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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노릇 해먹기 힘들다는 앵커 말에 육영수 여사가
1964년 서독 방문을 마치고 귀국길에 오르면서 환송객들에게 손을 흔드는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여사.
국민 노릇 해먹기 힘들다”는 앵커에게 육영수 여사가 한 말.
봉두완이 기억하는 박정희 육영수와의 만남
“우리 밥 비벼 먹을까?” 시골농부 같았던 ‘독재자’ 박정희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는 박정희, 봉두완의 하염없는 눈물만
박정희 정부 때인 1970년대, 동양방송(TBC)에서 ‘안녕하십니까? 봉두완입니다’라는 시사 프로그램으로 권력자에게도 쓴 소리를 마다하지 않은 봉두완 씨가 최근 펴낸 자신의 회고록 (앵커맨의 삶과 꿈·나남)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와의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그는 1961년 5·16혁명을 일으켜 집권한 박 대통령이 ‘시골농부 같은 대통령’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동안 세간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박정희의 인간미를 느낄 수 있는 일화가 여럿 담겨 있다.
이 가운데는 특히 ‘청와대 안에서 야당’ 역할을 했다는 퍼스트레이디 육 여사와 만나 대화를 나누는 장면도
눈길을 끈다.
회고록을 토대로 봉두완 회장과의 추가 취재를 통해 박 전 대통령 부부와의 인연을 소개한다.
갑자기 청와대로 호출한 육영수 여사
“오후 5시까지 청와대로 좀 와 달라고 여사님이 전하십니다.”
어느 날 느닷없이 청와대로부터 연락을 받고 봉두완은 청와대 소접견실에서 기다렸다.
내심 불안하기도 하고, 초조한 마음도 없지 않았다.
‘왜 갑자기 나를 보자고 하실까?’ 이런 저런 생각에 시간이 흘렀다.
“아유, 바쁘실 텐데 와주셨네요. 오랜만이에요.”
육 여사의 함박웃음을 보고 나서야 긴장이 다소 풀렸다.
“지난 번 한미정상회담 때, 취재와 보도를 잘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유엔총회에서 사진 촬영할 때 봉 특파원이 저를 뒤에서 끌어당기면서 대통령보다 낮은 계단에 서라고 코치를 잘 해주셔서 사진도 참 잘 나왔더라고요.
아침 8시 ‘뉴스전망대’는 대통령께서 빼놓지 않고 듣는 애청자세요.
봉 앵커 얘기를 대통령께서 귀담아 들으시는 거 같아요.”
육 여사가 비행기를 슬슬 태우기 시작하자 그는 우쭐했다. 한편으론 다행이라 생각하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봉 앵커가 서민들의 고단한 삶과 희망을 전하는 얘기나 야당의 발전을 위해 쓴 소리도 하는 것을 보면 참 소신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 기자 정신이 있으니까 방송도 잘 진행 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봉두완은 박정희 대통령과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과의 1965년 5월 한미정상회담 당시 한국일보 워싱턴특파원으로서 회담을 대표 취재하는 이른바 ‘풀 기자’로 들어가 취재하면서 박정희 대통령 부부와 인연을 맺었다.
“난 정말 봉두완 씨를 좋아해요. 1등 팬이에요.”
육 여사가 한참 동안이나 그를 치켜세우자 봉두완은 우쭐해졌다.
그런데 어느 순간 갑자기 육 여사의 표정이 싸늘하게 바뀌기 시작하는 듯한 느낌을 직감적으로 받았다.
“그런데, ‘국민 노릇 해먹기 힘들다’는데, 뭐가 어떻게 힘들다는 겁니까?”
“예?” 느닷없는 육 여사의 질문에 어안이 그는 벙벙해졌다.
‘나는 청와대 안의 야당, 할말 다 하고 삽니다.’
“나도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이 많아요.
‘어떻게 하면 우리 국민들이 좀 더 잘 살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한순간도 놓아본 적이 없어요.”
봉두완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아니, 말이야 바른 말이지 뭐가 그리 불만입니까?
물론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런저런 어려운 일을 많이 겪지만 방송에서 그렇게 딱 부러지게 말씀하신다고 금방 어떻게 다 달라지나요?”
육 여사의 목소리는 더욱 단호해져갔다.
“저도 청와대 안의 야당으로서 대통령께 할 말은 다 하고 삽니다.
내 딴에는 대통령께 도움이 되고,
국민 생활에 보탬이 될까 싶어서 내가 본 대로,
그리고 들은 대로 말하려고 애쓰는데,
밖에선 이런 사정을 잘 모르시는 것 같아요!
한밤중에 저 양반이 곤히 주무시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안 됐어요.
측은해요…”
봉두완은 육 여사의 음성이 높아지는 것을 숨죽여 듣고만 있어야 했다.
“TV에 나오시는 분들이 우리 대통령 때문에 사회가 불안하고,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서민생활이 궁핍해졌다는 식으로 말씀들 하시던데지금 우리나라,
우리 사회가 어떻게 됐다는 겁니까?
무엇이 어떻게 돼서 국민 노릇해 먹기가 그리 힘들다는 겁니까?”
봉두완이 며칠 전 정부를 비판한 것이 화근이었던 것 같았다.
그렇다고 잠자코 있을 수만은 없었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실은 그런 얘기가 아니라 일부 정치인이나 사회 일각에서 약간 충동적으로 떠들고 하는데 문제가 없는 건 아니죠, 뭐”
아한 모습의 국모(國母)로 불린 육영수 여사는 정작 청와대 안에서 박 대통령에 쓴 소리를 마다 않는 야당을 자처한 강골이었다.
“방송에서 비판도 하고 여론도 만들고 해서 우리가 봉두완 씨를 좋아해요.
우리 대통령께서도 아침 8시 땡 하면 시작하는 TBC라디오 ‘뉴스전망대’를 트랜지스터라디오를 들고 화장실에 가서도 듣곤 해요.
근데 엊그제 밤 ‘동서남북’ TV 좌담프로 시간에는 해도 너무 했어요.
야당보다도 더 심했어요.
너무도 일방적이더라고요.
속상했어요!
방송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아시지 않습니까?
한마디 한마디가 국민들에게는 굉장한 충격을 줄 수 있어요!”
“물론 잘 압니다.
그런데…”
“그렇게 잘 아시는 분이 어떻게 시도 때도 없이 국민을 불안하게 만들면서 아무 말이나 하시는 겁니까?
엊그제 밤에 저는 한숨도 못 잤어요.
대통령께서도 TV를 함께 보셨는데, 꽤 불편하신 것 같았어요.
그리고 청와대로 온 후, 많은 일을 겪으면서 고비를 넘길 때마다 고민하시던 그분 얼굴을 볼 때는
정말 측은한 마음뿐이에요.”
차분한 마음으로 평정을 되찾은 육 여사는 그에게 차를 권했다.
봉두완은 육 여사를 똑 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여사의 눈에는 이미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 있었다.
방송을 끝내면서 찜찜하기는 했지만 이처럼 흥분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시계를 슬쩍 보니 벌써 한 시간이나 흘렀다.
항상 근엄한 표정의 박 대통령 옆에서 온화하고 포근한 미소를 보이며 국민들에게 위안을 줬던 육 여사였다.
그런 그가 방송에 언짢아한 대통령 마음을 봉두완에게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 아닌가.
그 때 문이 열리더니 박 대통령이 들어왔다.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저녁이나 같이 하고 가지’
“아이구, 안녕하십니까? 대통령 각하!”
“음, 깡패가 여기 왔구먼. 오랜만이요, 봉두완 씨!”
‘까칠한’ 기자를 깡패로 에둘러 말한 것이다.
육 여사는 박 대통령에게 자리를 권하며, 그동안 나눴던 대화를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간략하게 전했다.
봉두완은 육 여사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정국에 대해 몇 가지 얘기를 했다.
“저녁이나 같이 하고 가지, 봉두완 씨!”
“예?”
“우리 식구들 하고 저녁 식사나 같이 해요.
댁에다가는 여기서 저녁 한다고 전화할게요.”
육 여사가 정중하게 얘기했다.
“신문기자들이 집에다 전화는 무슨…
밤낮 밖에서 술만 먹고 다니는 사람들인데…” 박 대통령이 거들면서 얘기했다.
봉두완이 같이 한 박 대통령과의 식사는 온 가족과 함께 한 자리였다.
대통령의 딸 근혜와 근령은 먼저 청와대 2층 가족 식당에 앉아 있었고,
아들 지만이 헐레벌떡 뛰어와 자리에 앉으며 대충 인사를 했다.
박 대통령은 짜증을 냈다. “야, 무슨 인사를 그리 하니? 손님한테…”
대통령의 호통에 지만은 다시 일어나 정중하게 인사했다.
저녁상은 놀라울 정도로 간소했다고 봉두완은 기억했다.
대통령이 좋아하는 양주 시바스리갈 한 병을 땄다.
봉두완은 밥그릇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박 대통령과 주거니 받거니 술을 마셨다.
그러는 사이 육 여사는 세 번이나 식은 국을 바꿔줬다.
얼큰해진 박 대통령이 봉두완을 보며 한마디 했다.
“같이 밥 비벼먹을까?” “봉두완 씨는 가만히 보면 애국자 같아.”
“예? 아니, 각하께서 무슨 말씀을…?”
봉두완이 한국일보 워싱턴특파원 때, 박 대통령은 존슨 대통령과 존슨 대통령과 백악관에서 열린 한미정상회담에서 한국군의 베트남전쟁 파병에 관한 14개항 합의를 했다.
베트남전 참전은 한국의 경제 발전 밑거름이 됐지만 한편으로 월남 패망으로 북한 김일성이 남침 계획을 세우는 등 한반도에 큰 위협이 되기도 했다.
봉두완은 6·25 참전 16개국 순방 취재 TBC-TV 특집을 통해 ‘언제 터질지 모르는 남북전쟁을 우려해 우리가 비상대비 태세가 필요하다’는 내용을 담아 박 대통령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봉두완이 주도한 6·25 특집방송은 청와대 안에서 ‘아주 좋은 적시타였다’는 평가가 나왔다고 한다.
박 대통령이 이 얘기를 술자리에서 거론하면서 격려한 것이다.
봉두완은 1934년 12월 황해도 수안에서 태어나 13살 때인 1946년 가을 자유의 품을 찾아 어머니의 손을 꼭 붙잡고 총탄을 무릅쓰며 38선을 넘어온 월남민이었다.
당시 38선 북녘은 소련군과 인민군이 함께 경계를 서고 있을 때였다.
봉두완은 그날 몹시 취했다. 혓바닥이 굳어 발음이 잘 나오지 않는 것을 느낄 정도였다.
거나하게 취했을 때 박 대통령이 불쑥 말했다.
“우리 여기다 밥 비벼먹을까?”
‘원 별스런 대통령 다 보겠네!’
봉두완은 속으론 질겁했지만, “아, 네, 좋습니다. 그러죠 뭐…”라고 대답했다.
그는 박 대통령과 함께 한솥밥 먹듯이 남은 푸성귀와 나물 등을 한 그릇에 섞어 맛있게 밥을 비벼 먹었다.
봉두완은 박정희의 서민다운 모습에 다시 한번 놀랐다.
밖에선 독재자로 욕을 먹었지만, 옆에서 지켜본 박 대통령은 여느 서민과 다름 없었다.
‘와! 이렇게 서민다운 대통령이라니’
봉두완은 농부의 순수함을 보이고 인간적으로 사람을 대하는 박 대통령의 모습을 결코 잊을 수 없다고 회고했다.
봉두완이 다시 청와대 초대를 받았을 때는 육영수 여사가 돌아가신 후였다.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8·15 경축기념식장에서 일본 교포 문세광의 총격으로 세상을 떠난 후였다.
박 대통령은 대통령집무실에서 창문 커튼을 걷어 올리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봉두완입니다!”
“봉두완입니다? 여기가 방송국인가? 그리 앉아, 별고 없지?”
봉두완이 자신의 프로그램을 시작할 때 하는 인사말을 하자 박 대통령이 화답한 것이다.
“봉두완 씨 방송 비판, 잘 듣고 있어.
무작정 비판만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봉두완 씨는 비판은 신랄하지만 내 보기엔 나라 걱정이 배어 있어서 좋아.
더군다나 솔직해서. 천주교 성당 오래 다녔지?”
“예, 1958년에 서강대 초대 이사장 진성만 신부님한테 영세 받고, 노기남 대주교님으로부터 견진성사 …”
“우리 집에도 근혜가 천주교 고등학교(성심여고)와 대학(서강대)을 다녔지.”
이렇게 한참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하다가 대통령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점심이나 하고 가지”라고 갑자기 말했다.
김정령 비서실장은 이미 와 있었다. 하지만 안주인 없는 식탁은 허전해 보였다.
간소한 식탁엔 붉은 포도주 한잔과 국수 한 그릇, 그리고 인절미 한 접시가 놓여 있었다.
국수는 그렇다 쳐도 인절미는 좀 의아했다.
“이게 웬 떡입니까?”
“응, 마침 오늘이 우리 집사람 생일이라서 임자를 불렀지.
그 사람이 생전에 좋아해서 말이야.
떡도 좀 들어…. 근혜는 행사장에서 좀 늦는가 봐. 자, 어서…”
봉두완은 가슴이 뭉클했다.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눈물이라도 보일까 이를 악물었다.
‘청와대 안의 야당’을 자처하면서 “국민 노릇 해먹기 힘들다”는 내 말에 항변하고 호소하던 영부인의 모습을
봉두완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 했다.
시골농부 같았던 박 대통령
1979년 10·26 사태로 박 대통령은 서거했다.
봉두완은 박 대통령이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육 여사 옆에 묻힌 다음 날 새벽 4시
통행금지가 풀리자마자 부인과 함께 택시를 불러 동작동으로 향했다.
박 대통령 묘지 앞에서 큰 절을 하고 기도를 드리며 용서를 빌었다.
“우리가 좋아하는 대통령 각하! 용서하십시오.
그동안 철없이 굴면서 시도 때도 없이 신랄한 비판과 비난을 한 저의 속 좁은 태도를 너그럽게 받아주시고
용서해 주십시오!
이제 하늘나라에 가서는 모든 걸 뒤로 하시고 내외분께서는 오래오래 평화의 안식을 누리소서.
부족한 저희들이 앞장서서 대통령께서 못 다한 조국 근대화를 위해 헌신하겠나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큰 절을 올리며, 두 사람이 묻혀 있는 무덤을 바라보는 두 눈에 뜨거운 눈물이 가득 차 있었다.
부부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이 묘역을 내려왔다.
평소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고 한
박 대통령 묘 앞에서 봉두완은 아내 김옥선(안젤라)과 함께 하염없는 눈물만 뿌렸다.
봉두완은 “박 대통령은 만나면 만날수록 인간미를 느끼게 하는 사람이었다”며 “독재자라기 보다는 시골 면장 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초등학교 담임선생님 같은 인상을 풍기는 아주 인간적인 모습으로 내 마음 속에 각인돼 있다”고 회고했다.
봉두완은 올해 88세로 미수(米壽)다.
그가 자서전을 쓴 것은 지나온 옛 얘기를 세상에 남기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일기 형식의 글을 펴내게 됐다고 했다.
100세 시대, 아흔을 바라보는 그는 “이제 남은 며칠, 몇 달, 몇 년을 어떻게 잘 보낼까 궁리한다”며
“하늘나라를 궁금해 하면서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손녀가 선물해 준 낡은 빨간 적십자마크 모자를 항상 쓰고 다녀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취재를 하는 기자에게 “내용도 없는 두꺼운 책을 왜 기자가 읽어?
와이프한테나 줘”라고 농을 던지는 그는 항상 유쾌하다.
촌철살인의 조크로 주위를 웃음 분위기로 만드는 봉두완,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옆에 있기만 해도 즐겁다고 한다.
일제 시대에 태어나 분단의 철책 선을 넘어 자유 대한민국에서 평생을 살아 온 그는
통신사 정치부 기자와 신문사 워싱턴특파원, 그리고 TV 앵커맨 1호, 국회의원과 국회 외무위원장,
은퇴 후엔 교수 등을 지낸 외교전문가이다.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현장에서 취재하고 지켜본 산 증인이어서 그의 자서전은 작은 역사교과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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