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오(圜悟)스님께서 풍주(灃州)의 협산(夾山) 영천선원(靈泉禪院)에 주석하시면서
설두 중현(雪竇重顯)스님의 송고(頌古)에 대하여 평창한 말씀의 핵심.
벽암록 中
제45칙 청주에서 지은 삼베적삼(靑州布衫)
[垂示]
垂示云. 要道便道, 擧世無雙. 當行卽行, 全機不讓. 如擊石火, 似閃電光, 疾焰過風, 奔流度刃.
拈起向上鉗鎚, 未免亡鋒結舌, 放一線道. 試擧看.
[수시]
말하고자 하면 바로 말을 하나니 온 세상에 둘도 없는 사람이요,
행하려면 곧 행하나니 전기(全機)를 휘두름에 남에게 사양하지 않는다.
이는 마치 전광석화와 같아 기염보다도 빠르고 바람보다 빨라
세찬 물에서도 칼을 가로지른다.
향상의 겸추(鉗鎚)를 들더라도 칼이 소용없고 혀가 묶이는 것을 면하지 못하겠지만,
한 가닥 (방편의) 길을 놓아주어 거량해보리라.
[본칙]
擧. 僧問趙州, 萬法歸一, 一歸何處. 州云, 我在靑州, 作一領布衫. 重七斤.
거론하다.(擧.)
어떤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물었다.
“일만 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느 곳으로 돌아갑니까?”
(僧問趙州, 萬法歸一, 一歸何處.)
- 이 늙은이를 내질러보았으나 산처럼 꼼짝도 않는구나.
절대로 귀신 굴속에서 살림살이를 해서는 안 된다.
“내가 청주(靑州)에 있을 때 무명 장삼 한 벌을 만들었는데,
그 무게가 일곱 근이더라.”(州云, 我在靑州, 作一領布衫. 重七斤.)
- 예상했던 대로 종횡무진 하는구나.
하늘을 뒤덮는 그물을 쳤다.
조주스님의 뜻을 보았느냐? 일찍이 납승의 급소를 움켜쥐었군.
조주스님의 귀착점을 알았느냐?
이를 볼 수 있다면 천상천하에 나만이 홀로 존귀할 것이다.
물이 흐르니 강이 만들어지고 바람이 부니 풀잎이 휩쓸린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노승(조주스님)이라도 그대의 발밑에 있으리라.
[평창]
만일 일격(一擊)에 대뜸 갈 곳을 알면
천하 큰스님들의 급소를 일시에 뚫어버리더라도 그대를 어찌할 수 없으리라.
자연히 물이 흐르면 강을 이루겠지만,
그렇지 못한다면 조주 노승이 발밑에 있을 것이다.
불법의 핵심은 번잡스러운 언어 속에 있지 않다.
이는 마치 그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만법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느 곳으로 돌아가느냐?”고 묻자,
“내가 청주에 있으면서 무명 장삼 한 벌을 만들었는데
그 무게가 일곱 근이더라”하고 말한 것과 같다.
만일 어구(語句)에서 이를 분별한다면 저울 눈금을 잘못 읽은 것이며,
그렇지만 어구에서 분별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처럼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이 공안은 보기[見]는 어려워도 알기[會]는 쉬우며, 알기는 쉬워도 보기는 어렵다.
어렵기로는 은산철벽이요, 쉽기로는 곧바로 뚜렷하여 계교한다거나 시비할 수가 없다.
이 말은 보화(普化)스님의 “내일 대비원(大悲院)에서 재(齋)가 있다”라는 말과
전혀 다를 바 없다.
하루는 어떤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물었다.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뜰 앞의 잣나무니라.”
“스님께서는 경계를 가지고 설명하지 마십시오.”
“노승은 경계를 가지고 설명한 적이 없다.”
그가 이처럼 말한 것을 살펴보면,
궁극의 꼼짝할 수 없는 자리에서 한 번 꿈쩍하여 자연스럽게 천지를 덮었다고 하겠다.
만일 몸을 비끼지 못한다면 이르는 곳마다 막히게 될 것이다.
말해보라, 불법이 어떠니 저떠니 하는 헤아림이 조주스님에게 있었는가를.
만약 그가 불법을 헤아렸다 한다면
그는 무엇 때문에 심성(心性)을 말하고 현묘(玄妙)를 말하였을까?
그가 만약 불법이니 종지니 하는 헤아림이 없다고 한다면,
그는 결코 그대의 물음을 저버리지 않은 것이다.
듣지 못하였는가? 어떤 스님이 목평(木平)스님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불법의 대의입니까?”
“겨울 오이가 이토록 크구나.”
또 어떤 스님이 고덕(古德 : 歸宗)스님에게 물었다.
“깊은 산, 가파른 벼랑처럼 전혀 사람의 자취가 끊긴 곳에도 불법이 있습니까?”
“있지!”
“어떤 것이 깊은 산속에 있는 불법입니까?”
“돌멩이가 큰 것은 크고 작은 것은 작지.”
이러한 공안을 살펴보라.
어려운 점이 어느 곳에 있는가?
설두스님은 그(조주스님)의 의도를 알았었기에 의로(義路)를 열어
그대에게 송을 한 것이다.
[송]
編辟曾挨老古錐, 七斤衫重幾人知. 如今抛擲西湖裏, 下載淸風付與誰.
치밀한 물음으로 오래된 저울[老古錐 : 조주스님]을 한 대 내질렀지만(編辟曾挨老古錐,)
- 하필이면 이 늙은이를 내질렀을까?
부딪치고 어느 곳으로 가는가?
일곱 근 장삼 무게 몇이나 알았을까?(七斤衫重幾人知.)
- 다시 해도 반푼 어치도 안 된다.
턱이 떨어져 말을 못 하는군. 또 그의 계책에 걸려들었다.
이제 서호(西湖)에 던져버렸으니(如今抛擲西湖裏,)
- 설두스님의 솜씨여야 이렇게 할 수 있다.
산승도 (장삼이) 필요치 않다.
맑은 바람을 내려 불어 누구에게 부촉할까?(下載淸風付與誰.)
- 자고이래로 아직도 (맑은 바람이) 있군.
말해보라. 설두스님이 그와 주고받은 것일까? 아니면 그의 주각(注脚)을 달았을까?
한 자식(설두)이 몸소 얻었군.
[평창]
18가지 물음[十八問]가운데 이는 편벽된 물음[編辟問]이라 한다.
설두스님이 말한 “치밀한 물음으로 조주스님을 한 번 내질렀지만”은
그 스님이 만법을 몰아붙여 일치(一致)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이 스님은 조주스님을 내지르려 하였으나 조주스님 또한 작가이다.
몸 돌릴 수 없는 곳에서도 벗어날 길이 있어 큰 입을 열어 말하였다.
“내가 청주에 있을 때 무명 장삼 한 벌을 만들었는데 그 무게가 일곱 근이더라.”
설두스님이 말한 “일곱 근 장삼 무게를 몇이나 알까?
이제 서쪽 호수에 던져버렸다”는 것은,
만법귀일(萬法歸一)이라는 일(一)자도 필요치 않으며,
일곱 근 무명 장삼 또한 필요치 않으니 일시에 서호에 던져버린다는 것이다.
설두스님은 동정(洞庭)의 취봉(翠峰)에 주석하였는데 그곳에 서호가 있다.
“맑은 바람을 내려 불어 누구에게 부촉할까?”라는 것은
조주스님이 대중 법문에서 말하기를,
“그대가 북쪽으로 온다면 (바람을) 치켜불게 해주고
남쪽으로 온다면 (바람을) 내려불어주겠지만,
설봉(雪峰)이나 운거(雲居)에서 온다면 외곬수이다”라 했다.
설두스님은 이리하여 맑은 바람을 누구에게 부촉할까라고 한 것이다.
치켜분다는 것은 그대에게 마음을 운운하고 성품을 운운하며
현묘한 갖가지 방편을 운운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만일 내려불면 결코 많은 의미와 현묘함이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한 짐의 선(禪)을 짊어지고 조주스님 처소에 이르렀으나,
한 수도 두어보지 못하게끔 하여 그것을 일시에 접어치우도록 하여,
맑기가 그지없고 준절하게 하여 조그만치의 일삼음도 없게 하였다.
이를 두고 “깨침이란 깨치지 못함과 같다”고 말하는데,
요즈음 사람들은 모두가 일 없는 것으로 알아버린다.
어느 사람이 말하였다.
“혼미함도 없고 깨침도 없으니 결코 구할 필요가 없다.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하지 않았을 때와
달마스님이 이 땅에 오지 않았을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한들 무엇하겠으며
조사 또한 서쪽에서 와서 무얼 하겠다는 것이냐?”
모두 이래 가지고서야 어찌 옳을 리가 있겠는가?
그러나 모름지기 완전히 사무치고 완전히 깨달으면 여전히 산은 산, 물은 물이다.
일체의 만법이 모두 있는 그대로 드러나야 비로소 할 일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듣지 못하였느냐? 용아(龍牙)스님의 말을.
“도를 배우려면 무엇보다 깨달으려 해야 한다.
마치 용주(龍舟)를 빼앗듯 해야 한다.
비록 옛 전각(殿閣) 같은 한가한 경지에 올랐다 하더라도
꼭 이를 얻어야만 비로소 쉬게 된다”고 하였다.
이는 마치 조주스님의 “무명 장삼 일곱 근”과 같다.
옛사람의 이와 같은 말을 살펴보면 금옥처럼 귀중한 것이다.
산승이 이처럼 말하고, 여러분이 이처럼 듣는 것도 모두가 치켜부는 것이다.
말해보라, 무엇이 내려부는 것인가를.
선상에 앉아 참구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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