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립고 정다웠던 묘법님을 생각하며
묘법님과 인연이 된 것은 30여년 전으로 올라갑니다.
그것은 묘법님의 사촌 동생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에 앞서 사촌동생은 또 비니초님과 인연이 있었습니다. 그 사촌동생이 당뇨합병증으로 고생할 때 동갑내기였던 비니초님이 그의 건강회복에 도움을 주고자 애쓴 적이 있는데 보람도 없이 20대 중반의 나이에 홍은동 문화촌에 살다가 자택에서 임종을 맞았습니다.
그때 저는 서울 남산의 후암동 대원정사(大圓精舍)에서 합창단 회장을 맡아 활동하던 시기입니다. 상가가 발생하면 제일 먼저 달려가 문상하고 염불과 왕생곡 등을 노래했었습니다. 그날 비니초님이 저에게 그가 불쌍하다며 노래공양을 해 주면 어떻겠냐고 하기에 흔쾌히 허락하고 합창단원들에게 연락하여 단원을 모으고 지휘자 선생님과 법사를 모시고 상가를 방문해 염불과 노래를 불러 드렸습니다.
'빛으로 돌아오소서'와 '장례식의 노래'였습니다. 그리고 정근 아미타불을 했었습니다. 그때 한 30대 초반의 청년이 있었는데 우리가 하는 염불을 큰소리로 따라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를 주시했고 의식이 끝나고 통성명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디 사는 누구냐고 하니 고인과는 사촌지간이며 남산 후암동에 사는 이혁진(李爀振)이라 했습니다. 나이는 저보다 3살 위인 병신생(丙申生)이었고, 법명은 동산(東山)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인연인가 싶어 여러 대화를 나누다 대원정사 법회에 나올 것과 합창단에 들 것을 권해 그렇게 하기로 한 이래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왔습니다.
그 사촌 발인하는 날 법사가 자기는 바빠서 화장터에 못 가니 저더러 대신 갈 수 없냐고 하기에 난감했지만 제가 염불해 드리고자 했습니다. 벽제 화장터는 합창단에서 한 달에 한 번 염불봉사를 다니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아는 이가 없지만 이혁진씨가 있었기에 화장이 끝날 때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염불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후로 합창단에 들어와 베이스를 맡아 활동하였고, 여의도봉축제등행렬, 한강연등축제, 세종문화회관 국악대제 등 불교 대형행사가 있는 곳에는 늘 함께 활동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대원정사(大圓精舍) (사)대원회와 인연이 다해 (사)대한불교법사회에 들어 활동할 때도 따라 오셨고, 제가 온라인 카페에 처음 가입했을 때도 초청하여 함께 성지순례도 다녔고, 다시 향불교를 만들었을 때도 함께 열심히 활동하였습니다. 동산 이혁진씨는 카페에 가입하시면서 대명을 묘법(妙法)이라 했는데 이는 그가 법화행자(法華行者)였기에 비니초님이 '묘법'이라 하는 것이 어떻게냐 하여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묘법님은 성지순례를 할 때 버스든 법당이든 제가 의식을 집전하면 늘 바라지를 자청하셨고, 상가(喪家)를 찾아 시달림을 할 때도 역시 바라지 역할을 하셔서 언제나 실과 바늘처럼 따라 두터운 정과 호흡을 맞추었습니다. 묘법님이 함께하면 상가에서 조가(弔歌)도 유장하게 부를 수 있었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막상 묘법님이 졸지에 영가가 되셨을 적엔, 코로나 병겁이 극성하고, 저의 몸은 병이 들었고 팔은 아파 목탁을 잡을 수 없게 되니 참으로 이런 안타까운 상황이 다 있는가 아쉬움을 누를 수 없습니다.
2008년 봉정암 오를 때의 모습. 노란 것은 공양할 미역
예전에 봉정암에 순례를 여러 번 하였는데 묘법님을 상기해 보면 큰 배낭에 미역을 짊어지고 가던 모습이며, 적멸보궁 문전에서 자다가 봉변 맞은 생각이 납니다.
2007년도 6월로 생각됩니다.
저는 그때 사리탑에서 혼자 쉬지 않고 1080배를 마치고 입추의 여지가 없던 적멸보궁에 들어 12시까지 다라니기도까지 마치고 내일을 위해 눈을 좀 붙여볼까 해서 숙소로 향하였는데, 지금은 3년 전 고인이 되신 보리사랑님과 묘법님이 숙소에서 나오는데 숙소는 난장판이라면서 손사레를 쳤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적멸보궁으로 향했는데 안에는 기도객으로 꽉차서 들어가지 못하고 통로에서 잠시 몸을 눕게 되었습니다. 통로 바깥쪽은 제가 자리잡고 안으로 묘법이 자리를 잡고 머리는 사리탑쪽으로 향하여 누워 있었습니다. 안에는 일자 목탁으로 빠르게 천수다라니가 이어졌습니다. 3시까지 하는 기도였습니다.
3시가 조금 못 되어 이어지던 기도소리가 마침내 멈추었습니다. 3시에는 새벽 예불이니 일어날 시간이라 스님이 나가시면 일어나리라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우리가 자고 있는 문쪽으로 스님이 나오시는 모양이었습니다. (원래는 스님 출입문은 따로 있었습니다.) 힘껏 방문을 열어 젖히자 동시에 엄청난 '딱'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자고 있던 묘법님의 머리를 사정없이 찧은 것이었습니다. 곤히 자다가 날벼락을 맞은 묘법님이 아직 잠에 덜깨어
"에이 씨... 누가 날 때리는 거여!"
당황한 스님이
"내가 일부러 때린게 아니고 문을 열다가... 미안합니다."
"에이씨, 어??? 스님이시네..."
이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던 적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웃음의 향기>방에 올려 보겠습니다.
성지순례 뿐만 아니라 등산도 참 많이 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묘법님은 암벽도 잘 탔습니다. 저는 암벽을 잘 못 탔지만 묘법님의 안내를 받아 아슬아슬한 암벽도 오르기도 했지요.
2007년 통일사에서 연등 만들 때
또 잊을 수 없는 것은 영흥도에 딱 하나 통일사(統一寺)라는 절이 있습니다. 영흥대교가 없을 적에는 연안부두에서 배를 타고 통일사에 갔던 적이 있습니다. 이 절은 묘법님과 깊은 인연이 있는 절이라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해마다 비니초님과 셋이서 연등만들기 봉사를 했던 절입니다.
이 절을 창건하신 명수 비구니 노스님은 순전히 자신의 사비를 털어 남북통일을 기도하는 도량으로 창건하셨습니다. 이 절에 가면 제가 새벽 도량석을 하고 예불을 올렸고 저녁이면 저녁 예불도 올렸었습니다.
해마다 부처님 오신 날을 한참 앞두고 묘법님과 함께 연등을 만들던 생각이 납니다. 꽃잎을 비비고 연등을 만들 때 묘법님과 비니초님은 연꽃을 붙이고 저는 풀칠만 정신없이 했었습니다. 묘법님과 연등을 걸고 연등을 늘이고 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그렇게 애써 만든 연등도 부처님 오신 날 주지 스님은 행사가 끝나는 즉시 모두 불살라 버리곤했습니다. 마치 소지공양 올리듯이...
작년 송년회 때 수국사에서 수국사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모습.
묘법님이 관계하신 절은 이밖에도 많았습니다. 우선 어렸을 때부터 다녔다는 수국사(守國寺)는 역사의 산증인이기도 했고, 이를 토대로 진관사(津寬寺)도 연줄이 닿아 있어 진관사도 찾곤했습니다.
그런데 묘법님이 법화행자로 공부했던 절은 따로 있었습니다. 면목동에 있던 묘광사(妙光寺)에서 주지 스님으로부터 법화경을 다년간 공부했습니다. 절은 원래 포교당 형태로 상도동에서 하시다가 면목동에 자리잡으셨으니, 저도 이리저리 묘법님 따라 절구경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몇 년전에 이 스님이 서산으로 이사를 가시는 바람에 공부를 할 수가 없었지요.
묘법님은 공부하시다가 아리송한 것이 나오면 저한테 질문하셔서 아는 대로 답해 드려서 늘 법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또한 한편으로는 남산의 대원정사에 저와 함께 오래도록 다니셨고, 경기도 양평의 서종면 서후리에 소재한 구안사(求安寺)는 묘법님의 쉼터이자 봉사활동 무대였습니다. 바쁜 스님의 일을 대신하여 서류정리, 우편발송 등 수없이 많은 일을 도왔었습니다. 묘법님이 이 절에 들면 저녁예불은 묘법님이 집전하셨고, 재나 사십구재 동지 입춘, 부처님 오신날, 성지순례, 방생 등의 불사가 있으면 언제든지 달려가셨으니 신심은 더없이 장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2011년 갑사 순례 때
그러나 묘법님은 성격이 약간 급하셨고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않고 앞만 보면서 나아가 시야가 좁다는 평을 들었고, 의욕이 많아 조금 앞서기도 하고 때로는 뒤쳐지기도 해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핀잔의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악의가 없고 마음이 따뜻하고 선하여 애증의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허물없는 사이가 되다 보니 늘 그를 위해서 충고 아닌 충고도 많이 했었습니다.
"형님은 참으로 변하지 않네요. 제가 가는 곳에 언제든지 어디든지 따라오시면서 왜 말은 그토록 듣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그리 싫은 소리를 해도 늘 묵묵히 듣고만 있고 받아들이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나는 형님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핀잔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듣기 싫어할 것임을 알면서도 고언을 아끼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우이독경이었고 마이동풍이었습니다."
저는 묘법님을 보면서 사람의 성격은 웬만해서는 바뀌지 않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후로 이것도 제가 능력이 없는 것임을 알고 세 번 권해서 안 들으면 그만두기로 했었지요. 누가 자신을 위해 말하면 새겨 듣고 고치려는 노력이 있으면 스스로를 빛나게 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없지 않았습니다.
갑사 대웅전에서 108배할 때
묘법님과 묘법님의 자당 어르신을 생각해 봅니다. 어르신은 치매에 걸리기 훨씬 전인 제가 묘법님을 알게 된 30여년 전부터 묘법님에 대한 소재 파악에 나섰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집에 전화를 걸으셨습니다. 함께 있다고 하면 안심하셨고 없다고 하면 어디로 갔나 찾기에 바쁘셨습니다.
"나오실 때 어디로 간단 말을 안 하시고 나온 겁니까?"하고 물으면, "말할 필요가 없다."고 해서 늘 이르기를 "나가실 때는 나간다고 들어오면 들어왔다고 출필고 반필면(出必告 反必面)을 하세요."라고 신신당부했습니다. 그런데 자당 어르신도 출타하실 때는 말없이 나가셔서 이번에는 묘법님이 어머니를 찾는라고 정신이 없었으니 이게 무슨 일입니까? 늘 어미소가 송아지를 찾듯, 송아지가 어미소를 찾듯하였는데 이런 상황은 어르신이 치매에 이르렀어도 계속 이어졌으니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80노모가 60넘은 자식을 염려한다는 말이 이를 두고 일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당 어르신에게 "왜 그토록 다 큰 어른을 찾습니까?" 하면 "그럴 일이 있다." 하셨지요. 그럴 일이란 묘법님이 노름을 한다고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아무리 그런 일이 없다고 해도 이를 믿지 않으셨습니다. 이 일이 어르신이 치매에 걸리셨어도 변함없이 묘법님을 믿지 못하는 단초가 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2011년 송년회 때 북악스카이웨이 팔각정에서.
저는 묘법님이 참 박복했던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30여년 전 노총각으로 대원정사에서 결혼은 했을 때 우리는 축가를 불러 주며 누구보다 행복하기를 바랐습니다. 애연가였던 묘법님은 담배도 끊고 법회가 끝나고 합창단 노래 연습이 끝나면 즐거운 마음으로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보기 좋았았습니다. 그러나 채 1년도 못 되어 아들을 낳자마자 파경이 나고 말았습니다. 알고 보니 부인이 지병을 숨기고 결혼했던 것입니다. 그 후로 혼자 지내다가 중풍을 맞기도 했습니다. 이른 새벽에 전화를 받고 달려가 응급조치를 하고 한방병원으로 모시고 가 입원시켰던 일이 생각납니다. 그후로 우리 집에 한 달간 머물면서 요양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는 그후로 7년여 동안 직장을 갖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갑작스러운 병으로 검사받았던 형이 검사 도중 돌아가시기도 했고, 근년에는 여동생을 설암으로 잃기도 했습니다.
2019년 송년회. 황금절 수국사에서 저는 묘법님이 마음을 끓이다 가신 것이 나무나 마음 아픕니다. 한 많으신 치매 어머니에게 미더운 자식이 못 되었던 점과 마음의 벽이 있었던 동생들과 마음을 풀지 못하고 가신 것이 너무 마음 아픕니다. 묘법님은 정말 마음은 선량한 분이었습니다. 이것이 30여년 이어져 온 질긴 정이었습니다. 이 선한 분이 생전에 어머니의 오해를 풀어 드리지 못하고 가신 것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제가 담도암에 걸렸다는 소식에 가장 마음 아파했던 묘법님, 그리고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려나 하고 애쓰시던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코로나19로 세상이 어수선하고 묘법님도 자당어르신을 모시느라 여념이 없던 터라 만남을 뒤로 미뤘었는데 그새에 황급이 가실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저를 위하여 상황버섯을 전달해 주시려고 했다지요. 그에 앞서 강원도 강릉에 온 식구들이 나들이 가셨다가 귀경길에 안흥에서 추억의 안흥 찐빵을 사들고 저의 집을 찾았으나 밖에서 잠시 만난 것이 마지막이 되었으니 이게 끝일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저는 이런 생각도 했었습니다. 코로나가 조금 더 누그러지면 제가 운동하는 백사실이든 북악스카이 팔각정이든 만나서 묘법님이 당면한 문제를 사성제를 토대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이렇게 가실 줄을 알았겠습니까?
매일 아침 예불드리고 나서 매일 <법화경약찬게>를 시작으로 <영가법문>, <장엄염불>을 해드렸고, 제가 쓴 부처님 일대기 서사시인 <오, 부처님, 우리 부처님>을 장엄염불로 들려 드렸고, 지금은 <법화경>을 들려 드리고 있습니다. 이런 기도를 늘 함께 했었는데 이것을 묘법님을 향하여 한다는 것이 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곤합니다.
숙세에 지은 복이 없어 금생에 어려움을 많이 만났지만 금생에는 선업적덕을 많이 지으셨으니 후생은 넉넉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2011년 송년회 저희 집에서 뒷풀이할 때 찬불가 부르시는 모습.
묘법님, 님께서 가신 후 슬픔은 크지만 모두 극복하고 있으니 남은 가족과 친지 그리고 법우와 지인에 대한 염려는 하지 마세요. 이제 저승에 가시거들랑 옛 인연은 모두 잊고 새인연을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순간의 미움과 원망은 영원한 고통을 낳는다고 하였습니다. 미웠던 일 용서하고 탐욕심을 버려야만 청정한 마음으로 극락세계 가는 법이니 미혹한 마음 벗어나고 집착하던 마음 훌훌 벗고 왕생극락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부디 무우세계 극락세계에 가셔서 아미타불을 뵈옵고 정법을 받들어 이고득락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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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_()_
민제님, 세상사 무상합니다.
오늘 고인의 아들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내주가 49재라고 하네요.
세상이 평온해지면 구안사 순례를 한번 추진해 보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_()_ _(())_
* 그때를 생각하면 막상 묘법님이 졸지에 영가가 되셨을 적엔,코로나 병겁이 극성하고,
저의 몸은 병이 들었고 팔은 아파 목탁을 잡을 수 없게 되니
참으로 이런 안타까운 상황이 다 있는가 아쉬움을 누를 수 없습니다.
백우님의 아파하는 마음이 전해 지내요.
이대목에는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지고 목이 먹먹하네요.
* "에이 씨... 누가 날 때리는 거여!"
이대목에는 것때 생각나서 웃음짖게 하네요.ㅎㅎㅎ
우리가 봉정암을 다시 오를 수 있을까요?
참 좋은 시절 이엿는데~~~
것때가 그립습니다.
묘법님은 각별했기에 늘 생각납니다.
오늘도 법화경 약초유품을 들려 드리며 왕생극락을 기렸습니다.
오늘 아들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진작에 아버지를 이해했어야 했는데 뒤늦게 후회된다며 울먹이더군요.
늘 눈에 띄는 행 때문에 애증의 대상이었지만 착한 품성 때문에 법우님들이 늘 찾게 되었지요.
몸을 잘 관리하여 봉정암에 도전을 해 봅시다.
묘법님에 대한 추억의 사진 사진 100여 장을 준비했습니다.
내일이나 모레까지 올려 보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_()_ _(())_
백우님께서 묘법님에 대한 사랑의 메세지 같은 사진과 글들을 읽으면서
가슴이 "찡" 하면서 눈물이 핑 돌기도 하고 "멍" 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잠시
웃음을 자아내는 글에서는 미소도 띄우면서 천천히 읽어 내려왔습니다.
감동 그 자체 입니다.
30년 세월이면 결코 짧지 않은 시간입니다.
그 많은 시간들 속에서의 佛蓮에서 여러 가지로 백우님을 애태우고 가신 묘법님 이시지만
다음 생에서는 여래장을 잘 펴시리라 믿습니다.
묘법님의 가시는 길에 사랑의 꽃비를 뿌려봅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_()()()_
감사합니다.
보현님은 묘법님을 모르시지만 묘법님은 보현님을 아셨습니다.
제가 이야기를 많이 해드렸었지요.
그래서 만나볼 기회를 찾고 있었습니다.
제 건강이 회복되고 코로나가 걷히면 함께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생각으로만 끝났으니 무상한 일입니다.
조계종 적폐청산 운동에도 몇 번 동참하시면서 불교에 대한 앞날도 걱정 많이 했었지요.
30년지기를 잃고 나니 아쉬운 생각이 늘 절로 납니다.
생전에 선업도 많이 지었으니 후생은 향상일로를 걷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_()_ _(())_
묘법님의 극낙 왕생을 기원 합니다. _()()()_
한빛님과는 아직 일면식이 없지만 그래도 이미 마음은 주고 받은 사이라
한빛님이 자취를 남겨 주시면 늘 반갑습니다. 감사합니다. _()_ _(())_
나미아무타불 관세음보살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_()_ _(())_
묘법님과 함께한 시간들이 생각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사진을 정리하다 보니 수많은 세월 함께한 것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네요.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_(())_
묘법님의 왕생극락을 발원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_(())_
감사합니다. 묘법님이 만년에 염화님을 크게 의지하며 살았던 것 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_(())_
백우법사님이 묘법님과 30여년전에 묘법님의 조카로인해 알게되셨군요.
항상 함께다니시는 모습이 참 보기좋았습니다.
백우법사님 계시는 자리에는 묘법님이 항상같이 하셨던같습니다.
늘 한결같으신분이였는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백우법사님의 장엄염불들으시고 이고득락 왕생극락하시옵소서~()()()~
늘 함께했지요. 변함없이... 정말 변하지 않고...
변할 것은 변했어야 했는데... 그런 생각이 듭니다.
영가가 되셨으니 영식이 밝아지면 혁범성성(革凡成聖)의 도리를 깨달으리라 생각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_(())_
묘법님에 대해 처음으로 알게 되었네요.
고인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백우님도 쾌유 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