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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온의 괴로움
그런가하면 육체적으로는 괴롭지 않으면서 마음만 괴로울 수도 있다. 수상행식 즉, 정신적인 괴로움이다. 감정적인 상처를 받았거나, 싫은 느낌을 계속해서 받아야 한다면 그것은 ‘수온의 괴로움’이다. 함께 있는 것조차 싫은 사람과 함께 지내야 한다면 그것은 괴로움이다. 그것은 육체가 괴로운 것이 아니라 정신이 그 중에도 수온이 괴롭다. 누군가가 나를 격멸하거나, 욕하거나, 수치심을 주었을 때 우리는 감정적으로 상처받아 괴롭다.
수온은 고수와 락수, 불고불락수가 있다고 했다. 좋은 느낌과 싫은 느낌, 그저 그런 느낌이 있는 것이다. 이 가운데 고수, 즉 싫은 느낌이 올 때 우리는 괴로움을 느낀다. 그렇다면 이 괴로운 느낌은 항상 실체적이거나 고정된 것일까? 싫은 느낌이라고 정해져 있는 감정이 있어서, 그런 감정이 오면 언제나 괴로워해야만 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미워하는 사람이 있어 그 사람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싫은 느낌을 받는다고 치자. 그 사람만 만나면 괴로운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실체적으로 ‘싫은 느낌’을 주는 사람일까? 만약 그렇다면 세상 모든 사람이 누구나 그 사람을 만나면 싫은 느낌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누군가에게는 싫은 사람일수도 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좋은 느낌을 주는 사람일 수도 있다. 그 사람에게 고정된 실체적인 ‘싫은 느낌’이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사랑했던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에 대해 크게 실망감과 배신감을 느끼고 헤어졌다면, 그 사람은 ‘좋은 느낌’에서 ‘싫은 느낌’으로 일순간 바뀌고 만다.
모든 상황도 마찬가지다. 무덥고 땀이 나는 상황은 ‘싫은 느낌’ ‘찝찝한 느낌’이겠지만, 사우나에 있거나, 운동을 통해 땀을 빼 다이어트를 하거나, 땀복을 입고 체중 감량하는 운동선수들에게 땀나는 상황은 오히려 좋은 느낌일 수도 있다.
조금 비위 상하는 비유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평소 방귀를 뀌는 사람을 더럽고, 지저분하다고 생각하며 방귀 냄새를 맡는 것을 싫은 느낌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병원에 가 보았더니, 맹장수술이나 대장암 수술 등 개복수술을 한 뒤에는 간절히 너무나도 간절히 가족 전체가 모여 앉아 방귀 나오기만을 기다리게 된다. 방귀가 나오기 시작하면 비로소 안도의 한 숨을 쉬며, 가족 모두가 기뻐하고, 축하해준다. 방귀라는 자체에 고정된 실체로써 싫은 느낌이 정해져 있다면, 방귀는 언제나 싫은 느낌이어야 하겠지만 비실체적인 것이기에 좋은 느낌일 때도 있는 것이다.
‘건강미가 넘친다’는 말을 들을 때, 어떤 사람은 속으로 ‘뚱뚱하다는 말인가’ 싶어 싫어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글래머하다는 말인가’ 싶어 좋아하기도 한다. 그 말 자체에는 좋거나 나쁜 고정된 의미가 담겨 있지 않지만, 그 말을 듣는 사람에 따라 그 말은 좋은 느낌이 되기도 하고 싫은 느낌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사관학교 생도들은 여름 방학이 되면 하계군사훈련을 한두 달 정도 나간다. 무더운 여름 날 뙤약볕 아래에서 훈련을 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분명히 ‘싫은 느낌’일 것이다. 학년별로 서로 다른 훈련을 받으며 다른 부대에서 훈련을 하는데, 신기하게도 더 힘든 훈련을 받는 학년들일수록 얼굴 표정도 더욱 밝고 성취감과 뿌듯함이 고스란히 느껴지곤 한다. 오히려 학기 중에 학교에서 수업을 받을 때보다도 더욱 살아있음과 열정을 느끼게 된다.
힘들고 고된 훈련을 끝마치고 와서 실시하는 법회는 학기 중에 실시하는 법회에 비해서 큰 차이를 느낄 정도로 집중력도 높고, 호응도도 높으며, 목소리에서도 자신감과 성취감이 넘친다. 이렇게 힘들게 훈련을 모두 마치는 날이 되면 그야말로 그 에너지는 하늘을 찌를 듯 높다. 그런 생도들 중에도 가장 힘이 넘치는 생도는 하는 훈련마다 좋은 성적을 받고, 남들 보다 뛰어난 체력과 정신력으로 앞서가는 생도일 것이다. 그런 성취감을 느끼게 될 경우는 뒤처지는 사람들에 비해 훨씬 강한 힘과 넘치는 에너지가 생겨난다. 이처럼 아무리 힘든 느낌을 받게 되는 상황일지라도, 자기 성취력이나 도전정신을 일깨우거나 할 경우에는 그것이 싫은 느낌이 아닌 좋은 느낌으로 다가오곤 하는 것이다.
스스로 그 험한 히말라야를 오르는 등반가들이나, 오지여행을 떠나는 사람들 또한 그 도전정신으로 인해 남들이라면 싫어 할 상황들 속에서 ‘행복한 느낌’을 느끼게 된다.
어떤 사람은 번지점프를 할 때 그 스릴감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반면에 대부분의 사람이라면 번지점프대 앞에 서 있을 때 죽고 싶을 만큼 공포스럽고 괴로울 것이다. 번지점프를 한다는 그 상황은 좋은 상황도 아니고 나쁜 상황도 아닌 중립이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 그것에서 좋은 느낌을 느끼기도 하고, 싫은 느낌을 느끼기도 하는 것이다.
90분 정도를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달리며 축구를 하는 것은 그리 좋은 느낌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월드컵 경기에 나간 선수의 입장이라면, 가만히 벤치에서 쉬며 구경하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무덥고 많이 뛰어야 할지라도 나가서 경기에 임하는 것을 원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는가. 무더운 여름날 뛰고 달리는 것 자체에 ‘싫은 느낌’이 정해져 있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무더운 더위 속에서 뛰고 달리는 것은 싫어 할 것이지만, 그렇지 않기에 상황 따라 그 힘든 상황도 ‘좋은 느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느끼는 느낌이나 감정 또한 고정된 실체적인 것이 아니다. 마음에 따라서 좋은 느낌이 될 수도 싫은 느낌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마음 하나만 바꾸면 싫은 느낌이 좋은 느낌으로 바뀌기도 한다.
친구들과의 바닷가 여행에서 친구들은 바다에 몸을 적시며 뛰어 놀고 있는데, 나는 화장 지워지는 것도 싫고, 여벌옷도 없고 해서 물에 안 들어가려고 하다가 친구들이 갑자기 뛰어와 번쩍 들고 바닷가로 집어 던졌다고 해 보자. 만약 마음에서 ‘나는 절대 바다에 들어가지 않을 거야’라고 정해 놓았고, 그 생각을 포기할 마음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 상황이 화가 나고, 괴로울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에 기왕에 그렇게 된 것, 한생각 돌이켜 ‘그래 이렇게 된 거, 친구들과 함께 재미있게 놀며 좋은 추억을 쌓아 보자’라고 마음을 돌리게 되었다면 그 상황은 오히려 잘 된 ‘즐거운 느낌’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한 생각 차이에 따라 괴로움과 즐거움, 좋은 느낌과 싫은 느낌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것이다. 자기 생각에 고집하고 집착하게 되면 괴로움일 것도, 그 생각에 대한 고집만 내려놓게 된다면 좋은 느낌으로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좋은 느낌을 느낄 것인지, 싫은 느낌을 느낄 것인지는 외적인 바깥 상황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 달려 있다.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가 느끼는 수많은 감정과 느낌들은 고정된 실체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느끼던 괴로움의 원인이 ‘수온의 괴로움’임이 판명 났다면, 이제 수온무아의 사유를 통해 그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 괴로움을 실체인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에 수온의 괴로움을 느끼는 것이니, 그 괴로움의 원인인 느낌, 감정이 고정된 실체가 아니며 언제든 마음을 바꿈으로써 싫은 느낌을 좋은 느낌으로 바꿀 수 있음을 깨닫는다면 그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가 있는 것이다.
이처럼 막연히 괴롭다고 느끼지만 말고, 그 ‘괴로운 나’를 오온으로 해체하여 사유해 보면 조금 더 쉽게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이와 같이 수온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올라오는 느낌과 감정을 해석하거나 분별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수념처의 수행이 필요하다. 쉽게 말하면 수념처란 ‘느낌 관찰’이다. 올라오는 느낌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기만 하여도 그 느낌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상온의 괴로움
또한 ‘상온의 괴로움’도 있다. 생각, 사유, 관념적인 괴로움이다. 수온의 괴로움이 감정적, 정서적인 괴로움이라면, 상온의 괴로움은 지성적, 관념적인 괴로움이다. 대상에 대해서 과거에 어떤 표상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그 대상이 과거의 경험을 통해 어떤 기억으로 자리잡고 있느냐에 따라 그 대상은 괴롭게도 즐겁게도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과거에 미인을 사귀다가 그녀가 바람을 피워 헤어진 경험이 있거나, 그런 경험이 두 세 번 계속되었다면 그 사람의 표상, 기억 속에는 ‘예쁜 사람은 바람을 피운다’는 생각이 자리잡게 될 것이다. 그러면 훗날 다시 예쁜 여인을 사귀게 되었더라도 마음 속에서는 불안하고, 바람 피우거나, 떠나가게 될까봐 근심 걱정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심지어 과도한 집착으로 상대방을 스토킹처럼 따라붙거나, 결혼을 하더라도 의처증에 걸리게 될 수도 있다. 스스로도 스토킹을 하거나 의처증인 자신이 싫고 괴롭지만, 과거의 표상과 기억이 관념 때문에 자신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상온의 괴로움이다.
비슷하게 어릴적에 버림 받은 기억이 있는 사람은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결혼생활을 하면서도 늘 마음 속에는 ‘버림받으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이 관념 속에 자리잡게 된다. 버림받을까봐 두렵고 괴로운 마음 때문에 사람을 사귀는 것도 어려워하고, 심지어 대인관계 기피증을 얻게 될 수도 있다. 이 또한 상온의 괴로움이다. 어릴적 상처나 트라우마로 인한 괴로움도 ‘상온의 괴로움’의 일종이다.
예를 들어 ‘나는 운동신경이 없어’, ‘나는 미술에는 소질이 없어’, ‘나는 많은 사람들 앞에만 서면 떨려’, ‘나는 축구는 못해’, ‘나는 영어를 못해’, ‘나는 능력이 없어’ 등의 생각들 또한 스스로 과거의 경험을 통해 만들어 놓은 관념일 뿐이다. 많은 사람 앞에서 발표를 하다가 망신을 당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스스로 ‘나는 사람들 앞에서는 말을 잘 못한다’는 관념에 사로잡힐 것이고, 그런 기회가 생기면 괴로울 것이다. 대중 앞에 나서는 직업은 아예 거들떠 보지도 않을지 모른다. 이게 다 상온 때문이다. 그러나 상온은 고정된 실체적인 것이 아니다. 언제든 바꿀 수 있는 것이다. 실제 불교 수련회에서 사람들 앞에만 서면 떨려서 말을 할 수 없다는 학생에게 소그룹 토의와 발표를 시키고 모두 함께 매우 크게 칭찬해 주었더니, 스스로 매우 뿌듯해 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그 발표 이후로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는 것을 서슴 없이 잘 하더니, 마지막날 회향 마음나누기를 하는데, 자신은 이번 수련대회를 통해 사람들 앞에 나서는데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이처럼 그런 상온의 생각과 관념들은 언제든 바뀔 수 있고, 변화해 가는 것이지, 고정된 것은 아닌 것이다.
필자는 어릴적 외할머님께서 침을 잘 놓기로 유명한 분이셨다. 조금만 아프거나 삐고 다치면 어김없이 외할머님께 끌려가듯 가서는 엄청 큰 침을 맞아야 했다. 그 어린 아이가 얼마나 아팠는지 그 이후로는 침을 맞거나 주사를 맞는 것에 대한 공포가 계속 상온 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심지어 초등학교 때 한 번은 손가락을 스스로 찔러 피를 내는 무슨 실험을 한 적이 있었는데, 다른 아이들은 다 잘 했지만, 나는 겨우 찔러 피를 내고 나서는 온몸에 식은 땀이 흐르고, 쓰러질 것만 같은 오한을 느낀 적도 있었다. 다른 친구들은 다 잘도 하는데 나는 왜 이렇게 두려워하는지에 대해 그 때만 해도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바로 이것이 표상작용 즉 상온의 괴로움이다.
그러면 이러한 상온의 괴로움은 고정된 실체적인 것일까? 그렇지 않다. 한번 기억의 표상 속에 담겨 있으면 그것이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기억의 연상작용을 일으켜 지속적으로 괴로움을 가져오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어느 날 침을 맞는 것에 대해 깊이 사유해 보았고, 그것이 내 생각 속에서, 표상과 기억 속에서 그렇게 만들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 이후부터는 스스로 외할머님을 찾아가 아주 큰 동침도 가만히 관찰하며 곧잘 맞게 되었다. 침이나 주사만 보면 깜짝 놀라던 기억의 표상이 뒤바뀐 것이다. 초등학교 때는 침이나 주사가 아프다는 생각이 있다보니, 주사 맞는 날은 학교도 가기 싫을 정도였지만, 그런 생각이 변하고 났더니 침 맞는 것이 아프기는커녕 요즘에는 스스로도 간단한 침을 놓기도 할 정도가 되었다.
이처럼 상온, 즉 생각과 표상은 고정된 것이 아니기에 늘 바뀐다. 실체적인 관념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고 바뀔 수 있는 것이다.
만약에 당신이 괴롭다고 했을 때, 그 괴로움의 원인을 색수상행식 중 어떤 것인지 해체해서 살펴보았고, 그 결과 상온 때문에, 관념 때문에, 생각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음을 발견했다면, 그 상온이 절대적인 것인지, 결코 바뀔 수 없는 것인지, 고정된 실체인지를 사유해 보라. 그렇지 않음을 발견할 것이다. 내 안에서 스스로 그렇다고 생각하고, 관념지은 채, 그 생각 속에 사로잡혀 점점 더 그 생각을 강화시켜온 것임이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진실은 그 어떤 고정된 생각이나 관념도 바뀔 수 있다는데 있다.
고정관념, 편견, 가치관 등이 절대로 바뀔 수 없다고 생각하거나, 자신의 생각을 유연하게 변화시킬 생각은 못한 채 한 가지 생각과 가치관,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게 된다면 점점 더 상온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어려워 질 것이다. 상온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가슴을 활짝 열고,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사고를 유연하게 열어 두고, 그 어떤 생각이나 관념도 열린 마음으로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상온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기가 한결 수월해 질 것이다.
상온의 괴로움에 쉽게 빠지거나,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나는 옳다’는 자기 생각에 대한 고집이 큰 사람이다. ‘나는 옳다’는 생각이 곧 고정관념, 선입견, 편견, 자기 고집에 사로잡힌 생각이며, 이런 사람일수록 ‘상온의 괴로움’에 많이 노출되기 쉽다.
그러나 상온에서 벗어나게 된다면, 우리가 느끼는 괴로움의 종류와 크기는 훨씬 가벼워질 것이고, 괴로움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게 될 것이다.
상온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마음을 활짝 열고 받아들이는 것과, ‘나는 옳다’는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 고정관념과 선입견, 편견과 자기고집을 내려 놓는 것, 생각이 올라올 때는 잘 관찰하는 것, 과거의 상처와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것 등이 있을 수 있다.
행온의 괴로움
‘행온의 괴로움’은 특정한 의도를 고집하게 될 때 그로인해 괴로운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적어도 서울대 정도를 가야 한다고 집착하는 사람이라면 그보다 못한 대학에 갔을 때 괴로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내 스스로 만들어 낸 행온의 괴로움일 뿐이다. 즉 내가 스스로 ‘서울대’라는 생각과 목표에 집착하고 있었기 때문에 괴로운 것일 뿐이다. 그러나 서울대가 아닌 다른 수많은 대학에 간 사람들이 다 괴로워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내 스스로 내가 만들어 놓은 ‘의도’에 고집하고 집착하기에 괴로운 것일 뿐이다. 이처럼 행온, 즉 어떤 의도에 대한 집착과 고집이 있을 때 괴롭다. 이것이 바로 행온의 괴로움이다.
반드시 진급해야 한다는 의도에 대한 집착이 강한 사람이라면, 진급에서 떨어졌을 때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크게 괴로울 것이다. 어떤 특정한 여인과 반드시 결혼해야 겠다는 의도에 대한 집착이 크면 클수록 그 여인과 결혼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괴로움도 커지기 마련이다.
이처럼 무엇이든 특정한 의도를 집착하거나, 어떤 바람에 대해 욕망하게 된다면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괴롭다. 이러한 괴로움이 바로 ‘행온의 괴로움’이다.
그러나 행온 또한 다른 온들과 마찬가지로, 고정된 실체적인 괴로움이 아니다. 단순히 의도에 대해 집착했기 때문에 괴롭다면, 그 의도를 내려놓음으로써 행온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공무원 시험에서 떨어졌다면 그것은 단지 둘 중 하나의 가능성을 의미할 뿐이다. 공무원이 되거나, 다른 직업을 찾거나 하는 두 가지 가능성 중에 ‘다른 직업을 찾는 것’으로 선명해졌음을 의미한다. 분별없이 바라보면 그렇게 단순한 사실이지만, 사람들은 공무원을 반드시 해야 한다는 의도에 집착함으로써 공무원 시험에서 떨어졌다는 그 단순한 사실에 ‘실패한 인생’이라거나, ‘난 능력이 없다’거나, ‘나는 패배자’라거나 하는 등의 온갖 해석을 가져다 붙인다. 공무원 시험에 떨어졌거나, 승진에서 탈락했다는 것은 단순한 하나의 사실을 의미할 뿐, 그것이 ‘능력이 없다’거나, ‘실패한 인생’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내가 내린 해석일 뿐, 진실이 아니다.
이처럼 한 가지 의도에 과도하게 집착하게 되면, 그것 이외의 다른 의도나 가능성은 가치를 상실하게 되고 만다. 의도 즉 행온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 이 회사에 취직해도 좋고 저 회사에 취직해도 좋다. 공무원도 좋고 군인도 좋으며 회사원도 좋고 자영업도 좋다. 모든 직업에 대해 활짝 열린 가슴으로 받아들이기에, 무한한 가능성이 그 앞에 놓인다.
그러나 한 가지 특정한 의도에만 집착하고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그것 아니면 절대 안 되는 줄 알고, 그것을 못 하면 실패한 인생으로 낙인찍기를 서슴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행온의 괴로움이며, 행온에 집착하는데서 오는 어리석음이다.
행온은 무아다. 어떤 의도일지라도 내 스스로 그 의도에 집착함으로써 괴로워질 뿐이지, 본래부터 절대적으로 이것만이 옳은 의도는 없다.
휴가를 산으로 가도 좋고 바다로 가도 좋은 사람은 어느 곳으로 가든 상관이 없다. 그로 인해 괴로울 일이 없다. 그러나 절대 나는 산은 싫고 바다만 좋다고 고집하게 되면, 산으로 가게 되었을 때 괴롭다.
만약 당신이 괴로움에 빠져 있다면, 그것이 색수상행식 중 어느 요소로 인해 괴로운 것인지를 살펴보라. 만약 그 괴로움이 당신의 특정한 의도에 대한 고집에서 온 것이라면, 그것은 바로 행온의 괴로움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행온은 곧 무아임을 사유해 볼 수 있다. 내 의도에 내 스스로 얼마나 집착하고 있었으며, 그 집착은 과연 절대 버릴 수 없는 것인가 하고 스스로에게 질문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의도가 아닌 다른 의도를 선택할 수는 없는 것일까? 이 대학이 아닌 다른 대학, 이 회사가 아닌 다른 회사, 이런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 이 길이 아닌 다른 길로 가는 것에 대해 마음을 열어 볼 수는 없는 것일까? 그렇다. 우리는 수없이 다양한 무수한 방식을 향해 마음을 열어 둘 수도 있다. 이 길이 아니면 다른 길을 찾을 수도 있고, 이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에 도전해 볼 수도 있으며, 이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 절대적으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없는데, 절대적으로 반드시 이렇게 되어야 한다고 고집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식온의 괴로움
식온의 괴로움은 분별과 인식의 괴로움이다.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면 괴로울 것이 없다. 그러나 다른 것과 비교하여 분별해서 차별심으로 이해하면 거기에는 좋고 나쁜 것이 생기고, 열등과 우월이 생겨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괴로움이 생겨난다.
스님들의 법문에 ‘분별하지 말라’,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고 하는 것은, 분별하여 인식할 때 괴로움이 생기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분별한다는 것은 곧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왜곡해서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식온은 이처럼 수온과 상온의 도움을 받아 행온이 만들어낸 세상을 왜곡하고 분별하여 자기 식대로 인식한다.
그런데 수온과 상온, 행온 자체가 무아로써 실체가 없는 것이고, 왜곡되기 쉬운 데이터이기 때문에 당연히 식온 또한 왜곡되고, 분별하여 대상을 인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눈귀코혀몸뜻으로 마주하는 색성향미촉법의 모든 대상을 식이 분별하여 인식한다. 예를 들면 눈으로 장미꽃을 볼 때 강렬한 아름다움으로 분별하여 인식한다. 물론 거기에는 상온의 도움을 받아 과거에 보았던 다양한 꽃들과 비교, 대조해 본 뒤에 이 정도면 다른 꽃들에 비해 강렬한 색감을 띈 꽃이라고 분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빠알간 장미꽃에 비해 진달래꽃은 덜 아름답다고 인식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인식은 진실일까? 어떤 사람은 진달래꽃을 장미꽃보다 덜 아름답다고 인식할 수도 있겠지만, 또 다른 사람은 너무 강렬한 색감을 가진 장미꽃보다 오히려 자연 속에서 은은하게 피어난 진달래꽃을 더욱 아름답게 인식할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떻게 인식하느냐는 이처럼 사람에 따라 다를 수가 있는 것이다. 어떤 분별심이 더 옳거나 틀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분별하여 인식하는 것만이 옳다고 집착하게 된다면, 다른 사람의 인식과 달라 의견 대립이 생겨날 수도 있다.
불교신자는 불교나 사찰에 대해 좋은 느낌과 좋은 생각을 가지기에 불교라는 종교를 ‘지혜로운 종교’로 자신의 마음 속에 조작해 만들어낸다. 그 사람의 행온은 마음 속에서 불교를 지혜로운 종교로 만들어내었고, 그렇게 내 안에서 만들어진 불교라는 지혜로운 종교를 식온은 ‘불교’라는 이름으로 인식하거나, 혹은 사찰, 불상, 대웅전, 팔만대장경 등의 형태를 부여하여 인식하게 된다. 명색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 매우 배타적인 타종교 신자라면, 불교를 ‘어리석은 종교’, ‘쓸모없는 종교’로 인식할 수도 있다. 그 두 사람의 불교에 대한 인식은 전혀 다른 것이다. 수온과 상온과 행온 모두가 다를 수밖에 없다. 불교를 좋은 느낌으로 느끼고 좋게 생각하기도 하지만, 싫은 느낌으로 느끼고 나쁘게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좋게 느끼고 생각해서 절에 자주 가는 업행을 일으킬 수도 있고, 나쁘게 느끼고 생각해서 절 근처에도 가지 않기도 할 것이다.
만약 불교를 나쁘게 인식하거나, 심지어 마귀의 종교라고 여기고, 근처에 가까이도 가기 싫어하면서, 절에 가는 것 자체만으로도 죄를 짓는다고 인식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 보자. 회사에서 야유회를 사찰로 갈 때 이 사람은 불편함을 넘어 괴로운 마음을 느낄 지도 모른다. 이것이 바로 식온의 괴로움이다.
즉 내가 어떻게 분별하여 인식하느냐에 따라 ‘있는 그대로의 중립적 대상’이 싫게 느껴지거나, 좋게 느껴지고, 그 대상이 즐거움을 주거나, 불행을 주기도 하는 것이다.
식온을 보통 ‘마음’이라고 한다고 했는데, 그야말로 어떻게 마음 쓰느냐에 따라,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동일한 상황, 동일한 대상, 동일한 사람, 동일한 행동이 괴로울 수도 있고, 즐거울 수도 있는 것이다.
직장에서 어떤 어려운 일을 시킬 때, 어떤 사람은 이것이 기회라고 생각하고 어려운 일이지만 이 일을 통해 나의 능력을 발휘하고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여길 수도 있고, 또 다른 사람은 그 일이 너무 싫고 괴로워서 몇 날 며칠이고 괴로워할 수도 있고 심지어는 차라리 퇴사를 선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미군에서는 전 세계 곳곳의 준 전시 상황인 나라에 파병을 많이 나간다. 미군 군종목사와 대화를 나누어 보았는데, 미군 장교들은 전시 상황의 나라에 파병을 가면 자칫 죽을 수도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기회로 삼고 스스로 선택해 전시인 곳에 자원해 가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그것을 통해 명예를 드높이고 진급도 할 수 있고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렇지 않고, 사랑하는 가족과 절대 헤어지기 싫거나, 전시 상황이라면 끔찍이도 싫어하는 사람일 경우라면, 파병을 간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죽을 것처럼 괴롭게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나에게 주어진 상황, 조건에 대해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분별하며,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이처럼 동일한 상황도 행복의 조건처럼 느껴질 수도 있고, 불행의 조건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만약에 내가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 단순히 나의 분별심으로 인한 것이라면, 우리는 무조건 그 상황에서 절망에 빠져 있을 것이 아니라, 나의 인식과 분별을 바꿈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으로 전환될 수 있음을 열린 마음으로 사유해 볼 수 있어야 한다. 분별심을 내려 놓으면, 혹은 그 대상에 대한 인식을 바꾸면 최악의 상황이 오히려 최선의 기회로 다가올 수도 있고, 불행의 상황이 행복의 상황으로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이 세상은 마음에 따라 지옥이 되기도 하고 극락이 되기도 한다. 분별심과 인식에 따라 동일한 조건도 다르게 느껴진다. 이러한 이치를 바르게 볼 수 있다면, 세상을 탓하기 보다는 내면으로 들어가 나의 분별심과 인식을 다룸으로써 괴로움을 행복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오온명상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가 괴롭다고 느낄 때, 그 괴로움을 가만히 오온으로 해체하여 사유해 보게 되면 오온 중 어느 요소 때문에 괴로운지가 드러날 것이다. 보통 우리는 괴로울 때, ‘아! 괴롭다’라고만 느끼지, 어느 요소가 괴로운지에 대해, 그 원인을 해체하여 살펴보려고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오온을 공부한 수행자라면 이제부터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오온명상’을 통해 괴로움을 낱낱이 분석해 보고, 그 하나 하나의 괴로움의 요소들이 실체가 아니며 공함을 사유함으로써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될 것이다.
괴로울 때, 오온 중 어떤 요소가 괴로운 것인가를 살펴보고, 그것이 무아임을 알게 된다면, 지금 내가 느끼는 괴로움도 실체가 아니며, 반드시 괴로워해야 하는 것은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괴로움이 올 때마다, 오온 중 어느 요소가 괴로운지를 살펴, 그것이 공함을 사유해 보라. 이것이 바로 ‘고를 소멸하는 오온명상’이다.
예를 들어 보자.
직장 상사가 그런 일 하나 제대로 못 하느냐고 부하직원들 보는 앞에서 나에게 화를 내고 갔다. 부하직원들 앞에서 상사에게 욕을 얻어 먹고 괴롭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렇게 괴로워하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이 괴로움을 해결해야 한다. 오온명상으로 해결해 보자. 이것은 오온 중 어떤 요소가 괴로운 것일까? 물론 이런 경우에 수온도 괴롭고, 상온도 괴롭고, 행온도 괴롭고, 식온도 괴롭다. 그런데 가장 큰 것은 아마도 행온일 것이다. 보통 행온이 원인인 경우가 가장 크고, 그 다음으로 수온, 상온이 뒤따르며, 식온은 총체적인 인식론적 괴로움으로 바탕에 깔려 있는 경우가 많다. 의지적 괴로움이 가장 크고, 감정적 괴로움과 사유적 괴로움이 그 토대를 제공하며, 총체적으로 인식론적 괴로움이 배경에 깔리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삶을 만들어내고 조작하는 것은 행온이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어떤 의지가 있을까? 남들 앞에서 그것도 부하직원 앞에서 상사에게 욕을 얻어 먹고 싶지 않은 욕구가 있다. 칭찬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와 의지가 있는 것이다. 그 의지와 욕구가 깨어지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행온의 괴로움이다. 그 행온의 괴로움으로 인해 감정적으로도 마음이 상하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직장상사가 밉고 원망스럽다. 이런 식으로 행온이 나를 ‘인정받지 못한 나’, ‘부하들 앞에서 창피한 나’, ‘일도 제대로 못하는 나’, ‘욕 얻어 먹어 괴로운 나’를 조작해 내고, 식온은 축 쳐져 있고 부끄럽고 창피한 나를 인식하게 된다. 이 때 수온과 상온은 함께 순환적으로 괴로움을 증폭시키는 작용을 한다. 이럴 때 상온은 온갖 것들을 상상해낸다. 두 번째 화살, 세 번째 화살을 계속 맞는 것이다. ‘그 상사는 나를 근본적으로 싫어하나봐’, ‘나를 미워하는게 틀림없어’, ‘그 상사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상사들이 다 나를 싫어하는게 아닐까?’, ‘이번 승진시험에서 떨어질게 분명해’, ‘부하직원들은 속으로 나를 능력없는 상사라고 욕하겠지’, ‘이러다 회사에서 짤리면 뭐해 먹고 살지’, ‘자식 학비 벌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차라리 죽는게 낫겠어’ 이런 식으로 상온은 끊임없이 괴로움을 양산해 내는 것이다.
사실 현실은 단순히 직장 상사가 나에게 일을 못 한다고 한 마디 한 것이다. 그것은 절대적인 ‘괴로운’ 상황이 아니라, 어느 회사에서든 ‘그럴 수도 있는’ 보편적인 상황이다. 그 상황을 가지고 괴로워할 것인지, 그저 가볍게 넘길 것인지는 전적으로 내가 선택하는 것일 뿐이다. 어느 회사에도 이런 일은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큰 괴로운 일이 되는 이유는 바로 오온을 ‘나’로 착각했기 때문이다.
감정적으로 상처받은 나, 능력도 없는 나, 인정도 못 받는 나 등 감정적인 수온의 괴로움, 생각이 만들어낸 상온의 괴로움, 특정 의도와 욕구를 나라고 생각하는 행온의 괴로움 등을 느끼는 존재를 ‘나’로 착각한데서 오는 것이다. 즉 오온무아를 모르고, 오온이 바로 ‘나’라고 생각하면 수상행식이 만들어내는 심리적인 모든 것이 ‘나의 괴로움’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하나 하나 살펴보면 모두 공하고 텅 비어 실체가 없는 것이다. 칭찬 받고, 인정 받고자 하는 의도를 내려 놓고, 살다보면 욕도 얻어 먹을 수 있고, 비판 받을 수도 있음을 겸허히 인정하고 수용하게 된다면, 의지와 욕구에서 오는 행온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큰 사람일수록 행온의 괴로움이 크지만, 그 욕구를 내려 놓을수록 행온의 괴로움은 가벼워지는 것이다. 욕을 얻어 먹을 때의 마음 상한 느낌 또한 그 느낌이 ‘나’라고 동일시하지 않은 채, 그 순간 있는 그대로 올라오는 느낌과 감정을 가만히 관찰하고 알아차려 보게 된다면 그 느낌으로 인한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또한 끊임없이 올라오는 생각들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면서, 그 생각에 힘을 실어 주지 않고, 그 생각을 계속해서 증폭시키지 않게 된다면, 두 번째 화살을 맞지 않을뿐더러, 그 생각은 실체를 가진 것이 아닌 그저 올라오는 것일 뿐임을 관찰하게 될 것이다. 바로 이것이 사념처 혹은 위빠사나라고 알려진 불교 명상의 핵심, 관 수행이다. 오온을 관찰하는 것이 바로 오온명상이다.
이처럼 그 상황 자체를 오온으로 분석하고 해체해서 사유해 보게 되면, 오온의 괴로움에서 점차 벗어나기 쉬워진다.
다른 비유를 하나 더 들어보자. 사랑하는 여자친구가 이제 그만 만나자고, 다른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이별을 고했다. 몇 날 며칠이고 괴로움에 아무리 전화를 걸어 봐도, 전화도 받지 않고, 집도 이사를 가 버렸다. 이 괴로움은 오온 중 어떤 요소가 괴로운 것일까? 마찬가지로 가장 크게는 행온이 괴롭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고 싶고, 사귀고 싶은 의도, 의지가 꺾이게 된 것이다. 이 순간, 우리는 그 의지를 절대 포기할 수 없을거라는 마음에 사로잡히게 된다. 절대 이 여자 아니면 안 될 것 같다. 결코 이 여자를 포기할 수 없다. 그것이 바로 행온이 무아인 줄 모르고, 행온에 사로잡히고 집착한 것을 의미한다. 이 여자와 사귀어야 한다, 내 여자가 되어야 한다는 의지에 고집하는 것이다.
그러나 행온무아의 가르침에 의한다면, 의지작용은 언제고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이 여인을 사랑하다가도 다른 여인을 사랑하게 될 수도 있다. 지금은 내가 이 여자 아니면 절대 안 될 것 같은 행온에 사로잡혀 있지만, 그것이 절대적인 마음이 아님을 사유해 보라. 그것은 내 스스로 만들어 낸 의지작용일 뿐,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이 세상의 수많은 여인 가운데, 어떤 특정한 여인이 결정코, 절대적으로 내 여자가 되어야 한다는 결정론은 없지 않은가? 그것은 내 스스로 그렇게 의지로써 만들어낸 허망한 생각일 뿐이다. 내 스스로 만들어 내어 내 스스로 거기에 빠지게 된 것일 뿐이다.
지금 가장 큰 문제는, 그 여인이 나를 버리고 바람이 났기 때문에 그 여인이 가장 큰 문제라고 여기겠지만, 사실은 그것 보다 더 큰 이유는, 내가 그 여인이 바람 나면 안 된다고 생각했고, 그 여인이 내 사랑이 되어야 한다고 고집했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사랑이란 이처럼 언제나 변할 수 있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크게 본다면, 이 세상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을 본다면 사랑하다 헤어지는 것은 보편적인 것이지, 특별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지금 내 앞에 바로 그 보편적이고 자연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사랑하는 여인과 헤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보편적이라고 보지 않고, 그럴 수도 있다고 보지 않고, 남들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지만, 결코 나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선 안 된다고 스스로 생각한 고집으로 인해 그 상황이 지금 나에게 특별히 괴로운 상황이 된 것은 아닌지 사유해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 과거에 그녀와 사랑했고 달콤했던 느낌들을 떠올리며 지금의 괴로운 느낌으로 인해 괴롭다. 또한 생각은 ‘예전에도 나를 속이고 계속 그놈과 만났던 건 아닐까’, ‘지금 둘이 동거를 하는 건 아닐까’, ‘내가 그렇게 매력이 없는 사람인가’, ‘나를 완전히 무시하는군’, ‘내가 그렇게 우습게 보이나’ 등등 끊임없이 생각을 만들어냄으로써 더욱 더 괴로움은 증폭되어져 간다.
여기에서 바로 오온관찰의 명상 수행이 필요해 지는 지점이다. 그런 괴로운 느낌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끊임없이 올라오는 생각을 관찰하고, 의도를 관찰하며, 분별심을 관찰하는 것이다. 또한 몸에서 어떤 반응이 일어나는지를 관찰하는 것이다. 색수상행식, 즉 몸과 마음을 전체적으로 판단 없이 알아차리고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그 오온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바라보면 사라진다’는 가르침이야말로 불교 명상의 가장 위대한 지혜다. 오온의 괴로움이 일어날 때, 바로 그 일어나는 지점을 분명하게 보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만으로 오온의 괴로움은 소멸될 수 있다.
[붓다수업] 중에서
첫댓글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
감사합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