년초에 써두었던 새해 결심을 년말에 다시 들여다 보았다. “아! 이런 생각을 했었구나”하며 한탄을 했다. 잊지 않으려면 항상 자주 보고, 머리에 각인 시켜야 했다. 또 다른 방법은 다른이들에게 선포하고, 잊으면 상기시켜 주도록 도움을 청하는 일이다. 몇년 전부터 내게 리포팅하는 직원들에게 세가지 약속을 하고 있다. 그것은 “첫째, 절대로 화내지 않겠다. 둘째, 요구되는 목표와 절차를 상세히 설명하겠다. 세째, 성장할 수 있도록 최대한 지원 하겠다”이다. 그러고, 직원들에게 내가 한 약속을 저버리는 경우는 정색하고 상기시켜 달라고 요청하곤 한다. 관리자들이 저마다 지향이 다르니 직원을 향한 행동방침 역시 각기 다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에 대한 절제”는 가장 강조하고 싶으면서도 내게는 여전히 도전적인 화두이다.
모름지기 리더는 자신에게는 엄정하고, 수하에게는 자애로워야 한다는 현인들의 말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상사는 기대에 못미치는 부하의 행동에 쉽게 화내게 된다.상사가 자주 화를 내면, 부하들은 거짓말을 하게 되고, 상사와의 소통을 꺼리게 된다. 포지션 파워가 있는 관리자들이 경계할 일이다. 이에 관한 징키스칸의 빌라크(명언)가 있다. 어느날 징키스칸은 이런 말을 했다. “<예순 베이>는 참 훌륭한 용사다. 아무리 오래 싸워도 지치지 않고 피로한 줄 모른다. 그래서 그는 모든 병사들이 자기 같지 않다고 성을 낸다. 그런 사람은 지휘자가 될 수 없다.” 장수는 모름지기 평범한 사람으로 이루어진 장졸들의 속네를 잘 살피고, 그들의 마음을 헤아려 군사를 이끌어야 한다는 징키스칸의 가르침이다. 비범하긴 하지만 사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저잘난 장수는 지휘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부하들이 따르지 않을 것이니, 큰 전쟁에 나아가 승리할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성을 내는 이는 상사로서의 자격이 없다.
한편, 엄정한 규율만을 강조하는 리더들이 있다. 규율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세계의 산물이다. 그러나, 엄격한 규율로 부터 조직에 대한 충성심, 상사에 대한 존경심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충성심과 존경심은 관계의 산물이며, 공유된 가치와 상호간에 내어준 배려의 시간으로 부터 나온다. 미해병대에서는 전통적으로 장교가 아닌 부사관이 신병훈련소 소대장을 한다. 그들의 훈련이 고되고 엄격하지만, 부사관 소대장들이 훈련병에게 보여주는 솔선과 배려의 정이 세계에서 제일 강한 군대를 만든다. 같이 비 맞으며 구보하고, 솔선 수범하는 소대장에게 존경심을 갖게되는 것은 규율의 산물이 아니라 감성의 산물이다. 감성이 절대로 이성보다 작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칼이 무엇인지 아는가?”하며 검도를 하는 선배가 내게 질문을 했다. 중국 무협지에 등장하는 “의천검, 도룡도”의 이름을 떠올리려는 나의 얼굴상을 보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칼은 뽑지 않은 칼이야. 처음 마주하는 상대의 뽑지 않은 칼이 가장 무서워.” 칼이 칼집에 들어 있을 때는 상대의 실력을 가늠하기 어려워 두렵다고 한다. 그러나, 일단 상대가 칼을 뽑게 되면 상대의 실력을 가늠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는 누군가는 죽거나 다친다. 그래서 신중한 고수는 최대한 먼저 칼을 뽑지 않고자 버틴다. 발검하는 순간 나의 수를 먼저 보이게 되고, 순간의 실수로 원치 않는 상처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란다. 먼저 화를 내는 일이 이와 같다. 조직의 장은 움직임을 무겁게하고 특히나 화를 표출해서는 아니된다.
그러나 나는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칼은 보이지 않는 칼”이라고 생각한다. 숨켜져 있으니, 칼인지도 모르고 어느 곳에서 누구가를 해치고 있는지 알기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 CIA가 비밀등급을 해제한 문서 중에 2008년 4월 2일에 공개된 “Simple Sabotage Field Manual”이란 것이 있다. 2차 세계대전 중에 발행된 이 책자는 적국에서 발각되지 않고 시행할 수 있는 “간단한 방해공작 현장 매뉴얼”을 설명한다. CIA의 전신인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의 국장인 윌리엄 도너번(William J. Donovan)이 1944년 1월 17일자로 사인한 지침서는 표지와 서문, 목차 그리고 본문 32페이지로 구성되어 있다. 조직내에서의 방해공작과 관련된 부문은 제5장 11,12절이 해당되는데 총 50개 항목이다. 구글링하면 문서 전문의 이미지를 다운로드 할 수 있다.
이 매뉴얼에는 적국에 침투한 공작원이 자신을 노출시키지 않으면서도, 효과적으로 적국의 전투력을 저하시키고 망하게 하는 여러가지 지침이 설명되어 있다. 몇가지 예를 들어보자. (전체 번역은 http://bit.ly/1YXOGWe 참조)
영국의 일간지가 이 문건을 공개하자 네티즌들이 “마치 우리 직장 이야기 같다”라는 댓글이 많이 달렸다고 한다. 귀하의 조직에도 위와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보이지 않는 칼이 있는 것이다.
또래의 세대는 기억에 남는 어린 시절의 공통 사건이 몇 개는 있기 마련이다. 우리세대는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라는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의 이야기가 그러한 스토리 중 하나이다. 내용은 이러하다. 동네 어린이들이 모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을 꼽기로 하고, 지나가는 어른들에게 묻는다. 호랑이, 귀신, 수소폭탄 등 여러 이야기를 듣게 되지만, 황혼이 지는 시간에 만난 노인은 그것은 “망각”이라 설명하며 사라진다. 당시에는 “뭐 이딴 이야기가 있어. 잊는다는 것이 뭐가 무서워. 오히려 무서운 기억을 잊으면 좋지”하고 “망각”이 제일 무섭다는 노인의 말을 이상하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수십년을 지내 보니 삶의 귀한 기억이 사라지는 “망각”이 얼마나 두려운 실존의 문제인지 비로서 실감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정말로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칼”은 그렇게 무서운 “망각” 속에서 활동하는 “보이지 않는 칼”이다. 우리가 잊고 있는 동안 조직을 망치는 보이지 않는 칼은 회사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조직을 와해시킨다. 치매가 걸린 노인의 뇌처럼 조직 이곳저곳에 구멍을 내고 슬금슬금 죽음으로 몰고 간다. “세치 혀속에 칼 들었다”는 선인들의 말이 있다. 사람의 “혀”가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칼 - 보이지 않는 칼”을 이르는 말임에 틀림없다. 화도 세치 혀가 일으키고, 조직의 건강한 프로세스도 세치 혀가 보이지 않게 망가뜨린다. 말의 절제함을 망각하지 않기를 바라며 새해를 시작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