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이 맛보는 위스키의 미래
2025년 01월 13일
한 모금의 위스키를 음미할 때면 수십 가지 향이 코끝을 스친다. 달콤한 캐러멜 향에서 시작하여 과일 향을 거쳐 마지막엔 그을린 듯한 스모키향까지. 위스키의 향은 마치 교향곡처럼 복잡하지만 진하다. 그동안 이런 복잡한 향의 조화를 분석하고 평가하는 일은 오로지 전문가들의 몫이었다.
사진 1. 여태 위스키의 복잡한 향과 조화를 분석하고 평가하는 일은 전문가의 영역으로 다뤄졌다. ⓒshutterstock
숙련된 위스키 테이스터는 최소 수년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각각의 향을 구분하고, 그것이 어떤 원료에서 비롯되었는지, 어떤 제조 과정을 거쳤는지를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전문가적 판단조차도 대부분 주관적일 수밖에 없으며, 때로는 같은 위스키에 대해서도 전문가들 사이에 의견이 엇갈리곤 한다. 그런데 최근 독일 프라운호퍼 공정공학 및 포장 연구소의 연구진들이 이 난제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들의 무기는 바로 다름 아닌 인공지능(AI)이다. 인간의 후각 시스템을 모방한 AI가 과연 수백 년 된 위스키 제조의 비밀을 밝혀낼 수 있을까?
향을 분석하는 놀라운 방법, OWSum
연구팀이 개발한 'OWSum(Olfactory Weighted Sum)' 알고리즘은 위스키의 향을 분석하는 데 있어 혁신적인 접근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앞선 설명처럼 기존의 향 분석은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며 평가자들 사이 의견 차이도 존재하지만, OW SUM은 분자 수준의 정밀한 분석을 통해 이러한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
연구팀은 가스 크로마토그래피와 질량 분석이라는 첨단 분석 기법을 활용해 학습 데이터를 얻었다. 해당 기법은 위스키에 포함된 모든 화합물을 분리하고 그 구조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이를 학습한 AI는 마치 퍼즐을 맞추듯, 이러한 분자들의 조합을 학습하며 위스키의 향을 이해해 나갈 수 있다. 주목할 만한 점은 AI가 단순히 개별 분자의 특성뿐만 아니라, 여러 분자가 상호작용을 하며 만들어내는 복합적인 향까지 분석할 수 있다는 점이다. 즉, 정확도뿐 아니라 유연성까지 갖춘 셈이다.
분자 구조가 말해주는 위스키의 정체성
AI의 분석 결과는 매우 흥미롭다. 먼저 미국산 위스키에서는 주로 멘톨과 시트로넬롤이라는 화합물이 특징적으로 발견되었다. 멘톨은 박하와 같은 시원한 향을 내는 성분으로, 미국 위스키의 상쾌한 특성을 만들어내는 핵심 요소였다. 시트로넬롤은 장미와 같은 꽃향기를 내는 성분으로, 미국 위스키의 부드러운 향미를 완성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반면 스코틀랜드 위스키에서는 메틸데카노에이트와 헵탄산이 주로 검출되었다. 이러한 화합물들은 스코틀랜드 위스키 특유의 깊이 있는 풍미를 만들어내는 핵심 성분이다. 특히 피트(peat)로 알려진 이탄을 사용하는 스코틀랜드의 전통적인 제조 방식이 이러한 특징적인 화합물 구성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사진 2. 위스키의 제조 방식에 따라 화합물 구성에 차이가 나타났다. ⓒcommunications chemistry
흥미로운 점은 같은 지역에서 생산된 위스키들이 공통된 화학적 특징을 보인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켄터키 버번위스키들은 모두 독특한 캐러멜 향을 만들어내는 특정 화합물 패턴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는 지역의 물, 기후, 숙성 방식 등이 만들어내는 고유한 '테루아(Terroir)', 즉 향미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점을 증명해 주고 있다. 화합물들의 독특한 조합은 마치 사람의 고유 지문과 같이 각 위스키의 고유한 특성을 나타낸다. AI는 이러한 분자 패턴을 학습함으로써, 단순히 위스키의 원산지를 구분하는 것을 넘어 각 위스키가 가진 고유한 스토리를 읽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전문가보다 더 정확한 AI의 판단력
연구진은 11명의 위스키 전문가 패널과 AI의 성능을 비교하는 실험을 진행했다. 미국산 위스키 7종과 스코틀랜드산 위스키 9종을 대상으로 한 이 실험에서, AI는 90% 이상의 정확도로 위스키의 원산지를 구분해냈다. 이는 개별 전문가들의 평가보다 더 일관되고 정확한 결과였다.
사진 3. 인공지능은 전문가보다 높은 정확도로 위스키를 구분해냈다. ⓒshutterstock
놀라운 점은 AI가 각 위스키의 주요 향미를 정확하게 파악했다는 점이다. AI는 미국산 위스키의 대표적인 향으로 캐러멜 향을 지목했고, 스코틀랜드 위스키에서는 사과 향과 페놀 특유의 스모키향이 특징적이라고 분석했다. 한 실험에서는 AI가 18년산 싱글몰트 위스키에서 "건포도, 말린 무화과, 오크통의 바닐라 향이 층층이 쌓여있으며, 끝맛에서 약간의 해풍 향이 감지된다"라는 놀라울 정도로 상세한 테이스팅 노트를 제시했다. 이러한 분석은 베테랑 위스키 전문가의 평가와 거의 일치했다. 또한 AI는 복잡한 향의 조합을 분석할 때, 위스키 테이스터들보다 더 높은 정확도를 보여 AI가 단순히 인간의 감각을 모방하는 것을 넘어, 더 정교하고 일관된 평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빙했다.
냄새를 배우는 AI, 미래를 향한 도약
이번 연구의 의의는 단순히 위스키의 원산지를 구분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이는 AI가 인간의 후각 시스템처럼 복잡한 향의 조합을 분석하고 패턴을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획기적인 성과이다. 인간의 후각 시스템은 수천 가지의 냄새를 구분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갖추고 있지만, 그 메커니즘은 아직도 완전히 이해되지 않고 있다. AI는 이러한 복잡한 후각 인지 과정을 새로운 방식으로 모델링함으로써, 인간의 감각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통찰을 제공할 수 있다.
한편, 연구진은 이 기술이 위스키 산업에 혁신적인 변화를 불러올 것으로 기대한다. 예를 들어서, 더 일관적인 위스키의 품질 관리를 자동화하고 표준화하는 데 활용될 수 있다. 또한 새로운 향의 조합을 개발하는 과정에서도 AI의 분석 능력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생산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화학적 변화를 조기에 감지하거나, 특정 향미를 극대화할 수 있는 공정을 개발하는 데도 AI의 역할이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대형 위스키 생산업체들은 이미 AI 시스템을 도입하여 발효 과정을 모니터링하고, 최적의 숙성 시점을 예측하는 데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더 나아가 이 기술은 위스키 산업을 넘어 향수, 식품, 음료 등 향이 중요한 모든 산업 분야에 적용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AI가 인간의 감각을 확장하고 보완하는 새로운 도구로 자리 잡게 될 날이 머지않은 것이다.
인간과 AI, 새로운 동반자 관계
오늘날 AI는 새로운 향의 조합에 대한 창의적인 해석이나, 위스키가 가진 역사적, 문화적 맥락을 이해하는 데에 한계가 있다. 즉, 수백 년에 걸친 위스키 제조의 역사, 각 지역의 독특한 문화와 전통, 그리고 개인의 취향과 경험 등은 AI가 쉽게 이해하거나 평가할 수 없는 영역이다. 또한, 위스키 제조는 단순한 화학적 과정이 아닌 하나의 예술이며, 여기에는 장인의 직관과 경험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따라서 AI는 단순한 화학적 분석을 넘어서 문화적, 감성적 요소를 지니고 있는 인간 전문가를 대체하긴 어렵다.
하지만 AI는 인간의 감각을 보완하고 확장하는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다. 전문가들의 주관적 평가에 객관적인 데이터 기반의 분석을 더해, 위스키 평가의 정확성과 일관성을 한층 높일 수 있을 것이다. AI의 분석은 전문가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패턴을 찾아내거나, 더 깊이 있는 이해를 가능하게 할 수도 있다.
사진 4. AI는 전문가의 감각을 보완하고 확장하는 강력한 도구가 될 것으로 보인다. ⓒshutterstock
이제 위스키 한 잔을 즐길 때, 그 속에 숨어있는 수많은 분자의 향연과 그것을 정교하게 분석해 내는 AI의 놀라운 능력도 함께 음미해 보는 것은 어떨까? 인간의 감성과 AI의 정확성이 만나 빚어내는 새로운 차원의 위스키 감상법이 우리 앞에 펼쳐지는 현재, 이는 단순한 기술의 진보만이 아닌, 인간과 AI가 함께 만들어가는 새로운 미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