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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일 전도사, 이학박사 황수관
‘웃으면 복이 온다’는 말처럼 황수관 박사는 웃으면서 즐거운 인생을 맞은 사람이다
항상 웃는다는 그는 슬플 땐 억지로라도 웃고, 기쁠 땐 즐거워서 웃는다고 한다
또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때라도 웃으면 언젠가는 걱정도 근심도 말끔히 씻어진다고…
결코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아온 그의 웃음 속에는 고난과 역경이 숨어 있지만
그래서 더욱 아름다워 보인다
고난과 역경, 그리고 신바람
스스로를 스마일 박사라고 칭하는 황수관 박사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얼핏 보면 그의 얼굴에는 세월의 흔적, 고생의 상흔들이 남아있는 듯 하지만 그의 미소 속엔 행복함만이 가득해 보인다. TV 프로그램인 ‘호기심 천국’에 고정패널로 출현하며 TV 스타덤에 오른 황수관 박사는 보여지는 것처럼 상대방에게 즐거움과 편안함을 주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백만불짜리 미소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아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1945년 일본에서 태어난 황 박사는 대구 교대를 나와 10여 년 동안 초등학교 교사를 지냈다. 교사시절 야간으로 대구대와 경북대 대학원을 졸업한 후 의학에 뜻을 품고 경북의대에서 연구생으로 공부한 후, 의대조교로 대학에 발을 내디딘 그는 연세의대 교수와 세브란스 건강증진센타 부소장, 스포츠 클리닉 원장을 역임했다. 그후 1997년 ‘신바람 건강강의’가 온 국민에게 알려지면서 유명세를 타고 ‘호기심 천국’의 호기심 박사로 활동하는가 하면, 많은 CF에 출연하며 CF 스타로도 명성을 날렸다. 국민대학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스마일 박사, 신바람 박사, 호기심 박사, 이야기 박사로 더 알려진 황수관 박사는 1994년에 베스트셀러가 된 ‘신바람 건강법’외에도 10여권이 넘는 책을 발간하는 등 많은 이들이 신바람 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지금도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뛰어왔습니다. 입학만 시켜 주세요”
어릴 적 황수관 박사의 삶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했다. 그는 어릴 적 어려운 집안형편으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갈 형편이 되지 않아 학교 가기를 포기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때 포항의 영일 중학교에서 입학금을 받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경주에서부터 포항까지 14km를 뛰어갔다.
정신없이 달려 학교에 도착했을 때 학교 선생님들이 하나같이 그의 모습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왔니? 이곳까지 걸어왔니?”, “아닙니다. 뛰어 왔습니다. 입학만 시켜 주시면 열심히 다녀 보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아이에게 끝까지 안 된다고 할 선생님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그는 가고 싶었던 중학교에 들어갈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는 내내 울었다. 기쁘기도 하고 속이 상하기도 해 집에 가는 내내 눈물이 나왔다.
학교까지는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무려 세 시간이 넘게 걸어가야 했다. 그는 매일 새벽 4시에 집을 나서 달음박질을 쳤다. ‘아버지, 어머니 다녀 오겠습니다’하고 인사를 드리면 어머니가 안타까워 울먹이셨다. “아이구 이 추운데 내복도 없이 저 어린 것이 삼십리 길을 걸어가다니…” 그렇게 매일같이 달리고, 걷고 하며 학교를 다녔다는 말에는 이학박사 보다는 마라토너가 더 어울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포항은 경주에서 동쪽이라 아침에 학교 갈 때 해를 마주보고 세 시간을 가야 했고 학교가 끝나고 돌아올 때도 해를 마주보고 세 시간을 꼬박 걸어야 했다. 봄볕에 하루 여섯 시간씩 햇볕을 쪼였으니 입학한지 얼마 안 돼 얼굴이 새까맣게 타 버렸다. 잠은 왜 그리 잘 오는지 새벽잠을 설치니 교문에 도착하자마자 잠이 와서 견디지 못할 지경이 되곤 했다.
그러나 학교를 다닌다는 것만으로도,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에게는 힘이 솟았다. 때문에, 학교 다니는 내내 지각, 결석을 한번도 하지 않았으며 우수한 성적으로 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학교 다닐 때 성적이 꽤 좋아 집 근처 안강중학에 새로 생기는 병설 농고에 장학생으로 입학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당시 50명 가량이 입학했는데 도중에 이 학교 저 학교 좋다는 곳으로 다 빠져 나가고 결국에는 13명이 졸업했다. 덕택에 학교에서 꼴찌를 졸업해도 전교에서 13등을 했다고 큰 소리 칠 수 있었다. 하지만 학생 수가 적어 학교가 문을 닫게 돼 1회 입학생이자 마지막 졸업생이 됐다.
어머니와 눈물의 찰떡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당시 사범대학교에서 대학 등록금을 받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사범대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학비는 면제였지만 생활비를 벌기 위해 부잣집에 들어가 입주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했다. 그 집에 아이 세 명이 있었는데 아이들을 차례로 가르치고 나면 밤 12시가 다 되곤 했다. 하지만 본래 공부에 욕심이 많았던 터라 대학을 졸업할 때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할 수 있었다.
대학 졸업식날 그의 어머니는 꽃다발 대신 찰떡을 가져오셨다. “아니, 어머니 남들은 다들 꽃다발을 가져 오는데 어머니는 왜 찰떡을 가져왔느냐”고 묻자 어머니 말씀하시길 “아니, 꽃은 금방 시들지만 떡은 먹으면 속이 든든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곤 어려운 형편에도 우수한 성적으로 학교를 졸업하는 아들이 자랑스럽다며 또한번 눈물을 펑펑 쏟아내셨다.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해 시골 학교가 아닌 대구 시내 한복판에 있는 초등학교에 발령을 받았다. 그제서야 그는 비로소, 하고 싶은 공부를 실컷 할 수 있게 됐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야간대학을 다니며 자신의 공부에 전념했다. 하지만 공부에 한이 맺혀 야간 대학에 야간 대학을 거치다 보니 결혼 후에도 집안 살림이 궁색하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공부에만 전념하기 위해 학교 선생을 그만두고 공부만 하다보니 이사만 스물 세번을 하게 됐다. 그러다 결국에는 사글세방 얻을 돈도 없어 길에 나앉아야 하는 형편이 되고 말았다. 하는 수 없이 아내가 자신의 이모님 댁으로 가자고 했다. 그렇게 13평짜리 아파트의 방 한칸을 얻어 다섯 식구가 살림을 차렸다.
그의 집안은 본래부터 기독교 집안이었다. 하지만 그는 항상 공부에 치여 신앙 생활을 멀리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외국 선교사가 근처 교회에 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교회를 찾아갔다. 그리고 선교사님의 말씀을 들으며 그동안 숨어있던 신앙심을 되찾고 새로운 삶을 살게됐다. 그는 신앙심을 갖게 되면서부터 자신이 공부에 목숨을 거는 것 자체가 부끄러워졌고 성경책을 읽으면서 울기도 많이 울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6-18)’ 그가 신앙심을 찾고 나서는 웃음이 절로 나왔다. 13평짜리 아파트의 골방이 천국처럼 여겨졌으며 밥을 못먹어도 기쁘고, 밥을 먹을 땐 더욱 기쁘고,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렇게 19년 전부터 그는 웃으면서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를 마감했다. 웃음 속에는 아픔, 고민, 철학 등 깊은 뜻이 있다. ‘젊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자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았고 지금의 어려움은 인생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모든 것이 다르게 보였다.
웃음을 찾게 해준 신앙과 믿음
그의 삶이 파란만장한 것은 그의 부모님 영향이 컸다. 대부분의 자식들은 부모의 삶에 따라 큰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그의 부모님은 나라를 빼앗기고 중국으로 건너갔다가 다시 일본으로 가서 힘들고 어려운 생활을 하며 살았다. 만약 부모님이 계속 중국에서 살았다면 그는 중국에 정착한 조선족이 됐을 것이고, 일본에서 정착을 했다면 제일동포가 됐을 터였다. 하지만 해방이 되자마자 아버지는 일본의 모든 재산을 버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늘 “삼시 세끼 죽을 먹더라도 사람은 정직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해방 전에 일본에 사셨을 때는 포도밭을 경작하는 큰 부자였다. 그의 아버지는 일터에 가기 위해 매일같이 포도밭을 지나다녔다. 그러던 어느날 일본인 포도밭 주인이 포도를 한 소쿠리 갖고 와서 아버지에게 먹어보라고 내밀었다. 배가 고팠던 아버지는 앉은 자리에서 한소쿠리를 다 비웠다. 그러자 포도밭 주인이 “포도 먹을 줄 아네”라며 “매일같이 포도밭은 지나다니면서 한 송이도 건드리지 않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포도 못먹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없어서 못먹는다”고 말했다. 그리고 다음번에 그가 다시 왔을 때는 봉투를 하나 들고 와서는 자신의 포도밭을 가지라며 포도밭 문서를 거져 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일본에서의 얼마간은 부자로 남부럽지 않게 살았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조국이 해방 되자마자 고국으로 돌아왔다.
해방 이후 한국에 돌아왔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아버지는 어디서 짚을 구해 와서는 밤이면 새끼를 꼬아 가마니를 만들었다. 그때 그것을 지켜보던 어린 그가 아버지가 새끼 꼬는 것을 따라하자 어머니는 대성통곡을 하며 “일본에 그냥 살았으면 내 귀한 새끼가 새끼를 꼬지 않아도 되지 않냐”며 아버지께 원망의 소리를 하셨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저 “새끼를 꼬다 보면 좋은 일이 생길꺼야”라며 과거에 대해서는 단 한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뿐만 아니라 그가 초등학교 때는 어린 나이에 나무하러 가는 모습이 어머니가 보기에는 얼마나 안쓰러웠던지, 그 설움을 또 아버지께 퍼붓는 날이 많았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올거니 너무 걱정하지 는 말씀 뿐이었다.
“우리 아버지는 현재 91세이심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정정하십니다. 반면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지요. 어머니는 매일같이 원망하고, 슬퍼하시며 사셨지만 아버지는 언젠가는 좋은날이 있을 거라며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분이지요. 그래서 아버님이 오래 사시는 거란 생각이 듭니다.” 그는 아버지가 나이 80이 넘어가면 가족의 모든 권한을 그에게 넘겨준다고 하셨으나, 아직까지도 모든 권한은 아버지가 관여하고 계시다며 기쁨의 웃음을 보였다.
그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웃음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신앙심과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에 잘살았던 때만을 생각하며 살다가는 현재의 삶에도 적응을 하지 못하고 과거 기억 속의 삶에 얽매여서 마음만 더 공허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가 그러했듯이 그 역시 7남매 중에 장남이라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매일같이 온갖 걱정들로 하루하루를 살았던 때와는 달리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끼고 나서부터는 욕심이란 것이 없어졌다.
60세가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매일 지방 강연 등으로 빡빡한 스케줄을 넉넉히 소화하는 그의 건강 비결은 바로 다름아닌 ‘웃음’이다.
스스로 인정하는 범죄자 상
그는 자신의 얼굴이 험상궂다며 “이것보세요. 제 얼굴은 웃지 않고 있으며 무지 험악합니다.”라며 스스로를 범죄자 상이라고 말한다.
“예전에 한번은 교수들하고 차를 타고 세미나를 다녀왔는데 앞에서 검문을 하는 거예요. 경찰이 차 안을 휙 보더니 저한테 신분증을 보여 달라는 겁니다. 제가 그만큼 얼굴이 험악했어요. 그런데 저는 예수님을 만나서 이렇게 웃게 됐어요. 어느 날 성경을 보다가 깜짝 놀랐어요. 성경에 ‘항상 기뻐하라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니라’는 말씀을 봤습니다. 우는 것이 하나님 뜻이 아니라 웃는 것이 하나님 뜻이구나. 하나님 뜻을 이루기 위해 기뻐해야지, 기뻐하려면 얼굴 표정이 바뀌어야 하잖아요. 그래서 거울을 보고 웃는 연습을 했습니다. 그런데 습관이란 게 무섭디다. 웃다보니까 사람을 보면 웃으면서 이야기를 하게 되는 거예요. 경직된 표정이 풀리면서 웃음이 생기고 그 웃음이 오늘의 저를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이 제 인생을 변화시켰습니다.”
연세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도 누군가를 만나면 항상 웃으면서 먼저 인사를 건넸다. 엘리베이터를 타서 만나는 사람에게도 ‘좋은아침입니다. 항상 행복하세요’라며 웃어보였다. 하지만 인사를 받는 사람 대부분이 그를 이상하게 생각했고 심지어는 화들짝 놀라거나 미친 사람 아니냐며 욕설을 퍼붓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까 그가 올곧은 성품의 대학 교수라는 것을 알게 된 사람들은 도리어 그에게 죄송하다며 먼저 인사를 건네왔다. 그는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 항상 웃으며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받아 올래? 안 받아 올래?”
그는 항상 나눔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긴다. 한번은 세브란스 병원을 설립하는 데 병원 설립자금이 모자라다는 것이었다. 이에 가만히 있을 그가 아니었다. 그는 돈이 많아서 기금을 왕창 낼 수 있는 형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내어 놓았다. “당시 전세 7천만 원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 돈으로는 턱없이 부족했지요. 하지만 그동안의 퇴직금을 다 따져보니 2억하고 조금 남는 거예요. 그때 결심했지요. 아, 이걸 내놓아야겠다고 말입니다.” 그렇게 결심을 하고는 우선 집에 가서 가족회의를 했다. 집안의 큰일이건, 작은 일이건 모두 가족회의를 통해 결정을 했기 때문이다. 물론 아내는 노발대발 난리가 났지만, 그가 결심한 것은 끝내 이루고야 만다는 것은 가족 모두가 알고 있는 기정사실이었다. 학교측에서도 그의 결정에 반대의 목소리가 컸다. 그의 사정을 뻔히 아는 터라 총장, 부총장 모두 난리가 났다. 아니, 돈 많은 교수들도 가만히 있는데 왜 황 교수가 나서냐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뜻을 말릴 수는 없었다. 그런데 그때 마침 서울우유측에서 그에게 CF를 제의 했고, 출연료가 딱 2억 원이었다. 2천만 원도 감지덕지해야 할 판에 2억 원이란 돈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CF 출현을 거절했다. 이유인즉슨 자신이 연세대학에서 이렇게 은혜를 입고 있는데 연세우유가 아닌 서울우유가 좋다고 선전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랬더니 서울우유에서 바로 연세대학총장에게 전화를 걸어 황수관 박사가 과연 황금을 돌같이 아는 사람인지 물으면서 출연 좀 시켜 달라고 부탁을 해 왔다. 그러자 도리어 총장님이 CF를 찍고 그 돈을 받으라고 난리가 났다. 누구보다 그의 처지를 잘 알고 있던 터라 연세우유 걱정은 말고 그돈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결코 그리하지 않았다. 그날 저녁 집으로 갔더니 평소 존대말을 꼬박꼬박 쓰는 아내가 멱살을 붙잡고 말했다. “받을래? 안 받을래? 부모님에다 처자식까지 모두 일곱 식구를 거느린 가장이 그돈을 안받아? 당장 받아 온나”라며 역성을 냈다. 그 돈이면 퇴직금을 고스란히 날리지 않아도 된다는 거였다. 하지만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렇게 서울우유 광고를 거절하고 열흘쯤 뒤에 다른 회사의 CF교섭이 들어왔다. 이번에는 위스키 광고였다. 예수 믿는 사람이 독한 술을 한잔씩 꼴깍꼴깍 마시는 모습을 보일 수 없어 바로 거절했다. 그리고 나서 얼마 안돼 다른 회사에서 교섭이 들어 오는데 모두 A급 회사로 열 네군데서 출연해 달라고 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먼저 돈으로 그를 시험해 보시고 합격하자 축복을 내려 주신 것이라고 믿었다. 여기 저기 들어오는 대로 출연하다 보니 모두 27개 회사의 CF에 출연하는 대기록까지 세우게 됐다.
그는 삶 자체가 나눔이다. 한창 월드컵으로 온 나라가 시끌벅적할 당시, 그는 월드컵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때 TV에서 이영표 선수가 어렵게 산다는 이야기를 듣고 5천만 원을 들고 이영표 선수 집으로 찾아갔다. 마침 포르투갈 전이 하는 날이어서 이영표 선수 가족들과 함께 TV로 경기를 봤다. 그런데 그 대회에서 우리나라가 우승하며 이영표 선수의 몸값이 마구 오르는 것이었다. 이에 그는 그럼 굳이 내가 도와주지 않아도 되겠네 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헌데 그 다음날 박지성 선수의 모교 축구부가 운영난으로 문을 닫을 지경이란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어제 도로 가져온 5천만 원을 그곳에 가져다 주었다. 현재는 이영표, 박지성 선수와는 알게 모르게 인연이 닿아 두 선수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밤이건, 새벽이건 빠지지 않고 경기를 시청하는 축구 마니아가 돼 버렸다.
호기심랜드, 웃음랜드
그는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한 가지 있다고 한다. “호기심랜드 웃음랜드를 만들고 싶습니다. 호기심랜드는 모든 호기심을 다 풀 수 있는 곳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과학, 인체, 우주 등 여기가면 호기심이 확 풀린다 할 정도로 제대로 된 하드웨어. 소프트웨어를 갖추고 싶습니다. 그리고 웃음랜드는 세계의 웃음을 다 갖다 놓고 싶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 안 웃는다고 하는데 여기오면 배꼽을 잡고 웃게 만들고 싶습니다. 외국 관광객들이 한국에 웃음랜드가 있는데 거긴 꼭 들러야 한다고 할 정도의 관광지로 만들고 싶습니다.”
재미있는 생각이 아닐 수 없다. 아니 그와 너무도 잘 어울리는 대답이다. 돈 보다는 이웃을, 그리고 남을 먼저 생각하는 그의 모습에서 세상이 아무리 험해도 살아야 하는 이유가 무언지 깨우치게 한다. 그는 채워지지 않는 욕심을 채우기 위해 매일같이 바둥대며 살아가는 많은 이들에게 진정으로 행복한 삶이란 웃을 줄 아는 여유가 있고 기쁨을 누릴 줄 아는 마음가짐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란 깨달음을 준다.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강연을 하면서 그는 많은 이가 웃으며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루가 짧게 생활을 하고 있다. 아니 어쩌면 채워지지 않는 욕심이 아니라 행복을 채울 수 있도록 밑빠진 항아리를 바쳐주는 두꺼비 역할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에디터|권도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