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봄날입니다.
예쁜 화분과 어린 나무들을 파는 가게들이 하나, 둘씩 문을 열고 여러 가지 꽃씨를 담은 봉투들이 거리거리에 쏟아져 나왔습니다.
송희는 엄마를 따라 시장에 가는 길입니다.
"엄마, 우리 마당에도 작년처럼 꽃밭을 꾸며요, 네?"
"응, 그래, 생각해 보자."
송희 엄마는 앞만 바라보며 그냥 걷고 있었습니다.
"엄마는 무엇이든지 들어주지 않으려면 생각해 보자, 하고 미루어 버리더라."
"응, 알았어."
엄마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송희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아휴, 저기 저 꽃나무 좀 봐요."
송희는 지나쳐온 꽃장수 아줌마 쪽을 가리키며 엄마를 흔들었지만 엄마는 끝내 들은 척도 안했습니다.
그런데, 시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막 지하도 층층계를 내려설 때였습니다. 엄마는 지갑에서 100원짜리 동전을 한 웅큼 꺼내더니, 어린 아기를 안고 앉아 노래를 부르고 있는 눈 먼 아줌마의 돈바구니 속에 살짝 담아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옆에는 고무장갑과 껌이랑, 볼펜등이 조금씩 놓여 있었습니다.
"엄마는 저번에도 백화점에 가서 재미있는 장난감을 사다주겠다고 해놓고선 약속도 안 지키고, 저런 거지한테는 물건도 가져오지 않고 웬 돈을 그렇게 많이 주어요?"
"조용히 좀 해! 다음부턴 시장 같은 데 따라오지도 말고."
엄마가 별안간 큰 소리로 꾸짖자, 송희는 눈이 휘둥그래져서 고개를 들어 엄마의 얼굴을 살폈습니다. 그처럼 다정하고 인자하던 엄마가, 요사인 웬일로 자꾸만 야단을 치는 지 모를 일입니다.
"알았어요. 뭐, 다음부턴 엄마 편을 드나 봐요. 아빠가 훨씬 더 좋은걸요."
이번엔 송희가 토라져서 입을 쭈욱 빼밀고 통당통당 앞서서 걸어갔습니다.*
2. 임원 선거
요즈음엔 모든 게 송이의 뜻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매일같이 아침에 일어나면 아빠와 함께 가까운 공원을 한 바퀴 비잉 돌아왔었는데, 아빠가 지방 출장 중이라서 자연히 아침 운동도 게으르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다가 오늘은 새학년이 되어 제일 기대했던 학급 임원 선출이 있었는데, 송희는 반장은커녕 부반장도 못되었답니다.
가뜩이나 기분이 좋지 않았는데 엄마마저 송희의 부탁을 한 가지도 안들어주니, 정말이지 화날만도 하지 뭐에요.
저녁 때, 책상 앞에 앉아서 숙제를 하고있던 송희는 오늘 낮에 있었던 일들이 자꾸만 머리에 떠올라서 제대로 공부가 되지 않았습니다.
"지혜는 그래도 지난 해에 나와 한반이였고, 공부도 항상 일 등만 했으니까 좋다고 생각해, 하지만, 부반장이 된 자영이보다 내가 못한 게 뭐야, 키도 나하고 비슷하고 옷차림도 그렇던데-. 우리 반 아이들은 순전히 엉터리야."
생각할수록 자기를 안뽑아준 반 아이들이 미웠습니다. 억울한 생각까지 들면서 속이 상하여 견딜수가 없었습니다.
"엄마, 내 말 좀 들어 봐요!"
송희는 또 부엌 쪽에다 대고 큰 소리로 엄마를 불렀습니다.
"왜 그러는 거야, 여자 애가 얌전치 못하고."
돋보기 안경을 코위에 걸치고, 호랑이처럼 무서운 할머니가 들어온 것입니다.
"아니어요, 할머니, 그냥 건너 가셔요."
"뭐냐? 내가 들어줄 테니 어서 말해봐!"
할머니는 송희 옆에 바짝 다가앉으며, 아무렇게나 써내려간 공책을 안경 너머로 바라보았습니다. 송희는 슬그머니 공책을 덮으며 싱겁게 웃었습니다.
"아들도 낳지 못한 네 에미가 뭘 안다고 자꾸만 에미를 불러대는 거냐, 차라리 모르는 게 있으면 나한테 물어보렴. 알았지? 응?"
할머니는 큰 기침을 서너 번 억지로 하면서 송희의 엉덩이를 또닥또닥 두들겨 주었습니다.
"실은요, 할머니, 나 오늘 반장도 부반장도 아무것도 못되었어요. 할머니, 1학년 때 선생님은 나더러 똑똑하고 영리하니까 2학년에 올라가면 꼭 반장이 될 수 있을 거라고 했었는데...."
"그래, 반장인가 뭔가 하는 것이 그렇게도 하고 싶냐?"
"그럼요, 내 작은 소원이었는데요. 이젠 틀렸어요. 2학기 때나 기다려야지."
"자식두, 이놈아, 네가 고추를 달고 나온 사내녀석이라야지 반장도 되고 일등도 하는 걸 바래지. 여자 애가 그런건 해서 뭐하게? 다 쓸데 없다. 쓸데 없어!"
"할머닌 또 고추 타령이셔요? 다 옛날 이야기에요, 할머니!"
송희는 할머니 쪽으로 눈을 흘기며 입을 삐죽거렸습니다.
"할머니, 날 차라리 어떤 집 아들하고 바꾸시지 그래요."
"저놈이 어디서 배운 버릇이야? 학교선생님이 그렇게 가르치던? 어른한테 막 덤비라고?"
할머닌 송희를 한바탕 야단치고는 밖으로 나갔습니다.
"아들, 딸 구별말고 둘 만 낳아 잘 기르자!"
송희는 할머니가 알아듣도록 큰 소리로 외치고는, 하던 숙제를 계속 했습니다. *
3. 얄미운 아이
다음 날입니다.
수업이 끝난 뒤 선생님은 반장과 부반장 그리고 줄반장들을 남게 하여 환경 정리를 돕도록 하였습니다. 송희는 자영이와 민수랑 함께, 학급 문고 표지를 하얀색 종이로 싸는 일을 맡아 했습니다.
"송희야, 그 쪽에 하얀 종이 남거들랑 이 쪽으로 좀 넘겨 줄래?"
자영이가 말했습니다.
"싫다. 네가 와서 가져 가렴!"
송희는 괜히 심통을 부리며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 내가 가져다 쓸게. 미안해!"
자영이는 오히려 송희한테 미안하다고 하였습니다.
'참, 별난 아이야.'
송희는 상냥하고 착실한 자영이가 속으로는 은근히 좋았습니다.
'자영일 우리 집에 한 번 초대할까?'
그렇지만 자영이는 안됩니다. 공부도 잘하고 똑똑한데다 얼굴도 예쁘고 너무나 빈틈없이 골고루 잘하는 자영이가, 샘많은 송희한테는 아무래도 얄미운 아이로만 보였으니까요.
"어머나, 내가 한 것보다 송희, 네가 한 것이 훨씬 깔끔하게 잘 되었구나!"
자영이는 다 된 책들을 책꽂이에 나란히 꽂으며 송희를 칭찬해 주는 것입니다.
"거짓말 마! 네가 더 잘 싼 걸 뽐내고 싶어서 그러지?"
"아니야, 사실대로 말한 건데, 넌, 왜 자꾸만 나쁘게 생각을 하니?"
여전히 자영이는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말했습니다.
"맞아, 송희는 이상하게도 자영이 말끝마다 전부 시비를 걸던걸!"
옆에서 줄곧 함께 일하던 민수가 한마디 거들었습니다.
"뭐라고? 넌, 왜 나서는 거야?"
송희는 남자 부반장인 민수마저도 자기를 무시하는 것처럼 생각이 들어 버럭 화를 냈습니다.
"아아니, 그냥 해본 소리야, 그런 말 좀 했다고 화를 내는 거야?"
민수가 혀를 쭈욱 빼밀고 한쪽 손으로 자기 턱을 쥐어잡고, 다른 손으로 얼굴을 박박 긁으면 원숭이의 흉내를 내는 바람에 송희도 억지로 웃고 말았습니다. *
4. 기다리던 아들
송희는 아주 잘 사는 큰 부자집은 아니지만, 그래도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다복한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송희 아빠는 큰 회사의 부장님이고, 엄마는 옛날에 여학교 선생님까지 지낸 멋쟁이 사모님입니다.
송희네 할아버지는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장학회장까지 지내며 사회에 좋은 일을 많이 하였으므로 널리 잘 알려져 있던 분이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송희는 어렸을 적부터 부족한 것이 별로없이 어리광도 곧잘 부리며 자라난 것입니다.
하지만, 송희 아빠가 삼 대째 독자이기 때문에, 할머니는 꼬옥 송희 밑으로 아들 손자를 하나라도 봐야만 된다고 고집을 꺾지 않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송희 엄마가 뒤늦게나마 아기를 가졌으니 할머니의 기쁨은 대단하였어요.
그러나, 송희 엄마는 아기 볼 날이 가까워질수록 걱정을 많이 하였습니다. 만약에, 태어난 아기가 아들이 아니고 딸이라면 할머니가 얼마나 실망할까 하는 생각에서랍니다.
마침내 송희네 집에는 커다란 경사가 생겼습니다. 그렇게도 기다리던 송희의 남동생이 내어난 것입니다.
언제나 큰 소리를 치며 엄하기만 하던 할머니는 그 많은 주름살을 한꺼번에 다펴보겠다는 듯 마냥 활짝 웃었습니다.
"암, 그렇고 말고, 우리 집안의 대를 이을 씨아들이 태어났다고!"
할머니는 여기저기에서 축하해 주는 소리를 듣고 싶어, 친척 집마다 전화로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얼마동안 답답했던 집안이, 새로 찾아온 봄 날씨와 함께 사르르 풀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 송희 만만세다! 우리 아가씨가 고추 밭에 터를 깔았거든!"
아빠도 엄마 못지 않게 기뻐하며 송희를 불끈 안아주었습니다.
아빠를 닮은 얼굴로 잘생긴 사내아이가 방실방실 웃을 때마다, 방안은 환해지고 모두들 즐거워서 싱글벙글 웃음꽃이 만발했습니다.
더욱이 대학교에 다니는 고모는 아기곁에서 떠날 생각을 안하는 것이었습니다. *
5. 말다툼
넓은 학교 운동장 가장자리엔 벚꽃들이 아름답게 피어나고 따스한 봄볕은 모든 생물들을 쭈욱쭉 자라나게 도와주고 있었습니다.
송희는 학교에 와서도 동생 자랑하기에 바빴습니다.
"우리 아기 얼굴은 포동포동 살이찐 게 꽈악 깨물어 주고 싶도록 귀엽단다. 벌써부터 곤지곤지 잼잼을 얼마나 잘한다고-."
"누군 동생 하나 못본 사람들만 모였니? 별 걸 다갖고 자랑이야."
조용히 앉아서 아침 자습을 하려던 얌전이 순자가 귀를 막으며 말했습니다.
"듣기 싫으면 넌 밖으로 나가라고!"
송희가 운동장 쪽을 가리키며 아이들을 둘러보자, 아이들은 '하하하'웃으며 송희에게 박수를 보냈습니다.
반 아이들은 새침데기 순자보다는 깔끔하고 야무진 송희의 편을 더 들어 주었습니다.
"얘들아, 그만 조용히 하고 제 자리에 가서 앉아!"
선생님으로부터 '방글'이라고 별명까지 받은 자영이가 생각보다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딱 버티고 서서 호령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송희, 넌 줄반장이면서 아침부터 그렇게 떠들어도 되는 거니?"
아이들은 자영이의 눈치를 살피며 제각기 자리로 가서 앉았습니다.
"별꼴이야, 아니 넌 반장도 가만히 있는데 부반장이 나서서 선생님처럼 명령이니? 나도 2학기땐 반장은 못해도 부반장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송희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자영이에게 덤벼들었습니다.
"어쨌든 네가 잘한 건 아니야, 조용히 자습하는 아이더러 나가라니, 그게 잘한 거야?"
자영이도 지지않고 말했습니다. 그 때, 마침 선생님이 들어오셨기 때문에 자영이도, 송희도 모두 제자리로 갔습니다.
학교가 파할 무렵이었습니다.
송희는 몇몇 아이들과 함께 교문 앞을 빠져 나오며 계속해서 떠들어댔습니다.
"얘들아, 자영이 고것이 1학년땐 몇반이었니?"
"응, 나와 한반이었어."
키가 작아 '꼬맹이'라고 불리워지는 지연이가 대답했습니다.
"너, 자영이네 집 알고 있니?"
"아니, 한 동네가 아니라서 잘 몰라."
"그럼, 그 애 엄마는 한 번이라도 봤니?"
"아아니, 글쎄, 자영이는 한번도 자기 집에 데리고 간 적이 없었어."
"오호, 그래? 하하하, 우습다. 학급에선 제법 똑똑한데 알고보니 맹꽁이로구나!"
아이들은 송희의 말에 배를 움켜잡고 한바탕 깔깔깔 웃었습니다. *
6. 송희의 초대
"얘들아, 그럼 오늘은 일찍 끝났으니까 우리 집에 가서 놀다 갈래?"
송희는 아이들을 곧잘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한 번이라도 송희네 집엘 다녀간 아이들은 금방 송희와 친해졌기 때문입니다.
지하도를 지나가는 층계 밑에서 또 그 눈 먼 아줌마를 만났습니다.
"아이구, 무서워! 가까이 가지마, 이쪽으로 와."
"눈을 감고 앉아 있으니, 누가 저 물건을 다 훔쳐가도 모르겠잖아?"
"그래도, 불쌍하다 그지? 저 아기 좀 봐. 시멘트 바닥이 저희 안방인줄 아나보다."
아이들은 재빨리 뛰어서 그 옆을 지나쳤습니다.
송희네 집은 3층 건물인데다, 화려하게 정리되어 있는 방 안도 아이들의 호기심을 끌었지만, 그보다도 송희 엄마와 할머니는 꼬마 손님들이지만 그처럼 자상하게 대접을 해줄 수가 없었습니다.
"너희 엄만 참 멋쟁이고 좋은 분이다. 우리 엄마도 좀 그래봤으면...."
아이들은 하나같이 송희를 부러워 하였습니다.
"얘들아, 너희들 2학기땐 꼭 날 반장으로 뽑아야 한다. 알았지? 그래야, 그 엉덩이에 뿔이 돋힌 자영일 혼내주지."
송희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아이들에게 부탁을 하였습니다.
"그럼, 우리가 널 빼놓고 누굴 뽑겠니?"
이렇게 해서 송희와 친해져가는 아이들은 날이 갈수록 많아졌습니다. 그 후로도 송희는 남동생 웅이의 백일 잔치에 반 아이들을 여러 명 초대하였습니다.
잘 차린 음식이며, 산더미 처럼 많아진 장난감이랑, 이제 막 기어 다니는 귀여운 남동생을 자랑하고 싶어서 였습니다. 그러나, 일부러 자영이는 빼놓았습니다. 선생님은 반장인 지혜보다도 자영일 더욱 더 사랑해 준다고 아이들이 자꾸만 송희한테 귀엣말로 전해줬기 때문입니다. *
7. 알 수 없는 일
제법 날씨가 따뜻해지는가 했더니, 벌써 여름 철로 접어들었습니다.
나무들마다 푸른 잎들을 팔랑거리고 사람들은 그늘진 곳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송희는 오늘도, 친해진 아이들 몇 명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지하도 층층계를 하나 둘, 하나 둘 하며 깡충깡충 뛰어내려가던 송희가 무언가를 보고 깜짝 놀란 듯 제자리에 멈춰 섰습니다. 아이들이 왜 그러느냐고 물었지만, 송희는 아무것도 아니라면서 그대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저녁 때쯤 초인종 소리가 나자 송희는 엄마를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나갔습니다.
"엄마는 참 이상해! 나, 오늘도 봤어요."
"우리 아가씨가 또 무엇을 원하시나요?"
엄마는 기분이 좋은 모양으로 송희의 뺨을 꼬옥 쥐어주었습니다.
"그, 거지 아줌마 말이어요. 그 사람이 누군데, 엄마는 종종 거기를 찾아가서 도와주느냐 말이어요. 누가 보면 창피하게 그게 무슨 일 이어요?"
"뭐라고? 너 말 다했니?"
엄마의 얼굴빛이 빠알갛게 달아오르며 두 눈이 무섭게 빛났습니다.
"아니어요. 제가 말을 잘못 했나봐요."
송희는 금방이라도 때려줄 듯한 엄마의 태도에 그만 힘이 쭈욱 빠졌습니다.
"송희, 너 좀 들어오너라."
엄마는 화를 가라앉히며 송희를 방으로 불러들였습니다.
"얘야, 이 엄마는 어렸을 적부터, 너처럼 돈이 생기면 그저 군것질이나 하려고 들진 않았어. 작은 일이지만 무언가 보람된 일을 찾아보도록 해야지. 앞으로 너희들이 자라서 할 일이 얼마나 많은 줄 알기나 하니? 그리고, 엄마는 시장을 볼 때마나 알뜰하게 줄이고, 비싼 물건 값을 깎아서 남은 돈들이나, 평소에 쓰고 남은 거스름돈을 모아가시고 그 분한테 찾아가는 거지, 공연히 할 일이 없어서 그러는 게 아니란다. 그런 사람들은, 오죽하면 길에 나와 앉았겠니? 보다 더 큰 도움을 주지는 못하나마..."
송희는 엄마의 두 눈에 눈물이 피잉- 돌고 있는 까닭을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 낮에도 반 아이들이 안보았기에 다행이지, 송희 엄마는 그 눈 먼 아줌마네 아기를 안아주고 있었으니까요. *
8. 오토바이 사고
귀여운 남동생 웅이는, 요사인 무엇이든지 틀어잡고 일어서서 한 발자국씩 내딛어 할머니의 사랑은 물론 온집안 식구들의 재롱거리가 되어주었습니다.
날씨가 매우 더워진 어느 날이었습니다. 마침 일요일이라서 송희네 식구들은 모두 집에 있었습니다. 송희는 웅이를 안고 밖으로 나와 하나, 둘 씩 피어나는 꽃들을 보여주고는 대문 밖으로 데리고 나왔습니다.
"걸음마, 걸음마, 울아기 걸음마!"
뒤뚱뒤뚱 한 발작, 한 발작 떼어놓는 웅이가 귀여워서 송희는 자꾸만 뒷걸음질치며 큰 길가로 나섰습니다.
그 때 였습니다.
찌익!하는 소리와 함께 송희와 웅이는 저만큼 나가 떨어졌습니다.
"으앙! 으앙!"
웅이의 찢어질 듯한 울음소리에 송희는 기를 쓰며 일어나려 했으나 마음대로 되지가 않았습니다. 골목길에서부터 속력을 내며 달려 오던 오토바이가 모퉁이를 돌다가 그만 두 아이를 받아버린 것이었어요.
이 소식을 듣고 달려나온 아빠와 엄마는 물론 할머니, 고모랑은 모두 정신을 잃은 것처럼 헤매이며, 오토바이 아저씨가 웅이를 데리고 간 병원으로 급히 쫓아갔습니다. 아빠들에 업혀서 병원에 옮겨진 송희는 한참동안 정신을 잃은 듯 잠을 자다가 깨어났습니다. 온몸이 무겁고 어지러웠으나 송희는 웅이가 걱정이 되어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송희 옆에는 근심스럽게 앉아있는 고모뿐이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고모, 웅이는 어떻게 되었어, 응?"
"걱정마, 송희, 넌 다행히도 크게 다친곳이 없으니 이삼 일만 병원에서 입원하고 안정을 취하면 된다더라."
"그럼, 우리 웅이도 괜찮아, 고모?"
"잘 모르겠어, 좀 있으면 결과가 나오겠지."
고모의 얼굴 표정으로 봐서 웅이가 적지 않게 다친 것만은 분명한 것 같았습니다.
"모두 내 잘못이야, 내가 우리 웅이를-."
"아이고, 부처님도 무심하시지. 우리 웅이가 어떤 아들인데, 이놈! 우리 웅이를 어떻게 할 것이여?"
오토바이 아저씨를 붙들고 실랑이를 하는 할머니의 울음섞인 목소리가 송희의 병실에까지 들려왔습니다. 송희는 머리를 감싸쥐고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 했으나, 고모가 말리는 바람에 그대로 누워 눈물만 주루룩 흘렸습니다.
"할머니, 용서해 주셔요. 죄송해요, 엄마, 아빠, 하느님! 우리 웅이를 살려주셔요, 네?"
송희는 혼잣말로 계속해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후, 일주일이 지나서 송희는 고모와 집으로 돌아왔지만, 웅이는 아직도 병원에 입원해 있었기 때문에 할머니와 엄마, 아빠는 줄곧 집에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어린 아기가 허리와 무릎을 크게 다쳤기 때문에 대 수술을 받았대요."
어쩌면 웅이는 퇴원을 해도 다리를 못쓰게 될 것이라는 소문이 송희의 귀에까지 들어온 것입니다.
"불쌍한 우리 웅이, 어떻게 해야 내 잘못을 용서받을 수 있을까?"
송희는 학교에도 나가지 않고, 낮이나 밤이나 고모 몰래 눈물을 닦아냈습니다.
가슴이 찢어질 듯한 아픔을 느꼈습니다. *
9. 해바라기 친구
그러던 어느 날, 담임 선생님과 반장을 비롯한 반 아이들 몇 명이 송희네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그 중에는 자영이도 있었습니다.
고모의 이야기를 대강 듣고 나서, 선생님이랑 아이들은 송희에게 저마다 위로의 말을 한 마디씩 하고 돌아갔습니다.
그 다음 날, 초인종 소리에 나가보니 뜻밖에도 자영이가 책가방을 들고 서 있었습니다.
"미안해, 부르지도 않았는데 찾아와서... 네가 몹시 슬퍼하며 괴로워하는 것 같아서.."
송희는 자영이가 찾아와서 하는 말들이 그렇게 반갑고 고마울 수가 없었습니다. 억지로 눈물을 감추며 자영이를 안으로 안내하였습니다.
고모는 과일을 쟁반에 담아 내놓고, 잠깐 병원에 다녀오겠다며 나갔습니다.
"자, 여기가 오늘 배운 것이야, 어서 보고 네 공책에 적어. 그리고, 내일부턴 학교에 나와야지. 동생은 어른들이 잘 돌볼테니까, 네가 더 시무룩해 있으면 어른들 마음도 편치 않을 거야."
자영이는 진정으로 따듯하게 송희를 위로해 주고 돌아갔습니다.
'저렇게 착하고 인정많은 아이를 공연히 미워했던 내가 나빴어.'
송희는 또 한 번 자신을 나무라면서 뉘우쳤습니다. 다음 날 아침도 송희가 미처 학교에 갈 엄두를 못내고 있을 때, 자영이는 송희를 데리러 왔습니다.
핼쓱하게 야윈 얼굴로 나타난 송희에게, 아이들은 박수를 쳐주며 반가워 했습니다. 사고를 당한 사람은 송희가 아니라, 송희의 동생인데도 아이들은 모두들 하나같이 친절하게 대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송희는 그 야무지던 입을 꼬옥 다물고 왈칵왈칵 쏟아질 것 같은 눈물을 참느라 혼이 났습니다. 그 뒤부터 자영이는 송희를 여러 가지로 도와주고 우울한 마음을 활짝 펴도록 애써 웃겨주기도 하였습니다. 어느새 자영이와 송희는 단짝 친구가 되었습니다.
송희는, 밝고 명랑한 생활을 하는 자영이가 언니처럼 믿음직스러웠습니다. 둘이는 오늘도 나란히 학교 교문을 나섰습니다.
"자영아, 우리 저쪽 지하도로 해서 가지 않으련?"
"아니, 왜? 너의 집은 이쪽 길로 곧장가야 빠르잖니?"
"그렇긴 해, 하지만 내가 만날 사람이 있거든!"
"그래? 알았어. 같이 가자."
송희는 자영이를 데리고 눈 먼 아줌마가 앉아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그리고는, 호주머니에서 열 개도 넘는 동전들을 그 아줌마의 돈 바구니에 쏟아 넣었습니다. 그러자, 그 눈 먼 아줌마는 고개를 여러번 숙여 감사의 뜻을 표했습니다. 오랜만에 가슴이 확 트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송희는 빙그레 웃으며 자영이쪽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자영이는 이미 저만큼 멀리 앞서가고 있었습니다. 송희가 달려가서 자영이를 붙들었을 때는, 언젠가 송희 엄마가 눈 먼 아줌마의 이야기를 꺼내면서 눈물을 글썽이던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송희를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요?
"너, 왜그러니? 울고 있잖아? 자영아, 갑자기 왜 그래?"
송희는 영문을 몰라 자영이를 흔들었습니다.
"아니야, 너의 착한 행동에 감동되었을 뿐이란다. 그런데, 거기 있는 껌이라도 한 통 들고오지 않고..."
"응, 괜찮아."
송희와 자영이는 한참동안을 말 없이 걸었습니다. 송희네 집에 거의 가까이 다가왔을 때, 자영이는 아까의 얼굴은 어디로 가고 즐거운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야아! 송희야, 너의 집 담 너머로 노오란 해바라기가 두 송이 이쪽을 바라보며 정답게 서 있구나!"
"어머나! 벌써 저렇게 컸네! 난 요사이 통 정신이 없어서 꽃밭도 제대로 한 번 살펴보지 못했어."
송희와 자영이는 똑같이 마주보면서 해바라기처럼 활짝 웃었습니다.
그리고는 약속이나 한 듯 서로의 손을 꼬옥 잡았습니다. *
10. 착해진 송이
오토바이 사고가 있었던 날 이후로 송희는 꼬박꼬박 일기를 썼습니다. 자기의 잘못을 알아내고 반성했으며, 하루에 한 가지라도 착한 일을 하자고 마음 먹었습니다.
'그래,나도 통장에 돈이 불으면 불우한 이웃을 돕는데에 쓰곤 할 테야. 아니, 그 보다도 지하도 그 눈 먼 아줌마한테 매일 매일 다녀오는 게 훨씬 낫겠지.'
송희가 이러한 일기를 쓰게 될줄은 아무도 짐작할 수 없는 일이었지요. 정말로 좋은 결심을 해냈다고 스스로 만족하며 승희는 흐뭇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이날 밤 송희의 꿈 속에서는, 눈 먼 아줌마와 자영이의 얼굴, 그리고 엄마랑 웅이의 얼굴들이 나타나 송희의 머리를 복잡하게 하였습니다.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의 답을 알아내려고 땀을 뻘뻘 흘린 것처럼, 송희의 머리가 식은 땀에 촉촉히 젖어 있었습니다.
다음 날, 송희는 학교가 파하기 무섭게 혼자서 지하도 계단 밑의 눈 먼 아줌마를 찾아갔습니다. 마이크를 잡고 앉아 흘러간 노래들을 슬프게 부르고 있는 그 아줌마는, 자세히 보니 그렇게 미운 얼굴도 아니었습니다. 오늘은 송희의 손에 맛있는 쵸콜렛 과자가 쥐어져 있었습니다. 웅이 보다는 한 두 살 위로 보이는 불쌍한 어린애에게 주려고 가져온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따라 그 아이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생각해 보니 이 아줌마 옆에는, 아이가 있는 날보다 없는 날이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아줌마 아이가 어디 갔느냐, 물어 볼 수도 없고 해서 송희는 작은 바구니 속에 땡그랑 동전 하나를 넣어 놓고 그냥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엄마도 모르게, 반 아이들도 모르게, 착한 일을 하고 있는 송희의 마음은 제법 철이 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매사에 침착하여지고 덤비는 성격도 차차 고쳐나가게 되었습니다. 남들 앞에서 자기 자랑만 하던 버릇도, 아이들을 몰고 다니며 남의 흉을 보는 일도 없어졌습니다.
엄마가 만들어 놓은 마당 한 쪽의 작은 꽃밭에서는 키가 큰 해바라기가 굽힘없이 커가고, 나팔꽃과 수세미도 새끼줄을 따라 높이높이 올라갔습니다.
엄마는 고향이 시골이어서인지, 비싼 목련이나 장미꽃보다도 옛날부터 한해살이 풀꽃들을 더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봉숭아, 채송화, 과꽃들이 한데 어울려 아름다운 꽃밭을 더욱 예쁘게 수놓았습니다. *
11. 웅이의 퇴원
햇볕이 쨍쨍 비추이는 여름 한나절은 몹시도 지루했습니다. 오늘 오후에 드디어 웅이가 퇴원을 하는 날입니다. 그 동안 서너 차례 송희도 병문안을 갔었지만, 기브스를 하고 누워있는 동생이 답답하다고 마악 보채일 때에는 차마 곁에 서서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송희는 병원엘 자주 가지 않았답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즐거운 여름 방학인데 해수욕장에도 한 번 안 데려다 줄 거냐고 큰 소리로 떼를 쓰며 어리광을 부렸을 텐데... 송희는 웅이한테 죄스러운 생각 때문에 감히 그런 말을 꺼낼 수도 없었습니다
다행히도 퇴원해 돌아온 웅이는 예전처럼 방실방실 웃었지만, 한 쪽 다리는 여전히 기브스를 풀지 않은 채로 였습니다.
"웅이야, 정말 미안해!"
그러나 할머니와 엄마, 아빠는 송희한테 꾸중은커녕 오히려 네 잘못이 아니니 걱정할 것 없다고 달래주었습니다.
"우리 송화가 매일매일 하느님께 기도해 주어서, 이렇게 웅이가 건강한 모습으로 퇴원할 수 있었단다."
엄마의 부드러운 말에 눈시울이 뜨거워진 송희는 할머니의 무릎에 엎드렸습니다.
"세상에, 천만다행이란다. 이 모두가 다 부처님께서 보살펴준 덕분이야."
사고가 난 뒤에도 여러 차례 가까운 절에 다니며 불공을 들이던 할머니인지라, 이번에도 부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송희는 하느님이나 부처님은 물론이고, 우리 웅이를 이만큼이라도 낫게 해주신 병원 의사 선생님, 그리고 자기 잘못을 너그러히 용서해주는 사랑하는 가족들, 모두 모두가 다 고맙기만 하였습니다.
그 뒤로 몇 날이 지난 뒤, 병원에 가서 기브스를 풀고 온 웅이는 가엾게도 한 쪽 다리를 절룩거렸습니다. 어른들은 아이들 몰래 한숨을 내쉬곤 했지만, 그 전과 다름없이 집안은 평화스러웠고 웅이도 곧잘 일어나서 두 손을 쫙펴보이며 재롱을 부렸습니다. 그러나, 힘이 없는 다리 때문에 금방 쓰러지곤 하였습니다. *
12. 고향마을 소꼽동무
하루는 송희 엄마가 아주 기쁜 표정을 하고 할머니 방에서 나왔습니다.
"엄마, 왜 그래요? 무슨 좋은 일이라도 생겼나요?"
"응, 그래. 송희야, 나와 같이 시장엘 갈까?"
엄마는 커다란 시장 바구니를 들고 앞장을 섰습니다.
"엄마, 내일이 무슨 날이라도 되나요? 아빠 친구들이 오셔요?"
"아니야, 오늘 저녁에 엄마 친구를 초대하려고 그래."
"아, 그랬었군요. 누구누구에요? 영하 엄마하고 반포동 이모? 또..."
"글쎄다."
"헌데 이상하다. 엄마 생일도 아니고, 어째서죠?"
"그래, 조금 있으면 알게 될거야. 엄마와 시골에서 소꿉동무로 지냈던 친구란다. 엄마는 고등학교 때부터 서울로 이사와서 공부했기 때문에 고향 친구들을 모두 잊어버렸지만, 지난 겨울부터 친구 한 사람이 여기 가까운 곳에 살고 있는 걸 알아냈어. 그런데, 한 번도 이야길 못 나누고 그 동안의 소식도 전혀 묻지 못했거든!"
"어머나, 그런 친구가 있었어요? 엄마도 참, 그렇다면 진작 나한테라도 알려주고 심부름이라도 종종 시키시지 않구서..."
"그러게 말이다. 계속해서 우리 집안 일이 밀리다보니 그럴 경황이 없었어. 아무튼 그 친구에겐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단다. 그래서 오늘은 용기를 내어 할머니한테 그 이야길 드렸더니 빨리가서 데려와 저녁이라도 함께 하라시는구나."
"엄마. 그러고 보면 우리 할머닌 무섭기만 한 게 아니야. 참 멋있는 분이라니까!"
"맞아. 정말 훌륭하신 분이지."
송희와 엄마가 이렇게 다정하세 이야기를 나누며 시장을 한 바퀴 빙 돌고 났을 때입니다.
"참 엄마, 들릴 곳이 한 곳 있잖아요? 저어기 계단 밑에 앉아있는..."
"으응, 그래."
엄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빙그레 웃었습니다.
"바로 그분이 나와 고향 마을에서 함께 자란 나의 소꿉친구란다."
"네에?"
송희는 하마터면 뒤로 넘어질 뻔 했습니다.
"엄마, 그 얘기 정말이어요?"
"그렇대두, 수수깡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양쪽 집 해바라기들이 울을 넘어, 서로 내기라도 하듯이 자라나던 이웃 사촌이란다.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나와 반에서 일, 이 등을 다투던 숙이임에 틀림없어. 그런데 어쩌다가 저 꼴이 됐는지, 그런 건 모두 하느님의 뜻이야. 사람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거든!"
"믿어지지 않아요, 엄마."
"나도 처음엔 사람을 잘못 봤겠지 했었는데... 우리 웅이처럼 그 애도 살아 가면서 무언가 잘못 됐을 거야."
이윽고 송희는 엄마와 함께 그 눈 먼 아줌마한테로 갔습니다. 송희 엄마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습니다.
"저어, 아기 엄마, 실례이지만 말 좀 물읍시다. 내 고향은 저기 서해안 남쪽에 있는 위도라는 작은 섬 마을이지. 내 이름은 미정이고... 박 미정! 숙이, 생각이 나나?"
눈먼 아줌마는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생각하더니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정말이지 반가워, 긴 이야긴 우리 집에 가서 나누고, 자. 내 손을 잡고 좀 따라와 주겠어? 멀진 않아."
그러나 아줌마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싫다고 했습니다.
"고맙지만 사양하겠어. 우리 집에서도 어린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거든! 지금이 몇 시인가?"
"응, 저녁 6시야. 잠깐만 집에 들려 저녁이라도 함께 하고 싶어서..."
"고마워, 하지만 다음으로 미루겠어. 우리 딸이 아길 업고 나 데리러 올 시간이야."
아줌마는 조심조심 작은 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아기 아빠는 뭘하시는데? 어쩌다가 눈이 그렇게 되었어? 처음엔 너무 놀라서 물어보지도 못했었지. 몇 달이 흐른 뒤에야 이렇게 용기를 내어 묻는 거야. 용서해, 혹시나 아픈 상처를 건드릴까 봐서..."
"그런 건 상관 없어. 기분 나쁘지 않으니까. 내가 이렇게 눈을 못보는데 남편을 어찌 성한 사람으로 기대하겠어. 하지만, 부모들의 운명이 이렇다고 내 자식까지 불쌍하게 버려둘 순 없었어. 그래서, 난 창피를 무릎쓰고 여기로 나온 거야, 다른 직업은 가질 수가 없으니까."
그 때였습니다.
송희는 또 한 번 깜짝 놀랄 일이 눈앞에 벌어졌기 때문에 가슴이 덜컥하고 내려 앉았습니다.*
13. 즐거운 저녁시간
눈먼 아줌마의 옆으로 아기를 업고 찾아온 여자아이는 틀림없는 송희의 친구 자영이가 아닌가요?
송희는 그냥 달아날까 하다가 별로 놀라지 않는 자영이의 태도를 보고, 겨우 말을 꺼냈습니다.
"아니, 네가?"
"고마워, 오늘도 이곳엘 찾아왔구나. 우리 엄마야, 인사드려! 엄마, 내 친구 송희예요."
자영이의 엄마는 입가에 씁쓸한 웃음을 띄운 채 고개를 서너 번 끄덕였습니다.
"우리 엄마도, 그 동안 병원에 계셔서... 제 친구 자영이에요."
송희 엄마의 두 눈에서 구슬 같은 눈물을 뚜욱뚝 떨어뜨렸습니다. 그리고는 자영일 가슴에 꼬옥 껴안아 주었습니다. 자영이도, 송희도, 그리고 두 엄마들도 소리를 죽여가며 흐느껴 울었습니다. 오가는 사람들이 이들을 보고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지나갔습니다.
그 날 저녁, 자영의 엄마는 자꾸만 반대를 했지만 자영이의 설득으로 모두 함께 송희네 집으로 모였습니다.
"정말 장하다. 나 같았으면 벌써 모든 걸 포기하고 말았을 텐데... 저렇게 믿음직스런 딸을 키우고 있다니, 종종 송희로부터 자영이 이야기는 들어왔었지. 자영이가 너무 똑똑하니까 우리 애가 이따금씩 질투를 하는 것 같았어. 과연 내 친구 숙이는 훌륭한 엄마야."
"별말을 다 하는구나!"
송희 엄마는 자영의 엄마 밥숟가락 위에다 반찬을 집어놓아 주면서 얘기했습니다.
"우리 웅이도 아직 어린데, 얼마 전에 불의의 사고로 다리를 다쳤어. 처음엔 앞이 캄캄하고 못살 것 같더니만, 모든 역경을 참고 견뎌나가면 어려울 것도 없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어. 널 생각하고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이토록 편할 수가 없더군."
그러자 자영이가 말을 받아 이었습니다.
"실은 요, 우리 아빠도 다리를 절룩거려요. 하지만, 지금 도장 파는 기술을 익혀서 생활비는 충분히 대고 있어요. 아빠는 엄마더러 집에 계시라지만 엄마의 고집 때문에... 물건을 팔러 나가는 것이지, 그저 돈을 얻겠다는 게 아니라면서, 그런데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도 종종 있어요."
자영이가 송희를 바라보면서 살짝 웃자, 송희도 따라 웃으면서 고개를 숙였습니다.
"어쨌든 우리 엄마, 아빠는 많이 배우지도 못하시고 가난해서 그렇지만, 웅이야 얼마든지 가르쳐서 훌륭한 재판관이나 장관까지도 시킬 수 있잖아요? 아줌마, 너무 걱정 마셔요."
어쩌면 그렇게도 말을 잘 하는지, 송희도 놀라서 자영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래, 자영인 다 자랐구나. 어른들보다도 생각이 더 깊으니 말이다. 너의 그 굳은 의지와 용기를, 우리 송화와 웅이한테 잘 좀 가르쳐주렴. 이렇게 좋은 친구를 만난 것도 다 하느님의 뜻이니..."
"에구머니, 우리 할머니는 모두가 부처님의 뜻이고, 우리 엄마는 모두 하느님의 뜻이래!"
송희가 음식을 한 입 가득 물고서 이렇게 말하자. 둘러앉은 사람들이 모두 '하하하' 웃었습니다.*
14. 사랑의 속삭임
"참 어머님, 숙이가 눈이 이렇게 된 것은 고등학교 1학년때 과학실에서, 실험 실습시간에 알콜램프가 폭발하는 바람에 실험 물질이 눈에 들어가서랍니다. 어머님, 그 때 얼굴에 화상을 입은 사람, 다친 사람들도 아주 많았다지 뭐예요."
송희 엄마는 자영의 엄마를 대신해서, 집에 오며 들었던 이야기를 송희 할머니께 들려주는 것입니다.
"그렇지, 우리 주위엔 옛날 같지 않아서 위험한 것들이 너무 많아, 매사에 항상 조심하며 살 수 밖에 없지. 딱하지, 딱해."
할머니는 혀를 끌끌 찼습니다.
"세상살이가 다 제 뜻대로 되는 게 없으니 남의 일이 내 일이지. 서로 도우며 살아야하고 말고. 또 자기가 몸이 불편하다고 해서 절망하면 더욱 안되고 말이야."
할머니는 아직 어려서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웅이를 들여다보며 또 목 메인 소리로 말했습니다.
"아무튼 반갑습니다. 두 사람이 고향에서 둘도 없는 친구였다는데 또 우리 송희와 자영이가 대를 이어 친한 친구가 되었다니 얼마나 축복 받은 인연인가요?"
송희 아빠도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습니다.
"다음엔 자영의 아빠도 한 번 초대하겠습니다. 우리 두 집이 서로 한가족처럼 지낼 수 있게 말입니다."
그러자 또 한바탕 박수 소리가 방안을 가득 메웠습니다. 어른들이 또다시 지나간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을 때, 숙희와 자영 이는 살그머니 일어나 밖으로 나왔습니다. 두 사람은 손목을 꼭 잡고 꽃밭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지금은 밤이라서 해바라기들이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지만, 내일 아침 날이 해면 또 다시 해바라기들은 환한 얼굴로 해님을 맞을 거야."
자영 이가 해바라기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그래 그래, 언제부턴가 나도 우리 엄마를 따라 해바라기 꽃을 좋아하게 되었어. 자영아, 넌 꼭 해님을 닮은 해바라기 같아."
"너도야, 송희야. 정말 고맙다."
"그건 내가 할 말이야."
둘이서 이렇게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대였습니다.
"옳지, 옳지. 해바라기처럼 밝게 웃으며 해님을 쫓아 실컷 뛰놀고, 해바라기 씨앗이 까맣게 여물듯 우리 아가씨들 고운 꿈도 토실토실 여물어야지."
어느 새 다가왔는지 송희 아빠가, 등뒤에서 두 아이의 어깨를 또닥거리며 노래부르듯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서쪽으로 건너가던 하얀 달님도 빙그레 미소지으며 송희네 뜨락을 환하게 비추어 주었습니다.(끝)
첫댓글선생님 작품에는 불우하거나 아픈 사람, 장애우에 대한 따뜻한 이야기가 많으십니다. 나와 이웃의 이야기를 가까이에서 느끼고 생각해 볼 수 있어 퍽 소중하게 여겨진답니다. 우리의 시선이 자주 어디에 머물러야 하는지 선생님께서는 어렵지 않게 일러 주십니다. 해바라기 친구. 여름에 읽으니 더 정겹네요. ^^
첫댓글 선생님 작품에는 불우하거나 아픈 사람, 장애우에 대한 따뜻한 이야기가 많으십니다. 나와 이웃의 이야기를 가까이에서 느끼고 생각해 볼 수 있어 퍽 소중하게 여겨진답니다. 우리의 시선이 자주 어디에 머물러야 하는지 선생님께서는 어렵지 않게 일러 주십니다. 해바라기 친구. 여름에 읽으니 더 정겹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