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의 세월이여
박 기 태
지그시 눈을 감았다 떠보니
세월의 함성이 영글은 마당에
꽃대궁이 춤추던 그리움이 피어나고
서럽도록 그리운 이름들이
구석구석 배어있는 순결한 추억
100년의 세월이 흘렀는가
뒷모습 보이며 안부 없이 걸어도
너무나 낯익은 구름들
어언 한 세기의 바람결에
성황산 줄기따라 눈부시게 빛나고
항가산 턱에 고인 채
작은 울림으로 함께 한 세월이구나
백일홍 흩날리던 꽃바람
짙푸른 녹엽의 푸라타나스 그늘
엉금엉금 기어오르던 푸른 잔디
으스러지는 긴 세월의 열병으로
용트림하던 그 때 그 자리
태인초등학교
새로운 21세기를 향한 눈빛인가
항가산 등너머로 찬연한 태양
세세연년 뛰는 심장
작은 기적인 삶들 속에
100년의 세월 동안 뿌린 씨앗
1만 2천의 가슴마다 희망으로 고였으리
빛나는 역사 영원하리라
그 이름도 찬란한 태인초등학교
100살 맞이 생일이여.
박 기 태(시인. 소설가 : 호 柔川)
41회 졸업 月刊 <韓國詩> 詩. 季刊 <문학사랑><公務員文學> 小說 등단. “한국시문학대상” “문학사랑문학상” “노산문학상” 수상. <전북문인협회> <한국문인협회> <국제펜클럽한국본부> 회원
시집: <바람사이로 걷는 밤> <바람과 나비> <바람아 쉬어가렴> <꽃그늘 당신> 외 다수
갈 등
박 기 태
초여름 어느 날.
생각 밖의 친지의 방문을 받았다.
대한유도회 소속 향교 일을 보고 있고 마침 전북유도회 사무실이 옛날 전라북도청사 옆에 있고 모임이 있어 온 김에 부근에 사무실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기에 찾아왔다고 했다.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친지였다.
이 친구는 무엇보다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 있다.
1970년대 중반인가로 기억된다. 아들이 농촌 오지의 초등학교 분교에 다니는데 선생님에게 매를 맞은 일이 있어 그 선생님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고 형사사건으로 고소한 일이 있었던 괴물 같은 친구였다.
옆에서 그의 고등학교 동창들이 말려도 영 듣지를 않고 결국 고소를 한 것이다.
오늘날 같으면 학교에서 교사들의 체벌이 문제가 되고 있기에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나 그 시절에는 그 체벌 자체를 <사랑의 매>라고 하여 그렇게 문제시 되는 시절이 아니었다.
그렇게 말려도 듣지를 않아 정신병자의 행위가 아닌가 하는 의미로 매도하고 말았던 기억이 있었다.
내게도 그런 추억 같은 체벌이 있었음이 생각났다.
내가 그 많은 학교를 다니면서 선생님으로부터 체벌을 당한 일은 딱 한 번이었기에 더욱 잊을 수가 없는 사실이었다.
1948년 초겨울이라고 기억된다.
정읍시 태인초등학교 1학년 2반 교실.
교사(校舍)가 교무실이 있는 앞동을 전관이라고 하고 뒷동을 후관이라고 했을 것이다. 그 전관의 교무실 동편에 있는 교실이었다.
그날의 수업시간은 국어시간으로 기억된다.
담임선생님은 남자선생님 박✬문 선생님이었다.
그 당시 나는 국어책이 뒷부분 3분의 1이 전부 찢겨져 나가고 없었다.
교과서의 외형은 회포대 종이로 책가위를 하여 싸여 있기에 교과서의 외형은 찢겨진 것을 볼 수 없었고 내용을 펼쳐보면 다 찢겨진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지급받은 교과서를 받고서 얼마지 않아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외워버렸기에 사실상 내용은 전부 외우고 있었다.
당시 나는 맏이로 내 동생과 6년 차이라서 집에 가면 어머니는 밭일을 나가시고 나는 집에서 아기를 봐야 했다.
집에서 책보를 풀러놓고 공부를 하다보면 방바닥을 기어 다니는 동생이 달려들어 널려 있는 책을 찢어버려서 모든 교과서가 반절 가까이 찢어져 나가 내용이 없는 책들이었다.
그중에서도 국어책을 제일 많이 읽다보니 동생의 손길이 제일 많이 갈 수밖에 없어 많은 페이지가 찢겨져 나간 상태였다.
그날 수업시간에 선생님은 이어달리기 읽기를 하고 있었다.
누군가를 지명하여 어디서부터 읽으라고 하시면 다른 학생들은 책을 펴고 들여다보다가 선생님이 다시 다른 사람을 지명하여 그 다음부터 읽으라고 하고 다시 다른 학생을 지명하여 그 다음부터 읽게 하는 이어달리기식 읽기를 하고 있었다.
누구인가 이어서 나를 지명하여 나는 찢겨져 나간 책을 펴 들고 읽기 시작하는 것이다.
평소 다 외웠으니까 틀릴 일은 없는데 페이지가 끝나면 책장을 넘겨야했으나 나는 미쳐 그걸 생각지 못하고 넘기지 않고 그대로 서서 책을 펴든 채 외우기만 하는 것이다.
이상함을 감지하신 선생님이 다가오시더니 책을 빼앗아 펴보신다.
역시 찢겨져나갔기에 다른 페이지를 펴들고 외우는 것을 들키고 말았다. 그때 선생님 손에는 매가 들려 있었다. 나오라고 하시더니 그대로 종아리를 솔직히 무수히 맞았다.
당시 우리 동네에서 1학년생이 8명이나 되었고 우리 반이 5명이었다.
그날 8살 어린아이 종아리를 얼마나 맞았는지 지금 기억에 힘이 제일 좋고 나이가 나보다 3살이나 많은 친구가 나를 업고 학교를 나왔다.
그래도 집에 가서 말도 못하고 그대로 견뎌냈기에 교사의 체벌이 문제가 될 이유가 없었고 또 부모님이 알으셨다 해도 어떻게 하겠는가?
그 당시 선생님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내가 초등학교 입학 때에는 9월에 신학년이 시작되는 학기였다.
늦여름, 아래 운동장(대운동장) 동편에는 아름드리 푸라타나스 나무가 있었다. 우리는 그 그늘에서 입학식 예비소집 같은 것을 한 것으로 기억한다.
편성된 반의 담임선생님이 각각 자기반 학생들 호명을 한다.
박✬문선생님이 “박풍태랑(朴風太郞)”. 하고 부르신다. 나도 내 이름을 모르고 있었다. 아마도 왜정시대에 태어난 내가 창씨 개명하여 출생신고한 이름을 그대로 정정하지 않고 있었기에 그렇게 불렀던 같다.
그때 재종형이 지켜보다가 대답하라고 하여 “네”하고 대답하면 일어서자 박✬문선생님이 빙그레 웃으시면서 이제부터는 “박기태”라고 한다. 라고 자상하게 가르쳐 주시던 그런 선생님이었다.
그런 선생님에게 업혀서 나올 정도로 종아리를 맞았던 어린아이였던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아파서 울기만 했다.
과연 <사랑의 매>라고 생각할 수가 있을까?
정확히 지금부터 63년 전의 일이다.
오늘날 돌이켜 생각하면 애정과 애증은 애당초 한 뿌리였다는 것이다.
그 매는 애정과 애증이 갈등하는 <사랑의 매>였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한결 마음이 포근해진다.
지금까지 학교라는 교육기관에서 교사로부터 매 맞은 기억은 딱 한 번이다. 그래서 지금도 잊혀지지 않고 있으며 한 뿌리에서 싹 티운 애정과 애증이었을 것이라고 갈등을 하게 된다.
박 기 태(시인. 소설가 : 호 柔川)
41회 졸업 月刊 <韓國詩> 詩. 季刊 <문학사랑><公務員文學> 小說 등단. “한국시문학대상” “문학사랑문학상” “노산문학상” 수상. <전북문인협회> <한국문인협회> <국제펜클럽한국본부> 회원
시집: <바람사이로 걷는 밤> <바람과 나비> <바람아 쉬어가렴> <꽃그늘 당신> 외 다수
첫댓글 흐~음~ 잘보았네 동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