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목시집 리뷰
실존적 로맨스의 온도
박형준(문학평론가)
서정시에 대한 낭만적 판타지는 위험하다. 그것은 시적 화자의 감정을 자유롭게 분출하는 것이 ‘시적인 것’이라는 오해를 조장하기 때문이다. 시는 내면의 감정을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고양된 언어를 통해 새로운 감성 구조를 입안하는 표현 양식이다. 낭만주의 사조조차도 시의 정서적 방종은 지지하지 않는다. 근대 로맨티시즘 시의 핵심 원리는 현실세계의 논법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마음의 상태, 그 이상세계를 향한 언어적 도약에 있다. 시의 언어는 기존의 의사소통 문법을 교란하며, 일상어의 사용 규칙을 고의로 어긋나게 한다. 일상어와 구분되는 시적 언어는 그래서 언어체계의 바깥을 상상하게 하는 것이 분명하지만, 감정의 범람과는 무관하다. 손미 시인의 근작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민음사, 2019)는 현대시의 수사적 텐션을 유지하면서, 철학적 인간학에 근접한 실존적 사랑을 통해 서정시의 낭만적 환영을 기각하고 있다. 시집 표제에 등장하는 ‘사람’과 ‘사랑’이라는 어휘만 놓고 보면, 독자의 멜로적 감성을 환기하는 것처럼 오인될 수 있다. 하지만 시인은 사랑과 이별, 삶과 죽음, 자아와 타자의 관계에 대한 기대/표현을 배반하고 전복한다. 시는 산문과 달리, 감정이나 사건의 극화가 아니다. 시는 스스로 ‘사건’이 되고 ‘감정’이 될 뿐이다. 손미는 이 점을 누구보다 잘 아는 시인이다. 굳이 마르틴 하이데거를 인용하지 않더라도―시가 특정한 사상과 감정을 직조하는 공작 도구가 아니라 포이에시스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시적인 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고유함을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의 분투일 뿐, 그것의 재현과 서술이 아니라는 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이든, 자연이든, 그 어떤 존재이든 마찬가지다. 서시 격에 해당하는 「옥수수 귀신」에서, 시인이 사랑의 숭고한 속성이나 애처로운 사연이 아니라 탐구와 성찰의 대상(“같은 몸”) 자체에 주목하는 것은 그래서 매우 자연스럽다.
아무도 얘기 안 했어 장례도 없이 환생도 없이 같은 몸에서 몇 번이나 죽을 수 있다는 걸
여러 개의 문을 열어도 아무 말도 안했어
깜깜한 방에서 웅크리면 나는 절반밖에 없다는 걸 어둠이 나를 파먹고 있다는 걸
한번, 찢어 본 적 없는데 팔다리도 흔들지 않는데 저 안의 옥수수는 정말 살아 있나?
외투 속 나는 정말 살아 있나? ―「옥수수 귀신」 전문
시인은 인간이 불완전한 존재(“나는 절반밖에 없다는 걸”)라고 말한다. 그래서 언제나 어둠 속에 쪼그려 있다. 심지어, 스스로를 “파먹”고 있다고 표현한다. 놀랍고 섬뜩하다. 그러나 오해해서는 안된다.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에 수록된 시 중에 그로테스크한 경향의 작품이 없진 않지만―이를 테면 「사혈(瀉血)」과 같이―, 그것은 괴기스럽거나 공상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손미 시의 내성적 뿌리는 단단한 실존적 물음을 바탕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인간은 누구나 소멸될 수밖에 없다. 인간 존재의 유한성은 근원적 불안(감)을 불러오고, 문명사회가 지속되는 한 그것은 사라지지 않고 다시 나타난다. 시인이 인간의 실존적 운명을 자학적 행위로 표현하거나(“나를 파먹고 있다는 걸”), 껍데기에 불과한 것으로 인식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외투 속 나는 / 정말 살아 있나?”). 이러한 운명은 기구하다. “장례”도, “환생”도 필요하지 않다. 인간은 ‘죽을 자’이자, ‘죽음을 경험할 자’이지, 아직은 ‘죽은 자’가 아닌 까닭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생을 다할 때까지 “빙글빙글”(「회전 테이블」) 자기 삶을 돌려가며, 다시 자신 앞에 ‘죽음’을 대령하는 존재이다. 이것은 실존적 사건이다. 시 「거기서 일어나는 일은 여기서도 일어난다」를 보자.
이게 무슨 냄새냐? 아무래도 나는 상하고 있어
나는 접시에 있다 아무도 오지 않는 식사 시간에
매일 태양이 뜨고 사람이 죽고 다시 태어나 몸에서 우유를 빤다
사람은 너무 가까워서 쉰다
상한 피를 물려주면서 우리는 번갈아 죽고 태어나고
그래서 한번 마주치지 않고 혼자 밥을 먹는다 ―「거기서 일어나는 일은 여기서도 일어난다」 부분
인간이 개체적 존재로 세상을 살아가는 과정은 모두 다르다. 제각기 다른 환경에서 태어나 사랑하며, 또 이별하고 죽는다. 시대와 풍토가 달라도, 인간이 생육을 거쳐 소멸에 이르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어떤 시대든, 어떤 지역이든, 어떤 인종이든 마찬가지이다(“거기서 일어나는 일은 여기서도 일어난다”). “매일 태양이 뜨고 사람이 죽고 다시 태어나”는 우주의 법칙이야말로, 인간 생(生)의 보편적인 속성이며 존재의 근원적 공통성이다. 위의 작품처럼, 시인은 우리가 망각하고 있는 존재의 본질을 오감으로 감지한다(“이게 무슨 냄새냐?”). 이성이 아니라 감각으로. 그리고 자신이 얼마만큼의 부와 명예를 가지고 있던지 간에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점을 깨닫게 한다. 이렇게 죽음을 선구하는 존재를 ‘시인(詩人)’이라고 부른 철학자가 있었으니, 바로 하이데거이다. “나는 상하고 있”다는 것, 나는 쉬고 있다는 것(“쉰다”). 그것을 통찰할 수 있는 인간은 경이로우며, 그 경지는 미학적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인간이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다는 존재론적 한계는 쉬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시인이 “아름답고 슬퍼서 / 나는 굳는다”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 때문이 아닐까. 오해하지 말 것은, 손미 시인이 초월적 윤회론이나 역사의 반복을 노래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목요일의 대관람차」를 보면 알 수 있다.
―「목요일의 대관람차」 부분
거대한 질서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존재론적 한계를 매우 흥미로운 형식으로 보여주고 있다. 실제 ‘대관람차’를 연상하게 하는 이미지 구상에서 알 수 있듯, 아래에서 위(혹은 위에서 아래)로 둥글게 돌아가는 형태이다. 대관람차의 회전 구조는 인간 존재의 본질과 근원적 한계를 깨닫게 한다. 지상과 천상을 잇고 매개하는 방식으로 ‘삶-죽음-삶’의 순환적 흐름을 상상하게 한다. 앞서 함께 논의한 작품(“매일 태양이 뜨고/ 사람이 죽고/ 다시 태어나/ 몸에서 우유를 빤다”, 「거기서 일어나는 일은 여기서도 일어난다」)의 형태적 변주로 보아도 맥락상으로는 크게 무리가 없다. 그러나 이 작품을 신앙적 고백이나 시적 수상록으로 읽어서는 안된다. 높은 곳에 올라 바라보니 자기가 살아온 길을 되돌아보게 된다는 따위의 값싼 인생성찰, 이를테면 말년의 회고담에 가까운 해석은 곤란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대관람차 운행(지상-천상-지상)의 상징성과 ‘죽을 자’로서의 깨달음이다. 천상(“방에서 방으로”)에 도달한 대관람차는 죽음의 임박함을 공표하는 임계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이 필멸(必滅)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자각함으로써, 지금과는 다른 삶을 개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직조한다. 그러나 매번 그것은 망각된다. 대지로 내려온 대관람차 안에 망각의 언어(“잊어버렸다”)가 탑승해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현대인의 근원적 슬픔은 바로 이러한 ‘존재의 망각’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본래 시인의 덕목은 죽음을 선구함으로써 인간 존재의 고유성을 임재시키는 데 있다. 시가 낭만적 감정의 표현이나 수사적 부림이 아니라, 존재의 본래적 가치를 발견하는 ‘마음의 실존론’으로 융기해야 하는 까닭이다. 「물의 이름」, 「애완」(“나를 마셨다 뱉는 공기를 먹고/ 몇 개의 화분이 죽어 갈 때”), 「국수」(“당신이 구부리고 앉아 면발을 빨 때/ 긴 가닥이 유일하게/ 당신 속을 읽을 때”), 「돌 저글링」(“서로에게/ 저를 던지며/ 충돌한다”) 등과 같은 작품에서 이러한 시적 지향을 확인할 수 있다. 「물의 이름」을 보자.
내가 만져서 물이 아프다
깜빡깜빡 불이 꺼진다
몸을 씻을 때 등을 톡톡 치는 물방울
거기 누가 들어 있나
맥박이 뛰어서
두드리며 이름을 불러서
끌려나오는 모든 물이 아프다 ―「물의 이름」 부분
시인은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전복적으로 사유하고 있다. 서정의 원리는 ‘세계의 자아화’이다. 그러므로 자아(“나”)와 대상(“물”)의 관계에서 인식이나 감정 표현의 주체가 되는 것은 언제나 자아(‘나’)이다. 이것은 서정시를 자기 표현(self expression)의 산물로 삼는 낭만주의적 문예론에 기초한 설명이지만, 통상 시 창작 원리로 이해되어 왔다. 그런데 손미는 「물의 이름」에서 이러한 시적 통념을 뒤집고 있다. 조너선 컬러는 서정시의 기본 구성 요소를 웅얼거림이라고 말한 바 있는데, 나는 여기에 하나를 덧붙여, ‘존재의 웅얼거림’이라고 말하고 싶다. 시의 주관적 감정이 과잉되지 않도록 조절하는 것은 수사적 장치이다. 허나 그것은 형식주의 문예이론가들이 강조하는 언어 조탁과 구성 미학(‘낯설게 하기’)과는 무관하다. 우리가 통상 얘기하는 ‘시적 허용’이란 문법의 허용치를 초과하는 작업이 아니라, 진부한 감성체계를 전복하는 힘이다. 「물의 이름」으로 돌아가 보자. 시적 화자는 물이 차갑거나 딱딱해서 아픈 것이 아니라―“내가 만져서”, “내가 찔러서”, “내가 닿아서”―, 나 때문에 오히려 물이 아프다고 말한다. 자아와 세계의 분열로부터 발생하는 고통/감정 표현은 서정시의 특징이 분명하지만, 이렇게 파토스(pathos)의 주체가 뒤바뀐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는 물성이 전혀 없다고 판단되는 사물, 다시 말해 인간이나 동물이 아닌 존재의 외침(”화장실에서 자주 울었다“)에도 귀를 기울이고자 하는 경지에야 가능해진다. (앞에서 살핀 「거기서 일어나는 일은 여기서도 일어난다」나 「목요일의 대관람차」에서와 같이, 인간만의 고유성을 발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시인은 인간을 비롯해 모든 사물의 고유성을 이해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져 명명되는 이름을 거부하고(“소리는 운다 / 이름을 부인한다”, 「소리와 소리」), 모든 사물의 고유한 울림(“내 말 들려?”)을 듣고자 한다. 인간적 관점에서 사물을 대하거나 재현하고자 하는 태도에서 벗어나, 모든 사물에 자기 자신을 개방하고자 하는 태도를 우리는 ‘실존적 사랑’이라 부른다. 이것은 지극히 깊은 로맨스이다. 자기 자신의 쓸모나 목적에 의해 인간/사물의 고유성을 조작하거나 변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본성에 가닿고자 하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손미의 시가 개별 문학 장르로서의 서정시에 그치지 않고, 인간 삶의 새로운 가능성을 정초하는 철학적 인간학처럼 느껴지는 것은 이런 까닭이다. 인간 존재의 불완전성을 자각하게 하는 것은, 결국 ‘지금-여기의 삶’에 필요한 생의 동력을 직조하는 일이다. 그것은 힘들고 고단한 일이지만, 포기할 수 없는 생의 의지(“살점이 떨어져도/ 사랑은 해야 하니까”, 「돌 저글링」)이다. 표제작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손미 시의 미덕은 인간의 유한성(“사람이 죽었는데”)과 불완전성(“사람은 껍질이 되었다”)을 사유하면서, 인간과 사물의 고유성을 발견하고자 하는 실존적 사랑에 있다. 이는 인간의 이기심과 외로움을 은폐하는 낭만적 사고와 진부한 언어 표현에 대한 거절로부터 출발한다. 그래서 더욱 뭉클하다. 시인의 진지한 시작(詩作) 태도는 대중독자들로부터의 고립을 자처하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의 한계(“사람이라는 종기”)를 실감하면서도, 인간에 대한 사랑(“나와 포갭시다”, 「전구」)을 포기하지 않는 시인의 언어에서 따뜻한 온기를 느낀다.
박형준 문학평론가. 오늘의 문예비평 편집주간. 부산외국어대학교 한국어문화학부 조교수. 평론집으로 로컬리티라는 환영 등이 있다. piko999@hanmail.net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