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 ..2010 년 5 월 21 일 오늘은 북한산 노적봉과 훈련도감 유영지 다녀오려합니다..누가 감히 철옹성보다 더 튼튼한 천연 돌옹성 이 안으로 들어올수 있단말인가 ?? 새로운 신생국 조선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왕사 무학대사와 이곳 북한산 백운대 만경대 노적봉에 두루 올라 요리조리 지세를 살핀후 지금의 북악산 아래로 수도 서울을 정하게 되니~~북한산 계곡에 맑은 물이 시원스레 흐르고 있군요..
노적봉 정상에서 사방으로 둘러보니 빙둘러쳐진 천연의 거대 바위 절벽이 정말 대단합니다..
완만해 보이고 둥그스럼한 부드러운 봉우리로 보여지지만 바위를 오르는 릿지길은 너무나 험하고 위험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구요..
앞쪽에 노적봉 보이고 그 뒤편으로 북한산 백운대와 인수봉 만경대가 노적봉을 가운데 두고 호위하듯 빙 둘러져있는 견고한 천험의 돌성 한가운데에 있는 노적봉입니다..
중성문에서 바라다 본 초여름날 노적봉은 그옛날 노적가리 쌓아놓은듯 부드럽고 둥그스럼한 편안할듯한 봉우리로 보여집니다..하지만 노적봉은 무척이나 오르기 어렵고 힘든길임을 알게되었구요..여기 노적봉 정상에 서면 진짜로 천험의 돌성 한가운데에 있는듯하답니다..
중성문의 초 가을날에 또 바라보니 ~~
남쪽으로 보현봉 문수봉으로 시작해 나한봉 나월봉 용출봉 서쪽으로 용현봉 의상봉 능선 북쪽으로 원효봉 염초봉 능선이 백운대로 이어지고 인수봉과 만경대가 동쪽으로 호위하고 있으니 정말이지 자연 그대로의 거대한 벽 돌옹성 한가운데 바로 노적봉이 이렇게 있답니다..
뭉클하고 찡하고 가엾던 그옛날 북한산성 돌성 쌓았을 민초들과 산성 수비를 담당했던 초병들 그옛님들 생각에 또 마음 싸해질지 모를 일이긴해도 말이지요..노적봉 정상의 봄 풍경이 아름답습니다..
노적봉 정상의 자연 그대로의 작은 정원이 기막힐 정도로 아름다운데 주변엔 온통 바위 전시장인듯 넓은 정상엔 옛 사연도 많답니다..
봄날이지만 노적봉 정상에는 차가운 겨울 바람 추위를 느끼게 되네요..솜씨없는 사진과 글이지만 그래도 예쁘게 보아주세요..ㅋㅋㅋ
둥둥둥~~~큰 북소리 들려오는듯한데 어이할꼬 ~~~버려진 그 흔적 그땅엔 황량한 초석만이~~~남았구나...옛님의 숨결 승병들의 호국 정신 그 옛님들이 계셨으니 이나라가 아직 건재하고 있는것이지요..
노적봉 아래에 위치하고 있는 노적사~~역사적으로 오랜 유서깊은 사찰이지요..
바로 아래 이미지는 노적봉 정상으로서 평평한 넓은 바위 공간에 이처럼 아름다운 바위들이 자리하고 있네요..바위 전시장처럼 보여지구요..군데군데 쇠말뚝 박혔던 흔적도 보여집니다..
노적봉 정상에서 주위를 둘러보니 정말로 북한산 한가운데 우뚝 서 있는 느낌이구요..여긴 이제야 봄꽃이 피네요..산아래
왠만한곳에는 화려했던 꽃잎들 모두 떨어지고 푸르른 나뭇잎으로 옷을 갈아 입었는데 말입니다..
화려한 봄풍경 아름다웠구요..
급경사 내림길에는 말라 죽은 소나무 애처롭습니다..그 옆에 다소곳이 꽃이 소나무를 위로하고 지켜 주기 위해 피어난 갸냘픈 꽃잎이
애처로워 보여집니다..
내가 저런 죽어버린 소나무 처지에 처해진다면 누가 저 꽃잎처럼 잊지않고 저렇게 피어주고 있을까 ?? 반대로 상대가
소나무라면 나는 또 저렇게 고귀하게 살아 갈수 있을까 ?? 많은 생각을 해 봅니다..
노적봉 막바지 오름길이기도 한곳이랍니다..사진 오른쪽 작은 구멍 홀이 보여지는데 저곳으로 손잡고 그곳에 발끝으로
찍고 오르시면 되구요.자일 설치 했을경우 그냥 편한데로 오르시면 된답니다..
이곳 노적봉은 암벽 클라이머들로 늘 언제나 붐비지요.인수봉은 어머니 품속같은 마음의 고향임은 말할것도없고 도봉산의 선인봉 만장봉
그리고 족두리봉에서 연습을 겸한 클라이머들의 행복한 공간임에 틀림없네요...이곳만 올라서면 다 왔습니다..노적봉 정상이지요..
천천히 이제부터 노적봉을 향하여 오르면서 바라보는 주변 풍경들이며 옛님의 숨결 느끼는 시간 되어볼까합니다..
노적봉 ..노적가리 쌓아놓은듯 멀리서 보면 둥그스럼하고 부드러워 보이는데 그게 아니로군요..
정상에서 보여지는 다양한 바위들 있구요..
빙 둘러보니 만경대 릿지 코스 만경대가 웅장히 보여집니다..
이곳 험한 노적봉 정상에서 새로운 새 세상을 그대는 보았겠네요..
선등자가 후등자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구요..
암벽 사이 소나무는 왜 이리 아름다운지요 ? 척박한 그 험한 바위 틈바구니에서 말입니다..
다양한 오름길 암벽이 보여집니다..
바라만 보고 있어도 스릴이 느껴지네요..
올라 가야 할길 아직도 까마득하네요..
요즈음에는 암벽 전문 교육을 하는 등산학교가 있어 바위와 친해 질수 있는 기회도 많다지요..
암벽 전문이 아닌 저로서는 가는 코스 오르는 다양한 길의 이름을 일일이 다 기억 할수도 없을뿐이니 아쉬울뿐입니다..
노적사 뒤로 올라서면 북장대지터에 무덤하나 있구요..
누구의 무덤인지는 정확한 정보 모르지만..다만 설로서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북장대지터여서 일제 시대때 그 흔적을 없애려고 가묘를 썼다는 이야기와 원래 사유지인 이땅을 모두 사찰에 헌납한바 그의 무덤이라는 등등 아무튼 그곳을 지나 이곳에 옵니다...
바위에서 물이 나오고 우물의 형태를 잘 갖추고 있는데 아뿔싸..마실수 있는 물이 아니로군요..
우물터..조선시대 그옛날 300 여명정도의 초병들의 식수 공급처 우물터가 이처럼 황망한 모습으로 버려져 있지요..그냥 보기만하는데도 마음 아려오네요..
올려다 본 노적봉 아득하고 육중하며 거대한 잠수정같은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오르는동안 잡념은 없어지고 한가지에만 집중하게 되겠죠..확인 확인 또확인 바로 집중력입니다..
난이도 있는 구간 다양한 코스로 암벽은 늘 언제나 이처럼 자리 지키고 있다는것을...
암벽 사이사이마다 나무와 풀 한포기 조화롭고 보기에도 좋구나..
노적봉의 최고 정상에 올라가 바라보니 동서남북 어디를 둘러 보아도 이곳이 한가운데 중간임을 알겠네요..원효봉 염초봉 능선으로
백운대 정상 그 옆에 인수봉 만경대 용암봉 모두 거대한 바위로 된 철옹성 그 안에 갖혀 있는듯 빙 둘러쳐져 있고 문수봉 보현봉
용출봉 용혈봉 나한봉 의상봉 우와 ~~어쩜 이리도 견고한 자연 그대로의 성안이 아닌가 ? 감히 누가 이 돌옹성 성안에 들어 올수 있단말인가 ? 정말 바라다보는 풍경 필설로 다 표현하기 어림없음을 알겠습니다..
용기와 도전 정신 집중력을 대단히 필요로 하는 암벽.. 오르기 기술도 좀 있어야하구요 힘도 좀 있어야겠구나 새삼 느끼게됩니다..
다양한 풍경 보면서 올라갑니다..
노적봉 정상에서 백운대 만경대 방향으로 가실경우 이곳으로 내려서야합니다..약수암쪽으로 내려가는 길도 있지만 그길은 푸석길로서 좁고 흙길이고 가파르고 별로 인기 없답니다..직접 그길 다녀봐서 경험으로 알수 있네요..가을철 단풍이 들었을때 풍경만은 참 좋지만요..낙옆이 떨어져 있을땐 어디가 길인지 분간이 잘 안갈정도로 사람의 왕래가 뜸해서 권하고싶지 않은 길이네요.
이곳 노적봉 정상에서 빙 둘러 한바퀴 돌아보면 성안에 한가운데 있음을 느끼게되네요..단단한 요새 화강암 돌성으로 빙 둘러져있는 천연의 요새입니다..감히 어느 누가 이 돌옹성에 들어올수 있으랴 느껴집니다..
멀리서 본 노적봉은 둥그스럼하고 부드럽고 완만해보입니다만 사실은 무척 험하고 힘든길이랍니다..화강암 바위 덩어리 신령스럽습니다..
노적봉의 풍경 이어집니다..이곳으로 바로 오르는 전문 클라이머들 무슨 생각으로 오를까요 ? 저처럼 사색하며 오를까요 ? 아니면 자기와의 싸움 고행일까 즐거움일까 ..모르긴해도 분명한것 한가지가 있군요..지금 이곳에 암벽이 있기에 오르는거라고...오 이런 대답이 맥없어 지는군요..
그옛날 훈련도감 유영지 뒷쪽 바위이구요..식수로 쓰일 물이 바위 밑에서 흘러 나온답니다.... 초석만이 이렇게 황량히 남아있는 둥둥둥~~쩌렁쩌렁 큰 훈련 북소리 들리고 수백명의 초병들의 식수로 사용했던 우물이 바로옆에 있으며 이 돌 초석 앞 훈련장에는 감자와 옥수수 심어져있는 밭은 밭이로되 보통의 밭이 아닌 눈물과 땀과 당시를 살아가신 옛 선조님들의 애환이 가득 배어있는 역사적인 현장이라 생각되니 잠시 상념에 젖어 멍하니 사색에 빠져드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아~~가엾어라 애틋하고 눈물겨울수가 ~~이리도 가슴 뭉클하고 뭔가 마음속 깊은곳에서 울분이 보잘것없는 제 가슴에 와닿아 싸해지는 기분 ~~~눈가에 맺힌 작은 소리없는 눈물방울 닦아냅니다..이곳 마당에서 훈련병들이 교관 지휘관의 구령 소리에 무슬 연마에
고생들 많이 했을 초병들의 모습 선히 떠올려 보게 되네요..
지금은 이처럼 초석만이 처량히 남아 있어서 그만~~~아득히 먼 지날날의 옛일을 알면 누구든 저와같은 느낌이실듯합니다..아무 생각없이 그냥 지나가시면 아무런 감흥도 기대하기 힘들겠지만요..보고 있어도 보이지 않고 눈만 감아도 보여지는 묘한 곳이 이곳이네요..
초석위에 세워진 지휘소에서 훈련대장 지휘소리에 훈련받던 북한산 초병들의 땀과 눈물이 있었던곳이요.300 여명정도 훈련받았던 그 옛날 운동장이 바로 이 초석 아래랍니다..~~~아아 어찌할까나~~
성벽 지키고 힘들어 했을 님들이시여~~~다들 어디로 가셨나이까 ??
가엾어라~~지나간 옛 역사의 순간들 타임머신이 있어 그시절로 돌아갈수만 있다면 술과 고기 준비하여 잠시잠깐만이라도 그들을 대접하고싶은 숙연해지는 그옛날 그 흔적이 이렇게 밭으로 변해있고 감자와 옥수수 심어져있어 보는이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네요.하루속히 복원되기를 기대해봅니다..
300 여명의 식수로 사용되었던 우물이 지금 이렇게 모양도 우습거니와 원형이 많이 변모해 있군요..마음이 아파옵니다..지나다니는 산님들을 위해서도 궂이 아니지만 조금만 신경쓰면 이처럼 내버려 두진 않았을텐데하는 마음 처량하기까지합니다..옛님들께서 사용하셨던 그모습 그 우물가로 복원 되기를 기대하며 우물물을 마실수 있는날 언제쯤일런지요 ??
무너져 없어진 행궁지.. 임금이 나라가 위태로울때 최종 방어지인 그곳 행궁지 피신해 있을 임시 궁궐 그 행궁 한줄기 바람에 스스슥 나뭇가지 떨리고 돌 축대는 무너지고 잡초 우거진 덩쿨 이끼낀 바위벽은 더없이 보는이로하여금 탄식을 자아내더니 행궁터가 그랬고 북한산에서 가장 크고 번창했던 사찰 중흥사..그 중흥사가 대홍수로 무너져 없어진 그 중흥사지..그곳에 가서 가만히 앉아만 있는데도 슬픔이 밀려오더군요..너무 감성적인것같지만 누구든 옛사연을 조금만 안다면 저와 같은 마음 아닐런지요..속히 복원되기를 기도합니다..
손끝으로 약 6~7 미터 올라야하는데 중간지점쯤에 구멍하나 있고 그 홀에 오른뒤 다시 자세 바꿔 발끝을 홀에 살짝 디딘후 오르면 완료하시게 됩니다....
올라 오시면 이곳 돌문 만나게 되구요 바위 사이를 껑충 뛰어 건너가 봅니다..노적봉 정상은 수백명이 앉아도 될만큼 넓고 평평한 바위로 되어 있으며 흙이 조금 있고 나무와 풀도 조금 보여지네요..다만 이곳에서 사방을 둘러보는 풍경 그야말고 천연의 요새 견고한 돌성 한가운데 있는듯 착각하게 되네요.. 멀리 산 봉우리들이며 한강 줄기 이어지는 아름다운 이곳이네요..
조선시대 이기하라는 신하가 북한산을 다녀와 숙종임금께 보고하기를 “신이 북한산으로 갈 때에는 북한산을 거쳐서 갔고, 돌아올 때에는 서도를 거치면서 북한산의 형세를 두루 살펴보았습니다. 동쪽․서쪽․북쪽은 험준하기가 이를 데 없었습니다. 인수봉․백운대․만경대의 세 봉우리가 바로 삼각산으로 깎아 세운 듯이 뒤에 우뚝 솟아 있으며, 약간 서쪽으로 있는 봉우리가 노적봉인데 그 아래로는 중흥사가 있습니다.
...노적봉에서 바라다 본 염초봉의 옆모습도 거대한 벽이네요..
만경봉은 동쪽으로 구불구불 뻗어 내려가다가 석가현(釋迦峴이) 되는 데 여기에는 보현봉․문수봉 등이 있습니다. 문수봉은 나래를 펴듯이 형제양봉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봉우리가 남쪽으로 뻗어 도사려 앉아 백악산을 이루었고, 문수봉에서 한 지맥이 서쪽으로 뻗어 칠성봉이 되었고, 칠성봉에서 두 지맥이 뻗어 나가 뚝 떨어져서 나한봉․증봉․대망봉․의상봉 등 여러 봉우리가 되었습니다. 이 맥이 중홍동 수구에 이르러 한 지맥이 서쪽으로 달려 나가 승가봉이 되었습니다.
...약수암 릿지 오르는 길 거대한 벽도 보여지는군요..
향림사 뒤에 봉우리를 백운봉이라 하는데, 이 맥이 서쪽으로 뻗어 영취봉과 원효봉의 두 봉우리를 이루고, 이 두 봉은 증홍동 수구 서쪽에 이르러서 그쳤습니다. 사면의 여러 봉우리가 깎아 자른 듯한 절벽으로 되어 있어 산 자체가 성곽을 이루고 있으므로 사람이 발을 붙이기 어려우니, 이는 실로「한 사람이 관문을 지켜도, 1만 사람이 뚫고 들어 갈 수 없다.」는 형국입니다. 고 상신 이덕형은 그 문집에서 ”주산의 뒷길은 백운대에서 끊어진다“고 했으나, 승려에게 물은 즉, ‘인수봉과 백운봉 사이에 아주 험하고 좁은 길이 하나 있는데 전령이나 겨우 통할 수 있고, 그 밖의 동․서․남 세 방향은 짐을 지고 통행할 수 없으나 행보에는 그다지 어렵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보여지는 풍경이 바로 돌옹성인거죠.. 어떻게 감히 적들이 이곳으로 넘어 올수 있단말인가 ? 어림없는 소리죠..
신이 중홍사로 들어가는데 그 길을 수구로 따라가면 석문의 옛터가 나오는데, 여기가 바로 서문입니다. 성벽은 무너졌으나 아직도 석축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내성으로 들어가면 거기에 또 성문이 있습니다. 이 곳은 사찰에서 거리가 겨우 수백 보 정도 떨어져 있어 길을 조금만 더 보수하면 우마가 짐을 싣고도 다닐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내의 산골짜기마다 물이 있어서 대군이 주둔하더라도 물이 부족할 염려는 없습니다.
...만경대 쪽으로 바라보아도 거대 암벽이요..
옛날에는 산 위에 소나무가 대단히 무성하였는데, 현재는 소나무가 쭉쭉 뻗어서 우거진 정도가 남한산성만은 못하나 성곽의 길이와 너비는 남한산성보다 나은 듯하여 수호를 위해서도 그대로 둘 수 없는 곳이니버려두기 매우 아깝습니다. 북한산의 형세는 넓지 못하여 적군이 발 붙이기는 어려우나 오직 중홍사 위쪽과 문수사의 동쪽,조 조계사의 서쪽과 좌․우 골짜기는 지세가 약간 평탕하여 옥견(玉肩이: 玉扃의 잘못, 옥으로 장식한 호화로운 궁전)이 피난하기에는 어려우나 거처할 수는 있습니다.
...백운대 쪽 바라보아도 거대 암벽이니 그 한가운데에 노적봉이 있게되는 것이죠..
12월에 다시 천달산 지도를 가리키면서 말하였다. “이곳은 홍복산에서 뚝 떨어져서 도봉산이 되었고 도봉산으로부터 뻗어 들이어와 북한산․백운봉․보현봉 등 여러 봉우리가 되었습니다. 이곳은 사면이 깎아 세운 듯한 험준한 벼랑이어서 비록 나는 새라도 곧바로 올라 갈 수 없는 형세니 참으로 천연적인 요새지입니다.
...자연 그대로 지형을 이용하고 끊어진 구간은 돌로 성벽 산성을 만드신 옛 조상님들의 국토방위 수호
대단했네요..
다만 지형이 좁아서 많은 사람을 수용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왕이 물었다. “그 형세가 남한산성과 비교하여 어떠한가? 이기하가 말하였다. “지세가 험조(險阻)하다는 면에서는 남한산을 이곳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왕이 말하였다. “근자에 민진후가 보고한 바에 의하면, ‘만일 외동(外洞)까지 포함하여 축성을 한다면 기내(畿內)의 백성들도 다 수용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 주위에 넓이가 어느 정도나 되는가?” 이기하가 말하였다. “만일 외동까지 포함시켜서 축성한다면 대중을 수용할 수는 있으나, 그래도 기내의 백성들이 다 들어가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의상 능선의 나월봉 풍경도 멋진 바위와 함께 거대 돌옹성으로 보여지구요..
영의정 서종태가 말하였다. “산의 내외 골짜기를 모두 포함하여 축성하면 그 넓이가 그다지 적지 않습니다.” 김석연이 말하였다. “신이 북한산에 가서 그 형세를 보니 과연 더할 나위 없이 험한 곳이었습니다. 신은 비록 견식이 보잘 것 없으나, 결코 그냥 버려 둘 수는 없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침 故 相臣 이덕형의 서계를 보니 ‘도성에서 아주 가까운 곳이 이와 같은 형세를 갖춘 곳이 있는데 이것을 그냥 버려 두기는 아깝다’ 하였습니다.
...북한산의 다양한 풍경 ...
이덕형은 선조 때의 명신이며, 직접 환란을 경험한 분으로서 그의 의견이 이와 같으니 이는 더욱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무릇 도성을 지키려 한다면 반드시 북한산에 축성을 해야 할 것이고, 도성을 버리고서는 북한산성에만 의존해서 이를 지켜낼 수는 없습니다.” 이기하가 말하였다. “도성은 국가의 근본이 되는 곳이므로 먼저 도성을 쌓아서 이를 견고하게 지킬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이에 따라서 처분하게 도성을 완축하고 북한성을 축성하여 안과 밖이 서로 형세를 호응하도록 하는 거점으로 삼는다면 좋을 것입니다.
...북한산의 다양한 풍경 ...
경솔하게 도성을 버리고 북한산성을 왕이 거처로 삼는 일이 옳은 일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김창집이 말하였다. “도성은 종묘와 사직, 그리고 백성이 자리잡고 있는 곳이니 굳게 지켜서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수성이라는 말의 대의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나 도성의 지형을 살펴보면 허소(虛疎)한 곳이 많습니다. 성상께서도 또한 도성이 너무 넓어서 지키기 어렵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에 북한산성 축성문제를 의논하라는 하교를 내리신 것입니다.
...북한산의 다양한 풍경...
전에 축성에 관하여 의논할 때에 신은 도성을 지키기 어렵다는 말을 사람들에게 했습니다. 지금 북한산 축성에 대한 의논이 분분하나, 그 형세를 보면 축성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홍복산은 규모가 협소하고 공력이 많이 들겠지만 북한산은 도성 가까이에 있을 뿐만 아니라, 축성할 곳이 많지 않아 홍복산 축성에 비하여 비용이 절약되고, 험준한 곳을 이용하여 축성을 하므로 공력도 덜 들 것 같습니다.” 왕이 말하였다. “이번의 북한산 축성논의는 때마침 청나라에서 자문이 온 뒤의 일이므로, 마치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지는 격이 되어서 사람들은 그것이 해구 때문에 계획된 것이 아닌가 의심하겠지만 험한 곳을 의지해서 축성을 하자는 나의 뜻은 장래를 위한 심원한 배려에서 비롯된 것이지, 비단 해구를 대비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염초봉에서 백운대 구간을 백운대에서 바라다 본 풍경...
그리고 연변을 지키는 일은 실로 국방의 근본이 되는 일이므로 변경을 굳게 지켜 적으로부터 임금을 보호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도성을 증축한다 할지라도 이를 지키지 못한다면 장차 어떻게 조처할 것인가. 도성은 종묘와 사직이 있는 곳이니 견고하게 지켜야 된다는 의논은 진실로 옳은 일이다. 그러나 주위가 너무 넓으니 그것만을 지키자는 의논도 완전한 계책은 아니다. 또 임진왜란 때 서쪽에서 피난한 것은 다만 명나라만을 믿었기 때문이었는데 지금에 와서 용만(龍灣: 의주)에 피난갔던 때의 일을 생각하면, 참으로 망극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숨은벽 거대한 벽이 길게 북서쪽으로 이어지고 있었고...
더구나 오늘날 형편은 도성을 떠나 머릴 갈 처지도 못되려니와, 또한 믿고 의지해서 찾아갈 곳도 없다. 지금 논의되고 있는 북한산은 도성에서 지척의 거리에 있으니 식량이나 무기를 별도로 조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도성에 있는 것을 운반해 갈 수가 있다. 비록 좁다고 생각되지만 민진후가 말한 바와 같이 외동까지 포함하여 성을 쌓으면 기민(圻民: 서울 부근의 백성들)까지 수용할 수 있다 하니 이 북한산을 끝내 방치해 두는 것은 참으로 아까운 일이다. 나의 생각도 민진후의 생각과 같다.“ 서종태가 말하였다. “민진후가 기민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한 말은 지나친 것 같습니다. 다만 도성의 백성은 거의 수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수봉 정상 백운대에서 바라다 본 풍경이구요..
옛 문헌 북한산 기록에도 이처럼 천험의 요새로 기록되어 있네요..
...백운대 정상에는 많은 등산객들과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죠..
원효암 역사깊은 오래된 암자가 원효봉 정상 가까이 있구요..
원효 릿지 구간을 오르고 있는 산님들 보여집니다..
아름다운 풍경과 역사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는 우리의 소중한 자연 유산 아끼고 사랑해야겠지요..
봄날 북한산 상쾌한 공기와 꽃향기는 그만이었네요..
늘 아름다운 산행 행복한 날들 되세요..견고한 자연 그대로의 천험의 요새 직접 두발로 지세를 두루 살펴보니 저의 소견으로도
그 옛날 수십만 대군이 쳐 들어 온다 한들 누가 감히 이곳에 들어 올수 있을까요 ?? 어림없는 일임을 알게 되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