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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성도님들이 왜 사도신경을 교회에서 암송하지 않는지 ,
사도 신경에 무슨 비성서적인 내용이 있는지 궁금해 하는 분이 계셔서 인터넷에의 내용을 여기
옮겨 놉니다 참고 하시기 바람니다. 내용이 약간 깁니다, 은혜는 많이 길겠지요?.
비 평 탁명환
“그러면 이단을 어떻게 분별할 것인가? 분별하는 기준이 여기에 있어 소개한다. 첫째, 사도 신경의 신앙고백 여부를 가지고 이단 여부를 판별할 수 있다. 우리 교회는 그 많은 교파에도 불구하고 모두다 사도 신경을 신앙고백으로 채택하는데 있어서 일치하고 있다. 주일 대예배 시간에 모든 교회에서는 사도 신경을 신앙고백으로 전 교인이 외운다. 그러나...안식교 등 모든 이단들은 사도 신경을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1
해 설
탁명환 씨가 그의 저서인 [기독교 이단 연구]에서 설정한 이단 판별의 첫 번째 기준이 바로 로마 카톨릭 교회를 비롯하여 대다수의 개신교회들이 공중 예배에서 신앙고백으로 암송하고 잇는 사도 신경(使徒信經)의 사용 여부이다.
먼저 밝혀 둘 것은, 안식일 교회는 비록 사도 신경을 예배시 공중을 위한 신앙고백으로 사용하지는 않지만, 일반 교회에서 사용을 비평하거나 그 일반적인 내용을 부인하는 입장도 취하지 않는다. 이렇게 경솔하고 무책임하게 사도 신경을 이단 판별의 첫 번째 기준으로 삼아 형제 그리스 도인들을 이단으로 정죄하기 전에, 오늘날 교회들이 쓰고 있는 사도 신경이 어떻게 만들어 졌으며 문제점이 무엇인지 진상(眞相)과 허실(虛實)을 바로 아는 일이 앞서야 하겠다.
먼저 사도 신경이 제정된 역사적 배경과 그것이 지닌 신학적인 문제점을 밝힌 후에 그것을 그리스도교의 공중 신앙고백으로 택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인지 밝히고자 한다.
사도들의 신경이 아닌 사도 신경
첫째, 사도 신경 곧 시도들의 신조(the Apostles, Creed) 는 그 이름과는 달리 예수께서 직접 가르쳐 준 신조도 아니고, 사도들에 의하여 쓰여진 것도 아니다.2 그러므로 권위나 정통성에 있어서 십계명이나 주의 기도문과는 차원이 다르다. 필립샤프(Philip Scaff) 의 말처럼 사도 신경은 “일찍이 만들어진 것 가운데 그렇게 짤막한 것으로는 크리스트교 신앙에 대한 최선의 대중적인 요약” 이기는 하지만” “이 신조가 매우 단순하고 간결해서.... 신학적인 지식이 증가된 단계를 위한 공식적인 교리의 기준이 되기에는 충분하지 않음을 인정해야 한다.”3
만약 사도 신경이 각시 대의 정통 신앙의 기준이 될 만했다면 그후 니케아신조 (325년) 나 칼케돈(451년)신조가 다시 나와야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종교개혁 이후 교파들이 저마다 신조를 만들어 30개도 넘는 신조가 양산(量産)되어 이전 것을 대신하거나 보강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초기의 신조들을 방편으로 현대 교회들의 일치한 정통성을 이룩하려는 시도의 부당함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적절한 평가가 있다.
“사도 신경이나 니케아 신조 등을 기초로 교파들을 연합시키려고 하는 것은 다 자란 성 숙한 어른을 아이들 상태로 돌아가라고 강요하는 것과 같다.”4
사도 신경의 역사적 배경
둘째, 염두에 두어야 할 일은 사도 신경이 만들어진 역사적 배경에 대한 이해이다. 복음서에 기록된 신앙고백(마16:16; 28:19)을 기초로 한 단편적인 신조가 2세기 초중반부터 존재한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의 사도 신경의 모체가 된 것은 서기400년경의 라틴 어로된 [로마 교회 구신 조](the Old Roman Creed)임이 밝혀졌다.5
그러나 오늘날 로마 카톨릭 교회나 개신교회들이 사용하고 있는 사도 신경 이와 같은 [로마 교회 구신 조]가 아니고 그 이후 300여년 동안 서방의 여러 교회들이 사용하면서 자신들의 신조에 맞게 내용을 수식한 것으로서6 뒤에 설명하겠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 사도 신경 대신 니케아 신조를 신앙고백으로 택한 동방 교회는 앞에 제시된 이단 판별 기준에 의하면 처음부터 이단이 되고 만다. 논증에는 논리가 서야 하고 기준에는 보편성(普遍性)이 있어야 한다.
애매한 내용-“지옥에 내려가셨다가”
셋째 지금 사용하고 있는 사도 신경에는 신학적으로 석연치 않은 찜찜한 내용이 첨가되어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앞서 말한 대로 지금의 사도신경은 서기700년 이후 갈리아(프랑스) 지방에서 형성된 것을 당시의 로마 교회가 최종적으로 수용한 것이다.9 그런데 이 8세기 신조에는 그 전의 신조에는 없던 여러 마디의 수식어가 첨가되어 신학적으로 그 의미를 애매(曖昧)하게 하고 있다. 첨가된 10여 가지의 표현 가운데 특히 신학적으로 주목되는 두세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다음에 구 신조에는 없던 “지옥(hell) 에 내려가셨다가(he descended into hell) 라는 삽입구가 첨가되었다.
이러한 표현대로, 예수께서 무덤에 장사되어 계셨던 삼일 동안 “지옥에 다녀오셨다는 희한한 이야기가 된다. 이 문구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을 인정치 않음으로써 이단이 된 아리우스파의 신조에 처음으로 나타났는데 (359년), 점차로 퍼져나가다가 결국 8세기에 개정된 사도 신경에 정식으로 삽입된 것이다.10
이곳의 “지옥”(hell)은 본래 헬라어의 “하데스”나 히브리어의 “스올”(sheol) 로서 죽은 후에는 모든 사람이 가게 되는 무덤 곧 음부(陰部)이다.(창37:35; 시16:10, 88:3등) 국내에서 번역 출판된 사도 신경 해설에도 이 말이 잘못 적용되었음을 아래와 같이 밝히고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단어(지옥)는 악인들이 형벌받는 곳을 의미하게 되었다. 그래서 현대 영어 지옥(hell)은 성경의 용어‘스올’ 이나 ‘하데스’와는 다른 뜻이며 또 사도 신경에도 적당치 않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때에 그는 분명히 지옥으로 가시지 않았 다.”11
바로 이것이 문제이다. 성경 어느 곳, 어느 말씀을 근거로 예수님께서 장사되어 계시던 3일간 거지 나사로와 회개한 강도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것인가? 앞서의 영혼 문제에서 언급한 대로, 또 하나의 개신교 연옥을 만들어 내는 엄청난 신학적 과오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15
이러한 혼난 때문에 미국의 감독 교회는 1789년에 제정한 기도에서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표현을 아예 삭제하거나 다른 표현을 쓰게 했다가 1892년에는 이를 철회하는 등 갈팡질팡 하고 잇다.16 이러한 자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이를 영적인 의도로도 해석하지만 모두 궁색한 시도에 불과한 것으로, 역사적 배경과 본문의 의도에 빗나간 것이다.
오늘날 영어로 된 사도 신경에는 거의 모두가 “지옥에 내려가셨다가”를 그대로 포함하고 있다.
우리 한국 교회들이 쓰고 있는 사도 신경도 물론 8세기에 개정된 것이면서도, “지옥에 내려가셨다가” 라는 문구는 삭제한 채 통용하고 있어 신학적인 혼란은 모면하고 있지만, 문서의 역사적인 일관성과 정확성은 무시하고 있는 셈이다. 신학적으로 깊이 재고해야 할 문제이다.
사연이 있는 표현 -“거룩한 공회”
문제가 되는 또 다른 삽입구는 교회에 관한 것인데, 5세기의 [로마 교회 구신 조]에는 일반적인 표현으로 “거룩한 교회(the Holy Church)를 믿사오며”로 되어 있다.17 그러나 8세기 개정 신조에는 거기에 “카톨릭을 첨가하여 거룩한 카톨릭 교회를 믿사오며”로 표현했다.18 ‘“카톨릭”(catholic) 의 뜻은 본래 “보편적” 혹은 “세계적”(universal) 이란 뜻이어서 일반적으로 쓸 경우에는 구태여 로마 카톨릭 교회를 가리키지 않는다. 그러나 그 당시 이미 베드로의 후계자임을 공언하고 나선 로마교회의 감독이 전 세계의 머리로서 땅위의 모든 교회를 다스릴 수 있는 유일한 교회라는 주장을 강화하고 있던 때였기 때문에 실제로 말의 뉘앙스(音調)가 다르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당시에 서방 로마 교회와 지상권을 위한 싸움을 벌이고 있던 동방 희랍 교회가 자신을 “거룩하고 정통적이며 세계적(카톨릭. catholic)인 사도직의 동방 교회”로19 부르고 있던 때라 서방의 로마교회가 이 “카톨릭” 이란 표현을 쓰기 시작하자 자기 이름을 도적 맞은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리하여 동방 교회는 로마 교회의 권위주의 적인 독선(獨善)을 드러낸 사도신경을 배척하고, 내용은 거의 비슷하면서도 동방 교회의 영역에서 제정된 유서 깊은 니케아신조(the Niece Creed)를 자신들의 신앙고백으로 고집한 이유를 알게 된다.20 아울러 역사적 뒷받침이 전혀 없는데도 불구하고 로마 카톨릭 교회가 사도신경을 굳이 사도들의 직접적인 작품이라고 무리하게 주장하는 이유도 깨닫게 된다.21 한국 교회들이 쓰고 있는 사도신경에는 이 “거룩한 카톨릭교회”의 표현을 그저, “거룩한 공회”라고 했는데 이 ”공회“란 말은 본문의 뜻과는 거리가 먼 애매한 뜻이지만 ,이러한 방식으로 난관을 넘기도 있다. 그러나 [한영 찬송가]에 함께 쓰여진 영문 사도신경에는 “the holy catholic church"라고 써서 그것이 8세기의 개정 신조임을 드러내고 있다.22
의심스러운 말 뜻- "성도가 교통하는 것"
또 다른 문제의 삽입구는 “성도가 교통하는 것”(the communion of saints)이다.23 이곳의 “교통”이란 무슨 뜻인가? 하나님이나 인간과의 교제를 나타낼 수 있는 헬라어의 “코이노이아”(koinonia)인데, 여기서는 그 문법적인 성격을 보아 성만찬을 통해 이루어지는 교제임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다.24
그런데 로마카톨릭 교회에서는 이 “교제”를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성도들뿐만 아니라, 죽은 성도들에게까지 확대하여 성자 숭배(聖者崇拜) 와 죽은 사람에게 기도하는 교리적 근거로 오용하고있다.25 물론 성경적인 의미의 성자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인 모든 신자들은 성도(聖徒.saints)를 가리키지만 (고전1:2) 로마 카톨릭의 성자는 죽은지 오랜 세월이 경과한 위에야 특별 심의를 거처 서품(敍品)되는 비성서적인 개념이다. 또한 죽은 자와 교통하는 일은 사단의 속임수로 (삼상28:8-19), 성경에는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사8:20; 신18:11.12)
사도신경을 가장 옹호하는 교회 - 로마 카톨릭
이러한 교리 적인 이유와 역사적 배경 때문에라도 사도신경을 가장 옹호하고 두둔하는 교회는 로마 카톨릭 교회임을 다음에 인용하는 교리 해설에서라도 일별할 수 있다.
증 언 가톨릭
“성 레오는 아무도 이 [사도]신경에 대해 무지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성카톨릭 막시무스는 이 신경에 무지한 영세 받은 선지들은 그의 시대에 있어서 믿음의 최대의 적으로 간주했으며, 오늘날에는 자신들의 교리를 모르는 카톨릭 신자들을 이유 없이 믿음의 최대의 적들로 간주할 수 있다고 했다. 성 토마스는 이 신경에 대하여 고의로 무지하게 되는 것은 죽음에 이르는 죄로 간주했다.“26
한 마디로 사도 신경에 무지하면, 신앙의 최대의 적, 곧 이단이 되고, 동시에 로마 가톨릭교회의 최대의 적이 된다는 것이다. 결국 탁명환 씨가 설정한 이단 판별의 기준은 중세적인 로마 가톨릭교회의 입장을 힘있게 대변한 데 불과하다. 사도신경에 대한 충성 여부를 정통과 이단의 판별 기준으로 삼는다면 로마 가톨릭교회는 최선의 정통이 되는 것이다.
종교개혁을 통하여 확인된 개신교의 정신은, “오직 성경” 만이 신앙의 규범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교회는 1546년 4월 6일, 개회 중이던 트렌트 종교회의(1545~63) 제4회기 동안, “성경과 정통은 동등한 권위를 가진 것으로 용납되어야 한다.”27 는 치명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참 신앙의 뿌리를 찾아 바르게 믿고 바르게 판단하는 그리스도 인의 양식이 참으로 아쉽기만 하다.
결 론
서두에서 밝힌 대로 안식일 교회는 사도신경의 일반적인 내용을 부정하지 않으며 그것을 공중 예배 시의 신앙고백으로 사용하는 것을 정죄하는 입장을 취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인간이 제정한 모든 신조가 그렇듯이 사도 신경 역시 그 역사적 배경이나 성경적인 빛으로 볼 때에 그것을 그렇게 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도 않는다. “사도 신경 해설”을 저술한 도날드콜의 솔직한 고백대로, “`지옥에 내려가셨다가`와 같은 찜찜한 내용 때문에, 우리가 사도 신경 고백할 때마다 이 사실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면 의심스러운 마음이 생긴다”28은 것만으로도 그것을 공중 예배의 신앙고백으로 택하기를 꺼리는 충분한 이유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앙고백의 목적이 양심적으로 의심 없이 믿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도신경을 정통과 이단을 가리는 판별 기준으로 삼아 같은 그리스도인 형제를 이단으로 정죄하는 일은 명백히 성경의 원칙과 그리스도인 정신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마15:3)라고 말씀하신 우리 주님의 교훈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사도 신경 사용 여부로 형제의 신앙을 비평하는 일은 성서 신앙에 어긋남을 알리고 싶다.
판 단
지금까지 깊은 관심을 가지고 사도신경에 관한 이상의 비평과 변증을 지면을 통하여 참여한 독자는 어떠한 이해에 이르렀는가? 교파에 관계없이 모두의 신앙의 기초를 오직 성경에만 두어야 할 필요가 절실하지 않는가? 인간이 제정한 신조들은 어쩔 수 없이 인간적인 정통이 되어 그릇됨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날 위험을 언제나 내포하고 있음을 다시 느끼게 한다.
사도 바울의 신조처럼, 성경은 능히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며,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 하여, “하나님의 사람을 온전하”(딤후3:15~17)게 하는 유일한 정통 신조임을 재확인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참고 문헌
1. 탁명환, 75.
2. Schaff, 14.
3. Ibid, 15.
4. J. L. Neve, Churches and Sects of Christendom
(Burlington, Iowa: The Lutheran Literary Board, 1940), 29.
5. Seven Members of the Faculty of the Episcopal Theological School, Creeds and Loyalty
(New York: The MacMillan Co., 1924), 3. Schaff, 19.
6. Schaff, 19.
7, Daniel Lamont, The Church and the Creeds(London: James Clarke & Co., Ltd., 1923), 30.
8. The Oxford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 968.
9. Schaff, 19.
10. Ibid., 21. The Oxford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 395.
11. 도날드 콜, 오창윤 역, 사도신경 해설(서울: 기독교 문서선교회, 1984), 75, 76.
12. Louis Berkhof Systematic Theology(London: The Banner of Truth 1966), 687
13. lbid., 679-681. Anthony A. Hoekema The Bible and Future
(Grand Rapids: W.B.Eerdmans publ Co.,1979), 101.102.
14. 부루스 로커비, 문석호역, 사도신경 강해(서울 : 생명의 말씀사. 1977. 58.
15. 앞서 취급된 [부활신앙과 영혼불멸사상]에서
누가복음16장의 부자와 거지 나사로와 23장42절의 십자가 강도에 관한 비평과 논증을 참조할 것.
16. Creeds and Royalty, 12
17. Schaff, 16. 23. 28.
18. E E. Carims, Chirstianity Throughout the Crnturies
(Grand Rapids: Zondervan Publ. House, 1981), 159.
19. The Oxford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 1014.
20. Schaff, 16, 23, 28.
21. Authur Devive, Creed Explained(New York: Benziger Brothers, 1892), 43~48.
22. 한국 찬송가 공회 편저, 한영 찬송가(서울: 생명의 말씀사, 1984), 표지안쪽.
23. Schaff, 21.
24. Jan Milic Lochman, The Faith We Confess(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4), 209.
25. Stephen Benko, The Meaning of Sanctorum Communio(Naperville: Alec R. Allenson Inc., 1964), 118.
26. Divine, 47.
27. The Oxford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 1388, 1389).
28. 도날드 콜, 80.
[출처 : 어두움이 빛을 이기지 못하더라, 신계훈 신학박사]
둘째, 영혼불멸과 예수천국 불신지옥 사상과 연옥사상은 성경적인가?
“영혼불멸설”과 “예수천국 불신지옥”과 “연옥사상”은 교파마다 그 해석이 다릅니다.
그러므로
그 판단 기준은 성경(66권)이며 성경을 얼마나 정확하게 해석하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하나님의 공의(公儀)에 대하며 말하며,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많은 교회에서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지옥(불못)에서 영원한 세월동안 고통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공의와 사랑이라고 불리는 하나님”과 자기를 믿지 않는다고 영원한 지옥(불못)에서 고통을 주시는
“잔혹하고 혹독한 하나님” 이런 야누스의 얼굴을 가지신 분이 우리가 믿고 따르는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전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공의로 세상을 심판(시 9:8 ; 행 17:31 ; 벧전 2:23)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인간에게도 공의로 재판(레위기 19:15 ; 신명기 16:18))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당신이 심판하실 때는 죄인이 받아들일 수 없는 공의롭지 못한 심판을 하실 수는 없을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기까지 죄인들을 사랑하신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는지요.
달란트의 비유에서 보듯 주인의 품성을 인정이 없고 모진 사람으로 오해하여 자신이 받은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두었던 종이 다시 돌아오신 주인에게 어떤 대가를 받았는지를 생각하면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믿으면서 그 하나님의 품성을
영원한 지옥이나 만드는 금수보다 못한 복수의 화신으로 만든단 말입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품성(공의와 사랑)을 저토록 변질시키고 치졸한 복수의 하나님으로 만드는 분들은 미구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예수님을 어떻게 대면할지 참으로 두렵습니다.
사후의 문제는 경험으로 판단할 것이 못되므로 의견이 각각 다릅니다.
종교가 다르면 그 생각이 다른 것은 당연하지만, 같은 기독교 내에서도 의견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곧 천당에 간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혹은 연옥으로 가서 이 세상에서 마치지 못한 죄의 값을 다 갚도록 고통을 당한다는 연옥설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사후 문제에 관한 의견이 각각 이지만 이것을 요약하면,
사람이 죽은 후에 그 육체를 떠난 영혼이 있는가 없는가,
또는 죽은 자가 어떠한 형체로 생존을 계속하는가 하는 두 가지 문제입니다.
그런데 동서양의 각 종교를 살펴보면 대부분의 종교는 영혼의 존재와 불멸을 믿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런 중에서 유독 성경만이 이것을 강하게 부인하는 데에는 무슨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기독교 역시 영혼 불멸설을 믿고 있으니 이는 참으로 기이한 현상입니다.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인간의 사후문제는 하나님께서 분명히 성경에 밝혀 놓았지만 많은 교회들이 성경 말씀을 곡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과학이 발전하지 않은 과거에
인간의 안목으로는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도는 것이 올바른 과학인 줄 알고 배우고 가르쳤던 적이 있었습니다.
위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성경)을 그대로 가르치지 않는 대표적인 교회가 가톨릭입니다.
바로 여기에
가톨릭이 성경 66권외에 외경 7권을 굳이 성경에 포함시키려는 이유가 숨어 있습니다.
가톨릭이 그토록 외경을 정경 안에 포함시키려는 이유는
“연옥”이나 “성모 승천설 무오성”, “천사숭배” 등 모든 것들을 외경책안에서 교리로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가톨릭에서 자주 인용하는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영원히"의 일부 내용입니다.
『제2경전의 기록 시기와 동기는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후(기원전 323년) 팔레스티나는 셀류코스 왕조에 의해 정치, 문화, 종교적 박해를 받게 되는데 유다인들에게 안식일과 할례를 금지시키고 율법이 금하는 고기를 먹게 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신원을 잃지 않고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충실히 간직하면 언젠가는 반드시 승리하리라는 확신을 불어 넣어 주기 위해서 기원전 300-350년경 하느님의 인도하심 즉 영감에 의해 쓰여진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한 묶음의 책들(제2경전)은 우리 교회 안에서 보존되어 내려온 중요한 교리들의 근거를 발견합니다. 구체적으로 부활, 천사와 악마, 연옥 등 구약 히브리 경전 39권에 분명히 들어 나지 않는 계시의 발전상을 보게 됩니다.
또한 신약성서에 많이 등장하지만 구약성서 히브리 경전에 없는 바리사이파, 사두가이파의 역사적 기원도 이 박해 시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또 신학적으로는 메시아의 새로운 희망이 싹틉니다.
특히 바리사이파의 부활과 내세에 대한 믿음(지혜서, 마카베오 하권)은 가톨릭교회가 연옥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는 성서적 근거이기도 합니다.
또 제2경전은 이스라엘이 알렉산더 대왕을 시작으로 한 희랍제국의 지배 아래서 유다 백성의 본모습, 특히 팔레스티나 밖에서 살고 있는 유다인들의 본모습을 지켜 내기 위하여 지혜 문학의 형식으로 하느님께 충실하고 정의로운 유다인의 표본을 제시하고 있으며 특히 신앙의 전통과 가치를 다시 발견하고 재평가하도록 하여 그들의 충실성과 신뢰심을 자극하고 강화하려고 애쓰는 길잡이로써 극심한 압제 하에서의 유다 공동체의 상황 분석, 하느님의 섭리, 하느님의 뜻에 대한 충실성 분별 있는 행동과 저항 및 투쟁, 부모에 대한 사랑 기도와 단식, 온전한 결혼 생활, 죽은 사람들을 존중하는 마음과 순교에 대한 성찰의 기초를 보여주고 신앙의 영웅들을 찬양하고 있는 하느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출처 : 김 안토니오 저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영원히"(성 바오로 (딸) 서원, 교보문고)]
종교개혁 당시 많은 종교개혁 자들이 가톨릭이 오랜 세월동안 변질시킨 성경의 진리를 찾아내고 밝혀내었지만
불완전한 부분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밝혀낸 것과 남의 것을 비교 분석하여 올바른 진리를 만들어 내거나 밝혀내야 했는데
대화 보다는 자기가 발견한 것만이 올바른 진리라는 주장들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수많은 교회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개신교는 교파마다 비슷하지만 다른 교리들을 가지게 되었고
이단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는 불행한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인간의 사후문제”입니다.
그러면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기존의 관념이나 생각들을 다 버리고
제 3자의 입장에서 냉정하게 잘 판단하여 보셨으면 합니다.
그리스도인과 영혼 불멸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 3장 16절).
이 말씀은 기독교의 중심 사상을 가장 간단명료하게 표현한 유명한 구절입니다.
우리가 읽은 바와 같이 구원의 필요는 인간이 멸망하여 없어진다는 사실 위에 기초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불멸한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는 것이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믿는 것도 아주 어리석은 일이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참으로 영혼불멸을 믿는다면 그것은 큰 잘못이요, 모순된 일입니다.
“예수천국 불신지옥과 연옥”은
사탄이 만들어낸 참으로 하나님의 품성(사랑과 공의)을 더럽히는 불순한 사상입니다.
‘(영원한)지옥이나 연옥’은 없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천인공노할 ‘지옥이나 연옥’을 만들어 놓는 무지막지한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품성을 모독하는 거짓 가르침에 현혹되어 상심하거나 의심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1. 인간의 구조(창세기 2:7 ; 욥기 27:3 ; 시편 104:29)
개역한글 : 흙 + (하나님의)생기 = 생령(生靈)
KJV : the dust of the ground + the breath of life = a living soul
[생령을 living being으로 NIV, RSV에서는 번역함 ]
생기[히, 니슈맛 하임](nishmat chayyim) = 생명의 호흡(breath of life)
생령[히, 네페슈 하야](nephesh chayah) = 살아있는 존재(living being)
[설명]
인간의 구조는 “사람(생령) = 흙 + 생기”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의 형상을 만드셨지만 그 형상에겐 아직 생명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형상의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시니 그제야 사람이 생령 (living soul)이 되었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런 생명이 없는 형상에 불과한 몸(흙)이 생기를 받은 후에야
살아 있는 생령(산 영혼)이 되었음을 명백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구조는 “사람 = 흙(육체) + 혼(영혼) + 생기”로 구성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육체와 분리된 ‘영혼’이 있다는 주장은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것임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죽은 영혼이 천국이나 지옥 또는 연옥에 간다는 가르침은
사탄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거짓된 주장입니다.
2. 신, 영, 영혼 등의 근본 뜻
사망은 곧 생명의 반대입니다.
시편 기자는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시편 104편 29절)라
고 하였고, 솔로몬은 기록하기를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전도서 12장 7절)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신”이라고 번역한 말은 원문 성경 히브리어의 “루아흐”(Ruach)라는 말인데, 호흡, 바람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위에 인용한 시편의 “호흡”이라는 말과 전도서의 “신”이라는 말은 원어로는 똑같은 말이므로 신이라는 말에
특수한 의미를 포함시킬 수는 없습니다.
동양 언어로 "신"이라고 하면 육체를 떠나서 독자적으로 생각할 수 있고 행동도 할 수 있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성경적인 사고방식이 아닙니다.
전도서 12장 7절의 “신”은 욥기 34장 14절의 “기운”, 욥기 27장 3절의 “하나님의 기운”과 똑같은 원어를
번역한 말입니다.
그리고 욥기 12장 10절의 한국어 번역은 “생물들의 혼과 인생들의 영이 다 그의 손에 있느니라”인데,
이구절의 우리말 성경과 일문(日文) 구어역을 한국어로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목숨이 그 손에 달려 있고 모든 사람의 호흡이 그 손에 달려 있 는 것이네.”(우리말)
“모든 생물의 목숨 및 모든 사람의 호흡은 그의 손안에 있다.”(일본 구여역)
즉 “혼”과 “영”을 “목숨”과 “호흡”이라 번역하였습니다.
원어에 충실하자면 우리말 성경과 일문 번역이 바른 번역입니다.
신약 성경 가운데 “영” 또는 “영혼”이라 번역한 말은 고대 헬라어의 “프뉴마”(Pneuma)라는 말인데,
이것 역시 “바람”, “호흡”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히브리어의 “루아흐”와 같은 의미입니다.
실례로, 야고보서 2장 26절의 “영혼”이라는 말을 “호흡”이라는 말로 바꿔서 생각해 봅시다.
“영혼(호흡)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신구약 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영”이나 “영혼”이라 한 말은 동양 사람들의 종래의
관념대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숨”이나 “호흡”이라는 의미로 생각하면 그 근본 의미를 잘 파악할 수 있습니다.
죽음은 본래 하나님께서 주셨던 “생명의 기운”, 즉 “영혼”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요,
그 결과로 생활(生活) 기능을 잃고 육체가 흙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3. 선악과를 먹기 전 하나님의 말씀 對 사탄의 주장
“정녕 죽으리라”(창 2:17) 對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 3:4)
4. 선악과를 먹은 후 하나님의 말씀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
5. 결과 - 사탄의 거짓말이 드러남
1) 아담이 죽음(창 5:5)으로 사탄의 거짓말이 드러났습니다.
2)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비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아들의 영혼이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겔 18:4)
3)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고전 15:22)
4)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히 9:27)
6.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 "흙"으로 돌아감
1) 필경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창 3:19)
2)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시 90:1)
3) 주께서 저희 호흡[히 루아흐]을 취하신 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시 104:29)
4)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시 146:4)
5)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전 3:20)
6)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히, 루아흐]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전 12:7)
7)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8~29)
7. 죽은 자가 의식이 있는가? - 아무것도 알 수도 할 수 없는 무의식 상태에 있음
1) 죽으면 모든 것이 소멸됨(욥 14:10)
2) “죽은 자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데 내려가는 아무도 못하리라”(시 115:17)
3) 도모[개역한글], 생각[개역개정], 모든 계획[새번역]이 죽는 날로 끝남(시146:4)
4)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죽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1)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이의 죽음 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전 3:19)
(2)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전 3:21)
(3) “그러므로 내 소견에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이는 그의 분복이라
그 신후사를 보게 하려고 저를 도로 데리고 올 자가 누구 이랴”(전 3:22)
(4)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일반인 그것은 해 아래서 모든 일 중에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 악이
가득하여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다가 후에는 죽은 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전 9:3)
(5) 모든 산 자 중에 참예한 자가 소망이 있음은 산 개(犬)가 죽은 사자보다 나음이 니라(전 9:4)
(6)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 것도 모르며 다시는 상도 받지 못하는 것은
그 이름이 잊어버린 바 됨이라(전 9:5)
(7) 그 사랑함과 미워함과 시기함이 없어진 지 오래니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에 저희가 다시는 영영히
분복이 없느니라(전 9:6)
(8)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무덤)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전 9:10)
5) “혹이 너희에게 고하기를 지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神接)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하거든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하라”(이사야 8:9)
6) 생명을 15년 연장 받은 히스기야 왕의 찬양
- 음부가 주께 사례하지 못하며 사망이 주를 찬양하지 못하며 구덩이에 들어간 자가
주의 신실을 바라지 못하되 오직 산 자 곧 산 자는 오늘날 내가 하는 것과 같이 감사하며
주의 신실을 아비가 그 자녀에게 알게 하리이다(이사야 38:18, 19)
7)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마가복음 12:27)
8. 성경에서 말하는 죽음이란? - 잠자는 상태
1) 다윗의 조상들은 모두 잠이 들었습니다.
“네(다윗) 수한(壽限)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솔로몬)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삼하 7:12)
2)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 이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막 5:39)
3)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고전 15:18)
4)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20)
5)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고전15:51)
6)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엡 5:14)
7)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살전 4:13)
8)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 찐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살전 5:14)
9. 상식적으로도 노아 홍수전에는 사람들이 약 천년동안 살았지만 현세는 100년 살기가 힘든데
어떤 사람이 100년 동안 잠도 안자고 먹지도 않고 쉬지도 않고 죄만 지었다고 칩시다.
그런데 그 대가로 영원한 세월동안 불 못에서 고통을 당해야 한다면
이것처럼 형평에 안 맞는 심판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많은 분들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사상을 성경의 진리라고 가르치고 또 믿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사랑,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불공정한 심판자가 어떻게 사랑 인지요?
하나님의 죄인에 대한 심판이 지은 죄보다 계산이 불가한 끝없는 형벌(100년 : 무한대) 이라면
저는 지금 당장 하나님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이 주신다는 영생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만약에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누가복음 16:19~31)처럼
나는 천국에서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데
내 부모, 남편이나 아내, 형제자매, 자식, 친구들은 건너편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 받으며
내게 도움을 요청할 때 무엇이라고 말씀하실는지요?
당신들은 살아생전에 죄를 많이 지었기 때문에 불 못에서 영원히 고통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씀하시며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찬양하며 희희낙락할 수 있겠는지요?
그런 곳이 천국이겠습니까? 지옥이겠습니까?
너무도 터무니없는 거짓사상들이 하나님의 성품(공의와 사랑)을 더럽히고 있습니다.
1) 사람이 죽으면 즉시 심판(천국 또는 지옥)이 이루어지는데 예수님이 죄인을 구하기 위해
성육신하셔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실 필요가 있겠는지요?
2) 삼일 만에 다시 부활하여 이와 같이 죽은 자들도 부활할 것이라고 실증하실 필요가 있겠는지요?
3) 사도신경에도 나오는 ‘죽은 자와 산 자’를 심판하시기 위하여 다시 오시겠다고 하는 것은
무슨 엉뚱한 말씀인지요?
4) 죽음과 동시에 심판(천국 또는 지옥)이 이루어진다면 성경은 모순이 되므로 다시 기록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초림, 부활, 재림이 무의미하고 불필요합니다).
10. 하나님의 사랑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항상 경책(警責)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處置)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겼으며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 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塵土)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시편 103:8~14)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에스겔 18:23)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에스겔 33:11)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 3:16)
도공은 자기의 작품이 맘에 안 들면 내던져 깨트려버리고 다시 만듭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은 작품이 죄를 범했을 때 작품을 버리지 않으시고 살리기 위해
사랑하는 독생자를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게하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 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사야 53:5~6)
11. 심판은 언제 이루어지는가? - 예수님 재림 시에
1)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대로 갚으리라”
(마태복음 16:27)
2)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은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
(요한복음 5:25, 28, 29)
3)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
(요한계시록 22:12)
12. 예수그리스도의 재림과 천년기 그리고 죄의 영원한 소멸(멸망)과 새 하늘과 새땅
1) 일천년 기간의 시작에 있을 일
(1)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 가운데 재림하심
(마태복음 24:27, 30 ; 마태복음 25:31 ; 누가복음 9:26 ; 누가복음 21:27 ; 데살로니가전서 4:16, 17 ;
데살로니가후서 1:7 ; 요한계시록 1:7 ; 요한계시록 14:14)
(2) 살아 있던 악인들이 재림의 영광으로 죽음
(예레미야 25:33 ; 데살로니가후서 2:8 ; 요한계시록 6:15~17 ; 요한계시록 20:5)
(3) 죽은 의인들이 부활함
(요한복음 5:25, 28, 29 ; 요한복음 6:39, 40 ; 데살로니가전서 4:16 ; 고린도전서 15:51~54 ;
요한계시록 20:6)
(4) 부활한 의인들과 살아있던 의인들이 공중에서 주를 영접함
(데살로니가전서 4:17)
(5) 모든 의인들이 승천함
(요한복음 14:2, 3 ; 에베소서 1:20 ; 에베소서 2:6 ; 데살로니가전서 4:17 ; 요한계시록 20:4~6)
2) 일천년 기간 중에 있을 일
(1) 악인들은 잠든 상태로 있고 이 세상은 아무도 사는 이가 없이 황폐해짐
(예레미야 4:23~26 ; 베드로후서 3:10 ; 요한계시록 20:5)
(2) 마귀는 아무도 없는 황폐한 땅에 갇힘 (요한계시록 20:1~3)
(3) 의인들이 하늘에서 재판권을 가지고 왕 노릇함 (요한계시록 20:4~6)
3) 일천년 기간의 마침에 있을 일
(1) 그리스도와 성도들이 땅위로 내려옴(스가랴 14:4 ; 요한계시록 21:2~3)
(2) 새 예루살렘이 땅위로 내려옴(스가랴 14:4 ; 요한계시록 3:12 ; 요한계시록 21:2)
(3) 악인들이 심판을 받기 위해 모두 부활함(요한복음 5:29 ; 요한계시록 20:8, 9)
(4) 사탄이 해방됨(요한계시록 20:7)
(5) 새 예루살렘을 공격함(요한계시록 20:9)
(6) 마귀와 악인들과 사망과 음부가 영원히 멸망(둘째 사망)당함.
(시편 9:5, 6 ; 시편 37:10 ; 말라기 4:1 마태복음 25:41, 46 ; 고린도전서 15:26 ;
데살로니가후서 1:8, 9 ; 요한계시록 20:9, 10, 14 ; 요한계시록 21:8)
4) 새 하늘과 새 땅 (베드로후서 3:13 ; 요한계시록 21:1,3~5)
14. 부활과 부활의 종류
사도바울께서는
천당이나 지옥이 없다는 것을 전제하에 예수님의 부활이 없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고전 15:19)고 탄식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대가로 부여되는 영생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부활을 통하여 비로소 누리게 됩니다.
사람이 죽는 즉시 몸을 떠난 영혼이 누리게 된다는 영생(永生)에 대한 가르침은 성경에는 전혀 근거가
없는 거짓입니다.
그것은 사단의 처음 거짓말인 영혼불멸설에 기초한 것입니다(창 3:3, 4).
부활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요(요 5:28, 29, 11:24), 사도들의 가르침이며(살전 4:13~18 ; 고전
15:35~44, 51~54), 다니엘이 가르치고 있(단 12:1, 2)는 진실입니다.
부활에는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속죄(贖罪)함을 받은 의인들이 영생을 얻기 위해 참여하는
"첫째 부활"이 있습니다(계 20:5, 6 ; 살전 4:13~18).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자신의 죄를 용서받지 못한 죄인들이 재림이 있은 지
천년 후에 불로 소멸되는 심판을 받기 위하여 참여하게 되는 "둘째 부활"이 있습니다
(계 20:5, 6 ; 요 5:28, 29).
그래서
첫째 부활을 "생명의 부활",
둘째 부활을 "심판의 부활"이라고 부릅니다 (요 5:28, 29).
그런데 다니엘서 12장 2절에는 재림의 때에 영생을 얻기 위하여 부활하는 의인들과 함께
"수욕(羞辱)을 받아서 무궁(無窮)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포함되어 있어 혼란을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예외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이미 사례를 설정해 놓으셨습니다.
자신을 재판한 파렴치한 대제사장 가야바의 참람(僭濫)된 언사(言辭)와 처사(處事)를 듣고 보고 나신 뒤,
주변 사람들을 향하여,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人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마 26:64)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1장 7절에는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둘째 부활에 참여하여야 할 죄인이 어떻게 살아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목도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그들의 부활은 우선 목적부터 다릅니다.
그들은 영생을 얻기 위해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그토록 조롱하고 모독한 그분이 참으로 하나님
의 아들이었음을 똑똑히 알 수 있는 참관(參觀)의 기회를 갖게 될 뿐입니다.
이러한 유(類)의 사람들을 위한 부활을
특별부활(特別復活)이라고 부릅니다.(단 12:2 ; 요 5:28, 29 ; 살전 4:16 ; 계 1:7 ; 계 20:5, 6)
악인들은 심판을 받기 위하여 부활합니다.
성경은 그들을 영원한 불로 심판하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불”과 “영원한 지옥”을 잘 구분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내린 불도 영원한 불이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불도 태울 대상(물질)이 없으면 더 이상 존재할 수도 없고 가치도 없는 것이지요.
태울 대상이 없어도 꺼지지 않는 불이었다면
소돔과 고모라에 내린 불은 지금도 여전히 타고 있어야 한다는 모순이 발생합니다.
마찬가지로
세상 마지막에 죄의 모든 것 즉,
하나님께서 원치 않으셨던 모든 것은 불로 자취도 없이 영원히 멸망(소멸)되고 맙니다.
"사망"과 "음부"(무덤)까지도 불못에 던지(계 20:14)움을 당합니다.
이것을 성경은 “둘째 사망”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죄인들이 불에 타서 소멸되는 과정을 굳이 지옥이라고 표현하자면 “한시적인 또는 일시적인 지옥”이라고 해야겠지요.
왜냐하면, 불에 다 타서 소멸되면 재만 남을 것이고 영원한 불도 꺼지니까요.
하나님께서 건설하시겠다는 새 하늘과 새 땅이
고작 어느 한군데에 죄인들을 영원히 괴롭히는 영원한 지옥(불못)을 만들어 천국과 지옥을 공존하게 하는
것이라면 그 새 하늘과 새 땅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노아 홍수에서 악인과 의인의 수는 수 십억대 8명이었음을 볼 때
지구 역사에서 악인의 수는 의인보다 훨씬 많으므로 천국보다 지옥이 비교도 안될 만큼 넓고 커야합니다.
아름답지만 좁고 협소한 천국과 불못이지만 넓고 광할한 지옥을 만드는 것이 오랜시간 후의 창조주의 계획이고 작품이라면 지나가던 개도 웃을 일입니다.
그리고 그 넓고 넓은 지옥에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이들이 영원한 세월동안 불못에서 고통을 당할 수도 있을텐데 말입니다.
(창 19:24 ; 사 33:14 ; 마 18:8 ; 마 25:41 ; 유 1:7 ; 계 20:9, 10, 14, 15 ; 계 21:8 ; 계 2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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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엄마 이걸 어떻게 읽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