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불꾸불한 산골길을 자동차 불빛에만 의지한 채, 달리고 또 달리기를 거듭한 끝에 강원도 화천에 있는 처가에 도착하고 보니, 시간은 새벽 한시를 훌쩍 넘어서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세 시간 정도면 넉넉히 올 수 있는 거리이건만, 잔머리를 굴려 복잡한 시간대를 피한다고 한 것이 오히려 다른 때보다 훨씬 더 막혀 버린 것이다.
제기랄! 피서철의 도로상황이란 도무지 예측을 할 수가 없다. 차가 막혀 고생할 때마다 다음 휴가지로는 강원도 쪽은 절대 택하지 않으리라 다짐해 보건만, 막상 처가에 도착하여 장인 장모님의 환대를 받다보면, 길이 막혀 고생했던 기억은 어느새 눈 녹듯 사라져 버리고, '역시 처갓집에 오길 잘했구나' 하는 간특한 생각으로 금새 뒤집어져 버린다. 그 때문일까, 다음 해 휴가철이 되어도 자동차 머리 방향은 어김없이 처가 쪽을 향해 있곤 한다.
마라톤을 취미로 갖기 이전에는 가끔은 이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휴가여행을 떠나기도 했었다. 허나, 6년 전 마라톤이라는 깊은 수렁에 빠져든 이후, 피서철 휴가지로는 반드시 이곳을 택하게 되었다. 물론, 장인 장모님이 편하게 해주는 탓이 크기는 하다. 그러나, 반드시 그 때문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이곳에는 맑고, 아름답고, 환상적이기까지 한 나만의 달리기 코스가 있기 때문이다.
처가가 있는 풍산마을을 출발해 한참동안 달리다 보면, 파로호를 한눈에 바라보며 달릴 수 있는 동촌 마을길이 나온다. 탁 트인 호수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등뒤로 받으며, 구불구불 가파른 언덕길을 넘고 나면, 산고랑 사이로 포장되지 않은 울퉁불퉁한 농로를 만나게 되는데, 이 농로를 껴안고 흐르는 작은 실개천은 정말이지 너무도 아름답다.
바닥의 하얀 모래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수정처럼 맑은 물, 굽이치는 물결에 산산이 부서지는 눈부신 햇살, 가장자리를 따라 듬성듬성 나있는 갈대 숲, 그 사이를 유유자적 헤엄쳐 다니는 송사리 떼들......더 이상은 글재주가 모자라 표현이 힘든 아름답고 정겨운 풍경들은 번번이 나를 이곳으로 유인해버리곤 하는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것은, 이 길을 한바퀴 빙 돌아서 처음 출발했던 장소에 돌아오면 그 거리가 하프 마라톤 코스의 거리와 정확하게 맞아떨어진다는 사실이다. 그동안에는 거리 개념 없이 무심코 달리기만 했던 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달리고 있는 이 길의 거리가 과연 얼마나 될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나는 궁금증이 생기면 참지 못하는 성미다. 때문에 바로 실측에 들어갔다. 자동차의 거리측정 버튼을 누른 후 그 길을 달려 본 것이다.
구불구불 다랑 논의 포장 안된 농로를 달리는 곳에서는 애를 먹기도 했으나, 처음 출발했던 장소에 돌아와 거리를 확인해보니 정확한 하프코스인 21킬로 100으로 표시 되어있었다. 처음엔 믿기지 않았다. 그래서 거푸 측정을 해 보았다. 그러나 불과 일이 미터의 오차만 있었을 뿐 하프코스의 거리가 확실했다. 신기했다. 이토록 정확히 맞아떨어질 수가......그 뒤로는 이곳은 언제나 나만의 전용 하프 코스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면 지금부터는 금년 여름휴가 때 이 곳을 달리며 겪었던 조금 괴상한 얘기를 써보려 한다. 전설의 고향에서나 나올법한 얘기인지라 곧이곧대로 믿는 이는 별로 없을 줄로 안다. 허나, 믿고 안 믿고는 읽는 여러분들의 자유다.)
평시 습관대로 일찍 일어나 아침 달리기를 하기 위해 신발 끈을 고쳐 매고 있었다. 자정을 훨씬 넘어 도착했던 탓에 잠이 부족한 상태이긴 했으나, 산골의 맑은 공기 덕분인지 몸 상태는 그다지 나빠 보이지 않았다. 산 고랑을 타고 불어오는 바람은 너무도 시원하고 상쾌하다. 팔을 벌려 폐포 가득 숨을 몰아쉬고 사지를 벌려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니 관절 마디마디에서 우두둑 뼈 부러지는 소리가 난다. 산골의 적막함 때문인지 유난히 소리가 크게 들린다. 괜 시리 가슴이 철렁 한다. 그러나 금새 혼자 열 적어져 맥없이 헤픈 웃음을 지어본다.
"아니! 이 사람, 지금 달리러 나가려는 겐가?"
새벽같이 일어나 논밭을 둘러보고 돌아오던 장인어른이 달리기 채비를 갖추고 있는 나를 보더니 어이없다는 듯 묻는다.
"예, 장인어른. 하루라도 뛰지 않으면 다리에 종기가 날것만 같아서요"
"허허! 일 낫군......이 사람아! 아무리 좋아하는 운동이라지만 무리하게되면 안 하는 것 만 못하다는 것을 모른단 말인가? 아서 게. 오늘 하루는 그냥 푹 쉬고 내일쯤 달려 보게나. 이토록 삶아대는데 달리기는 무슨......."
장인이 턱도 없다는 듯 손을 휘휘 저으며 만류한다.
"괜찮습니다. 장인어른. 제 몸은 이미 무쇠처럼 단련이 되어 있어 이 정도의 더위쯤에는 끄떡없습니다. 염려 놓으십시오."
물통 쌕을 허리에 두르며 자신 만만한 얼굴로 말했다.
"김 서방! 장인어른 말씀대로 하시게나. 오늘 아침은 모두 함께 같이 들도록 하세. 이젠 나이가 들어 그런지 몰라도 밥상머리에 앉으면 사람이 그립다네. 오랜만에 도란도란 둘러앉아 맛있는 밥 좀 먹어보고 싶네."
아궁이에 불을 지피며 아내와 함께 아침을 짓던 장모님이 말한다. 장모님은 아직도 재래식 아궁이를 고집한다. 다 늙어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에게 신식 주방이 무슨 소용이냐며 전에 살던 대로 사는 게 좋다며 한사코 아들딸들의 주방을 개량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넉넉지 못하게 살아가는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부모의 마음이리라. 예나 지금이나 부모님의 자식사랑은 늘 가슴을 시리게 만든다.
"정히 달리고 싶다면 저녁 에 달려보도록 하게. 오늘은 보름달이 뜰 걸세. 시원해진 저녁에 달빛을 벗삼아 달려 보는 것도 꽤 낭만적이지 않겠는가?"
장모님의 제안이었다. 달빛과의 동반 주 라......참으로 그럴 듯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모님의 말씀 중엔 가끔 이렇게 시적 감성이 불쑥 불쑥 드러나 보일 때가 있다. 고령임에도 가슴속엔 시상으로 가득 차 있는 듯 싶었다. 요즘 세상에 태어났더라면, 여류시인 쯤은 되어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 적도 있다.
"장모님! 참 좋은 생각이십니다. 장모님 가슴속에 이토록 낭만이 가득한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김 서방! 나이 먹었다고 너무 괄시 말게. 고목에 피는 꽃이 더 아름답다는 말 들어보지 못했는가? 말라비틀어지는 것은 몸뚱이지 마음은 아닐세. 속절없는 세월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가슴속에 고여있는 옹달샘 마저 마르는 것은 결코 아니라네"
장모님은 고개를 들어 부엌 바깥 하늘에 눈길을 주며 탄식 어린 말을 뱉아 냈다. 장모님의 허전해 보이는 얼굴에서 세월의 무상함을 읽을 수 있었다.
* * *
산골마을의 달은 마냥 게으름뱅이다. 하늘은 벌써 대낮처럼 환하게 빛나고 있는데도, 도통 제 잘난 낮 짝을 내밀려하지 않고 있다. 꾸물꾸물 꾸물대는 것이 화장대 앞에 자리 틀고 앉은 못생긴 여인네의 궁뎅이짝 같다. 달이 완전히 떠오르기를 기다리는 동안, 아내에게 자전거로 나의 달리기에 동행해 줄 것을 요청했다. 허나 마누라는 일언지하에 거절해 버린다. 어제 저녁의 여독이 아직까지 풀리지 안았다나 어쨌다나. 아니, 밤새 차를 운전하고 온 사람은 누구이며, 차 속에서 드르렁거리며 코를 골며 자던 사람은 누구였는데 아직까지도 피로가 풀리지 않았단 말인가? 그러기에 운동 좀 하라 그렇게 일렀건만 들은 척도 안 하더니......매정하게 청을 거절해 버리는 여편네가 몹시 고깝다. 장모님 같았으면 절대 거절하지 않았으리라 생각하니, 오동통한 여편네의 얼굴이 우리 속 돼지 얼굴과 꼭 닮아 보인다.
보름달이 산봉우리를 뚫고 삐죽이 얼굴을 내민다. 팔을 들어 시계를 보니 여덟시 반을 가르키고 있다.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달려도 열시 반까지는 돌아올 수 있으리라 생각해 보며 사립문 밖을 나섰다.
"달님하고 데이트나 실컷 하고 오슈"
문밖을 나서는 나를 보며 아내가 인사를 한다. 나의 청을 거절한 것이 미안한 듯 어색한 미소가 입가에 묻어있다. '흥! 말이나 않으면 밉지나 않지. 어디서 달 덩어리 같은 처녀나 하나 꾀 차고 들어올까 보다' 속으로 코방귀를 뀌어대며 동구 밖을 나섰다. 그러자 보름달이 기다렸다는 듯 얼른 따라 나선다. 활짝 웃어주는 함박웃음이 마냥 정 겹다. '그래! 퍼들어진 마누라 쌍판데기 보다야 보름달이 훨 났지. 흐 흐 흐......! 암, 그렇고 말고' 실없이 헤픈 웃음을 웃어대며 속으로 마누라를 뭉겨대고 나니 입가에 참깨가 한말이다.
산골의 여름밤은 생각보다 훨씬 시원하다. 찌는 듯했던 한낮의 더위는 어느 곳으로 사라졌는지 제법 서늘함마저 느끼게 한다. 장모님의 제안을 따르기로 한 것을 잘했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동촌 마을로 접어들자 저 멀리 파로호가 한눈에 들어온다. 파로호의 찰랑이는 물결들은 쏟아지는 달빛을 산산이 부수어 놓고있다. 어디선가 아련한 함성이 들려 오는 듯 하다. 이곳은 6.25사변 당시 중공군과 치열한 격전을 벌렸던 곳이라 한다. 한 달여 간의 밀고 밀리는 접전 끝에 결국에는 대승을 거뒀는데, 그 승리를 기리기 위해 이승만 대통령은 본래는 구만리라 불리었던 이 곳을 '파로호'라 개명을 하였다 한다. 치열했을 그 당시의 전투를 나름대로 머릿속에 그려보며 한참을 달리다보니 어느새 파로호가 저만큼 뒤로 물러나 있다.
오르막이 시작되는 소나무 숲길로 들어섰다. 갑자기 정전이 되어버린 듯 사방이 컴컴해진다. 빽빽하게 들어찬 소나무 숲은 단 한줄기의 달빛도 통과시켜주지 않고 있다. 숲은 쥐죽은듯 고요하다. 풀벌레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지면을 스치는 가벼운 나의 발자국 소리만이 정적을 깨뜨리고 있을 뿐이다. 갑자기 오싹 해지는 느낌이다. 꼭, 무언가가 나타나 뒷덜미를 낚아 채버릴 것만 같다. 뒤통수가 스멀스멀해진다. 어린 시절 어쩌다 학교에서 일이 있어 친구들과 떨어져 밤늦게 귀가할 때, 가슴 졸이며 도깨비 고개를 넘던 생각이 난다. '다른 애들에 비해 유독 겁이 많았던 나였지......생각하며 '피식 실소를 머금어 본다. 낮에 달릴 때는 시원한 그늘이 있어 즐겁고 상쾌하게 달릴 수 있던 길이다. 그토록 아름답던 길이 밤엔 이토록 공포감을 갖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똑같은 길인데, 단지 빛이 있고 없음에 따라 느끼는 감정이 이토록 완전히 달라져 버리는 것이다.
"나이 값 못하게 시리......"
겁 많았던 소년시절처럼 괜히 나약해지는 내 자신이 못마땅해져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가슴을 활짝 펴고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강하게 다잡아 본다. 하지만, 밀려오는 두려움은 좀처럼 가셔지질 않는다. 이럴 땐 누가 옆에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동반을 거절한 마누라가 새삼 고깝다. 헌데, 아까부터 누군가 뒤에서 따라오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규칙적인 나의 발자국 소리에 조금 다른 엇갈린 발자국 소리가 섞여있는 것 같다. 슬그머니 뒤를 돌아보았다. 허나, 칠흑 같은 어둠만 펼쳐져 있을 뿐,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두려움 때문 일거야' 생각하며 속도를 높여보았다. 그러자 뒤따라오는 발자국 소리도 빨라진다. 미치겠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대며 속도를 더욱 빨리 해 본다. 발자국 소리 역시 빨라진다.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아무도 없다.
늦추었다 빨리 달리기를 몇 번, 물밀 듯 몰려오는 두려움과 씨름을 하며 한참을 달리다보니 드디어 저 멀리서 어둠의 끝이 보인다. 길고 긴 터널의 끝에서 한줄기 빛이 보인 것이다.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깊게 숨을 몰아쉬고 단 숨에 내 달렸다. 숨이 턱밑까지 차 오른다. 그러나 속도를 줄일 수는 없다. 뒤따르는 발자국도 전 속력으로 따라 온다. 으 흐 흐......
숲의 터널을 벗어났다. 갑자기 세상이 환해졌다.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그와 함께 밀려오던 공포심도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가쁜 숨을 추스른 뒤, 혹시나 해서 뒤를 돌아보니 역시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달빛만 차갑게 흐르고 있을 뿐, 눈에 들어오는 것은 고요하게 잠들어 있는 풍경들뿐이다. 달빛 속의 세상은 그저 평화롭기만 하다.
"못난 것. 그렇게 좁아 터진 새가슴으로 무슨 일을 해 먹겠누"
혀를 끌 끌 찼다. 별것도 아닌 것에 그토록 놀랐던 내 자신이 너무도 한심한 생각이 들어서였다. 세상에 귀신이란 없다고 그동안 생각해왔었다. 공포란 그저 마음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일 뿐, 받아들이지 않고 부정해 버리면 그만 이라 생각했다. 허나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막상 상황이 닥치면 공포심을 억제하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감성을 이성으로 조절한다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은 벌써 중천에 걸려있다. 쟁반처럼 커다랗게 떠올랐던 보름달은 이젠 접시 만하게 작아져서 차갑고 하얗게 빛나고있다.
꾸불꾸불한 포장 안된 농로로 접어들었다. 농로를 따라 흐르는 실개천 속에서 보름달이 환하게 웃으며 나의 달리는 속도에 호흡을 맞추어준다. 놀랐던 가슴은 차츰 진정되었다. 마음의 여유를 갖고 주위를 살폈다. 그런데 송전탑이 개천 둑을 따라 일정한 간격을 두고 높다랗게 서있다. 작년까지는 없었던 구조물이었다. 송전탑에 걸쳐있는 전선 속에는 몇 만 볼트의 초고압의 전류가 흐른다 던데......초고압의 전류는 인간의 몸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던 기사를 신문에서 본적이 있다. 왠지 기분이 찜찜해 진다. 속도를 높였다. 조금이라도 빨리 송전탑에서 벗어나려는 속셈에서다. 그때다.
"형님! 저 치 달리는 폼이 좀 그럴 듯 해 보이지 않수?"
"흐흐! 그러네."
갑자기 어디선가 두런두런 주고받는 말소리가 들렸다.
"몇 년이나 묵었겠수?"
"글쎄......배 둘레로 보아선 한 삼 년, 폼으로 보아선 오 년쯤은 되어 보이는데......뭐, 그냥 후하게 쳐서 한 십 년 잡아줄까?"
"아니. 무슨 대답이 그렇수? 오 년이면 오 년이고, 십 년이면 십 년인 게지. 우물가 두레박 마냥 왔다리 갔다리 하는 것은 다 뭐요?"
"그러게 말야. 동생도 알다시피 내야 뭐 감 잡는데는 젬병 이지 않나......흐흐! 어디 동생이 한번 맞춰 보게"
계속해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이상한 생각이 들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살폈다. 그러나 주위엔 사람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갑자기 등골에 찬바람이 지나간다.
"거, 거기 누구요?"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물었다. 그러자, 말소리가 뚝 끊기며 조용해진다.
"누구요? 누구냔 말이오?"
재차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
"숨어 있지 말고 어서 앞으로 나오시오."
놀란 가슴을 가다듬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가만.......형님! 저 치가 지금 우리에게 말하는 건가요?"
"그, 글쎄......그럴 리가, 저 자는 우리가 말하는 소릴 듣지 못할텐데......"
"거기 누구냔 말이요? 썩 나오지 못하겠소?"
재차 소릴 질렀다.
"우릴 보고하는 소리 같은데요?"
"그러게. 이상하네. 그럴 리가 없을 텐데......그것참. 어찌된 영문이지? 아, 아니? 이게 뭐야? 여긴 송전탑 밑이잖아. 허 어! 이거 낭패로군. 큰일났어. 저 자가 우리말을 모두 알아들은 게야. 아하! 이걸 어떻허나."
"헉! 그, 그렇군요. 큰일이다. 이젠 어떻게 하지요?"
"어떻게 하긴, 얼른 도망쳐야지."
그러더니 말소리가 뚝 끊겼다. 한참을 기다렸으나 다시는 말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 사방은 다시 정적에 쌓였다. 무언가에 홀린 듯 하였다. 도대체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목소리는 들리는데 모습은 보이지 않다니......대화를 주고받던 그 두 사람은 누구였다는 말인가. 목소리는 바로 등뒤 가까이에서 들렸었다. 허나,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난감하다.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송전탑은 그들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머릿속이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해진다.
"내가 환청을 들은 것일까? 하지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환청이라 하기엔 너무도 또렷했다. 만약 환청이었다면 그토록 선명하게 귓속을 파고들 리는 없다. 그렇다면.......그들의 존대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귀신? 유령? 에이! 설마......궁금증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었다. 어릴 적 나는 귀신의 존재를 믿었었다. 어른들이 귀신 얘기를 해주면서 사실이라고 말하면 순진한 나는 그걸 곧이곧대로 믿었었다. 때문에 어쩌다 새벽녁 오줌이 마려워 일어났을 때, 얘기 속의 귀신이 나올까봐 무서워 화장실도 가지 못한 채, 바지에 오줌을 저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허나, 그것은 어릴 적 얘기일 뿐이다. 철든 이후엔 귀신이란 옛날얘기 속에서나 등장하는 것이지 실제 존재는 믿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귀신을 빼곤 설명할 수 없는 황당한 경험을 한 것이다.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머리에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그때다. 번개처럼 머릿속을 스치는 한 단어가 있었다.
전음지술. 혹시 그들이 중국 무협소설 속에 나오는 전음지술 을 이용해 대화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맞아!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
무협소설이란 본래 황당하고 허구성이 강한 얘기들로 이루어져 있긴 하다. 하지만 모두가 전혀 근거가 없는 얘기만은 아닐 것이라 생각해 본적이 있다. 실제로 중국 소림사엔 장풍을 시연 할 수 있는 무공이 지금까지 전수되어 내려 온다하지 않은가. 무협소설을 읽고 날 때면 혹시나 해서 촛불을 향해 장풍을 날려보낸 적도 여러 번 있다. 번번이 실패로 끝났지만 말이다.
마술 역시 그렇다. 마술이 속임수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전혀 속임수 같지 않은 마술이 얼마나 많은가. 얼마 전 일본인 마술사가 펼쳐 보인 유리창을 통과하는 카드 마술만 해도 그렇다. 분명 여러 사람들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보고있는 바로 앞에서 마술사가 던진 카드가 유리창을 통과하여 반대편 유리창에 떡 하니 붙어버렸다. 아무리 속임수라곤 하나 그 짧은 순간에 투명한 유리를 통과한다는 것은 도대체 어떠한 방법으로도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이렇듯 이 지구상에는 상식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럴진대 전음지술 이 실제로 사용되고 있다해서 크게 이상할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잡다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허나, 그 모든 것들은 그저 추측일 뿐, 수수께끼를 풀어줄 만한 속시원한 답은 나오지 않는다. 잊자. 잊어버리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환청이었을 게야.' 환청을 들은 걸로 생각해 버리면 그 뿐이다. 팔을 들어 시계를 보았다. 50여분이 흘렀다. 이곳은 대략 10km지점이다. km당 6분이 예정속도였으나 조금 빠르게 달린 것 같다. 두려움 때문에 생긴 조급한 마음 때문이었을 게다. 속도를 높여본다. 달리는데 에만 몰입할 생각에서다. 그러나 마음과는 다르게 밀려오는 의문들은 좀처럼 뇌리 속을 떠나려 하질 않는다. 애써 다른 생각을 해본다. 이것저것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보다 요즘 사회적 이슈인 국내 문제로 들어가 본다.
요즘 나랏님은 지독한 몸살을 앓고 있다. 40도를 훌쩍 넘어가는 고뿔중의 고뿔이다. 바로, 부동산 투기와 북한 핵 문제 때문이다. 핵 문제야 우리 스스로 어찌 해볼 도리가 없으니 그렇다 쳐도, 그토록 호언 장담했던 집 값 문제는 풀려 가는 폼 새가 어째 영~ 말씀이 아니다. 겨드랑이에 날개를 단 방자한 투기꾼들은 지엄하신 나랏님 말씀을 콧등으로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 나랏님 말씀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리 삐딱, 저리 삐딱 뛰어대는 폼이 청개구리가 따로 없다. 청 개구리청개구리 해도 이토록 고약한 청개구리는 보질 못했다. 다른 나라에서는 구경조차 할 수 없는, 기이하고 악랄한, 희귀종 중의 희귀종들이다. 사정이 그러하니, 나랏님 체면 또한 찌그러진 양철통이 되어버린 지 이미 오래다. 그래서 인지 요즘 들어 부쩍 나랏님은 나랏님 못해 먹겠다고 난리다.
"나랏님 되었다고 좋아하던 때가 언제인데......흐흐흐!"
나랏님 되지 못한 내가 천만 다행이다 싶다. 요즈음의 나랏님을 보면 실소 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내 손으로 뽑은 나랏님인데' 하는 생각에 연민의 정이 들기도 한다. 참으로 딱하기 이를 데 없다.
"흐흐! 딱 할 것도 많수"
갑자기 말소리가 들려왔다. 아까 그 말소리다. 소스라치게 놀랐다.
"누, 누구요?"
겁에 질린 목소리로 물었다.
"너무 놀라지 마시오. 당신을 해코지하려는 마음은 없으니까"
"......"
"그냥 돌아가려다 한가지 부탁이 있어 이렇게 다시 왔소"
"부탁? 당신들은 대체 누구요? 사람이요. 귀신이요. 먼저 정체부터 밝히시오"
"흠! 곤란한 질문이군요. 귀신이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뭐, 뭐요? 아니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귀, 귀신이라는 얘기 아니요?"
"글쎄요. 귀신이라......귀신이란 없소. 아니, 어쩌면 귀신이 맞을지도 모르겠소. 사람들은 죽은 자의 혼을 귀신이라 부르니 그렇게 보면 귀신이 맞을 런 지도 모르겠소. 허나 엄밀히 말하면 우리들은 귀신이 아니고 육체를 떠나 인간 세상에 잠시 머물고 있는 정신, 즉 혼이라 말할 수 있소"
"에이! 형님 그렇게 어렵게 얘기 할거 뭐 있수? 여보시오. 달리는 양반. 우리 귀신 맞소. 사람들은 우리들을 귀신이라 부르지요"
또 다른 귀신이 말한다.
"저, 정말이오? 정말 귀신이란 말이오? 세상에......정말 귀신이 있다니"
"귀신. 귀신 하지 마시오. 듣는 귀신 기분 나쁘오"
형님이라 불리 우는 귀신이 퉁명스럽게 말한다.
"뭐요? 그럼. 뭐라 불러야 되오?"
"그, 글쎄......뭐라고 불러야되나? 동생. 우리를 뭐 라고 불러야되지? 저승에 온 뒤로 이승사람과는 처음 대화를 해 보는 터라 참 난감하네......"
"에이! 형님. 귀신을 귀신이라 부르면 되지 난감 할 게 뭐 있소?"
"그래도 그렇지. 난 귀신이라는 명칭은 싫어. 이승에 있을 때 귀신을 제일 무서워했거든......귀신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꼭 귀신 나올 것 같아서 싫어. 정말 싫어. 정말 싫어."
"흐흐흐! 이미 귀신이 되었는데. 귀신이 싫다니. 아니! 그래. 형님은 아직까지도 자신을 인간으로 착각하구 있수?"
"휴! 그래. 그러게 말일세......내가 말해놓고도 이상하네. 그래 이젠 귀신이 되어 버렸지. 맞아! 이제 난 귀신이야. 망할 놈의 귀신.......속절없는 귀신이 되어 버렸어. 휴~"
형이라 불리는 귀신이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내 쉰다.
"이게 모두 그 놈 때문이오"
동생귀신이 버럭 소리를 지른다.
"바로 그놈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귀신이 되어 버렸소. 그런데 형님은 그놈을 위해서 저 양반에게 부탁을 하려 이렇게 다시 돌아오지 않았소? 도대체 난 형님 속셈을 모르겠단 말이오"
동생귀신이 화가 난다는 듯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동생! 아직까지도 동생은 그 사람을 원망하고 있군......누차 말했지만 그건 그 사람 잘못이 아니야. 우리가 잘못한 것이라 구. 모두다 우리 잘못이야"
"아니. 왜 형님은 그것을 우리 잘못이라고만 그러우? 우린 그저 달리고 있었을 뿐인데......달리는 양반! 한가지 물어 봅시다. 도로 위를 달리는 게 잘못된 일이오?"
"네? 그게 무슨 소린지......"
"밤에 도로 위를 달린 것이 잘못된 것이냐 이 말이오."
"그, 글쎄요. 도로를 달리는 것을 잘못이라 할 수 있을까요?"
"맞지요? 잘못이 아니지요? 보시오. 형님, 저 사람도 우리 잘못이 아니라 하지 않소?"
"그게 아니야. 그 날 우리는 검은 옷을 입고 달렸지 않았나. 잔뜩 흐린 별빛하나 없는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반사 조끼도 입지 않고 우중충하고 어두운 곳을 달리고 있었으니 그 자가 우리를 보지 못한 것은 당연한 거였지. 몇 번을 말했지만 그 사람은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야. 사고 뒤에 그 사람이 한 행동을 보면 알 수 있지 않나. 우리 때문에 너무도 큰 정신적 고통에서 지금까지도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피해자라 구. 난 그 사람을 생각하면 눈물이 날 것만 같아."
"......"
"달리는 양반! 얘기를 들어 대충 짐작하였겠지만 우리도 이승에선 당신처럼 마라톤을 즐기는 매니아였소. 비록 농사꾼이었지만 달리는 것이 좋아 가끔은 대회도 참석하곤 했었다오. 그러한 우리를 보고 마을 사람들은 '마라톤 형제'라 불렀지요"
"아! 예......그런데 왜?"
"왜, 귀신이 되었냐 그 말이지요?"
"예? 아, 네......아닙니다.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전 그저......"
당황스러운 그의 질문에 마땅하게 대꾸할만한 말이 생각나지 않아 어정쩡하게 얼버무리고 있는데,
"흐흐! 당황할 것 없소. 그 사람 때문이었소. 대형 화물차를 운전하고 있던 그자가 일년 전에 우리를 황천으로 보내주었소."
"네? 아! 네 에......"
"그 놈은 우리를 치고 뺑소니를 쳐버렸소. 천하에 나쁜 놈! 빨리 병원으로 옮겼으면 살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동생귀신이 분하다는 듯 격앙된 목소리로 소리친다.
"동생. 그런 억지소리는 하지 말게. 그 날 우리는 정통으로 치어 병원으로 옮겨도 살지 못했어. 그자가 내려와 살피는 것을 보지 못했나? 그자는 우리가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겁이 나서 도망 가 버렸던 거야. 자네도 보질 않았나. 그의 공포어린 눈과 좌절 섞인 참담한 얼굴을......"
"그래도 뺑소니를 옳다고 할 수는 없지 않소?"
"물론, 옳다는 게 아니야. 그 사람 딱한 사정이 그럴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게야. 동생도 잘 알지 않는가.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그런데도 아직도 동생은 그 사람을 원망하고 있군"
"......"
"그 사람은 죄책감 속에서 일년동안이나 헤매었어. 아마, 그 사람은 그 죄책감을 평생동안 떨쳐 버리지 못 할 사람일세. 결코 나쁜 사람은 아니야. 동생도 보지 않았나? 자기 집에 우리의 영전을 만들어 놓고 일년 동안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조석으로 밥 사발을 올려놓는 정성을......그리고 끝없는 참회의 눈물을 흘리지 않던가? 난 그것을 보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모르네"
"하지만, 우리는 지금 그것 때문에 편히 하늘 나라로 가지도 못하고 있지 않소? 놈이 그 영전을 얼른 치워주어야 영원한 하늘나라로 들어갈 수 있을 텐데. 그렇게 붙들고 늘어지고 있으니......에이! 놈은 죽어서도 영 골치 덩어리야. 고약한 자 같으니라고."
"흐흐! 동생. 그렇게 마음에 없는 소릴 하질 말게. 비록 우릴 죽게 만든 사람이지만 얼마나 고맙고 가상한가 일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우릴 생각해 주는 그 마음 씀씀이가 말이네"
"흥! 무척도 가상하시겠소"
"그토록 오랫동안 살 섞고 살던 자네 마누라는 자네 죽은 지 일주일만에 자네 영전을 치워 버리지 않았던가? 어디 그것 뿐이야? 채 일년도 지나지 않아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지 않은가"
"아니! 형님은 꼭 그렇게 남의 아픈 곳을 후벼파야 되겠수?"
"흐흐! 미안, 예를 들어서 그렇다는 게지. 그러니 그 사람에 대한 원망은 이제 그만 풀도록 하게나"
"나도 놈을 꼭 미워하는 것만은 아니라우. 가끔......어쩌다 가끔 미워질 때도 있지만......"
"아네. 나도 아네. 자네 마음을"
"......"
다시 정적이 흐른다. 왠지 동생 귀신이 울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비록 울음소리가 들리지는 않았지만.
"달리는 양반! 얘기를 들었으니 대충 짐작은 하였겠지만, 우리는 일년 전, 이모라는 사람이 몰던 대형화물차에 치어서 죽었다오. 그런데 그 운전사의 처지가 참으로 딱하오. 노모가 치매에 걸려 있는데 사고나기 얼마 전 그의 아내는 그런 시어머니와 어린 자식을 놔두고 집을 나가 버렸소. 그 와중에 이런 대형사고가 나 버린 것이란 말이오. 그러니 어떻게 하겠소. 뺑소니를 칠 수밖에......그가 없으면 치매에 걸린 노모와 어린 자식의 앞길이 막막한데, 아마 내가 그 입장에 처했다 하더라도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요. 그 날 우리가 달리기를 하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하필이면 그토록 처지가 어려운 사람의 차에 치일게 뭐요. 참으로 후회 막급 이오. 모두 우리 잘못이요. 그 날, 밭일 끝내고 항상 다니던 지름길로 그냥 왔더라면 그런 일은 없었을 터인데, 며칠 남지 않은 마라톤 대회에서 이번만큼은 기필코 서브-3를 달성해야 되겠다는 욕심에 복장도 갖추지 않은 채 집에까지 달리기로 한 것이 실수였소.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처럼 칠흑같이 어두운 밤길을 검은색 옷을 입고 뛰었으니......피곤에 지친 몸으로 화물차를 운전하던 그가 어찌 우릴 볼 수 있었겠소. 참으로 우리가 멍청했소. 참으로......"
말을 잠시 중단한 그는 후회 막심하다는 듯 연달아 탄식을 내뿜고 있었다.
"그런데 말이오. 화물차 운전사는 우리를 치고 도망쳤다는 죄책감에서 아직까지 벗어나지 못하고 있소. 그만 잊어버리면 좋으련만......자기 집에 우리의 영전을 차려놓고 아침저녁으로 밥 한 공기와 약간의 찬을 차려놓고 울어댄다오. 바보 같이......그런다고 우리가 살아 돌아오나. 요즘 같은 세상에 그토록 여려 빠져 가지고 어떻게 살아가려고......멍청한 놈! 그렇게 물러 쳐 먹었으니 마누라가 도망가 버렸지. 하여튼 우리는 그 자가 우리의 영전을 치우지 않고 있기 때문에 하늘나라에도 가지도 못하고 있소. 기왕에 죽은 몸 하루빨리 저승으로 떠나야 할텐데, 언제 까지 그러고 있을지......놈의 뜻이 가상하다고는 하나 그래도 갈 사람은 가야 하는 것 아니겠소?"
"그랬군요!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허! 그것 참! 그래서요?"
"그런데 놈에게 커다란 위기가 닥쳤소. 바로, 오늘밤 우리를 치었던 그 장소를 그자가 지나가기로 되어 있소. 그런데, 그 곳이 지난번 수해 때 지반이 약해지며 도로 밑 땅속에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커다란 동공이 생기게 되었소. 지금까지는 대형차가 지난적이 없어 무너지지 않았으나, 오늘 그자가 무거운 석재를 가득 싣고 그 곳을 지나면 틀림없이 무너져 내릴 것이오. 그러면 어떻게 되겠소. 아래쪽은 천길 만길 낭떠러지인데......그런데 그자는 그걸 까마득히 모르고 있단 말이오"
"혀, 형님! 형님은 지금 천기 누설을 하고 있소. 그자의 명줄은 오늘까지란 것이 이미 정해져 있는데 형님이 어찌 그걸 막으려 한단 말이오.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그러시오?"
동생 귀신이 당황한 목소리로 말한다.
"동생! 부탁을 하려면 어차피 얘기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동생은 가만히 있게. 내가 모두 알아서 할 테니"
그러면서 다시 말을 잇는다.
"그래서 한가지 부탁을 하려 하오. 오늘 그자가 그곳을 통과하기 전에 우리 대신 그곳에 위험 표지판을 하나 세워 주었으면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그자에게 끼친 피해를 조금이나마 값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부탁하는 거요. 그리고 그자의 처지가 너무 딱하지 않소? 지금 그가 죽는다면 그의 노모와 아이는 어떻게 되겠소. 부디 내 부탁을 거절하지 말아주시오"
"안되오. 절대 안되오. 어찌 하늘의 뜻을 거스르려 한단 말이오"
동생 귀신이 격앙된 목소리로 말한다.
"동생! 염려 말게. 하늘의 뜻이란 게 어디 있는가. 어차피 이 일이 끝나면 우리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영혼이 아니던가. 더 이상 무슨 미련이 남아 있겠는가. 모두 다 처음 왔던 곳으로 가게 되는 것을......"
"아니! 형님이 그걸 어떻게 아슈? 말끝마다 형님이 말하는 그 처음 왔던 그 곳은 대체 어디란 말이오? 아직 가보지도 않았으면서......"
"자네 우리가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기 전에 어디서 왔는지 아는가?"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겠소."
"허공에서 왔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왔다는 말일세."
"쳇!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자네 이 우주의 끝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노 코멘트요. 내가 형님의 그 말도 되지 않는 개똥 철학에 또 넘어 갈 줄 알았수? 흥! 어림없지."
"우리가 살았던 지구가 속해있는 은하계에는 태양과 같이 스스로 빛을 낼 수 있는 별들이 천억 개나 된다네. 그리고 또 그 천억 개의 은하가 모여 우주를 이루고 있네. 실로 어마어마하지. 어디 그 뿐인가? 그 우주 천억 개가 모인 아직 이름이 붙여지지 않은 거대한 천체가 또 있다는 사실일세. 정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야"
"듣기 싫소. 농사꾼이었던 주제에 어디서 주워 들은 것은 있어 가지고......흥!"
"그런데 말이야. 이 거대한 천체의 끝은 그 끝을 모르는 허공으로 되어있다네. 끝없이 이어지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세상만사 모든 것들이 바로 그 곳에서 시작되고, 또, 그 곳에서 끝나게 되어있지. 우리가 갈 곳이 바로 그 곳일세."
"그러면 우리가 죽자마자 만났던 염라대왕과 옥황상제는 뭐란 말이요?"
"그건 허상이야. 실제로는 없는 헛것 들 이라구"
"뭐요? 헛것이요? 아니! 염라대왕에게 끌려가 그렇게 치도곤을 당해 놓고도 그 것 들이 모두 헛것이었다 이말 이요?"
"그렇다네"
"허! 헛소리도 어느 정도 해야지"
"우리가 겪은 그 모든 것들은 우리가 인간 세상에 있을 때 머릿속에 저장되어있던 기억들이 잠시 재생되는 과정을 거쳤던 것뿐일세"
"뭐, 뭐요? 허허......!"
동생귀신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허탈한 웃음을 웃는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가 본 것이 어디 염라대왕과 옥황상제뿐이던가? 예수, 부처, 알라 등등. 인간들이 만들어낸 신이란 신들은 모두 만나 보았지 않은가. 하늘에 웬 신들이 그렇게 많지? 그들은 한결같이 모두 자기가 유일신이라 그러지 않던가? 하다 못해 한쪽 눈밖에 없는 몽달귀신마저 자기가 세상에서 오로지 하나밖에 없는 신중의 신이라고 떠들고 다녔었지. 그 것 보게. 그 것으로 그 모든 것들이 인간들이 만들어낸 인간들의 의식 속에서만 존재하는 허구이고, 또 허상이라는 걸 말해 주는 것일세. 모두 헛것을 본 것이야"
"달리는 양반! 저 형님의 헛소리에 절대 넘어가지 마슈. 저 형님은 이승에 있을 때부터 저렇게 말도 되지 않는 괴변을 늘어놓는 것을 즐기고는 했단 말입니다. "
동생귀신이 혀를 홰홰 내두르며 말한다. 나는 언제 턴가 그 들이 주고받는 대화에 푹 빠져 있었다. 어느새 무섬증도 씻은 듯 사라졌다. 그저 친숙한 사람들이 주고받는 대화를 듣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생전에 마을 사람들은 저 형님을 '개변가'라 불렀지요. 흐흐! '개변가'란 '괴변가' 의 발음이 변해서 만들어진 말이지요. 말이 좋아 '괴변가' 지. 실은 개의 변, 즉, 개똥철학을 말하는 것 아니겠소? 허구 헌 날 개똥 노래나 부르는 사람을 무어라 하겠소. 바로 실성한 사람을 두고 말하는 것 아니겠소? 흐흐!"
"뭐? 내가 미친 사람? 예끼! 이 사람. 그럼 자네는 괴테나 소크라테스 이런 사람 모두를 미친 사람 취급하는 겐가?"
"아니! 그럼, 형님을 소크라테스와 동일선상에 놓겠다는 건가요? 언감생심도 유분수지. 흐흐! 그러니 마을 사람들에게 '개변가' 소리나 듣는 게지요. 이제 아시겠소? 그러니 말도 되지 않는 개똥 철학일랑 이젠 제발 그만 좀 하시라는 이 말씀이외다"
"허어......"
형님 귀신이 할말을 잃은 듯 허탈한 웃음을 웃는다. 잠시, 침묵이 흐른다. 그런데,
"자, 잠깐! 달리는 양반! 잠깐만 멈추시오"
갑자기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거기 잠깐 서시오. 여기서부터는 송전탑이 길 과는 다른 방향으로 빠져나가게 되어 있소. 송전탑에서 나오는 전자파가 없으면 당신과 소통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 지......."
영문을 몰라 말끝을 흐리며 물었다.
"본래는 인간과 귀신은 서로간에 소통을 할 수 없게 되어있지요. 그런데 딱 한가지 주파수로는 인간과 소통이 가능하답니다. 우리는 평소에는 인간들이 듣지 못하는 주파수로 얘기를 하지요. 헌데, 이 송전탑의 전자파가 우리가 하는 말의 주파수를 인간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주파수로 변이를 시켜 버린 것입니다. 물론, 모든 송전탑에서 발생되는 전자파가 그 주파수를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지요. 송전탑에서 흐르는 전류의 양과 전압의 세기가 맞아 떨어졌을 때, 우리들이 대화하는 주파수를 변이 시킬 수 있는 전자파가 발생 하게 되는 것이랍니다"
"아......!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하게 이해는 할 수 없었지만 하여튼 그런 게 있을 줄이야. 까마득히 몰랐던 사실을 새롭게 알았다.
"우리도 처음엔 몰랐소. 동촌 마을에서 달리고 있는 당신을 발견하고는 우리도 뒤따라 뛰고 있었지요. 우리들끼리 잡담을 주고받고 받으면서 말입니다. 설마하니 우리들의 얘기가 당신에게 전달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말입니다. 그런데, 바로 송전탑 밑에서 들키게 된 것이지요"
그랬었구나. 어쩐지 뒤통수가 스멀스멀 해지며 자꾸 불안한 생각만 들더라니......이제까지의 모든 상황이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제가 부탁드린 것 해 주실 수 있겠소?"
"예?"
"아까 도로에 위험 표지판 세워달라는 부탁을 드렸었지 않소"
"아! 그것 말입니까? 예, 물론, 해 드릴 수 있지요. 있구말구 요"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뭘 그 까짓 것 가지고......"
"아닙니다. 아니 에요. 실은 우리 귀신들은 지푸라기 하나 옮겨 놓지 못한답니다. 그저 혼만이 있을 뿐, 육체는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귀신이 사람을 해쳤다는 얘기는 그저 이야기 속에서 나오는 이야기일 뿐이지요"
"......"
"기왕 부탁하는 김에 한가지 더 부탁드리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무슨......?"
"그 트럭 운전사에게 이제 그만 우리를 놓아달라는 부탁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 사람이 우리를 붙잡고 있는 한 우리는 자유롭게 떠날 수가 없답니다. 영전을 치워달라고 해 주세요."
"음, 그거야 뭐 어렵지 않지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가만있자. 보답으로 뭘 해 드리고 싶은데 무엇으로 해드려야 되나...... 옳지! 뭐든 알고 싶은 것이 있으면 한가지만 물어보시오. 내 답을 해 드리지요"
"네?"
"알고 싶은 것 말입니다. 우리 영혼들은 비록 지푸라기 하나 옮길 힘은 없지만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은 모두 알고 있답니다. 어떠한 것도 좋습니다"
"뭐든지 요?"
"예"
"한가지만 요?"
"예"
"음. 가만있자. 뭘 알아보나? 옳지! 그럼 로또 복권 일등 당첨 번호도 알 수 있나요?"
"흐흐흐! 역시 돈이군요. 돈......그거 좋지요. 물론 알 수 있습니다. 있구말구 요."
"정말이오?"
"그럼요"
"설마......"
"설마 라니요. 제가 누구입니까? 귀신 아닙니까. 귀신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 그렇군요. 그럼 알려 주십시오."
"좋습니다. 허나 알려 드리기 전에 한가지 살펴보아야 할게 있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시오."
한동안 침묵이 흐른다.
"아, 이런! 안되겠소. 절대 알려 드릴 수 없소."
"네? 왜요?"
"복권 번호를 알려 드리는 것은 아주 쉬운 일입니다만, 헌데 그 것이 말입니다. 그 복권에는 돈만이 있는 게 아니라 엄청난 재앙도 같이 붙어 있군요. 안되겠어요. 재앙을 당신에게 드릴 수는 없지요. 로또는 포기하는 게 현명할 것 같습니다"
"그, 그럴 리가......그러면 그 재앙을 떼어내고 주시면 되지 않습니까?"
"제겐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알고 있는 것을 알려드리는 능력밖엔 없습니다"
"아! 이런......좋다 말았군요. 그것 참, 너무 아쉽군요. 그런데 그 재앙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나요?"
"입에 담을 수 없을 만큼......모르는 게 좋을 것이오"
입맛이 쓰다. 얼씨구나 했는데. 제기랄! 실망이 크다.
"너무 실망하지 마시오. 보아하니 부러울 게 없을 분 같은데 욕심이 많으시군요. 자식들 공부 잘해 좋은 대학에 다니고 있고, 재산도 부자라고 할 수는 없으나 그리 부족해 보이진 않는데 더 이상 무얼 더 바라십니까?"
젠장! 역시 귀신이 맞긴 맞나보다.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나의 신상을 훤하게 파악하고 있다.
"다다익선이라고 많을수록 좋지 않겠습니까?"
"흐흐흐! 그럴까요?"
"......"
"자식들이 불행해 지는 것을 바라십니까?"
갑자기 엉뚱한 질문을 한다. 세상에 제 자식의 불행을 바라는 부모가 있단 말인가?
"무슨 말씀이신 지......."
"자, 잠깐! 달리는 양반! 저 형님의 개똥 철학이 또 나오기 시작했소. 말려들지 마시오."
가만히 듣고있던 동생 귀신이 황급히 끼여들며 말한다. 하지만 형 귀신은 전혀 아랑곳없다는 듯 자신의 말을 계속한다.
"돈이란 게 무엇이요? 돈이란 이 세상을 행복하게 살아가는 데에 있어 한가지 꼭 필요한 조건에 불과하오. 행복의 조건에는 돈보다 훨씬 우위에 있는 조건들이 많이 있지요. 자식에게 많은 재산을 물려주는 것은 재앙을 물려주는 것이나 마찬가집니다. 그 말에 수긍을 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 하드래도 자식이 누려야할 가장 중요한 행복 중 두 가지를 무참하게 빼앗아 버리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오."
"두 가지요?"
"그렇지 않겠소? 재물에는 모으는 재미, 쓰는 재미, 그리고 베푸는 재미, 이렇게 세 가지가 있다 생각하오. 그런데 자신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닌, 부모로부터 많은 재산을 물려받게 된다면 모으는 재미는 당연히 모르게 될 것이며, 모으는 재미를 모르니 베푸는 재미 또한 알 턱이 있겠습니까? 재물의 소중함을 모르는 사람은 남에게 베푸는 따위의 행동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 법이니까요. 결국엔 모으는 재미와 베푸는 재미는 모르는 체 쓰는 재미의 달콤함에만 빠져들게 되겠지요. 그러나, 몸에 좋은 달콤한 꿀도 계속해서 먹게되면 언젠가는 독이 되어 돌아오고 말지요."
"아! 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에 수긍이 갔다. 돈을 모으는 재미 또한, 쓰는 재미 못지 않게 쏠쏠한 쾌감을 준다는 것은 내 자신의 경험에 의해서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많이 벌면 많이 버는 대로 적게 벌면 적게 버는 대로 알 콩 달 콩 저축하는 재미를 맛보며 지금껏 살아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끔은, 정말 가끔은 일확천금의 돈벼락을 한번 맞아 봤으면 하는 꿈을 꾸어 본 것 또한 사실이다.
"음식에 맛이 여러 가지가 있듯 인생에도 여러 가지의 맛이 있습니다. 단맛 쓴맛 신맛 매운맛, 고소한 맛 심지어 구린 맛까지 있지요. 이런 다양한 맛들을 골고루 편식 없이 맛보며 살아가는 인생이 참 인생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흐흐흐! 형님, 형님이 지금 한 말은, 결혼식 주례사에서 베껴 온 것 맞지요?"
동생 귀신이 빈정거린다.
"아까 당신이 나랏님을 딱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던데, 흐흐! 그것 보시오. 나랏님 이라 해서 좋을 것 하나도 없습니다. 천운을 타고나야 된다는 나랏님 되었으니 그보다 더한 명예가 어디 있겠냐 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백성들의 존경을 받지 못하는 나랏님이 그게 무슨 명예가 되겠습니까? 오히려 나랏님 되지 않았으면 훨씬 더 존경받았었을 나랏님들도 많이 있지요."
형 귀신은 동생 귀신의 비아냥거림에도 전혀 개의치 않고 능글능글 웃어 가며 자신의 할말을 다 해 버린다. 동생 귀신은 그러한 형이 몹시 못 마땅한 듯 킁킁거리는 콧방귀 소리가 요란하다.
"주례사가 너무 길었나 보구려. 동생의 볼따구니가 풍선처럼 부풀어올라 있는 것을 보니. 흐흐! 이젠 가야 할 시간이 된 것 같소. 내 부탁 잊지 마시오."
부탁과 함께 말소리가 뚝 끊기며 조용해진다. 한참 동안을 기다렸으나 다시는 말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 그들은 이곳을 떠나 간 것이다. 어디로 간 것일까. 궁금증과 함께 왠지 모르게 허전한 생각이 든다. 지금껏 그 들과 주고받은 대화는 귀신이 아닌 오래 전 동호회에 가입하여 활동할 때, 동호회 회원들과 함께 대화를 주고받으며 달릴 때의 그 기분이 들었다.
한동안을 더 달린 끝에, 그 들이 표지판을 세워달라는 부탁 받은 지점에 왔다. 파로호로 흘러드는 샛강의 다리 바로 앞이었다. 그다지 넓은 샛강이라 할 수는 없었으나 도로에서 꽤 깊숙하게 들어가 있는 것이, 만약 차가 그 곳으로 굴러 떨어지게 된다면 결코 목숨을 부지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행이 동촌 마을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의 카센터에서 위험표지판을 하나 구할 수 있었다. 표지판은 매우 낡아 형광 페인트가 모두 벗겨져 있었다. 카센터 주인에게 페인트 가게가 있는 곳을 물어 형광 페인트를 사서 덧칠을 하여 표지판 설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반대편 차선으로 접어들 때였다. 저 쪽에서 차가 달려오고 있다. 헤드라이트 불빛의 위치와 엔진소리로 보아 승용차는 아닌 듯 싶었다.
"혹시?"
번개처럼 한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간다. 위험 표지판을 설치 해 놓은 반대 차선으로 건너가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기다렸다. 예감은 적중했다. 트럭이었다. 트럭은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런데, 트럭이 표지판 앞에서 갑자기 핸들을 꺾는다. 그리고는 내가 서 있는 곳을 향해서 돌진한다. 너무나 갑작스런 상황에 어쩔 줄을 몰랐다. 강렬한 라이트의 불빛이 눈을 찌른다. 헉! 이럴 수가! 나도 모르게 다리 아래로 몸을 날렸다. 몸이 공중으로 붕 뜬다.
"으 아 아 아 아......악!"
진달래가 피어 있다. 개나리와 벚꽃도 피어있다. 커다란 벚꽃 나무에서 벚꽃이 하나 둘씩 떨어지기 시작한다. 가느다란 미풍이 스쳤기 때문이다. 돌연, 미풍이 돌풍으로 변한다. 벚꽃 이파리들이 어지러이 날리며, 돌풍은 다시 소나기가 되어 억수로 퍼붓는다. 얼마나 퍼부었을까. 벚꽃 이파리는 낙엽이 되어 세상을 굴러다닌다. 하필이면 낙엽일게 뭐야. 빌어먹을......흩날리던 낙엽들이 눈보라로 바뀐다. 허공에 분분이 흩날린다. 뱅글뱅글 눈앞을 돈다. 눈 폭풍이다. 세상이 온통 하얗게 변한다. 아! 아! 아! 어지럽다.
* * * * * * * * *
"김 서방!"
아! 어디선가 아련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꿈속에서일까? 아니면 다른 세상에서일까......목소리는 파도치는 메아리가 되어 머릿속에서 퍼져간다.
"아니! 이 사람. 김 서방! 무슨 꿈을 그렇게 험하게 꾸는 겐가? 이제 그만 일어나게. 저녁에 달리러 나간다 하지 않았던가?"
장모님의 목소리다. 장모님이 거세게 나를 흔들고 있었다.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눈을 떴다. 장모님의 걱정스런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아! 그렇다면 꿈? 모두가 꿈이었단 말인가? 하지만......꿈이라 하기엔 기억들이 너무 생생하다. 그러나 다행이다. 천만 다행이다. 만약 꿈이 아니었다면? 으흐흐!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자면서 무슨 고함을 그렇게 질러대는가? 식은땀도 비 오듯 하고......아무래도 자네의 몸이 많이 약해진 것 같네. 그럴 만도 하겠지. 이 더운 뙤약볕에서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녔으니......이것 좀 보게. 장작개비 마냥 비쩍 말라 가지고. 아무래도 그냥 둬선 안되겠네. 오늘 닭 한 마리 잡아 자네 몸보신 좀 시켜야겠네. 가만히 있자! 어떤 놈을 잡아야 하나?"
말을 마친 장모님이 마당에서 놀고 있던 닭들을 살펴보기 시작한다. 그러자 닭들은 말을 알아듣기 나 한 듯 슬금슬금 장모님 눈치를 살핀다.
"옳지! 저 실한 수탉으로 하는 것이 좋겠군. 저 놈이 요즘 바람기가 돌았는지 자꾸만 옆집 암탉들을 넘본단 말씀이야. 제 놈의 조강지처를 열씩이나 두고도 자꾸만 옆집 담 장을 넘는다구. 잘 되었다. 내 오늘 저 놈을 절딴 내 버리고 말지."
말을 마치더니 헛간에서 닭 잡을 때 쓰는 긴 장대 올가미를 꺼내온다. 아무래도 장모님의 말은 사위인 나에 대한 일종의 경고 성 말인 것 같기도 하다. 딸을 놔 두고 다른 여인네에게 음심을 품지 말라는.......하지만 나는 결백하다. 마누라 외엔 결코 다른 여인네 손목 한번 잡아 본적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음 속으로도 그런 적이 없었느냐고 물으면 거기에 대해선 할 말이 없다. 마음 속으로야 수 십 명, 아니 어쩌면 수 백 명도 넘을만한 숫자의 여인네를 범해 왔으니 말이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수탉의 고깃살이 밥상 위에 올라와 봐야 목구멍에서 재대로 넘어 갈 것 같지 않다.
"장모님! 괜찮습니다. 약하다니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보기에는 이렇게 말라깽이처럼 보여도 근육은 무쇠처럼 탄탄하답니다. 그리고 한 마리밖에 없는 종 계를 보신용으로 써서야 되겠습니까. 보아하니 체구도 우람하고 털에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것이 종 계로서 손색이 없어 보이는데요"
"잘못 보았네. 저 얼간이는 덩치만 컷다 뿐이지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허 풍선일세. 색정 들린 걸귀처럼 뻔질나게 옆집 담 장은 잘도 넘어대지만 한번도 옆집 암탉들을 눌러대는 것을 보질 못했네. 눌러 대기는커녕 담 장을 넘자마자 저 집 수탉에게 대가리를 쪼이고서 피를 질질 흘리며 쫓겨오기 일쑤지. 맨 날 그렇게 당하면서도 소갈머리 없는 저놈은 기회만 있으면 담 장을 넘어간단 말이야. 쓸개 빠진 놈."
장모님께 미운 털 박힌 수탉은 기어코 밥상 위에 올려지고야 말았다. 양다리와 모가지가 댕강 잘려 나간 채, 제 놈 생전엔 먹어보지도 못했던 인삼과 대추, 마늘을 뱃속에다 가득 채우고서......
"많이 먹게. 씨암탉은 아니지만, 오래 묵은 닭은 아니라서 맛이 괜찮을 것일세. 그러나 저러나 자면서 왠 비명을 그렇게 질러 대는가. 원! 큰일나는 줄 알았네."
"저이는 가끔 그래요. 어떤 날인가는 한밤중에 자다말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대서 옆집 아저씨가 무슨 큰일이 났나해서 그 밤중에 전화를 다 했더라니까요 글쎄. 어 휴~ 챙피해서 죽는 줄 알았어요."
옆에서 닭 날개를 뜯고있던 아내의 고자질이다. 아내는 닭 날개는 언제나 제가 먹어 버린다. 남자가 닭 날개를 먹으면 바람을 피운다나 어쩐다나.
"악몽을 꾸었어요. 글쎄, 꿈속에서 달리고 있는데 귀신을 만났지 뭐유. 뭐, '마라톤 형제' 라나 뭐라나 하는 귀신을요."
"뭐? 마라톤 형제? 김 서방! 자네 지금 마라톤 형제라 했는가?"
장인이 눈을 크게 뜨며 묻는다.
"예. 장인 어른. 그런데 왜 그러십니까?"
"자네 저 건너 동촌 마을의 '마라톤 형제'를 전에부터 알고 있었는가?"
"동촌 마을의 마라톤 형제라니요? 아닙니다. 전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장인어른......아니? 그렇다면, 동촌 마을에 '마라톤 형제'가 실제로 살고 있단 말인가요?"
"죽었네. 작년에......사릿 재 다리 앞에서 뺑소니차에 치어 죽었네"
"예 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럴 리가......그럴 리가......그렇다면 꿈속의 일들이 모두 사실이란 말인가? 설마......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어디 꿈 얘기를 해보게"
장인은 무언가 집히는 게 있다는 듯 호기심 어린눈으로 말했다. 나는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남아있는 꿈 얘기를 한 장면 한 장면 모두 세세하게 얘기를 하였다. 그 들과 주고받은 대화 내용 하나 하나 까지 모두 얘기를 하였다. 얘기를 듣는 동안 장인 장모의 입에선 놀라움과 감탄사가 이어졌다. 특히 동생 마누라의 재가 문제에 이르러서는 무릎을 치며 탄복을 하였다.
"이럴 수가! 모두 사실이야.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가 사실이네."
연이은 장인 장모의 감탄사가 이어졌다.
"허 어! 어찌하여 그들은 일면식도 없었던 자네에게 현몽을 하였단 말인가? 참으로 기이한 일일세.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된 다는 말인가? 그것 참. 알 수 없는 일이네.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야"
장인은 연달아 '알 수 없는 일이야'를 되 뇌이고 있었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도대체 꿈과 현실이 일치된다는 자체도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 하드래도 왜 하필 그 들과는 전혀 무관한 나의 꿈속에 나타났는가 말이다. 내가 그 들과 같은 마라톤을 취미로 갖고 있었기 때문일까? 아마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그들은 그들 말대로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오늘 내가 그 길을 달릴 것이라는 것을 알고있었을 게다. 그래서 내 꿈에 나타나 그 부탁을 하려 했는지 모른다.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그게 맞다는 확신이 섰다. 그렇다면? 그렇다면......비록 꿈 이었을망정 나는 그들과 약속을 한 것이다.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약속은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어디 가려는 겐가?"
"예, 장인어른. 그들과 한 약속을 지키려 구요"
"약속? 음! 약속이라! 그래, 약속은 지켜야겠지. 꿈속 귀신과의 약속이라......"
...........끝까지 읽어 주신 분이 있다면 초 절정의 인내심에 경의를 표합니다. 기왕 시작한것이라 끝까지 써 보긴 했는데 무슨 재미가 있을런지............
노을 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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