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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서평|
기하학적 무한과 허수(虛數)의 시학
-김뱅상 시집 『냉장고에서 비키니를 꺼냈다』
-이선락 시집 『심포니, 소실점 뒤의 오브제를 위한』
박대현
1. 시와 에크프라시스
현대시가 미술과 음악으로부터 시적 영감을 수혈 받아온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김종삼이 슈베르트, 모차르트, 바흐, 말러 등의 작곡가들을 시에 자주 인용했다거나, 김춘수가 샤갈, 이중섭, 피카소 등의 화가들을 시의 제재로 삼은 것은 널리 알려진 예다. 비단 현대뿐만 아니라 시는 이미 오래전부터 인접 예술과의 상호 교섭을 통해서 발전해 온 역사적 과정이 있다.
수사학의 기법 연습 과정 정도 여겨졌던 ‘에크프라시스(Ekphrasis)’는 르네상스와 낭만주의를 거쳐, 근대에 이르면서 미술의 시각적 이미지가 시의 언어적 재현으로 전이되는 예술적 현상을 일컫는 말로 정착되었다.보다 쉽게 말하자면, 미술 작품과 관련된 화가의 마음, 미술 작품에서 발생한 시적 영감과 그로 인해 탄생한 시, 그 시를 읽고 또다른 해석을 하는 독자의 마음까지 모두 ‘에크프라시스’에 해당한다.에크프라시스는 대상 작품의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그로부터 영향을 받은 시인의 내면이 서술된다는 점에서 상호교섭의 ‘이중적 재현’(박정우)이라고 할 수 있다.
시와 미술의 관계뿐만 아니라, 시와 음악의 관계에도 이 용어는 적용될 수 있다. 김종삼의 시가 음악가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은 데서 알 수 있듯이, 시와 미술의 교섭 관계는 시와 음악에도 고스란히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일컬어 ‘음악적 에크프라시스’로 부를 수도 있지 않을까. 이처럼 김뱅상과 이선락의 시 세계는 미술과 음악의 상호교섭을 시적 전략으로 삼는다.
김뱅상은 시적 언어의 이면에 추상적 기하학을 펼쳐내고 있고, 이는 그의 시적 언어가 몬드리안과 말레비치의 회화적 영향 속에 있음을 말해준다. 이선락은 활자 매체가 지닌 2차원적 평면성과 기존 세계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전위적 시도를 보여주는데, 회화의 매체적 도입과 활자의 시각적 배치를 통해 2차원과 3차원을 넘어서는 고차원적 세계를 시집 속에 침투시키는 언어 예술의 극단적인 실험성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 글은 김뱅상‧이선락 두 시인이 시와 미술‧음악과의 상호교섭을 통해 ‘에크프라시스’의 새로운 차원을 열어보인다는 사실을 주목할 수밖에 없다.
2. 절대적 침묵과 무한의 왈츠-김뱅상 냉장고에서 비키니를 꺼냈다
김뱅상의 시작 방법은 구성주의적 회화의 세계관에 근거한다. 대상의 선과 면과 색을 극단적으로 단순화시키는 회화 기법은 대상의 현상적인 개별성을 삭제하고 대상의 본질적 형태를 파악하고자 하는 예술적 충동과 무관하지 않다. 이를테면, 김뱅상 시인이 시의 제재로 자주 삼는 몬드리안은 복잡다단한 현상 너머에 자리 잡고 있을 보편적 실재로서의 순수 정신의 세계를 추구한다. 김뱅상의 시세계 역시 몬드리안처럼 극단적으로 단순한 형이상학의 세계를 추구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탈각되는 개별적인 세계의 형상들이 시집 도처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의 시는 순수 정신에 이르는 과정에서 조각나고 분절되는 주체와 세계로부터 비롯되는 이미지들의 향연이다. 즉, 그의 시에서 주목해야 할 대상은 순수 정신과 함께 그 주위를 공전하는 세계와 시인의 조각난 이미지들이라고 할 수 있다.
선들은 어둠 속으로 들어가 도형이 된다 아니 사각의 블랙홀
너와 헤어진 골목,
어둠 한 줌 머리끝까지 끌어당겼지
블랙은 나를 또다른 벽 속으로 끌고 가고
간절하다는 것, 겨울 화분에 물을 주는 일
겨울은 스며들지도 않아
떡잎이 돋아날 즈음이면 내 튕겨 나간 검정 따위 찾을 수 없을지도 몰라
팔이 없어질까, 몸은 젤리가 되고
어디든 굴러갈 수 있는 도형은 없을지도
녹턴은 틀지 말아줘 뻣뻣해진 내 몸에 블랙이 필요할 뿐이야
터널 속, 난 언제나 벽에 기대 살거든
오래 햇빛을 보지 못한 도형들도
날아오르면 나비가 될까?
나비가 바닥에 떨어진다
무슨 어둠을 핥으려던 것이었을가, 어둠이 도형 안쪽을 채우는
블랙은 사각으로, 또는
동그랗게
기다리지도 않았는데 블랙은 너를 빨아들인다
이불을 당기자 더듬거리는 밤의 겹쳐짐에 대해
-김뱅상, 「검은 사각형」 전문
시인이 각주에서 밝힌 대로 이 시는 카시미르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1915년 작)을 대상으로 한 작품이다. 그러나 이 시는 말레비치 작품의 단순한 향유로 머물지 않는다. 말레비치는 이 시에서 후경화된 세계로 들어앉고, 시인의 내면은 말레비치의 세계 속에서 전경화된다. 즉, 이 시는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으로 수렴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시인의 내적 상처와 동요에 대한 지적이고 간명한 진술이다.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 앞에서, 시인은 “너와 헤어진 골목,/ 어둠 한 줌 머리끝까지 끌어당겼지”라는 시적 발화를 이끌어낸다. ‘검은 사각형’이라는 절대적 침묵 앞에서 시인의 발화는 비근하고 쓸모없고 누추한 것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발화에는 생기가 돋는다. 견딜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검은 사각형’이라는 절대적 침묵 앞에서는 어떤 고통과 슬픔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그러므로 그것에 대해 사후적 으로 발생하는 심리적 거리를 지닐 수 있는 것이다. ‘검은 사각형’ 앞의 ‘슬픔’은, 마치 죽기 전의 작은 몸짓처럼 정갈해진다. 그래서 이 ‘작은 몸짓’의 언어들은 슬프지가 않다. 탈색된 슬픔의 언어가 아닐 수 없다. 거대한 죽음의 침묵 앞에서 “내 튕겨나간 검정 따위는 찾을 수 없”는 것이다. 그 검정이란 ‘검은 사각형’에 이미 점염(點染)되어 사라져 버린 시인의 감정이 아니겠는가. 쇼팽의 “녹턴”은 더 이상 “틀지” 않아도 된다. 시인의 “몸엔 블랙이 필요할 뿐”이다. 시인은 말레비치에 압도된 상태다. 그 절대적 침묵에 말이다. 하지만 감정은 사라져도 이미지는 남는다. 감정 없이 “나비”처럼 날아오르는 이미지들. “오래 햇빛을 보지 못한 도형들”이 시인의 내면을 떠돌다 끝내 “나비”처럼 “바닥에 떨어”진다. “도형 안쪽”에 가득한 “어둠”은 도무지 슬프거나 아프지가 않다. 단지 “블랙은 사각으로, 또는/ 동그랗게”, 밤처럼 “겹쳐”진 채, 우리 모두를 “빨아들이”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숭고에 직면한 자아의 형상이 아닐 수 없다.
시인은 미술 작품뿐만 아니라, 음악을 통해서도 숭고를 체험한다. 음악 속에서 “머리가 흔들리”고 “피보나치로 확산하는 겨드랑이”를 상상적으로 감각한다. 피보나치 소수가 무한히 존재하는지에 대한 증명은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다. 하지만 해결되지 않았으므로 그것은 오히려 이해의 접근이 불가능한 숭고의 대상이다. 시인의 겨드랑이는 피보나치 소수처럼 무한한 크기로 자라나는 날개를 느낀다. 음악을 통해서! 그것은 비좁은 자아의 형틀에서 벗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무한히 확산하는 세계의 숭고 속으로 자아는 “구름처럼” 부풀어 오르고 “뭉그러지”고 “사라”진다.
우린 가끔 야생적이지, 계단에 서서
왈츠를 구르며
왼쪽에서 스텝을 옮긴다 레 미
오른쪽으로 돌면 눈빛 하나 파에 머물고
돌아갈 수 없는 아니, 다시 찾은 왼쪽이랄까?
바람 지나가자 출렁이는 높은음자리
층계참까지 흘러내리고
눈을 접으면 꽃잎 하나 떨어지고
왼손을 풀자 계단마저 출렁거리고
왜 머리가 흔들리는 거지?
피보나치로 확산하는 겨드랑이?
시 도, 음자리 술렁이고 머릿결 흔들린다
입술 치켜들면 건반 소리 커진다 포르테 포르테, 뻗어나가고
내 얼굴, 속이 비어 있다 누가 탈출한 것일까?
동그라미, 이건 그림자들이야
끊어진 통화음이 부푼다
구름 부숭부승 뭉그러진다
한 계단 오른발 내딛자
나 한 걸음 더 밖으로 사라지고
-김뱅상, 「옆자리가 비었다-피아노 계단」 부분
부제로 제시된 ‘피아노 계단’은 시적 주체가 활보하는 음악의 세계다. ‘피아노 계단’은 시인이 활보하는 자유로운 내면의 세계다. 시적 주체는 피아노 계단에서 “야생적”인 모습으로 변하기도 하고, “포르테”의 강도로 왈츠를 경쾌하게 추기도 한다. 시인에게 음악은 ‘옆자리’를 비우는 기능을 한다. 음악과 함께 운신의 폭이 넓어진다. 음악은 시적 주체를 보다 자유롭게 하는 역량을 지니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시는 음악을 통한 해방감을 공간적으로 형상화한다. 청각에서 비롯되는 자유로움을 공간적으로 시각화한다. 「옆자리가 비었다」는 시의 제목은 움직일 수 있는 자유의 확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시적 주체는 오랫동안 고정된 자아의 틀에 오랫동안 갇힌 상태였다. 음악을 통해 비로소 자아의 좁은 틀에서 벗어난다. “내 얼굴, 속이 비어 있다 누가 탈출한 것일까?”라는 진술을 보라. “내 얼굴”을 “탈출”한 이는 바로 시인의 자아가 아닌가. 피아노 음계에 따라 “한 계단 오른발 내딛”으면 “나”는 “한 걸음 더 밖으로 사라”진다. 그것은 음악이 제공하는 순수한 내면의 공간이 아닐 수 없다. 음악이 열어주는 공간은 무한하다. 피보나치 소수처럼 인간이 닿을 수 없고, 해결조차 할 수 없는 무한한 숭고의 세계. 시인은 그 숭고의 세계를 음악을 통해서 활보하고 있는 것이다.
김뱅상의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시세계를 직조하는 회화와 음악 속으로 성큼 들어서지 않으면 안 된다. 김뱅상은 회화와 음악을 통해서 존재론적 변환을 이룬다. 그것은 자기 탈(persona)의 옷을 벗는 일로 진술되기도 한다. 그의 시 「냉장고에서 비키니를 꺼냈다」에서 진술하고 있듯이, 추운 겨울에 “옷을 거꾸로 벗”고 “비키니”를 입는 일과 다르지 않다. 냉장고에서 꺼낸 차가운 감각의 ‘비키니’는 새로운 존재로의 전신(轉身)을 상징한다. “어둑어둑”하고 “캄캄한 밤”으로 이루어진 시적 주체의 내면은 “비키니”를 입을 때마다 “천둥소리로 덮인 세상 하나를 열어젖히”는 해방감을 느낀다. “소리들은 환하게 빛”난다. “하얀 도깨비들”과 같은 온갖 것들이 출몰하는 그의 내면에 차가운 “비키니”를 입고 벗는 일은 회화와 음악의 감각적 이미지를 통해서 “내 속에 나 부풀어” 올라 “닿을 수 없는 우듬지”에 닿으려 하는(「수요일의 빛깔」) 시작 행위라고 할 수 있겠다. 요컨대, 그의 시는 주체의 해방과 도약을 위한 회화와 음악의 시적 변주라고 할 수 있다.
3. 허수의 시학과 실재의 구멍
이선락의 시세계 역시 회화와 미술을 경유한다. 그의 시에는 고흐, 말레비치, 로스코, 추사 김정희, 달리, 칸딘스키, 뭉크, 베토벤, 라흐마니노프, 차이코프스키, 비발디 등의 예술가들이 다양하게 인용된다. 언어를 매개로 한 시 예술의 한계를 회화와 음악을 통해서 보다 확장하고자 하는 시도다. 시를 통해 상상된 이미지의 해상도는 회화에 미치지 못하며, 시의 운율과 정서적 울림 또한 실제 음악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시는 회화와 음악을 횡단하며 그 예술적 의미를 사유하고 확장하는, 오직 ‘언어’만이 가진 메타적 역량을 지닌다. 이선락은 이 메타적 언어를 통해 주체와 세계의 심연을 응시하고, 마침내 그 한계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우선 이선락은 시집 전체를 입체적인 화집(畫集)으로 활용한다. 이 시집에는 적잖은 이미지들이 삽입되어 있고, 입체감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트롱프뢰유(Trompe-l'œil)의 효과를 지닌 것들이 다수 존재한다. 예컨대, 「종이 뒷면에 빨간 아ᄒᆞㅣ들 산다」처럼 못으로 그린 사람 형체를 삽입하고 그 흔적이 그 뒷면에도 드러나도록 한 실험이 과감하게 시도되고 있다. 이 모든 시도들은 지면의 평면성이라는 2차원적인 한계를 넘고자 하는 충동과 무관하지 않다. 시인은 이 시집을 도록(圖錄)으로 활용하면서 다차원적 입체성을 드러내는 방향으로의 진화를 급진적으로 밀어붙인다. 이를 위해서 회화의 시각적 감각뿐만 아니라 악곡 제목을 인용하여 청각적 감각까지 동원한다.
「까마귀가 나는 밀밭」에서 까마귀를 빼내면 배경 어디쯤 구멍이 뚫릴까 거꾸로 돌던 계절, 어느 밀밭에선 지층이 듬성해질까?
(중략)
문득, 공중이 찢어진다
겨울 3악장, 하늘은 제멋대로 까마귀를 벗어난다
밀밭 반대 방향으로 구멍을 뚫어도, 빨강
우리는 ㅅᅟᅢᆨ까ㄹ의 관절에 대해
외마디 울음을 나눈다
계절 하나, 우화한다
-「어떤 ㅅᅟᅢᆨ까ㄹ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일시 중지되었습니다」 부분(35쪽)
이 시는 고흐와 비발디의 세계로 이루어진다. 고흐의 「까마귀가 나는 밀밭」의 풍경을 시적으로 변주하면서 이 세계의 누빔점, 즉 봉합된 “구멍”을 찾는다. 그리고 비발디의 「사계」 중 “겨울 3악장”이 인용된다. 비발디의 「사계」가 울려 퍼지는 “하늘은 제멋대로 까마귀를 벗어”나 “밀밭 반대 방향으로 구멍을 뚫”는다. 그 순간 이 세계의 ‘색깔’은 더 이상 ‘색깔’이 아니라 “ㅅᅟᅢᆨ까ㄹ”로 전환된다. 기존의 언어 체계가 균열하는 틈새로 세계의 실재가 출몰하는 순간이다. 이 세계의 “우화”란 이 세계에 대한 존재론적‧인식론적 비상(飛翔)을 뜻하는 말에 다름 아니다.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고흐의 ‘회화’와 비발디의 ‘음악’이다. 다른 예술의 시청각적 자극을 통해 이 세계의 누빔점이 뚫려(풀려) 버리는 것이다. 무엇보다 음악은 이 세계의 두터운 이미지의 장벽을 단숨에 관통시키는 힘을 지닌다. 음악을 통한 변연계의 자극은 언어적 표상의 한계를 넘어선다. 변연계의 자극은 ‘신체의 언어’(정동)를 활성화시킴으로써 이 세계의 경계에 구멍을 뚫어버린다. 구멍 바깥의 세계는 이미 존재했고, 존재한다.
그것은 오랫동안 공상과 상상의 영역으로 치부되었으나 이선락의 시는 그것을 실재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이 시집 전체에 입체적으로 새기고 있다. 그리고 강력한 수학적 상징 하나를 도입하는데, 그것은 바로 허수(i)다. 따라서 그의 시는 허수의 시학이다.
카르다노에 의해 시작되고 오일러에 의해 기호 i를 얻게 된 허수는 근대 이후 반드시 필요한 수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허수(imagery number)는 그 이름이 의미하듯이 상상의 수이며, 현실의 물질에 대해 대응할 수 없는 수다. 그래서 라이프니츠는 허수에 대해 “귀신 같은 존재와 비존재 사이의 양서류”라고 불렀다. 하지만 오늘날 물리학의 많은 수식들은 허수 없이는 성립이 불가능하다. 이러한 허수는 수학 체계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세계를 열어준다. 허수는 한낱 허구의 숫자에 지나지 않았으나, 수학의 실재 범위를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확장시켰다.
이선락은 허수를 통해 시의 세계를 확장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지닌다. 허수는 곧 현실의 이면 속에 존재할 실재를 탐구하게 하는 전략적 개념으로 차용된다. 이선락의 시에서 허수는 자주 진술되고 있으나, 허수에 대한 진술보다는 아래의 시를 제시하는 것이 시집의 이해에 더 효과적이겠다.
-이선락, 「게놈의 아포리아」 전문
위 시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구멍 이미지다. 인쇄면뿐만 아니라 구멍 뒤에도 정체를 알 수 없는 글이 인쇄되어 있다. 시인이 추구하는 세계는 바로 인쇄된 종이의 이면의 실재다. 산재한 기호가 난무하는 이 세계의 이면에는 또 다른 실재(현실)가 존재한다는 상상은, 허수가 상상적인 수에서 실재적인 수로 일변했듯이, 더 이상 상상이 아니라 현실에 육박한다고 할 수 있다. 위의 인쇄면을 떠다니는 글자를 이어보면 다음과 같다. “네 속에서 게걸음 치는/ 나를 들여다본다// 밖에서 안으로, 안에서 밖으로// 쿵, 떨어진다// 왜// 동그라미와// 선의 방향은,// 구멍이 뚫릴까?// 나는// 너는// 자꾸// 어긋나고// 비틀릴까?” 이렇게 읽어보면 이 시의 전언은 명확하다. “네 속에서 게을 치는/ 나”란 지금 이 현실의 ‘나’가 아닌 다른 현실의 ‘나’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너’는? 그것은 우리가 상식으로 받아들이는 이 세계가 아니라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다른 세계다.
이 세계는 시간이 흐르는 3차원의 세계다. 3차원의 세계에 ‘구멍’이 뚫리는 순간, 새로운 세계가 우리 앞에 나타난다. 2차원의 평면(인쇄면)에 구멍이 뚫리듯, 3차원의 공간에 구멍이 뚫리면 4차원의 시공간 혹은 더 높은 차원의 세계가 열리게 된다. 바로 이 시편에 존재하는 두 개의 구멍이 바로 서로 다른 세계를 잇는 통로다. 하지만 여기에는 반전이 있다. ‘구멍’ 속의 글자를 읽어보면, “최고가”와 “매수신고”가 눈에 띄는데 맥락상 “최고가매수신고”와 “우선매수신고” 등과 같은 법원 부동산 경매 용어가 포함된 문장의 일부인 것이 드러난다. 그렇다면, 구멍의 저편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이고 인쇄면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세계가 아닌가. 이로써 “네 속에서 게걸음 치는/ 나를 들여다본다”고 말한 발화자의 진정한 실체를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저편의 현실에 실재하는 존재의 목소리이며, 차단된 이 세계와 연결되고자 하는 충동의 주체라고 할 수 있다.
수학사에서 실수 체계의 기반은 허수로 인해서 무너지게 된다. 허수를 통해 만들어진 복소수의 세계가 수학 체계의 기반을 더없이 확장시킨 것이다. 세계의 탐색은 필연적으로 세계의 확장을 초래한다. 그것은 주체의 확장이기도 하다. 일점원근법을 폐기한 입체파, 무의식을 예술의 영역으로 견인한 초현실주의 모두 세계 인식의 확장과 주체의 확장을 도모한 예다. 입체파가 세계를 2차원적으로 인식해왔던 고루한 관습을 폐기했다면, 초현실주의는 무의식이라는 인간 의식을 실체를 열어보였다. 이러한 확장은 시간 차원에 대한 도전으로 이어진다. 예술에 사물의 운동을 도입한 키네틱 아트나 사물의 흐름과 변화를 예술에 도입한 플럭서스(fluxus) 모두 예술에 시간 차원을 반영한 것이다. 예술은 3차원 공간을 벗어나 4차원 시공간으로 확장하려는 충동을 내재하고 있다.
이선락 시인이 허수를 차용하는 이유도 이와 같다. 정확히는 허수를 이용한 복소수(a+bi)다. 시인은 복소수를 통해 실수의 좌표 체계를 벗어난 복소평면을 만들어낸다.이는 기존에 없던 새로운 차원의 발견이 아닐 수 없다. 양자역학의 수식에서도 흔히 쓰이는 허수는 3차원에서는 발견하기 힘든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는 빈 구멍이 된다. 그래서 이선락의 시는 “오래된 세상의 말이 들려왔다 출구가 어디래?”(이선락, 「석양증후군이 있는」)와 같은 질문에 대한 매우 도발적인 시의 응답이라고 할 수 있다.
4. 시적 영토로서의 전위적 에크프라시스
김뱅상과 이선락의 시 세계는 미술과 음악이라는 인접 예술과의 끊임없는 상호교섭을 통해 ‘에크프라시스’의 지평을 한 단계 더 확장해낸다. 두 시인에게 회화적 이미지와 음악적 선율은 대상의 단순한 시적 재현에 머무르지 않는다. 김뱅상이 몬드리안과 말레비치의 절대적 침묵 속에서 자아의 해방과 숭고를 길어 올린다면, 이선락은 고흐, 말레비치, 로스코, 비발디 등을 경유하여 언어적 표상의 한계를 부수고 세계의 실재를 드러낸다. 이들에게 타 예술과의 조우는 좁고 고정된 자아의 틀을 깨부수고 새로운 존재로 도약하게 만드는 강력한 존재론적 변환의 계기가 된다.
특히 두 시인의 실험성은 활자 매체가 가진 2차원적 평면성을 넘어 미술과 음악을 경유하여 무한과 다차원의 세계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김뱅상이 피보나치 수열처럼 인간의 인식을 초월한 무한한 시공간을 활보한다면, 이선락은 종이 전면과 이면을 관통하는 ‘구멍’의 이미지와 ‘허수’의 시학을 도입하여 3차원의 시공간을 넘어선 고차원적 세계를 지면에 입체적으로 각인시킨다. 이들의 시는 이 세계의 견고한 장벽에 균열을 내고, 그 이면에 은폐되어 있던 낯설고도 거대한 차원의 통로를 열어젖히는 전위적인 실험의 장이다.
요컨대 두 시인의 시작(詩作) 행위는 평면적인 언어 예술이 도달할 수 있는 극단의 영토를 보여준다. 이들은 회화의 시각적 감각과 음악의 청각적 울림, 그리고 수학적 상상력까지 동원하여 기존 실수 체계의 완고한 현실을 복소평면의 무한한 가능성으로 확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낡은 세상의 언어가 끊임없이 출구를 물을 때, 두 시인의 혁신적 시세계는 이미지 과잉 시대 속에서 역설적으로 인쇄된 텍스트가 구현할 수 있는 미적 아우라의 물리적 고유성을 재생산해 낸다. 이는 미술과 음악을 가로지름으로써 발생하게 된 ‘에크프라시스’의 시적 효과라고 단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