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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군인의 이야기를 통해 발견한 성경
기독교복음침례회의 한 의학박사가 형제교회에서 구원을 얻었던 이야기이다. 구원파에만 구원이 있다고 주장한다고 비판하는 정동섭씨의 말대로라면 하나님께서 초대교회 이후 잠들고 계셨단 말인가. 정동섭씨의 이같은 가당찮은 비판이 얼마나 모순인지는 성경을 통해 복음을 알게 된 수많은 기독교복음침례회의 신도들의 간증이 말해주고 있다. 그 중 이 간증은 좋은 예이다.
내 고향은 영산포였다. 내 증조할아버지는 한약방을 운영하면서 돈을 많이 버셨는데, 할아버지가 가업을 이어받지 못하면서 재산이 많이 줄었다. 그러나 그나마 있던 재산도 아버지 대에 와서 아버지의 사업 자금으로 다 들어갔고, 가세는 기울어서 급기야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쯤에는 광주에 조그만 방 한 칸 얻을 정도의 돈만 남게 되었다. 게다가 집 문제로 재판을 하게 되었는데 재판에서 지는 바람에 가뜩이나 없는 살림에 집의 벽마다 딱지가 붙어 버렸다.
그때까지 나는 성격이 낙천적이었지만, 그런 일은 감수성이 예민한 중학교 신입생이 견디어 내기에는 어려운 일이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와 울고 있었는데 큰누나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재옥아, 너는 공부를 해라. 공부를 하는 것이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이다. 운다고 해도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그때부터 나는 친구들과 놀다가도 누가 뭐라고 말해 준 것도 아닌데 그 애들과 나는 다르다는 생각을 문득 문득 하게 되었다. 그래서 집에서 시험공부를 하고 있을 때, 동네 친구들이 놀자고 부르면 나도 모르게 가족들에게 나 없다고 해달라고 부탁하게 되었다. 무엇을 하고 있든 친구들이 부르면 무조건 뛰어 나갔던 그전까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성적은 계속 올랐고, 첫 시험 때 반에서 14등을 기록했던 성적은 그 후 계속 일등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중학교 3학년이 되었다. 시골에서 한 친구가 광주로 유학을 가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그 친구와 정말 친해져서 서로 간을 빼어주듯 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런데 시간만 나면 그 집에 가서 먹고 같이 자면서도, 그 친구가 우리 집에 오는 것은 무언지 모르게 불편했다. 그래서 주로 부모님이 계시지 않은 그 친구의 자취방에서 먹고 같이 지냈다. 그런데 그 친구와 친해지면 친해질수록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해졌다. 그 허전함은 말로 표현할 수 있을 만큼 구체화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뜬구름 잡는 것 같은 막연한 생각에 그때부터 나는 교회를 기웃거리게 되었다.
그것이 내가 교회에 내딛은 첫 발걸음이었다. 목사의 설교를 들었지만, 내 생각을 건드리거나, 끄집어서 설명을 해 주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주일을 거룩히 지키고 착하게 살라는 내용의 설교만 할 뿐이었다. 인생이란 이러이러한 것이라는 내용도 있었다. 그렇게 나는 나름대로 종교인이 되어서 살아가게 되었다.
나는 고등학교의 첫 담임선생님이 첫 시간에 하신 말씀을 잊을 수가 없다. 국어 선생님이셨던 그분이 칠판에 쓴 글자는 “彷徨” 이었다. 이 글자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은 반에서 아무도 없었다. 선생님은 이 글자가 방황이라고 설명을 하셨다. 선생님은 이것이 책의 제목이라고 했다. 물론 그 책을 읽어 본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나는 그때부터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해 여름, 방학 숙제를 핑계로 나는 책 읽기를 시작했다. 처음 잡았던 책은 삼중당 문고로 나온 <여자의 일생>이었다. 얼마나 재미가 있었던지 밤을 새우며, 눈물을 흘리며 그 책을 읽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책읽기에 푹 빠져들었다. 그때 내가 읽은 책들은 <상록수>, <페터 카멘친드>, <지와 사랑> 등이었는데, 그 전에 읽었던 흥미 위주의 책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나는 인생에 대해 파노라마처럼 보여주는 책을 접했던 것이다. 그리고 1년이 지나고 나니 머리가 굵어지게 되었다.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전 1:18) 하신 성경 말씀이 정확했던 것이다. 머릿속은 점점 더 복잡해져 갔고 그에 따라 나는 날로 종교인이 되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고등학교 2학년 봄이라고 기억된다- 목포에서 전화 교환원으로 일하던 둘째 누나가 나를 찾아왔다. 와서 나를 보고 대뜸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믿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사람이 한번 죽고 난 다음에 심판이 있는데 죄가 없어야 영원한 세상에 들어갈 수 있다는 알 수 없는 말을 하면서 나에게 죄가 확실히 없어졌느냐 물었다. 나는 그때까지 교회를 몇 년이나 다녔지만 그런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런 질문을 하는 누나의 눈빛은 낯선 사람의 눈빛이었고, 나는 누나가 미쳤거나 아니면 어느 이단에 빠졌다고 판단했다.
그날 처음으로 나는 교회의 수요 예배에 참석했다. 그때까지는 공부를 해야 했기 때문에 일요일에만 교회를 갔고, 그것도 주일 예배만 참석하고 돌아와서 공부를 했었다. 그러나 그날은 그럴 수 없었다. 교회에 가서 전도사님께 누나의 이야기를 했고 그것이 맞는 이야기냐고 물었다. 전도사님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누나의 말이 다 성경에 있다는 것이었다. 충격적이었다. 이 문제는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일 텐데 그때까지 나는 그런 말은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 주에 혹시나 그런 말씀을 해주실까 해서 설교를 유심히 들었는데 목사님의 설교는 변함이 없었다. 내가 가지고 있었던 문제를 다루기는 했지만,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모든 고민들을 잊어버렸다. 당시 일어났던 광주사태로 인해서 모든 리듬이 깨져버린 것이다. 학교에 가지 않고, 놀기만 하다가 광주사태는 끝났고, 나는 그때부터 곁길로 나가기 시작했다.
목사님의 딸을 꼬셔내어 수요일도 그 여학생을 보기 위해서 교회를 갔다. 그러나 둘이 만나고 있을 때는 좋았지만, 만나고 나면 머릿속은 더 복잡해졌다. 그러니 여학생을 만나면서도 다독거리지를 못하고 계속 횡설수설 하면서 철학적인 헛소리만 하게 되었다. 결국 이 여학생은 그런 나를 견뎌내지 못했다. 머릿속이 혼돈스럽고 어지러웠던 나는 벤치에 누워 멍하니 있는 때가 많아졌다. 사람들은 다 내가 여학생에게 채여서 그런다고 했지만 나는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세월은 흘렀고, 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공부를 했다. 10월이 되었을 때 누나가 와서 누나가 다니는 교회에 가보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했다. 그 교회에서는 목사라는 사람이 앞에서 설교를 하는데 강단 옆에 걸려 있던 찬송가 괘도를 짊어지더니 예수님이 내 죄를 이렇게 짊어지고 갔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참 인상 깊었다. 그때부터 수요일은 누나가 다니는 형제 교회를 갔고, 일요일은 집 앞의 장로교회를 나갔다.
그러던 어느 수요일이었다. 한 군인이 휴가를 나왔는데, 정규 설교 시간이 끝났을 때 나를 보고 성경 이야기를 하자고 했다. 서로 마주 앉았는데 성경을 여기 저기 보여주었다. 거기에 어떤 체계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단순히 성경 구절을 나열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 3: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한복음 5:24)
그 성경 구절들 가운데서는 누나가 말했던 내용들도 있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브리서 9:27)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태복음 5:27-28)
이제 나는 죄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죄를 많이 짓고 살아 온 것도 아니었다. 죄라고 해 보았자 어려서 할아버지 돈 훔친 것, 어머니 말씀 듣지 않은 것들 정도였다. 나는 모범생으로 산다고 살아왔는데도 죄인은 죄인이었던 것이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브리서 9:12)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6)
그 군인은 나에게 이 말씀들을 왜 믿지 못하느냐고 했다. 나는 그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그 사실들이 간단한 것이라고 했고, 나는 무슨 말인지 잘 몰라서 답답해하면서 앉아 있었다.
그때였다. 어느 구절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말씀 한 구절이 이해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그가 보여주는 모든 구절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것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그 사람이 그런 내 상태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설명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성경을 보여주었을 뿐이고, 나는 가지고 있던 문제들이 해결되었던 것이다. 나는 나도 모르게 휘파람을 불면서 발이 둥둥둥 뜬 기분으로 집에 돌아왔다. 그리고 성경을 듣는데 그때부터 성경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내 것이 된 것이다. 그때부터 성경 말씀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 이후로는 만나는 사람마다 내가 알게 된 사실들을 믿으라고 전도하기 시작했다.
나는 구원파에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 형제 교회에서 단 한 번 만난 군인에 의해 말씀을 깨달았다. 정동섭 교수가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는 구원파 사람들의 간증과 나의 간증이 분명하게 일치한다는 점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형제 교회도 이단으로 정죄할 것인가?
정동섭 교수가 다녔던 구원파에서도 구원받은 날짜나 구원받은 성경 구절을 강조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분명 거듭나는 시점은 존재하는 것이고 말씀으로 거듭난다는 것을 믿고 있다. 정동섭 교수는 이를 악의적으로 해석하여 빨갱이로 몰듯이 색깔을 칠하고 있다. 거듭난 사람은 같은 경험을 한 사람을 서로 알아 볼 수 있다.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자녀로서 형제자매가 되는 것이다. 형제 교회나, 구원파나, 거듭난 체험을 한 어거스틴, 루터, 웨슬레 등등 수많은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구원받은 체험을 동일하게 가지고 있다.
월간 글소리 2월호와 기독교평론신문 2월 24일 자에 실린 기사입니다.
첫댓글 r간증 잘읽어 보았습니다 참으로하나 외모로 하나 전파되는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내가 기뻐하고 기뻐하리라 는 성경어딘지 있는걸로 알고있는데요 형제교회든 구원파든 죄와 허물로 죽었던내가 영원한 속죄의사실이 확신으로 이루어 진데대해 그누가 부정하리요 만 근데 형제교회가 어딘지가 궁금하네요 아시는분은 덧글에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