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續 서남동길
(1)
다시 통일전망대에
울진땅(경상북도) 월송정에서 귀가할 서울 영감을 태우러 먼 길을 달려온 이는 태백(강
원도) 사람 김영규.
감당하기 벅찬 큰 우환중에도 우리에게 회를 먹여주려 애쓴 사람은 노실(강원도 삼척시
임원)의 어부 장봉주.
불가에서는 옷깃만 스쳐도 억겁의 인연이라지만 동아줄 같은 인연의 아우들이다.
가다 오다 만났지만 혈연을 기죽게 하는 사람들임을 다시 확인하며 귀가한지 24일.
애들 성화에 예전과 달리 생일을 집에서 보내기 때문에 추석을 넘긴 10월 5일 강릉가는
무궁화호 심야열차에 올랐다.
3개월 남짓 전(6월 27일?), 16km가 넘는 터널(솔안터널)의 개통으로 우리나라 유일의
스위치백(switchback) 구간이 사라진 영동선.
추억을 잃어버리게 된 듯 아쉽기는 해도 진일보한 우리 철도에 흐뭇한 기분인데 영동선
스위치백 뿐 아니라 스위치백 자체를 모르는 열차승무원이라니 희한한 철도직원이다.
10월 6일(토) 새벽 4시 42분에 도착한 강릉역에서 시외버스터미널까지 걸었다.
중도시 이상의 도시에서는 새벽이 오히려 좋다.
길을 물을 수 있는 새벽의 미화원들을 어렵잖게 만날 수 있으니까.
길을 안내하는 사람마다 택시를 타라고 권했지만 고성방면(거진) 첫차(5:50)를 타려면
어차피 대기해야 하는 시간에 걸은 것이다.
거진시외버스터미널까지 2시간 10분 걸린다는 시간표와 달리 1시간 반만에 도착했다.
차량들의 정체가 심한 시간대를 기준했기 때문일 것이다.
고성버스의 현내면 종점에서 만만디로 걸었는데도 출입신고소에는 8시 남짓에 도착함
으로서 전망대 입장 개시시간(9시)에 빠듯하리라는 예상과 달리 많이 기다려야 했다.
보행자 입장불가의 난제 해결사는 인천의 젊은이.
혼자인 그는 팀으로 묶일 때의 불편(나올 때도 동행해야 하는)을 감수하고 스스로 나와
팀을 만든 고마운 청년이다.
민통선 내의 자유로운 활동을 용인한다면 보행자의 출입도 허용되어야 할 것이다.
전망대까지 11km가 보행로로는 무리지만 오전 이른 시간대에는 허용해도 되지 않을까.
왕복 시간을 고려해서.
적지 않은 입장료를 받으면서 셔틀버스 운행 정도는 하는 것이 도리일 것이다.
그보다, 대규모 단체버스(대형) 외에는 모든 차량을 신고소 주차장에 두고 셔틀버스를
이용해 전망대에 오르도록 하면 어떨까.
대국적으로 보면 왕복 22km의 유류절감도 결코 경시할 수 없는 효과일 텐데.
월북자 발생 사건 때문에 제약이 많다지만 보행자가 월북한 것이 아니잖은가.
당국자들(국정원)의 대(對)국민 자세에 따라서 획기적 개선의 여지가 많은 운영이다.
축복받지 못한 탄생, DMZ과 남방한계선이 만나는 해발70m 고지의 통일전망대.
코앞의 송도, 금강산 구선봉과 해금강도 지척이고 흐릿하게나마 일출봉, 채화봉,육선봉,
집선봉, 세존봉, 옥녀봉, 신선대 등 금강산의 절경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휴전선 철책을 금기의 선으로 하여 대치하고 있는 최전방 초소.
동족간의 살육과 분단의 고통을 피부로 느끼게 하는 곳이다.
발 아래 저 앞의 동해북부선 철도와 2004년 12월에 개통되었다는 동해선 남북연결도로.
금강산 육로관광이 이뤄지던 한때는 오매불망의 통일이 곧 올 것으로 기대하게 했건만.
도로와 철로가 유난히 쓸쓸해 보였다.
통일전망대는 다시 먹구름에 덮혔고 통일의 전망이 없는 전망대가 되고 말았다.
통일 후의 비전으로 채워도 모자랄 전망대에는 북쪽은 섬멸해야 할 적으로 복귀되었다.
(전망대 이야기는 메뉴 '통한의 휴전선' 의 12회 글(최종회) <다시 '최악의 통일이라도
최선의 분단보다 낫다'>로 대신한다)
이른 아침부터 어떤 행사를 준비하고 있는 국군 어느 부대의 군악대.
'ROTC강릉동지회'가 주관하는 어느 걷기팀의 장도를 축하하기 위해서 동원된 듯 한데
통일을 경축하는 팡파르(fanfare)를 위해 왔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적하고 평화로운 명파리 해변, 남반도 최북단 동해의 해수욕장인 명파리해수욕장.
이 지역 민통선의 북상, 이전으로(1995년?) 민간인에게 개방되었고 금강산의 육로관광
개시에 따라 등장한 접객업소들이 금강산 길이 막힘에 따라 폐업 또는 휴업상태인 곳.
(달리는 차창을 통해 일별한 것이 아쉬웠는데 7개월여 만인 지난 5월에 풀었다.)
이설(異說) 관동별곡
전망대를 나온 시각은 10시 40분.
11시 정각에 마차진해변(縣內面麻次津)에서 월송정(경북울진군)을 향해 걷기를 시작해
대형 금강산콘도 뒤 무송정(茂松亭) 해안 백사장에서 잠시 머물렀다.
이름대로 소나무 숲이 무성하나 무송부원군 윤자운(茂松府院君尹子雲/1416~1478)이
머물다 갔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우찬성 때 함길도체찰사가 되어 이시애의 난(李施愛亂)을 진압하러 갔으나 되레 반군에
잡혀 거짓 문서에 서명하고 구명해 돌아온 사람이다.
그럼에도,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때 공신이라 하여 세조가 많이 봐주었다.
삼상(三相)을 두루 거쳤으니까.
'관동별곡800리길'이 조성되었는가.
해안길에 안내판이 등장했다.
몇개 코스로 구분한 듯한 이 길이 정 송강(松江鄭澈/1536~1593)의 관동별곡에 근거한
길이라면 고성의 길이 아니라 강원도의 길이겠다.
마차진에서 삼척 죽서루까지 라니까.
그렇다 해도 울진의 2경은 무엇으로 채우는가.
송강이 말하는 관동은 울진이 경상북도로 이속되기 전, 강원도 땅이었을 때니까.
그렇다면 내 길은 이설(異說) 관동별곡으로 하자.
대진1리해수욕장 주변이 민박집촌이다.
내가 만일 이 곳에서 민박한다면 주저 없이 찍을 집이 보였다.
데크만 있을 뿐 아무 장식이 없는'연이네 집'(Rental House).
나는 이름도 건물도 이런 집을 좋아한다.
대간, 정맥에서도 새 집(천막)의 등장으로 투숙은 하지 못했지만 별님이네 집, 꽃님이네
집 등을 선호했으니까.
철 지나 쓸쓸한 대진해변을 통과해 대진등대로 올라갔다.
현내면 대진리, 대진해변과 대진항 사이 곶(串/岬)에 세운 우리나라 최북단의 등대다.
1973년 1월 20일에 점등했다는 해발 31m의 유인등대다.
무슨 수로 나이를 속이겠는가.
수직31m를 좁은 나선형 철계단 타고 오르는 일이 예전과 달리 수월하지 않았다.
꼭대기에서는 마차진의 금강산콘도와 무송정을 비롯해 북쪽 멀리, 남으로는 대진항 등
동해뿐 아니라 사방의 조망이 일품이지만 현기증을 느끼게 되었으니까.
이 지역은 38도선에서 한참 이북이다.
6. 25민족동란 이전이라면 꿈도 꾸지 못할 북한 해역이다.
하지만, 휴전상태일 망정 총성이 멎고 양측의 한계선이 고착되어감에 따라 내륙은 민통
선을 넘나들며 산 따라 북쪽으로 발길들이 이어졌는데도 바다는 왜 겁을 먹었나.
어로한계선을 남쪽 한참 아래에 설정해 놓고 고기잡이를 제한했다니 말이다.
대진등대는 1980년대까지도 도등(導燈/Leading light)에 불과했단다.
도등이란 우리 어선들의 월경을 막는 일종의 경고등인데 5km 이상 북상해도 되는 어로
한계선을 왜 한참 남쪽에 설정해서 어촌에 타격을 주었을까.
월북은 물론 납북도 막아 어민을 보호한다는 명분보다 패배주의적 몸사리기가 아닌가.
이 등대는 1990년대에 들어서 어로한계선이 북상(5.5km)함에 따라 비로소 등대 본연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단다.
군부독재정권은 어민의 고충과 호소를 군화발로 짓밟아버린 것이다 .
금강산을 통한 남북교류를 비틀어버린 것도 그 피를 받은 후예들이다.
등대가 선 곶(串)의 끝에는 육군 해안소초(小哨)가 있다.
희한한 슬로건을 가진 군대다.
무슨 다른 뜻이 있는지 "이겨놓고 싸운다"는 부대다.
군인에게 선(善)은 아마도 승리일 것이다.
그렇다면 싸움이 무슨 기념놀이인가. 승리했는데 왜 싸우는가.
맛 있는 음식과 후한 인심이 국가의 품격을 높여준다?
한나루(大津)로 불렸던 국가어항 대진항으로 내려섰다.
2년 전(2010년)에 신축했다는 2층구조 '대진항수산시장'이 핸섬하지만 파리를 날린다.
주말의 정오인데도 하층 매장이 썰렁한데 2층 식당에서 체온을 느낄 수 있겠는가.
소비자가 없다는 뜻이다.
농촌의 인심이 가을의 추수에 달렸다면 어촌은 주식시장처럼 하루살이다.
아침에 만선이면 하루가 흥청거린다.
아침배가 빈채로 귀항하면 그 날의 인심은 칼바람처럼 차갑다.
문제는 소비자다.
소비자만 있으면 어촌은 흉어라 해도 돌아가니까.
그러나 아무리 풍년이라 해도 소비자가 없으면 풍년기근에 다름 아닌데 고기도 고객도
흉년이면 대책이 없지 않은가.
더구나 이런 날이 잦다면?
빈도가 높아감으로서 어촌의 장래는 어둡다는 것이 중론이란다.
남획으로 인한 어획고의 격감은 어업 종사자들의 자업자득이다.
경기의 침체로 인한 구매력(소비) 감소는 위정자들의 책임이 크다.
하지만 이같은 사람들을 고른 국민의 책임이 더 크다.
이것이 주권재민(主權在民)이라는 민주주의의 장단 양면이다.
간밤에 서울 집에서 저녁식사를 한 이후 오후 1시가 되어 식당을 찾아나섰다.
점심식사 집으로 고른 식당은 일꾼들이 드나드는 해안의 부두식당.
작고 허름한 이 식당의 점심 메뉴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백반이다.
기동성이 편리한 택시 기사들이 맛집을 찾아간다면 일꾼들은 후한 인심을 선호한다.
늙은 길손에게 택일권이 주어진다면 늘 후자다.
일꾼들의 단골집에는 단 하나의 특징이 있다.
수시로 식탁을 살펴 풍성하게 해주므로 부족한 것이 없다는 것.
인색한 집은 단골을 거느릴 자격이 없고 단골은 광을 활짝 열어놓은 집으로만 들어간다.
식당뿐 아니라 대인(對人)사업 성패의 기본 키(key)일 것이다.
"맛 있는 음식과 후한 인심이 국가의 품격을 높여줍니다"
식당 내부벽에 걸려있는 유일한 액자의 싸인펜 글이다.
누구길래 국가의 품격 운운했나 살펴보았다.
2009년 9월에 국무총리가 되어 '세종시'로 씨름하다가 2010년 8월에 물러난 J씨다.
그가 2011년 5월 28일 여기 대진항을 지나다가 식사하고 가면서 남긴 글인 듯.
어떤 연유로 이 식당에서 식사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대통령(2012년 10월 현재)처럼
쇼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며 정상인의 감성은 대체로 공통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나라의 제1가는 대학교의 총장을 지낸 학자가 이전투구의 정치판에서 소위 스타일을
꾸기고 있을 때는 안타까웠지만 해안의 작은 식당에서 공감대가 형성되는 듯 했으니까.
어떤 이는 20년도 더 오래 전에 지낸 국무총리의 직함을 여전히 사용하는데 반해 (전)이
라는 전치사를 붙인 그에게는 정치가 보다 학자의 품성이 여전한가.
천고마비(天高馬肥)라는 가을의 첫 주말이건만 관련 없는 늙은 길손이 민망하기 짝없게
느껴지도록 조용한 대진항의 즐비한 횟집들.
이 불황의 터널을 빠져나오게 될 날은 과연 요원한가.
초도리로 이어지는 해안길도 쓸쓸하기는 매한가지.
불교가 마치 은둔의 종교처럼 산속으로 숨어들어간 것이 이속(離俗)의 뜻보다는 억불의
결과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중생의 제도를 이루려면 사바세계로 깊이 파고드는 것이 당연하다.
다만, 사찰의 개념이 고색창연하고 육중한 와가로 고정되어 있기 때문인지 대진리 해안
도로변의 빌딩 사찰이 낯설게 다가왔다.
'영산불교'라는 신설교단 현지사의 고성분원인데 건물부터 개화되었나.
남의 종교를 왈가왈부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남의 종교를 폄훼하는 종교는 독선이며 마땅히 비판받아야 한다.
이런 이유로, 비록 독선적 기독교의 울 밖에 있으나 기독교 신앙고백을 중히 하는 나는
불교도들의 포용력을 존경한다.
비구니의 절에 유폐(幽閉)상태였던 사춘기의 소년은 그절의 비구니들을 통해서 종교를
초월한 인간애를 배웠으니까.
해안길은 초도리(草島里)의 초도해수욕장을 거쳐 어촌체험마을, 초도항으로 이어진다.
성게로 이름이 난 어촌정주어항이다.
초도항 앞바다에는 금구도(金龜島)가 뜀뛰기로 건널 수 있을 듯 가까이 있다.
거북이 형상이라는 이 무인도가 주목을 받게 된 까닭은 광개토대왕릉이라는 것.
대왕 시신의 안장이 고증을 통해 확인되면 원형을 복원하겠다고 부풀어 있는 고성군.
황금같은 관광상품 하나가 탄생을 목전에 두고 있는가.
신라의 왕은 물속을, 고구려 왕은 섬을 택했다면 유사한 유언을 한 백제의 왕은 없는가.
모두 물 맑은 동해를 택한 것은 우연일까.
화진포
초도항에서 잠시 철책해안을 따르면 화진포해수욕장(花津浦)이다.
길이와 넓이가 비슷하다 할 정도로 넓은 폭이 특징인 백사장을 가졌으며 광활한 호수를
거느리고 있는 국민광광지다.
이에 더하여 밀림을 연상케 하는 울창한 송림은 금상첨화(錦上添花)에 다름 아니다.
해수욕장과 호수 사이에 위치한, 각종 조개류와 갑각류를 전시한 화진포해양박물관 앞
'관동별곡800리 답사1번지 고성' 표석대에는 송강의 관동8경이 요약되어 있다
이북의 '통천 총석정'과 '고성 삼일포를 제한 6경을 차례로 거쳐가게 될 것이다.
간성 청간정을 비롯해 양양 낙산사, 강릉 경포대, 삼척 죽서루,울진 망양정을 거쳐 평해
월송정에 당도하면 또 하나의 장정이 완결된다.
문제는 관동별곡(關東別曲)과 관동팔경(關東八景)의 관계다.
송강의 관동별곡을 끌어들이지 않는다면 문제될 리 없으나 관동별곡을 근거로 한 팔경
이라면 문제가 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관동별곡에는 월송정이 없으니까.
화진포해수욕장 남단에서 거진으로 가는 해안길은 얼마간 끊긴다.
금구교를 건너 송림을 왼쪽에 끼고 호숫가를 걷는 낭만의 길이 한동안 계속된다.
금구교는 햇빛에 비치는 모습이 황금거북 같다 해서 붙여진 금구도에서 온 이름이란다.
한쌍이 마주보고 노니는 고니를 형상화 했다는 난간과 넘실거리는 물결과 동해 일출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는 조형물로 장식한 다리다.
강원도 지방기념물 제10호로 지정되어 있는 화진포
현내면 초도리와 죽정리(竹亭), 거진읍 화포리(巨津花浦)가 공유하고 있는 16km둘레인
동해안 최대의 자연석호란다.
석호(潟湖)란 사취, 사주 따위가 만의 입구를 막아 바다와 분리되어 생긴 호수를 말하며
담수와 해수가 교차하는 천연의 담염호(淡鹽湖)다.
이 곳에 살던 심성 고약한 영감 이화진(李花津)이 시주하라고 찾아온 금강산 건봉사의
승려에게 골탕을 먹였다.
심성 고운 며느리는 봉변을 당하고 돌아가는 승려에게 시아버지를 대신해 시주를 하려
했으나 승려는 자취 없이 사라졌고 자기네 집과 전답은 호수로 변해버렸다.
충격을 받은 며느리는 그 자리에 돌이 되어버렸고 홍수와 기근과 역병에 시달리던 마을
사람들이 착한 며느리를 위해 매년 제사를 지냄으로서 마을에 평안이 돌아왔다.
화진포의 전설인데 하필 고약한 영감의 이름을 땄을까.
긴 호반의 해당화가 열매만 남았지만 개화기에는 무척 아름답겠다.
차로(화진포길)를 따라서 먼저 들른 곳은 화진포교를 건너 현내면 죽정리 이승만 별장.
말로가 불행했지만 분단국으로나마 독립한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다.
임시정부때와 혼란정국(광복후)의 많은 뒷 얘기는 접어두고 이승만을 삼신이라고 했다.
외교는 귀신, 정치는 참신, 인사는 병신이라는 말이 회자되었던 것.
한국의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1732~1799/미국 초대대통령)이 될 수 있는
유일한 분인데 병신 인사로 인해 기회를 날려버리고 망명지에서 생을 마쳤다.
우의마의(牛意馬意)를 동원하고 삼선개헌을 하고 장기집권을 했지만 인의 장막에 갇혀
있었을 뿐 애국의 열정은 악랄한 쿠데타 군인들과 달리 순수했던 분이다.
그래서, 4. 19 유혈 민주혁명은 본인은 물론 국가적으로도 불행한 일이다.
이 병신 인사로 인한 불행은 역대 대통령이 예외 없으며 현재는 극치다.
화진포의 성(城)으로도 불린 거진읍 화포리 해안의 김일성 별장은 참 좋은 위치에 있다.
외국인 선교사들의 안목이 선교 외적으로도 훌륭했나.
같은 선교사인데도 이기붕의 별장으로 사용되었던 집과는 대조된다.
산정호수에도 김일성 별장이 있었다.
김일성은 북쪽의 절경들을 두고 왜 38도선 가까이 내려와 별장들을 가지고 있었을까.
적화 통일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까.
그의 별장지들은 남쪽의 인기있는 국민관광지가 되었으니 그의 안목도 수준급인가.
참혹한 민족동란이 38선을 휴전선으로 대체, 미봉된 것은 또 하나의 비극이지만 남쪽의
레저산업에는 많이 기여한 것이 사실이다.
38선으로 도로 묶였더라면 남쪽의 폭발적인 레저(leisure)욕망을 충족시킬 길이 없어서
전전긍긍했을 것이니까.
'시작이 좋으면 끝도 좋다'를 믿으며
이기붕의 별장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이 별장의 가족사는 한국의 현대사에서 가정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과욕이 부른 가장 큰
불행이고 비극이다.
한 여인의 제동장치 없는 권모술수가 자기 가족의 멸문을 초래한 것은 애석한 일이다.
그러나, 그들이 권좌에 올랐다면 나라가 거덜났을 것이므로 대국적으로는 최악을 막은
불가피한 차악이라 할 수 있다.
부모와 동생을 죽이고 자살한 아들. 대통령의 양자가 됨으로서 족보에 따르면 생부모가
형님과 형수가 된 어처구니없는 가계가 권력욕의 산물이었다.
이씨조선 500년의 연장선이라고 할까.
아들 짓이 아니고 이 사태의 책임을 이기붕일가에 돌려 위국을 수습하기 위한 제삼자의
의도적 살해였다는 소문도 있었으나 소문일 뿐이었다.
심지어, 이기붕을 이조 광해군 때의 이이첨(李爾瞻/1560~1623)과 비교하기도 했다.
대북파 두목이며 정권의 실세였던 이이첨은 인조반정으로 본인이 참형을 당함은 물론
멸문의 화를 당했는데 이기붕도 그랬다는 것.
광해군과 이승만이 권좌에서 쫓겨나 섬(제주도와 하와이)에서 살다가 병사한 것도 닮은
꼴이라 그럴사한 비교였다.
이 불행은 국가적 유전자인가.
두번째 비극이 박정희 가족이다.
박정희를 살해한 김재규는 브루터스(Brutus/BC85~BC42)의 말을 인용했다고 들었다.
브루터스는 이렇게 말했다(세익스피어 전집)
"내가 시이저를 덜 사랑했기 때문이 아니고 내가 로오마를 더 사랑하였기 때문"이라고.
나는 이 말을 믿고 싶다.
박정희의 피살은 불행이고 비극이었지만 나라를 위해서는 최악을 막은 차악이라고.
민주주의적 사고를 갖지 못한 자의 권력욕은 죽기 전에는 버려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 비극의 시대로의 회귀가 시도되고 있는 것 같으니 어찌하면 좋은가.
김일성 별장에서 거진 들머리 해안으로 가려면 뒷산으로 올라서 응봉~소나무숲산림욕
장으로 해서 도로로 내려서는 새 산길 또는 매표소에서 신설도로를 따라야 한다.
나는 후자를 택했다.
화진포생태박물관에서 호반을 따르다가 신설 3km의 거진해안관광순환도로를.
순환도로 고개마루에서 해오름쉼터 뒷봉(해오름공원?)에 오르는 계단이 아슬아슬하다.
별별 이름으로 애써서 만든 길들을 시비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전국적으로 이 많은 길들이, 자금의 출처(중앙정부, 지자체)와 관계 없이 우리의
웰빙에 얼마나 기여하고 있는가는 따져봐야 한다.
왜냐하면 이 길을 조성하는 비용이 우리의 세금이기 때문이다.
과연, 이 길들이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데 필요불가결하며 우선순위에서 다른 모든
일에 앞서는가.
고개를 넘어 해안에 들어서면 곧 거진해안도로 조형공원 해오름쉼터다.
해안을 돌아가면 거진인공암벽장이고 국가어항 거진항(巨津)이다.
5백여년 전, 한 선비가 과거보러 한양으로 가던 중 이곳에 들렀다가 산세를 훑어보니 클
'거(巨)'자와 같이 생겨 큰나루 즉 거진이라 불리고 있단다.
전설이 뒷받침하듯 거진항은 태백산맥줄기의 구름이 해안을 에워 싸고있어 오래전부터
천혜의 어항으로 발달해왔다는 것.
한데, 거진항에는 과연 인공암벽훈련시설이 필요한가.
마치, 산 위에 조성된 어항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어둠이 나래를 펴기 시작하는 때,
거진항 국수집에서 비빔국수를 먹으며 안내받은 정자를 찾아갔다.
거진해수욕장 해안길가, 거진1교 직전의 소공원 한귀에 있는 정자다.
공원을 거닐거나 운동기구들에 매달리는 사람들, 옹기종기 모여있는 소수의 팀들, 밝게
비취는 노등 밑 공원의 풍경이 이어지고 있는 시간대에 집을 지었다.
조명을 받고 있는 파도위 범선의 석조 조형물과 파도와 명태 조형물의 네온사인이 휘황
하게 수놓고 있는 거진1교 간, 아름다운 야경의 정자에서 첫 밤을 보내게 되었다.
게다가, 청결하게 관리되고 있으며 입실하는 순간 비발디의 사계를 연주하는 화장실이
지근에서 심야에도 나그네의 발길을 가볍게 하고 있다.
보기 드물게 음악이 있는 해우실(解憂室)이다.
국내명태의 최고산지 거진항의 명태축제를 앞두고 준비팀이 밤을 잊고 있다.
10월 25일~28일 이라는데 4일을 위해 준비할 것이 그리도 많은가.
14번째라면 그새 노하우가 많이 축적되어 있을 텐데 숙성기간이 필요한 일들인가?
준비사무실에서 바닥에 깔 박스를 얻어 숙소로 돌아올 때 어항에 정박중인 군함 1척이
육중한 고동을 남기고 어항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어항 한쪽이 동해를 지키는 해군 함정의 정박기지인가.
군(軍)과 군(郡)이 밀접한 관계를 유지할 수 밖에 없는 동해의 전방기지라 그런가.
축제행사에는 육. 해군 군악대 축하공연도 있고 해군함. 해경정 견학 행사도 있는데 저
군함도 그 행사와 관련이 있는가.
시작이 좋으면 끝도 좋다는 말을 믿으며 우리 동해를 지키는 군함의 심장 뛰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을 청하는 첫날 밤이 깊어갔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