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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스따(Siesta)
남으로 내려갈 수록 무더위가 더 극성을 부리는 이베리아 반도.
그럼에도 내 2번의 까미노 데 산띠아고 걷기 기간에는 모두 한여름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2번째 기간에는 북에서 거의 수직으로 남하하는 2개의 장거리 루트(뽀르뚜 길과 1.000km
가 넘으며 까미노 데 산띠아고에서 가장 긴 쁠라따 길/Via De La Plata)를 연이어 걷는 것으로.
순례자(peregrinos)의 여정에는 계절이 고려의 대상이 아님을 의미한다.
시기(계절)의 호 불호 또는 난이도에 휘둘려서는 아니된다는 뜻이다.
굳이 까닭을 대라면 의도적은 아니라 해도 비능률적이라는 단점보다 노영(tent)의 편의성이라는
장점이 잠재적 역할을 했을 것이다.
스페인의 시에스따(siesta)를 활용하면 능률은 끌어올릴 수 있으니까.
낮잠 자는 스페인의 전통적인 습관을 말하는 스페인어 '시에스따'는 라틴어 '오라 섹스타'(hora
sexta/여섯 번째 시간)에서 유래했단다.
동틀 무렵을 기준으로 6시간이 지나 잠시 쉰다는 의미를 내포한 라틴어.
스페인 문화의 영향을 받은 무수한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도 이(siesta)를 시행하고 있다.
시에스따가 없는 뽀르뚜갈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인지 브라질에는 없지만.
시에스타는 고온지대의 생활문화다.
스페인 외에도 비슷한 날씨의 나라들(필리핀, 중국, 베트남, 인도, 이탈리아, 그리스, 크로아티아,
몰타, 중동지역 등)에서도 나타나는데 이베리아 반도를 양분하고 있는 뽀르뚜갈에는 왜 없는지.
국가적 습관의 유무와 관계 없이 나는 뽀르뚜갈의 까미노 뽀르뚜게스에서 이 시에스따를 십분
활용할 것이다.
무더운 날씨에는 많은 양의 음식을 먹게 되고 식후에는 이 두 가지(더위와 다량의 음식)가 조합
되어 식곤증(food coma)을 유발한다.
2000여년 전, 자신의 최후가 임박했음을 알고 12제자와 마지막 만찬을 가진 후 기도하러 게쎄
마니(Getsemani))로 간 예수는 제자들(Pedro와 Zebedeo의 두 아들)에게 특별한 당부를 한다.
"지금 내 미음이 괴로와 죽을 지경이니 너희는 여기 남아서 나와 같이 깨어 있어라"
그러나 기도를 마치고 돌아와서 자고 있는 제자들을 본 예수는 한탄하며 그들에게 말한다.
"너희는 나와 함께 단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단 말이냐? . . . .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말을 듣지 않는구나"
이러기를 세번이나 되풀이 할 정도로 제자들은 너무 지쳐서 눈을 뜨고 있을 수 없었던 것.
(신약성서 마태복음 26:36 ~ )
온종일 곳곳을 돌아다녔기 때문에 피로와 공복이 함께 왔는데 포도주를 곁들여 식사를 했으니
당연한 결과다.
식사의 성격이나 내용으로 보아 자기의 최후가 각각으로 다가오고 있음을 예감하고 있는 예수
와 달리 그의 제자들은 이 최악의 비극을 눈치채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절박한 위기 상황이라 해도 자연스런 생리현상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이거늘 하물며.
더운 지방 사람들의 몸에는 이 것(siesta)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뜻하며 이 시에스따를 가졌더
라면 이같은 안타까운 실망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 아닌가.
재회 난망의 이별이기 때문에?
새벽같이 떠날 채비를 이미 끝낸 상태라 수선스럽지 않은 이른 아침의 나.
새벽 6시에 출발할 수 있도록 빵과 커피, 주스 등을 챙겨놓은 로저.
식사 후, 우리는 로저의 집 인근을 지나는 까미노 뽀르뚜게스의 로터리(그의 집 베란다에서 오
가는 뻬레그리노스가 내려다 보였던)까지 갔다.
2가지 플레차(flecha/화살표 : amarillo/yellow와 azul/blue)가 함께 있는 위치다.
A29고속도로(아래층)와 입체 교차하는 길 로터리 중앙에 자리한 아치(arch) 앞이다.
뽀르뚜로 진입하거나 뽀르뚜를 떠나는 순 역방향 뻬레그리노스가 모두 교차 통과하는 아치.
그는 우리의 별리 의례(別離儀禮)로 아 아치를 교차 통과하려 했는가.
어제 말한 그의 예정과 달리 여기에서 그렇게 헤어졌다.
회자정리(會者定離)라 하며 이별이 없으면 재회도 없거늘 헤어짐이 어찌 없을 수 있는가.
그럼에도, 겨우 2번째지만 그(로저)보다 많이 늙은 내게는 재회 난망의 마지막 이별이라는 느낌
때문인지 숙연했으며 몹시 무거운 분위기였다.
허전하고 야릇한 아침 기분을 환기하기 위해서라도 걸음을 재촉하려 했는데 한 염려가 기우(杞
憂)로 확인되면서 일신되었다 할까.
염려란 리스보아로 가서 시계방향(순방향)으로 걸어야 하는 경우를 말함인데 2색(노랑, 파랑)의
화살표가 대등하게 있으며 곳에 따라서는 역전 현상을 보이기도 하니 뭘 염려하겠는가.
하루를 온전히 쉰 다음 날 아침이라 비상도 할 수 있을 듯 싱싱하게 걷는 뽀르뚜게스 내륙길은
왼쪽에 눈을 주면 로저의 집이 확인되는 지점을 끝으로 남행 쁘라제리스 길(R. Prazeres)이다.
소교구마을 까넬라스(Canelas)의 주택지역이 끝나는 야산길을 잠시 올랐다가 내려가며 이름이
바뀐 길(R. Mirante)에서 좌(東南)로 틀었다가 곧 남행을 계속하는 길인데 이름이 없다.
리스보아에서 출발하는 순방향 뻬레그리노스라면 이 고개(alto)에 올라 뽀르뚜 시가지를 바라
보는 순간이 감격스러울 수 있겠다.
프랑스길과 노르떼길, 쁘리미띠보길 등을 걸을 때 몬떼 도 고소의 동산(alto)에서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를 바라볼 때의 감격처럼.
스페인의 20%도 되지 못하는 땅이기 때문인지, 스페인에서 이 정도의 야산이라면 목축용으로
개간되었을 성 싶은데 주택지로 난개발되면서 좁은 골목길들로 어지럽다.
촉감이 자극적인 돌포장과 평온한 아스팔트 길(R. do Alto da Serra)이 번갈으며 공원(Serra de
Canelas/Negrelos)을 지난다.
"여우에서 토끼까지 .... 자연이 있다 ...."(Da raposa à lebre... A natureza está lá... /다 라뽀사 아
레브리... 아 나뚜레자 이스따 라...)는 어느분의 표현(뽀르뚜갈語)이 적절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공원이다.
뱀이 나올 것 같아서 긴장이 되기도 하는 천연의 숲.
벨라 비스따 길(R. Bela Vista)을 따라 남하하는 역방향 까미노 뽀르뚜게스.
이 길은 고대 로마시대의 길이라는데 퇴화되어 현재는 염소 트랙이 되었단다.
남아있는 흔적은 뽀르뚜갈의 돌포장과 다른 당대의 넓적한 돌포장이라 할까.
잔존 로마시대의 길 중에서는 드문 케이스(case)다.
유치원(Jardim de Infancia/Quinta Da Pena)과 공원묘지(Cemitério de Perosinho), 교회(Igreja
de Perosinho)를 지나는 동안에 길 이름이 거듭 바뀐다.(R. Alzira Pacheco, R. Padre Joaquim)
까미노에서는 걷는 것이 기도
까미노를 걷는 중에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마주하는 공공건물은 교회(가톨릭)다.
즉, 까미노는 교회들을 이어주는 길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양자는 불가분의 관계라 하겠는데
단 하루를 쉬었는데도 아침에 마주친 첫 교회(Igreja de Perosinho)가 신령스럽게 다가왔다.
기도하러 교회 안에 들어가고 싶도록.
까미노에서 나의 기도의 개념은 걸으면서 하고, 기도하면서 걷는 일과 자체라 할 수 있는데도.
"勞動은 祈禱다"
강원도 태백시와 삼척시(당시에는 삼척군)로 뻗어있는 백두대간 지근의 예수원(Jesus Abbey)의
벽에 붙어 있던 슬로건(slogan)이다.
"서방 수도 생활의 아버지"로 불리는 성 베네딕또(Sanctus Benedictus de Nursia/480 - 547)의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라틴語)는 말은 기도와 노동이 동의어에 다름 아님을 뜻한다.
옛 수도사들의 표어였지만 새삼스럽게 다가왔던 슬로건.
예수원은 성공회(Anglican Church)신부 토레이 3세(Reuben Archer Torrey III/1918~2002)가 19
60년대에 삼척군 하장면 하사미마을(三陟郡下長面下士美/훗날 太白市三水洞에 편입, 삼척군은
市로 승격)에 세운 수도원인데 초창기에 관계자들의 피땀어린 노동으로 일궈낸 공동체다.
특히 자급자족을 위해 매봉산 삼수령 산비탈(예수원목장과농장)에 쏟은 땀은 가히 거룩한 노동
이며 그 일이 곧 기도였다.
한국명 대천덕(戴天德)은 미국의 유명 부흥 목사였던 토레이(R.A.Torrey/1856~1928)의 손자다.
삼대(三代)를 이어야 참 목사라는데(그만큼 힘겹다는 뜻) 그의 부친(R.A.Torrey Jr./1887~1970)도
중국에 파송된 선교사였다.
교통사고로 한 팔을 잃었기 때문인지 만년에는 한국에서 6.25동란으로 인한 '절단 환자의 재활
프로젝트'(The Korean Amputee Rehabilitation Project)를 설립, 운영했다.
토레이 신부는 특히 기도를 강조한다.
'기도하는 집' 임을 표방하는 예수원의 모든 일과는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끝난다.
'꼬모 오라르'/Cómo Orar/How to Pray/어떻게기도할까)의 저자인 조부(R.A.Torrey)의 영향인가
심오한 신학자가 아니고 당대의 세계적 부흥사 답게 토레이 목사의 저서는 선동적이다.
그의 책 'The Holy Spirit'('聖靈論'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어 번역본이 1956년에 서울에서 출간)의
부제도 "Who He is and What He does"(그는 어떤 분이고 어떤 일을 하는가)
"사도 바울 이후 누구의 글보다 더 많은 영혼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했다"는 논평이 나왔을 만큼.
예수원이 당면한 최선의 일이 노동이었을 때는 그것이 바로 기도였다.
철학자의 노동은 사색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사색하는 것이 기도다.
예술가의 노동은 작품을 만드는 것이므로 그 작업이 바로 기도다.
선생의 기도는 가르침이며 학생의 그것은 배움이다
농민의 기도는 알찬 수확이며 상인에게는 정직한 거래가 기도다.
그러므로 사람의 바른 기도는 태어날 때 각기 받은 탈렌트(talents/talentos)의 극대화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 분이 가르쳐주신 기도,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다.
형이상학적인 천상의 일이 아니고 현재적 성취를 의미하는 것
따라서 뻬레그리노스(순례자)의 기도가 오로지 걷는 것임은 자명하다.
온갖 것이 함축되어 있는 걸음 걸음이.
토레이 목사는 온갖 경우의 기도를 부흥사 답게 성경에서 찾았는데, 기도의 때 역시 그랬다.
언제 기도할 것인가.
"늘(항상, 끊임 없이, 쉬지 말고) 기도하라"(Orad sin cesar: 스페인語/Pray without ceasing/신약
I데살로니카5:17)
뻬레그리노스(순례자/pilgrim)가 쉬지 않고, 줄곧 걷는 이유다.
거창한 돌담과 사각 기둥형 조형물의 의미
2013년에 세르제두(Serzedo)와 합병된 소교구마을 뻬로지뇨(Perosinho)의 교회.
금요일의 아침에 교회의 출입문이 열려 있을 리 없는데도 다가가서 문을 밀고 당겨본 늙은이.
열린 문은 교회 아래, 빠드리 조아킹 길(R. Padre Joaquim) 끝 사거리의 까페(Tavares) 뿐이었다.
겨우 4km쯤에 1시간 남짓 걸었을 뿐이며 아직 어떤 조우(순례자, 주민)도 갖지 못한 아침이지만
모닝 커피 한잔 마시고 가라는 것인가.
이른 아침의 텅 빈 홀 스탠드에 홀로 앉아서 마신 기억이 없기 때문에 이 아침에 마신 이 커피는
아마도 내 까미노 생활에서 최초가 될 것이다.
까미노는 남행 에두아르두 히베이루 길(R. Eduardo Ribeiro)을 잠시 따르다 분기하는 뻬레이라
아지베두 길(R. Pereira Azevedo)로 옮기는데 분기 지점 중앙에 표지판이 서있다.
도처에 서서 고마운 안내를 하고 있는 여느 표지판들과 달리 모닝 커피로 여유로워진 늙은이의
심사를 뒤틀어 놓으려는가.
뻬레그리노스에게 '뻬로지뇨 마을'임을 알리려고 까미노 마크(concha)와 함께 'PEROSINHO' 라
쓰인 표지판인 듯 한데 단면이기 때문이다.
파띠마(Fatima)가 있는 까미노 뽀르뚜게스는 다른 루트들과 달리 역방향 코스도 순방향과 대등
하게 인식하며 특히 뽀르뚜갈인들 중에는 순방향 이상의 비중을 두고 있음은 이미 언급했다.
중부지방 산따렝(Santarém) 현에 속한 지자체 오렝(Ourém)의 소교구마을(freguesia)인 파티마.
이 마을은 성모(Santa Maria)가 출현하였다는 1917년 이후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 못지 않은
성지가 되었으며, 그래서 노랑(순방향)과 파랑(역방향) 안내표지가 대등하다.
그럼에도, 이 표지판은 순방향 뻬레그리노스를 위할 뿐이니 눈에 거슬리는 것이 당연하잖은가.
역 방향 순례자들은 거꾸로(OHNISOREP) 읽어야 하니까
이 일대는 뽀르뚜갈의 북부지방을 대표하며, 수도(Lisboa) 다음(제2)의 대도시인 뽀르뚜의 외곽
지대인데도 그 명성에 비해 매우 낙후된 지역이라는 느낌이었다.
로마 제정때 길을 만들 정도로 주목받았던 지역이 왜 역사의 조명을 받지 못하게 되었을까.
이 지역에서 해발200m 이상인 곳은 까넬라스 마을의 미란떼 고개가 유일하며 평지에 다름아닌
지형인데도 취락이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관심거리도 없다.
건조한 길이라는 뜻이다.
그리주(Grijó e Sermonde/freguesia)의 알베르게(Albergue de peregrino são Salvador de Grijó)
까지 5km 정도를 가는 동안에 뻬로지뇨 교회 이후의 까미노 주변에 교회가 없다.
교회(Igreja/church) 보다 규모가 작은 예배당(Capela/chapel)이 3개(Santa Marinha, Senhor do
Calvário, Santo António) 보였을 뿐.
모일 주민이 부족하기 때문이며 이는 집단 주택가가 없음을 의미한다.
세상 만사에 장단(長短)과 음양(陰陽)이 있다.
시선을 홀리는 사물이나 생각을 앗아가는 역사적 유적, 유물이 없는 무미한 길이라면 애오라지
명상하며 걷고 걸으며 명상하는, 순례자(Peregrinos)에게는 되레 다행한 길일 것이다.
걸림돌이 없으므로 본분에 충실할 수 있으니까.
구아르다 길(R. da Guarda)에 편입하여 남하하는 까미노는 산뚜 안또니우 예배당앞 사거리에서
동진하는 알라메다 두 모스떼이루(Alameda do Mosteiro/수도원길)를 따른다.
유칼립투스들을 비롯하여 울울한 숲을 보호하기 위해 있는 듯 위압감을 주는 높고 긴 돌담장을
역(逆)'ㄴ'자 형태로 돌아가는 길이다.
워낙 거창한 돌담이라 들여다 볼 수 없는 안쪽이 수도원 경내라 하나 구글맵(Google map)에서
확인된 현장은 개간 중인 광대한 숲일 뿐인데 거대한 담장으로 보호해야만 하는지?
돌아가는 4거리의 중앙에 2개의 직사각형 돌기둥이 서있다.
북한산 자락, 내 동네에 자리한 국립4.19민주묘지의 만장(輓章)을 연상하게 하는 조형물이다.
궁금했으나 풀어주기는 커녕 내 물음을 들어줄 아무도 없기 때문에 지나쳐야 했는데 훗날 어렵
사리 알아낸 것은 줄리우 디니스의 기념비(Monumento a Júlio Dinis/1839~1871)라는 것
뽀르뚜 산(産)이며 꼬엘료( Joaquim Guilherme Gomes Coelho)가 본명인 작가다.
시인, 소설가, 극작가에 더해 의사였지만 자기 병은 치료하지 못한 듯.
결핵으로 31세에 요절했다니까.
그래도, 1868년에 출판된 소설 '모르가디냐 두스 까나비아이스'(Morgadinha dos Canaviais)를
비롯해 여러 작품의 저자인 그로 인하여 이 작은 마을은 회자되는 유명 마을이 되었단다.
1949년에 영화로 거듭난 이 소설은 아름답고 마음씨 고운 여인을 주인공으로 한 전원소설이며
결핵 퇴치를 위하여 환경이 좋은 곳, 그리주에 기거하는 동안에 쓴 작품이라는 이유로.
모순 중 모순
육중한 돌담을 따라서 동진하는 수도원 길(Alameda do Mosteiro)의 끝에는 그리주의 수도원
(Mosteiro de Grijó 또는 Mosteiro de São Salvador de Grijó)이 깊숙이, 넓게 자리하고 있다.
효시는 작은교회(little church)의 뜻인 '에끌레지올라(Ecclesiola/라틴어)수도원'이라는 이름으로
10c부터 있었으며 현(現) 수도원은 1574년에 착공, 1626년에 첫 미사를 드렸단다(奉獻)
1.600여개 기둥의 예술성에 대해 언급한다면 무지의 폭로에 다름아니겠지만 규모가 대단하며
시선을 압도하는 사각형 회랑(回廊)이 특히 이색적이다.
자료에 의하면 마을 이름 '그리주'(Grijo)의 시원은 수도원 '에끌레지올라'(Ecclesiola)다.
10c에 수도원 'Ecclesiola'가 11c에는 'São Salvador de Ecclesiona'로 불리었고, Egrejinha(라틴
語로 Igriji), Egrijó를 거쳐 마침내 Grijó(그리주)로 정착되었다는 것.
라틴어(Latin) '작은교회'(Ecclesiola)가 변형을 거듭하여 뽀르뚜게스(뽀르뚜갈語) 'Grijó'로.
이름이 말해주듯 19c 초(1801년)의 거주 인구가 1.523명에 불과했다.
이 수도원이 이곳에 들어선 16~17c초에는 아마도 기백명에 불과했을 것이기 때문에 1600개의
회랑이 언뜻 이해되지 않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길(R. Cardoso Pinto)을 두고 마주하고 있는 공원묘지(Cemitério de Grijó)에 답이 있다.
2013년에 행정구역 개편으로 세르몬지(Sermonde)와 통합했는데도 주민이 12.000명 미만인 소
교구 마을이지만 사후의 집(幽宅)은 거대하고 화려하다.
소규모의 교구마을(freguesia)에 1.600여 기둥의 회랑을 가진 수도원과 호사스럽게 단장한 대형
공동묘지가 극동의 늙은이에게는 외화내빈과 허장성세로 보였으니까.
앞에서 언급한 대로, 이 수도원의 효시는 922년이며 1112년에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한 밀레니엄(millennium) 이상의 역사에 비하여 번성하지 못한 마을 아닌가.
그렇기는 해도, 마을의 규모에 비해 대단위인 이 묘지는 잠시동안에도 많은 생각을 갖게 했다.
한 이베리아 반도 안에서 서로 접하고 있는 두 나라 간의 문화적 동질성과 이질감을.
뽀르뚜갈과 스페인의 크기는 1(92090km2) : 5.5(505.990km2)지만 인구는 1(10.418.000명) : 4.5
(46.398.000명)의 차가 있다.
인구 밀도로 보아도 1km2에 113명 : 92명으로 뽀르뚜갈이 비좁은 것은 분명하다.
가령, 뽀르뚜갈에서 마을 간의 간격이 100m 미만으로 공간개념이 희박한 경우라 해도 위 양자
의 비교에 따르면 스페인에서는 550m나 되기 때문에 확연히 구분될 수 밖에 없다.
까미노 밖의 체험이 없기 때문에 일반적 현상은 단언적일 수 없지만 뽀르뚜갈의 까미노에서 폐
공가(廢空家) 1채를 보았다면 스페인의 그 길에서는 5채 이상인 것이 정상이다.
면적은 뽀르뚜갈과 비슷하나 인구는 5배나 되는 한국과는 아예 비교할 여지가 없지만 스페인에
비해서 많이 비좁다는 느낌이 당연한 뽀르뚜갈이다.
내 관심은 대동한 듯 하나 사뭇 다른 두 나라의 묘지문화다.
묘지가 주거지에서 멀리 쫓겨날 수 밖에 없는 한국과 달리 공동묘지가 도심(주거지)의 노른자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양국이 공통적이다.
그러나, 스페인이 소규모마을(aldea) 단위까지 공동묘지의 조성이 마을 형성의 기본조건이 되는
듯 하다면 소교구마을(freguesia) 단위라 묘역이 대규모인 듯 한 뽀르뚜갈이다.
전자가 대형 교회는 물론 규모가 작은 교회(iglesia, igreja/church)까지도 경내 묘역이 필수처럼
되어 있다면 후자에서는 대소 교회 불문, 경내 묘역을 아직 보지 못했다.
스페인의 5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 국토 면적이 협소한 뽀르뚜갈이기 때문일까.
인구 비례(4.5 : 1) 보다 더 좁으니까.
왕정시대의 붕괴와 일제 식민기, 광복과 민족 동란의 소용돌이, 군사 쿠데타를 거쳐 자유분방한
민주정체로 탈바꿈했으며 농경사회가 산업사회로 재편된 대한민국(한반도의 남반부)
이에 따라, 모든 전통 문화에 쿠테타적 변혁 태풍이 불었는데도 요지부동한 것이 있다.
구각을 탈피하기는 커녕 되레 구태를 고수하고 있는 그것은 묘지문화다.
전국의 유수한 산들이 사자들의 유택을 위해서 희생되었으며 이 희생은 완료형이 아니고 끝이
보이지 않는 진행형이니까.
모순 중 모순이다.
이 세상을 완전히 떠나는 사람의 마지막 순간을 사망에서 별세, 서거, 타계, 선종, 소천 등 갖은
예우의 단어들로 표현하며 애도하면서도 왕래가 어려운, 인적 없는 곳으로 추방(?)한다.
묘지 방문의 빈도도 해를 거듭할 수록 줄어들고 대를 잇는 동안에 아예 잊혀지고 만다.
대형 묘원(墓園)의 등장으로 전국 산야의 묘지화는 막고 있으나 다른 불편이 심각한 수준이다.
선영 방문의 절기 마다 전국의 각종 도로는 몸살을 앓고, 인적 물적 손실이 이만저만 아니다.
미사(misa/Mass) 전후, 먼저 간(사망) 가족의 집(교회경내의 묘소)을 꽃단장하고 지참한 음식류
를 먹고 있는 모습은 정답고 평화롭다는 표현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투명인간인 듯, 삼자에게는 보이지 않을 뿐 사랑스런 가족 간에 담소하고 있는 듯이 보이니까.
저간에 일어난, 서로에게 관련된 일들을 화제로 하여 이야기를 나누다가 헤어질 때도 아무때나
다시 만나서 못다 한 이야기를 계속할 수 있으므로 아쉬울 것 없다는 표정이다.
집에서 산보 삼아 잠시 걸으면 닿는 공동묘지도 마찬가지 신(scene)이 연출되는 장소다.
한국은 어떠한가.
각종 특혜를 제시하며 묘역 조성을 시도하는 당국에 인근 마을들의 응답은 결사적 거부다.
한사코 반대하는 이유는 어이없게도 집값의 하락이란다.
우후죽순처럼 신생하나 호구도 어려운 영세 교회들에게는 별세계의 일이겠지만 대형 교회들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재에 귀재다.
부자(富者) 교회가 된 것이 그 증거다.
황금 수입원(빌딩 임대사업)을 기피 정서가 강한 무덤으로 대체하려 하겠는가.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