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변한 미국측 태도
이 전문은 한국 육군을 앞장 세운 쿠데타 계획의 수립을 유엔군 사령부에 지시한 내용이다. 한국 육군 이종찬 총장의 신뢰도를 평가하도록 지시한 것은 흥미롭다. 신뢰도 평가가 어떻게 됐는지는 알 수 없다. 81년에 조셉 굴든이 쓴 「한국전 비사」에 따르면 『워싱턴-서울 사이에 오고간 여러 전문들은 한국 육군참모총장이 미국과 이승만 사이의 어떤 대결에서도 미국 편을 들 것임을 시사했다』고 썼다. 클라크 사령관은 미국 연합 참모 본부의 6월 25일자 지시에 따라 이승만 제거 계획을 수립했는데 그 요지는 이러했다.
『속임수를 써서 이승만을 서울로 초대한다. 그 사이 유엔군 병력(필자주 : 한국군을 가리키는 뜻)은 부산으로 진주, 정부 시설을 장악한다. 이승만에겐 계엄령을 해제하고 국회의 자유를 허용하도록 지시한다. 거절하면 그를 연금한다. 그 대신 국무총리가 그런 선언을 하도록 한다』(조셉 굴든 「한국전 비사」617쪽).
7월 1일 계엄령하에서 국회가 개원되었다. 이승만 정권은 야당 국회의원들을 샅샅이 찾아내 강제 등원시켰다. 의사당은 의원 수용소로 둔갑했다. 이 무렵 미국 측의 입장은 「비우호적 중립」에서 갑자기 이승만 지지로 급선회하기 시작했다. 7월1일 야당의 핵심 의원인 서범석은 발췌 개헌안 심의 작업장에서 어느 청년의 전갈을 받았다. 『조병옥 박사 심부름입니다. 내일 하오 4시까지 버티라는 연락입니다. 미8군이 이 박사를 체포, 감금한 뒤 군정을 펴기로 했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몇 시간 뒤 서범석 의원은 복도에서 안면 있는 미 대사관 참사관을 만났다. 그는 서범석씨에게 다가오더니 일본말로 『기세끼와 아리마셍(기적은 없읍니다)』이라고 내뱉듯 말하곤 돌아서 가버렸다. 서범석씨는 미국 쪽의 태도가 侮杵珦습?알았다. 그는 발췌 개헌안도 장택상의 작품이 아니라 실은 미국쪽 제안이 아닌가 의심했었다고 한다.
7월 4일 발췌 개헌안이 상정되기 직전, 미국 대사 무초는 신익회 국회의장을 만나 『사태를 더 이상 악화시키지 말라』고 당부했다. 이것은 미국측의 태도에 마지막 희망을 걸었던 야당 세력에겐 크나큰 실망이었다. 그날 밤에 발췌 개헌안은 국회의원 1백63명의 기립 찬성으로 통과되었다. 이렇게 되니 미군의 쿠데타 계획은 실천의 필요성을 잃게 되었다. 그러나 휴전 협정 조인 직전에 가면 이승만 제거 계획이 또 등장한다. 어쨌든 이런 계획은 미국이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한국의 국가 원수쯤은 서슴없이 제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비친 것이다. 월남에서의 고딘 디엠 제거도 같은 맥락에서 이뤄진 것이었다. 더구나 한국군을 동원하려 했다는 것은 미국의 행동 양식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군 동원 계획과 한국 육본 심야 회의의 상관 관계에 대해선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청탁(淸濁)을 같이 들여 마시고
발췌 개헌안을 통과시켜 재선의 길을 확보한 이승만은 드디어 육군본부를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이승만 정권은 자신에게 반기를 들었던 이종찬 장군 이하 핵심참모들을 모두 파면할 생각이었으나 벤 플리트의 만류로 인사 이동에 그쳤다고 한다. 이종찬 장군은 총장직에서 해임되고 백선엽 중장이 후임총장으로 지명됐다. 벤 플리트, 라이언 고문단장 등 미군 수뇌부는 이종찬의 도미 유학을 주선했다. 국내에 남아 있으면 고생할 염려가 있다면서 이 총장을 끈질기게 설득, 안광호 대령과 함께 미국 참모 대학으로 유학 보냈다.
이종찬 장군은 미국에 가는 조건으로 가족과의 동행을 약속받았으나 이행되지는 않았다. 체재비도 월3백 달러 이상 지출이 금지되는 등 여러 가지 수모를 겪었다. 이 장군 등 참모 대학 유학생 6명은 돈을 모아 자동차를 한 대 사 가지고 같이 타고 다녔다고 한다. 유일한 운전 면허 소지자 정래혁 대령이 전속운전사였다.
7월 11일엔 이용문 작전국장이 수도 사단장으로 전보되었다. 이임식에서 그는 이런 연설을 했다.
군인은 정치에 개입해선 안된다.
정치에 이용되어서도 안된다.
그러나 정치를 알아야 한다
이임식에서 찍은 이용문 장군과 박정희 대령의 사진은 퍽 인상적이다. 호랑이 상(相)의 얼굴에다가 듬직한 몸집을 가진 이용문의 옆에는 작고 깡마른 박정희가 붙어 서 있다. 두 사람에겐 정말 아쉬운 이별이었을 것이다. 두 사람은 외모에서뿐 아니라 성격에서도 크게 달랐다. 안광호씨는 『이용문 장군이 장비라면 박정희 대령은 관우 같았다』고 했다. 다른 측근은 『이용문은 장비처럼 용감했으나 장비처럼 사려가 얕지도 않았고 장비처럼 단순하지도 않았다』고 평했다. 이용문은 외향적이었고 박정희는 내성적 인간이었다. 이용문은 거침이 없이 활달했고 박정희는 심사 숙고 끝에 무섭게 결단내리는 스타일이었다. 둘 다 청탁(淸濁)을 들여마시되 이용문은 껄껄 웃으며, 박정희는 싱긋이 웃으며 그렇게 할 사람이었다. 둘 다 큰 세계를 품고 있었다. 두 사람이 친했던 것도 성격상의 이런 차이가 상호 보완 역할을 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종찬과 박정희의 공통적 인상은 강직함이었다. 박정희의 오랜 측근 한 사람은 이런 비교를 했다. 『이종찬의 그것은 소승적 강직이었고 박정희의 그것은 대승적 강직이었다. 이종찬이 강직 일변도의 자존심 높은 인물이었다면 박정희는 강직한 표면 뒤에 아주 유연한 정신 세계를 깔고 있었다. 18년 동안 한 나라를 통치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강유의 조화였을 것이다』육본의 강경파였던 김종면 정보국장은 얼마 뒤 김창룡이 조작한 동해안 반란 음모사건에 얹혀 주모자로 구속되었다. 이 대통령 암살을 모의했다는 누명을 씌워 3년 징역형을 살게 했다. 4·19 뒤 김 장군은 재심을 청구, 원심 무효 판결을 얻어냈다.
이용문과 박정희에게 있어서 정치 파동은 큰 정치적 학습이었을 것이다.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타국의 정권을 쉽게 뒤엎으려 하는 미국, 쿠데타에는 소수병력에 의한 신속한 심장부 장악이 필수적이란 것, 미군과 한국군의 관계 등등 사례 연구의 소재는 많았고 배운 점도 많았을 것이다. 육본에서 정치 파동과 군의 움직임을 가깝게 지켜 본 그 교훈은 박정희의 큰 밑천이 될 것이었다.
37세에 요절하다
이용문 준장은 수도 사단장으로 가서는 수도 고지 쟁탈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리곤 곧장 남부 지구 경비 사령관으로 전보되었다. 지리산 지구 공비 토벌을 담당한 부대였다. 사령부는 남원에 있었다. 53년6월23일 대구 육본에 남아 있던 이근양 대령은 옛상관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내일 콜린스 대장을 만나서 휴전반대를 천명해야겠어. 차 좀 내 줘』 다음날 대구에 살고 있던 이 장군의 부인 김정자 여사는 장남 이건개를 데리고 비행장으로 남편 마중을 나갔다. 도착 시간이 지나도 남원을 출발했다는 비행기는 오지 않았다.
이 근양 대령은 전군에 수색령을 내렸다. 밤중에 소식이 들어왔다. 남원 근방의 운봉고개에 비행기가 한 대 처박힌 채 발견됐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죽은 두 사람은 미국인과 한국인이란 보고였다. 발견자가 키 크고 잘생긴 이용문 장군을 미국인으로 오인한 것이었다. 밤2시에 비보를 접한 이건개는 어머니와 함께 지프차로 다섯 시간을 달려 추락 현장에 도착했다. 달릴 동안 그는 아버지가 살아 있도록 줄곧 기도했으나 부활의 기적은 없었다. 경비행기는 논두덩에 앞부분이 반쯤 처박혀 있었고 이용문 장군은 뒷자리에서 죽어 있었다. 그 때 나이 서른 일곱이었다.
조종사는 그날 날씨가 나쁘다고 난색을 표시했다. 이용문 장군은 대범한 평소 성격대로 이륙을 명령했다가 변을 당한 것이었다. 『벌여도 한번 크게 벌일 사람』 『장래의 육군 참모총장』 『살았더라면 대통령이 되고야 말았을 사람』 『남자가 봐도 첫눈에 반해 버리는 사람』은 그렇게 갔다. 육군 본부장으로 치뤄진 장례식에는 김석원·이종찬·유재홍 장군과 함께 초췌한 모습의 박정희도 참석했다. 조종사와 함께 이 용문은 칠곡에 묻혔다. 생전에 이용문과 박정희의 사이가 어떠했는가는 박정희 대통령이 이용문 장군의 유족에게 베푼 세심한 배려를 통해 더욱 실감나게 드러난다.
「이용문 형」을 못잊어 한 박대통령
이건개 부장검사에 따르면 박정희 대통령은 5·16 전까지는 이 장군 기일엔 꼭 육영수 여사와 함께 참례,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곤 했다고 한다. 유족의 생활도 깍듯이 보살펴 주었다. 박정희 장군이 최고회의 의장이 된 뒤 맨 먼저 한 일은 이용문 장군 묘소의 수유리 이장이었다. 이근양 장군이 실무를 맡아서 봤다. 예산이 모자라 도움을 청했더니 박정희 의장은 당시로선 거금인 백만원을 선뜻 마련해 주더라고 했다.
이건개씨가 5·16 뒤 박 의장을 처음 만난 것은 큰 아버지의 구명을 위해서였다. 이용문 장군의 형은 해군 참모총장을 오래 지낸 이용운 제독이었는데 5·16직후 모종 사건으로 구속돼 있었다. 어머니와 하께 이건개씨(당시 서울 법대 재학)가 의장 집무실로 올라 갔을 때 박 의장은 선 채로 창 밖을 바라보며 골똘한 생각에 빠져 있었다. 두 모자가 들어서자 박 의장은 돌아섰다. 이건개 씨는 깜짝 놀랐다고 한다. 박정희 의장의 눈에서 뿜겨져 나온 살기가 그의 앞에서 어른거리는 커턴을 이루고 있었다. 중국 무협 소설의 한 장면이 생각났다.
두 모자가 인사를 하니 그 살기는 걷히더란 것이다. 그러나 박 의장은 자리에 앉아서도 몸에서 긴장을 풀지 않았다. 당시는 미국과의 관계 등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이 많아 박 의장이 한참 고민할 때였다. 무서운 집념의 발산이었을까? 이야기가 이용문 장군에게 미치자 비로소 박 의장은 유쾌하게 웃으며 긴장을 풀더라고 한다.
대통령 부처의 죽음에 수사 참여
이근양 장군은 대구 육본 시절의 생각 그대로 정치와는 관계를 맺지 않는 충직한 군인으로 남았다. 1964년 어느 날 그는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마주 앉았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한참 하다가 대통령은 갑자기 『이용문 장군 댁은 요즘 어떻게 살지? 건개는 뭘 하지?』라고 물었다. 『건개는 고시에 합격, 사법 연수원에 다니고 생활은 곤란한 모양입니다』고 했더니 박 대통령은 『내가 생각을 못했구먼. 다음 달부터는 내가 도와주겠어』라고 말했다. 그4년 뒤 국방부에 근무하던 이근양 장군은 사복 차림으로 청와대에 갔다가 복도에서 대통령과 마주쳤다. 『어, 요즈음은 군인도 사복 입나?』고 농을 던진 다음 대통령은 갑자기 『참, 이용문 장군 댁은 요즘 어떠냐?』고 했다. 이근양 장군만 보면 대구 육본 시절 세 사람이 어울려 다니던 걸 연상하는지 꼭 이용문 장군 유족의 안부를 묻곤 했다는 것이다.
박 대통령은 69년엔 검사가 된 이건개씨를 청와대로 불러들였다. 그 뒤 3년간 그는 민정·정보·공보 비서실에서 근무했다. 육영수 여사는 그를 가족처럼 가깝게 했다고 한다. 71년 대통령 선거 때였다. 이건개 비서관은 김대중 후보가 춘천에서 연설하는 것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청와대로 돌아와 육 여사에게 그 인상을 이야기했다. 육 여사는 『지금 각하한테 가서 그대로 이야기해 달라』면서 같이 가자고 했다. 마침 박 대통령은 식사중이었다. 이건개씨는 김대중씨의 대중 연설 솜씨가 건국 이후 최고 수준일 것이라고 칭찬한 다음 특히 청중들이 환호한 대목이 있었다고 했다. 박 대통령은 심각한 표정으로 듣더니 『그게 뭐냐?』고 물었다. 『부정 부패를 언급한 대목이었습니다. 각하께서도 서둘러 부정 척결의 단호한 의지를 보여야 합니다』고 그는 강조했다. 이래서 생긴 게 청와대 사정 담당보좌관 제도였다는 것이다.
31세의 젊은 나이에 이건개씨가 서울 시경국장에 임명된 것도 박 대통령의 배려 덕분이었다. 이용문 장군의 형인 이용운 전 해군 참모총장은 한때 외국에서 반정부 활동을 폈다. 지난 77년 이건개씨는 당시 중앙 모 기관 이철희씨의 반대를 무릅쓰고 큰 아버지를 설득, 귀국시켜 박 대통령과의 면담을 주선, 오해를 풀도록 했다. 82년에 이건개씨는 이철희씨를 다시 만났다. 검사와 피의자의 사이로서. 이건개 검사는 육 여사와 박 대통령의 죽음을 두차례 모두 확인해야 하는 숙명적인 입장에 서기도 했다.
그는 육 여사가 피살되기 한 달 전 청와대에 가서 육 여사를 만났다. 헤어질 땐 현관까지 나와 이건개씨의 두손을 꼭잡고 『열심히 해라, 열심히』라고 당부했다. 육 여사는 그때 은빛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 마지막 모습이 이건개씨의 뇌리에 아직도 도장처럼 찍혀 있다. 육 여사가 언니로 대했던 이용문 장군의 부인 김정자 여사는 지난 73년에 암으로 타계했다. 김여사는 20년동안 도서관을 다니며 「한국 결혼 제도사」란 책을 썼다.
어느날 박 대통령은 이건개씨를 만난 자리에서 『모친 안녕하시지?』라고 안부를 물었다. 암에 걸려 투병중이라고 했더니 대통령의 눈에선 금방 이슬이 맺히더라고 한다. 이건개씨는 74년의 8·15 사건 당일 현장 수사를 지휘했다. 저격순간의 필름을 되풀이 돌려가면서 문세광의 총탄이 육 여사의 머리를 꿰뚫는 참혹한 장면을 봐야 했다. 10·26 사건 때는 보안 사령관 보좌관으로 파견되어 현장수사에 참여했다. 아버지를 가장 존경했던 사람, 아버지의 영향을 평생 못 잊어 하며 그리워했던 사람의 죽음에 대한 수사 발표문을 이건개씨는 썼던 것이다.
잔정과 비정 사이의 진면목
이근양씨에 따르면 이용문 장군이 죽은 뒤 군에서 박정희 장군이 가장 많은 은혜를 입은 사람은 문관 시절 그를 현역으로 복직시켰던 장도영 장군이었다고 한다. 박정희 장군이 사단장 시절 백모 군단장과 충돌, 『더러워서 못해 먹겠다. 당장 옷을 벗겠다』고 했을 때 박 장군을 달래고 뒷수습을 한 뒤 박 장군을 다른 보직으로 돌린 것이 당시 육군 참모차장 장도영씨였다. 박정희 장군은 4·19 뒤 육군작전 참모부장 시절 한때 예편 대상자로 거론되는 등 막다른 골목으로 몰린 적도 있었다. 예편 대상자가 된 이유를, 당시 참모차장 김형일 중장은 미군 측에서 「사상 불투명」이라고 찍었기 때문이라고 박 장군에게 해명했었다.
박 장군은 그 해명을 믿지 않고 군 내부 반대파에 의한 모략이라고 해석했던 것 같다. 박 장군은 그 문제로 김형일 장군과 대판 싸워 육본에 남아있기가 곤란했었다. 이 때 이근양 장군이 2군 사령관 장도영 중장을 찾아가 부탁, 박정희 소장이 2군 부사령관으로 피신(?)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 한직에서 박 소장은 거사 계획을 짤 수 있었다. 장도영 장군과도 거사를 의논했다. 그만큼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거사 계획의 정보를 맨 먼저 장면 총리에게 알린 것은 일본 망명길에서 돌아와 조폐공사 사장이 돼 있었던 선우종원씨였다. 이모 장군이 중간에 사람을 넣어 그에게 전달한 주모자들의 조직표에는 당시 참모총장 장도영 장군 이름이 꼭대기에 얹혀 있었다.
이 정보를 장 총리에게 가져갔더니 장 총리는 『생 사람 잡을 짓이다』고 펄쩍 뛰었다고 한다. 그 며칠 뒤 선우씨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장총장이었다. 『선우형, 나한테 무슨 감정이 있오?』 그는 원망하듯 말했다. 장도영 총장이 5·16때 보여 준 과단성 없는 행동을 장면과 박정희쪽에 양다리를 걸친 것이라고 평한 사람이 있다. 반대로 치열한 경합속에서 자기를 총장으로 발탁했던 장면과 박정희 두사람에 대한 인간적 의리 속의 방황 때문에 그랬으리라고 이해하려는 이들도 있다. 박정희 장군은 장도영 에게서 「이용문 형」의 이미지를 구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장도영은 이용문처럼 깊고 넓은 그릇을 갖지 못했던 것 같다. 박정희는 자기를 채울 수 없는 그 그릇을 깰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장도영으로부터 여러 차례 은혜를 받은 박정희였지만 대권을 위해선 그에게 사형을 선고할 만큼 비정했다. 이용문 가족에게 보여준 잔정과 장도영에게 보여준 비정, 그것이 청탁을 모두 들여 마신 박정희의 진면목이었을까?
순수 군인의 길을 따라…
이종찬은 참모 학교 유학에서 돌아와 진해 육군 대학 총장으로 임명됐다. 약 7년간 있었다. 중앙 정치 무대로부터 초연한 그의 고답적인 이미지는 이 시기에 더욱 빛나게 되었다. 4·19 뒤 그는 과도 정권에서 국방장관이 됐다. 군을 정화한다는 명분으로 그가 퇴진시킨 장군들 가운데는 백선엽, 유재홍 장군도 끼여 있었다.
두장군 모두 정치 파동을 전후하여, 곤경에 처했던 이 종찬을 극진히 모시고 도운 사람이었다. 이종찬 장군이 이승만에 대한 항명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군복을 벗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미군측의 강력한 후원 덕분이었을 것이다. 이종찬 장군은 5·16 뒤 주체 세력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정치 일선에는 나서지 않았다. 정치적 장교들이 세상을 주름잡는 속에서 그는 군의 순수성을 고고히 상징하는 고목으로 비쳐졌다. 박정희와 이종찬은 군인의 양극단형을 보여주는 듯했으나 그 거리만큼 심정적으로 멀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종찬은 그가 일찍이 「육본 제일의 인물」이라고 간파했던 박 대통령 밑에서 여러 나라의 대사를 지냈다. 그러다가 제2기 유정회 의원으로 지명됐다.
김재규 중앙 정보부장의 끈질긴 설득을 이기지 못했던 것이다. 김재규는 이종찬을 은인으로 생각한 사람이었다. 김재규는 송요찬 장군 밑에서 연대장으로 근무하다가 사소한 일로 수모를 당하자 진해로 내려와 이종찬에게 육군 대학 교관으로 써달라고 간청했다. 송요찬이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근무지 이탈로 처벌하겠다』고 펄펄 뛰자 이종찬 총장은 송 장군을 꾸짖고 김재규를 데리고 왔다. 김재규는 이를 골수 은혜로 생각, 이 총장을 극진히 대우했다.
그러나 이종찬은 죽을때까지 유정회 의원 된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자신의 곧고 깨끗한 생애에 말년의 실수가 흠이 되게 생겼다고 원통해 했다는 그도 후배 이용문, 박정희를 따라 저승으로 갔고 지금 여기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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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군의 항명은 군최고통수권자에 대한 하극상이었다. 결과가 좋았기 때문에 부정과 부패가 난무했으며 파탄난 민생을 위해 혁명을 했다고 하나 이미 혁명의 싹은 오래전부터 자라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저에는 창군과정의 문제점들로 인한 소외집단이 혁명의 주체세력이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