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명여자대학교 박물관에는 동양 여러 나라의 의복이 전시되어 있었다. 우리는 그 의복을 더욱 값져보이게 하는 자수 공예를 보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뛰어난 작품들에는 세월이 흘러도 전혀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 세련미가 있었다.
1481년대의 네모난 통형 지석 앞에서 “보통 가문은 아니었을 것이라느니, 장례를 치르면서 도자기를 구울 여유가 있었을까? 그 때는 장례 기간이 매우 길었다 ”는 등의 여러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집에 와서 안내문을 보니 그 지석은 ‘대표유물’로 분류되어 있었으며 ‘분청사 선각 초문 성화17년명 통형 지석’이라는 긴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제작 연대가 기록되어 있어서 선각분청자의 제작이 15세기 후반에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귀중한 작품이라고 한다. 1년 동안 답사를 다니면서 제법 귀한 작품을 고르는 안목도 생긴 모양이다. 특이하다며 몰려가 이야기를 나눈 것이 대단한 작품이니 말이다.
나전 칠기의 작품들을 둘러 보며 전복껍질을 모아가면 값을 쳐준다느니, 우리나라 자개가 빛깔이 오색영롱하다느니,
여자들은 다 가지고 싶어해서 집집마다 자개장농이 다 있다느니 하면서 호감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온통 자개로 뒤덮여 있고 온작 복을 비는 기원이 쓰여 있는 작은 장농을 보았는데 아름답기는커녕, 욕심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아니 욕망을 채 표현하지 못함을 아쉬워하는 천박함이 느껴졌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아주 남아도는 돈을 주체하지 못함이 철철 넘치는구만!”이라고 내뱉었다. 대학생인 도슨트가 무안해하며 웃었다.
도슨트의 해설을 들으니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어 유익하기는 했으나 너무 빠르게 진행해서 작품들을 천천히 돌아보지 못한 아쉬움이 남았다. 아쉬움을 안고 우리는 백범 기념관으로 향했다.
백범 기념관에 일찍 도착해서 교수님을 기다리는 동안 기념품 판매대에 매달려 구경을 했다. 한글과 태극무늬로 디자인 된 넥타이가 퍽 인상적이었다. 비잉 돌며 구경하다가 신용카드 크기의 거울 뒷면에 쓰인 글을 보고 의아해 했다.
“배우는 것은 어려운데 행동하기는 쉽다” 우리가 평소에 알고 있는 상식을 뒤엎는 글이었다. 행동하기가 쉽고 배우기가 어렵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참으로 맞는 말이다. 옳다고 느끼는 순간 행동하기란 쉬운 일이지만 그 느낌과 의지는 가르친다고 배울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참으로 배우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혼자 열심히 구경하고 있으니 다른 회원들이 나를 부른다.
“거~ 살 것도 아니면서 뭘 그렇게 열심히 보쇼?”
“원래 하수는 본답사 보다는 기념품점에서 노는 걸 더 즐긴답니다~”*^^*
그러는 사이에 교수님께서 도착하셨고, 그곳에서 근무하는 우리 문화교양학과의 선배님인 홍소연 자료실장님이 직접 해설을 해주셨다. 1919년 이후의 백범 선생의 행적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으나 그 이전에 선생이 교육에 열을 올리고 있었던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아서 안타깝다고 하셨다. 그 분의 지시에 따라 평소에는 그냥 지나쳐 가곤 했던 영상자료실의 내용을 모두 보고,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만화로 꾸며놓은 동영상도 보았다. 그리고 백범 선생의 일대기의 설명을 들었다.
한 전시실에 백범 선생의 어머니 동상이 있었는데, 선생이 치하포에서 일본군 중위를 국모보수國母報讐로 처단하고 인천형무소에 갇혀있을 때, 그 아들에게 세 끼 식사를 먹이기 위해 온힘을 다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우아한 여인의 모습이 아닌 바가지에 찬밥을 담아가는 힘겨운 어머니의 모습에서 큰 뜻을 품은 아들을 살려내어 우리나라를 되살리려는 많은 어머니들의 강인한 의지를 보는 듯 했다.
백범 선생은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중에 아내를 잃었는데 그 비문이 특이했다. 하마터면 놓치고 지나갈 뻔 했는데 송찬섭교수님께서 지적을 해주셔서 자세히 보게 되었다.
‘ㄹㄴㄴㄴ해 ㄷ달 ㅊㅈ날 남 / 대한민국 ㅂ해 ㄱ달 ㄱ날 죽음 / 최준례 묻엄 / 남편 김구 세움’
ㄱㄴㄷㄹ 순서대로 1234를 나타낸다니 4222년 3월 19일에 태어나고 대한민국 6년 1월 1일 사망하였음을 알리는 비문이다.
다음 공간으로 가니 이봉창 의사가 활짝 웃고 있었다. 백범 선생이 조직한 비밀테러 조직인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에 가입하면서 쓴 선서문의 글씨체가 그의 호탕한 성격을 말해 준다. ‘나는 적성(赤誠:참된 정성)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首魁:악당의 최고 우두머리)를 죽이기로 맹세하나이다.'라는 선서를 하고 일왕 히로히토를 암살을 위해 떠나기 전에 찍은 사진이다. 백범 선생이 침통한 얼굴을 하고 있자 자신은 31년 동안 해보고 싶은 것을 다 해 보았고 의로운 일을 위해 떠나니 웃어달라면서 함박웃음을 지은 모습이라고 한다. 음......눈물이 핑 돌았다.
그 옆에는 윤봉길 의사가 권총과 수류탄을 들고 있는 결연한 모습이 보인다. 그의 선서문도 이봉창 의사의 선서문과 내용은 같은데 글씨체가 너무 깔끔한 것이 대조적이어서 웃음이 나왔다.
죽음을 각오하고 떠나는 의연한 두 분의 모습과 그렇게 두 젊은이를 사지로 몰아넣어야 했던 백범 선생의 찢어지는 마음이 전해져서 또 눈물이 핑 돌았다. 두 의사의 의거 덕분에 위기에 처해있던 독립운동의 열기가 되살아났고 백범 선생의 현상금은 60만원으로 껑충 뛰었다고 한다. 그 당시 중국 돈 1원은 은화였는데 그 무게가 25g이므로 60만원의 무게는 은銀 15ton이라고 한다. 2002년 현재 198억원이라니 일제의 충격이 얼마나 컸었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하는 금액이다.
훗날 백범 선생은 이봉창, 윤봉길, 아나키스트 백정기의 시신을 효창원에 옮겨 묻었으며, 안중근 의사의 시신을 찾아 묻기 위해 가묘도 만들어 두었는데 그것이 바로’삼의사 묘역‘이다.
다음 공간으로 가니 우리 힘으로 일제를 몰아내려는 ‘한국광복군’들의 훈련 모습이 보인다.
<특전용사의 노래>
비가 오나 눈이 오거나 거센 바람 휘몰아쳐도
바위같이 굳은 의지는 우리들의 기상이로다.
어서 가자 특전 용사야, 조국 강산 다시 찾으러
정의로운 총칼을 들고 앞을 향해 나아가리라.
대포 소리 땅을 울리고 원수 무리 쏟아져 와도
걸음마다 피를 흘린들 최후까지 싸워 이기리.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조국 땅을 밟는 그날에
원수들을 쫓아버리고 태극 깃발 높이 날리리.
외세가 들어오기 전에 우리 광복군이 일제를 몰아내고 독립을 하였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직접 그 일을 해내지 못한 그네들의 한숨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마지막 방에서 백범 선생이 1949년 1월과 3월에 세운 ‘백범학원’과 ‘창암학원’의 기념사진을 보았다. 꼬질꼬질한 상고머리의 아이들 수십 명이 쪼로록 몰려 앉아 있는 모습이 참으로 희망차 보인다. 백범 선생이 살던 시기가 평화로웠다면 아마도 백범 선생은 교수가 되었을 것이라는 홍소연 실장님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지게 하는사진들이다.
그리고 경교장에서의 암살, 국장 장면 등이 보인다. 한 쪽에 백범학원생 일동이 드린 만장이 늘여져 있다.
‘하라버지 이렇듯 변을 당하시와 / 급작ㅎ이 가옵시매 / 원통하기 더욱 끝이 없나이다.
하라버지 그렇나 저의 어린 것들은 / 가슴 속 깊이깊이 맹세하옵니다
그 성스러운 뜻을 이여 받들고저 / 하라버지 임의 뜨옵신 그 혼령이나마 / 하늘에 기리 안식하소서
어리오나 저의 백여 백범이 또 있사오니 (대한민국 三十一년 六월 二十六일)’
목이 메이고 눈물이 핑 도는 글이다. 하얀 비단에 쓴 삐뚤빼뚤한 아이의 글씨에서 또 다른 백범의 모습이 보인다.
홍소연님은 머리가 되기 위해 싸우지 말고 머리를 움직일 수 있는 발이 되기 위한 ‘爭足’을 강조하 백범일지의 영인본을 읽을 것을 권했다. 우리는 기념관을 나서기 전에 백범 동상 앞에서 기념 촬영을 했다.
답사를 끝낸 우리는 기념관 건너편의 음식점에서 점심을 먹었다. 밥을 먹으면서 시험정보와 성적 이야기를 나누었다. 누가 보면 고시생들인 줄 알았을 것이다. 신입생 학우님과 교수님 그리고 홍소연선배님이 밥값을 서로 내겠다고 다투기에 “제가 문화답사회 총무인데요!”라고 손들고 말해서 모두의 시선을 집중시켰고, “교수님이 사주시는 밥이 제일 맛있습니다!!!”로 마무리 지었다. 교수님께서는 기꺼운 마음으로 밥값을 내셨고, 우린 답사를 더욱 열심히 하는 것으로 밥값을 하기로 무언의 결의를 했다.
일 년에 한 번씩은 백범 기념관을 방문해달라는 홍소연님의 당부를 끝으로 우리는 헤어졌다. 돌아오는 전철에서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두 보람찬 답사라고 뿌듯해 했다~
첫댓글 오웃, 열심당원으로 메모하더니 오늘은 안날렸네요.
밥값은 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