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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허는 1912년 4월 머리를 기르고 속복을 입은 채로 북방의 고원에서 입적한다. 일년 뒤 이 소식이 수덕사의 제자들에게 알려지고 혜월과 만공은 곧장 그곳으로 달려가 난덕산에서 다비에 붙였다. 그때가 1913년 7월이었다. 이후 만공은 경허의 행적을 따라 각처에 흩어져 있던 경허의 유고를 수집하기 시작한다. 마침내 1935년에 수집한 유고를 만해 한용운에게 넘기며 혹 글자의 누락이나 그릇된 점을 고쳐 교열하여 주기를 부탁한다. 그러나 문도가 좀더 완벽을 기하기 위해 경허 만년의 원고까지 포함하기로 하여 인쇄를 미루다가, 1942년 봄에 갑산, 강계 및 만주 등지에까지 가서 유고를 수집한 뒤 1942년 여름에 간행하였다. 각 선원은 5원, 각 개인은 50전 이상씩 연조금을 모아 인쇄한 것이다. 이것이 1942년 중앙선원 판본 «경허집鏡虛集»으로 당시 비매품으로 배포되었다.
1942년 비매품으로 간행된 중앙선원 판본 «경허집» 표지와 이 판본에 수록된 경허선사초상
«경허집»의 표제는 남전한규가 제자하였으며, 속표지를 뒤이어 <열반송>, <경허선사초상>, <경허선사필적>이 실려 있다. 그리고 한용운의 <서序>와 <약보> 및 <목록>, 본문 순으로 이어진다. <목록>은 목차를 뜻한다. <목록>을 살펴보면 옛 글의 체제를 따라 법어, 서문, 기문記文, 서간, 행장, 영찬, 시詩, 가歌 순으로 배열되어 있다. 歌의 일부만 한글일 뿐 나머지는 모두 한문으로 쓰였으며, 한용운의 序부터 시작하여 한적본의 면수로 60면, 즉 오늘날의 면수로 120면에 이른다. 이 «경허집»은 1970년에 «경허당법어록»(대동불교연구원 1970)이라는 제목으로 바뀌어 영인본이 간행된 바 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경허집»은 번역되지 않았다.
«경허집»이 처음 번역된 것은 1981년이다. 수덕사 문중의 원담스님은 «경허집»을 단순히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증보하기 위하여 1970년대 중반부터 다시 경허의 행적을 따라 각처를 답사하여 법어 및 <금강산유산가>를 비롯한 선시 40여 수를 새로 발굴하였다. 그리하여 한암스님이 찬술한 행장과 경허의 만행 일화 38편까지 덧붙혀 1981년에 «경허법어鏡虛法語»라는 이름으로 간행하였다. 그러니까 이 책은 «경허집»의 증보국역판인 것이다. «경허법어»에는 경허의 친필 유묵이 여러 점 수록되어 있어 아쉬운 대로 경허의 글씨를 살필 수 있어 좋다. 그리고 번역본이긴 하지만 원문(한문)을 함께 수록하고 있으며, “법문의 심장부인 <오도가>, <심우가>, <심우송>으로부터 수록”(46면)하고 일화, 행적, 연보를 마지막 부분에 배치하였다. 그러나 법어, 서문, 기문, 서간, 행장, 영찬, 송頌, 가歌의 기본체제는 옛 판을 그대로 따랐다. 인물연구소에서 1981년에 간행된 이 증보번역판은 747면에 이르며 당시 2만 원이라는 거금의 가격에 판매되었다.
그러므로 «경허법어»는 연구자들이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일반 독자들이 보기에 너무 방대하고 난해한 점이 있었다. 그러던 차 금번 홍법원에서 일반 대중이 누구나 경허큰스님의 법어를 쉽게 접할 수 있도록 간추려 «경허대선사 법어·진흙소의 울음»을 간행”(10면)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현재에도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진흙소의 울음»(홍법원 1990)이다. 이 번역본은 «경허법어»의 번역문을 좀더 현대적으로 고쳐 다듬은 것으로서 <경허선사의 일화>, <경허선사의 법어>, <경허선사의 선시>라는 세 체제로 배열하고 법어의 제목을 임의로 달았으며, 법어 일부와 선시 수백 수 중에서 아흔 수 가까이를 수록하지 않았다. 이전의 경허집은 법어나 법문을 앞부분에 수록했던 반면에 «진흙소의 울음»은 경허의 일화를 오히려 앞부분에 배치했으니, 일반 독자들이 경허를 좀더 쉽게 접근하도록 의도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울러 법어의 한문은 수록하지 않았으며 선시의 한문만 함께 수록하였으나 면수는 422면에 이른다.
왼쪽으로부터 원담 번역의 «경허법어»(인물연구소 1981)와 «진흙소의 울음»(홍법원 1990), 그리고 석명정 번역의 «경허집»(극락선원 1991)
경허집의 역사는 «진흙소의 울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석명정이 번역한 «경허집»(운주사 1990년, 374면)과 «경허집»(극락선원 1991년, 429면)이 있는데 이 두 번역이 동일한 것인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아마도 동일한 역자에 의한 것이니만큼 번역 내용은 다르지 않겠지만, 1990년판이 면수가 적은 것으로 미루어 간추린 번역으로 짐작된다. 반면에 석명정의 1991년판 «경허집»은 원담스님의 1981년판 «경허법어»와는 배열 및 제목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원문 내용은 동일하다.
이상의 판본비교에서 우리는 중앙선원 판본 «경허집»과 이의 증보국역판인 «경허법어»가 경허어록 원문 연구의 기준이 되는 판본이며, 석명정의 1991년판 «경허집»은 번역본으로서만 의의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진흙소의 울음»은 일반 독자들을 위한 보급판일 뿐 학술적인 가치는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의 독자들이 구입할 수 있는 경허어록은 몇 가지 종류가 있을까? 모두 다섯 종류이지만, 그중 두 권은 절판되었다.
- 진성원담 역, «진흙소의 울음»(홍법원 1990년, 422면)
- 석명정 역, «경허집»(운주사 1990년, 374면) 절판
- 석명정 역, «경허의 무심»(고요아침 2002년, 182면) 절판
- 석명정 역, «마음꽃»(고요아침 2002년, 228면)
- 석성우 역, «나를 쳐라»(노마드북스 2005년, 223면)
원담의 «진흙소의 울음»은 앞서 말했다시피 «경허법어»의 번역문을 고쳐 다듬고 간추려 수록한 것이며, 석명정의 «경허의 무심»과 «마음꽃»은 같은 역자의 1990/91년판 «경허집»에서 추린 것으로 앞의 책은 법문을, 뒤의 책은 선시 80여 수를 뽑아 수록하였다. 특히 «마음꽃»은 사진을 곁들여 시화집처럼 꾸며서 간행한 것이며, 역자의 감상평도 들어 있다. 석성우 번역의 «나를 쳐라»는 역자의 감상평만 없을 뿐 «마음꽃»의 형식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그러니까 경허어록의 진수를 맛보려면 «경허집»(1942)이나 «경허법어»(원담 1981), «경허집»(석명정 1991)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진흙소의 울음»(원담 1990)이나 «경허집»(석명정 1990) 정도의 내용은 되어야 한다. 이들에 비하면 «마음꽃»이나 «경허의 무심», «나를 쳐라»는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그저 얇은 분량의 예쁜 시집 한 권을 읽는 기분이 들 뿐, 경허의 진면목을 엿보기에는 모자란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런데 인터넷 서점에서 “경허”를 검색해 보면, «마음꽃»이나 «나를 쳐라»가 윗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진흙소의 울음»은 거의 팔리지 않은 채 어디 한데에 쳐박혀 있는 인상이 든다. «진흙소의 울음»에 대한 책소개 내용이 전무할 뿐 아니라 역자의 이름마저 표기되어 있지 않아, 과연 이 책이 무슨 책인지 알기도 어려운 것이다.
경허어록이 1942년 중앙선원 판본의 «경허집»으로 처음 세상에 드러난 이후 최근의 «나를 쳐라»로 마무리된 결말은 자못 씁쓸하다. 물론 이것이 끝은 아니겠으나 현 시대의 정신적 주소를 알려주는 듯하여 괴이한 기분마저 든다. 불교서적에 대한 관심이 적은 것이나 대중적인 편집본이 출간되는 것이야 푸념할 바 아니겠으나, 적어도 «마음꽃»이나 «나를 쳐라»보다는 «진흙소의 울음»이나 «경허집»이 좀더 환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야 하지는 않을까?
사방을 돌아보아도 사람이 없어 의발을 누구에게 전하랴, 의발을 누구에게 전하랴. 사방을 돌아보아도 사람은 없어, 봄 산에 꽃 활짝 피고 새가 노래하며, 가을 밤에 달이 밝고 바람은 맑기만 하다. 정녕 이러한 때에 무생無生의 일곡가一曲歌를 얼마나 불렀던가?
일곡가를 아는 사람 없음이여, 때가 말세더냐. 나의 운명이던가. 또한 어찌하랴.
산빛은 문수의 눈이요, 물 소리는 관음의 귀로다. “이랴 쯔쯧!” 소 부르고 말 부름이 곧 보현이요, 장張서방 이李첨지가 본래 비로자나로다.
불조佛祖가 禪과 敎를 설한 것이 특별한 게 무엇이었던가. 분별만 냄이로다. 석인石人이 피리 불고, 목마木馬가 졸고 있음이여. 범부들이 자기 성품을 알지 못하고, 말하기를 “성인의 경계지 나의 분수가 아니다.”라 한다. 가련하구나!
[...중략...]
슬프다. 어이하리! 대저 의발을 누구에게 전하리? 사방을 돌아보아도 사람이 없구나. 사방을 돌아보아도 사람이 없으니, 의발을 누구에게 전하리.
송頌하기를
홀연히 사람에게서 고삐 뚫을 구멍 없다는 말 듣고,
몰록 깨닫고 보니 삼천 대천 세계가 이 내 집일레.
六월 연암산 아랫길에
들 사람 일이 없어 태평가太平歌를 부르네.하였다.
이상은 <오도가悟道歌>(1981년 원담 역)의 시작과 끝 부분이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