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운동 80년이 흐르고 강북구에서 재현되는 3.1정신 ]
3.1운동이 일어났던 지도 90여년, 손병희 선생님의 부인 守義堂 朱玉卿님이 가신지도 벌써 20여년 세월이 흘렀다. 천도교도 손병희선생도 수의당님도 쇄락해가는 천도교와 함께 점점 세상의 관심으로부터 벗어나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민선2기로 당선하신 강북구 청장님께서 2003년 3월 1일 독립운동의 초석을 놓은 봉황각에서 3,1운동재현행사를 시작하였으니 이 행사는 독립운동의 산실인 거룩한 봉황각을 심지어 중국집이냐고 묻는 사람이 있는 주변의 인식은 물론 강북구민모두의 인식 속에 봉황각의 역사성과 그곳에 어린 애국 애족의 정신을 기리는 뜻 깊은 행사로 자리매김 된지도 벌써 7년째 되었다.
강북구에서는 이곳봉황각과 더불어 손병희선생님 그리고 강북구에 잠들어계신 애국선열들의 묘역을 성역화하고 탐방로를 만들어 강북 구민은 물론 모든 국민들 에게 나라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데 앞장서고 있다.
지금 우리들이 외국에 나가서 대접받고 세계에 한류의 열풍이 불고 한류스타가 이름을 날릴 수 있는 것, 이모두가 우리에게 조국이 있는 덕분이다. 민족은 있지만 조국이 없는 사람들 그들은 그들이 의탁 하고 사는 국가의 정세변화에 따라 학살도 당하고 삶의 터전을 빼앗기기도 하고 세계를 떠돌며 유랑하기도 한다.
인간에게 있어 첫째 나를 세상에 있게 하여 주신 부모님과 나와 내가족의 안전을 지켜주는 조국과 모든 살아 있는 생명체를 길러주시는 우주자연보다 더 고마운 존재는 없다. 옛말에도 君 師 父 일체 라는 말이 있지만, 부모님과 조국과 우주자연은 부모님처럼 받들고 공경하여 효도를 다해야할 고맙고 존귀한 대상이다. 우리들이 이러한 정신을 잃지 않도록 늘 옆에서 일깨워 주시는 애국선열님들의 묘역과 광복군 합동묘소 4.19민주화 선배님들의 묘소가 있는 우리고장 아름다운 삼각산과 더불어 축복받은 구민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사는 우리 고장의 많은 자랑거리중의 으뜸인 황각 그리고 그곳에 사시던 아름다운 한 여인의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1. [ 독립운동의 사전준비]
벌써 7년째 추운 날이나 따뜻한 날이나 한 번 도 빠지지 않고 벌리는 3.1운동 재현행사 그 행사를 하는 봉황각을 누가 언제 왜 지었을까?
봉황각은 1910년 국치이후 의암성사께서[이하 성사라 칭함] 事大阿附[사대아부]는 非自主性[비자주성]이요. 派閥獨裁[파벌독재]는 非民主性[비민주성]이요. 毁譽謨辱[훼예모욕]은 非民族性[비민족성]이니 이상은 3대 망국근성이라 앞으로 국권 회복은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되니 내 10년 안에 나라를 되찾겠다고 선포하신이후 다음해인 1911년 봄 성사께서 의친왕 이 강공과 함께 우이동을 찾아 밀회를 하신 후 그해 8월 당시는 심산유곡이었던 이곳에 밭과 임야 27,946평을 800원이라는 거금을 투입하여 구입하시었다.
다음해인 1912 년 봄 현지답사 후 봉황각을 건립할 자리를 정하시고 금년 안에 집을 완공 하라고 명하셨다. 천도교본부에서는 그해 3월 7일에 기공하여 6월 19일에 준공을 마쳤다.
성사께서 鳳凰閣 건립과 동시에 1912년 4월 15일부터 1914년 3월 25일까지 3년간 7차례에 걸쳐 전국의 청년간부들을 49일씩 차례로 독공수련을 시켰는데 1회 때 21명 2.3.4회는 49명씩 5.6.7회 때는 105명씩 총483명의 독립 운동자를 양성하셨다.
이들이 지방교구로 돌아갈 때 성사께서 등사기를 준비해 두라이르시니 훗날 독립선언서를 복사하기위한 사전 준비다.
성사께서는 봉황각 건축 후 7년간 이곳에 머무시며 조국광복을 위한 지도자양성 이외에도 많은 인재 양성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뜻있는 인사들을 불러 국사와 교회 중대사를 논의 하셨고 3.1운동당시 천도교대표 15인도 483명의 수련생 출신이다.
독립운동을 일으킬 인재 양성이 하루가 급하셨던 성사께서는 당시 조그만 암자에 지나지 않았던 도선사의 승방을 빌려 1회와 2회의 수련을 지도하시었으니 독립운동을 위한 성사님의 급하신 마음이 엿보인다.
성사께서는 연성 수련을 통하여 독립운동의 역군을 양성하는 한편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1918년 4월4일 대교당 신축계획을 세우고 매 교호 당 10원 이상씩의 성금을 모금하기로 결정하여 100 만 원 이상의 성금이 모아지자 경운동 88번지에 대지를 매입하고 1918년 12월 1일 현도기념일에 개기식을 거행하였다. 1백만 원의 성금 중 대교당건축비는 불과 27만원 나머지 금액은 모두 독립운동자금으로 쓰여 진 것이다.
7년간 독립운동을 위한 인재양성으로 인적 터전을 닦아 놓으신 성사께서는 독립운동을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의 3대원칙을 세우시고 각 종교 단체와 연합하여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을 하신다.
2. [3.1운동 그 이후]
이날 태화 관에 모인 29인은 선언서를 낭독한 후 성사께서 최린을 시켜 일제 통감부에 전화로 이 사실을 통보하니 일본 경찰 수 십 명이 태화 관을 포위하자 민족대표 29인은 일제히 조선독립만세를 크게 외치신후 성사님을 비롯한 3인씩 자동차로 남산에 있는 倭성대 총감부로 압송되셨다.
독립만세운동을 주도면밀히 지도하시고 전 세계에 독립을 선포하신 성사님은 민족대표들과 함께 중범죄인 국사범으로 3월 7일을 기해 내란죄로 모두 기소되어 서대문감옥독방에 수감되시니 향년 60세셨다. 이렇게 수감되어 재판을 받으실 때 마다 성사께서는 독립의 당위성을 당당히 주장하시며 조금도 일제에 굴하지 않으시고 수감생활을 견디어내셨다.
3. [수감생활 그리고 옥바라지 ]
이때부터 3번째 부인이신 주옥경[守義堂] 의 지극정성의 옥바라지가 시작된다.
성사님께서 투옥되시자 자택인 가희동이 너무 멀어 형무소 앞에 옥바라지할 집을 구하려니 형무소에서 죽은 시신을 잠시 안치하는 집밖에 없어서 그 집을 얻어 수리하고 옥바라지를 시작하니 26세의 꽃 같은 새댁이다. 민족지도자들이 감옥에 가친 초기에는 사식조차 허가하지 않다가 겨우 사식 차입이 허가되니 주옥경은 이곳에서 하루에 세끼씩 사식을 지어 들여보내며 지극 정성의 옥바라지가 시작 된다.
어떻게 해서라도 민족지도자들에게 중형을 가하려는 검찰은 경성복심법원에 공소를 제기하였다. 입옥한지 10개월 되는 그해 11월 30일 주옥경 에게 의암성사가 위독하니 병보석을 신청하라는 전갈이 온다. 알고 보니 11월 28일 성사께서 뇌일혈로 쓰러지신 것을 2일이나 경과한 후에 알려 준 것이다. 교통수단이 없던 그 시절 가희동 집에까지 달려가 그 사실을 알리고 가족과 교회간부들과 보석신청을 하니 또 그날이 마침 일요일이라 월요일로 미루고 월요일에 다시 신청하니 병세가 호전되었다며 보석이 불허된다.
주치의 박종환 [성사께서 의대를 보내 의사가 된 사람]과 가족과 교인들이 들어가 보니 의식 불명인체 반신불수가 되어 있었다. 조금씩 병세가 호전되던 성사께서 다시 포덕 1920년 6월 12일에 뇌일혈이 재발 전신불수가 되신 데다 늑막염까지 겹쳐 위중해지자 다시 병보석 허가를 신청하라는 연락이 온다. 보석신청을 끝내고 6.13일 가족과 교인들이 장맛비를 맞으며 감옥 앞에 종일 기다려도 성사님이 나오지 못하시자 14일 보석신청을 정식으로 하여도 형무소 측에선 가타부타 말이 없다. 이러한 일제의 만행에 대한 신문지상의 비판의 여론이 급등함에도 불고하고 보석신청 9일 만인 6월22일에야 보석을 불허한다는 통지가 오자 주옥경은 정무총감에게 직접 찾아가 사장해보지만 천황폐하[일왕]의 명령이 아니면 출감시킬 수 없다는 핑계로 보석이 불허 되었다. 일제는 성사의 병환이 극도로 악화되어 말씀도 못할 지경에 이른 언도 공판을 약 1주일 앞둔 10월22일 수감되신지 20개월 19일 만에 병보석을 허가하여 출감하시니 성사님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만신창이가 되신 후였다.
4. 병상생활 그리고 환원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어 출감하신 성사님은 상춘원에서 [동대문 박 천도교 별원] 투병생활에 들어가시니 한의와 양의 두 분 주치의의 치료와 주옥경님의 지극한 간병 생활이 시작된다. 해가 바뀌고 1921년 봄 1년 반에 걸친 지극정성의 간병에 힘입어 호전되어가던 병세가 악화되기 시작하던 중 4월 8일 생신축하식이 있은 얼마 후 5월 15일부터 병세가 악화되기 시작하여 5월16일에는 완전 혼수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렇게 악화된 병세로 고생하시던 성사께서는 드디어 5월 19일 62세를 일기로 은도시대 박해받던 동학을 천도교라는 우리나라 최대의 근대종교로 발전시키고 마지막으로 조국독립의 제단에 한 몸을 바치신 웅혼한 일생을 마감하셨다.
일제는 형집행정지로 석방된 죄수라는 핑계로 영결식조차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각 신문에는 이러한 당국의 처사에 대한 비판의 기사가 급등해도 일제가 영결식의 허가를 하지 않은 까닭은 죄수라는 것은 핑계일 뿐이고 혹시라도 영결식에 많은 군중이 모여 또다시 만세시위와 같은 소요사태가 일어날 것을 염려한 때문 이었다. 여러 번의 장례허가 신청이 기각 되어 고심 중 어떤 사람의 조언으로 최린이 한국인 道 警察部長[도 경찰부장]에게 부탁하여 간신히 장례허가를 받게 되었다.
5.[ 장례식]
이에 장례준비 위원회는 구체적인장례 절차를 확정하니 장례일은 6월 5일로 정하고 신축된 천도교 대교당에서 영결식을 거행하기로 하였다.
1918년 12월 1일기공하여 1921년 2월에 완공한 대 교당 조금만 건강이 허락되면 그렇게 가보고 싶어 하시던 대교당 살아생전 그 원을 못 푸시고 이제 싸늘히 식은 시신이 되어 마지막 가시는 길에야 그곳을 들리게 된 것이다.
오전 9시 영결식이 끝나고 성사님의 靈與 [영여]가 우이동 장지로 출발하니 장례위원을 선두로 종학원. 보성초등. 보성고등 전문학교. 동덕여학교 학생과 교직원 1천 5백여 명이 뒤따르는 행렬 뒤에는 天道敎 三世敎祖 義菴聖師 孫秉熙 靈柩[천도교 삼세교조 손병희영구 ]라는 명정 뒤로 70여대의 꽃차와 270여개의 만장이 숲을 이루고 다음으로 장례위원장 중앙총부 간부들이 영여를 모신 뒤에 주상인 춘암 상사 [4세교주] 와 유족 및 친족 그 뒤로20여대의 자동차와 200여대의 인력거 이어 수 천 명의 남녀교인들과 일반 조객들이 뒤를 따르니 장례행렬의 선두가 창경궁 정문을 지날 때 후미가 대교당 정문을 빠져 나올 만큼 일직이 볼 수 없었던 길고도 장엄한 장례행렬이 장관을 이루었다.
6.[ 동덕여학교와 고려대와의 인연 ]
손 의암의 장례행렬에 동덕여학교와 보성학교의 학생과임직원이 대거 참여 하였으니 성사께서 동덕학교와 보성학교에 많은 지원을 하신연고라 성사께서 동학을 천도교로 대고천하 하신 후 64명의 젊은이들을 일본에 유학 시키시는 한편 천도교 학교를 세우실 뜻을 접으시고 경영의 어려움에 빠진 사학을 지원하시니 1906년 사립보성학교에 80원을 지원한 것을 시작으로 동덕여자의숙. 용산 양영학교 .양덕여학교. 전주 창동학교 등 무려 전국의 16개 학교에 지원금을 학교의 규모에 따라 15원에서 80원까지를 다달이 지급하다 경영난에 허덕이는 동덕여학교와 폐교위기에 처한 보성학교 [현 고려대 전신]에 부채 3만원을 청산해 주었다.
고려대학교가 3만 여원의 부채까지 짊어져 더 이상학교를 유지할 수 없는 폐문의 위기에 접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의암성사는 보성학원의 부채를 청산해 주었으나 부채가 청산되었어도 더 이상 학교의 운영이 어려움을 말하며 인수 경영을 제의해온다. 1910년12월 21 일 이에 보성학원 인수절차를 밟으니 명의자는 천도교 대도주 박인호이며 인수조건은 인수 후 3년 내에 구교주가 귀국하여 반환을 요구하면 실비 상환으로 이를 환부하고 3년을 경과하면 모든 권리를 천도교 측에 영구히 귀속 한다.
성사님의 지극한 정성과 천도교 본부의 많은 자본투자로 학교는 궤도에 올라서 동일교사에서 고락을 같이 하던 보성전문학교는 창립13 년 만에 낙원동소재 오성학교를 임차하여 교사를 옮기니 비로소 보성전문[현 고려대] 명실상부한 전문학교의 토대에 올라섰다.
7. [보성학원의 재단 결성과 김성수]
그러나 3.1운동이후 성사께서 투옥 수감 생활 중 얻으신 병환으로 1922년 5월 19일 환원하시고 3.1운동 이후 계속되는 일제의 탄압으로 인한 재정난에도 보성학원의 경영비는 계속 지급 되었으나 이미 학원의 장래 발전은 예측이 불허한 상태가 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보성학교 교장 윤익선은 독립신문사장으로서 투옥되고 보성학원의 명의상의 설립자인 천도교대도주 박인호. 강사 임규. 강사 신익희. 졸업생 주익. 재학생 오일철, 손재기 .이병헌. 이태윤 . 방정환. 박용준, 김상진 등이 검거 투옥됨으로서 그 타격이 이만 저만이 아니게 되었다.
천도교의 실정과 보성학원의 자체 사정이 이렇게 어려워지자 1920년 2월 교장으로 취임한 고원훈이 총독부에 전문학교 승격에 관한 타진을 거듭하며 재단법인 기성회를 조직하며 널리 사회독지가들에게 호소하니 진주부호 김기택이 금15만원의 거액을 출연하였다. 그러자 천도교도 종래의 천도교 본부였던 송현동의 대지와 건물 당시 시가 5만원을 약속하고 그 이외 유지 58인이 각 천원에서 3만원에 이르는 금액을 출연하여 그 총액이 43만원에 이르니 1921년 11월 28일로 김기태 박인호 이하 58인의 설립자명단으로 각인의 기부증서를 연명으로 허가를 출원하니 동년 12월 28일로 재단법인 보성학원의 인가가 승인되었다.
그 중에도 개성사람 김 원배는 3만원의 거금을 출연하고도 설립자 명단에 참가함을 거절하니 자신은 오직 공익을 위하여 출자할 뿐 명리나 사익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라 하여 설립자 모두를 감격시켰다. 이리하여 천도교는 1910년 12월 21일 이종호로부터 인수받았던 보성학원을 1921년 4월 1일에 재단법인 보성 전문학교로 인계하였으니 천도교가 보성전문학교를 경영한기간은 12년 3개월 12일이다.
보성전문 현 고려대학교는 국권 상실기 구국의 일념으로 이용익이 설립하고 구국의 인재를 키워내겠다는 의암성사의 신념으로 폐교의 위기를 벗어나 민족의 사학으로 자리잡혀가다가 3.1운동이후 또다시 경영난에 빠진 것을 각계각층 우국지사들의 성금으로 보성전문으로 재 설립되어 인촌김성수 선생이 최종 인수 받아 오늘에 이르렀으니 실로 민족 사학으로서 그 사명 또한 크다 할 것이다.
동덕여학교의 경우도 지원을 하다 학교 측의 요구로 인수받아 인수 경영하여 일제의 조선교육령. 사립학교 령. 개정사립학교 규칙 등의 법률을 강화해 민족사학에 대한 규제강화로 1227개였던 사립학교 가 8년 후 461개로 격감하는 가운데도 보성학교와 동덕여학교는 꾸준히 발전해왔다.
그러나 3.1운동이후 일제의 박해로 천도교는 예금 등 많은 천도교재산을 압수당하고 재정이어려워지자 성사님의 뜻을 받들어 동덕여학교를 애초의 설립자 조동식에게 168평의 2층 양옥의 신축교사와 지원금 까지 얹어서 돌려주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인하여 장례식 때 보성학교와 동덕학교의 학생들이 장례 행렬의 선두에서서 마지막가시는 성사님의 영구를 배웅하였던 것이다.
2. [홀로 남은 守義堂 朱玉卿 그 헌신의 아름다운생애 ]
1. [ 장 례 식 그 후 ]
300만교도와 교단의 간부들이 비록 주옥경님 보다 나이는 위일망정 모두가 성사님의 사모님으로서 또한 독립운동을 함께 해온 동지로서 우러러 받들고 존경하니 의암성사의 환원1주기를 맞아 추모 강연회를 하고 우이동 성사님 묘소를 참배하고 청년당은 천도교의 실천 강령인 정신개벽. 사회개벽. 민족개벽의 3대 개벽을 실현해나갈 각오를 다지며 농민부. 노동부. 청년부. 학생부. 여성부. 유소년부. 상민부의 7대 부문 운동을 추진하며 우리나라 신문화운동의 선도적 역할을 담당 하였다. 봉황각 경내에 있는 빨간 벽돌 2층 건물 이것이 창도주 수운 최제우의 出世100주년 기념관으로서 이곳에서 개벽 어린이 신여성 등의 잡지를 만들어내던 신문화운동의 산실이기도하다.
이때에 주옥경님 은 여성부의 선두에서 내수단이라는 이름으로 여성 계몽운동에 앞장서니 이것이 한국여성운동단체의 시초이다.
2. [일본유학 ]
이렇게 [성사님 환원 후] 천도교 여성의 지적 신앙적 생활적 발전을 위하여 5년간 헌신하던 주옥경님은 잠시 일선에서의 여성 운동을 접으시고 성사님의 사위되시는 소파방정환의 권유로 일본 동경으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유학을 결심 하게 된 가장 큰 동기는 아무리 모든 교인들이 성사님의 사모로서 존경하여 받들지만 아직도 앞길이 구만리처럼 많이 남은 33세의 젊은 여성으로서 언제까지나 천도교 여성회의 주장으로서만 살수 없는 것이요 또한 시대의 변화를 보고 배우며 세계정세에 대처하는 새로운 학문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신 것이다.
일본으로 건너간 주옥경님은 동경에 천도교내수단 동경지부를 조직하고 이끌며 일본어학원에 입학하여 어느 정도 일본 말을 익힌 후 櫻町[앵정]에 있는 [정칙]학교 영문과에 입학한다.
장차 미국에 유학하여 근대화한 선진국의 문물과 제도를 배워 짓밟히는 조국에 이바지 하고자하는 일념으로 교회에서 보내 주는 생활비를 절약하고자 교인이며 동지인 이종숙과 방을 얻어 자취를 하며 열심히 공부하였으나 점점 어려워지는 교회의 사정으로 미국유학의 포부를 접고 포덕 70년 정칙하교 영문과 2년 과정을 수료하고 귀국한다.
3.[ 귀국 그리고 여성회활동 ]
이후로 여성들의 권리향상을 위하여 포덕 71[1930] 2월 6일부터 서북지방을11곳을 순회하신다.
“내가 오늘날까지 살아오는 동안에 유형무형의 큰 도움을 받은 것은 돌아가신 손 선생님의 덕 이지요. 지금이나 앞으로도 당신의 주지를 받들어 한 평생을 천도교에 바치는 동시에 조선사회를 위하여 미약하나마 도우려고 합니다.” 라고 귀국 후 가진 매일신보와의 인터뷰에서 밝히신 것처럼 주옥경님은 성사님이 주도하신 3.1운동을 시작단계에서는 일경을 감시하는 역할에서부터 수감 중, 옥바라지와 환원 후 그 뜻을 받드는데 있어 정성[誠]과 공경[敬]과 믿음[信]을 다하신 천도교 모든 여성들의 귀감일 뿐 아니라 우리민족 모든 여성들의 귀감이 되시는 어른이시다.
1932년 잡지 신여성의 끈질긴 요청에 의하여 [과부정조론 ]이라는 짧은 글이 실린다. “글쎄요. 일반적으로 이를 말할 때는 예전과 달라서 다시 개가하기를 제창하고 있지만 나 개인으로 생각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남들이야 여하이 말하던지 자기 한 사람의 성격과 의지에 달린 줄 압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이 아무리 개가하는 것이 옳다고 열렬히 주장한다하여도 당자로서는 그것이 옳지 못 하던지 또는 자기 양심이 이를 부정한다면 이는 할 수 없는 일 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결코 봉건사상의 전제가 내 머리를 좌우한다기보다 당자 자신이 죽기로서 이를 지켜야 한다면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요. 그러니까 과부의 정조문제는 요컨대 당자 자신의 결심 여하에 있을 줄 압니다.
이렇게 주옥경님은 오로지 일편단심 성사님을 존경하고 사모하는 마음 성사님의 뜻을 이어 천도교 발전과 조선의 독립만을 생각하며 살아오신 것이다.
4.[ 광복 그리고 김구 임시정부 주석 손병희 선생 묘소 참배]
1945년 11월 23일 주한미군사령관 하지의 주선으로 C47 군용기편으로 귀국한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귀국 후의 바쁜 일정이 대강 끝나자 1946 년 2월28일 의암 손병희 선생의 묘소를 찾는다.
안악을 떠나 상해로 간지 27년 오로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풍찬 노숙하던 임시정부 주석 김구. 김규식 박사. 이시영. 유동열. 엄항섭. 안미생 장준하 와 젊은 수행원등 3.1운동의 주역이었던 권동진과 오세창 등 일행은 추운 겨울날 우이동 골짝 손질을 제대로 하지 못한 엉성한 묘 앞에 선 일행의 가슴은 너무나 슬프다.
먼저 백범선생이 묘소 앞에 정중히 머리 숙이고 읍하자 누군가의 입에서 흐윽 울음이 터지고 한 옆에 나란히 섰던 권동진 오세창 두 분이 와락 껴안고, 기쁨도 아닌 슬픔만도 아닌 이 감격을 터뜨렸다. “여보, 이제 정말 내 땅을 찾았구려!” ....
나는 어느 분의 목소리인지 분간할 수 가 없었다. 그것은 누구의 목소리도 아닌 비장의 오열 이었다. 내가 그리워하던 조국의 숨소리를 이제 이곳에서 듣는 것이었다. 그렇다 조국은 숨어서 울고 있었다. 그리고 아직도 그 슬픔을 다 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두 주먹 을 쥐었다. 허공이라도 미친 듯이 치고 싶었다. 차례로 머리를 숙이고 안미생[안중근 의 조카 김구주석의 며느리] 여사가 들고 온 꽃다발을 받아 묘지에 놓아드렸다. 이렇게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말없이 무덤 속에 계신 손병희 선생을 만나고 있었다.
[이상 장준하의 돌베개에서 발췌 ]
5. [ 6. 25 전 쟁 ]
1950년 6.25전쟁터지고 충북 진천피란지에서 환도 후 서울로 올라오신 주옥경님은 어느덧 1955년 1월 21일 환갑을 맞는다.
21세 꽃다운 나이에 의암성사님을 만나 5년이라는 짧은 기간을 부부로서 살아 본 이후 20개월 19일간의 고달픈 옥바라지에 17개월간의 병수발 그리고 28세부터 환갑이 되기까지 33년을 오로지 성사님의 유업을 이어 조국의 독립과 천도교의 발전 이 나라 여성의 지위향상을 위해 바쳐온 일생이시다.
1958년 포덕 100주년에 대비하여 성사님의 뜻을 받들어 천도교 대 교당에 경운학원을 열고 불우 한 환경으로 진학을 못한 8세에서 20세 까지의 초등하교과정을 무료로 가르치기 시작하여 이듬해 포덕 100주년을 기하여 1회 졸업생을 배출한다. 당시 경운학원의 재학생수는 150여 명에 이르렀고 포덕 100년에 개원한 경운 유치원은 3회 졸업생까지 배출 하였으나1960년의 4.19, 1961년의 5,16등 시국이 불안한데다 분단이후 침체된 교세로 인하여 영리 법인이 아닌 무료교육기관으로서 이끌어갈 여력이 없었기 문을 닫는 다.
6. 의암 손병희선생기념사업
1959년 의암 성사께서 환원하신지 어언 40여년이 가까워 오는데 일제하의 박해 6.25이후의 혼란기 등 격동 속에 의암성사의 묘소는 묘비하나 없이 퇴락해가고 있었다. 1949년 손의암 성사 기념 사업회를 범 교회적으로 조직하여 묘소 보수는 물론 기념사업을 하기로 하였었다. 당시 기념 사업회는 오세창 유동열을 고문으로 추대하고 위원장 최준모 부위원장에 주옥경과 정광조 를 선임하여 추진하던 중 6.25 전쟁으로 무산되고 어느덧 40 여 성상이 흐르니 묘소는 오랜 세월 비바람에 봉분조차 무너질 지경에 이르렀다.
성사님의 조카사위 김상근의 발의로 시작된 기념사업은 천도교만의 독자적 사업으로 할 것 이 아니라 범사회적 운동으로 해야 된다는 결론으로 당시 부 교령이었던 황생주와 이단을 동덕여대 조동식 학장에게 보내 이 뜻을 전하니 조동식은 이 뜻을 흔쾌히 받아 드려 묘비건립과 묘소보수작업을 범사회적인 의암 손병희선생기념으로 추진하는데 의견일치를 보았다.
그리하여 의암성사의 탄신일 4월 8일을 기해 중앙대교당에서 발기총회를 겸한 창립총회를 개최 하였다.
* 여기 발기문일부를 소개하면 .....그처럼 염원하던 조국대한을 찾은 지도 어언 십 수 년이 되었건만 선생의 묘소에는 비석 하나 서지 못하고 그 위대하신 생전의 업적을 깊이 기념하는 아무런 시책조차 없으니 우리들 후생으로서 송구스럽기 그지없는 바이다. 이제 비록 만시지탄은 없지 않으나 위대한 3.1 정신을 계승하여 민족정기를 선양하는 전 국민운동의 하나로서 선생의 추념 사업이 가장 긴요 시급함을 절감하는 동시에 우리후생들이 당연한 의무로 자인하여 이에 손병희 선생 기념 사업회를 발기하는 바이니 삼천만 애국동포 제위는 이에 대한 열렬한 박수와 함께 성심성력을 기울려 주기 바라는 바이다.
이렇게 시작된 기념 사업회는 4월 23일 상임위원회를 열고 고문을 선임하니 국회의장 이기붕 부통령 장면 대법원장 조용순 33인 유족회장 이갑성 전부통령 함태영. 전대법원장 김병로 내무부장관 최인규 문교부장관 최재유를 추대했다. 이 자리에서 김상근은 1천 만 원을 희사하였고 시사시보는 3천 만 원을 희사했다.
그리고 기념사업의 목적으로는
1.묘소보수 2.묘비건립 3.의암성사 전기 간행 4. 기념관건립의 5. 동상건립 다섯 가지를 정하고 일을 추진해나갔다. .
1956년 12월 24일 인일기념일에 창도100주년 기념사업을 준비하는 원주직 간담회에서 봉황각을 수도원으로 사용하기로 결의하고 명칭을 의창수도원이라 결정하니 이는 의암성사의 의로움을 창달 한다 는 의미이다. 해가 바뀌고 수의당님 의창수도원에 옮겨 사시게 하니 수의당님은 이제 비록 묘소일망정 스승이요 남편인 의암성사의 옆에서 항상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매일 묘역 정비현장을 돌보시는 가운데 1959년 10월 8일 오후2시 묘소 앞에서 묘비제막식이 거행되니3부요인과 각계각층의 대표 학생시민 교인등 2 천 여 명이 참석한가운데 육군군악대의 주악과 예포소리가 우렁차게 우이동 계곡에 메아리쳤다. 조동식회장 주옥경님 33인 유족회장 문교부 장관이 묘비를 제막 하니 “의암 손병희 선생묘”라는 한문 글씨가 뚜렷하다. 이날 참석지 못하신 이승만 대통령의 추념사는 문교부장관이 대독하고 정부 최고기관 대표들의 추념사에 이어 동덕여고합창단의 “의암 손병희선생추모가”가 은은히 울려 퍼졌다.
7. 이승만대통령 묘소참배
묘비제막식을 마친지 보름 후 인 10월 23일 오후 기념 사업회 명예회장인 이승만대통령이 묘소를 찾아와 80고령에 묘소언덕길을 올라 화환을 올리고 묵념한 다음 “위대한분이었어” 라고 하시며 주옥경 사모님의 손을 잡고 한참동안 의암성사의 유덕을 추앙하였다. 그러며 지난번 묘비제막식 때 공무가 바빠 참석치 못한 데 대해 유감의뜻을 표하였다.
사회각계의 성금과 조동식. 김상근. 김학서 등의 헌금에 이어 박정희대통령도 이해 9월 2일 금 1백만 원을 보내며 50만원은 동상건립기금에 50만원은 주옥경님의 생활비에 보태라고 당부 하였다. 마침내 여러 사람들의 정성으로 환원 43주기인 5.19일 독립만세의 진원지인 탑골공원에 의암 손병희선생 동상 건립이 시작 되어 1966년 의암성사 환원 44주기인 5.19일 동상제막식을 마칠 수 있었다.
이에 주옥경님은 답례로 묵화 한 폭을 그려들고 청와대를 방문하니 묵화를 본 박대통령은 묵화가 70이 넘은 주옥경님이 직접 그렸다는 데 너무나 놀라워하였다. 그 솜씨가 너무도 훌륭하였기 때문에 감탄한 박대통령은 장개석이 선물한 필묵 한 벌을 선사하였다. 의암성사 환원 45주기인 1967년 마침내 420면의 의암성사 전기가 완간 되어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45주기 추념식 및 출판기념회가 열리니 대통령을 비롯 각계각층의 화환과 정부기관의 대표들이 참석한가운데 동아 방송의 중계로 성대하고 경건하게 의암선생의 영전에 전기를 헌정했다.
꽃다운 21세의나이에 성사님을 만나 겨우 7년의 세월을 고초 속에 함께하고 이제 40여성상을 33인 유족회 회장, 광복회부회장 직을 통하여 오로지 성사님을 유업을 받들고 천도교 여성회를 통 하여 이 나라 여성들의 의식향상과 여권운동에 이바지해 오셨다.
8. [ 아름다운 은퇴 ]
천도교는 이에 1968년 천도교여성회장에 1969년 여성회는 성덕사라는 최고의 존호를 올리었다. 1971년 3.1절 52주년을 맞아 서울시에서 주도하는 3.1기념행사에서 주 옥경님은 유족회장으로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니 낭랑한 음성으로 또렷하고 거침없이 읽어 내려가는 모습을 보는 청중들은 저분이 77세나 되신 분이라는데 모두가 놀라워했다. 1971년 4월 5일 천도교중앙총부는 천도교의 최고 예우 직 종법사로 추대하니 연세가 77세이시다. 이해 6월 20일 천도교 여성회 중앙 확대 위원회가 소집되고 주 옥경님의 완곡한 뜻을 받들어 그동안 천도교 여성회의 대표직등을 모두 사임하고 은퇴하시니 여성회에서는 명예회장으로 추대하였다. 1974년 3월 25일 천도교 여성회 창립50 주년을 맞아 여성회중앙본부는 50주년 기념식을 가지고 주 옥경님 에게 감사패와 공로메달을 헌정하니 향년 80세가 되셨다. KBS와 중앙일보 등 각종 언론이 기념식과 주 옥경님에 대한기사를 실으니 성사님 환원 후 50여 성상을 학처럼 살아오신 주 옥경님께 드리는 사회의 보답이리라. 봉황각에 옮겨와 사신지도 어느새 20여년이 되었다. 서울시는 의암성사께서 독립운동을 준비 하시던 봉황각을 포덕 110년[1969]9월 서울시 유형문화제 2호로 지정하니 이제 봉황각은 명실 공히 의암성사의 독립정신을 헌양하는 민족정기의산실로 자리 매김 되었다.
9. 군자는 군자를 알아본다.
이러한 봉황각에서 성사님의 묘소와 그 정신을 지키며 사시는 주 옥경님을 교인들이 찾아뵈면 옛날에는 인물 많은 천도교, 돈 많은 천도교, 회의 잘하는 천도교라 고 했지. 그때는 정말 대단 했어 라고 혼자 독백 하시며 지내시는 동안 어느새 80 세 가되셨다. 포덕 116년 봉황각에서 80세 생신 잔치를 버렸다. 시중을 들어주시는 김재선 내외가 지극정성으로 모시고 여성회원들과 교단간부들이 자주 찾아뵙지만 피붙이 하나 없이 외딴 산골 큰집에 여생을 보내시는 주 옥경님께 말벗이 되어 주시고 아이들의 재롱을 보여주신 고마운 집안이 있었으니 개울 건너 초가집 차 씨 어른 댁 이다. 한학이 깊으시던 차 어른과 나누는 시국이야기며 옛시조나 종교에 관한 이야기 등, 생각이 부족한 사람들은 꽃다운 청춘을 독립 운동하시는 성사님을 그림자처럼 따르며 어려운 심부름 찾아오시는 손님 접대 다해 내시고 모진간난 고초 다 겪으시며 60여년 세월을 오로지 성사님의 뜻을 이어 교회와 민족을 위해 일하시다 노년에 봉황각에서 외로이 지내시는 주 옥경님 에게 차 어른 댁에서는 언제나 존경하고 별식을 하면 청해서 대접하고 보내 드리며 지극정성으로 따뜻이 보살펴 드리니 역시 군자가 군자를 알아본다는 옛말이 틀리지 않는가보다. 특히나 차 어른의 손자 어린 차 승연을 귀여워하시던 주 옥경님의 봉황각과 차 어른 댁의 연락병 역할을 하였던 차승연회장님이 기억하는 주 옥경님은 언제나 손에 염주를 드시고 자주 성사님 묘소 앞에 앉아 기도를 드리셨다 고 한다. 세상에 어느 조강지처가 주 옥경님 보다 더 남편을 잘 보필하였으며 어느 정경부인의 정절이 주 옥경님의 60여성상 일편단심의 정절보다 고귀 할 수 있을까? 1982년 12월 28[음]일 86세의 생신을 맞아 교인들이 지극한 정성으로 생신을 차려드린 후 모시는 분이 새로 오셨다.
10. 꺼져가는 촛불 그 아름답던 생애
흐르는 세월 앞에 장사 없다고 그 기품 있고 아름다우시던 주 옥경님 점점 기력이 쇄해 지시고 정신이 혼미해지시니 자주 봉황각 숲속을 헤매시며 길을 잃어 보살펴드리는 분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셨다고한다. 성사님을 모셨던 짧은 세월, 그리고 길고긴 인고의 세월 아무리 교인들이 지극정성으로 받들어 드리기로 외롭고 고달팠을 가슴속사연을 터놓고 하소연할 피붙이 하나 없이 인내와 자존심으로 버텨 오신 그 많은 세월 성사님의 명예에 조그만 흠집이라도 생길라 조심조심하며 학처럼 고고하게 살아오신 주 옥경님 86세의 봄이 가고 여름이 오고 가을이지나 겨울이 온다.
이제 그 많은 인고의 세월을 기품 있고 당당하게 살아오신 주옥경의 생애가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1월 17일 오전 6시 40분 주 옥경님은 유언조차 없이 언제나 손에 쥐고 놓지 않으셨던 염주를 꼭 쥐고 눈을 감으시니 이날은 음력으로 12월 23일이었다. 87세의 생신을 닷새 앞두고 스승님이자 사랑하는 님, 그님이 일생을 바쳐 사랑 했던 조국과 그 민족, 천도교라는 종교를 통하여 이룩하려던 지상천국의 꿈을 따르시던 守義堂 주옥경의 순애와 순국의 일생은 막을 내렸다.
이에 천도교중앙총부는 천도교회장으로 영결식을 거행하기로 정하여 봉황각에 빈소를 차리니 주 옥경님 평온한 그 모습 입가의 엷은 미소는 지금 저 무궁의 세계에서 성사님의 성령이라도 만나고 계신 듯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 이었다고 한다.
천도교 중앙대교당으로 모셔진 주 옥경님의 영여는 의식에 따라 영결식이 진행된 후 동덕여고 합창단의 “위령노래 ”합창과 분향을 끝으로 영결식은 끝나고 영구는 다시 우이동 장지로 향하였다. 장례행렬은 앞뒤로 경찰경호차의 호위를 받으며 오후 1시경 우이동 성사님 묘역 입구에 당도 영구는 성사님 묘역 동쪽기슭에 마련된 유택으로 모셔져 참례자들의 애도 속에 임운길 집례로 정중히 天道敎 宗法師 守義堂 朱玉卿 之柩 [천도교 종법사 수의당 주옥경 지구]라는 명정을 덮은 후 하관 식과 함께 장례절차를 마쳤다. 천도교 여성회 임원들 모두가 장례기간동안 상복을 입어 고인에게 조의를 표 하였다.
守義堂 의암성사의 의로움을 지킨다는 뜻의 당호를 오롯이 지켜내신 守義堂 朱玉卿의 생애는 이렇게 막을 내리니 붉은 옥 같이 영롱한 일생이었다.
* 이글은 천도교 선도사 신인간 주간 김응조의 수의당 주옥경 사모님 전기에서 참고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