놓고 기도라고 하는 생각으로 몰아 부친다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근기가 약한 중생에게는 어쨌든 해라, 해봐라, 하면 된다가 필요하니까 그걸 강조하는 이야기 그게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신해행증의 본래 뜻은
질 문 : 그리고 스님 이것도 몰라서 여쭙고 싶었는데요. 불교 수행은 신해행증(信解行證)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 신해행
증에 대한 경전적인 근거가 있는지요?
우룡스님: 신해행증은 주로 화엄경 이야기겠지요. 그리고 사집(四集)에 신해행증이 필요하다고 나왔고 그렇습니다.
질 문 : 신해행증의 본래 뜻은 무엇인가요?
우룡스님 : 처음에는 앞도 뒤도 없지만 무조건 신(信) 믿음, 그 다음에 해(解) 이해, 그 다음에 행(行) 실천, 그리고 실천해서 결과에 도달하는 증(證) 깨달음, 이게 신해행증이죠.
질 문: 신해행증할 때 신이라는 것은 처음에 무조건 믿는 것을 이야기하는 건가요?
우룡스님: 그렇지요. 그러니까 무턱대고 믿으라기보다도 앞에 이야기한 돈오(頓悟)라고 하는 오(悟)가 결국 확신에 신(信)이 정립이 될 때 돈오라고 했다고 하듯이 옆 사람이 뭐라 해도 정확하게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정립이 되어야 되겠지요. 그것은 신(信)이라고 해야 되겠지요.
질 문: 이럴 때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라는 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에 대한 믿음과 어떤 것이 같고 다른지 궁금합니다. 제 짐작으로는 믿음 다음에 해(解)가 있으니까 해라는 것은 부처님 교법에 대한 이해, 우주의 존재법칙인 인과법에 대한 이해, 이 해가 믿음과 같이 갈 때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말씀으로 이해됩니다. 그렇게 된다면 신(信)과 해(解)가 같이 가고 행(行)이 또 되어야 하고 증(證)으로 이루어질 때 올바른 불자, 올바른 수행자의 길이라고 볼 수 있는 거지요?
우룡스님: 그렇지요. 신(信)이란 모든 사람에게 불성(佛性)이 있다는 믿음을 갖는 것, 그래서 나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갖는 것, 부처님 말씀대로 정진하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갖는 것이라 할 수 있죠.
질 문: 이걸 물론 믿음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이해되는데 우리가 교육을 통하여 불자들에게 부처님 법에 대해서 가르친다, 깨달음에 대해서 믿음을 세워준다, 이런 문제가 요즘은 지식과 과학기술이 발전되어 있다보니까 얘기해도 안 믿으려고 하잖아요. 본인이 이해해야 믿지.
서구 선진국에서도 기독교가 많이 퇴보하고 있는데 그 이유가 무조건 믿어라 하니까 그렇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부처님 교법에 대한 정확한 전달과 이해를 시킬 수 있는 방법으로 법문도 많이 나와야 되고, 좋은 교재나 책도 나와야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보통 기복적인 기도, 불공, 재사 이런 것이 한국불교에서 일반적인 사찰의 신행 패턴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이때 바람직한 불공,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불공(佛供)은 어떻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에 대하여 가르쳐 주십시오.
불공은 내 자신의 참회가 기본이다.
우룡스님 : 참회(懺悔)가 결국 불공이겠지요. 여태까지의 나의 마음가짐과 뒤돌아보면서 내 마음가짐과 내 말 그리고 내 행동 이걸 반성을 하는 게 결국은 불공이 되어야 되지 않을까요. 반성이 되면서 거기에서 우러나는 참회 결국 이게 불공의 주춧돌이 되고 이게 불공이 되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불공이란 것은 결국 참회이고 나의 반성과 참회 그게 가장 기초가 되고 거기에 영가천도라고 하는 것은 돌아가셨다고 하면 우리와 먼 곳으로 가버리는 착각을 일으키는데 이 분들의 가슴의 응어리 때문에 바로 떠나지 못한다는 거, 그러니까, 영가 천도는 그 분들의 가슴의 응어리를 풀어드려야 되기 때문에 그렇게 하려면 내 가슴이 먼저 풀어져야 되지 않느냐, 내가 풀어지고 난 다음에 “미안합니다. 당신도 한번 푸십시오.” 하는 게 되어야지요.
그래서 천도라고 하는 것도 결국은 피차 내 마음, 나를 반성해서 푸는 것, 참회하는 것 그게 결국 영가 천도의 주춧돌이 되어야 될 것이고, 불공도 결국은 살아있는 우리끼리의 반성과 참회 이게 결국 불공이 되어야 되겠지요.
질 문 : 그때 불공이란 것도 부처님께 또는 지장보살님께 무엇을 해달라고 부처님 이거 해주십시오. 그렇게 미루고 기대하고 이런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참회, 내 자신이 참회하여야 한다는 말씀이군요.
우룡스님: 내가 여태까지 잘못했습니다. 앞으로 실천하겠습니다. 여태까지 잘못을 용서해주시고 도와주세요.
질 문: 그때 실천을 서원하는 것도 소원을 바라는 그런 문제라기보다는 어떤 것을 서원해야 될까요? 우룡스님: 내 향상이지요. 내 반성, 내 향상하겠습니다. 나를 곁에서 지켜봐 주시고, 지칠 때는 나에게 도움을 주세요, 도 필요하겠지요.
재사의 참뜻
질 문: 불교에도 재사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이때 재사라는 게 유교에서 말하는 “제(祭)”자가 아니라 “재(齋)”자인 것이죠? 어떤 것이 맞는 건지요?
우룡스님 : 재사라고 하는 것이 자자(自恣)에 기인한 것인데 재사라는 걸 귀신이 와서 밥 먹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아라, 추모재다. 그 날 모여서 가신 분을 회고하면서 가신 분의 실천은 이렇고 가신 분의 가르침은 이랬다, 나는 그 가르침을 얼마나 지키고 얼마나 실천하려고 애를 썼느냐? 이 대화를 나누는 모임이 재사이지, 꼭 귀신이 밥을 먹으려고 온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가족끼리 모여서 이 분의 실천은 어땠고 이분의 말씀은 어떤 말씀이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분의 말씀을 얼마나 받아들여서 얼마나 실천하려고 노력을 하고 있는가, 이걸 추모하고 반성하고 모여서 대화를 나누는 자리가 제사다, 나는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해줘요.
사주, 부적의 의미
질 문 : 또 우리 한국 불교 안에 많이 들어와 있는 것이 사주나 부적, 이런 것도 많이 들어와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될지요?
우룡스님 : 저는 사주는 내 반성이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거든요. 사주는 대우주의 회전과 나를 연결시켜서 내가 대우주의 향상에 얼마나 보조를 맞추어서 살아왔는가, 얼마나 어겼는가를 가늠하는 게 사주다. 내가 대우주하고 톱니바퀴를 맞추어서 살아왔으면 평탄할 것이고 행복할 것입니다.
여태까지 대우주의 향상에 발을 얼마나 맞추었고 못 맞추었느냐를 가늠하는 것이 사주다, 나는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면서 지금부터라도 대우주의 톱니바퀴에 맞추어 가도록 노력을 해야지, 이게 어긋나면 어긋날수록 나에게는 괴로움과 고통이 더 올뿐이다,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질 문 : 결국은 우주의 법칙, 우주의 섭리라는 것은 인과법이고 연기법이니까요? 내가 얼마나 어긋나지 않게 그렇게 설명해주면 충분히 이해하고 이끌 수 있겠네요. 스님 부적이란 뭔가요?
우룡스님 : 부적(符籍)이라고 하는 그 사람의 마음의 안정, 안심을 주는 게 부적인 것 같아요. 독일의 심령과학자 한 분이 악령을 불러놓고 동양에서 이야기하는 경면주사(鏡面朱砂) 뚜껑을 열어놓으니까, 그 기운이 나와서 악령을 쫓더라, 그래서 경면주사라는 것이 사기를 쫓는 기운을 갖고 있다는 소리를 합니다마는, 첫째는 내가 부적을 가졌다는 안도감 때문에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느냐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질 문 : 이것도 방편론이 될 수 있겠지만 좀….
우룡스님 : 기복 쪽으로 몰아 부칠 게 아니고, 부처님 이야기에 경에 비추어서 당사자가 자꾸 이해하고 푸는 쪽으로 가야 될 것 같아요.
질 문: 부처님께서는 사주 같은 얘기는 없으신 거지요? 운명론에 대한 비판과 인과법에 대한 이야기는 있어도 이런 것은 없을 것이고 부적 같은 것은 어떻습니까?
우룡스님: 부적 같은 이야기는 별로 없지요. 사주 같은 거 보고 길흉화복에 의지해서 살아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지요. 의식(儀式)에 대하여
질 문: 스님께서는 의식에도 밝으시니 여쭤봅니다만, 천도의식이라는 것이 부처님 당시나 경전에 근거가 있습니까?
우룡스님 : 천도의식이라는 것은 나타난 게 별로 없지요. 능엄경에 보면 왕이 아버지 제삿날 재를 올리면서 부처님을 청해서 공양을 올렸습니다. 어느 집이든지 언제나 부처님께서 공양을 받으시면 그 집에 가서 법문을 해주시고 공양을 받으신 다음에 법문을 해주셨다는 기록은 나타나긴 하지만, 그게 우리나라에서의 재사처럼 그런 것인지 그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나는 ‘자신이 풀어져야 영들이 풀어진다는 것은 믿어라.’고 강조하지요.
질 문: 스님께서는 의식(儀式)에 대해서도 밝으신 분으로 정평이 나있습니다. 특별히 의식을 전수 받으셨는지요?
우룡스님: 의식에 대해서 별로 모릅니다. 우리 어렸을 때는 어른들이 무조건 가벼운 의식부터 마무리를 해야 ‘초심(初心)’이라도 가르쳐 주셨지요. 그 무렵에 다 배워 주입이 되었죠. 근래는 어른들이 이것은 외워라 할 뿐이지, 옛날 어른처럼 이 글자는 어떻게 발원하고 어떻게 한다는 꾸지람이 없고, 일상생활을 하면서도 이건 어떻게 쓰이고 어떻다는 잔소리를 안 해주시니까, 의식이 퇴색되면서 젊은 세대가 전혀 관심을 갖지 못하고 그렇게 되고 있지요.
의식을 정리한 분은 쌍계사에 진감국사 직계로 내려오셨던 박대호스님이라는 분이 계셨어요. 쌍계사 소리의 마지막 어른이지요. 그 어른에게 제가 전체 정리하는 차원에서 배움을 청하니 “나이 많아서 지금은 소리를 못 가르쳐준다. 그러니까 이론적으로만 이렇게 이렇게 네가 배워라.” 그래서 그 어른이 마지막으로 정리해주셨어요.
곽 대후스님이라고 젊은 세대에서는 모르죠. 곽 대후 스님 하면 우리나라 의식계에서도 거두(巨頭)라고 해야 될까요? 그 어른이 여든이 넘은 후에 진주 의곡사에서 만나 지도를 받은 인연이 있습니다.
불교와 허무주의의 차이
질 문: 스님 요즘 일반인 사이에서 불교를 잘못 받아들여 공(空)을 허무주의 같은 걸로 받아들이는 분도 있는데 이걸 제대로 가르침을 주신다면….
우룡스님: 불교는 대우주의 섭리라고 해야 될까요. 대우주와 함께 향상하는 게 불교이기 때문에 허무 쪽은 아니지요. 착각하면 허무주의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옛 어른들도 허무가 아니냐 하면 꾸지람을 그렇게 하시대요. 한암 노스님도 그러시고 돌아가신 우리 스님도 그렇고 “허무적멸지교(虛無寂滅之敎)가 불교다.” 그랬지만 도교(道敎)는 허무(虛無)교이고 불교는 적멸도(寂滅道)입니다.
한국불교의 고질병 말과 실천이 따로 가는 문제에 대한 해법
질 문: 한국 불교의 가장 문제 중에 하나가 불자든 스님이든 말씀과 행이 일치하지 않는 문제, 실천이 안 따르는 문제, 이런 것을 이야기하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행이 따를 수 있도록 실천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할 수 있을까요?
우룡스님: 자그마한 일부터 자꾸 해야지요. 말 쪽으로만 가지 말고 해야 된다는 것, 그래서 내가 요새 신도들에게
“밥상머리에서 합장을 하느냐?”,
“가족들에게 밥상머리에서 합장을 시키느냐?”,
“이거 자그마한 것만 실천해도 한없는 복을 얻고 그런 것이 된다.” 그런 소리도 합니다.
“밥 한 그릇에 하늘의 은혜와 땅의 은혜, 수 십명의 땀방울의 은혜가 젖어 있는 것이 밥알 한 알이지 않느냐? 그 은혜를 생각하면 내 실천을 가지고 밥을 먹을 수 있다고 생각을 하느냐?”,
또 “짐승은 배가 고파서 밥을 먹는지는 몰라도 사람은 배가 고파서 밥을 먹어서는 안 된다. 내 기력을 보충하기 위해서 내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 먹는 것이 밥이지, 배가 고파서 먹는 것은 짐승들이 밥 먹는 것이다. 사람은 내 책임을 하기 위해서 기력을 보충하기 위해서 먹는 것이 밥이어야 된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밥상머리에서는 밥에 담겨있는 은혜에 감사하면서 내가 이 밥을 먹을 자격이 있는가? 나를 반성하면서 하루 세끼 꼭 합장하고 시작하고 밥 먹고 나서 합장하고 이 작은 일부터 실천을 해야 된다는 것, 내 가족들에게 밥 알 하나라도 함부로 하지 말라는 부탁하고 밥상머리에서 이 고마움에 감사하는 뜻으로 합장시키고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는 뜻으로 합장시키는 그것부터라도 시켜라 하지요.
질 문: 생활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좋은 가르침이네요. 그 외에 더 설법하실 때 자주하시는 말씀이 있으시면?
우룡스님: 다른 것은 없어요. 나는 차라리 “부처님 앞에서 무릎을 안 굽혀도 되는데 내 가족 앞에 아침, 저녁으로 삼배씩을 해라. 그게 가장 진실한 예불이다.” 그러니까 내 가족이라고 해서 좋은 인연으로만 모여진 것이 아니다.
어쨌든 가까이에서 만나는 사람은 싸웠든 두들겨 팼든 욕을 했든 자주 부딪치는 사람이 가족이다. 지나간 시간에 자주 부딪힌 인연으로 가까이 모여서 그걸 풀려고 하는 노력을 해야 되는데 앞도 뒤도 모르고 자꾸 부딪쳐서 모진 인연만 만들어가고 있으니까, 이것부터 먼저 반성해서 나에게 가족이 꼭 필요한가, 그러면 나에게는 가족이 얼마나 소중한가?
이것부터 생각을 하고 또 가족 사이에 부딪힌 것을 풀려고 하면 잘했든 못했든
“내가 당신한테 잘못한 거 참회합니다. 용서하시고 당신이 건강하시고 모두 순탄하소서!”
아침으로 내 가족한테 삼배씩하고 저녁시간에도 삼배씩을 해라, 이렇게 함으로서 가족 사이에 다툼이 없어지면서 화목이 이루어지고 화합이 이루어진다, 여기에서 모든 향상이 이루어지는 거다, 이런 식으로 잔소리를 합니다.
그래서 화가 나고 짜증이 나고 신경질이 나거든 부처님 앞에 와서 삿대질을 하고 고함을 지르고 달려들어라, 그러나 살아 있는 내 가족한테는 절대 큰소리치지 말고 짜증, 화내지 말아라. 그런 소리를 해요.
그러면 부처님 앞에 와서 고함지르고 삿대질을 하라고 하면 모두가 자신이 없어서 못하지 않느냐, 우리가 그만큼 밝게 참되게 진실하게 살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이지 않느냐, 내가 그렇게 자신있게 살고 있으면 삿대질하고 달려들면서 내가 이렇게 참되게 진실하게 바르게 살고 있는데 왜 나한테는 복을 주지 않느냐고 고함을 지를 수 있지 않느냐?
우리 생활이 그만큼 자신이 없으니까 부처님 앞에 와서 고함을 못 지르지 않느냐, 차라리 고함을 지르든지 욕을 하든지 삿대질을 하든지 여기에 와서 하고 내 가족에게는 절대 그걸 짓을 하지 말아라, 그런 소리를 하지요.
거기에 덧붙여서 불교는 사는 걸 배우는 게 아니라 죽는 걸 배우는 것이다, 죽어야 된다, 고기 덩어리 붙들고 “내다, 너다” 하는 바람에 내외간에 싸움도 생기고 형제간에 싸움도 생기고 사회에 싸움이 생기지 않느냐, 이런 이야기가 결국 금강경 같은 데 가장 세밀하게 나오죠. 고기 덩어리 붙들고 “나다, 너다” 하는 생각 이걸 죽여야 된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몰아가지요.
질 문 : 스님 마지막으로 제방에서 정진하시는 수행자들에게 좋은 말씀 좀 해주십시오.
우룡스님: 제가 무슨 말씀을 할 수 있나요. 저는 다만, 비록 수행하는 스님이라도 당신 그 날 밥값은 꼭꼭 하도록 해야 된다, 일주일에 한 시간이든지 두 시간이든지 포교 강연을 나가서 어느 절에 가서 법문을 해 주신다 든지, 아직까지는 우리나라에 제사를 모시는 풍속이 있으니 일주일에 몇 시간은 어떤 절에 가서 불공 시식 해주시고 법회를 몇 번을 해 준다든지 이게 제도가 되어서 선방에만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선방에 앉아있는 스님들도 자기에게 잡비든지 의복이든지 돌아갈 수 있도록 제도 자체가 근본부터 탈바꿈을 해야 되겠지요.
그리고 세상이 점점 더 어려워지니까 신도든지 스님이든지 우리는 한 덩어리가 되어야 한다는 이해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절 살림살이는 신도들이 알아서 하고 스님들은 조용히 공부하는 그런 식이 되어야 되겠지요.
물론 이것은 시간이 걸려야 될 것이고 선방 스님들이라고 해서 덮어놓고 앉아있는 것만 능사가 아니고 일주일에 한 번, 한 달에 두 번이든지 어떤 포교당에 가서라도 법회를 해야 되는 거, 이런 제도가 이루어져야 될 걸로 생각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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