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소개
하근찬(河瑾燦 1931- ) 소설가. 경북 영천 생. 전주사범 졸업. 동아대학교 수학. 1957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소설 “수난이대”가 당선되어 등단. 초기에는 역사적 상황과 연계된 가난한 농촌을 비극적 현실로 인식하고 그 아픔을 이겨내는 강한 의지를 보여 주었다. 즉, 어려운 농촌 현실의 제약 조건에도 불구하고 굳건히 극복해 내려는 농민들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다. 단편 “삼각의 집”에서는 도회지 서민의 생활상에 현대의 삶에서 발견되는 부조리를 연결시켰으며, 단편 “왕릉과 주둔군”에서는 외국군의 주둔과 타락한 윤리를 다루었다. 그 외 작품으로 단편 “흰 종이 수염”, 장편 “야호(夜壺)”, “산에 들에” 등이 있다.
줄거리
박만도는 3대 독자인 아들 진수가 전쟁터에서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몹시 마음이 들떠 있다. 그는 아직 아들이 탄 기차가 들어오려면 멀었음에도 일찌감치 역전으로 나간다. 병원에서 나온다는 말에 약간의 불안감을 느끼기는 했으나, 설마하니 아들이 자기처럼 불구가 되진 않았으려니 하고 애써 마음을 편히 먹는다. 그는 한쪽 팔이 없다. 일제 때 강제 징용을 나가 비행장 건설 중 폭격에 잃어버린 것이다. 그때 그는 기절까지 했었다. 그는 항상 왼쪽 소맷자락을 조끼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꽂아 놓고 다녔다. 일말의 불안감이 없었던 바는 아니나, 그는 아들이 돌아온다는 생각에 어서 시간이 흘러가 버렸으면 한다.
아들에게 주려고 역전으로 가는 길에 고등어도 한 마리 산다. 정거장에 도착한 시간이 10시 40분, 점심때쯤 온다고 했으니 시간은 아직도 한 시간이나 넘게 남았다. 기다리는 동안 박만도는 옛날에 자신이 당했던 일들을 떠올려 본다.
멀리서 기적 소리가 울려 만도는 벌떡 일어선다. 괜히 가슴이 울렁거리기 시작한다. 기차가 플랫폼에 도착하고 사람들이 내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아들의 모습은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어느 상이 군인 하나가 서 있을 뿐이다. 조바심에 안달이 난 박만도가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뒤에서 "아부지!" 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뒤로 돌아선 순간 그는 입이 딱 벌어지고 눈은 무섭도록 크게 떠지고 만다. 아들은 틀림없었으나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한쪽 다리가 없어져 빈 바지 자락이 펄럭이고 있었고, 목발을 집고 있었던 것이다. 박만도는 눈앞이 아찔해진다. 기진하고 실성한 모습으로 두 부자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집으로 향한다.
돌아오는 길에 아들 진수는 이 같은 꼴을 하고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느냐고 아버지에게 하소연한다. 만도는 "나 봐라! 팔뚝 하나 없어도 잘만 안 사나. 남 봄에 좀 덜 좋아서 그렇지 살기사 왜 못 살아!"라며 격려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외나무다리가 하나 있다. 진수는 도저히 다리를 건널 수가 없다. 머뭇거리는 아들을 바라보던 만도는 대뜸 등을 돌리며 진수에게 업히라고 한다. 팔 하나가 없는 아버지와 다리 한쪽이 없는 아들이 조심스레 외나무다리를 건너고 있다. 눈 앞에 우뚝 솟은 용머리재가 이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핵심 정리
갈래 : 단편 소설. 본격 소설. 전후(戰後) 소설
배경 : 시간(일제 말기부터 6.25 전쟁까지). 공간(1950년대의 어느 한적한 시골)
문체 : 간결 명료한 문장. 관형어 · 부사어 · 사투리 사용
어조 : 격앙된 목소리에서 안정된 목소리로 변화함
성격 : 사실적. 토속적. 해학적. 비극적
인물 : 박만도와 진수 부자는 현대사의 수난을 경험한 우리 민족을 상징함
갈등 : 개인 ↔ 사회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과 작가 관찰자 시점 혼용
구성 :
발단 - 살아서 돌아오는 아들을 마중하기 위해 정거장에 나가 기다림
전개 - 십이삼 년 전 만도가 징용에 끌려가던 과정 회상함
위기 - 불구가 된 아들에 대한 만도의 슬픔과 분노와 좌절감
절정 - 아버지의 아들과 화해
결말 - 외팔이 아버지가 외다리 아들을 업고 외나무다리를 건넘
제재 : 민족의 수난사(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
주제 : 수난으로 일관된 현대사의 비극적 단면과 그 극복의 의지
출전 : 단편집 <수난 이대>(1972)
등장 인물
박만도 : 아버지. 일제 징용에 끌려갔다가 왼팔을 잃고 돌아옴. 수난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품은 긍정적인 인물로 성격이 다소 급하고 직선적이다. 의지적이고 낙천적이며 익살기가 있다.
박진수 : 박만도의 아들. 삼대독자. 6 25에 참전, 한쪽 다리를 잃고 돌아온 순박한 시골 청년으로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전쟁과 인생과 역사의 의미 같은 거창한 것에 대한 사색은 할 줄 모르지만, 자기에게 닥치는 사태를 감수하면서 살아가는 의지적 인간성이 엿보임
술집 여편네 : 부자 간의 우울한 기분을 해소시켜 주는 분위기 조정자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시간적으로는 과거와 현재의 시간을 상호 교차시키며 회상 또는 연상의 수법을 적절히 활용한 역순행적 구성을 보이며 진행 사건의 관계로 보면 병렬 대조형 구성을 보인다. 이러한 구성은 일제 강점이란 역사적 수난과 6.25 동란이라는 민족적 시련의 두 사건을 유기적으로 연결시키며, 그 수난이 우리 민족 전체의 문제임을 밝히고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살아가는 참담한 시대의 인간들이 삶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고 시련을 극복하는 주제적 차원으로 이어지고 있다. 과거의 회상 부분은 요약적 서술로, 현재 일어나는 사건의 전개는 주로 대화를 통해 한 인물의 치열한 심리 갈등과 화해를 반영시킨 장면적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작품 전체적인 흐름에서는 작가 관찰자 시점이 주로 많이 사용되고 있으나 주제 표출의 어려움 때문에 전지적 작가 시점과 1인칭 관찰자 시점이 병행해서 사용되는 복합적 관점으로 관점의 혼란을 극복하고 자연스럽게 적용하고 있다.
또 이 글은 6.25 직후의 한 조그만 시골 마을에서 일어난 일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일제 말기의 식민지 시대에서 6.25 사변에 이르는 거대한 역사적 배경이 깔려 있다. 만도와 진수 이 부자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 즉 외부적 압력으로 인한 육체적 손상을 입고 있다. 이들 부자의 이러한 육체적 손상은 우리 현대사가 경험한 역사적 수난의 과정을 확인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들 두 세대가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장면에서 비극의 상처와 고통을 서로 감싸고 도우면서 역사적 시련을 극복해 가려는 의지가 감동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여기에서 외나무다리는 단순한 배경 요소로 그치지 않고 사건의 구성에 적극적으로 기여하는 핵심적 조건 구실을 한다. 이 소설에서 사용되고 있는 농민들의 투박한 언어, 사투리 등은 인물들의 성격과 심리 상태를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데 이바지하고 있으며 개별적인 소재 즉 주인공의 일정한 버릇 등도 경제적으로 활용되어 단편 소설의 밀도 있는 구성에 기여하고 있다.
“흰 종이 수염”과 함께 작가의 대표작이다. 일제에 의해 한 팔을 잃은 아버지와 6.25 전쟁으로 한쪽 다리를 잃은 아들의 상봉, 즉 2대에 걸친 수난이 한자리에서 확인되는 짧은 한 순간의 이야기를 통해 민족사적 비극을 암시한다. 간결한 문체 위에 이야기하는 시간의 사건과 과거 회상의 사건이 서로 적절히 교차되어 흥분과 격정이 고조되는 미적 쾌감을 가능케 한다. [수난이대]는 한국 현대사가 당면했던 역사적 비극을 조그만 마을에 사는 부자를 통해 보여준다. 이 수난이대는 단편 소설로서 정통적이고 모형적인 가족사 소설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제목이 나타내는 바와 같이 역사의 변환 속에서 한 가족 부자 이대(父子二代)가 겪는 비극과 수난의 역사, 즉 수난의 가족 세대적인 역사의 기술이라는 면에서 다분히 가족사 소설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 작품이 이야기하려는 것은 역사적인 비극의 재확인이 아니라 차례로 팔과 다리를 잃은 이 두 세대가 서로 협력하여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장면에서 알 수 있듯이 역사적인 비극을 딛고 일어서는 재기를 위한 화합(和合)을 기본 주제로 하고 있다.
외팔이인 아버지가 외다리가 된 아들을 업고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마지막 장면은 수난의 연대기를 살아가는 삶이 지탱해야 하는 휴머니즘의 귀결적 화해라는 측면이기도 했다.
<참고> “수난 이대”에 대하여
□ 운명론자 또는 체념론자
이 작품은 역사의 거대한 조류에 휘말려 불구자가 된 두 부자의 상봉 장면을 그리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아버지 박만도와 아들 박진수는 어찌 보면 역사의 대기권 밖에서 그날그날 자족하며 살 줄 알았던 소박한 사람들이었다. 두 부자는 똑같이 본인의 의지와는 별 상관없이 역사와 시대의 부름을 받아 역사의 권내로 뛰어 들었다가 돌이킬 수 없는 상흔(傷痕)을 안고 다시 권외로 밀려 나오게 된 것이다.
애초부터 이들 부자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소박하고 인정 넘치는 삶의 자세를 계속 지켜 갈 수 있는가 하는 쪽으로 쏠려 있었다.
만도는 속으로 '인제 새파랗게 젊은 놈이 벌써 이게 무슨 꼴이고? 세상을 잘못 타고나서 진수 니 신세도 참 똥이다 똥.' 이런 소리를 주워 섬겼고, 아버지의 등에 업힌 진수는 곧장 미안스러운 얼굴을 하며, '나꺼정 이렇게 되다니, 아부지도 참 복도 더럽게 없지. 차라리 내가 죽어 버렸더라면 나았을 낀데···.'하고 중얼거리는···. 이렇게 두 부자는 자신들의 불행을 아파하고 탓하고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들 부자는 운명론자, 혹은 체념론자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이들 작중 인물에게는 흔히 말하는 '의식'이란 것도 없고 자신의 아픔을 역사의 비판으로 이끌어 올릴 만한 지성도 결핍되어 있는 것이다. 아버지 박만도는 아들이 돌아오면 반찬 해 주겠다고 고등어 묶음이나 들고 다니고, 또 외다리가 되어 돌아온 아들의 모습을 보고 홧술을 거푸 몇 잔 마셔 대는 정도의 반응밖에 보이지 못하는 극히 소박하면서도 직정적(直情的)인 인간형에 속한다.
아버지 박만도와 아들 박진수는 자신들의 불행을 마음놓고 통곡할 만한 적극성도 지니고 있지 못하며, 또 자신들의 삶에 지워지지 않은 상처를 남기고 간 그 거대한 힘의 존재에 대한 분석과 항변을 시도할 만한 지성도 갖추고 있지 못하다.
이런 유형의 독특한 인간형을 형상화한 것은 확실히 하근찬 특유의 개성이 낳은 산물이라 하겠다. 6.25 전쟁을 소재로 한 다른 소설들, 가령 최인훈의 '광장', 황순원의 '나무들 비탈에 서다', 박경리의 '시장과 전장'에 나오는 주인공들과 위의 두 부자를, 특히 전쟁으로 인한 충격과 상처를 어떻게 수습하고 있는가 라는 측면에서 비교한다면 아주 흥미 있는 결과가 나오게 될 것이다.
앞에 예시한 세 작품의 주인공들이 자신들이 받은 유형, 무형의 상처를 '적극적으로' 다스리고 음미하고 있다면 '수난이대'의 두 부자는 어리석다고 할 정도로 '소극적'인 대응법을 취한다. 이들 부자는 기껏해야 운명론의 무드에 빠지거나 아니면 팔자 타령을 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또 앞서 예시한 세 작품의 주인공들이 전쟁이란 무엇이고 왜 있어야 하고, 더 나아가서는 역사는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식으로 실존의 몸부림을 치고 있는 반면, '수난이대'의 주인공들은 역사와 전쟁이 남기고 간 상처를 생존 본능의 확인을 통해서 잊으려 하거나 뛰어 넘으려 하고 있다.
이 작품은 한 가족의 부자(父子) 2대에 걸친 시련의 중첩을 통해서 역사와 인간의 삶의 떼어 놓을 수 없는 상호 관련성을 포착함으로써 우리 현대사의 뼈아픈 경험인 일제 말기와 6.25의 전쟁 체험을 문학적으로 형상화시켰다. 커다란 역사의 상처를 두 인물에 투영함으로써 생생한 전형성을 획득한 점도 주목할 만한 특징이다.
□ 배경에 대하여
이 작품은 6.25 직후의 한 조그만 시골 마을에서 일어난 일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일제 말기의 식민지 시대에서 6.25 사변에 이르는 거대한 역사적 배경이 깔려 있다. 세부적 배경 중에서 중요한 것으로는 작품의 앞뒤에 두 번 나타나는 외나무다리가 있다. 이 외나무다리는 단순한 배경 요소로 그치지 않고 사건의 구성에 적극적으로 기여하는 핵심적 조건 구실을 한다.
□ 인물에 대하여
이 소설의 등장하는 인물은 ‘박만도’와 그의 아들 ‘진수’, 그리고 술집 여편네 등이다. 박만도는 일제 시대에 징용으로 끌려 팔 한 쪽을 잃은 불구자이고, 아들 진수는 6.25 사변에 참전하여 다리 한 쪽을 잃은 상이 용사다. 그들은 한결같이 순박한 시골 사람들이지만 뜻하지 않은 외부 압력으로 육체적 손상을 입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그들 부자는 우리의 현대사가 경험한 역사적 수난의 과정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박만도’는 일정한 버릇을 지니고 있다. 단골 술집에 들를 때마다, ‘서방님 들어가신다.’고 하여 술집 여편네와 농담을 하기를 좋아한다. 그런데, 이 날만은 그런 농담을 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가 여느 때와 다른 심리 상태에 놓여 있으며, 몹시 우울해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작가는 등장인물의 말과 행동을 통해 그 성격이나 심리 상태를 드러내는 간접적 표현 방법을 사용했다. 그리고 이 작품에는 ‘아니예’, ‘우짜다가’, ‘똥이다, 똥’ 등 농민들의 투박한 언어가 주로 많이 사용되었는데, 이 또한 등장 인물들의 성격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데 이바지한다.
아버지인 ‘박만도’는 이 작품의 주인공으로서 두 차례의 역사적 수난을 거듭 겪고 있지만, 어려움에 좌절하지 않고 극복해 나아가려는 의지를 지닌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최초의 경험으로 당황하는 아들 ‘진수’와는 이런 점에서 판이하게 구분된다.
□ 주제에 대하여
이 작품은 “수난 이대”라는 제목이 뜻하는 바와 같이, 아버지와 아들 두 세대가 겪은 가족사적 수난을 다룬 것이다. 즉 아버지는 일제와 강제 징용으로 끌려가 팔 한 쪽을 잃고, 아들은 6.25때 참전하여 다리 한 쪽을 잃음으로써 모두 불구가 되었는데,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 두 세대가 겪은 가족사적 수난의 과정을 통해 이 땅의 현대사가 경험한 역사적 비극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 속에 담긴 이야기는 그러한 피해와 확인으로 끝나지 않는다. 차례차례로 팔과 다리를 잃은 이 두 세대가 서로 도와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장면에서 명백히 읽을 수 있는 바와 같이, 비극의 상처와 고통을 서로 감싸고 도우면서 극복해 가려는 의지가 감동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이 작품의 주제는 플롯의 절정을 이루는 이 부분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살아가는 참담한 시대의 인간들이 그래도 삶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고 역사적 시련을 극복하는 과정을 그린 데에 이 작품의 근본적 의의가 있다고 했다.
□ 시점에 대하여
이 작품에는 여러 가지 시점이 혼합되어 나타난다. 어떤 경우에는 전지적 작가 시점이 사용되는가 하면, 어떤 경우에는 작가 관찰자 시점과 1인칭 관찰자 시점이 동시에 사용되기도 한다. 작품에서 주인공 박만도의 성격이 말과 동작으로 제시되어 독자에게 선명하게 전달되고 있는 것은 작가 관찰자 시점에서 서술된 경우이다. 그리고 작중 화자가 인물들의 내면 심리 세계에 대해서까지 서술의 범위를 넓히고 있는 것은 전지적 작가 시점에 의한 경우라 할 수 있다. 이것은 관찰자 시점으로는 너무 단조롭고 평이한 서술에 그치기 때문에 전지적 시점을 병용하여 주제 표출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이다.
이렇듯 여러 시점을 복합적으로 사용하면 혼란을 초래할 수도 있으나, 이 작품에서는 무리 없이 사용하여 오히려 소설의 다양성을 획득하였다.
작품의 전문
1. 수난 이대 / 하근찬
진수가 돌아온다. 진수가 살아서 돌아온다. 아무개는 전사했다는 통지가 왔고, 아무개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통 소식이 없는데, 우리 진수는 살아서 오늘 돌아오는 것이다. 생각할수록 어깻바람이 날 일이다. 그래 그런지 몰라도 박만도는 여느때 같으면 아무래도 한두 군데 앉아 쉬어야 넘어설 수 있는 용머리재를 단숨에 올라 채고 만 것이다. 가슴이 펄럭거리고 허벅지가 뻐근했다. 그러나 그는 고갯마루에서도 쉴 생각을 하지 않았다. 들 건너 멀리 바라보이는 정거장에서 연기가 물씬물씬 피어오르며 삐익 기적 소리가 들려 왔기 때문이다. 아들이 타고 내려올 기차는 점심때가 가까워 도착한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다. 해가 이제 겨우 산등성이 위로 한 뼘 가량 떠올랐으니, 오정이 되려면 아직 차례 멀은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공연히 마음이 바빴다. 까짓것, 잠시 앉아 쉬면 뭐할 기고.
손가락으로 한쪽 콧구멍을 누르면서 팽! 마른 코를 풀어 던졌다. 그리고 휘청휘청 고갯길을 내려가는 것이다.
내리막은 오르막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대고 팔을 흔들라치면 절로 굴러 내려가는 것이다. 만도는 오른쪽 팔만을 앞뒤로 흔들고 있었다. 왼쪽 팔은 조끼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고 있는 것이다. 삼대 독자가 죽다니 말이 되나. 살아서 돌아와야 일이 옳고말고. 그런데 병원에서 나온다 하니 어디를 좀 다치기는 다친 모양이지만, 설마 나같이 이렇게사 되지 않았겠지. 만도는 왼쪽 조기 주머니에 꽂힌 소맷자락을 내려다보았다. 그 소맷자락 속에는 아무것도 든 것이 없었다. 그저 소맷자락만이 어깨 밑으로 덜렁 처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노상 그쪽은 조끼 주머니 속에 꽂혀 있는 것이다. 볼기짝이나 장딴지 같은 데를 총알이 약간 스쳐갔을 따름이겠지. 나처럼 팔뚝 하나가 몽땅 달아날 지경이었다면 그 엄살스런 놈이 견뎌 냈을 턱이 없고말고. 슬며시 걱정이 되기도 하는 듯 그는 속으로 이런 소리를 주워섬겼다.
내리막길은 빨랐다. 벌써 고갯마루가 저만큼 높이 쳐다보이는 것이다. 산모퉁이를 돌아서면 이제 들판이다. 내리막길을 쏘아 내려 온 기운 그대로, 만도는 들길을 잰걸음 쳐 나가다가 개천 둑에 이르러서야 걸음을 멈추었다. 외나무다리가 놓여 있는 조그마한 시냇물이었다. 한여름 장마철에는 들어설라치면 배꼽이 묻히는 수도 있었지마는 요즈막엔 무릎이 잠길 듯 말듯 한 물인 것이다. 가을이 깊어지면서부터 물은 밑바닥이 환히 들여다보일 만큼 맑아져 갔다. 소리도 없이 미끄러져 내려가는 물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으면 절로 잇속이 시려 온다.
만도는 물 기슭에 내려가서 쭈그리고 앉아 한 손으로 고의춤을 뜯어 헤쳤다. 오줌을 찌익 갈기는 것이다. 거울면처럼 맑은 물위에 오줌이 가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뿌우연 거품을 이루니 여기저기서 물고기 떼가 모여든다. 제법 엄지손가락만씩한 피리도 여러 마리다. 한 바가지 잡아서 회쳐 놓고 한잔 쭈욱 들이켰으면……. 군침이 목구멍에서 꿀꺽했다. 고기 떼를 향해서 마른 코를 팽팽 풀어 던지고, 그는 외나무다리를 조심히 디뎠다.
길이가 얼마 되지 않는 다리었으나 아래로 몸을 내려다보면 제법 아찔했다. 그는 이 외나무다리를 퍽 조심한다.
언젠가 한번, 읍에서 술이 꽤 되어가지고 흥청거리며 돌아오다가, 물에 굴러 떨어진 일이 있었던 것이다. 지나치는 사람이 없었기에망정이지, 누가 보았더라면 큰 웃음거리가 될 뻔했었다. 발목 하나를 약간 접쳤을 뿐, 크게 다친 데는 없었다. 이른 가을철이었기 때문에 옷을 벗어 둑에 널어놓고 말릴 수는 있었으나 여간 창피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옷이 말짱 젖었다거나 옷이 마를 때까지 발가벗고 기다려야 한다거나 해서가 아니었다. 팔뚝 하나가 몽땅 잘라져 나간 흉측한 몸뚱이를 하늘 앞에 드러내 놓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지나치는 사람이 있을라치면, 하는 수없이 물 속으로 뛰어 들어가서 얼굴만 내놓고 앉아 있었다. 물이 선뜩해서 아래턱이 덜덜거렸으나, 오그라 붙는 사타구니를 한 손으로 꽉 움켜쥐고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흐흐흐…….”
그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곧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하늘로 쳐들린 콧구멍이 연방 벌름거렸다.
개천을 건너서 논두렁 길을 한참 부지런히 걸어가노라면 읍으로 들어가는 한길이 나선다. 도로변에 먼지를 부옇게 덮어 쓰고 도사리고 앉아 있는 초가집은 주막이다. 만도가 읍네 나올 때마다 꼭 한번씩 들르곤 하는 단골집인 것이다. 이 집 눈썹이 짙은 여편네와는 예사로 농을 주고 받는 사이다.
술방 문턱을 들어서며 만도가,
“서방님 들어가신다.”
하면, 여편네는,
아이 문둥아 어서 오느라.“
하는 것이 인사처럼 되어 있었다. 만도는 여간 언짢은 일이 있어도 이 여편네의 궁둥이 곁에 가서 앉으면 속이 절로 쑥 내려가는 것이었다.
주막 앞을 지나치면서 만도는 술방 문을 열어 볼까 했으나, 방문 앞에 신이 여러 켤레 널려 있고, 방안에서 웃음소리가 요란하기 때문에 돌아오는 길에 들르기로 했다. 신작로에 나서면 금시 읍이었다. 만도는 읍 들머리에서 잠시 망설이다가, 정거장 쪽과는 반대되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장거리를 찾아가는 것이었다. 진수가 돌아오는데 고등어나 한 손 사가지고 가야 될 거 아닌가, 싶어서였다. 장날은 아니었으나, 고깃전에는 없는 고기가 없었다. 이것을 살까 하면 저것이 좋아 보이고 그것을 사러 가면 또 그 옆의 것이 먹음직해 보이고 그것을 사러 가면 또 그 옆의 것이 먹음직해 보였다. 한참 이리저리 서성거리다가 결국은 고등어 한 손이었다. 그것을 달랑달랑 들고 정거장을 향해 가는데, 겨드랑 밑이 간질간질해 왔다. 그러나 한쪽밖에 없는 손에 고등어를 들었으니 참 딱했다. 어깻죽지를 연방 위아래로 움직거리는 수밖에 없었다. 정거장 대합실에 들어선 만도는 먼저 벽에 걸린 시계부터 바라보았다. 두시 이십분이었다. 벌써 두시 이십분이니 내가 잘못 보나? 아무리 두 눈을 씻고 보아도 시계는 틀림없는 두시 이십분이었다. 한쪽 걸상에 가서 궁둥이를 붙이면서도 곧장 미심쩍어 했다. 두시 이십분이라니, 그럼 벌써 점심때가 겨웠단 말인가? 말도 아닌 것이다. 자세히 보니 시계는 유리가 깨어졌고 먼지가 꺼멓게 앉아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엉터리였다. 벌써 그렇게 되었을 리가 없는 것이다.
“여보이소 지금 몇 싱교?”
맞은편에 앉은 양복장이한테 물어 보았다.
“열시 사십분이오.”
“예, 그렁교.”
만도는 고개를 굽실하고는 두 눈을 연방 껌벅거렸다. 열시 사십분이라, 보자 그럼 아직도 한 시간이나 나마 남았구나. 그는 안심이 되는 듯 후유 숨을 내쉬었다. 궐련을 한 깨 뻬 물고 불을 댕겼다. 정거장 대합실에 와서 이렇게 도사리고 앉아 있노라면, 만도는 곧잘 생각키는 일이 한 가지 있었다. 그 일이 머리에 떠오르면 등골을 찬 기운이 좍 스쳐 내려가는 것이었다. 손가락이 시퍼렇게 굳어진 이끼 낀 나무토막 같은 팔뚝이 지금도 저만큼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바로 이 정거장 마당에 백 명 남짓한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 중에는 만도도 섞여 있었다.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으나, 그들은 모두 자기네들이 어디로 가는 것인지 알지를 못했다. 그저 차를 타라면 탈 사람들이었다. 징용에 끌려 나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십 이삼년 옛날의 이야기인 것이다.
북해도 탄광으로 갈 것이라는 사람도 있었고 틀림없이 남양군도로 간다는 사람도 있었다. 더러는 만주로 가면 좋겠다고 하기도 했다. 만도는 북해도가 아니면 남양군도일 것이고, 거기도 아니면 만주겠지, 설마 저희들이 하늘 밖으로사 끌고 가겠느냐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그 들창코로 담배 연기를 푹푹 내뿜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이 좀 덜 좋은 것은 마누라가 저쪽 변소 모퉁이 벚나무 밑에 우두커니 서서 한눈도 안 팔고 이쪽만을 바라보고 있는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주머니 속에 성냥을 두고도 옆사람에게 불을 빌리자고 하며 슬며시 돌아서 버리곤 했다. 플랫포옴으로 나가면서 뒤를 돌아보니 마누라는 울 밖에 서서 수건으로 코를 눌러대고 있는 것이었다. 만도는 코허리가 찡했다. 기타가 꽥꽥 소리를 지르면서 덜커덩! 하고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는 정말 덜 좋았다. 눈앞이 뿌우옇게 흐려지는 것을 어쩌지 못했다. 그러나 정거장이 까맣게 멀어져 가고 차창 밖으로 새로운 풍경이 휙휙 날라들자, 그만 아무렇지도 않아지는 것이었다. 오히려 기분이 유쾌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바다를 본 것도 처음이었고, 그처럼 큰배에 몸을 실어 본 것은 더구나 처음이었다. 배 밑창에 엎드려서 꽥꽥 게워내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만도는 그저 골이 좀 띵했을 뿐 아무렇지도 않았다. 더러는 하루에 두 개씩 주는 뭉치밥을 남기기도 했으나, 그는 한꺼번에 하룻 것을 뚝딱해도 시원찮았다. 모두 내릴 준비를 하라는 명령이 떨어진 것은 사흘째 되는 날 황혼때었다. 제가끔 봇짐을 챙기기에 바빴다. 만도도 호박덩이만한 보따리를 옆구리에 덜렁 찼다. 갑판 위에 올라가 보니 하늘은 활활 타오르고 있고, 바닷물은 불에 녹은 쇠처럼 벌겋게 출렁거리고 있었다. 지금 막 태양이 물위로 뚝딱 떨어져 가는 것이었다. 햇덩어리가 어쩌면 그렇게 크고 붉은지 정말 처음이었다. 그리고 바다 위에 주황빛으로 번쩍거리는 커다란 산이 둥둥 떠 있는 것이었다. 무시무시하도록 황홀한 광경에 모두들 딱 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몰랐다. 만도는 어깨마루를 버쩍 들러 올리면서, 히야 고함을 질러댔다. 그러나, 섬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숨막히는 더위와 강제 노동과 그리고, 잠자리만씩이나 한 모기 떼…….그런 것뿐이었다.
섬에다가 비행장을 닦는 것이었다. 모기에게 물려 혹이 된 자리를 벅벅 긁으며, 비오듯 쏟아지는 땀을 무릅쓰고, 아침부터 해가 떨어질 때까지 산을 허물어 내고, 흙을 나르고 하기란, 고향에서 농사 일에 뼈가 굳어진 몸에도 이만저만한 고역이 아니었다. 물도 입에 맞지 않았고, 음식도 이내 변하곤 해서 도저히 견디어 낼 것 같지가 않았다. 게다가 병까지 돌았다. 일을 하다가도 벌떡 자빠지기가 예사였다. 그러나 만도는 아침저녁으로 약간씩 설사를 했을 뿐, 넘어지지는 않았다. 물도 차츰 입에 맞아 갔고, 고된 일도 날이 감에 따라 몸에 배어드는 것이었다. 밤에 날개를 차며 몰려드는 모기 떼만 아니면 그냥저냥 배겨내겠는데, 정말 그놈의 모기들만은 질색이었다.
사람의 일이란 무서운 것이었다. 그처럼 험난하던 산과 산 틈바구니에 비행장을 다듬어 내고야 말았던 것이다. 허나 일은 그것으로는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더 벅찬 일이 닥치는 것이었다. 연합군의 비행기가 날아들면서부터 일은 밤중까지 계속되었다. 산허리에 굴을 파들어 가는 것이었다. 비행기를 집어 넣을 굴이었다. 그리고 모든 시설을 다 굴속으로 옮겨야 하는 것이었다.
여기저기 다이너마이트 튀는 소리가 산을 흔들어댔다. 앵앵앵 하고 공습경보가 나면 일을 하던 손을 놓고 모두가 굴 바닥에 납작납작 엎드려 있어야 했다. 비행기가 돌아갈 때까지 그러고 있는 것이었다. 어떤 때는 근 한 시간 가까이나 엎드려 있어야 하는 때도 있었는데 차라리 그것이 얼마나 편한지 몰랐다. 그래서 더러는 공습이 있기를 은근히 기다리기도 했다. 때로는 공습 경보의 사이렌을 듣지 못하고 그냥 일을 계속하는 수도 있었다.
그럴 때는 모두 큰 손해를 보았다고 야단들이었다. 어떻게 된 셈인지 사이렌이 미처 불기 전에 비행기가 산등성이를 넘어 달려드는 수도 있었다. 그럴 때는 정말 질겁을 하는 것이었다. 가장 많은 손해를 입는 것도 그런 경우였다. 만도가 한쪽 팔뚝을 잃어버린 것도 바로 그런 때의 일이었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굴 속에서 바위를 허물어 내고 있었다. 바위 틈서리에 구멍을 뚫어서 다이너마이트를 장치하는 하는 것이었다. 장치가 다 되면 모두 바깥으로 나가고, 한 사람만 남아서 불을 당기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터지기 전에 얼른 밖으로 뛰어나와야 되었다. 만도가 불을 당기는 차례였다. 모두 바깥으로 나가 버린 다음 그는 성냥을 꺼냈다. 그런데 웬 영문인지 기분이 께름직했다. 모기에게 물린 자리가 자꾸 쑥쑥 쑤시는 것이다. 걱즉걱즉 긁어댔으나 도무지 시원한 맛이 없었다. 그는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성냥을 득 그었다. 그래 그런지 몰라도, 불은 이내 픽 하고 꺼져 버렸다. 성냥 알맹이 네 개째에사 겨우 심지에 불이 당겨졌다. 심지에 불이 붙는 것을 보자 그는 얼른 몸을 굴 밖으로 날렸다. 바깥으로 막 나서려는 때였다. 산이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사나운 바람이 귓전을 후려갈기는 것이었다. 만도는 정신이 아찔했다. 공습이었던 것이다. 산등성이를 넘어 달려든 비행기가 머리 위로 아슬아슬하게 지나가는 것이었다.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또 한 대가 뒤따라 날라드는 것이 아닌가. 만도는 그만 넋을 잃고 굴 안으로 도로 달려들었다. 달려들어가서 굴 바닥에 아무렇게나 팍 엎드러져 버리고 말았다. 고 순간이었다. 꽝! 굴 안이 미어지는 듯하면서 다이너마이트가 터졌다. 만도의 두 눈에서 불이 번쩍 났다.
만도가 어렴풋이 눈을 떠 보니, 바로 거기 눈 앞에 누구의 것인지 모를 팔뚝이 하나 놓여 있었다. 손가락이 시퍼렇게 굳어져서, 마치 이끼 낀 나무 토막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만도는 그것이 자기의 어깨에 붙어 있던 것인 줄을 알자, 그만 으아! 하고 정신을 잃어버렸다. 재차 눈을 땠을 때는 그는 폭삭한 담요 속에 누워 있었고, 한쪽 어깻죽지가 못 견디게 쿡쿡 쑤셔댔다. 절단 수술(切斷手術)은 이미 끝난 뒤였다.
꽤액 --- 기차 소리였다. 멀리 산모퉁이를 돌아오는가 보았다. 만도는 앉았던 자리를 털고 벌떡 일어서며, 옆에 놓아 두었던 고등어를 집어 들었다. 기적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그의 가슴은 울렁거렸다. 대합실 밖으로 뛰어나가 홈이 잘 보이는 울타리 쪽으로 가서 발돋움을 하였다. 째랑째랑 하고 종이 울자, 한참만에 차는 소리를 지르면서 달려 들었다. 기관차의 옆구리에서는 김이 픽픽 풍겨 나왔다. 만도의 얼굴은 바짝 긴장되었다. 시꺼먼 열차 속에서 꾸역꾸역 사람들이 밀려 나왔다. 꽤 많은 손님이 쏟아져 내리는 것이었다. 만도의 두 눈은 곧장 이리저리 굴렀다. 그러나 아들의 모습은 쉽사리 눈에 띠지 않았다. 저 쪽 출찰구로 밀려 가는 사람의 물결 속에, 두 개의 지팡이를 의지하고 절룩거리며 걸어 나가는 상이 군인이 있었으나, 만도는 그 사람에게 주의를 기울이지는 않았다. 기차에서 내릴 사람은 모두 내렸는가 보다. 이제 미처 차에 오르지 못한 사람들이 플랫폼을 이리저리 서성거리고 있을 뿐인 것이다. 그 놈이 거짓으로 편지를 띄웠을 리는 없을 건데……. 만도는 자꾸 가슴이 떨렸다. 이상한 일이다, 하고 있을 때였다. 분명히 뒤에서.
“아부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만도는 깜짝 놀라며,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만도의 두 눈은 무섭도록 크게 떠지고 입은 딱 벌어졌다. 틀림없는 아들이었으나, 옛날과 같은 진수는 아니었다. 양쪽 겨드랑이에 지팡이를 끼고 서 있는데, 스쳐가는 바람결에 한쪽 바짓가랑이가 펄럭거리는 것이 아닌가. 만도는 눈앞이 노오래지는 것을 어쩌지 못했다. 한참 동안 그저 멍멍하기만 하다가, 코허리가 찡해지면서 두 눈에 뜨거운 것이 핑 도는 것이었다.
“에라이 이놈아!”
만도의 입술에서 모지게 튀어나온 첫마디였다. 떨리는 목소리였다. 고등어를 든 손이 불끈 주먹을 쥐고 있었다.
“이기 무슨 꼴이고, 이기.”
“아부지!”
“이놈아, 이놈아……”
만도의 들창코가 크게 벌름거리다가 훌쩍 물코를 들이마셨다. 진수의 두 눈에서는 어느 결에 눈물이 꾀죄죄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만도는 모든 게 진수의 잘못이기나 한 듯 험한 얼굴로,
“가자, 어서!”
무뚝뚝한 한 마디를 내던지고는 성큼성큼 앞장을 서 가는 것이었다. 진수는 입술에 내려와 묻는 짭짤한 것을 혀 끝으로 날름 핥아 버리면서, 절름절름 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앞장 서 가는 만도는 뒤따라오는 진수를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한눈을 파는 법도 없었다. 무겁디 무거운 짐을 진 사람처럼 땅바닥만을 내려다보며, 이따금 끙끙거리면서 부지런히 걸어만 가는 것이다.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고 걷는 진수가 성한 사람의, 게다가 부지런히 걷는 걸음을 당해 낼 수는 도저히 없었다. 한 걸음 두 걸음씩 뒤지기 시작한 것이, 그만 작은 소리로 불러서는 들리지 않을 만큼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진수는 목구멍을 왈칵 넘어오려는 뜨거운 기운을 꾹 참노라고 어금니를 야물게 깨물어 보기도 하였다. 그리고 두 개의 지팡이와 한 개의 다리를 열심히 움직여대는 것이었다. 앞서 간 만도는 주막집 앞에 이르자, 비로소 한 번 뒤를 돌아 보았다. 진수는 오다가 나무 밑에 서서 오줌을 누고 있었다. 지팡이는 땅바닥에 던져 놓고, 한쪽 손으로는 볼일을 보고, 한쪽 손으로는 나무 둥치를 감싸 안고 있는 모양이 을씨년스럽기 이를데 없는 꼬락서니였다. 만도는 눈살을 찌푸리며, 으음! 하고 신음 소리 비슷한 무거운 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술방 앞으로 가서 방문을 왈칵 잡아당겼다.
기역자판 안에 도사리고 앉아서 속옷을 뒤집어 까고 이를 잡고 있던 여편네가 킥 하고 웃으며 후닥딱 옷섶을 여몄다. 그러나 만도는 웃지를 않았다. 방 문턱을 넘어서며도 서방님 들어가신다는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아마 이처럼 무뚝한 얼굴을 하고 이 술방에 들어서기란 처음일 것이다. 여편네가 멋도 모르고,
“오늘은 서방님 아닌가배.”
하고 킬킬 웃었으나, 만도는 으음! 또 무거운 신음 소리를 했을 뿐 도시 기분을 내지 않았다. 기역자판 앞에 가서 쭈그리고 앉기가 바쁘게,
“빨리 빨리.”
재촉을 하였다.
“핫다나, 어지간히도 바쁜가배.”
“빨리 꼬빼기로 한 사발 달라니까구마.”
“오늘은 와 이카노?”
여편네가 쳐주는 술사발을 받아 들며, 만도는 휴유 --- 하고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리고 입을 얼른 사발로 가져갔다. 꿀꿀꿀, 잘도 넘어가는 것이다. 그 큰 사발을 단숨에 말려 버리고는, 도로 여편네눈 앞으로 불쑥 내밀었다. 그렇게 거들빼기로 석 잔을 해치우고사 으으윽! 하고 개트림을 하였다. 여편네가 눈을 휘둥굴해 가지고 혀를 내둘렀다. 빈 속에 술을 그처럼 때려 마시고 보니, 금새 눈두덩이 확확 달아오르고, 귀뿌리가 발갛게 익어 갔다. 술기가 얼큰하게 돌자, 이제 좀 속이 풀리는 성 싶어 방문을 열고 바깥을 내다보았다. 진수는 이마에 땀을 척척 흘리면서 다 와 가고 있었다.
“진수야!”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리 들어와 보래.”
“………….”
진수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어기적어기적 다가왔다. 다가와서 방 문턱에 걸터앉으니까, 여편네가 보고,
“방으로 좀 들어오이소.”
하였다.
“여기 좋심더.”
그는 수세미 같은 손수건으로 이마와 코 언저리를 싹싹 닦아냈다.
“마 아무데서나 묵어라. 저 --- 국수 한 그릇 말아 주소.”
“야.”
“꼬빼기로 잘 좀 ……. 참지름도 치소, 알았능교?”
“야아.”
여편네는 코로 히죽 웃으면서 만도의 옆구리를 살짝 꼬집고는, 소쿠리에서 삶은 국수 두 뭉텅이를 집어 들었다.
진수가 국수를 훌훌 끌어 넣고 있을 때, 여편네는 만도의 귓전으로 얼굴을 갖다 댔다.
“아들이가?”
만도는 고개를 약간 앞뒤로 끄덕거렸을 뿐, 좋은 기색을 하지 않았다. 진수가 국물을 훌쩍 들어마시고 나자, 만도는,
“한 그릇 더 묵을래?”
하였다.
“아니 예.”
“한 그릇 더 묵지 와.”
“고만 묵을랍니더.”
진수는 입술을 싹 닦으며 뿌시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막을 나선 그들 부자는 논두렁길로 접어들었다. 아까와 같이 만도가 앞장을 서는 것이 아니라, 이번에는 진수를 앞세웠다. 지팡이를 짚고 찌긋둥찌긋둥 앞서 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팔뚝이 하나밖에 없는 아버지가 느럿느럿 따라가는 것이다. 손에 매달린 고등어가 대구 달랑달랑 춤을 추었다. 너무 급하게 들어마셔서 그런지, 만도의 뱃속에서는 우글우글 술이 끓고, 다리가 휘청거렸다. 콧구멍으로 더운 숨을 훅훅 내불어 보니 정신이 아른해서 역시 좋았다.
“진수야!”
“예.”
“니 우째다가 그래 됐노?”
“전쟁하다가 이래 안 됐심니꼬. 수류탄 쪼가리에 맞았심더.”
“수류탄 쪼가리에?”
“예.”
“음.”
“얼른 낫지 않고 막 썩어 들어가기 땜에 군의관이 짤라 버립디더.병원에서예.아부지!”
“와?”
“이래 가지고 우째 살까 싶습니더.”
“우째 살긴 뭘 우째 살아? 목숨만 붙어 있으면 다 사는 기다. 그런 소리 하지 말아.”
“……”
“나 봐라. 팔뚝이 하나 없어도 잘만 안 사나. 남 봄에 좀 덜 좋아서 그렇지, 살기사 왜 못 살아.”
“차라리 아부지같이 팔이 하나 없는 편이 낫겠어예. 다리가 없어놓니, 첫째 걸어댕기기에 불편해서 똑 죽겠심더.”
“야야. 안 그렇다. 걸어댕기기만 하면 뭐 하노, 손을 지대로 놀려야 일이 뜻대로 되지.”
“그러까예?”
“그렇다니, 그러니까 집에 앉아서 할 일은 니가 하고, 나댕기메할 일은 내가 하고, 그라면 안 대겠나, 그제?”
“예”
진수는 아버지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만도는 돌아보는 아들의 얼굴을 향해 지긋이 웃어주었다. 술을 마시고 나면 이내 오줌이 마려워지는 것이다. 만도는 길가에 아무데나 쭈그리고 앉아서 고기 묶음을 입에 물려고 하였다. 그것을 본 진수는,
“아부지, 그 고등어 이리 주소,”
하였다. 팔이 하나밖에 없는 몸으로 물건을 손에 든 채 소변을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아버지가 볼일을 마칠 때까지, 진수는 저만큼 떨어져 서서 지팡이를 한쪽 손에 모아 쥐고, 다른 손으로 고등어를 들고 있었다. 볼일을 다 본 만도는 얼른 가서 아들의 손에서 고등어를 다시 받아 든다.
개천 둑에 이르렀다. 외나무 다리가 놓여 있는 그 시냇물이다. 진수는 슬그머니 걱정이 되었다. 물은 그렇게 깊은 것 같지 않지만, 밑바닥이 모래흙이어서 지팡이를 짚고 건너가기가 만만할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외나무다리는 도저히 건너갈 재주가 없고……. 진수는 하는 수 없이 둑에 퍼지고 앉아서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리기 시작했다. 만도는 잠시 멀뚱히 서서 아들의 하는 양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진수야, 그만두고, 자아 업자.”하는 것이었다.
“업고 건느면 일이 다 되는 거 아니가. 자아, 이거 받아라.”
고등어 묶음을 진수 앞으로 민다.
“…….”
진수는 퍽 난처해 하면서, 못 이기는 듯이 그것을 받아 들었다. 만도는 등허리를 아들 앞에 갖다 대고, 하나밖에 없는 팔을 뒤로 버쩍 내밀며,
“자아, 어서!”
진수는 지팡이와 고등어를 각각 한 손에 쥐고, 아버지의 등허리로 가서 슬그머니 업혔다. 만도는 팔뚝을 뒤로 돌리면서, 아들의 하나뿐인 다리를 꼭 안았다. 그리고
“팔로 내 목을 감아야 될 끼다.”
했다. 진수는 무척 황송한 듯 한쪽 눈을 찍 감으면서, 고등어와 지팡이를 든 두 팔로 아버지의 굵은 목줄기를 부둥켜안았다. 만도는 아랫배에 힘을 주며, ‘끙!’ 하고 일어났다. 아랫도리가 약간 후들거렸으나 걸어갈 만은 했다. 외나무다리 위로 조심조심 발을 내디디며 만도는 속으로, 이제 새파랗게 젊은 놈이 벌써 이게 무슨 꼴이고. 세상들 잘못 만나서 진수 니 신세도 참 똥이다, 똥. 이런 소리를 주워섬겼고, 아버지의 등에 업힌 진수는 곧장 미안스러운 얼굴을 하며, ‘나꺼정 이렇게 되다니, 아부지도 참 복도 더럽게 없지, 차라리 내가 죽어버렸더라면 나았을 낀데…….’하고 중얼거렸다.
만도는 아직 술기가 약간 있었으나, 용케 몸을 가누며 아들을 업고 외나무다리를 조심조심 건너가는 것이었다. 눈앞에 우뚝 솟은 용머리재가 이 광경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