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우리를 험한 길로 보내실 때는 질긴 신발을 주신다.- 코리 텐 붐
[고린도전서 10장 13절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얼마 전 로스앤젤레서에 있는 바욜라(Biola) 대학으로부터 강연을 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캐시 맥레이놀즈 교수는 자신의 수업에 와서 "고난과 장애의 신학"에 대해 강연해 달라고 부탁했다.맥레이놀즈 박사는 나에게 65명의 학생들에게 하나님이 어떻게 고난으로부터 구해 주시는지에 대해 강의해 달라고 했다. 나는 내 소개를 하기도 전에, 벽이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것 같은 익숙한 감각을 느꼈다. 폐쇄공포증, 그것은 나의 오래된 적이다. 새벽 2시쯤 진통제의 효과가 떨어져 잠에서 깼을 때 밀려오는 느낌과 똑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그 무덥고 캄캄한 한방중에 담요조차 차버릴 수 없다. 게다가 오랜 시간 한 자세로 누워 있어서 뻣뻣해진 근육의 고통이 밀어닥친다. 남편 켄은 옆에서 단잠을 자고 있고 나는 그 고통이 무서워서 다시 잠을 청해 보려고 노력하곤 한다. 나는 늘 하던 대로, 나 자신의 이야기로 강의를 시작했다. 체사피크 만에서의 더운 여름날 아침, 뗏목, 다이빙, 충돌, 상해, 볼티모어 병원에 있는 척추 손상자를 위한 특수 침대..... 오랜 치료 기간, 상상도 못했던 사역의 시작. 거기서부터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질문으로 들어갔다. '어떻게 하나님이 내 인생에 이 모든 일을 허락하실 수 있는가?' 나는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척추 보조기를 바로 착용했고, 조심스럽게 자세를 잡았다. 하지만 그날은 몇 번이나 자세를 바꾸었는데도 통증이 심하게 왔다. 정말이지 너무나 아팠다. 나는 강의를 시작한지 15분 되었을 때에 너무나 힘들었다. 어쨌던 나에게 할당된 45분의 시간을 얼렁뚱땅 해치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나의 힘들었던 강의를 통해 신비로운 일을 행하셨을 수도 있다. 잠깐 휴식 후 한 학생의 질문이 나의 가슴 깊이 사무쳤고 내 신경을 건드렸다. "선생님은 고통의 시기를 겪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제 생각엔 그 고통이 선생님의 주된 사역에 집중하는 데 매우 방해가 될 것 같은데요, 왜 하나님은 이런 일을 허락하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사지마비 상태로 사는 동안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언어로 "왜 하나님이 이런 일을 허락하시는가?"라는 질문을 받아 왔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 순간에는 대답을 하기가 몹시 힘들었다. 목이 메고 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대답을 시작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하지만 그만두어야 했다. 잠시 숨을 내쉬며 마음을 가다듬어 보았지만, 콧물이 흐르고 아래쪽 눈꺼풀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렇다. 나는 할 말을 잊었고 학생들도 그것을 알았다. 이제 어떻게 할까? 난 구경거리가 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계속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은 거의 울면서 대답을 해야 했다. "저는 그 문제에 대하여 여러 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몇 십 년 동안 저는 아프지 않았습니다. 정말 그랬어요. 물론 저는 사지마비 환자이고 그래서 참 힘들게 살고 있지만, 대개는 힘든 걸 잊고 지냈습니다. 그냥 익숙해진거죠. 손을 움직인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거의 잊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이런 고통이 찾아오니, 마치 하나님께서 다시 새로운 고난을 저에게 주시는 것 같았어요. 정말 생소하고 예전에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고난 같은 느낌이랍니다. 왜 그럴까요? 저도 모르겠어요 아마도, 아마도 하나님이 이런 일을 허락하시 것은 여러분이 45분 동안 들은 이야기들이 진부하고 상투적인 이야기로 들리지 않도록 하기 위함인 것 같습니다.[인생의 최고의 목적과 가치는 자기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것인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난을 주셔서 그 사명을 잘 감당하게 하시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자신이 직접 고통을 느껴 보지 않고서 어떻게 고난에 대해 가르치고 배울 수 있겠는가? 지금 나의 가장 큰 적은 사지마비에 흔히 따라오는 일반적인 통증과 아픔이 아니다. 새롭고 심술궂은 적이 나의 삶 속에 침입해 들어 왔다. 그것은 처음에는 내 목을 아프게 찌르는 창으로 나타났다가 내가 그 전쟁터에 적응하기 시작했을 때 새로운 전선, 곧 등 아랫부분을 한층 더 세게 공격해 왔다. 지난 2년 동안 겪어 온 육체적인 고통의 끈질긴 공격은 상상을 초월했다. 잠시도 휠체어에 앉아 있을 수가 없기 때문에 나는 사무실에 있는 침대에서 일을 했다. 근육이완제도 효과가 없다. 진통제 애드빌 피엠(Advil PM)이나 비코딘(Vicodin), 또는 그보다 더 독한 약들도 마찬가지다. 예전에는 반대쪽으로 눕혔지만 내가 그 자세를 더 이상 견디지 못해서 지금은 2시간 동안 반듯이 누워 잔다. 그리고 다시 새벽 4시에 잠이 깬다. 그때는 오전 7시 30분에 내 친구들이 올 때까지 그냥 그 상태로 있으려고 한다. 심한 아픔을 겪고 있을 때는 예수님에 대한 감상적이고 달콤한 묘사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뿐더러 특별한 감동을 주지도 못한다. 당신은 아마도 전쟁에 능한 전략가이자 용사이신 예수님을 원할 것이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위험하고 때로는 번잡한 일상생활의 참호 안에서 내 곁에 계시는 전쟁터의 예수님이다. 나를 방문한 밥 목사님은 "주 하나님, 하나님은 생각만으로도 조니를 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실 수 있습니다."라 기도한 후, 시편 57편 2-3절을 축도하듯이 읽으셨다.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그가 하늘에서 보내사 나를 삼키려는 자의 비방에서 나를 구원하실지라." 나는 충분히 오랫동안 어둠의 영들로부터 맹열한 추격을 받았다. 켄과 나는 고통의 속에서 하나님의 구속을 바라보기로 결심했다. 고통은 축복의 상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축복이다. 그것은 낯설고 어두운 친구지만, 그래도 친구다. 어쨌던 하나님의 검열의 손을 통과했으니 말이다. 그것은 환영받지 못하는 손님이지만 , 그래도 손님이다. 그것이 나를 예수님과의 더 가깝고 친밀한 교제의 장소로 이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마치 하나님의 왼손을 붙잡는 것처럼 고통을 붙잡는다. 어쩌면 구속의 사실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치유가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물론 나는 고통을 없에 달라고, 그 고통이 끝나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고통을 견딜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그것으로 부터 유익을 얻을 수 있는 은혜를 달라고, 고통을 찬양의 제물로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한다. 이글을 쓰는 지금, 하나님은 나를 치유하시는 것이 아니라 잡아 주시는 쪽을 택하셨다. 고통이 심할수록 하나님은 더 꼭 안아 주신다. 그것이 앞으로 말하고 싶은 진리이다.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고 계신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