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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강원일보 신춘문예]
눈동자에 살고 있는 구름 / 시 정선희
눈동자를 자주 쳐다보는 사람은 언젠가 떠나게 되어있지
눈동자는 또 다른 눈동자를 부추기지 검은 눈동자 흰 눈동자 눈동자에 살고 있는 구름
하늘에 있는 구름이 눈동자 속으로 흘러들면
그는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가 없게 되지
구름이 풀린 사람을 본 적 있니? 흰구름이
검은 구름을 침범한 걸 본 적 있니?
그는 눈동자에 발목을 잡힌 사람,
그의 눈동자는 지금 여기를 보지 않고
언제나 저 멀리 허공을 보고 있지
오래 전 김시습이 그랬고 임제와 김삿갓이 그랬던 것처럼 그는 세상에 없는 길을 찾고 있지
구름처럼 하늘과 땅을 오르내리고 있지
만약 저들 중 누군가를 좋아한다면
당신도 벌써 구름이 선택한 사람,
만약 스튜어디어스나 등반가를 꿈꾼다면
당신은 벌써 구름에 중독된 사람
사람 마음이 열두 번도 더 바뀌는 것도
구름 때문이야
마음을 붙잡고 싶다면
눈동자를 매달아 두는 게 좋을 거야
쉿! 저기 저 구름
조심해!
[신춘문예 - 시 당선소감]이젠 마음껏 하늘을 쳐다볼 수 있을 것
시는 내게 순간의 진실을 포착한 스냅사진 같은 것. 나는 늘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 시는 내 삶을 맑히는 거름망이고 어지러운 내 삶의 발자국이다.
그동안 참 바보같이 살았다. 남들이 다 가는 길 두고 혼자서 멀리 돌아서 가곤 했다.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다고 고개를 흔들고 더러 손가락을 세우기도 했다. 시인이 되었다고 하면 이제 좀 이해해 줄까? 당선 소식을 듣고 무슨 면책특권을 얻은 것 같다.
이제 좀 엉뚱한 행동을 해도 시인이니까 능히 그럴 수도 있겠지…
너그럽게 봐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이상한 안도감. 제일 먼저 남편에게 당선 소식을 전한다. 잘하는 것보다 못하는 게 더 많은 나를 가장 많이 참고 기다려준 고마운 사람이다. 다음에는 시 때려치우라고 구박한 시인 유홍준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자존심 상해서라도 좋은 시 써서 복수하고 싶었다. 그리고 함께 공부한 로모 친구들한테도 참 고맙다. 끝으로 이렇게 당선소감을 쓸 기회를 주신 강원일보와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린다. 세상에 자꾸 두들겨 맞다 보니 눈은 가자미눈이 되고 목은 자라목이 되는 중이었는데 “옴매, 기 살아!” 이젠 짧은 목 길게 뽑아 하늘도 맘껏 쳐다볼 수 있을 것 같다.
△ 정선희(44) △ 경남 진주 生 △ 논술학원 운영
[신춘문예 - 시 심사평]참신한 상상력과 현대적 언어감각 놀라워
예심을 거쳐 올라온 작품은 20명 100여편이었다. 그중 최종 논의의 대상이 된 작품은 이주상의 `풍금소리'와 박명삼의 `두타연', 정선희의 `눈동자에 살고 있는 구름'이었다.
`풍금소리'는 전통적인 삶을 소재로 묘사는 뛰어났으나 신선한 현대적 감각이 뒤떨어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두타연'은 주제가 선명하고 묘사는 뛰어났으나 참신함과 현대성이 약했고, 추상적 어휘들이 장애 요소가 됐다. 당선작으로 선정한 `눈동자에 살고 있는 구름'은 흔한 소재인 `구름'을 참신한 상상력과 현대적인 언어 감각으로 새로운 시의 가능성이 돋보였다. 시의 생명인 리듬감도 잘 살려낸 것은 물론 개성적 발상이 놀랍고, 아이러니와 위트가 돋보이는 수작이다. 다만 시의 마무리가 다소 가벼운 느낌을 준다.
이승훈 한양대명예교수·이영춘 시인
[광주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시]
삼거리 점방 / 김승필
감실감실 화랑 성냥 양초 넣고
시오리 길 전봇대 돌아 발쪽발쪽 막걸리 주전자 딱지 쫀득이 파리채 넣고
귀신같이 동네 사람 죽은 걸 척척 알아맞힌 칠복이 아재 담상담상 검정 고무신 허리띠 넣고
머리빡 기계독 오른 동네 아이 밀어 넣고
오다마 삼양라면 박카스 크라운산도 브라보콘 농심새우깡 크라운 조리퐁 뽀빠이 맛동산 회똑회똑 넣고
넙죽넙죽 상둣도가 지나갈 때 눈 한번 꿈적하고
무뚝뚝이 아버지 악다구니 밀어 넣고
알금알금 파리똥 범벅 밀레 만종 액자 춘길 아재 이발소 면도 거품 집어넣고
쑥부쟁이 구절초 애기똥풀 쇠비름 고들빼기 똘똘 말아넣고
후루룩후루룩 뚝딱 마시면 배부르겠다.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수박- 진서윤
수박밭에는 여물지 않은 태양들이 숨어있었다.
햇빛 줄기가 연결된 곳엔 푸르스름한 심장이 떠있고 폭염이 몰려들고 있었다.
양말 목 풀린 실밥처럼
몸이 헐 것 같은 날
거꾸로 자라는 덩굴의 비린 향이 꼼지락거렸다.
직선의 나이에 곡선의 통증이 붉다
모래밭 이랑마다 층층이 쌓이는 바람말이를 먹었다
누군가 손등으로 통통 두드려보고 갔다
그때 문득, 통증에 씨앗이 생겼다.
세상의 모든 음(音)은 보이지 않는 발자국처럼 익어가고 서리라는 말을 들으면 붉은 당도(糖度)가 끈적거렸다.
달의 필라멘트가 끊어진 밤
고양이가 지나갈 때마다 감지 등(燈)이 켜지고
닿기만 해도 탁! 터질 준비가 되어 있는 만월(滿月)
수박 속에는 검은 별들이 유영하고 있을 것이다.
푸른 굴절무늬로 온몸을 묶어 놓은 여름, 허벅지 아래로 붉은 씨앗 한 점(點) 떨어졌다.
이후 모든 웃음을
손으로 가리는 버릇이 생겼다.
들판 너머 여름이 이불 홑청 끝자락처럼 가벼워졌다
마르지도 젖지도 않은 이파리를 허리에 감고
수박들이 붉은 속셈으로 익어간다.
[2013 경인일보 신춘문예]시 당선작
'떠도는 지붕'/장유정·필명
바람으로 벽을 세운다.
해와 달을 훈제하는 뾰족한 꼭대기에는 바람의 뚜껑이 있다.
날씨 사이에 계절이 끼여 있는 벌판에
조립식 숨구멍을 튼다.
이것을 바람의 집이라 부르고 싶었다.
예각이 없는 벽,
구겨진 바람을 펴 문을 만든다.
환기창으로 들어 온 햇살은 시침만 있는 시간이 되고
불의 씨앗을 들여놓으면 집이 된다.
집에서 흔들리는 것은 연기뿐이라는 듯
발굽이 있는 흰 연기들이 꾸물꾸물 날아오른다.
한 그루 귀한 자작나무, 벌판의 한 가운데 서서 시계로 운영되고 있다 푸른 지붕은 바람의 소관이다. 반짝거리는 나무의 초침이 다 날아가도 재깍재깍 부속품들만 돈다. 흐린 날에는 시간도 쉰다.
빈집을 알리는 표시가 열려 있다
정착하는 곳마다 그 곳의 시간은 따로 있다
자작나무에 붙은 시간이 다 떨어지면 지붕을 걷고
게르! 하고 부를 때마다 게으른 잠이 눈에 든다.
바삭거리는 시간들이 날아간다.
집은 버리고 벽만 둘둘 말아 트럭에 싣는다.
떠도는 것은 지붕뿐이다.
[2013 경인일보 신춘문예]시부문 당선소감/장유정 (필명)
"시의 공간에 가구 하나씩 들여놓을것"
아무 것도 없이 가구 하나 없는 방들에서만 느낄 수 있는 낭랑한 울림, 허허벌판은 텅 비어있음과 벌거벗음, 집의 출발점입니다. 그 나머지는 시간이 다 알아서 만들어줍니다.
2009년 여름, 문예창작학회에서 몽골을 방문했습니다. 상식 없이 따라나선 길, 주먹 크기만한 별들이 쏟아진다는 초원의 지도를 따라가는 버스는 열 몇 시간을 덜컹이며 달려갔습니다.
지친 방문객들에게 별은 깜빡 졸다 놓쳐버린 공연이었습니다. 갔던 길을 되돌아오는 길엔 드문드문 말과 양떼의 무리와 게르! 간혹 건너편으로 오색 무지개가 떴고, 비가 왔고 그리고 맑게 갠 하늘의 노을이 붉었습니다. 끝이 뾰족한 지붕 밑에 누워 아궁이 같은 난로에 불 지펴 잠이 들었습니다.
가스통 바슐라르는 집을 구성하는 유별난 상상구조를 한 가지 차원이 결여되어 있는 공간으로 보았습니다. 걸어 올라가고 그에 맞먹도록 걸어 내려오는 행위로 이루어진 수직적 차원이 빠져 있는 계단, 단층뿐인 집.
여행에서 돌아와 숨차게 써내려갔던 시.
정확히 시가 무엇인지 갈팡질팡하는 저에게 '조금만 더'라고 격려의 눈빛으로 일러주시는 김수복 지도교수님, 문학 지도를 펼치며 명작의 길을 안내하시는 박덕규 교수님, 늦은 나이에 '문학공부를 하는 것으로도 그래도 복이다' 하셨던 강상대 교수님, 수업시간에 '이번 생은 실패했다'고 철학적 눈빛으로 항상 물으셨던 이시영 교수님, 순수한 열정과 문학적으로 예리한 김용희 교수님, 엉뚱함이 좋은 시를 쓰는 데 장점이 될 거라고 말하셨던 박샘, 시의 가지와 살을 냉정함으로 평해주는 혜숙샘, 처음 문학의 씨를 싹트게 해주셨던 경사대 교수님들과 동기들, 빛나는 시인과 작가를 꿈꾸는 대학원 선배님과 동기들, 군포여성문학회 회원들, 사는 것에 항상 촌스러워도 따뜻한 마음을 아끼지 않는 초등학교 오랜 벗들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아내의 자리를 불평 없이 보듬어 주는 남편과 철없이 문학을 하겠다고 나섰던 엄마를 도리어 인정해주는 자랑스러운 아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해봅니다. 며칠 전, 두세 개의 보따리를 안고 있는 엄마를 꿈속에서 보았습니다. 지붕을 둘둘 말아 하늘로 가신 지 꼭 일 년 기일. 당선통보를 받고 먹먹했습니다.
미성숙한 제 시 평가에 날개를 달아주신 최동호 교수님과 김기택 시인님께 감사드립니다. 감았다가 풀었다가 감고 감기는 실패처럼 둘둘 말았다가 펴는 시의 공간에 가구며 의자를 하나하나씩 들여놓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약력
1962년 평택 출생. 현재 군포 거주
단국대 대학원 문예창작과 석사 수료
2007년 경기사이버문학상 입선
[2013 경인일보 신춘문예]시부문 심사평/최동호·김기택
"보이지 않는것 읽어내는 힘 돋보여"
▲ 시인 최동호(좌), 시인 김기택(우)
본심에 오른 열 명의 작품은 안정적인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데다 저마다 밤을 새운 듯한 치열한 절차탁마의 노력도 보였다.
떨어뜨리는 것이 잔인하다고 느껴질 만큼 그 정성과 노고는 커 보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작품들의 완성도가 자유로운 시 쓰기를 즐기기보다는 경쟁에서 이겨야겠다는 집념으로 자신을 학대하여 나온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하였다.
당선작의 모델을 미리 머릿속에 그려놓고 시의 형태와 창작방법과 사유를 그 틀에 억지로 맞추려는 듯한 태도가 여러 작품에서 보였기 때문이며, 어떤 작품들은 같은 사람이 쓴 것처럼 비슷해 보였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를 깨뜨리고 시 쓰기를 즐기면서 자유로워져야 남들과는 다른 개성도 나오고 새로움도 나올 수 있다. 창작은 이래야 한다는 경직된 태도는 시 쓰기를 괴롭게 만들고 나아가 호기심과 상상력까지 고사시킬 수 있다.
장유정의 '떠도는 지붕'은 이런 우려를 어느 정도 덜어준 수작이어서 당선작으로 결정하는 데 쉽게 의견이 일치하였다. 유목민의 천막집인 게르를 소재로 한 이 작품은 보이는 것 속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읽어내는 관찰력이 돋보인다.
게르의 잠재적인 구성 요소인 바람과 시간과 불의 운동을 역동적으로 묘사한 솜씨도 볼 만하다. 하늘과 바람으로 숨 쉬고 자연의 움직임을 읽으며 떠도는 유목민의 자유와 야생의 정신을 집이라는 시공간의 형식으로 구현한 시적 인식도 탄탄하고 믿음직하다. 당선을 축하한다.
박복영의 '골동품 가게를 둘러보다'는 평범한 대상에서 서정적 미적 체험을 이끌어내는 관찰력과 자연스럽고 차분한 어조가 돋보였지만, 상투적인 직유와 동어반복이 많아 긴장을 끝까지 유지하지 못했다. 남시우의 '리어카 화단'은 대상에 대한 따뜻하고 긍정적인 시선과 꽃의 이미지를 거리의 풍경으로 변주하는 상상력이 흥미로웠지만 과거를 회상하면서 전개하는 시적 인식과 형식이 상투적이었다.
장서영의 '시소의 빨간 경사는 때때로 무료하다'는 당선작과 겨룰 만한 완성도를 지니고 있고 상상력도 신선하여 호감이 갔지만, 신춘문예용으로 만든 듯한 느낌에서 자유롭지 못했을 뿐 아니라 함께 투고한 다른 작품은 수준이 떨어져서
[2013 경향 신춘문예 당선작]시 부문 - 이해존 ‘녹번동’글
1
햇살은 오래전부터 내 몸을 기어다녔다 문 걸어 잠근 며칠, 산이 가까워 지네가 나온다고 집주인이 약을 치고 갔다 씽크대 구멍도 막아 놓았다 네모를 그려 놓은 곳에 약 냄새 진동하는 방문이 있다 타오르는 동심원을 통과하는 차력사처럼 냄새의 불똥을 넘는다 어둠 속의 지네 한 마리, 조정 경기처럼 방바닥을 저어간다 오늘은 평일인데 나는 百足으로도 밖을 나서지 않는다
2
산이 슬퍼 보일 때가 있다 희끗한 뼈마디를 드러낸 절개지, 자귀나무는 뿌리로 낭떠러지를 버틴다 앞발이 잘리고도 언제 다시 발톱을 세울지 몰라 사람들이 그물로 가둬 놓았다 아물지 않은 상처가 곪아가는지 파헤쳐진 흙점에서 벌레가 기어나온다 바람이 신음소리 뱉어낼 때마다 마른 피 같은 황토가 쏟아져 내린다 무릎 꺾인 사자처럼 그물 찢으며 포효한다
3
저마다 지붕을 내다 넌다 한때 담수의 흔적을 기억하는 산속의 염전, 소금꽃을 피운다 옷가지와 이불이 만장처럼 펄럭이며 한때 이곳이 물바다였음을 알린다 흘러내리지 못한 빗줄기를 받아내는 그릇들,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방안에 고인 물을 양동이로 퍼낼 때 땀방울이 빗물에 섞였다 오랫동안 산속에 갇혀 있던 바다가 제 흔적을 짜디짠 결정으로 남긴다 장마 끝 폭염이다 살리나스*처럼 계단을 이룬 집들을 지나 더 올라서면 산봉우리다 계단 끝에 내다 넌 내 몸 위로 햇살이 기어다닌다
* 페루 고산의 계단식 염전.
[2013 국제신문신춘문예] 시 당선작 -
섬, 이유 /김유경
이 섬에선 사람이 죽으면 바람에 묻는다
그건 섬의 풍토병 같은 내력이어서 여자는
바다로 떠나 돌아오지 않는 아비의 아이를
박주가리 씨앗처럼 품은 채 바람에 묻혔다
은행나무가 여자의 무덤이며 묘비명이었다
남은 여자들이 제 주검을 보듯
길게 울다 돌아갔다, 섬에서 여자가 죽으면
살아서 뜨겁고 애달팠던 곳이 먼저 젖는다
바람은 젖어 있는 것부터 시나브로 말린다
소금에 간이 밴 깊이를 모두 말려
눈물의 뿌리가 마른 우물처럼 바닥을 드러내면
영혼을 바다로 돌려보내는 것이 바람의 법이다
하루 두 번 물마루 끝이 어물어물 붉어지고
꼭 쥐고 있던 바람의 손아귀가 스르르 풀리면
섬은 귀를 열고 듣는다, 먼 바다에서 들려오는
돌아오지 않는 아비들의 빈 배가 웅웅 우는 소리를
죽은 여자는 그 소리에 기대어 바람 몰래
혼자서 아이를 키운다, 뭉텅뭉텅 사라지는 몸에서
눈동자는 빛을 잃고, 머리칼은 제멋대로 자라나온다
아이를 품은 움 같이 보드라운 궁륭, 그 곳에선
바다 밑바닥에서만 나는 해초 내음이 나날이 짙어졌다
마침내 바람이 여자를 온전히 데려갈 때
죽은 여자는 아이를 은행나무 잎 속에 묻어두고
떠난다, 홀로 누워 있었던 자리에
노란 은행잎이 수북수북 쌓인다, 가을 한 철 내내
바람의 장례가 제 열매 다 익도록 잎을 물들이지 않는
은행나무의 사랑 같은 것인지 아무도 몰랐다
바람이 먼 바다 부표를 향해 치솟아 올라 길을 잡고
여자의 푸른빛 인광은 그리운 바다를 향해
따뜻하게 흘러간다, 아이는 그 바다 어디쯤에서
돌아오지 못한 제 아비를 그대로 빼닮았지만
섬도 바람도 그 아이를 알아보지 못했다.
[2013 신춘문예] 시 당선소감
'서른 전 등단' 만용이 현실로…스스로에 모진 시인될 것 / 김유경
종종, 일상을 '살아내는 것'이 아닌 '견디고 있다'고 느끼는 때가 있었다. 모두들 떠들썩하게 즐거운 때, 도저히 그 속에 섞여들 수 없었던 때도 있었다. 그런 막막함 속에서, 나는 줄곧 '쓴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왔다. 그것은 희박하지만 여일하게 빛을 발하는 밤하늘의 별 같은 것이었다.
애초부터 빈약하고 어수룩한 내 글이 삶의 방편이 되리라는 위험한 상상은 하지 않았다. 때문에 '쓴다는 것'으로 되돌아오기까지, 적지 않은 용기가 필요했다. 2010년 여름부터 시작된 나의 글쓰기는 다른 쪽으로 난 두 갈래 길을 합쳐 하나로 만드는 무모한 작업이었다.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읽기를 게을리 했다. 기사를 쓴다는 명목으로 쓰기를 소홀히 했다. 앞서 간 이들의 빼어난 문장을 교묘하게 훔쳐와 내 것인 양 우쭐대기도 했다. 이 과분한 자리를 빌려 깊이깊이 고개 숙여 반성한다. 앞으로 다가올 새날은, 나만의 고유한 빛깔을 지닌 살뜰한 문장들이 정수리 위로 벼락처럼 쏟아지는 날들이길 바라본다.
'시'라는 하나의 완결된 세계로 철부지를 이끌어주신 정일근 교수님, 글 쓰며 동고동락한 경남대 청년작가아카데미 친구들, 맹랑한 후배 너그럽게 품어주시는 경남신문사 식구들께 이 영광을 돌린다. 애틋한 나의 가족과 친지들, '부족함'을 '가능성'으로 보아주신 심사위원님들, '서른 전에 등단하겠다'는 만용을 패기로 여겨주신 모든 분께 진심으로 그리고 전심으로 감사드린다.
한 문장 겨우 쓰고 쉽게 두 문장을 지우는, 스스로에게 야박하고 모진 시인이 되겠다.
▶약력 1985년 경남 창원 출생. 부산대 사범대학 졸업. 경남대 교육대학원 재학. 현재 경남신문 문화부 기자.
[2013 신춘문예] 시 심사평 / 형식 뒤흔든 신인다운 패기 돋보여
파악된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상식으로 굳어져 최초의 경이를 상실해버린 세계 속에서 어떻게 삶과 사물에 대한 실감을 끌어올 수 있을까.
예심과 본심을 겸한 1차 심사를 거쳐 오른 작품들은 시 장르 고유의 구심점을 향한 몰입과 그로부터의 탈주로 크게 구별되었다. 서정성에 충실하였으나 새로운 모험의 열기가 느껴지지 않는 작품들 그리고 과잉된 탈주의지로 설명적인 산문투들이 먼저 제외되었다. 조립은 잘 되었으나 맥이 빠져 시적 울림에 실패한 작품들 또한 좋은 평을 받지 못했다.
최종심에 오른 것은 박다닌, 최희명, 김유경 세 사람의 응모작이다. 우선, 박다닌은 소외된 삶을 조명하는 따듯한 시선에 호감이 갔으나 이미지와 이미지를 연결하는 고리가 작위적으로 다가왔다.
심사위원들은 최희명과 김유경의 작품을 들고 팽팽한 긴장 속에 심사를 이어갔다. 최희명은 '고려인 집성촌'이라는 무거운 오브제를 절제된 감각으로 구조화하는 솜씨가 녹록잖았다. 견고한 형식미 또한 높은 점수를 받았으나 오히려 그 형식미가 시상의 확장을 방해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자칫 진부할 수 있는 주제를 삶의 구체성 속에서 길어올리는 김유경의 시는 시상을 끌고 가는 기량에 있어서나 시어를 낯설게 만드는 방식에서 단연 돋보였다. 넘치는 수사의 욕망에 절제가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없지 않았으나 서사를 내장한 이미지들의 날렵함이 그 흠을 오히려 더 빛나게 하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함께 보내온 작품들의 고른 수준도 신뢰감을 주었고, 무엇보다 시 너머에 대한 지향을 통해 고정된 형식을 뒤흔드는 신인다운 패기가 압도적으로 다가왔다.
장고 끝에 김유경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뽑는데 심사위원들은 만장일치로 합의를 보았다. 이 새로운 시인이 시 장르만의 특장을 고집스럽게 파고들어 가면서도 그 너머를 사유할 수 있는 무서운 신인으로 성장하길 바란다.
심사위원 허만하, 최영철, 손택수(이상 시인)
[동아일보 신춘문예 2013]시
‘가난한 오늘’ / 이병국
검지손가락 첫마디가 잘려나갔지만 아프진 않았다. 다만 그곳에서 자란 꽃나무가 무거워 허리를 펼 수 없었다. 사방에 흩어 놓은 햇볕에 머리가 헐었다. 바랜 눈으로 바라보는 앞은 여전히 형태를 지니지 못했다.
발등 위로 그들의 그림자가 지나간다. 망막에 맺힌 먼 길로 뒷모습이 아른거린다. 나는 허리를 펴지 못한다. 두 다리는 여백이 힘겹다.
연필로 그린 햇볕이 달력 같은 얼굴로 피어 있다. 뒤통수는 아무 말도 없었지만 양손 가득 길을 쥔 네가 흩날린다. 뒷걸음치는 그림자가 꽃나무를 삼킨다. 배는 고프지 않았다.
꽃이 떨어진다.
[2013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작/시]
쇼펜하우어 필경사-김지명
안개 낀 풍경이 나를 점령 한다
가능한 이성을 다해 착해지려한다
배수진을 친 곳에 야생 골짜기라고 쓴다
가시덤불 속에 붉은 볕이 흩어져 있다
산양이 혀를 거두어 절벽을 오른다
숨을 모은 안개가 물방울 탄환을 쏜다
적막을 디딘 새들만이 소음을 경청한다
저녁 숲이 방언을 흘려보낸다
무릎 꿇은 개가 마른 뼈를 깨물어댄다
절벽 한 쪽이 절개되고
창자 같은 도랑이 넓어진다
사마귀 날개가 짙어진다
산봉우리 몇 개가 북쪽으로 옮겨간다
초록에서 트림 냄새가 난다
밤마다 낮은 거래 되고
낮이 초록을 흥정하는 동안
멀리 안광이 흔들린다
흘레붙은 개가 신음을 흘린다
당신이 자서전에서 외출하고 있다
◆당선 소감(김지명)
꿈 높이 구두를 갈아 신은 아침 같았다. 불현듯 다가온 당신이 동굴 밖에 인형 하나를 그리며 소란했다. 당신의 소리 없는 노래를, 안무 없는 춤을, 감정 없는 사랑을, 동굴 속 어둠을 빌려 수없이 적었다. 당신과 내가 짝짝이 신발이란 걸 알아차린 어느 날, 당신은 떠났다. 당신을 그리워하는 것이 호흡인 나날을 보냈다. 불안은 짐승 여럿이 사는 움막에서 동거했다. 침묵으로 수태 기간을 보내고 당신을 찾아 나선다. 당신이 날 알아볼 줄 알았다. 꿈 높이 구두로 능동의 영토에 첫 발자국을 만든다. 이제 또 다른 불안을 내 허파에 기른다.
모험할 기회를 주신 심사위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멀리 볼 수 있는 안목과 죽음을 담보로 시작에 임해야 한다고 가르쳐주신 선생님께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 무작정 시를 좋아하던 설렘을 어깨 힘줄로 길러 준 선목문학회, 에이스동인 혜경, 정현, 성진에게 고마운 마음 전한다. 끝으로 오랫동안 후견인으로 지켜봐 준 남편과 딸에게 기나긴 고마움을 표한다.
◇ 약력 1960년 서울 출생 논리논술 강사
◆심사평-해마다 시 쓰기 열정 많아 향후 발전 가능성에 무게
예심을 통과한 열네 분의 작품들을 선자들이 숙독하고 논의했으나, 아쉽게도 올해엔 한눈에 띄는 당선작을 찾지 못했다. 전반적으로 일정한 수준의 기본기는 갖췄으나, 그 ‘너머’에 이르도록 끌고 가거나 들어 올리는 힘을 내재한 시편을 찾아내기란 꽤나 지난한 일이었다. 그러한 추동력이란 삶을 바라보는 서정적 진정성의 관점에서는 물론이려니와 언어 자체가 직조해내는 미묘한 ‘아우라’를 통해서도 발현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최종적으로 네 분의 작품들이 집중 숙고되었는데, 김지명의 ‘쇼펜하우어 필경사’, 지연식의 ‘가금의 서’, 박은선의 ‘흔적 하나’, 이도은의 ‘엄마는 외계인’이 그것들이다. ‘가금의 서’는 가장 활달한 지적 실험정신과 개성 있는 텍스트적 상상력을 보여주어 주목되었는데, 과유불급이랄까 시에 녹아들지 못한 생경한 언술이나 비유들이 흠결로 드러나 완성도라는 점에서 아쉬웠다. ‘흔적 하나’는 창문 틈에 죽은 곤충의 시체를 화자로 한 묘사적 상상력이 진정성에 닿아있어 끝까지 고려되었지만, 군더더기라 할 언술들이 많아 정련미가 부족했다. ‘엄마는 외계인’은 동화적 상상력이라 할 나름의 발성법을 갖고 있어 발전 가능성이 보였으나, 좀 더 웅숭깊은 시선과 시적 사유의 깊이와 넓이를 더해주기를 바란다.
고심 끝에 ‘당선작 없음’까지 고려되었으나, 해마다 시 쓰기의 열정을 불태운 투고자들의 고뇌와 절망을 감안하여 향후의 발전 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 ‘쇼펜하우어 필경사’를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쇼펜하우어 필경사’ 역시 수사적 완성도의 미흡함을 드러내고 있으나 앞으로 각고의 정진을 통해 문체를 획득하게 된다면, 오히려 이런 약점을 자신만의 시학을 구축하는 장점으로 전환시킬 수 있겠다는 기대를 갖게 하는 특유의 힘 있는 시적 언술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을 높이 산 것이다.
심사위원 본심: 엄원태`조용미(시인), 예심: 안상학`김이듬(시인)
[문화일보] 2013 신춘문예 게재 일자 : 2013년 01월 02일(水)
오늘의 의상 -정지우-
성당의 느티나무 그늘이 무더위에 끌리고 있다
팔랑거리는 양떼들을 데리고
계절 속으로 입성하려면 가벼운 체위는 가리고 고딕의 시대를 지나야 한다
폭염은 언덕에 한낮으로 누워 있다
구름의 미사포를 쓰고 그늘을 숙이던 오후는 초록의 전례를 들려주더니
밀빵을 혀에 얹고 한동안 입들이 닫혀 있을 것이다
종탑에는 귀머거리 새가
종소리를 둥지로 삼아 살고 있다
회색을 입고 묵상에 잠긴 성전엔 돌기둥을 돌던 저녁의 의복이 걸쳐져 있다
미사의 요일엔 검은 머리카락을 버리고 히브리어를 닮은 숟가락으로 점심을 먹는다
오늘의 드레스코드는 디저트가 없는
주일 맛 나는 테이블
중세의 햇빛이 스테인드글라스로 들어오는 창문
귀가 잘려진 무늬에선
단풍잎 맛이 나는 오래된 말들이 달그락거린다
촛대처럼 나무가 자꾸 떨어뜨리는 중얼거림들
대신 읊고 가는 가을 울음소리가 스르르 바닥에 끌린다
계단이나 혹은 의자로 배치되어 있는 한 철을
나는 양치기 소년으로 지나고 있다
시름의 골목 지나는 어린 나에게 돌아가고 싶어
시 당선소감 - 정지우
입술을 달싹였지만 말이 되어 나오지 못한 날들이 되풀이됐다. 한동안 소리를 잃었을 때 모든 밤과 낮을 모아 구겨버린 일들이 소소한 날의 뒤편을 떠다녔다. 내 옆엔 언제나 불면의 그림자만이 작아졌다 커지곤 했다. 시어를 쌓았다 허물어버린 기억이 어제의 눈송이로 내리고 그 위로 겨울비가 내렸다. 차가운 빗물에 미끄러질 뻔한 손을 간신히 잡아준 아침처럼 당선 소식을 받았다. 아직 어린 아이로 골목을 지나고 있는 나에게 먼저 찾아가고 싶다. 내가 나를 잃어버린 시간으로부터 너무 멀리 와 있었다. 타인의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는 나를, 양떼를 몰고 성당 주위를 돌고 있는 양치기 소년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묵상을 의복처럼 걸치고 사물의 바깥에서 길을 잃어도 멀리 성당 종소리에 귀를 붙들려도 중세로 돌아가는 길을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잠시 쉬어가야겠다, 라고 생각했을 무렵이었다. 몸으로 시를 써서 왼쪽엔 통점을, 오른쪽엔 고독을 모시고 살았다. 문득 뒤돌아보게 되는 연말엔 더욱 지치고 힘들었던 것 같다. 매번 마침표를 찍고 싶은 순간을 지나치곤 했는데 이제는 그 시름을 넌지시 위로할 수 있겠다. 무수한 날들, 삶의 전환점을 돌아 어린 나에게 돌아가는 일이 헛되지 않음에 감사한다. 오랜 기다림에 손을 내밀어주신 황동규, 정호승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시의 근원이신 엄마에게 생애 최고의 선물을 전할 수 있어서 무엇보다 기쁘다. 언제나 곁에서 독자로 조언과 힘을 실어주었던 남편과 소망을 주는 딸 이주, 이정 그리고 동생 애정이에게 지면을 빌려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많은 가르침을 주신 이봉일, 이문재, 이영광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학우들, 목동 문우들과 행복을 나누고 싶다. 그리고 힘들 때 벗이 돼주었던 동료 논술 선생님들과 나를 선생님으로 부르는 아이들이 보고 싶다. 더욱 치열하게 시를 쓰면서 희망을 견디기로 한다. 끝까지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 1970년 전남 구례 출생
▲ 경희사이버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 논술 언어력지도교사
풍성한 비유로 우리 시대의 삶에 화두 제시 / 시 심사평
▲ ‘2013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본심을 진행 중인 황동규(왼쪽) 시인과 정호승 시인.
최종심까지 남은 작품은 박도준의 ‘빨대’, 한그린의 ‘어떤 악기’, 최원의 ‘이웃의 중력’, 정지우의 ‘오늘의 의상’이었다. ‘빨대’는 인간에게 죽임을 당하는 새끼 곰에 대한 어미 곰의 모성을 역설적으로 드러냈으나 설명이 지나쳐 시적 형성력을 잃고 말았다.
‘어떤 악기’는 비뇨기과 탁자 위에 꽂혀 있는 ‘오줌 컵’들을 하나의 악기로 파악한 점이 신선하고 기발하나,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신선함과 기발함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 큰 단점이었다. ‘이웃의 중력’은 이웃과 함께 살 수밖에 없는 우리 삶의 관계를 투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수작이었다. 보통 그 투명함 속에는 냉소적인 차가움이 있게 마련인데 인간적인 따스함이 돋보여 호감이 갔다. 그러나 타 신문사에 중복 투고한 탓으로 더는 심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결국 당선작으로 결정된 ‘오늘의 의상’은 풍성한 비유를 통해 오늘 우리 시대의 삶에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 하는 화두를 제시하고 있다. 특정한 모임에 예의상 입고 가는 의상을 일컬어 ‘드레스 코드’라고 할 때 오늘 우리의 삶에도 특정한 의상이 필요하며, 그것이 바로 ‘사랑의 의상’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 신뢰가 갔다.
이 시는 전체적으로 종교적 은유성을 지니고 있으나 결코 종교성에 함락돼 있지 않다는 점이 또한 큰 장점이었다. 함께 투고한 ‘향신료 상인’이나 ‘발소리를 포장하는 법’ 등도 시인으로서의 앞날을 기대하기에 충분한 작품이었다.
앞으로 한국시단의 발전을 위해 자기만의 개성이 두드러진 시를 쓰는 시인으로 성장해주길 바란다.
심사위원 황동규·정호승
[2013 부산일보 신춘문예 - 시] / 정와연 2012-12-31 [08:18:48]
네팔상회
분절된 말들이 이 골목의 모국어다
춥고 높은 발음들이 산을 내려온 듯 어눌하고
까무잡잡하게 탄 말들
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이 모이면 동네가
되고 동네는 골목을 만들고
늙은 소처럼 어슬렁거리는 휴일이 있다
먼 곳의 일을 동경했을까
가끔은 무명지 잘린 송금이 있었다
창문 없는 공장의 몇 달이 고지대의 공기로 가득 찬다
마음이 어둑해지면 찾는 네팔상회
기웃거리는 한국어는 이국의 말 같다
달밧과 향신료가 듬뿍 배인 커리와 아짜르
손에도 엄격한 계급이 있어 왼손은 얼씬도 못하는 밥상
그러나 흐르는 물속을 따라가 보면
다가가서 슬쩍 씻겨주는 손
그쪽에는 설산을 돌아 나온 강의 기류가 있다
날개를 달고 긴 숫자들이 고산을 넘어간다
몇 개의 봉우리가 창문을 두드린다
질긴 노동이 차가운 맨손에서 목장갑으로 낡아갔다
세상에는 분명 돌아가는 날짜가 있다는 것에 경배,
히말라야줄기를 잡아끄는 골목의 밤은
왁자지껄 하거나 까무잡잡하다
네팔 말을 몰라 그냥 네팔상회라 부르는 곳
알고 보면 그 집 주인은 네팔 사람이 아니다
돌아갈 날짜가 간절한 사람들은 함부로
부유하는 주소에서
[2013 신춘문예 - 시 당선소감] "마음을 비운 자리에 긍정의 힘이 솟아"
꽁꽁 언 날에 훈훈한 전화 한 통을 받습니다. 마음은 화끈 달아올랐으나 몸은 덜덜 떨고 있었습니다. 한참을 서성거렸습니다. 아, 이런 기분이구나, 이런 날이 내게도 오는구나,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길이었습니다. 이쯤에서 돌아설까 하는 생각도 여러 번 했습니다.
기쁜 소식이 전해지려고 그랬을까요. 세상이 달리 보였습니다. 젖은 땅에 달라붙은 낙엽을 보며 행복했습니다. 빙판길에서도 여유가 생겼습니다. 마음을 비운 자리에 긍정의 힘이 솟았습니다. 자연의 순리에 따라 늙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날마다 감탄하며 살아간다는 어느 노인의 말이 실감 나는 한 해였습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당선이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마음이 급변해 요동을 쳤습니다.
먼저 부산일보사에 감사를 표합니다. 아직 많이 부족한 글을 뽑아 주신 심사위원들께도 큰절을 올립니다. 갈팡질팡하는 길목에 주단을 깔아 주셨습니다. 그 길로 선뜻 들어서기가 왠지 두렵지만 들어서렵니다. 주단이 끝나는 지점에는 더 높은 갈래의 길이 있다는 걸 잘 압니다. 열심히 찾아가겠습니다.
큰 도움 주신 숭의여대 강형철 교수님, 김양호 교수님, 박상률 교수님, 전기철 교수님께 감사 드립니다. 용기를 불어넣어 주신 마경덕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선생님 고맙습니다. 문우들과도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묵묵히 지켜봐 준 존경하는 남편 김종갑 씨, 시 쓰는 엄마가 멋지고 자랑스럽다는 세 딸 명륜 소나 안지, 아들 재환 모두 모두 사랑합니다.이 무한한 기쁨과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 드립니다.
정와연(본명 정길례)/1947년 전남 화순 출생. 숭의여자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2013 신춘문예 - 시 심사평] "세상의 관절염 어루만지는 숙련된 직녀"
나와 너, 나와 우리, 나와 세상 사이에 관절염이 심한 시대에는 통증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언어의 직녀나 기존의 형식을 개성적인 칼로 쳐내는 새로운 검객이 필요하다. 때문에 시력과 시세계가 각각 다른 심사위원들의 눈에 띄는 직녀나 검객은 호불호의 문제가 아니라 내공의 깊이였다. 안타깝게도 용감하게 수사의 촘촘한 그물망을 벗어나 검을 날리는 작품은 그리 많지 않았고 드문드문 보이는 축에도 문장과 문장을 뛰어넘는 검법에 개연성이 부족했다.
'맥문동 재봉골목'은 예쁘고 앙증맞은 묘사의 보폭이 너무 조심스러워 골목을 벗어나 골목 밖의 세계를 아우르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나스카라인'은 대상을 도형화하는 섬세한 솜씨에 깊이 치중하여 도형을 그리는 이유를 상실하지 않았나 싶었다. 그것은 인식의 문제이기도 하나 언어의 숙련을 제고해 봐야 할 것 같다. 당선작으로 합의에 이른 '네팔상회'는 영리한 작품이다. 관계의 관절염을 앓는 시대를 인식하는 깊이와 언어를 직조하는 내공, 표현하고자 하는 세계에 도달하기 위해 시작점을 찍는 노련함은 유려하게 흘러 과장되지 않게 세상의 관절염을 어루만지는 숙련된 직녀로서 심사위원들에게 깊은 신뢰감을 주었다. 그 영리함에는 안전을 보장해 주는 기존의 직조법을 거듭 재탐색할 것이라는 자세도 포함해 주기로 한다.
심사위원 오탁번·강은교·조말선
[2013 불교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시/ 최길하
‘탑’
탑은 탑보다
탑 그림자가 더 좋다
그림자도 그냥 그림자가 아니라
물고기떼 집이 돼주는 물 속 그림자가 더 좋다
물 속 그림자도
뭉게구름 몇 장 데리고 노는
늙으신 탑이 더 좋다
아침마다 마당을 쓸어놓고
등불같은 까치밥 쳐다보는
우리 종손같은 탑이 더 좋다
■ 시 심사평
“번잡 벗어도 ‘결핍’은 없었다” 고은 / 시인
또 묵은 인연으로 <불교신문> 새해의 시를 만나게 되었다. 500인의 응모작 가운데서 나에게 온 92인의 작품들을 읽기를 거듭했다. 우선 소재의 폭이 넓다.
절간 해우소와 노모의 응가에도 시의 시야가 꽂혀 있다. 쓰레기 분리수거와 환경미화원의 미덕에도 가 있다. 찜질방에도 가 있다. 멀리 아프리카 수단에서부터 스페인 그라나다도 지나친다.
물론 <불교신문> 응모이므로 산사나 불교정서에 발걸음을 상습적으로 하는 것도 적지 않다. 하지만 시조쪽이 저조한 반면 자유시 쪽의 역량은 그야말로 당당한 군웅할거(群雄割據)이다. 자유시의 경우 그 지적인 표현능력의 수준이 놀라울 정도였다.
‘월식’은 착실하다. 어머니의 내실 반지고리에 성장과정의 향수가 밀집한다. ‘호미로 새긴 금성모자’ 역시 농경사회의 한 정경이 군더더기 없이 단정한 사상(事象)을 구현한다. ‘농점 6호’ 역시 벼농사의 첫 사례가 정교한 공감을 자아낸다. 농업적 지성이 여기에 있다. ‘궁극의 시간’은 청각언어의 묘미를 재미나게 살리고 있다. 우리말의 의성어로 궁극의 의미를 포착하는 재치가 있다.
‘탑’은 번잡을 다 벗어나 있다. 그렇다고 결핍은 눈에 띄지 않았다. 단호하고 단정하다. 참 경지가 엿보인다. 다만 이것과 다른 작품의 수준에 차이가 나서 이것이 의외적이다. ‘노도서신’은 서포 김만중을 통한 강개가 절절한 궁중언사가 묘미를 더한다. 유장하다. ‘둠벙에게 물어봐’는 고향에서의 유년체험이 성숙한 의식에 대해서 근본에의 환원을 일깨운다. 시다운 시다.
‘배꼽이다’는 이만한 현실감각에서의 깊은 자의식은 기성시단에서고 귀중한 현상이다. 하지만 의식의 노출이 감동보다는 충돌하는 기호의 역설에 기울어지고 있다. 이런 나머지 ‘탑’으로 당선작을 삼는다. ‘둠벙…’과 ‘배꼽…’이 아깝다. 내 마음으로는 셋을 한꺼번에 뽑고 싶었다.
■ 시 당선소감 / 최길하
“불교의 진리는 ‘질량불변의 법칙’입니다”
제게 불경을 풀어놓은 책이 있는데 그것이 고등학교 교과서인 화학, 생물, 물리 등의 책입니다. 공고 화공과를 졸업하고 그것으로 지금까지 밥도 만들고 글도 만들었습니다.
학교에서는 참 재미없는 책이 전공이었던 화학이었는데 졸업을 하고 어느 날 헌책방에서 일본사람들이 쓴 갈잎만한 크기의 자연과학문고를 만났습니다. 그 사람들은 물리 수학 화학 천문을 세상 이치와 비교하면서 너무 재미있게 풀어놓았더군요.
<화엄경>이 참 심오하고 좋다고 하여 그것만 터득하면 마음에 환한 꽃밭이 한 마지기 생기는 줄 알고 책을 사서 읽어보는데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요. 그래도 심심하면 바람이 책장 넘기듯 뒤적뒤적하다 덮고 하기를 몇 십 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그 화학책 내용 중에 ‘질량불변의 법칙’이 바로 <반야심경>과 한통에 붙은 배와 등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는 <반야심경> <화엄경>이 엉킨 실 풀리듯 술술 다 풀리는 겁니다.
<법화경> <화엄경>은 자연과학을 은유와 상징으로 세상이치를 말씀하신 자연과학책이었고, 화학 천문 물리 등은 경전에 그려놓은 법계를 수치로 정량계산 할 수 있도록 증명한 경전이었습니다. 가장 큰 발견은 등호(=)입니다. 모든 수학은 좌변과 우변을 평등 즉 균형을 이루게 하라는 것이잖아요. 균형이 되면 정답이고 어느 쪽으로 기울면 오답입니다.
이 세상의 이치인 성주괴멸 이것은 산화와 환원인데 항상 동시에 이루어지며 좌우가 질량불변, 균형을 유지합니다. 요즘 정치사회의 화두가 통합이고 통합의 방법으로 격차를 줄이자는 것인데 층의 높낮이차를 낮추자는 것도 등호(=)의 세상이치라고 생각합니다.
시조를 쓰고 있습니다. 성을 쌓고 스스로 성에 가두어진 성주와 성 안에 백성이 있는 연방을 바라보면서 소외자가 치고나갈 방편으로 시를 응모하게 되었습니다.
신문사와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리며 결코 실망시켜드리지 않을 것을 약속합니다.
[불교신문 2877호/ 1월1일자]
[2012 서울신문 신춘문예-시 당선작] /김준현
이끼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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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 위로 귀 몇 개가 떠다닌다
검은 비닐봉지 속에 느린 허공이 담겨 있다 나는
내 빈 얼굴을 바라본다 눈을 감거나
뜨거나, 닫아놓은 창이다
녹슨 현악기의 뼈를 꺾어 왔다 우물이 입을 벌리고
벽에는 수염이 거뭇하다 사춘기라면
젖은 눈으로
기타의 냄새 나는 구멍을 더듬는, 장마철이다
손가락 몇 개로 높아지는 빗소리를 누른다 저 먼 곳에서
핏줄이 서는 그의 목젖, 거친
수염을 민다
드러나는 싹이여, 자라지 마라
벌레들이 털 많은 다리로 밤에서
새벽까지 더듬어 오른다
나는 잠든 그의 뒷주머니에
시린 손을 숨긴다 부드럽고 가장 어두운
비닐봉지 안에 차가운 달걀 몇 개를 담아
바람에 밀려가는 주소를 찾는다
귀들이 다 가라앉은 물에도
소름이 돋는 중이다
▲ 김준현 [당선소감] 더 정갈한 글로 보답하겠습니다
어릴 때, 저녁이면 부모님은 저와 동생에게 과일을 깎아 주셨습니다. 지켜보며, 사과껍질을 끊기지 않게 깎는 법을 배우고 싶었죠. 그러나 손놀림이 서툴렀던 저는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생각하면, 한 번도 긴 곡선의 껍질을 남긴 적이 없었던, 제 사과.
서툴렀던 건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병아리를 길렀던 적이 있었죠. 어쩌다 다리를 다친, 이름도 잊어버린 그 병아리 역시 제 서투른 사육의 증거였습니다. 베란다의 사과박스 속 홀로, 한 쪽 다리로 서 있던 병아리를 보며 저는 ‘쓸쓸’이라는 감정을 배웠습니다. 의무처럼, 저는 병아리의 배설물이 묻은 신문지를 갈아주었습니다. 오래된 신문지와 새 신문지의 날짜 사이 점점 간격이 벌어지던 어느 날, 병아리는 눈을 감고 있더군요.
방에서 홀로 쓰다가 그렇게 지칠 때면 저는 밝고 따뜻한 집으로 돌아갑니다. 늘 믿고 기다려주신 아버지, 어머니, 동생에게- 늘 사랑하고 고맙습니다.
문학을, 사람을 대하는 자세를 몸소 보여주시고, 늘 제 서투른 감각들을 짚어주시는 김문주 교수님. 감사합니다, 그 이상의 인사는 좋은 작품이어야 할 것 같습니다. 더불어 영남대 국문과의 교수님들, 제가 지나온 모든 선생님들과 친구들, 특히 승협, 명재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정끝별 손택수 두 심사위원께는 더 정갈한 소리로 보답을 드리겠습니다. 오래 가라앉고자 합니다.
■약력
▲ 1987년 포항 출생 ▲영남대 국문과 졸업▲ 현재 동대학원 국문과 재학
[심사평] ‘따로 없는 詩 쓰는 법’ 모험에 박수를
추사에 따르면, 묵죽을 그리는 데는 법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법이 따로 없는 것도 아니다. ‘따로 있는 법’을 성실히 참조하면서도 과감히 떨쳐버리고 어떻게 ‘따로 없는 법’을 찾아나설 것인가. 신춘문예 시 부문 심사는 모험을 향해 떠난 외롭고 고단한 열정들과의 뜨거운 만남의 자리였다.
▲ 심사위원 정끝별(시인·왼쪽), 손택수(시인).
꼼꼼하고 균형 잡힌 예심을 거쳐 올라온 총 20여명의 작품 중 최종심에 오른 것은 ‘새라는 가능성’, ‘고동의 길’, ‘만찬’, ‘이끼의 시간’ 등 모두 네 편이었다. 예리하게 벼린 언어 감각이 돋보이는 ‘새라는 가능성’은 높은 시적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기시감이 있었다. 새, 새장, 온도, 울음, 바람 등 선택된 오브제들과 그 엮음의 방식이 표절 시비로 이미 당선 취소된 바 있는 작품들과 유사해 또 다른 표절 시비를 몰고 올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 하에 가장 먼저 제외되었다. ‘만찬’은 “노을에도 마블링이 있다/ 칼이 허공의 날개처럼 살 사이를 휘젓는다”와 같은 감각적인 언술에 호소력이 있었으나 전체적으로 과잉된 수사욕망을 절제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은 ‘고동의 길’과 ‘이끼의 시간’이었다. ‘고동의 길’은 수많은 시 창작론의 정석이라고 해도 될 만큼 균형 잡힌 구조와 투박한 시어들을 장악해 들어가는 사유의 힘이 돌올했다.
반면에 미성년의 실존적 내면을 다룬 ‘이끼의 시간’은 우물, 검은 비밀봉지, 현악기(기타) 등으로 변주를 거듭하는 은유와 신경증적인 감각들로 이미지와 이미지, 의미와 의미 사이의 연결고리가 불안으로 술렁였다. 동봉한 작품들 또한 같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하지만 이 불안은 그 무엇도 결정되지 않는 혼돈 속에서 돋아나는 새로운 가능성의 감각과 열기로 꽉 차 있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완숙한 포도주의 맛과 아직 미숙하긴 하되 미래를 잠재한 떫은 포도주의 맛 사이에서 장고 끝에 심사위원들은 ‘따로 없는 법’을 찾아나선 자의 모험에 손을 들어주기로 하였다. 새로운 시인의 탄생에 매운 채찍과 응원을 함께 보낸다.
[2013 조선일보 신년특집] [신춘문예 / 시 당선작 / 당선소감 / 심사평]
손톱 깎는 날 / 김재현
우주는 뒷덜미만이 환하다, 기상청은 흐림
구름 사이로 드문드문 쏟아지는 빛 속에는
태양이 아닌, 몇 억 광년쯤 떨어진 곳의 소식도 있을 것이다
입가에 묻은 크림 자국처럼 구름은 흩어져 있다
기상청은 거짓, 오늘
나는 천 원짜리 손톱깎이 하나를 살 것이다
태어났을 때부터 내 손톱은 단단했다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나의 바깥이었다
어릴 적부터 손톱에 관해선
그것을 잘라내는 법만을 배웠다
화초를 몸처럼 기르는 어머니를 보고 자랐지만
나는 손톱에 물을 주거나 낮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주는 일 따위에 대해선 상상할 수 없었다
결국 그것은 문제아거나 모범생이거나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과 같았지만
나는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만 모범이었으며 문제였을 뿐
그러므로 손톱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
나 또한 그것의 바깥에 불과하다
오늘, 우주의 뒷덜미가 내내 환하다
당신은 매니큐어로 손톱을 덮으려 하고 나는 손톱을 깎는다
우리는 예의를 위해 버리고, 욕망을 위해 남기지만
동시에 손가락 위에 두껍게 자라는 것들이
어느 쪽에 가까운지 알 수 없다
다만 휴지 속으로 던져둔 손톱들과, 날씨
그리고 나에 대해서만 생각할 뿐
버려진 손톱들은 언제나 희미하게 웃고 있다
그림=이철원 기자 [당선 소감] "아이처럼 엉엉 울었습니다, 자꾸만 새로워지겠습니다"
김재현 찌개가 끓고 있는 밥집에서 연락을 받았습니다. 텅텅 비어 있던 배 속이 밥알 대신 알 수 없는 감정들로 차올랐습니다. 먹지 않아도 배부를 수가 있구나. 우습지만, 당선 연락을 받고 처음 깨달은 게 그것입니다. 연락을 받은 친구들이 달려와 볼에다 마구 뽀뽀를 해댔습니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였고 금세 두려움이 차올랐습니다. 제가 그동안 무엇을 써왔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습니다. 훈련을 마치고 첫 전장에 나가는 병사의 심정이 이랬을까요.
시인이 된다는 것과 시인이 되고 싶은 것 사이에 이토록 깊은 거리가 있다는 걸 몰랐습니다. 간밤의 꿈에서 누군가에게 사과를 했고 그는 받아주지 않고 그냥 돌아섰습니다. 그가 시였을까요. 꿈에서 깨어난 후, 나는 아직 텅 비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실은, 시 쓰기에 방점을 찍는다는 생각으로 투고했던 글이었습니다. 그 방점이 새로운 문장을 쓰기 위한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놓으면 온다는 이치를 알 것 같습니다. 이제 이 길을 숙명이라 믿고 묵묵히 걸어가겠습니다.
제 가능성을 봐주신 심사위원분들께 우선 감사드립니다. 부끄럽지 않게 써나가겠습니다. 끝까지 저를 놓지 않으셨던 박주택 선생님, 김종회 선생님, 서하진 선생님. 평생을 다해도 갚을 수 없는, 너무나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처음으로 시의 길을 알려주셨던 정우영 선생님. 항상 건강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격려와 확신을 주었던 이체, 강진, 동운. 주모동의 단테. 문예창작단의 선후배들. 당신들이 제게는 써야 하는 이유들이었습니다. 고향 친구들인 용준, 한상, 지홍, 경록, 정훈. 내일도 오늘처럼 끈끈하게 살아갑시다. 지금은 이름을 부르기 힘든, 하지만 언젠가 나를 용서해주길 바라는 그에게도 하고픈 말이 있습니다. 절망과 방황을, 성장과 배움을 당신을 통해 겪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마지막으로 나를 나 자신보다 아껴주는 금희와 부모님에게 진심을 담은 사랑을 전합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는데, 갓 태어난 기분입니다. 집에 돌아가 아이처럼 울었습니다. 자꾸만 새로워지겠습니다.
▲1989년 경남 거창 출생
▲경희대 국문과 재학 중
[심사평] 삶의 구체성을 통한 사유 그것을 언어화하는 능력 돋보여
조정권(왼쪽), 문정희 시인. 어느 해보다 많은 응모작을 보며 새롭고 다양한 개성과 시세계에 대한 기대 또한 더욱 높았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오른 시 가운데 이소연의 ‘활과 무사’ 외, 노정균의 ‘우산은 어디서 파나요?’ 외, 김재현의 ‘손톱 깎는 날’ 외로 의견이 좁혀졌다. 이 세 사람의 작품은 우선 언어 장인으로서의 기량과 그것을 삶의 지렛대로 끌고 가려는 진정성이 돋보였다. 최근 한국시에서 자주 지적되는 산문화, 언어 낭비, 소통의 문제도 비교적 잘 극복해 가고 있었다.
이소연은 ‘활과 무사’ ‘늑골이 빛나는 발레 교습’ 등의 작품을 통하여 감각적 투시, 대담한 언어 구사로 산뜻함을 드러내었고, 노정균은 ‘우산은 어디서 파나요?’와 ‘입양’을 통하여 우리말의 어미를 “…다.”로 끝내지 않고 이어지는 각운을 통하여 사유가 리듬을 불러오는 작법의 시도를 보여주었다.
논의를 거듭한 끝에 김재현의 ‘손톱 깎는 날’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삶의 구체성을 통한 사유, 그것을 언어화하는 능력과 밀도를 주목했다. 함께 응모한 다른 작품들 또한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 신뢰를 보탰다. 뱀처럼 섬뜩한 이미지의 ‘아야와스키의 시간’, 태어날 것들을 위해 스스로를 앓아 주렁주렁 매달린 ‘몰식자(沒食子)’에서 예사롭지 않은 재능을 보았다. 하지만 미개척지를 향한 탐색과 언어 실험자로서의 패기가 지나쳐서 억지스러운 조어가 이물(異物)처럼 박혀 있는 것이 다소 눈에 거슬렸다. 시란 사물과 사유를 언어로 갈고 닦아 가장 명징하게 본질을 드러내는 생명체이다. 삶의 타성과 시류와 진부에로의 수압을 잘 견뎌내어 부디 좋은 시인으로 훨훨 날아오르기를 바란다.
[2013 신춘문예 - 시] 이정훈,
'쏘가리, 호랑이'
나는 가끔 생각한다
범들이 강물 속에 살고 있는 거라고
범이 되고 싶었던 큰아버지는 얼룩얼룩한 가죽에 쇠촉 자국만 남아
집으로 돌아오진 못하고 병창[i] 아래 엎드려 있는 거라고
할애비는 밤마다 마당귀를 단단히 여몄다
아버지는 굴속 같은 고라댕이[ii]가 싫다고 산등강으로만 쏘다니다
생각나면 손가락만 하나씩 잘라먹고 날 뱉어냈다
우두둑, 소리에 앞 병창 귀퉁이가 와지끈 무너져 내렸고
손가락 세 개를 깨물어 먹고서야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갔다
아버지가 밟고 다니던 병창 아래서 작살을 간다
바위너덜마다 사슴 떼가 몰려나와 청태를 뜯고
멧돼지, 곰이 덜걱덜걱 나뭇등걸 파헤치는 소리
내가 작살을 움켜쥐어 물속 산맥을 타넘으면
덩굴무늬 우수리 범이 가장 연한 물살을 꼬리에 말아 따라오고
내가 들판을 걸어가면
구름무늬 조선표범이 가장 깊은 바람을 부레에 감춰 끝없이 달려가고
수염이 났었을라나 큰아버지는,
덤불에서 장과를 주워먹고 동굴 속 낙엽잠이 들 때마다
내 송곳니는 점점 날카로워지고
짐승이 피를 몸에 바를 때마다
나는 하루하루 집을 잊고 아버지를 잊었다
벼락에 부러진 거대한 사스레나무 아래
저 물 밖 인간의 나라를 파묻어 버렸을 때
별과 별 사이 가득한 이끼가 내 눈의 흰창을 지우고
등줄기 가득 가시가 돋아났다 심장이 둘로 갈려져,
아가미 양쪽에서, 퍼덕,
거,리,기,시,작,했,다
산과 산 사이
沼와 여울, 여울과 沼가 끊일 듯 끊일 듯 흘러간다
坐向 한번 틀지 않고 수 십 대를 버티는 일가붙이들
지붕과 지붕이 툭툭 불거진 저 산 줄기줄기
큰아버지가 살고 할애비가 살고
해 지는 병창 바위처마에 걸터앉으면
언제나 아버지의 없는 손가락, 나는
[i]'절벽'이란 뜻의 강원도 사투리
[ii] '골짜기'란 뜻의 강원도 사투리
당선소감
"세 번 도리질했는데… 두 아이 이름 적어놓고 또 밤길을 줄여갑니다"
세상의 하고많은 배역 중
왜 제게는 나귀 한 마리와
끝없이 걸어야 하는 길이 주어졌는지
밤마다 손바닥을 들여다봅니다
후벼서 미안하다는 듯 흐르는 이 강을
오늘은 애수라고 불러봅니다
내가 강가에 마을 하나 지어 놓으면
밤나무 두 그루와 낡은 슬레이트 지붕이 떠갑니다
뇌운 용항 도돈 판운 멀리 주천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여울 가 삐익 삑,
노루새끼 호드기 붑니다
고지를 받았을 땐 지실고개를 넘고 있었습니다
아니요, 세 번 도리질 했는데
네 번 맞다고 해서 박달재를 넘을 땐
말씀으로 수태한 처녀 같았습니다
딱!
밤톨 떨어지는 소리가 만종처럼 울려
다릿재 꼭대기 노을을 몰고 시속 팔십 킬로미터
붕붕 서쪽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립고 고마운 이름이 왜 없겠습니까만
나경 해오니 두 아이의 이름 울금빛으로 적어놓고
또 밤길을 줄여야합니다
고형렬 선생님, 감사합니다
심사평
독특한 개성의 탄생… 신화적 상상력의 눈부신 질주 보는 듯
세 명의 심사위원이 투고작 전부를 나눠 읽고 거기서 추린 작품을 토대로 논의를 거듭한 결과 '쏘가리, 호랑이'(이정훈)를 당선작으로 결정하는 데 합의했다.
'쏘가리, 호랑이'를 비롯해 이정훈의 작품은 요즘 우리 시단에서 보기 힘든 신화적 상상력의 눈부신 질주를 보여준다. 그 상상력은 강물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를 산맥을 치달리는 호랑이로 치환시키는 마법을 가능케 한다. 우리 민족 고유의 향토적 풍광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시는 마치 이 땅에 산업사회가 도래한 적이 없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언어의 구체성과 밀도를 획득하고 있다. 이 독특한 개성의 탄생을 축하하며 다만 그의 시편들에 내포된 일종의 아나크로니즘(의도적인 시대착오성)을 앞으로의 시작을 통해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모색해주길 바란다는 권고를 덧붙이고 싶다.
'단풍나무 빵집'의 손현승은 심사위원들에게 오랜 망설임의 시간을 강요한 응모자였다. 대화체를 적절히 활용한 이 시는 대상이 되는 빵-빵집-빵집 여자에 범용한 일상성을 뛰어넘는 서정적 후광을 씌워주는 데 성공하고 있다. 삶을 바라보는 따스하면서도 원숙한 시선이 인상적인 이 시는 읽다보면 고소한 빵냄새가 주변에 감도는 듯한 풍미를 선사한다. 심사위원 구성이 조금만 달랐다면 최종 결과가 다르게 나왔을지도 모를 만큼 이 작품이 주는 매혹은 상당했다.
'곰이 돌아왔다'의 장유정도 아까운 응모자였다. 투고작 전부가 일정한 수준을 유지한 견고한 시적 형상화 능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미지의 조형이나 어조의 완급조절에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고 있으나 전체적으로 시적 발상이 새롭지 않다는 난점을 갖고 있었다.
이밖에 '누군가의 단검'의 김지연, '애플파이 레시피'의 고태관, '골목은 모퉁이를 돌면 막혀 있다'의 유병현, '불룩한 체류'의 이문정 등도 기억에 남는 작품을 선보인 응모자들이었다. 이들 모두에게 건필의 응원을 보낸다.
첫댓글 꼭 요긴한 자료이네요.
모두 필독하시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올렸습니다. 금시아님! 전국적으로 보나 봐요. 이렇게 조회수가 많을 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