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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울어주는 큰무당 김금화
시대 탓일까? 70 넘고 80 넘은 할머니치고 기구하고 서러운 인생의 고비를 넘지 않은 분이 얼마나 될까. 전쟁과 폐허를 헤치고 살아남은 그녀들 삶은 대개가 시난고난한 한 편의 드라마다. 아홉 살에 신병을 앓기 시작해 딱 60년 전 정월 대보름, 열일곱에 내림굿을 받은 큰무당 김금화를 보면 더욱 그렇다. 그녀의 삶은 유난히 돋보이는 한 편의 서사극이다. 14살에 시작된 고된 시집살이, 2년 만의 도망과 곧 이어진 1년간의 지독한 무병은 물론 한국전쟁 동안은 혹세무민을 이유로 인민군에게 끌려가 여러 차례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은 ‘미신 타파’의 기치를 걸고 ‘마녀사냥’을 방불케 하는 탄압을 하며 덩달아 우쭐해진 동네 건달들을 보내 굿판을 헤집곤 했다.
다행히 해외 문화계로부터 주목을 받아, 열아홉에 이미 대동굿을 주도하던 그녀는 한국 전통문화의 전수자로 이름을 날리며 ‘서해안 풍어제’의 맥을 잇게 되었고, 해외초청 공연을 통해 자연종교의 원초적 생명력을 일깨워주는 시대의 샤먼으로 우뚝 섰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 태어난 다섯 남매 중 그녀에게 유난히 모질던 외할머니도 그렇고, 문화 권력에 빌붙은 하수인들뿐만 아니라 가난해서 예단을 못해온 며느리 구박하느라 “저고리 바느질해놓으면 섶 잘못 달았다고 북북 뜯어서 흙바닥에 짓이겨놓고, 버선코를 박아놓으면 솔기가 안 맞는다고 얼굴에 내던지던” 시어머니도 알고 보면 그녀를 큰 만신으로 만든, 제 몸 던져 그녀를 키운, 어이구, 영혼의 스승이었다. 무당이던 외할머니는 공수를 주면서 펑펑 울었다. “손녀딸아, 나는 양반집에 시집 와 아들 못 낳아, 아들 낳게 신령님께 기원하다 신이 들어 무당이 됐다. 그런 내가 왜 몰랐겠나. 어찌하든 막아보려고 일부러 너한테 몹시 굴었건만 오늘 이 길 들어서게 됐으니 남 욕되게 하지 말고 큰 사람 돼라.”
나와 남의 경계,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수시로 넘나드는 무당. 그러나 경계는 위태롭게 마련이다. 아이도 어른도 아닌, 여성도 남성도 아닌, 아니 여성이며 남성인 경계. 풋볼 선수 하인스 워드를 보면 피부 빛의 경계도 큰 내공을 쌓을 때까지는 존재의 위기 지대라, 어쩌면 경계는 영혼의 성장을 위해 꼭 순례해야 할 땅이기도 하다. 아니, 이건 우리 사회의 저급하고 천박한 가치관과 거기 놀아나는 의식의 서툰 수작 탓이다. 사회 구성원들이 건강하고 자유로운 의식을 지녔다면 경계에 드는 일이 반드시 비극적인 운명으로 이어질 이유가 없을 테니 말이다.
남의 아픔을 제 것으로 삼아 대신 아파주고 대신 울어주던 큰무당 김금화의 속살이 짓무르는 속내 이야기는 영혼의 성장이 갈급한 시대적 소재기도 하다. 최근 소설 속 인물 ‘계화’로 다시 태어난 그녀는 자기 성장을 꿈꾸는 이들에게 자기 운명을 덫이 아니라 힘의 원천으로 삼아 알을 깨고 나오라고 속삭인다.
ⓒ 오마이뉴스 문경미 |
병술년, 정월 스무엿샛날 저녁이었다. 대동강 물도 녹인다는 우수가 나흘 전이었다. 한낮의 햇살은 봄기운에 겹고 바람은 아직 눈의 찬기운을 머금은 때, 서울 남산 둔덕에 우뚝 솟은 밀레니엄 힐튼 호텔이었다. 그곳 일층 로비에서 지하 오크룸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오색찬란하거나 오랜 세월의 기운이 스민 맞이(巫神圖)들이 내걸려 있었다. 계단 아래엔 작두거리에 쓰일 장안기가 비스듬히 세워졌고, 계단과 계단 사이의 공간에 떡과 오색실과와 삼색나물이 담긴 굿상이 차려졌다.
비좁고 언뜻 초라하기 그지없었으나 굿상은 정중하고 성의가 돋보였다. 바로 이 자리를 차린 쪽은 '주한유럽연합상공회의소'. 그들은 병술년 새해맞이 행사로 한국의 굿을 선택해 김금화 무당을 모신 것이었다. 청와대 북한산 쪽 뒷문을 개방한다고, 문화재청이 인간문화재 김금화만신을 불러 액막이굿을 하려던 것이 취소된 적도 있는 이 땅에서 정작 유럽인들이 새해맞이로 굿판을 턱 벌린 것이다.
'보여주기 굿'을 하도록 내 준 시간은 딱 30분. 그 시간에 재수와 건강과 행운을 비는 상산맞이와 타살굿과 작두거리를 보여준다고 했다. 서너 시간은 족히 걸릴 굿을 반시간에 몰아붙이고도 굿의 신명을 이방인들에게 전할 수 있다면, 그건 명인만의 능력일 것이었다.
굿이 시작되기 전에 굿청의 양쪽에서 김금화 무당의 제자 무당들이 외국인들에게 점을 봐줬다. 그들은 이미 주최 측에 예약을 해둔 사람들이었다. 통역이 옆에 있었다. 막 점을 보고 난 한 여성은 "후련하고 시원하다"고 소감을 말했다. 무언가 생각들이 정리되지 않은 게 있어서 답답했는데 이제 개운하다는 것이었다.
허락된 시간은 딱 30분, 우선 상산맞이부터
영어 해설자의 굿에 대한 설명으로 굿판이 열렸다. 상산맞이 복색을 차려입은 큰무당김금화가 제자들과 함께 굿당에 올랐다. 그는 동서남북 사방신과 멀고 가까운 산의 신령들을 맞이해서 대접하는 굿을 시작했다. 한복에 갓을 쓰고 대기하던 주최측 간부들과 호텔 총지배인이 신발을 벗고 굿상에 올라갔다. 그들은 방금 무당이 불러모신 명산의 신령님들은 물론 동서남북 사방의 물길과 하늘 길에 행운을 가져다줄 서낭신들에게 술을 따르고 절을 했다.
그저 한점 빛으로 빗겨낸 상산맞이 끝물에도 김금화 무당은 서양인들에게 깃대점을 쳐줬다. 붉고 푸르고 노랗고 하얗고 파란 다섯 가지 방위의 상징인 오방기의 깃대 끝을 모아잡고 두루마기에 갓을 쓴 상사원에게 내밀자 그가 깃대 하나를 잡았다. 그가 잡은 깃대를 천천히 뽑자 붉은 깃발이 빠져나왔다. 붉은 색은 그중 재수를 상징하는 것이어서 무당이 휘둘르라고 일렀다. 문자로 말하지 않아도 금방 서로 이해했고 사람들은 함께 좋아했다. 붉은 깃발은 그에게 재수를 주고 행운을 불러들일 것이었다.
김금화 무당은 선 자리에서 복색을 바꿔서 타살굿으로 들어갔다. 타살굿은 전쟁이나 난리로 세상이 어지러울 때 피를 흘리고 죽어 간 여러 군웅신들을 모셔서 위로하고 대접하는 굿이다.
보통 마당에서 하는 타살굿을 이날은 한두 평 넓이의 비좁은 공간에서 해야 했다. 굿에 쓸 돼지는 공기 좋고 물 맑은 명당에서 따로 길렀다. 쌀겨를 먹이고 돼지의 터럭마다 입을 맞춰 고이 길러 군웅신들을 대접할 때 썼다.
김금화 무당은 삼지창에 통돼지의 한가운데를 찔러 곤두세웠다. 삼지창의 대는 어른 주먹만한 소금주머니에 세웠다. 그리고 정성을 다해 축원하기 시작했다. 이 소박한 정성이 성에 차지 않을지라도 크게 받으셔서 인간에게 닥칠지 모르는 피를 흘리게 되는 흉한 액을 물리쳐달라고 비는 것이었다. 김금화의 간절한 축원 끝에 돼지가 거짓말처럼 우뚝 섰다. 모여 섰던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간절한 축원 끝에 돼지가 거짓말처럼 우뚝 섰다
ⓒ 오마이뉴스 문경미 |
타살굿은 이것으로 '보여주기'를 마치고 곧 작두거리가 준비됐다.
무당이 겅중겅중 뛰고 솟구칠 수도 없는 비좁은 무대에 칠성단이 꾸며졌다. 날카로운 작두 위에서 춤추는 작두거리는, 비수거리라고도 부른다. 산이나 바다를 건너온 허물을 벗겨내고 집안이나 식구들에게 든 액운을 모두 막아달라고 소원하는 굿이다.
김금화 무당은 작두거리의 복색으로 갈아입었다. 그는 최선을 다하는 것 같았다.
이미 한·미 수교 백주년이 되던 1982년 5월부터 8월까지 뉴욕에서 LA 등 여러 도시와 예일대학과 코네티켓 브리니티시 주립대학을 돌며 굿을 보여주기 시작해 오늘에 이르기까지 유럽은 물론 아시아 여러 나라에도 다녔다.
굿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김금화의 보여주기 굿은 한국인을 느끼고 한국인의 문화와 정신을 짐작하고 엿보게 하는 것은 물론, 우리의 복색과 춤과 노래와 악기와 음식을 두루 느끼고 맛보게 하였다. 로마대학에서 교황의 진혼굿을 했고, 오스트리아에선 육백년 된 성당 앞에서 굿을 했고, 파리와 독일에서도 굿을 했다. 뉴욕 링컨센터에서의 굿은 몇 달 전에 이미 표가 매진될 정도였다. 올 한해도 세계 여러 나라에서 굿을 통해 한국의 민속과 정신문화를 알릴 계획이 잡혀있다.
작두거리의 복색인 삼동다리를 입고 신장칼을 들고 칼춤을 춘 김금화가 사람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런 뒤에 서양남자 둘을 불러올려서 드럼통 옆에 세운 긴 장안기를 잡게 하였다. 장안기엔 수(壽)사납고 액운이 낀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이윽고 김금화가 날카롭게 갈아 날을 새파랗게 세운 작두를 받아 '놀리기' 시작했다.
작두를 고추 들고 혀를 내밀어 혀를 천천히 가르고 소매를 걷어 팔뚝을 가르고 치마를 걷어올려서 허벅지와 종아리를 갈랐다. 이렇게 작두 두 짝을 놀린 뒤에 제자들에게 돌려줬다. 곧 두짝을 하나로 맨 작두가 칠성단에 놓일 것이었다. 남자 둘이 어깨에 맨 작두에 김금화가 두 팔을 걸치고 매달렸다. 사람들이 차마 쳐다보지 못하고 눈을 감거나 고개를 숙이기도 하였다.
장구와 징과 제금이 격렬하게 울렸다. 김금화의 표정은 비장했고 구경꾼들도 그랬다.
높이 솟구치고 몸을 젖히고 겅중겅중 뛰기 시작한 일흔 중반의 무당 김금화는 맨발로 작두 위에 섰다. 그가 작두날 위에 몸의 균형을 잡고 섰을 때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오랜 축원 끝에 통돼지가 우뚝 섰을 때처럼 그들은 무당과 한 마음이 되고 사람을 위해 복을 주고 한을 풀어줄 신명들과 하나가 된 듯하였다.
장구와 징과 제금이 격렬하게 울렸고, 표정은 비장했다
ⓒ 오마이뉴스 문경미 |
김금화는 작둣날 위에서 신의 말을 전해주는 '공수'를 줬다.
경제가 좋아져서 모두 소원을 성취하라는 것이었다. 대한민국도 잘 살고, 유럽도 잘 살고, 누구나 복을 듬뿍 받아 가시라고 축원했다.
무당의 말이 무엇인지 알아듣지 못해도 축원이라는 건 느낄 것이었다.
모두들 경견한 표정으로 김금화가 모말에 든 복주머니를 던져줄 때, 그리고 흰 쌀을 흩뿌려줄 때 서로 받으려 손을 들었고 받은 사람들은 기뻐했다. 그들은 한국을 떠난 뒤에라도 이날의 격렬하고 신기하고 따뜻한 문화의 경험을 잊지 못할 것이다.
복을 준 김금화가 작두 위에서 내려왔다.
재빨리 칠성단이 치워지자 김금화가 한복을 입은 대표단을 무대로 불러올렸다. 그들이 손에 손을 잡고 김금화를 따라 덩실덩실 춤췄다. 누구는 무복을 입었고 누구는 모자를 썼다. 무대에 올라가지 못한 사람들도 저절로 어깨가 들썩였고 몸이 흔들렸다. 신명과 흥이 국경과 민족을 넘어선 것이었다.
열일곱 살에 신이 내려 무당이 된 사람, 한민족의 얼을 앗으려던 일제 시대에 무당으로 살아남아야 했던 가혹한 슬픔, 그리고 정작 해방된 땅에서 굿이 미신으로 몰려 겪어냈던 참혹한 수모와 학대를 김금화는 어디에 감췄을까. 젊어 한 때 무당을 그만두려고 방황했던 것도 이젠 추억이 되었을까. 자기의 땅에서 모독 받고도 그 땅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이 시대의 무당 김금화가 또 한번 세계에 우리 문화를 드높인 한 마당, 그 곁에서 존경과 사랑을 보내는 나는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산과 도시에 절과 교회가 지어지는 동안 김금화는 자신의 사재를 털어 강화도에 조촐한 굿당을 지었다. 도울 김용욱 선생이 '금화당'이란 현판을 써서 걸어주었다. 그러나 김금화 필생의 꿈인 우리민족의 정신과 문화의 상징으로 만들려는 금화당은 사회의 냉대와 무관심으로 그 초라함을 벗어날 길이 아득하다.
이 시대 천대받는 무당의 한 상징인 김금화의 외로움에 우리는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해 본다.
ⓒ 2006 OhmyNews
인간문화재 만신 김금화 여사
나라굿으로 유명한 김금화 선생은 일반인에게도 널리 알려진 큰 무당이다.
12세때 무병을 앓은후 17세에 외할머니로부터 내림굿을 받은 그녀는 기예까지 출중하여 황해도 일대에서는 알아주는 무당이었다. 82년 한미수교 100주년을 기념한 미국 공연장에서 일약 국제적 스타가 되었고 그후 줄곧 나라굿을 주도해 왔다.
선생은 분에 넘치는 명예와 사랑에 보답하고자 사재(私財)를 털어 서해안 풍어제 전수관을 건립하고,무의탁 노인들도 봉양하겠다고 밝혔다. 김동인의 '배따라기'에도 소개된바 있는 서해안 풍어제(배연신굿·대동굿)는 황해도 해주,옹진,연평도 지방에서 성행했던 풍어(豊魚)를 비는 굿이다.
지난 85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 받은 서해안 풍어제의 맥을 잇고 있는 무당 김금화 선생. 그녀는 강신무(降神巫)이면서도 철물이굿,만수대탁굿,배연신굿,진오기굿 등 모든 종류의 굿에 뛰어난 기량을 가지고 있어 큰 무당이라 불리운다.
31년 황해도 연백군 석산면에서 2남3녀중 2녀로 태어난 그녀는 12살때부터 무병(巫病)을 앓기 시작하였다. 14세때 시집을 갔으나 몸이 약한 탓에 모진 시집살이를 견디지 못하여 친정집으로 쫓겨났다. 17세때 외할머니이며 만신(여자 무당)이었던 김천일씨에게 내림굿을 받았다. 그뒤 나라굿을 도맡아 하여 관(官)만신이라 불리는 권씨에게서 제대로 된 굿을 배웠고,혼자 대동굿을 주재할 만큼 뛰어난 기능을 인정받은 그녀는 19세에 독립하였다.
"무당이셨던 외할머니 덕택에 어려서부터 난 굿을 꽤 잘했지요. 마을사람들 사이에서는 외할머니가 굿을 해주면 사고가 안나기로 유명했는데,손녀딸 역시 굿이 맑다는 소문이 퍼져 옹진,해주,연백 등으로 바쁘게 불려 다녔습니다. 그때는 아호 '넘새'란 이름으로 아주 유명했지요."
6·25전쟁과 함께 월남한 그녀는 무속인 방수덕씨와 인천과 경기도 이천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월남한 다른 무속인들은 사회적으로 천시받는 미신이라 하여 남한에서의 무속활동을 포기했지만 김금화 선생은 생각이 달랐다. '어차피 이 길을 가야할 운명이라면,도둑질이나 사기치는 나쁜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떳떳이 하자'는 것이 그녀의 굳은 신념이었다. 65년 활동무대를 서울로 옮긴 선생에게 시련은 끊이지 않고 찾아왔다.
"석관동으로 이사올 무렵은 새마을 운동으로 인해 미신타파 바람이 굉장히 거셀 때였어요. 외할머니에게 배운 만수대탁굿을 올리는데 주민들의 신고가 빗발치는 거예요. 여러번 파출소에 끌려가서 다시는 굿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썼지만 집에 오면 또 했죠. 삼각산에 가서 기도도 참 많이 했습니다."
일개 무녀에 불과했던 김금화 선생이 학계에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72년도 전국민속경연대회에 참가하여,'해주장군굿놀이'로 개인연기상을 타면서부터이다. 그녀의 재능을 눈여겨 보았던 고향 언니인 양소운 선생(봉산탈춤,서도소리의 일인자)이 대회출전을 적극 권한 것이다. 당시 쟁쟁했던 민속학자인 임석재,이두현,최길산 선생들도 그녀의 기예에 감탄했다고 한다.
74년 민속학자들의 소개로 김선생은 'TV 문학관'에 출연하는 기회를 얻었다. 작품은 김동인 원작의 '배따라기'였는데, 주인공인 장미희의 원혼을 기리기 위해 굿을 하는 무녀로 출연한 것이다. 굿은 무속의 제의(祭儀), 즉 무당이 제물과 춤·노래로써 신에게 치성을 드리고 길흉화복을 비는 의식을 이른다.
굿은 조선시대까지 한을 풀고 고통을 극복케 해주는 정신적인 카타르시스를 제공했고 공동체 의식을 다지는 사회적 행사로 큰 역할을 담당했다. 춤과 노래가 곁들여진 공동체적 성격이 강한 굿은 현대에 들어서면서 단순한 무속이 아닌 '종합예술'로서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72년도 였던가? 극장 '공간사랑'에서의 공연을 준비하며 다짐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재대로 된 굿을 보여 주자고. 굿은 천시받아야 할 미신이 아니고 고유의 민속예술이고 종합예술이란 사실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이틀간의 공연은 대성황을 이루며 끝났습니다. 그후 문예진흥원의 후원으로 인천 연안부두와 소래에 가서 굿판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차근차근 국내에서의 위상을 다지고 있던 김금화 선생에게 82년도에는 세계적으로 발돋음할 수 있는 운명같은 기회가 찾아왔다. 한미수교 100주년을 맞아 미국 LA에 있는 녹스빌국제박람회장에서 거행될 친선공연에 초청된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공연에 참가할 수 있었어요. '김금화의 굿을 통해 한국의 민속예술을 보여주자'는 조자용(前 에밀레 박물관장)씨 등의 학계측과 '샤머니즘에 불과한 무당굿으로 나라망신 시키려 드느냐'고 펄쩍 뛰는 관공서측의 팽팽한 대립으로 자칫 공연참가가 무산될 뻔 했지요. 당시 미국대사였던 김용식씨를 조박사님이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결국 '철무리굿'이 아닌 '철무리춤'이라는 이름으로 무대에 오르도록 절충을 봤지요."
한국대사관의 우려와는 정반대로 김금화 선생의 굿판은 일약 세계민속학자들 사이의 화제거리가 되었다. 볼 것 다보고 시큰둥해진 미국관객 앞에 홀연 나타난 빨강,파랑 무복의 여인이 맨발로 시퍼런 작두 위에 올라 춤을 추는 모습은 센세이션 그 자체였던 것이다. '무당이 어딜···'하는 멸시와 천대를 무릅쓰고 가까스로 무대에 올려진 15분간의 공연이 그토록 열광적인 줄은 그 누구도 상상치 못한 일이었다. 김금화 선생으로 인해 우리 굿이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예술로 새롭게 자리매김 하는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선생이 세계무대에 이름을 떨치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재미교포인 신딸 최희야씨와의 작은 인연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보스톤 대학에서 '인디언의 샤머니즘'을 전공한 최희야씨는 존재에 대한 의문을 품고 사는 엘리트 여성이었다. 샤머니즘 학술대회를 마치고 귀가중에 교통사고를 당하고 기적적으로 살아난 그녀는 그때부터 누군가 자신을 부르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인디언 무당을 찾아봤지만 큰 만족을 얻지 못한 최씨는 별안간 한국에 오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히 들었다고. 한국에서 만난 문예진흥원의 최종민 교수를 통해 많은 만신들을 소개받은 그녀는 그중 김금화씨의 사진을 보며 묘한 이끌림을 느꼈다. 결국 최씨는 김금화선생을 찾아왔는데, 처음 보자마자 두 여인은 동시에 몸에 전율을 느끼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후 최씨는 김선생으로부터 내림굿을 받아 신딸이 되었다. 과학적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두여인의 미스테리 사건이 KBS의 한 프로에 소개되면서 김금화 선생은 민속학자들과 시청자들의 큰 관심을 끌었다. 엘리트 여성이 내림굿을 받는 모습이 마냥 신기하게 비춰진 것이다. 신딸 최희야씨와의 첫만남을 회상하는 김선생은 '우리 사이에는 전생의 끈이 연결되어 있거나 묘한 텔레파시가 통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82년 이후부터 국제적인 유명세를 가지게 된 김금화 선생은 그간 외국에서 수많은 나라굿을 해왔다. 백두산 천지에서의 대동굿,독일 베를린에서의 윤이상 선생을 위한 진혼굿 등이 대표적이다. 선생의 이력에 세인트 존 디바인 성당에서의 나라굿도 추가되어 우리나라의 민속예술이 널리 세계에 알려지길 기대해 본다.
서해안 풍어제
우리나라는 예로 부터 각 지방마다 그 지역의 특색에 맞는 풍어제가 발달해 왔는데.. 그중 서해안 풍어제는 황해도 일대에서 성행하던 대동굿과 배연신굿을 풍어와 만선을 비는 대표적인 풍어의식으로 행하여 왔다. 이는 6.25 전쟁이후에도 김금화 선생님을 비롯 많은 이들에의해 전해져 현재는 국가 지정 무형 문화제 82-2호로 지정되었고 이제는 예술적인 면에도 그 우수성을 인정받아 많은 행사에 초청되어 시연 되어지고 있다.
서해안 풍어제는 당산맞이, 대동굿, 배연신굿 등 크게 3과정으로 나누어진다. 마을굿 형태인 당산맞이와 대동굿, 풍어를 기원하는 선주들이 행하는 배연신굿으로 나뉘는데 요즈음에는 보통 이틀에 걸쳐 진행되고 있다. 어업을 생업으로 하는 바닷가 마을이나 배를 부리는 집에서는 해마다 혹은 몇 년에 한번씩 풍어를 기원하는 굿을 한다.
대동굿과 배연신굿
김금화 선생님이 무형 문화재 기능 보유자 로 선정된 부분이 바로 이...대동굿과 배연신굿의 "무녀" 부분이다. 황해도에서는 마을사람들이 공동으로 추렴을 하여 모두의 이익을 빌고 단결을 다지는 풍어제를 대동굿이라 하고 선주가 하는 굿은 배연신굿이라고 부른다. 즉 대동굿은 황해도 해서지역, 특히 옹진군의 뱃사람들이 풍어로 만선의 꿈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하며 온 마을 사람들이 한바탕 즐기던 축제였다. 배연신굿은 배를 부리는 선주가 풍어와 집안의 재수를 위해 벌이는 굿이었다
인간문화재 만신 김금화 여사
'만수'란 한 무당이 하는 소리를 다른 무당이 받아서 꼭 같이 전달하는 '만수받이'라는 말 중의 '만수'이고, 여자 무당을 존대하여 쓰는 말은 '만수'가 아니라 '만신'이라는 순수 우리말을 쓴다. 어떤 사람은 '만신'을 '만신(萬神)'이라는 한자 조어(造語)를 쓰고 있으나 이는 맞지 않는 말이다. 금화(錦花)라는 이름의 의미는 '비단꽃'이라는 뜻이다. 1931년에 아들이 귀한 황해도 연백군 석산면 한 집안에 태어나서, 남자 동생을 본다는 뜻의 '넘새'라는 아명(兒名)을 가졌던 그녀가 나이 다섯 살에 남동생을 보고 얻은 이름이 금화이다. 일곱살에 옹진으로 이사했다.
열 살 전에 동네 아이들과 놀면서 시퍼런 낫을 맨발로 타고 올라가 춤을 추고, 열 살이 넘으면서부터는 어느 집에는 무슨 일이 생기고, 아들 낳는다, 딸 낳는다, 어느 사람은 무슨 짓을 한다는 둥의 '허튼 소리(?)'를 마구 뱉어내는 맹랑한 금화였다. 때로는 사냥꾼이 쏘아 떨어뜨린 꿩을 사냥꾼은 찾지 못하는데 금화가 찾아 자기 집으로 가져 오기도 하고, 어떤 때는 말을 탄 장군이 달려 오거나 호랑이가 쫓아와 물고 늘어지는 환상(幻像)과 환청(幻聽)에 사로잡히는 금화였다. 무속(巫俗)에는 무병(巫病)이란 말이 있다. 몸에 신령이 찾아들었을 때에 신기(神氣)를 이기지 못하여 생기는 병이 무병이다. 많은 사람들이 금화에게 무병이 들었다고 했다. 열 일곱 살이 되던 해의 정월 대보름날 밤이었다. 무병을 앓던 금화가 달맞이를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개울을 건너려 하자 하늘에서 무수한 별들이 머리 위에 쏟아져 내렸다. 개울을 건너려다가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신이 내리는 순간이었다. 이 때부터 금화는 '신의 딸'이 되었다.
금화에게 신이 내리자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가장 가슴이 아팠다. 외할머니는 아들을 낳지 못하여 산기도를 드리다가 신령이 몸에 들어온 이래 '천일이 만수'라면 황해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큰 만수였다. 외할머니는 외손녀가 자기처럼 무당이 된다는 생각에 가슴이 아팠고, 금화의 어머니는 자기 어머니에 이어 딸 마져 무당이 된다는 생각에 가슴이 미어졌다. 그러나 강신(降神)은 인위적이 아니다. 운명적이다. 외할머니 어머니 외손녀의 3대에 걸친 이 운명을 고리를 '사람이 싫다'고 벗어날 수는 없었다. 외할머니가 신 어머니가 되어 금화의 허주굿을 했다. 허주굿이란 금화의 몸에서 온갖 잡신을 다 몰아내는 굿이었다. 이어서 내림굿을 했다. 작두를 탔다. 그 때 '신 어머니인 외할머니'가 물었다.
"너는 무당이 되어 무엇을 하겠느냐?"
금화는 이제 막 신의 딸이 된 새끼 무당이라 신 어머니의 말을 직접 듣지 못하고 중간에 있는 만수들이 '만수받이'를 해서 전해 주었다.
"구관(舊官) 신관(新官) '나라 만신'보다 더 높은 무당이 되겠습니다."
"이 빌어 먹을 년아! 어데다 대고 그런 경망스런 주둥이를 놀리느냐? 저 년을 제 정신이 들 때가지 마구 쳐라!"
내림굿을 하던 날 금화는 공수 한 마디 잘못하여 싸리 채찍으로 종아리에 무수히 맞았다. '큰무당이 되겠다'는 새로운 공수를 한 다음에 매가 멈추었다. 무당이란 이렇듯 말 한 마디, 몸 매무새 하나까지 주의하고, 겸손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어서 놋쇠걸립과 쌀걸립을 다녔다. 걸립 도중에 용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고, '죽은 쇠'를 가져다가 '산 쇠'를 만드는 놋쇠걸립과 솟을굿도 성공적으로 끝났다.
내림굿 다음 해에 벌써 소를 잡아 제물로 바치는 대동굿이 들어왔다. 닷새간에 걸쳐 벌어진 대동굿은 대성황 대성공이었다. 작두에 오른 열 여덟 살의 만신 김금화의 모습은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仙女)와 같았다. 땅 위에서 추는 모습은 나비와 같았다. 금화는 금방 황해도 일대를 풍미하는 무당이 되었다. 무당이 된지 3년도 못된 열 아홉 살에 용해라는 신딸을 낳았다. 신딸과 함께 복지기 할머니를 되리고 굿판을 다녔다. 나이가 젊고 어린 두 무당들이 어찌나 영험하고 신춤을 잘 추는지, 두 사람이 같이 다니면 사람들은 금화를 '큰당닥궁이'라 부르고, 용해를 '작은당닥궁이'라 불렀다.
그러던 어느 날이다. 하늘에서 시커먼 먹구름이 땅으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피가 묻은 옷가지를 싣고 가던 달지구도 먹구름에 휩쌓였다. 신의 게시였다. 북에서는 무당을 '인민의 정신을 좀 먹는 반동분자'로 몰고 있었다. 금화는 곧 나라에 큰 난리가 난 것을 남들보다 먼저 알고 피신했다. 그래도 사람들은 깊은 밤 중에 몰래 찾아와 점을 보고 갔다. 하루 밤은 나는 새도 떨어진다는 CID 간부의 장모가 찾아왔다. 사위가 폐병에 걸려 죽게 되었다고 했다. 점을 보니 죽지 않을 것만 같았다. 환자 집에 찾아가 굿판을 벌였다. 작두를 타고 '사흘 후부터 회복된다'는 공수를 하고 내려오는 찰랐였다. 가슴이 섬뜩했다.
"무어? 다 죽어가는 사람이 3일 후에 살아난다구? 전시에 군인도 못먹는 쌀로 떡을 해서 굿울 해? 이년 너 지금 당장 총살이다!"
CID 대장이 총뿌리를 금화의 가슴에 댔다. 순간 많은 사람들이 공수 결과나 보고 총살을 시키자고 했다. 대장은 총뿌리를 금화의 목에 다시 대고 3일 후에 보자며 떠났다. 드디어 3일이 되는 날의 새벽이었다. 장모가 찾아와 피도 토하지 않고 생기가 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난중(亂中)에 신 어머니인 외할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고향은 이미 무당이 살 수 있는 땅이 아니었다. 인천으로 피난해 왔다. 금화가 왔다는 소식을 들은 고향 사람들이 찾아왔다. 주로 가족들의 안위(安危)와 재회(再會), 그리고 호구지책(糊口之策) 등에 관해 점을 보러오는 사람들이었다.
8.15 해방과 6.25 동란을 거치면서 세상은 갑자기 변했다. 서구 문물이 밀물처럼 밀려 들어오고 전통 풍습은 썰물처럼 빠져 나갔다. 이 땅의 믿음의 주인이었던 무속은 하루 아침에 미신(迷信)이라는 탈바가지를 쓰고, 세인(世人)들의 이상한 눈초리와 함께 경찰의 체포와 구금이라는 천형(天刑)을 받아야 했다. 수 없이 경찰에 불려갔다. 다시는 굿을 하지 않겠다는 시말서를 수없이 썼다. 그러나 어찌하랴. 병들고 서럽고 불행한 사람들이 찾아와 굿을 해달라는 것을 어떻게 해주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행패도 많이 당하고, 조롱도 많이 당했다. 어떤 때는 굿판에 양아치들이 떼를 지어 찾아와 돈을 내라며 제사 상을 뒤엎고 장구를 찢었다. 어떤 산 기도장에서는 예수교 교인들이 떼거리로 나타나 굿판을 둘러쌓고 찬송가를 부르며 그녀를 '마귀'라며 손가락질했다. 새마을운동이라는 것이 전국에서 벌어진 후에는 무당들이 설 자리는 완전히 없어졌다. 허기진 배를 움켜지고 울기도 많이 울었다. 조상 대대로 하던 굿을 왜 못하게 하는가 원망도 했으나 그녀는 끝내 그녀가 택함을 받은 '무(巫)의 길'을 떠날 수가 없었다. 햇볕이 없는 음지 생활이 몹시도 길게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이다.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가 열린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황해도 사람들이 무어 좋은 민속이 없느냐고 했다. 섬에 다니며 만선(滿船)과 안전(安全)을 빌며 용왕제를 올리던 무가(巫歌)를 불러 주었더니, 그걸 '민속예술'이라는 단어로 포장하여 대회에 나갔다. 화려한 춤과 아름다운 무가가 담박에 상장을 가져 왔다. 광주 부산 제주 할 것 없이 대회가 열리는 곳마다 공로상 개인상 단체상 장려상 우수상, 상이란 상은 한 때 모조리 만수 김금화의 찾이였다. 신문 방송 티비에서 그녀의 모습이 자주 나타났다. 그리하여 어제까지 무당이라고 천대받던 김금화가 당당한 민속 예술인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 때에 속리산에 있는 에밀레박물관의 조자용 선생의 소개로 한미수교100주년 기념 행사에 참가해 달라는 미국 스미소니안 박물관장의 초청을 받았다. 전직 주미 대사 한 사람이 샤머니즘이라고 못가게 큰 훼방을 놓았으나 그들은 끝내 미국에 갔다. 현지에서 한국 대사관 직원들로부터 다 떨어진 의상 때문에 '이걸 입고 어떻게 미국 관중 앞에 서느냐'는 핀잔을 먹었다. 심지어 그들은 숙소에서 공연장으로 타고 갈 차를 보내 준다고 약속해 놓고, 고의적으로 차를 보내지 않아 공연 자체가 무산될 뻔한 일이 생겼다. 서둘러 다른 차를 타고 갔다.
"신사 숙녀 여러분! 공연 무대에서 카페트를 걷은 것은 카페트를 깐채로 공연할 수 없기 때문이지, 공연이 끝나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위대한 한국의 사마니즘 대표가 여러분을 위하여 어렵게 멀리에서 여기에 왔습니다. 여러분이 모시고 있는 미국의 샤머니즘과 한국의 샤머니즘이 합하여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을 위한 굿판이 벌어지고, 굿판이 끝난 다음에는 행운을 가져다 주는 고사떡을 나누어 드립니다."
김금화 일행이 무대에 올랐다. 공연장은 벌써 많은 사람들이 빠져 나가 텅 비어 있었다. 요란하게 두드려대어 숨막히게 빨라지는 장단 소리에 맞추어 그녀가 작두에 올랐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신령님의 힘으로 엄청난 동작의 작두춤을 추고 내려왔다. 어느 새 가던 발길을 다시 돌려 들어왔는지 공연장에 가득찬 관중들은 기립 박수를 첬다.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이어서 녹스빌 워싱턴 뉴저지 등 긴 여정의 공연이 있었고, 그 뒤에는 매 년 독일 호주 등의 초청이 계속되고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무당, 특히 만수 무당 김금화에 대한 국내외의 인식을 날로 높아갔다. 서울대 음대에서 국악을 전공하고 미국 UCLA에서 세계 무속을 전공하던 채희아가 귀국하여 그녀로부터 내림굿을 받는 장면이 KBS-TV 특집 프로그램으로 방영되면서 무속에 대한 인식은 더욱 새로워졌다. 어제까지 천대받던 만수 무당 김금화는 드디어 무속 춤을 가장 잘 추는 '무형문화재 제82호'가 되었다.
동서고금(東西古今)을 통하여 샤마니즘은 존재하고, 샤마니스트들과 어울려 벌어지는 에피소드와 섬짓한 일들은 한 두 가기가 아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일반 고사(告祀)에서는 돼지 머리가 통속적으로 쓰이고, 굿판에서는 금방 잡은 통돼지가 주로 받쳐진다. 큰 굿판이라면 소를 통채로 잡아 신에게 받친다. 그리고 고사나 굿판에서 사용된 고기와 떡, 과일 같은 제물(祭物)들은 재수가 있다하여 서로 조금씩 나누어 먹는 풍속이 있다. 이는 캐도릭에서 미사 때에 과자를 조금씩 나누어 먹는 것과 비슷한 종교 의식의 하나이다. 김금화 여사도 미국에서 굿판을 벌인 후에 떡과 고기를 나누어 주면, 그곳 사람들은 우리나라처럼 많은 양을 바라지 않고 조금씩 아주 조금씩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나누어 먹고자 하는 것을 보고 감탄했다. 신의 제물은 욕심의 대상이 아니라 나눔의 대상이다.
옛날에는 산짐승 산인간을 통채로 신에게 받치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봉사 애비를 둔 심청이는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하여 공양미 3백 석을 받고 황해도 장산곶마루 앞 바다 인당수에 통채로 제물이 되었다. 대서양을 주름잡던 바이킹들은 산 처녀를 제물로 배에 싣고 망망 대해에 떠내려 보내는 의식(儀式)이 있었고, 남태평양 타히티 같은 곳에서는 산 총각의 사지와 몸둥이를 나무토막에 묶어 신전(神殿)에 받치는 풍속도 있었다. 예로부터 우리나라의 굿판에는 만수대탁굿이라는 의식이 있었다. 살아계신 부모님의 천수를 기원하고, 돌아 가신 뒤에는 극락(極樂) 천도를 기원하며 산수왕을 가르고 산넋을 드리는 굿이다. 자손 우환 질병 평안 사고 자살 원한 원귀(寃鬼) 액운 부귀 강령 소망 공포 위안 등도 이 굿을 통하여 푼다. 대개는 닷새에 걸쳐 의식이 베풀어지고 본굿은 사흘간에 걸쳐 펼져지는 영실굿이다. 제물은 일반적인 한 가지 타살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소 돼지 닭과 같은 세 종류의 짐승를 타살하여 받쳐지고, 이를 3타살이라 한다.
김금화는 천지신명(天地神明)을 모시는 '신령의 딸'로 만신 외길 50년을 기념하여 무속 예술의 진수인 만수대탁굿을 1997년 오월 파주 기장사에서 베풀었다. 김금화는 내림굿을 받은 만신이지만 일평생을 통하여 무당으로서 기예를 갈고 닦는데 온힘을 기우려 왔다. 그래서 그녀의 크고 작은 굿판에서는 다른 굿판에서 보기 힘든 '의식 집행 절차'와 그 '절차에 따른 무예(巫藝)'가 극치를 이루어 숨을 죽이게 하기도 하고 환희를 동반하기도 하며 슬픔을 이끌어 내기도 하는 '극적인 위엄(威嚴)을 동반'하는 신화(神話)와 같은 '금화(金花) 특유의 굿'이라는 의식이 진행된다.
참고로 그 때 펼쳐진 만수대탁굿의 순서를 보면 ...
산청올림으로 시작하여 일월맞이-석함칠성-공중칠성-상산부군맞이-초부정 초감흥굿-복잔내림-영정물림-제석굿-공주님거리-성주굿-소대감놀이-도산말명 방아찜굿-소어름굿/생략-사냥굿-소(蕭)로 받은 썩은 직성 부귀 할마이들 놀리기-성수거리-타살군옹굿-별상거리-일월맞이-사또놀이-도령돌기-별따기-산수왕가르기-먼산장군거리-대감놀이-걸립대감놀이-조상굿/영실굿-영실 상산 부군 맞이-영실 영정물림-영실 칠성 제석굿-영실 성주굿-영실 소대감놀이-영신 도산 말명 영실 방아찜 굿-영실 타살군옹굿-영실 도령돌기-영실 먼산 장군거리- 영실대감놀이-영실걸립대감놀이-영실 조상굿-영실 수왕천 가르기-작두거리-마당굿에 이어 공주전송굿이라는 44개 과정이 5일간에 걸쳐 펼쳐룶다. .
물론 현대인들이 즐기는 하이라이트는 시퍼런 작두 위에 올라 무당춤을 추는 작두거리가 아닌가 한다. 이 행사에는 김금화의 제자 30 여 명이 보조 출연했다.
인간문화재 만신 무당 김금화의 생애와 이적(異蹟)에 관한 기록은 '복은 나누고 한은 푸시게'라는 단행본 속에 있다. 여사의 꿈은 무속(巫俗)이 무교(巫敎)로 승화하고, '무당을 위한, 무당에 의한, 무당의 단체'를 만드는 일이다.(인간문화재 만신 김금화 여사 연락처:전화 02-966-5934 팩스 969-9723) .....(참조 : http://www.mudang.org/)
약력
중요무형문화재 제82-2호 보유자 김 금 화
주요연혁
1948 17세 강신무로 내림받음
1980. 10. 전국 민속 예술 경연대회 장려상 수상
1982. 5. 2 한미수교 국제 문화협회 참가
1982. 6. 2 철물이굿 강의 - 미국 예일대학
1982. 6. 5 뉴프리탄시 명예시민상 수여, 철물이굿 공연-미국의사당
1982. 7. 2 한미수교 백주년기념 문화사절로 참가 - 미국
1984. 4. 27 미국하와이 대학 심포지엄 참가
1985. 2. 중요무형문화재 제82-2호 서해안배연신굿 및 대동굿
예능보유자 지정
1988 서울대학, 이화여대, 홍익대학 대동굿 전수
1989. 4.16~28 일본 교민협회 주관 대동굿 전수 및 공연
1992. 3. 27 연세대학교 굿강의
1998 독일 베를린 코리아 훼스티벌 공연
2000 인천세계춤축제
2000. 9. 7 중앙공무원교육원 굿강의
2001. 5. 21 국립정신병원 굿강의
2001. 5. 31 인천바다축제
2002. 4.18~30 서해안풍어제 미국순회공연
2002. 6. 월드컵 기념공연
2002. 9. 추석맞이 민속문화축제
2002. 11.9-18 파리가을축제
2003. 4. 15 MBC 화제집중 방영
2003. 7. 6 부산문화예술회관-김금화의 대동굿
2003. 7.12-20 미국링컨센터페스티벌
2003. 9. 6 월미평화축제
2003. 10. 4 대구지하철사고진혼굿
2003. 10. 12 백제문화제
2003. 10.31-11.3 국제민속예능페스티발 - 일본
2004. 2.12-13 女舞, 허공에 그린 세월 - 국립국악원 예악당
2004. 3. 22 미국 지오내셔널그래픽 TV방영
굿의 종류와 내용
굿의 종류와 전체적인 모습은 아주 다양하다. 굿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천신굿(혹은 재수굿)과 오구굿이다. 천신굿은 이름 그대로 여러 작은 신령들까지 잊지 않고 잘 대접해 신령들의 대동화합을 꾀해 신령계와 인간계의 조화를 통한 재수를 기원하는 것이며, 오구굿은 전형적인 사령제(死靈祭)로서 죽은 영혼들을 저승세계로 안전하게 도착하게 해 주는 굿이다.
굿은 형태에 따라 크게 선굿과 앉은굿으로 구분할 수 있다. 선굿은 무당이 서서 하는 굿으로 일반적인 굿을 뜻하고, 앉은굿은 충청도 지역에서 무당이 앉아서 주로 독경을 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한편 같은 목적의 굿이라 하더라도 지역에 따라 내용이나 명칭이 조금씩 다르다. 예를 들어 망자 천도의례인 진오기굿은 서울·경기·황해도 지역에서 부르는 명칭이고, 충청도에서는 오구굿, 함경도는 망묵이굿, 평안도는 수왕굿, 강원도는 오구자리, 전라도는 씻김굿이라 하며 제주도는 시왕맞이 라고 부른다.
굿의 내용에 따른 분류
천신(薦神)굿 : 새로 추수한 곡식을 신령에게 바치며 집안의 평온을 기원하는 굿으로 평민 들의 경우엔 재수굿이라 부른다.
나라굿 : 이것은 왕조시대에 왕가의 요청에 의해 행해지던 굿으로 지금은 사라졌다.
신령기자굿 : 무당이 스스로를 위하는 굿인데 무당이 되기 위한 내림굿(허주굿)과 자신이 모시는 신령을 위한 진적굿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진오기굿 : 죽은이의 명복을 빌고 저승에 편히 가도록 하는 의례이다. 굿을 의뢰하는 계층 에 따라 새남, 얼새남, 평진오기 등으로 나뉜다.
용신굿 : 이는 주로 강이나 바다 등 물가에서 물의 신령인 용신(龍神)을 위하여 행하는 굿 이다.
병굿 : 식구 중에 병이 난 사람이 있을 경우 하는 굿으로 천연두를 물리치기 위한 마마배 송굿이 유명하다.
도당굿 : 대표적인 마을굿으로 특히 중부지역에서 두드러진다.
여탐굿 : 혼인이나 환갑 등의 기쁜 일을 조상에게 알리는 굿으로 지금은 더 이상 지내지 않는다.
작두
작두는 작도(斫刀)의 변화음이며 지방에 따라서는 짝도(경상남도), 짝두(강원도, 전라도 일부) 작뒤(함경도) 등으로도 불린다. 무당이라고 해서 모두가 작두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 작두신령이나 장군님을 모 시고 있을 때 필히 작두를 소유하는데 이유는 작두가 작두신령이나 장군님을 상징하는 무구이기 때문이다.
작두를 타는 이유는 첫째, 무당이 작두 타기를 통해 신령님의 영험력을 극대화한다.
작두 위에서는 신의 영적인 힘이 극대화되어 있기 때문에 이때에 내리는 공수는 어떠한 공수 보다도 위력이 있다. 둘째, 작두를 탄다는 것은 맨발로 작두 날을 눌린다는 것이며 이는 곧 부정한 액을 눌리고 좋지 못한 해로운 기운을 눌러 억제시킨다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 작두신령이나 장군님을 모시고 있을 때 필히 작두를 소유하는데 이유는 작두가 작두신령이나 장군님을 상징하는 무구이기 때문이다.
동해안 오구굿
동해안은 지역적으로 보아 무속의 원형이 잘 보존된 지역이다. 이 곳의 굿으로는 별신굿과 오구굿이 있는데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위한 별신굿은 吉굿이다. 그래서 동해안의 굿은 죽은 영혼을 사혼시켜 위로하고 극락으로 천도하는 오구굿에 그 특징을 찾는다고 한다. 水亡굿이라 불리우는 오구굿은 전라도 쪽의 씻김굿과는 달리 진지하고 슬픈 대목이 많다. 오구굿은 밤을 새워하기 때문에 밤저라고도 한다.
내림굿
내림굿은 접신된 사람이 자신에게 실린 신을 맞이하여 祈者로서의 노릇을 펴도록 위해서 하는 굿으로 흔히 신굿이나 내림굿 혹은 신 내림굿이라고 한다. 本鄕의 산을 밟는 삼산, 잡귀와 잡신을 제거하는 허주굿, 내림굿, 솟을(불릴) 굿으로 치뤄진다.
서해안 풍어제(국가지정 무형문화재 82-2호)
황해도 해주, 옹진, 연평도 지방에서 성행했던 굿이지만 굿의 기본적인 구조나 형식은 서해안 일대의 다른 풍어제와 비슷하다. 서해안 배연신굿과 대동굿이 한 종목으로 묶여 중요 무형문화재 82-2호로 지정되었지만 사실 배연신굿은 선주의 개인 뱃굿이고, 대동굿은 마을의 공동제사이다.
그런데 배연신굿은 개인 뱃굿이면서도 내용이나 형식 규모 등이 대동굿에 버금가는 굿이다. 배연신굿은 바다 가운데의 배위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이 특이하고 연희적인 요소도 많으며 아기자기 하다.
배연신굿 및 대동굿의 사제무는 동해안이나 남해안 지역의 사제무와는 달리 신이 내린 강신무이고 대부분의 사제과정에서 순간순간 접신(接神)현상과 몰아의 경지에 이르러 굿의 신비한 분위기를 지니는 것이 특징인데 그러면서도 여기에 나오는 사냥굿이나 영산할아밤·할맘 거리는 무굿에 들어 있는 정식 굿거리로서는 어느 굿에서도 볼 수 없는 뛰어난 연희성을 지니고 대동굿의 묘미를 한층 더해주고 있다.
國巫 김금화 선생님의 만신진적
갖가지 음식과 술을 장만하여 만신 자신이 봉신하고 있는 신령(할아버지)을 대접하기 위해 베풀어지는 것으로서 일종의 신령에 대한 감사제이다. 그러므로 진적은 곧 신의 제자인 무당의 무업이 잘 이루어지도록 보살펴 주신 것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서 감사의 마음으로 치러지는 굿이라 할 수 있다.
진적은 재가집(단골집)의 요청에 의해 치러지는 굿이 아니라 무당이 자신과 신령을 위해 무당 스스로가 치루기 때문에 이것을 `만신진적'이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