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몸에 새기다. (어우동)
성종 때 종실의 처로서 조선왕조 최대의 성 스캔들을 일으킨 어우동의 이야기이다.
어우동은 종실 태강수(泰江守) 이동(李仝)의 아내가 되었는데 행실이 방탕하여 조정의 여러 관리및 유생들과
관계하였다. 어우동의 빗나간 애정행각은 자신의 몸에 상대 남성의 이름을 새기는 데까지 이어졌다.
처음 종실인 방산수(方山守) 이란(李瀾)과 정의가 두터워지자 어우동은 이란에게 자신의 팔뚝에
이란의 이름을 새겨 물들여 줄 것을 청하였다.
이어서 전의감(典醫監) 생도(生徒 )박강창(朴强昌)을 매우 사랑하여 자신의 팔뚝에 박강창의 이름을 새기고,
또 서리(署吏) 감의향(甘義享)을 사랑하여 자신의 등에다 감의향의 이름을 새겼다.
조정에서 이를 알고 어우동과 관계한 자를 문초한 것이 수십 명에 이르렀다.
결국 어우동은 종실의 족보인 선원록(璿源錄)에서도 이름을 삭제당하고 풍속을 어지럽혔다는 이유로
사건 발생 3개월만에 교형에 처해졌다.
성종실록 (국가기록원 부산기록관). /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음
<성종실록> 권122, 성종 11년(1480) 10월 18일
번역
어을우동(於乙于同)을 교형에 처하였다. 어을우동은 바로 승문원지사 박윤찬의 딸로 당초 태강수 이동에게
시집갔는데 행실이 매우 난잡하였다. 이동이 일찍이 은장이(銀匠)를 집에 불러 은기(銀器)를 만드는데
어을우동이 은장이를 보고 좋아하여, 거짓으로 계집종처럼 하고서는 나가서 서로 이야기하며,
사통하려는 뜻을 품었다.
이동이 이를 눈치 채고 곧장 쫓아내자, 어을우동은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서 홀로 앉아 슬퍼하며 탄식하였다
한 계집종이 위로하기를, "사람이 얼마나 살기에 상심하고 탄식하기를 이리 하십니까?
오종년(吳從年)이란 이는 일찍이 사헌부의 도리(都吏)가 되었고 용모도 아름답기가 태강수보다 월등히
뛰어납니다.
족계(族系)도 천하지 않으니, 배필을 삼을 만 합니다. 주인께서 만약 생각이 있으시면,
마땅히 주인을 위해서 불러 오겠습니다." 하니, 어을우동이 머리를 끄떡였다.
어느 날 계집종이 오종년을 맞이하여 오자, 어을우동이 맞아들여 간통을 하였다.
또 일찍이 미복(微服)을 하고 방산수 이난의 집 앞을 지나다가, 이난이 맞아들여 간통을 하였는데,
정호(情好)가 매우 두터워서 이난에게 자기의 팔뚝에 이름을 새겨 주라고 청하여 먹물로 이름을 새겼다.
또 단옷날에 곱게 단장을 하고 나가 놀다가 도성 서쪽에서 그네 뛰는 놀이를 구경하였다.
수산수 이기가 보고 좋아하여 그 계집종에게 묻기를 "뉘집의 여자냐?" 하였더니, 계집종이 대답하기를,
"내금위의 첩입니다.." 하여 마침내 남양의 경저(京邸)로 맞아들여 정을 통하였다.
전의감 생도 박강창이 종을 파는 일로 인해 어을우동의 집에 이르러서 값을 직접 의논하기를 청하니,
어을우동이 나와서 박강창을 보고는 꼬리를 쳐서 맞아들여 간통을 하였는데,
어을우동이 가장 사랑하여 또 팔뚝에다 이름을 새겼다.
또 이근지"란 자가 있었는데, 어을우동이 음행을 좋아한다는 소문을 듣고 간통하려고 하였다.
직접 그의 문에 가서 방산수의 심부름을 온 사람이라고 사칭하니,
어을우동이 나와서 이근지를 보고는 곧장 붙잡아 간통을 하였다.
내금위 구전이 어을우동과 담장을 사이에 두고 살았는데, 하루는 어을우동이
그의 집 정원에 있는 것을 보고, 마침내 담을 뛰어넘어 서로 붙들고 익실(翼室)로 들어가서 간통을 하였다...
사람들이 자못 어을우동의 어미 정씨도 음행이 있을 것이라 많이 의심하였는데, 그 어미가 일찍이 말하기를
"사람이 누군들 정욕이 없겠는가? 내 딸이 남자에게 혹하는 것이 다만 너무 심할 뿐이다." 하였다.
* 어우동의 죄목은 "강상죄"였다
유곽쟁웅.遊廓爭雄, (간송미술문화재단) (국보 제135호 혜원전신첩에 수록된 30편의 그림 중 하나)
야금모행. 夜禁 冒行. (간송미술문화제단) (국보 제135호 혜원전신첩에 수록된 30편의 그림 중 하나)
춘색만원(春色滿園). 신윤복 (국보 제135호 혜원전신첩에 수록된 30점의 그림 중 하나)
풍속도 (국립중앙박물관)
이부탐춘. 신윤복 (국보 135호 혜원전신첩에 수록된 30점의 그림 중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