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회 사이펀 신인상(하반기) | 이도화
탁발승 땅콩이 외 5편
우리 집 마당 고양이 땅콩이는 스스로 주인이라 착각하는 반려묘도 아니지만
주인의 명에 따라 사는 사육묘도 아니다
독립 세대 임차묘라 부를 수 있을까
어쩌다 생활 반경이 겹칠 때가 있어도 그와 나의 일상은
다른 원주 위를 움직인다
내가 지구라면 그는 달처럼 움직이는데 땅콩이는 나의 원이 그의 원과 가까워지거나 멀어지는 것을 말없이 경계한다
이 철칙에 가까운 거리 두기는 서로 정들기는 힘들게 만들었어도
그에게는 뜻밖의 선물이 되었다
집고양이와 길고양이의 장단점을 헤아려
제 나름의 자유를 설계할 수 있게 해준 것이다
땅콩이는 통조림 특식이든 새집이든 무관심으로 일관하여
빚을 지려 하지 않고
그가 즐기는 것은 항상 그의 곁에 있는 햇볕과 바람과 아늑함,
흥이 나면 나비 뒤를 쫓기도 하지만
공양 때가 되면 슬금슬금 밥 먹으러 오는데
누런 땅콩색 장삼을 걸치고
아침 탁발에 나서는 남방의 소승불교 스님
단아한 발걸음이 사뿐사뿐 가볍다
땅콩이가 앞서 걸어가면 나는 그의 뒤를 따른다
트리하우스
어린아이들의 훈육에는 칭찬과 야단이 필요하겠지만
넉넉한 나무의 품도 가끔은 유용할 것이라 생각했다
거목으로 자란 은목서 속가지를 쳐내자
둥글게 부푼 공간이 방 하나 들이기에 넉넉하다
바닥을 뚫고 올라온 줄기와 가지는
기둥과 서까래, 잡고 있는 손등에 푸른 피가 돌고
발등에 새 가지가 돋을 것처럼
발바닥이 근질거린다
아이들은 뛰어내릴 듯 장난을 치고
서로 따돌려 싸우고 울리기도 하지만
느린 나무의 심장박동은 빨라지지 않는다
내리쬐는 햇빛에 푸른 허파가 대장간 풍로처럼
불룩불룩 부풀어 오르는 시간, 아이들은 각자 편한 대로
줄기에 기대거나 가지에 매달려
시간을 보내는데
찌르라기 한 마리가 날아든다
어쩔 줄 몰라 해서 나는
얼른 가슴을 풀어헤치고
흉곽을 열어 한 칸을 비워 놓고
기다렸다
부자유친
주민증을 재발급받으려면 지문이 살아있어야 했다
줄지어 물결치던 손바닥 융선은
거친 마당 일에 밀려 무너지고 손가락의 지문은
흔적만 남은 형국
손가락을 쪽쪽 빨아 뭉개진 것도
골무처럼 벗어놓아 누가 집어 간 것도 아닌데
물결무늬 흠집 없던 지문은
맡겨둔 목도장
시골살이 몇 년 만에 막도장이 되었다
두 손을 벌리고 이리저리 돌려보자
손 하나가 희끄무레 나타나 겹쳐져 보인다
체구에 비해 크고 억세 보이는 손
아이쿠, 아버지!
군데군데 손바닥에는 굳은살이 백였는데
손가락 끝 지문 자리가 하나 같이 매끈하다
관절이 울퉁불퉁 불거지고 혈관이 검푸르게 부풀어 올라
두툼해진 손등, 움켜쥐면
억센 주먹이 권투선수 못지않다
어머니를 닮은 줄 알았는데
손을 보니 아버지 손
얼굴에 잡힌 주름살도 아버지를 닮았다
종점
쓰레기 더미에 구겨버린 한 청년의 고독사는 살이 녹아내리고 흰 뼈대가 드러나서야
주위에 알려졌다*
고시촌과 쪽방촌 거리 곳곳에서 발길을 감추기 시작한
낡은 후드 티, 구부정해진 고독을
한 차례 더 꺾어 어둠 속에 밀어 넣는다
거미줄로 동여맨 반지하 단칸방에는
창이 있어도 새어 나올 빛이 없고
말끔히 빈 지갑에는
라면스프 빈 봉지가 들어있다
코끝에 감돌았을 한 모금의 숨을 좇아
쪽창 쪽으로 까치발을 세우려 해도
방바닥은 쓰레기 늪이 되어
푹푹 빠졌을 것인데
영어 문제집과 쓰다만 이력서가 꽂혀있는 책꽂이 위로는
벽에 고이 걸어둔 양복 한 벌,
시종 근엄한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뭘 했어요?’
‘……’
‘놀았어요?’
*KBS, 시사직격(2021. 5. 7), “2021 청년 고독사 보고서”에 따르면, 2020년 한 해 20대 청년의 고독사 사망자 수는 4,196명, 2013년에 비해 2.5배 증가한 수치
스캔들
달의 인터폴 낭설이 한동안 사막 일대를 달구더니 그믐달이 위구르의 사막 길을 달려오고 있었다 얼떨결 포토라인에 서게 된 낮달은 수수한 모습이었으나 수억의 팔로워를 둔 사이버 셀럽이기도 했다
회원의 면면을 살펴보면 해운대 달맞이고개와 모스타르 올드 브릿지의 연인들, 손바닥만 한 창가로 달이 뜨기를 기다리는 복역수들, 파키스탄 산악 보초병과 야간당직 항해사들, 그리고 달빛이 툭툭 어깨를 치면 하나같이 반갑다는 표정으로 돌아보는 남녀노소 모든 이들
밤길의 길동무, 달은 창을 열어놓고 물만 떠 놓으면 누구네 집이든 따라 들어가 한 식구처럼 놀다 가기도 했다 달을 목표물로 삼았던 국제사기단의 집에 가서도 마찬가지, 달은 등굣길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느라 매일 같이 첫 교시 수업을 빼먹고 놀다 오는 아이와 같았다
사기꾼들은 긴급아동구호기관 행세를 하면서도 달을 따라다니며 아부를 하고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해주었다 자신이 훤히 떠 있는 시간을 골라 회원을 모집하고 공금을 횡령하는데도 티끌만치의 의심도 두지 않았다는 달, 의혹이 깊어지고 있었지만 낮달의 증언은 희미하고 반달은 상현이었던지 하현이었던지 늘 분명하지 않았다
점치던 ‘달의 몰락*’은 랩으로 개사되었고 달의 행방을 물으면 아이들은 가사에 나오는 대로 길바닥 둥근 맨홀을 가리키곤 했다 재판부의 고심 어린 판결이 있고 난 뒤 자숙 끝에 달이 다시 떠오른다는 날
시민들은 하나 같이 동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달은 떠오르지 않았다
돌아서는 등 뒤로 한 아이가 외쳤다
달이다!
달은 거리마다 맨홀 뚜껑이 되어
사람들 발아래 떠 있었다
*가수 김현철의 3집 앨범 ‘횡계에서 돌아오는 저녁’(1993)에 수록된 곡
공양주
팔공산 말사 도덕사에는 후덕해 보이던 공양간 보살이 있었는데,
절간 고시생들에게 퍼주던 밥은 언제나
봉긋이 솟은 고봉밥, 깎아 퍼주면 복도 따라 깎인다고
그녀의 불국토, 공양간에는 무럭무럭 김이 올라, 한 끼 식사만 같이하면 한 식구라 불렀다
펄펄 끓는 된장국에 장수 고시생들의 음담패설을 받아 석둑석둑 썰어 넣고
보살들의 속세 연애담을 슬슬 뿌려 내놓으면
없던 고기 단맛이 배어들어,
멸치 한 마리 찾아볼 수 없는 절간이지만
조금씩 체중이 늘어 나갔다
시골살이는 먹거리를 잘 키우는 일에 앞서
살아있는 것들을 제대로 먹이는 일
닭들이 집을 비워 빈 닭장에 왠 생쥐, 까만 눈만 깜빡이며
뭔가를 찾아 오물조물 먹고 있다
잠시 망설이는 사이 저도 잠시 망설이다
발목을 툭 치고 굴러가듯 달아나는데
질색하는 편이지만 신기하게도 귀엽다
어쨌든 아침은 이곳에서 해결했을 것이니
네가 군식구라면 나도 도리 없이 공양주,
일찌감치 마당만 한 바퀴 돌고 나도
하루 일의 반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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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화
*1955 대구 출생
*한국해양대학교 항해학과 졸업
*University of Massachusetts 졸업(MBA)
*Purdue University 졸업(경영학박사)
*POSCO 경영연구소 책임연구원(1988-1991)
*인제대학교 경영학과 교수(1991-2008)
*동아대학교 경영학과 교수(2009-2017, 명예퇴직)
*현재 동아대학교 경영학과 명예교수
*2017년 《부산시인》, 《부산시조》 신인상
*시집 『출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