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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5:1-12> 팔복, 산상수훈, 복이 있나니,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린 자, 의가 되신 예수님, 믿음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 (2강)
<지난주 말씀 요약>
▶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복 받기를 원하시는 것보다 더 많이 우리들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복의 근원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복 주시는 분입니다. 다른 것들에게 아무리 복을 빌어도 복을 받지 못합니다.
→ 그래서 하나님을 떠나서는 진정한 복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구약 히브리어에서 “복”이란 단어가 “바라크”인데, 이 의미가 “무릎을 꿇다, 경배하다, 찬양하다, 축복하다”의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과 관련이 있음을알 수 있습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경배드릴 때에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 성경 말씀 전체가 복을 받을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을 복음이라고 합니다
많은 복 중에 가장 큰 복이 구원의 복이요, 영생의 복인 것입니다.
▶ 그리고 첫 번째 팔복으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 자들에게 천국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마음이 마치 어린 아이가 부모가 없이 살 수 없듯이 우리가 하나님이 없이는 살 수 없다는 마음인 것입니다.
팔복의 복이 모두 “미래형”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유독 “천국”에 대해서는 현재형으로 받는다고 했습니다. 천국을 지금부터, 현재적으로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죽음에 상관없이 이 누림이 영원히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에서의 영생인 것입니다.
당연히 종말론적으로도 사탄이 완전히 불 못에 들어가면 사망과 애통이 없는 천국이 주어질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두 번째 복부터 시작합니다.
1)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 5:4)
애통(헬, 펜데오)는 슬퍼하다, 애통하다는 뜻입니다. 표준새번역과 공동번역은 “슬퍼하다”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가 사용된 것을 보면, ① 예수님께서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물었을 때에 예수님은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신랑이신 예수님을 빼앗겨 금식해야 하는 상황에서의 슬픔인 것입니다 (마 9:15)
② 실제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에 막달라 마리아와 같이 예수님을 따르던 여인들이 무덤 가까이에서 울었던 슬픔도 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마가복음 16:10]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알리매
물론, 요한계시록에서 바벨론이 멸망당했을 때 상인들과 같이 악인들이 우는 슬픔도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계 18:1,15,19)
③ 그리고 자신의 연약함으로 넘어져 죄 가운데 살 수 밖에 없는 죄인이 탄식하며 애통하는 슬픔인 것입니다.
[야고보서 4:9]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슬픔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해서, 가족의 불상사로 우는 차원이 아니라, 내 안에 주님이 안 계신 것에 대한 슬픔이요, 죄인들이 자신의 죄를 놓고 탄식하는 슬픔인 것입니다.
→ 오늘날 이런 애통을 하는 자가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눈물이 말라 있습니다.
자신이 죄인인 줄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 형제, 자식이 세상을 떠날 때만 우십니까? 사업이 망할 때만 우십니까?
그런 울음은 악인들도 웁니다.
① 우리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온전하지 못하고 있음에 대한 슬픔으로 울어야 합니다.
② 우리 주님이 통치하는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해야 하는데, 세상의 가치관으로 다스려지는 나라를 보고 슬픔으로 울어야 합니다.
③ 수많은 사람들이 죄로 인하여 죽음으로 달려가고 있음을 애통해야 합니다.
④ 그리고 지금 어려움에 처해 있는 우리나라외 민족을 위하여 울어야 합니다.
→ 우리나라가 사상에 묶여 좌우 진영으로 나뉘어져 싸우고 있는데 결국 친미, 친일, 친청, 친소로 나뉘어져 싸우다가 망한 구한말과 같은 상황이며, 조선시대에 훈구파, 사림파로 시작하여 동인, 서인이 나뉘고, 다시 남인 북인으로 나뉘어 싸웁니다. 결국 임진왜란을 맞게 됩니다.
오늘날이 이와 비슷하게 나뉘어져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가 망하거니 침략을 당할 수 있는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이런 위기인 현실을 보고 예레미야처럼 애통하고 슬퍼해야 하고, 예레미야처럼 애가를 불러야 하는 것입니다.
▶ 오래전에 주님께서 제 뺨에 큰 눈을 통해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마치 멸망당할 예루살렘 성을 보고 우시고, 죽은 나사로를 앞에 놓고 인간들이 죄로 인해 죽어야 하는 실존 앞에서 우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누가복음 19: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요한복음 11: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주님은 지금도 울고 계십니다. 우리들의 모습과 교회의 모습, 썩은 세상의 모습을 보고서 말입니다. 예수님의 울음, 애통이 우리들의 것이 되어야 하고, 오늘 말씀에서의 애통, 슬픔이 우리들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 그러면 그런 자를 위로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위로가 참 위로입니다. 인간들의 위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① 이 땅에서도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주님께서 ② 우리를 슬픔과 눈물이 없는 영원하고 온전한 천국에서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 위로(헬, 파라칼레오)는 원어적으로 보면, “곁으로 부르다”의 뜻이 있습니다.
※ 파라클레토스(보혜서 성령, 대언자 / 파라+클레토스)
그러므로 여기서의 위로는 슬퍼하는 우리를 주님 곁으로 불러 자기 옆에 있게 하는 위로인 것입니다. 주님이 함께하는 위로인 것입니다.
마치 울고 있는 아이에게 “이리로 와, 하면서 안아주고 같이 있게 하는 위로”와 같이 말입니다. 위로를 받는 것은 미래형으로 되어 있어, 그렇게 울면 슬픔이 끝이나 위로 받는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지금 어떤 이유이든 간에 애통함으로 위로를 받아야 할 분들이 있습니까? 머지않아 위로와 기쁨이 다가올 것을 믿습니다.
→ 주님 안에서의 애통을 하는 자는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와 같이 반드시 기쁨으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시 126:6)
이런 슬픔, 울음은 오히려 우리들에게 소망이기도 합니다.
2)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마 5:5)
온유한(헬, 프라위스)는 온유한, 친절한, 겸손한, 관대한, 부드러움, 동정심이 많은, 가벼운, 순한, 조용한 등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표준새번역과 공동번역에서도 “온유한”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영어성경은 대부분 “the meek, the gentle”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온유한 사람을 영어로 젠틀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난폭하고 매정하고 잔인하고 거칠고 까칠한 마음과는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사람에게도 그러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도 까칠한 분들이 많습니다.
거저 하나님 말씀에 아멘이 안되고, 따지고 묻고, 자기 생각으로 하나님의 뜻을 판단하고, 다시 조정하고자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기에 불편해 하시는 분들입니다.
▶ 그러므로 성품적인 온유함도 있지만, 모세와 같이 하나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고 따르는 온유함이 중요한 것입니다. .
[민수기 12: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모세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기 전에는 애굽 싸람을 쳐죽였습니다. 자기 의가 있었던 자입니다. (출 2:11-14), 그런데 그가 미디안 광야에서 장인의 양을 40년간 치면서 양처럼 온유한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를 때 그의 대답을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4:13] 모세가 이르되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자기의 힘, 의가 다 빠진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 온유하지 못하면 모세처럼 광야 훈련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때가 되면 온유해지는 것입니다. 모두 성령의 역사, 열매입니다.
[갈라디아서 5:22]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 하나님께서 이런 자들이 땅을 기업으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의 땅은 하나님께서 주신 이 땅에서의 기업과 하늘에서 누리는 기업이 모두 포함됩니다.
※ 땅(헬, 게)은 지리적인 땅, 약속의 땅, 바다와 대비되는 땅
제가 시골서 땅이 부족한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지금도 땅이 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텃밭에 무엇을 가꾸고 기르는 것을 좋아합니다. 싹이 나고 열매를 맺히는 모습을 보면 그 신비와 아름다움에 탄복합니다. 그래서 흙 냄새가 좋고, 땅이 좋습니다. 이런 축복을 받고 싶습니까? 그러면 우리 모두 더 온유해야 하는 것입니다.
▶ 이스라엘 민족을 보면, 그들이 강해서 가나안 땅을 차지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뜻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따를 때 주어진 땅인 것입니다. 그렇지 못했을 때에 앗수르와 바벨론에게 땅을 빼앗기고 포로로 잡혀가는 것입니다.
그들은 가장 작은 민족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준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작은 민족인 그들이 세상 중앙의 땅을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겔 38:12). 하나님께서 보호하지 않으시면 살아갈 수 없는 민족입니다.
▶ 동물들도 온유한 것들이 땅에 더 충만합니다.
사자와 같은 강한 동물이 이 땅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힘이 없고 연약한 동물들이 땅에 더 번성하여 땅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도 놀랍지 않습니까?
강한 것들은 멸종의 위기에 있는 것들이 많은데, 초식동물과 같은 힘이 없고, 작은 것들이 더 많이 번성하여 살고 있는 것입니다. 공룡도 멸종을 당했습니다.
인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힘으로, 무력으로 남의 나라 땅을 점령하고자 하는 나라는 결국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역사가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강한 자는 결국 부러지고 맙니다. 대나무와 같이, 갈대와 같이 유한 것들이 바람에 흔들려도 꺽이지 않는 것입니다. 칼은 칼로 망한다고 했습니다 (마 26:52)
▶ 세상 사람들은 지금 성품들이 너무 거칩니다. 사납습니다. 폭력적입니다.
고기를 많이 먹어 짐승의 피가 들어가서 그런지 모두 동물과 같이 난폭해졌습니다.
→ 노아의 홍수 이후에 사람들에게 양식으로 동물을 먹을거리로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피째로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창 8:3-4) 그리고 먹을 수 있는 정경한 짐승은 대부분 초식동물과 같은 것들입니다.
노아의 홍수 이후에 인간 수명은 급격히 줄어든 이유의 하나입니다. 수명이 줄었다는 이야기는 땅을 오래동안 차지하지 못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 바울은 인간의 악독함에 대하여 로마서에서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로마서 3:13)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또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자로 무정한 자, 무지비한 자라고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31). 이들은 사형에 해당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천국에 못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실제로 성품도 온유하고, 따뜻하고, 부드러워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도 온유해야 합니다. 무조건 “아멘”, “순종”입니다.
그들이 천국의 기업, 땅을 차지할 것입니다.
→ 이 땅과 천국의 땅을 기업으로 받고 싶습니까? 온유해야 합니다. 거칠고 분노하고 폭발적인 성격을 죽여야 합니다.
말만하면 싸우려고 하는 사람들이 되면 안됩니다.
더구나 하나님 앞에서 대들면 온유한 자가 아닙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내 뜻에 맞지않아도 무조건 “아멘” 그 자가 온유한 자입니다. 그러면 땅을 차지할 것입니다. 이 땅에서도, 천국에서도 말입니다.
3)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마 5:6)
의(헬, 디카이오쉬네)가 무엇입니까? 사전적인 의미는“의로움, 옮음”(righteous)입니다. 그러면 성경적인 의로움은 무엇일까요?
▶ 한자 “義”를 보면 굉장히 굉장히 영적입니다.
양 양(羊)자에 나 아(我)의 합성어입니다. 양은 구약적으로는 제물이며, 신약적으로 어린 양되시는 예수님입니다.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지만, ① 이것은 자기가 양을 들어 신에게 바치는 모습이기도 하고, ② 제물(제물의 피)에 내가 가려진 모습이기도 하고, ③ 그리고 자신이 제물과 일체되어 제물된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어린 양의 피로 죄인된 자신이 가리워진 모습이며, 자신이 산 제물이 된 모습인 것입니다. 죄인인 자신은 감추어지고 희생제물, 그 피가 드러나 보이는 모습인 것입니다.
이렇게 된 사람을 의인(義人)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양, 어린양, 곧 피가 없으면 의인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5: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에베소서 1: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죄인된 우리들의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양 양(羊)자 밑에 있는 한자 나 아(我)자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손 수(手)에 창 과(戈)로 되어 있습니다.
손에 창을 쥐고 있는 모습입니다.
손에 창을 들고 남을 찌르고자 하는 모습이 죄인된 자아인 것입니다.
사방으로 뽀족한 것들과 낙씨 바늘, 갈고리와 같은 것들이 있는 모습입니다. 이런 모습을 어린 양되신 예수님의 피가 덮여져서 의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한자 “義”가 성경적인 의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한자는 노아의 홍수를 아는 후손들이 만들었고, 동물제사를 아는 자들이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 구약에서의 의롭게 되는 것은 모든 하나님의 명령을 다 지키는 것입니다.
[신명기 6:25] 우리가 그 명령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할지니라
모든 (히, 콜) 명령입니다. 613가지 율법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명령을 다 지킬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진정한 의에 도달할 사람이 없습니다. 수없이 의에 도달하고자 무수한 동물의 피를 흘렸지만, 오늘 속죄제, 화목제를 드리고도 오늘 또 죄를 지으니 도무지 의에 도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죄 없으신 온전한 어린양이 되셔서 자신을 제물로 드림으로 한 영원한 온전한 제사를 드리시고, 그를 믿는 자마다 의롭다함을 얻는 새로운 살길을 우리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게 복음입니다.
[히브리서 10:11] 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17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 예수님은 죄가 아예 없으신 분이므로 그분 자체가 “의”입니다.
그래서 그를 의의 왕이라 부릅니다 (히7:2). 자신이 의가 되시고 또 믿는 자를 의롭다하실 수 있는 분인 것입니다.
[로마서 3: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성경은 주의 보좌의 기초가 “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편 89:14] 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 인자함과 진실함이 주 앞에 있나이다
[시편 97:2] 구름과 흑암이 그를 둘렀고 의와 공평이 그의 보좌의 기초로다
이것은 하나님은 의로 다스리신다는 것이며, 그 하나님의 의는 결코 흔들리거나 변하지 않고 절대적인 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산과 같습니다.
[시편 36:6] 주의 의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고 주의 심판은 큰 바다와 같으니이다 여호와여 주는 사람과 짐승을 구하여 주시나이다
의가 되시는 그분의 말씀도 의로운 말씀인 것입니다.
▶ 그러므로 예수님을 뺀 의는 없습니다. 아무리 자기가 의롭다고 우겨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상대적이고 인간적인 작은 의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붙어 있어야 의롭게 됩니다. 예수님의 피가 뿌려져야 의롭게 됩니다. 의가 되시는 예수님은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롬 4:25) 할렐루야!
▶ 이러한 예수님에 의해 주어지는 이 “의”에 주리고(헬, 페이나오) 목마른(헬, 딥사오)자가 베부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참된 양식이요, 참된 음료이십니다.
[요한복음 6: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그러므로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의가 되시는 예수님에 대한 갈증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가 없었다면, 우리들은 여전히 죄 가운데서 살다가 죽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리고 목마름에 대한 갈증은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죄의 문제에 대하여 해결자이신 예수님에 대한 갈증인 것입니다.
그리고 의의 말씀에 대한 갈증이요, 그리고 의로운 삶에 대한 갈증인 것입니다.
예수님 없이는 아무도 의인이 될 수 없습니다.
[로마서 3: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이것이 모든 인간의 죄인된 모습입니다.
그래서 이런 죄인된 자신을 놓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리 주님께 겸손히 나아오는 자세가 주리고 목마른 상태인 것입니다.
우리들이 구원을 받는 의는 결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선행, 행위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피의 공로와 은혜로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 물론 의라는 것은 일반적인 개념으로 옳은 행실도 포함됩니다 (계 19:8).
가장 옳은 행실이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큰 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가르친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당연히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것도 포함됩니다. 죄를 짓지 않는 행동 모두 포함되는 것입니다.
혹시 죄를 짓더라도 즉시 회개하고 돌이킬 때에 그는 여전히 의가 주어져 하나님 앞에서 의인으로 인정되는 것입니다.
불법의 사함을 받아 정죄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4:7]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로마서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 이런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를 배부르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배를 채워주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양한 의미로 적용할 수 있겠지만, 의가 되신 예수님으로 채워주시겠다는 것이며, 의의 말씀으로 채워주시겠다는 것이며, 의로운 삶을 살도록 이끌어 가시겠다는 것이며, 그리고 우리를 의인으로 인정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믿음의 승리를 이룰 때에 의의 보좌인 주님의 보좌에 함께 앉게 되는데 그 보좌는 의인이 앉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21]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우리들 자신에게는 의로움이 없습니다. 무조건 의로운신 예수님께 붙어 있어야 합니다. 그분의 의가 전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의롭다 함을 얻고”. “의의 옷으로 덧입는” 은혜가 주어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