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곡송학교가 84 년의 나이를 끝으로 문을 닫아야 하나 보다.
1929년 9 월 어느날 4 년제 국민학교로 시작하여,
2013년 3월 문을 닫아야 하다니!
김천군 곡송면 태촌리에 위치한 곡송학교에
1920년 생인 우리 아버지는 1 회로 들어갔다가
월사금 낼 형편이 못되어 2년 인가 다니다 그만 두었고,
1962년에 졸업한 50년 생인 우리 형님은 17회,
1967년 2월에 졸업한 54년 생인 나는 22회,
남동생은 27회 여동생은 29로 졸업했다.
4 년제로 출발해서 그런지 좀 회수가 늦다.
"흰구름이 감도는 백운산 아래
낙동길의 선산가도(街道) 앞을 가로한
아늑한 산록에 자리잡아서
그 이름도 훨씬 곡! 우리 곡송교
만세! 만세! 영원히 만세"
한해 선배이면서 고등학교 동기로 부산에서 교장하는 형근이와
나는
" 나의 살던 고향은 ---
꽃피는 산골
곡송학교 살구꽃" 이라
노래 불렀던
곡송 학교
네가 문을 닫는다 하니,
아버지 죽었을 때도 흐르지 않던 눈물이 눈에서 흐르는 구나!
내가 학교 입학하던 1961 년
1960년의 4.19 끝나고
1961년 군사혁명이 일어 나던 해 이었다.
5,16 혁명가
"동 트던 새 아침에 어둠을 뚫고
찬란히 밝어오는 혁명을 뚫고
죄악을 뿌리 뽑고
웃음을 심자
새나라 새살림을 호령하려나
아! 아! 감격의 새날이다.
오 ! 새날이다."
우리가 학교 들어가고 날마다 학교 엠프에서 흘러 나왔다.
1,2,3,4 도 모르고
이름 적을 줄도 모르고
3 월 어느 맑은 날
흰 두루마기를 입고 따라 오는 아버지에게 빨리 오라고 하면서,
동네 앞 길을 6 촌 영국이와 같이 달려 가던 일이 어저깨 같은데
벌써 52 년이 지났구려.
"곡송학교 살구 꽃
아기 진달래"
음악책을 보고 배운게 아니라
선배들이 하는 것 따라 하다 보니
'복숭아 꽃 살구꽃'이
당연히 곡송학교 다니는 사람들이 부르는 '곡송학교 살구꽃' 같이 들렸으리라.
학교가 있는 동네 태촌,
학교에서 500 미터 쯤 덜어진 새터
학교 뒤산 너머 신풍
학교에서 동쪽에 있는 완동
완동 지나고 좀더 가면 시술, 그리고 대조, 그 옆의 월유,
학교에서 5 킬로 쯤 떨어져서 크다란 울고개를 넘어서 오느라 지각해도 그냥 봐주는 소재,
학교에서 서쪽으로 암마 고개 넘어 북성,
그리고 북성에서 외현천 냇가 지나서 나의 고향 천동.
학교 온 후 비가 많이 오면 선생님 한 분이 애들 20-30 명 데리고 냇가 폭 넓은 곳에서
서로 손잡고 건너고,
늦은 가을 철에 비가 와서 추운 초겨울에 냇가에 물 내려 가면 동네 청년 2-3 명이
장화신고 신고와서 업고서 건너 주기도 했지.
학교에서 남쪽으로 3 킬로 가까이 떨어진 감천 냇가 옆의 5 일장이 서던 배시내.
다 이제는 객지에 가서 사는 사람들이 되었겠구먼.
서울로, 대구로 , 부산으로, 대전으로, 포항으로, 울산으로, 김해로,창원으로,
태촌의 공동 묘지가 있는 곳을 묘지 파내고 학교로 만들어서
태촌 공동 묘지가 우리 동네 앞산으로 오게 되었다.
학교 다닐 때는 밤에 뭐가 날아 다닌다고 야단들이었지.
교실 밑이 무덤 있던 자리가 되어서.
어릴 때는 참 그 동네 상여들이 우리 동네 앞산으로 오는지 궁금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57BBE3950F9E44918)
1990 년 대 쯤 지은 교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903E03950F9E44B13)
곡송학교 나이와 비슷한 나이의 은행나무
( 사진 왼편에 수양버들이 있었지)
우리가 입학할 1961 년에는 교문에서 들어 가면서
정면으로 6 칸의 판자벽에다가 까만 콜타르 바른 기와집,
왼편으로 3 칸은 바닥이 마루가 아닌 흙 바다.
그리고 본관뒤로 이층이라 불렀던 축대 위의 4 칸 기와집 이렇게 교실이 있었다.
1 학년 때에는 본관 동쪽에서 2 번째 교실에서 공부했고,
우리가 2 학년 때 쯤에는 다시 2 층이라 부르는 곳으로 부터
조금 떨어져 높은 곳에 교실 2 개 만들어 3 층이라 부르고,
3 학년 때 공부했고,
4 학년 때에는 2 층이라 부르던 나무 판자 벽 옆에 벽돌로 교실 한 칸 만들어 공부했고,
5 학년 때에는 본관옆에 벽돌 교실 만들어 공부했고,
6학년 때에는 본관 교무실 옆에서 공부했다.
2 학년 때 부터 인가 본관 앞에 크다란 글자들이 붙어 있었다
"올해는 증산의 해"
"올해는 재건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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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에는 "올해는 일하는 해"
학교에 할일이 있으면 동네 별로 구루마나 지게 지고 와서,
학부모님들 스스로 부역하기도 하고,
우리 아버지도 우리 형이 학교 다닐 때는 여러번 왔다고 형님이 이야기 했다.
내가 학교 다닐 때에도 2, 3번 학교 일하러 온 것 같다.
교문에는 아름들이 수양 버들이 양 옆에 서 있었다.
그리고 고향의 봄 노래에도
냇가에 수양 버들이 나오고,
고향 앞을 가로지르는 외현천 냇가 방천에도 수양버들이 서 있었다.
그래서 수양 버들은 나에게 정다운 나무이다.
예나 지금이나
미술 시간에 도화지 위에 자주 등장 했던 수양버들 휘영청 늘어진 가지들.
학교 운동장 옆에도 아름들이 수양 버들이 서 있어서 운동회 때에는
'먼 산에 아지랑이 봄날에 잠자고
산골짜기 흐른 눈물 또 다시 흐른다
고목에도 잎이 피고
벌 나비는 날아 다니는데
가시님은 왜 안오나
왜 아니 오시나'
"백군 이겨라 청군 이겨라
울로 먹자 청군, 알로 꺼져라 백군."
그 나무 아래에서 열심히 응원을 했는데,
그러다가 그 나무들은 다 고목으로 없어진지 오래이다.
5 학년 때 쯤인가 부터 70년 이상을 버티고 아직까지 서있는 은행 나무 아래에서 운동회 때
청군 백군을 나누어 응원했다.
은행 잎 주워서 책 장에 끼워 다니기도 하고,
미술 시간에 물감 묻혀서 도화지 접어서 그 안에 넣고 찍기도 했지.
과학 시간에는 물 컵들고 나가서 입으로 물 뿜으면서 무지개 발생 월리도 공부했다.
동네 별로 애들이 20-50 명씩 많으니
주먹 보다 조금 더 큰 고무공 사가지고,
학교에서 동네 끼리 축구 경기도 하곤 했지.
여자 애들은 고무줄 놀이와 공기 하고.
운동회 때에는 온 가족이 다 참석해서 즐겁게 운동하고
동네 별로 나누어 달리기
줄다리기 하고
6 학 년 때인가
사은회 때 잡아 먹을 것이라 하여
돼지 사다가 2 층 올라가는 언덕에 돼지 우리 만들어 놓고,
일요일 날은 동네 별로 당번 정하여 돼지 돌보러 가고,
2, 3 학년 때에는 학교에 무슨 준비 한다고
동네 별로 이엉 만들어 지개로 지고 가고,
겨울에는 난로 나무 불쏘시개 만들어 들고 가고,
학교 운동장 청소는 동네 별로 구역 나누어
토요일 날은 커다란 대나무 빗자루 들고 학교 갈 때,
빗자루 안가지고 가면 눈 감기고 도랑에서 매를 맞던 아이들,
옆 동네 선배들은 여러명 모여 가다가
'새보들' 이라는 물 깊이가 가슴 가까이 오는 곳에 가서
선배들이 강제로 시켜 목욕하고 가던 생각.
학교 가다 돌 아 오면서 봇도랑에서 고기 잡아 고무신에 넣어 가지고 와서
우리 동네 앞의 둥붕에 갔다 넣던 일.
1963 년 쯤인가 우리 선배들이 많이 다니던 감문중학은 전국체전에서 씨름 우승을 하여서
우리 형 동기들이
"경북" 이라는 글자가 적힌 티 샤스를 자랑 스럽게 입고 다니던 시절
2년인가 3 년의 배신에 사는 선배는
그 당시 대한 민국 최고의 중학교
경기중에 입학 했다고
선생님이 자랑 하던 일.
한해 선배 교장 이낙봉 선생 아들이
김천중에 장학생으로 합격했다고 자랑하던일,
해마다 당시 경북의 명문학교 김천중에 5, 6 명씩 입학하던 일.
주산 선수로 선배들과 같이
4 학년 때는 김천 가서 기차 타고 아천국민학교에,
5 학년 때에는 버스 타고 개령가서 대신국민학교로 ,
1966년 10월, 6 학년 때에는 감문중학교에서 열린 금릉군 체육 대회에서 종합 우승을 하여
어두워진 감문중학교 운동장에서 체육 선생님이 우승기 들고 앞장 서서
"흰 구름이 감도는 백운산 아래---"
곡송학교 교가 목이 터져라 부르면서 운동장 2, 3 바퀴돌았다.
아! 아! 이제는 이름으로 밖에 부를 수 없는 학교가 될 줄을 누가 예상 하였으리요.
우리가 6 학년 때 쯤에는 6학년이 130 명,
1 학년들은 약 150-180 명 되어서 전교생이 900 명 정도이고,
내 동생이 6 학년 때 쯤에는 아마 1000 명이 더 되었을 것 같다.
그러다가 행정 구역 변경으로 가장 동네가 크던 소재가 선산으로 떨어져 나가고,
월유도 떨어져 나가다가
2000 년 쯤에는 전교생이 100 명 쯤 된다 하다가
2013년 에는 급기야 전교생이 20 명도 되지 않아 문을 닫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