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의 윗부분의 첫번째 사진은 알렉산더가 살을 뺀 모습이에요
훨씬 멋있죠~ 저 수트보고 멋있어서
기절하는줄 알았습니다 ^^
기네스 펠트로가 런던에 있는 이유는(지금도 있는진 몰겠지만;;)스텔라의 강력한 권유도 있었지만
알렉산더 맥퀸의 컬렉션을 보기 위해서라고 말할 정도죠.그가 천재이기때문에 그의 옷을 산다고도 말하기도 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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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개성과 도전적인 스타일의 천재성과 상업적인 성공을 다 거둔
이 젊은 디자이너로 인해 지방시의 뒤를 잇는 (맥퀸에 이어)
줄리앙 맥도널드는 참 부담스러울 것 같기도 합니다.
놀라운 독창성에도 불구하고 맥퀸의 의상은 뛰어난
재단술로 입기에도 편하다고 합니다.
맥퀸의 어깨가 강조된 매니쉬한 재킷은
칼 라거펠트 갤거리의 컬렉션에서 비슷하게 재연되기도 했죠..
<a.m report>
택시기사의 아들이었던 알렉산더 맥퀸은 그의 무산계급으로서의 불손함이 쓰레기 등과 같은 잡동사니와 포스트 펑크 등으로부터 오히려
영감을 얻는데서 탄생되었다.
맥퀸은 패션계의 지배적인 자리를 확보하고 있으며 동시에 런던패션에 활력을 되찾아 주었고 고전적인 파리의 패션계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그렇다면 그는 미래를 디자인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는가? 16세에
맥퀸은 Savile Row에서 재단사Anderson, Shepard, 그리고 Gieves와
함께 실습생으로 일하였다.
그곳에서 찰스왕자와 미카일 고르바체프의 옷을 바느질하였다. 맥퀸이 lining한 코트로 인해 모욕을 받은 찰스왕자의 사건 이후 그는 영국에서 'bad boy'로 알려지게 됐다.
Koji Tatsuno와 Romeo Gigli 와의 작업기간 이후 멕퀸은 런던의 명성
높은 St.Martins's College에 들어갔으며
그의 석사논문 발표 과정에서 후에 그를 엘리트 패션계로 발 딛을 수
있도록 도와준 스타일리스트 Isabella Blow의 관심을 사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아웃사이더로 남게 되었다. 그는 세계적인 라거펠드와
어울리는 것도, 속물처럼 도도하게 행동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1992년 멕퀸은 자신의 이름으로 패션세계를 놀라게 했다.
1995의 봄/여름 쇼에서 그는 스카치 테이프와 타이어 바퀴 자국으로
장식된 모델들을 쇼에 서게 함으로써 여자를 경멸하는 남자라고 비난을 받았다
또한 영국의 18세기 스코틀랜드의 대학살을 기념하기 위한 그의 쇼에서 모델들은 피로 얼룩지고 탬폰의 줄을 보이게 하고 베어진 타탄과
쪽모임세공된 레이스 드레스를 입음으로써 큰 화제거리가 되는 동시에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이러한 모든 비판과 비난 뒤에는 완성도 높은 그의 작품이 있으며 어두우면서 섹시한 미가 우리를 매료시킨다.
런던은 90년도 중반에 뛰어난 재능들로 넘쳐나게 되었는데 대부분은
맥퀸의 영감으로부터 얻어진 것이다. 1996년 맥퀸의 사치스러운 시각은
그해의 영국 디자이너 상을 수상하게 되었으며 같은 해, 지방시의 디자이너로 채택되었다.
그의 지방시에서의 첫번째 쇼에서는 신화적인 행렬을 내보내게 되는데 이 행렬은 벤허를 초라하게 느끼게 할 정도로 웅장한 행렬이었다.
언론은 그의 뛰어난 재능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도금한 갑옷, 깃으로
장식한 큐피드, 그리고 코르셋을 받쳐입은 검투사들의 행렬에 비난을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이러한 화려한 쇼에서 벗어나 1998년 일본적인 우아한
스타일을 시도하면서 1999년 봄/여름 컬레션에서 새로운 기하학적인
유동성을 선보였다.
맥퀸은 최근 그의 파격적인 스타일에서 벗어나 좀더 현실성있는 입을수 있는 옷들을 만들어내고 있으나
그의 진정한 재능은 틀에 박힌 패션에서 벗어난, 금기시 되는 것들을
띄어넘고자 하는 그의 욕망이며 지방시가 그의 이러한 스타일을 수용할 수 없다면 맥퀸 라인의 그림자에 가려질수 밖에 없다.
맥퀸 본인의 라인이 지속적으로 찬사를 받고 있으며 1999년 봄/여름
컬렉션은 영국이 그의 선정주의에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의족의 모델이 등장하고
흰 발레리나 가운을 입은 Shalom Harlowe에게 검정과 노란 잉크를 분사하는 두 로봇의 쇼는 그의 재능을 확연히 나타내었다.
알렉산더 맥퀸 이라는 이름은 이제 전세계에 패션 매니아들을 설레이게 하는 진정한 크리에이티브로 칭송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