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기초등학교가 설립되기까지
-풍기초등학교개교1백주년기념사업회-
(풍기초등학교총동창회) 풍기초등일백년사편찬팀장 서 효 석
풍기에도 신교육이 필요했습니다
1. 근대화의 물결 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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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항이 정식으로 개항된 해가 1876년 운양호사건이 일어나고 7년이 지난 1883년이다. 1854년에 개항된 일본과 비교할 때 무려 30년 의 차가 생긴다. 서세동점이라는 역사적 전환기에서 은둔의 나라였던 조선도 시세의 흐름을 역류하지는 못하고 새로운 문명을 받아들이는 시대를 맞이해야 했다. 당시의 교육제도는 과거시험에 목표를 둔 교육이었다고 볼 수 있다. 최고의 교육기관인 성균관이 중앙에 있고 중등 교육기관으로 볼 수 있는 교육기관으로 중앙에는 사학이 지방에는 향교가 있었다. 지방의 초등교육기관으로는 서당이 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는 오늘날의 학제와 같이 계통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독립한 교육기관으로 존재하였다. 개항은 곧 개화의 시기와 맞아 떨어지며 개항과 더불어 외국 선교사들이 들어와 신교육의 길을 열어 가게된다. 일반학교 교육을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은 이른바 개신교 전도 사업으로 세운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이다. 1885년 6월 인천항으로 들어 와 서울 서소문동에 집 한 채를 사서 시작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처음 두 사람의 학생을 놓고 시작한 배재학당(培材學堂)이 이듬해 67명이나 되었으며 1887년 벽돌조로 신축하여 완공되자 고종황제가 친히 배재학당이라는 교명을 지어주었고 이화학당은 1887년 여자학교로서 명성황후가 이름을 지어 내렸다고 한다.
2. 갑오경장의 소용돌이가
갑오경장(甲午更張)으로 새로운 시대가 도래됨에 1894년 8월 31일 종래의 과거제도가 폐지된다. 반상(양반과 상민)의 등급(等級)을 없애고 귀천(貴賤)에 구애받지 않으며 인재를 등용하는 제도(銓考局條例)가 시행되고 시험과목도 획기적으로 바뀌어 진다. 이로서 고려시대인 서기 958년부터 실시해 오던 관리채용 과거제도가 끝을 맺게 되고 1895년 2월 덕육(德育)과 체육(體育), 그리고 지육(智育)을 기르는 교육기강을 천명(闡明)하면서 국가중흥이 교육에 달려있다는 고종황제의 소서(소書 )가 다음과 같이 엄중하게 발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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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짐(斟)이 교육에 힘쓰지 않으면 나라가 공고(鞏固)하기를 바라기 심히 어렵다. 세계의 형세를 살펴 보건데 부강하고 독립하여 웅시(雄視)하는 모든 나라는 모두 다 그 인민의 지식이 개명(開明)하였다. 이 지식의 개명은 교육의 선미(善美)로 이룩된 것이니 교육은 실로 국가를 보존하는 근본이다. 그러므로 짐은 군사(君師)의 자리에 있어 교육의 책임을 몸소 지노라... ...이제 짐이 교육의 강령(綱領)을 보이니 첫째 이름을 물리치고 실용을 취하도록 하여라. 곧 덕양(德養)이니 오륜행실을 닦아 속강(俗綱)을 문란(紊亂)치 말고 풍교(風敎)를 세워 인세의 질서를 유지하며 사회의 행복을 증진시켜야한다. 다음은 체양(體養)이니 동작을 떳떳이 하고 근려(勤勵)를 주로하며 惰逸(게으름과 편안함)을 탐하지 말고 고난을 피하지 말고 그대의 근육을 굳게 하여 뼈를 튼튼히 하여 강장(康壯) 무병(無病)의 낙(樂)을 향수(享受)하라, 끝으로, 지양(智養)이니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추구함으로써 지(知)를 닦고 성(性)을 이룩하고 아름답고 미운 것과 옳고 그른 것과 길고 짧은데 머물지 않으며 나와 남의 구역을 세우지 말고 정밀히 연구하고 널리 통하기를 힘쓰라 한 몸의 사(私)을 꾀하지 말고 공중의 이익을 도모 하여라 이 세 가지는 교육의 기강이다. 짐은 정부에 명하여 학교를 널리 세우고 인재를 양성하여 그대들 신민(臣民)의 학식으로써 국가중흥의 대공(大功)을 찬성(贊成)케하려 한다...
이 같은 고종의 교육입국정신에 따라 정부는 현대식 학교법규인 여러 관제와 규칙을 계속하여 제정․공포하였다.
3. 한국교육의 근대화 과정을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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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을 근대화하여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국권을 지켜야겠다는 인식은 다행스럽게도 정부관리보다 외세의 조짐을 일찍이 짐작한 개혁인물들에 의해 민간에서 더욱 적극적으로 나타났고, 근대 교육의 실천에도 민간이 앞장섰다고 할 수 있다. 정부가 육영공원을 세우기 3년 전인 1883년에 원산 지방인들이 힘을 모아 관료들과 합심하여 신학문을 가르치기 위한 근대학교 「원산학사」를 설립한 것은 배재학당이나 이화학당보다 빠른 그 시초라고 본다. 원산학사는 육영공원과는 달리 처음부터 입학 자격을 개방했다. 관학이나 선교계 학교에 앞서서 자발적 성금으로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이 세워졌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교육 근대화를 위한 노력이 바라던 만큼의 성과를 얻지 못한 채로 지속되는 동안에 민간에서도 같은 노력이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원산학사 설립이후로부터 1910년 사립학교령이 공포되기 전까지는 사립학교를 설치하는데 있어서 정부 인가가 필요하지 않았고 또 보고 의무도 없었으므로 얼마나 많은 학교들이 세워졌는지에 대한 정확한 통계를 알 수 없는 실정이다. 그러나 민간 사립학교들 역시 재정난과 인적 자원의 부족, 그리고 1908년 통감부의 「사립학교령」공포 이후로 부터는 일제 탄압에 의해 대부분이 폐교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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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정부와 민간의 교육 근대화를 위한 노력이 의욕에 상응하는 성과를 얻지 못하고 있을 때에 기독교 선교사들에 의해 사립학교들이 계속 설립되었다. 1885년부터 1910년 2월가지 전국적으로 설립된 기독교 계통 학교의 수는 796개교에 이른다. 대체로 교육내용이 부실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선교계 학교들의 교육과 기독교 문화가 1900년대 초반까지 우리 사회와 교육을 근대화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비록 선교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지만 기독교는 한글의 대중적 보급과 남녀평등 사상의 도입에 앞장섰으며, 기독교적 인도주의, 서구적 합리주의 등 서양의 사상이 선교계 학교를 통해 소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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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우리 사회에서 민중이 국가 정치에 적극적으로 관여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국민의 의식이 개화되고 새로운 지식과 문물을 세워야 한다는 근대적 의미의 민권 의식 및 교육열이 길러지는 것이 오로지 1883년부터 나타나는 근대식 교육기관들의 성과라고만 말하기는 어렵다. 물론 19세기 말 사학과 관학들에서 교육을 받고 배출된 인재들이 우리나라 교육 근대화에 참여하였고, 일제하에서 불굴의 의지로 계속된 민족 교육 운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교육구국운동, 애국계몽운동, 사학들이 민족교육운동이 전국적인 규모로 국민들의 호응을 얻으면서 계속될 수 있었던 것은 일부 지도자들의 노력만으로 가능했던 것은 아니다. 모든 국민들의 열렬한 자발적 호응과 교육열이 없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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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 일제하의 근대 교육 활동에서도 민족교육은 관주도형의 공교육 기관보다도 민주도형의 사교육 조직에서 더 적극적이었다. 사교육 조직에 있어서도 법적 제약이 강화되어 감에 따라 점차 수적으로 감소되거나 변질되어 가는 정규 사립학교보다 도시와 농촌을 막론하고 대중 계층을 대상으로 광범하게 조직 ․ 운영되던 미인가 사학이나 야학 ․ 강습회 ․ 개량서당 등 비정규적인 민중 교육기관의 활동이 중시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제도적 교육과 비제도적 교육의 두 가지 대응 방식을 상황에 따라 상호보완적으로 사용해 왔다는 사실은 한국교육의 근대화 과정에서 발견할 수 있는 전략적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4. 서당에서 소학교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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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 이전 지방교육기관으로는 고등교육기관인 향교(鄕校)와 기초교육을 담당했던 서당(書堂)이 있었으나 당시에는 서당이 유일한 교육기관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서당은 서원이나 학당에 다니지 않는 지방 인사들의 자제 교육을 위해 민간이 설립한 초등 보통교육기관으로서 상급 교육기관으로 진학하기 위한 준비 교육을 담당하고 있었다. 통상 전국 각지의 동 ․ 면에 산재해 있으면서 7~8세의 아동들을 입학시켜 사서오경(四書五經)까지 가르치고 학업의 증진 의욕이 있는 학생은 15~16세에 이르러 도시에 있는 학당이나 향교로 나아갔다.
서민사회의 중요한 교육공간을 마련해 주었던 서당의 실태를 살펴보면, 설립유형에 따라 훈장 자신이 자기 생계를 위해 또는 취미 또는 사업으로 경영하는 훈장자영서당(訓狀自營書堂)이 있었고, 마을의 부유한 유지가 서당을 세워 자기의 자제를 교육시킴과 동시에 친지의 자제를 수용하는 유지독영서당(有志獨泳書堂), 동리의 유지들이 조합하여 훈장을 초빙하고 교실을 마련하여 그 자제를 교육시키는 유지조합서당(有志組合書堂), 마을 전체가 한 조합을 이루어 서당을 설치한 촌조합서당(村組合書堂)으로 구분할 수 있다.
서당에서는 처음 천자문부터 배우기 시작하여 동몽선습, 통감, 소학, 4서3경 등을 배워 나가며 서당에 따라서는 3, 4권 정도로 끝나는 경우도 있었다. 학습방법은 각자의 소리를 내어 암송하며 의문이 있는 경우 훈장의 지도를 받는다. 지방교육기관인 향교와 서당은 고려시대는 물론 조선시대에 와서도 국민교육의 대종을 이루는 교육기관으로 발전되어 전국 각지에 수 없이 설립 운영되어 왔으나 대원군의 집권 말기에 당쟁을 없애기 위한 방안으로서 서원 폐쇄령을 내렸고, 또 1894년 과거 제도가 폐지되자 성균관과 학당 그리고 향교 등과 함께 쇠퇴의 길을 걸었다. 더욱이 1895년 정부에서는 일본의 교육제도를 모방한 새로운 학교 제도를 채택하였고 현대적인 학교로서의 소학교, 중학교, 전문학교들이 설립됨으로서 서당의 기능이 더욱 쇠퇴하기에 이른다.
우리고장의경우도 전국적인 상황과 다름이 없었다. 신교리(교촌1리)에 향교가 있어서 지역의 양반이나 부유층 자제 100-200명이 수학할 수 있었다. 대부분 서민 자제는 마을마다 1-2개가 있는 서당에 다니거나 형편이 미치지 못하는 자녀들은 문맹자로서 평생을 살아야하는 매우 절박하고 처절한 삶을 영위해 왔다.
당시 풍기에는 60여개의 서당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며, 30년 전 만해도 큰 마을에는 서당이 지켜져 왔으니 교육환경이 열악했던 서민의 애환을 그나마 찾아 볼 수 있었다.
풍기군의 대표적 서당은 아래와 같다.
• 중산서제(中山書薺) 풍기군 서부면 백야리 • 우곡서당(雲谷書堂) 풍기군 와룡면 와룡리 • 노계서당(蘆溪書堂) 풍기군 노좌리면 노좌리
5. 학교 설립의 디딤돌이 생기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채결된 후 우리나라는 사실상 독립국가로서의 입지를 잃고 있었으며, 1906년 2월1일 설치된 통감부의 정치적 간섭으로 조선왕조는 하는 일은 꼭두각시놀음에 불과하였다.
거세게 불어오는 이른바 외세의 힘은 강했지만 기존세력의 수구파들 때문에 신교육의 열기는 계속 늦어지는 안타까움도 없지 않았다. 신학문과 새로운 제도를 받아들이지 않고 아직도 양반자세에서 우매한 민초들을 다스리고 있었으니 답답하기 그지없고 결국 일본의 계획된 침략야욕은 무르익을 수밖에 없었던 시기다.
지방에서는 뜻있는 인사들이 서양문물을 빨리 받아들여한다고 곳곳이 신교육의 장으로 사립학교가 설립되고 신교인 기독교가 선각자들을 통해 전파되는 등 소용돌이 속에 꿈틀거리고 있었다.
한편 일제통감부에서는 개화의 세력을 차단하려고 사립학교의 설립을 통제였는데 1907년부터 1908년 8월 까지 민중들이 자발적으로 설립한 학교가 전국의 약 3,000개가 넘었고 이른바 애국계몽 운동가들이 전국방방곡곡에서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던 것은 매우 다행한 일이었다. 그래서 일제통감부는 1908년 8월 「사립학교령」을 제정 공포하여 교육의 본질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까다로운 조건을 내세워 우리 민족의 신교육 구국운동을 탄압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한국의 애국계몽 운동가들과 민중들은 여기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들은 방방곡곡에 세워진 작은 규모의 학교들을 통합하여 큰 규모의 학교로 만들었으며, 농민들은 토지를 내 놓고, 지방 유지들은 기부금(寄附金)을 내 놓았으며, 일부 부녀자들은 장신구(裝身具)까지 헌납하여 일제가 요구하는 시설기준에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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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1909년 5월 1일 까지 애국계몽 운동가들이 재인가 신청을 낸 학교 수가 1,708개 교에 달하게 되었으며 이 중에서 일제 통감부가 인가를 내준 것은 종교학교를 포함하여 1909년 5월 말 현제 242개 교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애국계몽 운동가들과 애국계몽 운동단체와 민중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다시 헌신적 모금운동으로 시설확충과 교사양성을 추진하고 불굴의 투지로 학교 설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우리민족이 1909년 11월 11일까지 결국 인가를 받아 낸 각종 학교 수가 2,232개교에 달하게 된다. 이것은 우리민족과 애국계몽 운동가들의 신교육구국운동이 쟁취한 대승리였다.
이 시기 애국계몽 운동가들의 구국교육의 내용은 새로운 현대의 철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예술, 체육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철저한 애국주의 독립사상의 교육이 그 뼈대를 이루었다. 그리하여 이 시기의 애국계몽 운동가들의 교육구국운동은 당시 한국의 교육체계와 지식체계와 문화체계를 근본적으로 변혁 시켰을 뿐 아니라 그 후 독립운동에 있어서의 민족간부가 된 수십만의 애국청년들을 양성하는데 성공하였다. 애국계몽가들의 교육구국운동의 결과, 아무리 적게 추산하여도 약 50만 명 이상의 애국청소년들이 배양되었는데, 이들이 10년 후에 3 ․ 1운동의 주체세력이 되고 모든 독립운동의 주춧돌이 된 것이었다.
애국계몽 운동의 일환으로서의 언론계몽 운동은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만세보」, 「大韓民報」 등의 신문과 각종 잡지 및 學會報 들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되었다.
「황성신문」은 1905년 11월 20일자 사설에서 張志淵이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소위 「을사조약의 부당함과 을사5적」의 매국행위를 폭로 규탄하는 유명한 논설을 게재하여 80여 일간 일제에 의하여 정간당한 후 1906년 2월 22일에야 복간되는 등 국권회복을 위한 언론계몽 활동에 종사하였다. 이러한 와중에서 영주지역에도 순흥, 풍기, 영천지역으로 계몽운동의 기미가 개화의 물결을 실감한 유생들에 의해 전개되고 있었고 순흥에서는 영주권에서는 가장 빠르게 사립학교가 설립되는 역사적인 장(場)이 마련된다. 이 당시 우리지역은 북쪽에서 월남하는 인원도 적지 않았다. 평양에서 내려온 인사들 가운데는 신교인 기독교의 영향을 빨리 접하여 1907년 풍기교회(현 성내교회)가 관내에서는 가장 일찍 선교되어 교회가 헌당되는 획기적이고도 역사적인 전기가 마련된다. 그리고 개성에서 내려온 사람들은 인삼의 재배조건이 좋은 풍기에 인삼재배면적을 확대하고 재배요령을 전통적 재래방식에서 개량방법을 연구하여 발전시키고 인적조합을 결성하는 등 산업 근대화의 기초가 다져지고 있었다. 이렇게 국가적인 시대상황이 격랑을 거듭하였다. 따라서 개신교의 도래와 산업의 근대화가 신학교 설립의 촉진에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며 우리지역에 당시 권병선군수를 비롯한 유지신사(有志紳士)들이 뜻을 모아 신교육의 요람인 소학교가 세워지게 된 것이다.
6. 일제 강점기의 시대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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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적인 시대상황이 격랑을 거듭하는 동안 개신교의 도래와 산업의 근대화가 신학교 설립의 촉진에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며 우리지역에서도 당시 권병선(權丙宣)군수를 비롯해 유지신사(有志紳士)들이 뜻을 모아 신교육의 요람인 소학교를 세우기 위해 대거 참여하였다. 그것은 교남교육회(嶠南敎育會)에서 동분서주(東奔西走)하며 활동한 모습을 보아도 짐작되며 역사적(歷史的) 전기(轉機)가 되었던 1908년 당시의 시대상황(時代狀況)을 살펴보면 국사편찬위원회 근대사편에 풍기출신 황윤덕(黃潤德)을 군수로 임명해주기를 바라는 청원서(請願書)를 풍기군민의 이름(대표 : 趙鏞憲, 李相殷)으로 궁중 내 총리대신(總理大臣)에게 보낸 글이 있는데 상당기간 군수가 궐위(闕位)되어 있어 군민이 매우 어려움을 겪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군민의 뜻이 받아들여지지는 않고 주사 직무대리로 군정을 보던 풍기군 마지막 군수인 권병선 군수가 승진되어 1914년 영주군에 통합될 때까지 고을을 다스렸다. 권병선 군수는 일찍이 풍기군에 주사로 일하면서 지역출신 이풍환선생과 함께 교남교육회 회원으로도 활동하였고, 무지한 주민들을 위해 계몽운동에 앞장섰으며 산업근대화에 지대한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1900년 전후에 풍기군수의 재임기간이 1년을 넘지 못했고 1904년 이후 1907년 까지는 군수의 이름조차 등록되어 있지 않고 확인할 수 없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전국적으로 전개된 국권회복운동이 보수적이었던 이 땅에서 혼란(混亂)을 겪고 있었음을 짐작 할 수 있다.
1906년 4월 설립된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의 지방지회가 각처에 설립되어 유력한 유생들이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참여하였고, 1907년 대한자강회가 해산되고 1907년 11월 설립된 대한협회(大韓協會)도 기존의 대한자강회 지방지회 조직을 인수하면서 각처에 조직되었다. 그렇지만 영주지역의 경우 이러한 계몽단체의 조직에 대한 유생들의 움직임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웃 고을인 봉화군은 금석주ㆍ김호규 등 100여 명이 봉성광학회(鳳城光學會)를 조직하고 학교 설립과 인재양성을 목적으로 교육에 노력하였다는 것을 보면 우리 지역의 활동 상황을 아직까지 찾지를 못하였을 뿐 새로운 문물과 신교육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1908년 3월 서울에서 활동하던 영남출신의 인사들이 상호간의 친목과 계몽사상의 보급을 목표로 교남교육회(嶠南敎育會)를 조직하였고, 영주지역 출신으로 교남교육회에 가입하고 활동한 인사들을 보더라도 결코 활동 기간이 짧다고 생각 할 수는 없다. 초기 우리 경북지역에서 신교육이 태동(胎動)되는 것을 보면 1906년도 대구현풍학교와 고령학교인데 설립취지와 근거가 1895년 7월 19일에 공포한 ‘소학교령’ 제16조, 17조에 학령 및 취학에 관한 내용대로 “만 7세부터 만 15세까지의 8개년을 학령으로 하고, 각 부 ․ 군은 그 관내의 학령 아동을 취학시킬 공립소학교를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규정에서 지방공공단체가 서둘러 의무를 수행하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 정부에서 신속하게 전국의 모든 지역에 필요한 만큼의 학교를 설립 운영하기가 어려웠고 국가가 보조금을 지급하면서 까지 사립학교설립을 권장하는 경향(傾向)이었지만 순탄치 않았으므로 뜻있는 사회유지나 관리(官吏)들에 의해 지역실정에 따라 늦거나 빠르게 학교설립의 움직임을 볼 수 있다.
당시 서울을 중심으로 설립된 교육기관과 실태를 보면 광흥학교, 한성의숙, 흥화학교, 시무학교, 상동청년학원 등으로 특히 흥화학교는 1905년 을사보호조약의 체결에 분노하여 순절한 민영환이 설립한 학교였으며 1905년에 설립된 양정의숙과 보성학교는 1905년에 설립된 학교로서 대표적인 민족사립학교였다. 지방엔 안창호선생이 그의 고향인 평안남도의 강서에 설립한 점진(漸進)학교가 민간인이 설립한 최초의 학교인 동시에 남녀공학의 시작이기도하였다. 이들 사립학교들은 주로 소학교(小學校) 수준이었으며, 교육내용은 관공립소학교의 내용에따라 교과목이 편성되었으나, 일반적으로 역사를 중시하였는데 이는 당시의 교육이 일제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민족의 힘을 키워야한다는 목표를 지닌 민족교육이었음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사립학교가 근대화의 급속한 흐름에 따라 방방곡곡에 세워지고 있었고 가까운 이웃 순흥면을 비롯하여 경산송림학교 선산영창학교 등이 세워지는가 하면 1902년부터 10년 사이에 경북 대구지역에 30개 이상의 사립학교가 세워지게 된다. 이때 풍기에서는 안정사립학교가 권병선 군수와 이풍환 총무, 황락성, 황덕주, 황재진 등 유생들이 대거 참여하여 매우 빠르게 신교육의 요람으로 1908년 5월 20일 인가를 받게 된다.
7. 교남교육회(嶠南敎育會)의 활동
구분 |
성명 |
학력, 관직, 경력 |
영주 |
이병헌(李秉憲)
김 숙(金 塾)
김병철(金秉喆)
이긍호(李兢鎬)
정규집(丁奎集)
장두규(張斗奎)
송상갑(宋相甲)
박병철(朴炳哲)
권대찬(權大)鑽)
송상섭(宋相燮)
권상두(權相斗)
김홍규(金洪奎)
김인식(金仁植) |
1896년 풍기군수
1918공립간이실업학교 훈도
(구한국)승훈랑 장릉참봉
進仕,1911 이왕직 찬시, 1915 장사(掌司)
1910 군서기, 1912년 의원면직 |
순흥 |
김낙순(金洛純)
이윤갑(李潤甲)
김교명(金敎明)
이주명(李宙明)
신언집(申彦集)
김교림(金敎林)
정호익(鄭鎬益)
송주면(宋柱冕)
이만하(李晩夏)
OO수(~洙)
신두균(申斗均)
이휘실(李輝實) |
(구한국)박사, 1913군서기
1903 한성사범학교 입학, 1905 교동보통학교 교원
1905 계동보통학교 교원, 1909 사립소흥학교 교사
1911 공립보통학교 훈도
1896 풍기의진 창의장
유생, 신태운의 자
참봉
1909 사립소흥학교 교감
1909 사립호흥학교 교사
1907탁지부측량견습생, 탁지부기수,
1909사립소흥학교 교사,1912 순흥공립보통학교 훈도
유생 |
풍기 |
황윤덕(黃潤德)
김종수(金種洙)
김재종(金在鐘)
황도흠(黃道欽)
김경연(金慶淵)
김한병(金漢炳)
김중배(金重陪)
이풍환(李豊煥)
권병선(權丙宣)
윤길선(尹吉善)
장상희(張相喜)
이인수(李寅洙)
신태승(申泰昇)
신희균(申喜均)
한상오(韓相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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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 이황직 속 의원면직. 단산면장
1915 임시토지조사국 기수보
승훈랑, 시종직, 주사1909, 통정대부, 사립안정학교 총무.
1908 풍기군 주사, 1909 풍기군수, 1914 의성군수
1917 청송군수 1922 고령군수, 상주군 이안면장, 통정대부
1902 통신원 참서
1909 사립안정학교 교감
1908 풍기주재소 순사, 1910 군서기 1914 평북 초산군수
1910 사립안정학교 교사
1909 사립안정학교 교사, 1910 도서기(충북),
1912 군서기 |
영주지역 출신의 교남교육회 회원들은 주로 을미의병(乙未義兵)이후 상경 활동하던 유림들이거나 전 현직 관인들이다. 이들은 주로 영주, 순흥, 풍기 등 영주지역 일대에 세거하던 양반 사족으로 을미의병 이후 상경하여 일찍부터 계몽사상(啓蒙思想)을 접할 수 있었던 인사들이었다. 영주지역 교남교육회 회원 김교명은 1896년 을미의병 시 풍기의진의 창의장이었고, 신언집은 을미의병 시 순흥의진의 부약장 및 소모장이었던 신태운(申泰雲)의 아들이다. 그리고 김교림은 참봉으로 그의 부친 역시 을미의병 시 의병에 참여하였으며, 이휘실은 유생이었다. 이들은 을미의병 이후 상경하여 활동하였던 유생으로 파악된다.
영주지역 출신의 교남교육회 회원 중에서 김숙(金塾)은 갑오경장 시 1896년 풍기군수를 1년 동안 역임하였고, 상주군 이안면 출신인 권병선은 풍기군 관아에서 주사로 군수직무대행 일을 보다가 1908년 초 군수로 승진되어 6년 간 재임했던 인물로 1908년 교남교육회 회원인 이풍환(李豊煥), 이인수(李寅洙)와 사립안정학교(安定學校)를 설립한 공로자다. 이미 1906년 사립 소흥학교(紹興學校)를 설립했던 교감 정호익, 교사 이윤갑, 이만하, 송주면 등은 교남교육회에서 신교육을 이수하고 이후 교남교육회원의 중심인물이 된다. 이렇게 소흥학교는 신교육구국운동의 목표 하에 설립된 영주지역 최초의 신교육기관으로서 신교육사에 시사(示唆)하는바가 크다. 풍기에서 설립된 사립 안정학교도 풍기군수에 임용되지 못한 궁내부서기 정육품 황윤덕(黃潤德)이 의원면직되어 고향에 내려와 교육 계몽활동을 하게 되며 그 밖에 김종수(金種洙), 김재종(金在鐘), 황도흠(黃道欽), 김경연(金慶淵), 김한병(金漢炳), 김중배(金重陪), 이풍환(李豊煥), 권병선(權丙宣), 윤길성(尹吉善), 장상희, 이인수(李寅洙), 신태승(申泰昇), 신희균(申喜均), 한상오(韓相五) 등 신교육의 취지를 살려 교남교육회활동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이들의 모습을 주목하게 된다.
8. 학교 설립과 교명의 의미
교명의 공식 명칭이 사립 안정학교(安定學校)였다. 이미 이웃 순흥군에서는 사립 소흥소학교(紹興小學校)로 학교 명칭이 제정되어 있었고 그 명칭이 소수서원(紹修書院)의 소(紹)자와 흥주군(興州郡)의 군 첫 자인 흥(興)을 인용하여 소흥(紹興)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풍기의 경우 왜 안정(安定)이란 명칭을 썼는지 당시 상황을 정확히 확인할 수 없으나 풍기지역명칭유래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고려조 기주의 명칭을 사용하면서 안정(安定) 또는 영정(永定)으로 불리였던 것으로 보아 안정(安定)이란는 이름은 글자 그대로 편안한 자리라는 뜻으로 결정했으리라 본다. 설립시의 상황은 당시 중앙에서 발간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와 황성신문(皇城新聞)에서 잡보(雜報)로 소개된 5점의 자료에서 그 면면을 찾아 볼 수 있다.
(安校有望) 豊基郡 安定私立學校 來函을 據한 則 郡 主事 權丙宣씨와 駐在所 巡査 李寅洙씨와 鄕員 黃在鎭 黃德周氏가 去 四月 二十日에 一郡人事를 會同하야 敎育必要와 設校方針을 聖心說諭하메 全郡人事가 心悅誠服하야 爭先捐義故로 一以修茸校舍하고 一以募集生徒하야 興旺之望이 有하다더라
皇城新聞 1908년 5월 29일(隆熙2년) (安定有校) 豊基郡有志紳士가 協議하야 私立安定學校를 設立하고 校 長은 黃樂成씨로 總務는 李豊煥씨로 敎師는 宋寅勉 南相復 韓相五씨 로 校監은 張相喜씨로 選定하고 趣旨書를 發表하얏다더라. 大韓每日申報 1909년 5월 26일(隆熙 3년)
위의 보도내용은 1908년 5월 29일과 1909년 5월 26일 두 차례에 걸쳐 황성신문 잡보와 대한매일신보에 게재된 내용으로 유일하게 학교설립의 일정을 명시하고 있다. 그동안 학교설립을 위해 권병선 군수 직무대리 그리고 주재소 순사 이인수, 향청의 대표로서 황재진 황덕주씨가 설립방침대로 전 군민에게 성심으로 설득하자, 마음속으로 깊이 감복한 군민들이 뜻을 같이하여 열성적으로 노력한 결과 많은 학생들을 모집하고 앞을 다투어 기쁜 마음으로 성금을 모아 교사도 수리하고 특별하게 지어서 지난 4월 20일에 발표하여 5월 20일에 개교하였다.
(豊校興旺) 豊基郡 安定學校 郡守 權丙宣氏가 熱心敎育하야 學府에 認可를 承한지라 全郡人民이 感服贊助하고 靑年子弟가 聖心來學하야 一般生徒가 100여명에 달하고 郡守主事書記及廳直이까지 仕退後에 每日二時式篤實來學하메 敎師及學監諸氏가 亦爲勸勉敎授한다더라. 皇城新聞 1909년 4월 29일(隆熙 3년)
학교 설립 후 1년이 경과 된 후의 신문 게재 내용으로 군수직무대리로 있던 권병선 군수가 군수로 승진하고 더욱더 학교교육에 심혈을 다하여 군민들이 감화해서 찬조도 많이 하니 학생수가 1백 명이 넘고 고을 청년자제들이 성심으로 학교에 나와 열심히 공부하는데 군청직원과 교사 학감 모두 퇴근 후에 까지 두 시간 이상 교육을 시키고 또 지도하며 학업에 열중토록 권면하였다.
(안정유지연구) 豊基郡 私立安定學校는 設立三載에 該校長 宋聲晩 各科 敎師 崔景植 申禧均 黃寫來 諸氏의 熱心敎授로 學員이 九十餘名이 至하야 進就之望이 有하나 學校財政이 窘拙함으로 本 郡守 權丙宣氏는 該校維持方針을 硏究中이라더라. 皇城新聞 1910년 4월 10일(隆熙 4년)

학교 설립 후 3년차가 되자, 황낙성 교장선생이 타 지방으로 정근 되고, 이어서 송성만이 교장선생이 되었다. 선생님도 인사이동이 되어 이름이 변경된다. 계속해서 열심히 가르쳐서 학생수가 90여명에 이르고 앞으로 교육의 발전이 희망적이나 재정이 어려워 권병선 군수는 학교의 유지 발전을 위해 고심하고 있다는 사실을 군졸(窘拙:매우궁핍하고 어려움)하다고 보도하였는데 시대상황이 당시 사립학교 운영 자체가 매우 어려웠음을 알 수 있다. 이후 1년이 경과되면서 1911년 3월 사립안정학교가 폐교되고, 1911년 4월 1일 풍기공립보통학교로 명칭이 변경되며. 4년제에서 6년제로 수업 연한도 연장된다. 이어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풍기군 안에 있던 생고개면, 동촌면과 영천군에 속해 있던 대룡산면, 가흥면 일부를 포함하여 새로운 행정구역인 안정면이 신설 되었다. 이때 새로운 행정 구역명칭이 역사적 유래를 참고하여 안정이라는 행정구역 명칭으로 정해졌다고 본다. 풍기초등학교의 연혁을 보면서 설립 시 소재지는 지금과 같은데 명칭이 사립안정학교로 되어 있어 명칭을 보고 지금의 안정면 위치에 처음으로 초등학교가 세워졌다가 옮겨 온 것으로 잘못 이해하기 쉬운데 오해(誤解)가 없어야하겠다. 위치도 지금의 자리가 구 풍기군청의 관아였고, 동쪽에 위치한 지금의 읍사무소 뒤편 제운루(薺雲樓)누각 옆 빈청(賓廳)을 개수하고 증축(增築)하여 이용하였다. 1914년도 영주군에 통합되면서 옛 풍기군 관아(官衙)였던 성내동 22번지의 넓은 면적을 학교가 사용하고 옛 제운루(薺雲樓)아래 건물을 짓고 땅은 분할(分割)하여 은행나무 아래 700여 평만 영주군 풍기면(읍)사무소로 사용해 왔다. 9. 풍기초등학교가 있기까지 애쓰신 분들.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등 당시 신문자료와 교남교육회원명부등에 등재되어 있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행적을 알아본다. 영주지역 교남교육회 회원(풍기) - 황윤덕, 김종수, 김재종, 황도흠, 김경연, 김한병, 김중배, 이풍환, 권병선, 윤길선, 장상희, 이인수, 신태승, 신희균, 한상오. ♦ 설립자 : 권 병 선 군수 (1871, 7, 21 - 1943, 4.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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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택 옆에 세워진 권병선 군수의 비 | 상주군 이안면 출신으로 1908년 주사로 부임하여 풍기군수직무대리에서 1909년 승진되며 재임기간이 6년이었다. 1914년 전국 행정구역 개편 시 풍기군이 영주군에 통합되자 의성군수로 이임하게 된다. 이후 약력(국사편찬위원회 직원록)을 보면 의성군수(1914년-1917년), 청송군수(1917년-1920년), 고령군수(1920년-1922년), 상주군공검면장(1927-1928년), 상주군이안면장(1928년-1941년)등 40여 년을 공직에 있었으며 특이한 사항은 15년간의 장수 군수를 엮임 하다가 고향 상주에 가서 약 13년간 면장에 재직한 부분이다. 풍기군수로 부임하지 마자 신교육의 요람 사립안정학교의 설립자가 되었는데 당시 향청의 유생, 향원을 중심으로 지역 주민들의 성원을 받아 전통을 이어 역사적인 장을 마련해 준 공로자이기도 하다. 황성신문 잡보에 나타나듯이 재정이 궁핍함에도 학교운영과 유지에 많은 노력을 하였으며, 솔선하여 교육을 독려한 것으로 보아 매우 의욕적으로 신교육을 강화 시킨 면을 찾아볼 수 있다. 당시 연령이 1871년생(辛未)이니 군수부임 때가 37세였다. 그러면 초대 황낙성 교장보다는 11세, 총무 이풍환선생 보다는 4년의 연하 층이나 중앙관직은 같은 시대에 근무했던 동료였던 것으로 짐작되고 지역의 중요현안을 허심탄회하게 상의하고 민심을 다스리는데 향원들의 많은 도움을 받았을 것으로 본다. (권병선 군수의 유택은 현재 고향인 상주군 이안면 여물리 임 54-1번지 후산에 안좌해 있으며 20년 전 후손들이 뜻을 모아 비를 세웠으니(通政大夫 豊基郡守 權公 丙宣之碑)가 그것이다. ♦ 순사 이 인 수 직책으로 보아 대한제국직제편성에서 치안분야를 책임지고 있었던 위치에서 군수와 유기적으로 협의하여 학교설립에 기여했던 인물이며 1910년 군서기로 근무하다가 1914년 평안북도 초산군수로 승진하여 이임하였고 영주지역 교남교육회 회원으로도 할동하였다. ♦ 향원 황 재 진 (진사) (1853 - 1924) 진사 황조하의 아들로서 호를 동려(東廬)로 썼고, 1853년(계축년)생이다. 당시로 보아 연령이 많은 편이었으며 많은 글을 남기신 유생이었고, 이풍환 선생과 가까이 지난 흔적이 있다. 동려문집(東廬文集)이 전하는데 당시 향원 유생들과 교류한 글이 수록되어 있다. 1924년(갑자년)에 유명을 달리 하였다. ♦ 풍기군서부면장 황 덕 주 (1861, 1, 25 - 1940, 7, 28) 평해 황씨로 서부3리 43번지에 거주하면서 주도적으로 신교육설립에 가담하였다. 1910년 제1회 수료 시 교장으로 명기된 것으로 보아 제1대 황낙성, 제 2대 송성만 그리고 3대 교장으로 재임했음을 알 수 있다. 권병선 군수보다 연령이 10세 많았으며 풍기군 서부면장(면사무소 금계1리에 소재))으로 직책상 주요산업중심의 동을 맡은 책임자로 지역발전에 크게 공헌하였고, 1914년 행정구역이 개편되고 1925년까지 영주군 풍기면 초대면장으로 재직하였다. 1900년(광무 4년)9월9일 궁중 중추원의장에게 경상북도풍기군 유학(幼學)의 이름으로 경모궁(景慕宮)을 장조(莊祖:사도세자)의 태실(胎室)로 이름 짓는 것이 법과 예에 맞는 것이라는 건의문을 동료 송인면, 이학희등과 함께 올릴 정도로 강직한 인품을 가지셨던 분이었다. ♦ 교장 황 낙 성(1860, 3,11 - 1937, 12, 16) 당시 풍기지역에서 백리에 창원황씨가 세거하던 시기였다. 황사우의 아들로서 1860년(고종20년)에 출생하여 일찍이 고종 조에 문과에 급제하고 고종황제를 가까이서 모시는 승정원 주서를 지낸 인물이다. 연령과 경력을 감안하여 권병선 군수와 향원에서 유지신사(有志紳士)들이 초대교장으로 추대하였다. ♦ 총무 이 풍 환(1867, 3, 14 - 1933, 6, 8) 총무의 역할은 지금이나 100년 전이나 다름이 없을 것이다. 학교설립의 실질적인 공로자로 짐작케 한다. 개성출신으로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주사, 승훈랑 등의 중앙관직을 거쳐 뜻 한 바 있어 부친인 이종식(영양현감)이 근무하던 안동 영양을 오르내리다가 1800년 말 정착하여 산업근대화에 헌신하였다. 과거 행적으로 보아 설립자 권병선 군수를 비롯해 중앙관직에 있던 위의 분들과 교분이 있었고, 재력도 상당하여 향청의 중심에서 폭 넓은 활동을 하였으며, 민초들의 애로사항을 많이 해결해 주었고 풍기인삼포조합 설립도 주도하였으며 21년간 조합을 이끌어 간다. 역시 교남교육회원으로 활동하고 일생을 마칠 때까지 풍기보통학교 학무위원을 맡았으며 세상을 떠나자 학교에서 풍기사회장으로 성대한 영결식이 거행되기도 했다. 관직을 떠나고 공적을 인정받아 조선왕조로부터 통정대부(정3품)의 교지를 받았으며 산업에 기여한 지대한 업적을 인정하는 표창장만도 인삼, 쌀, 밀, 양잠, 과수, 금융조합설립등 20여 점이 남아 있다. ♦ 교감 장 상 희 교남교육회회원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특별한 경력은 찾을 수 없었다. ♦ 교사 한 상 오 1909년 안정시립학교교사. 1910년 도서기(충북), 1912년 군서기 - 송인면, 남상복, 신희균 선생의 기록은 확인할 바 없었다.

학교설립당시 신문(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에 보도된 원문 참고문헌 :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풍기읍지, 영풍군향토지, 한국사대계(1973년),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 1993), 경북교육사료(경상북도교육위원회:1982년), 영주교육사, 영주지역사회론(홍대선 : 1997), 인천개항 백년사(1983년), 목포개항백년사(1983년), 영풍군정 15년사(1995년) ,순흥초등백년사(2006년), 남평초등백년사(2006년), 현풍초등학교 백년사(2006년), 고령초등학교 개교백년사. ♣자료 제공 김 인 순(48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