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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 때문에 국민학교밖에 다닐 수 없었다. 6.25동란 중 월남한 그는 부두 노동자,미군부대 PX에서 초상화 그려주는 일 따위로 생계를 유지했다.
박수근 미술관 후원에 전시된 동상
미술관 휴계실에서 창문을 통하여 내다 본 모습, 동상이 보인다
유화 작품
굴비 (1962년 작)
미술품 경매회사인 (주)서울옥션에서 실시한 '제99회 근현대 및 고미술 경매'에서 박수근의 유화 '시장의 여인' 작품이 전화 응찰자에게 9억원에 낙찰됐다.
시장의 여인 . . . - 박수근 -
박 화가의 그림은 그전에도 '노상'이라는 작품이 경매10억 4천만원에 팔렸고, 바로 최근에도 신생경매사인 K옥션에서도 '나무와 사람들'이라는 작품이 7억 천만에 낙찰된데 이어 세차례나 최고가를 기록 갱신을 했다.
노상 . . . - 박수근 -
박 화가의 '나무와 사람들' 1965년 하드보드에 유채로 그린 작품으로 낙엽을 떨군 나목 뒤로 사람들이 두명씩 짝을 이루어 담소를 나누는 정경을 담았고 화가 특유의 화면구성과 질감을 보여줘 경매 전부터 큰 관심을 불러 모으기도 했다.
나무와 사람들 . . . - 박수근 -
해외 경매에서는 지난해 3월 뉴욕 크리스티경매에서 '앉아있는 아낙과 항아리'란 작품이 약 13억원에 판매돼 한국현대미술품 중 최고가에 팔린 바 있다.
앉아있는 아낙과 항아리 . . . - 박수근 -
박 화가 작품이 경매 최고가를 잇달아 경신하고 있는 것은 한국의 서정을 대표하는 작가인데다 환금성(換金性)이 있고 향후 작품가격이 더욱 상승할 것이라 예측 때문이다.
미군 PX에서 그림그리던 박화백(왼쪽에서 3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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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의 고향인 강원도 양구군 박수근 선생 생가 터에 200여 평 규모로 건립된 양구군립 박수근미술관
1914 2월 21일(음력 1월 28일)강원도 양구군 양구면(지금은 읍(邑)) 정림리에서 박형지와 윤복주의 삼대 독자로 태어남. 위로 누나가 셋 있었음. 아버지가 광산 사업에 손을 댔다가 큰 손해를 봄 그림 재주가 뛰어나 담임선생님과 교장선생님으로부터 각별한 귀여움을 받음. 깊은 감동을 받음. 밀레와 같은 화가가 되게 해 주옵소서"라며 늘 기도했다고 함. 양구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함. 교장선생님의 격려로 독학의 결심을 굳힘. 농가에서 일하는 여인과 들에서 나물 캐는 소녀를 그리기도 함. 독학의 시골 미술학도로서 전부터 목표로 삼았던 서울의 [조선미술전람회(鮮展)] 서양화부에이른 봄의 농가를 그린 수채화<봄이 오다>를 출품하여 입선하자 크게 용기를 얻음. 유방암으로 오랫동안 투병하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슬픔에 잠김. 이후 집안 살림은 더욱 어려워져 아버지는늘어난 빚 때문에 얼마 안되는 재산을 정리하여 금강산으로 들어가고, 형제들도 뿔뿔이 흩어지게 되자 홀로 춘천으로 가서 최악의 빈곤한 생활을 하면서 그림에 정진함. 제15회 [선전]에 <일하는 여인>이라는 수채화를 출품하여 두 번째 입선함. 춘천에서 포천등지로 자립의 길을 찾아 떠돌며 그림을 그리던 시기로, 이해의 출품지는 경기도로 되어 있음. 제16회 [선전]에 나물캐는 소녀들을 스케치한 수채화 <봄>이 세 번째로 입선함. 이 해의 출품지는 서울로 되어있음. 제17회 [선전]에서 어렵게 구입한 유채로 처음 그린 <농가의 여인>이 입선함. 이 해의 출품지도 서울로 되어 있으며, 이 무렵 상경하여 미술에 대한 견문을 넓히던 시기로 보임. 제18회 [선전]에 유채로 그린 <여일(麗日)>이 입선함. 그의 유화 독학과정을 엿보여 줌.가을에 거처를 서울에서 춘천으로 옮긴 후, 아버지가 재혼하여 동생들과 살고 있던 금성에 갔다가 춘천에서 여학교를 나온 이웃집의 17세 처녀 김복순을 사랑하게 됨. 2월 10일, 금성 감리교회에서 김복순과 결혼식을 올림. 모두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금성에서 새 가정을 꾸밈. 5월 평안남도 도청 사회과의 서기로 취직이 되어 평양으로 떠남. 동생 동근이 병으로 사망함. 9월에 평양으로 신부를 데려옴. 휴일과 퇴근 후에는 제작에 열중하며 [조선미술전람회]연속 입선화가로서 기량을 계속 다짐. 봄에 첫아들 성소(成沼)를 낳음. 제 22회 [선전]에서 역시 아내를 모델로 하여 그린 <실을 뽑는 여인>이 입선함. 첫 딸 인숙(仁淑)을 낳음.미군의 폭격이 평양에도 미치게 되자 부녀자와 노약자의 소개령이 내려 아내와 어린 남매를 함께 금성 본가로 보냄. 평양에서 혼자 남아있다가 8.15 해방을 맞이함. 금성중학교 미술교사로 부임하여 교직생활을 하게 됨. 차남 성남(成男 뒤에 城男으로 씀)이 태어남. 큰아들 성소가 뇌염으로 죽음. 3남 성인(成仁)이 태어남. 6.25 전쟁이 일어남. 그러나 연말의 중공군 참전과 유엔군의 후퇴로 또다시 위협을 느끼고 시골로 피하던 도중 인민군 추격으로 가족과 헤어져 홀로 남하를 결행함. 군산까지 내려가 부두노동으로 생활하면서 자유로워진 몸으로 그림을 다시 그리기 시작함 10월. 공산치하로 되돌아간 금성에 남아 숨어 지내던 아내가 어린 남매 인숙, 성남이를 데리고 남하에 성공함. 처자의 남하 여부를 매일 수소문하던 중 그곳으로 찾아온 아내와 극적으로 상봉함. 화방의 주선으로 싼값으로라도 그림을 팔려고 다님. 이상우의 소개로 미군 CID(범죄수사대)에 그림 그리는 일자리를 얻어 다녔으며, 또한 미 8군 PX(지금의 신세계백화점 건물)에서 훨씬 수입이 좋은 초상화를 그렸으며, 여기서 모은 35만 환으로 창신동에 조그마한 판잣집을 마련하고, 작은 마루를 제작 공간으로 삼아 창작에 열중함. 남한에서의 첫 출품한 <집>이 특선으로 선정되고 각광을 받았으며, <노상에서>가 입선하였음. 굵고 명확한 검은 선의 윤곽, 흰색, 회갈색, 황갈색 주조의 평면적 색채에 명암과 원근감이 거의 배제된 특질적인 표현을 보이기 시작함. 미술관련 신문기사들을 모아 스크랩을 시작하여 1965년 타계할 때까지 계속함. 제 3회 [국전]에서 <풍경>, <절구>가 입선함. 자신의 작품에만 전념하여 극심한 생활고를 이겨나감. 제 4회 [국전]에서 <오후>가 입선함. 제 5회 [국전]에서 <나무>가 입선함. 주로 외국인 미술애호가들에게 가장 한국적인 소재와 정감을 가진 특이한 조형수법의 화가로 평가되어 소품이 적지않게 팔리게 됨. 빈곤한 생활 속에서도 제 6회 [국전]을 위해 1백호 크기의 대작 <세 여인>을 고심해서 제작하여 출품하였으나 낙선되자 충격과 비탄에 빠지고 이로 인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지 않던 음주가 심해짐. 사랑의 눈길을 집중시키는 등주제의 일관성 및 독특한 조형성으로 성숙된 예술적 경지를 반영하고 있음 반도화랑의 창설과 운영에 중심적 역할을 했던 화상 겸 수집가인 미국여성 실리아 짐머맨(Celia Zimmerman)의 콜렉션으로 들어갔던 <노변의 행상>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유네스코 미국위원회 기획의 [동서미술전]에 출품됨. <모자(母子)>, <노상>, <풍경>을 출품함. 국전 운영 부서로부터 추천 작가 결정을 통고받고 이 해의 제 8회전에 <한일(閑日)>과 <좌녀(坐女)>를 출품함. <봄>, <휴녀(休女)>, <노인과 유동(遊童)>을 출품함. 4.19 학생의거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민주당 정권이 들어섬. 5.16 군사혁명이 일어남. 제 11회 [국전] 서양화부 심사위원으로 위촉되고, <소와 유동(遊童)>(호암미술관 소장)을 출품함. 완전한 예술의 재현 - 김흥수씨의 역작들"이라는 '신간소개' 글을 신문에 기고함. 표현적 내면성도 절정에 달했으나, 생활은 그의 작품 속의 인물들처럼 변함없이 빈곤했음. 제 12회 [국전]에 추천작가로 <악(樂)>을 출품함 백내장을 수술 비용이 없어 악화된 뒤에야 한 안과병원에서 수술을 함. 시신경이 끊어져 한 눈을 아주 못 보게 됨. 창신동에서 전농동 77번지 23통 5반으로 이사함. 미국에 있는 그의 작품 수집가들과 연락을 취하였으나 열지 못함. 지병이던 간이 갈수록 더 나빠지면서 심한 고통이 따랐으나 음주와 제작 생활을 강행함. 간경화와 응혈증이 크게 악화되어 4월초에 청량리 위생병원에 입원함. 그러나 회복이 어렵게 되자 5월 5일 퇴원. 마지막 말을 남긴 채 생애를 마침. 경기도 포천군 소홀면 동신교회 묘지에 안장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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