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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사랑을 알게 되며
생명은 1980년 12월에 군대에서 전역한 후 1981년 봄에 한의과 대학 본과 2학년으로 복학하였다. 그동안 많은 갈등과 좌절 속에서 진로에 고민을 하던 중 대부분의 한의과 대학 졸업생이 개업을 하지만 자신은 학문에 뜻이 있어서 대학에 남아 그간 받은 스트레스와 고통을 극복하며 자신과 같은 처지에 도움이 되는 정신과학을 연구하기 위해 대학병원에 남아 한방을 동양심리학적인 방법으로 연구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본과 3학년 때는 이에 관련된 연구 자료를 모으기도 했다. 그런데 문제는 대학에 남으면 수련의를 하는 동안에 수련의 월급으로는 결혼하여 생활하기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으로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간 대학생활에서 후회되는 것은 자신이 용렬하여 연애도 한번 제대로 못한 것이었다. 군대에서 배운 깡다구로 연애를 꼭 해보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중앙도서관 열람실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머리를 틀어 올린 일명 ‘똥머리’를 한 여학생이 눈에 확 띄었다. 그 순간 귀신잡는 수색대에서 배운 용기가 분출하였다. 그 학생을 무조건 쫒아갔다. 생명이 다니고 있는 같은 의약관 건물의 치대생이었던 것이다. "이게 웬 떡인가? 내가 만약 저 여학생과 사귀어 결혼한다면? 두 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있겠다" 고 생각하니 만면의 미소가 번질 수밖에...
생명은 어떻게든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같은 한의과클래스에 친하게 지내던 여학생 정미란에게 부탁하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미란에게 “혹시 예과 1학년 때 치대학생들과 함께 배웠어?”라고 물어보았다. 그렇단다. 마치 하늘로 올라가는 길이 열리는 듯 희망이 보였다. 그럼 치대에 머리를 묶어 틀어 올린 키 큰 여학생에게 오늘이 화요일이니 목요일6시에 ‘블루’ 라는 카페로 나와 달라고 전달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다음날 전갈이 왔다. 나온단다. 그야말로 어느 날 하늘에 떠오른 쌍무지개를 우연히 발견해도 “이 보다 더 기쁘지는 않을 거야!”. 그런데 정미란은 치대에 딱 한명의 여학생이 있었단다. 그래서 자기가 알고 있던 동급생 친구는 여자인 자기가 보아도 천상 여자 같은 얌전하고 아주 좋은 친구인지라 소개하려고 했는데, ‘똥머리’를 한 친구는 새로이 다른 과에서 편입한 친구란다. 어쨌든 생명의 말을 그 녀에게 전하여 나온다는 말을 듣는 순간부터 가슴이 떨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목요일 아침이 오고 하루 종일 강의실을 바장이며 기다린 수업이 끝나고 5시50분에 카페 블루에 미리 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카페는 지하 1층 어두컴컴한 분위기의 구석 자리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은은한 클래식이 흐르고 입구를 연신 바라보고 있던 순간 정확하게 6시에 그녀는 나타났다. 생명은 얼른 일어나 손을 들어 '이쪽!' 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녀는 싱글싱글 웃으며 다가와 앞자리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이 생명입니다.”라고 씩씩하게 자신을 소개하자 “아, 네... 송성애입니다.” 이렇게 의례적인 인사교환이 있었다. “그런데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세요?”라고 의아해 묻자. “아 네... 저를 보자고 하시는 분이 어떤 분인지 정말 궁금했어요.” “그래요?”, “막상 보시니 어떠세요?”, “ 네, 좋습니다”, “다행입니다” “저를 어떻게 아셨나요?” “아 네, 며칠 전 도서관 열람실에서 제 앞자리에 앉으셨는데 인상이 너무 좋으셔서 꼭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그렇군요!” 이런 일상적이 이야기가 오가고 잠시 적막이 흘렀다.
그녀는 머뭇머뭇하더니만 커다란 핸드백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탁자위에 올려 놓았다. 그리고는 “이게 무엇인지 아세요?” 생명은 잠시 뚫어져라 보다가 “화장품 아닌가요?” 라고 말하자 “열어보세요!” 라고 말한다. 열어보니 그것은 선(SUN)이라는 담배였다. 너무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요즈음은 ‘여대생이 담배를 피운다’ 는 것은 흔한 일이고 여대생도 버젓이 길을 걸으면서도 당당히 담배를 피우고 다니지만 그 당시에도 여성이 담배를 핀다는 것은 그야말로 술집 아가씨 아니면 벼랑 끝에나 서 있을 법한 막장의 인생이 아니고서야 상상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시골에서 태어나 모범생으로 자라 고지식한 생명은 담배를 피우는 여대생과 사귄다는 것은 생각도 못해 본 일이었다. 그 당시 생명은 군대에 가기 전까지는 담배를 피운 적도 없는데 논산 훈련소에 입소하여 훈련 도중에 쉬는 시간에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곤 무료로 나누어준 ‘화랑담배’나 필울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배운 담배를 전역한 후에도 가끔 피우고 있었다. 그래서 생명은 내색하지 않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그 담배갑에서 담배를 꺼내어 천연덕스럽게 그녀에게 권하고 자신도 하나 더 뽑아 라이터에 불을 켜서 불을 붙여주고 자신도 담배에 불을 붙이고 빨아 연기를 내 품어 내었다. 그녀는 미안한 듯 “당황스럽지 않으세요?” “ 아뇨 괜찮아요!” 하지만 속으론 담뱃불을 뱃속에 집어넣은 것만큼이나 뜨끔했다. 그렇게 첫 만남은 황당함 속에서도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마무리되었다. “다음 주 월요일 시간되세요? 이 자리에서 6시에 또 봅시다” “그러죠 뭐...”
이튿날 등굣길에 멀리 앞에서 걸어가고 있는 그녀가 보인다. 그녀는 멀찌감치 뒤에서 보아도 훤칠한 키에 묶어 올린 ‘똥머리’가 그 당시엔 흔하지 않은 터라 바로 눈에 띄었다. 보아하니 같은 반 남학생과 나란히 이야기를 하며 골목길을 따라 올라간다. 생명은 멀찌감치 뒤에서 천천히 눈에 띄지 않게 쫒아간다. 그 다음 날 점심시간에 같은 건물의 휴게실에서도 또 보인다. 하지만 아직은 아는 척을 할 수가 없다. 가슴 졸이며 월요일을 기다렸다.
다시 블루카페에 정확하게 6시에 나온 송성애는 역시 미소를 지으며 나타난다. “ 많이 기다리셨어요?”, “아뇨 5분전에 왔어요.” “뭘 좀 마실까요?” “무엇을 드시겠어요?” “저... 칵테일 한잔 마시면 안 될까요?” “아뇨, 좋아요. 전... 그럼 드라이진 마실게요!” 생명은 술을 잘 못하여 아는 것이 목포 친구네 집에서 먹어본 솔 술과 비슷한 드라이진이 전부였다. 웨이터가 오자 성애는 세련되게 “핑크 레이디”를 시켰다.
성애는 참 대범한 성격이었다. 아버지는 교수이신데다 워낙 독실한 크리스찬인지라 매일 아침 5시에는 모든 식구가 예외없이 일어나 식탁에 모여 새벽기도를 마치고 식사를 해야 한단다. 딸이 다섯이고 막내로 아들 하나인데 성애는 2째 딸이란다. 흔히 부모들이 첫째 아이를 낳으면 첫 작품이라 이렇게도 해보고 싶고 저렇게도 해보고 싶어 아이를 우유부단하게 만든다. 그러다가 둘째 아이를 낳으면 아이가 울다가도 그치고 열이 나다가도 식으니 무관심하게 내 버려둔다. 그러다 보니 둘째아이는 부모의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나쁜 행동으로 문제아가 되거나 아니면 사랑을 쟁취하는 그 노력이 바탕이 되어 크게 자수 자수성가하는 ‘모 아니면 도’가 된다. 성애도 그 엄격한 집안에서 둘째 딸로 태어나 다른 자식과는 달리 삐딱선을 타게 되어 고등학교 때는 불량한 여학생들과 어울려 담배도 피고 몰래 극장도 가고 술도 마시게 되었을 것이다. 처음부터 치과대학을 다닌 것이 아니고 다른 과를 다니다가 예과 2학년 때 전과를 하였으니 적응하기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러니 일주일에도 수시로 2-3번씩 시험을 쳐가며 학업을 따라간다는 것이 너무 어려웠다. 특히 시험 준비는 선배들이 정리해 놓은 족보를 구하지 못하면 학점을 따기는 보통 노력으로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같은 반 남학생들과 항상 함께 잘 어울려야 그나마 족보라도 얻을 수가 있었다. 그러기 위해 술, 담배 그리고 당구장까지 쫒아 다니며 중성처럼 지내며 족보를 얻어야 이수학점을 따 낼 수 있었던 것이다. 한의대도 마찬가지이니 그런 상황을 생명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성애가 대범한 반면 너그럽고 아주 정이 많으며 섬세한 감정도 가지고 있었다. 특별히 클래식 기타를 잘 쳐서 단과대학연주회 때 합주도 하고 독주도 하였다. 생명은 그런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연주회에 찾아갔다. 생명은 80년대 당시 '통기타를 못 치면 간첩'이라고 할 만큼 기타연주가 일반화되었지만 아무리 노력해 봐도 악보를 보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아 그런지 잘 안되어 포기했었다. 연주회에서 성애가 혼자 치는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에 그만 뿅 가버렸다. 연주회가 끝나자 무대 뒤에 찾아가 미리 사 들고 온 꽃다발을 아무 말 없이 전해주고 얼굴이 새빨개져 도망쳐 오기도 했다. 그 후에도 방과 후 어두컴컴한 교실에 남아 기타를 연주하는 것을 찾아가 옆에서 듣고 있자면 성애는 마치 음악의 신 “뮤즈(Muse)”처럼 느껴졌다.
생명과 성애는 늘 도서관 열람실에서 만나 공부하고, 중요한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때는 아침 일찍 나 온 사람이 열람실 자리를 잡아 주고 늘 나란히 앉아 공부하다 함께 커피를 마시러 다니곤 했다. 함께 만나 ‘블루’ 카페에 앉아 열정적으로 입술도 맞추고 어두컴컴한 캠퍼스를 거닐다 숲속에서 키스도 하고, 축제 때는 함께 참석하여 춤도 추고 캠퍼스에서 손도 잡고 다녔다. 교정을 둘이 나란히 함께 걸어가면 두 따라 오던 후배들은 “형님! 그림 좋습니다!”라고 부러워했다.
중간고사가 끝난 어느 가을 날 버스를 타고 불암산을 올라갔다. 약간 비탈진 언덕에 잔디가 마른 곳에 나란히 자리하고 누워 맑은 가을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가 둘은 눈이 마주쳤다. 입을 맞추려고 하는 순간 밑에 누워있던 성애는 잔디가 말라서 미끄럽다 보니 몸이 밑으로 쏙 빠지고 다시 올라와 생명이 입을 맞추려고 하면 역시 주르르 미끄러지니 서로 바라보고 멋쩍은 웃음을 짓기도 했었다.
둘은 만나면 즐겁고 행복한 가운데서도 늘 생명의 머릿속에는 ‘성애가 담배를 못 피우게 해야 할 텐데...’ 라는 강박관념에 쌓이게 되었다. 생명의 나이도 서른이 다 된 복학생이고 성애도 20대 후반이니 충분히 결혼을 할 수 있는 나이이고 성애정도라면 생명의 완벽한 이상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소 대범하기는 하지만 막내라 용렬한 생명을 이끌어 줄 포근함과 능력도 충분히 있었기 때문이었다. 큰누나 작은 누나들은 “너 애인 있는 것 같은데 한번 데리고 와 봐라!” 하시는 것이다. 두 부모님이 연로하셔서 70세가 다 되어 가시니 이젠 막내아들만 결혼시키면 모든 일은 끝인데 막내며느리가 늘 궁금하신 것이다. 그런데 성애와 결혼하면 성애가 주의는 하겠지만 얼마나 실망들이 크실까?
여태껏 부모 형제들이 어려운 가운데도 막내 동생하나 출세를 시키기 위해 형님 누님들이 서울에 데려다 놓고 매형 형수님들의 눈치를 보아가며 돈을 아끼고 밥 먹여주고 십시일반으로 돌려가며 학비를 대주었는데, 누가 될 것이지 목이 빠져라 기다리시는데, 다른 것은 다 용서할 수 있지만 담배를 피운다는 것이 언젠가 들통나면 어른들이 다른 어느 다른 것이 다 맘에 들어도 그 하나로 모두들 절망을 하실 텐데....
그래서 생명은 성애에게 담배를 끊도록 유도하기 위해 어느 날 "나는 담배를 끊어 1주일째 안 피고 있다"고 했다. 사실 생명은 담배를 안 피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아주 가끔 담배를 피우는 상황이었다. 그 말을 들은 성애도 1주일간 많은 노력을 해보았나 보다. 그러나 이미 고등학교 때부터 담배를 피워 중독이 된 상태라 담배를 끊기가 너무 너무 힘들었나보다. 무던히 노력을 1주일 정도 해보았던 어느 날 함께 카페에서 “담배를 끊으려고 노력은 해봤어?” 라고 말하자 그 말을 들은 성애는 화가 난 듯 핸드백을 땅에 내동댕이치며 “우리 이젠 그만 만나요! 내가 담배 피는 꼴이 보기 싫지요?” 라고 소리친다. 청천벽력같은 소리였다. "왜 그러느냐?"며 소매를 잡는 생명에게 “당신이 더 잘 알잖아요?” 그렇게 말하고는 휙 나가버리는 것 이었다. 생명은 멍하니 하늘만 바라 보고 있었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나이가 30살이 다 되었으면 어린 아이들 불장난도 아니고 결혼 상대자라면 앞으로 몇 년 후 결혼을 하자든지, 아니면 정말로 성애가 아니면 못살겠다든지 라는 확신을 심어주었어야 하는데..., 하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담배는 피워도 된다고 할 수는 없는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그 후로 성애는 학교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다른 후배를 시켜 만나 자고 해도 만나기 싫단다. 안 만난다는 것이다. 생명은 친한 친구 김동섭과 함께 못 마시는 술을 몇 잔 먹고 성애네 집으로 달려갔다. 초인종을 눌렀다. 잠시 후 훤칠한 키에 체격이 좋으시고 근엄하신 성애 아버님이신 송교수님이 나오셨다. “무슨 일이야?” 생명은 당황했다. “네, 교수님! 성애 를 좀 만나러 왔습니다.” 라고 목이 메어 겨우 말할 수 있었다. 교수님은 일고의 겨를도 없이 “내일 학교에서 만나라!” 라고 말씀하시고는 문을 쾅 닫으시는 것이었다. 그 후로 생명은 일주일 동안 밥도 안 먹고 술로 지새우며 성애를 차차 잊어야 했다.
어느 날 본과 4학년 졸업반 때 같은 정주고등학교와 경성대학교의 선배이신 장 교수님은 생명이 여자 때문에 고민한다는 것을 어찌 아시고 졸업반의 대표로 활동한다는 것도 아시고, 군대도 갔다 왔겠다, 졸업반이니 곧 취업을 할 것이고, 보아하니 인상도 괜찮게 생긴 것을 보시고는 ‘너희들은 한의사라 먹고사는 문제는 걱정 안 해도 되니 조용하게 사는 게 좋아’라고 말씀하시며 당신께서 나서서 중매를 해 보시겠다고 한다. 하지만 송성애에 대한 '사랑의 몸살'이 가시기도 전에 선뜻 나서지 못하고 속만 태우고 있었다.
1979년 생명이 군대생활 말년에 별이 두 개인 사단장님이 골프를 치시다가 허리를 다치셨단다. 그래서 이생명이 한의과 대학을 다니다 입대 했지만 수색대대에서 병사들이 다치면 침을 잘 놓아 준다 고 소문이 자자해서 수색대대장이셨던 오팔척 대장의 추천으로 사단장님의 관사에 불리어 갔다. 사단장님은 샤워를 하신 후 잠옷으로 갈아입고 안방에서 생명을 기다리고 계셨다. 생명은 바짝 긴장을 하고 부관과 함께 더듬더듬 방문을 들어서며 “충성!” 하고 칼 같은 거수경례를 하고 방으로 들어서니 사단장님의 첫 말씀은 “네가 나를 사단장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네 환자라 생각하고 편하게 치료하라” 신다.
의사는 늘 환자가 부자라고 아첨하지 말고, 지체가 높다고 기가 죽으면 안 되고, 가족이라고 너무 신경을 쓰면 정확하게 진료를 할 수 없다고 배워왔다. ‘첫인상에 흔들리지 말고 항상 평정심을 갖고 냉정하게 환자의 질병에 집중하여 진료해야 한다’ 고 배웠다.
군대 말년에 팔자가 펴서 제대 2달 전부터 사단장님의 일과가 끝나고 샤워를 하시고 나면 지압해 드리고 침을 놓고 약 30-40분이면 일과가 끝이다. 사단장님 관사에 머물며 심심하면 관사 옆 테니스장에 놀러갔다. 테니스장 옆에 군종신부님숙소가 있었다. 신부님은 성함이 주성령이시고 고향이 전라도 고창분이셨다. 주 신부님의 뒷바라지를 위해 신부님의 어머님께서 관사에 와 계셨다. 주 신부님은 3째 아드님으로 독실한 가톨릭집안이시라 주 신부님의 2째 형님도 신부님이시고 여동생도 수녀님이시다. 테니스장에는 테니스 주 특기병이 3명 있었는데 테니스장을 관리하고 간부들 레슨과 게임을 해주는 일이 전부였다. 그런데 신부님 어머님께서 가끔 테니스병 들에게 가끔 맛있는 간식이며 반찬을 주시니 늘 고마워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이생명이 놀러가자 “이 상병님 신부님 어머님께서 팔이 아프셔서 잠을 잘 못 주무실 정도로 고생하시는데 침 좀 놔주시면 안 될까요?” 라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그럼 어서 모시고 오라고 했더니 할머님을 모시고 왔다. 할머님은 흔히 말하는 ‘오십견’으로 고생을 하고 계시었다. 그래서 침을 놓아 드렸더니 신통하게 그 침을 한 방 맞고 다 나으셨다고 한다. 그래서 고향에 계신신부님 아버님에게 연락하여 저 청년을 주씨 집안의 사위로 삼도록 하라 는 지령을 내리셨단다.
그래서 복학하여 학교 다니고 있는 생명에게 주신부님 아버님은 시골서 상경하시면 가끔 전화를 하여 선을 보러 나오라고 하신다. 수시로 주씨 집안의 아가씨들 가운데 배필이 될 만한 약사, 교사, 첼리스트, 직장여성 들을 3년에 걸쳐 6번이나 소개하셨다. 그러나 결혼할 적년기이지만 아직 학생인 생명은 거절할 수 없어서 계속 어디로 나오시라고 하시면 나가서 선을 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생명이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하자 주씨 집안 신부감은 아니지만 남자 쪽은 할아버지가 주선하시고 여자 쪽은 신부감 어머님 친구가 주선하여 동대문의 ‘지하철다방’에서 7번째 선을 보았다. 이제껏 보았던 주씨 집안의 아가씨는 아니지만 마음에 들었다. 그날 먼발치서 장인 장모도 몰래 보신 모양이다. 생명의 첫 인상이 착한 것 같아 아주 마음에 드셨단다. 그날 다방에서 나와 대학로를 거닐며 양식집에 가서 저녁도 함께 먹었는데 비교적 어느 색시감보다 마음에 들었다. 네째 딸이라 중간에서 중재자 역할을 잘해서 비교적 성격도 무난했다. 가정교육학과를 나와 아직 직업은 없지만 영리해 보이는 미스 강의 생활력이 강해 보여 더 마음에 들었다.
특히 자세히 집안 이야기를 들어보니 장모될 분이 고향에서 99칸짜리 집에 사시던 부잣집 큰딸이셨는데 장인어른 될 분이 전라도 명주에서 교육대학 영어과교수이셨는데 정치에 욕심이 생겨 37세에 고향 남원에서 교육자치 교육장으로 선거에 나와 당선되고 1년 후 5·16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박정희 사령관이 군부통치에 동의하면 도장을 찍고 그 자리에 남겨주고 동의하지 않으면 옷을 벗으라고 하니 젊은 혈기에 반대하고 박차고 나와 그 후로 서울로 올라와 10년간 백수 생활을 하셨는데 장모님되실 분이 딸 5명과 아들 2명을 키우시기 위해 구멍가게, 연탄배달까지 하며 고생 끝에 모두 대학교육을 시키고 안정된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는데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 후로 생명은 늘 장모님이 마음에 들어 결혼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너무 욕심을 부려 송성애와 같은 능력 있는 여자에게 경제적인 의존을 하면서 까지 대학에 남아 연구하겠다는 생각이 너무 지나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아무 직업도 없으니 자신을 믿고 잘 따라 줄 것 같아 미스 강을 택하여 결혼할 생각을 굳혔다. 하지만 미스 강은 시골서 올라 와 동냥공부를 하고 누나네 집에 더부살이하고 있는 무일푼의 생명이 마음에 차지 않았다, 하지만 미스 강 어머님은 생명이 너무 마음에 든다며 이군을 만날 때 입고 나가라며 옷도 사 주시고 용돈도 많이 주시며 더 만나보라고 강요를 하신다.
세 번째 데이트 하는 날 대학로의 어느 카페에서 생명이 마침 졸업하며 <한국의약신문>에 기고하여 기사화되어 나온 “한의학발전을 위해서는 한의학연구소가 꼭 필요하다”는 제목으로 한면에 논문을 실어준 의학전문지를 일부러 가지고 나가서 보여주었다. 천천히 읽어보더니 “아주 좋은 발상이네요” 하고 별로 관심이 없는 듯 도로 신문을 돌려준다. 사실 그간 '한의원을 차려 준다', '병원을 차려준다'고 선을 보자고 제의하는 중매쟁이도 있었지만 생명은 시골서 올라와 겨우 한의과대학을 졸업하여 가진 것도 없고 장가들 결혼준비비용도 없었다. 그래서 어렵고 힘들어도 조그만 단칸방에서부터 살림을 시작해야 했기 때문에 부잣집 딸은 그런 환경을 이겨 나가기 힘들 것이라 판단하여 생활력이 강한 여성을 원했다.
암튼 신부님 아버님은 이내 아쉬운지 한번만 더 보자고 하신다. 악기 오보에를 하는 시립교향악단 단원인 단아한 아가씨를 소개시켜주었지만 미스 강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생명은 미스 강에게 프러포즈를 하고 결혼까지하게 되었다.
1984년 졸업할 당시에 생명은 시골에서 올라와 공부만 했지 돈 한 푼 없는 빈털터리였다. 후암동에 ‘신통한의원’에 취직을 했지만 결혼식을 앞두고 할 수없이 둘째 자형에게 500만 원을 빌려 겨우 300만 원짜리 전세를 구했다. 그 돈으로는 서울에서는 방을 못 구하고 부천으로 나가는 경계선을 벗어난 ‘역곡’ 이라는 교외에 2층의 옥탑 방을 겨우 구할 수 있었다. 그때 마침 2달간 받은 월급과 축하금으로 제주도에 겨우 신혼여행을 다녀왔다.
비록 서울 외곽의 작고 불편한 시골 옥탑방이지만 신혼살림을 차려 초등학교 때까지만 어머니가 해주시는 밥을 먹고 학교를 다녔지 중학교 진학 이후부터는 형수님, 누님들이 챙겨주시는 ‘18년간의 눈칫밥’을 면하게 된 것이 너무 기뻤다. 미스강의 위로 3언니들은 모두 연애를 잘 하여 좋은 신랑감을 구했다. 그러다보니 역시 4째 딸도 아주 단촐하게 장롱 한 짝 들고 시집을 왔다.
어느 날인가는 생명은 강남성당에서 독거노인들을 위해 매주 목요일 오전에는 한의원 문을 닫고 무료진료를 해주고 있었다 그때 마침 함께 진료를 도와주기 위해 봉사를 나오신 자매님 한 분이 “의사와 결혼하려면 열쇠가 3개는 있어야 한다면서요...”, “선생님은 결혼할 때 열쇠를 몇 개나 받으셨어요?” 하고 물으신다. “네? 무슨 말씀이세요? 우리 집사람은 장롱 하나 딸랑 들고 시집 왔는데요.” “에이 그럴 리가요?” “정말 입니다.” 사실 그 자매님은 딸이 셋이 있었는데 큰 딸을 시집보내기 위해 중매쟁이에게 의뢰하여 신랑감으로 어떤 의사를 한 분 소개받았는데 몇 번 만나게 해주더니 다짜고짜 “아파트는 몇 평짜리를 사줄 거냐? 그래도 의사인데 33평 정도는 하나 사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라고 하시더란다. 남편은 일찍이 50대 초반에 지병으로 가시고 남은 아파트로 남은 두 딸도 공부를 시켜야하는 데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를 팔아서는 안 될 것 같아 그렇게는 안 된다고 하자. 주말에 자기 딸과 의사가 만나 백석역 쪽으로 데이트 하러 가자고 하였는데 토요일 약속한 시간에 안 나타나고 끝났다고 하신다. 그런데 남부한의원 이 원장은 열쇠를 하나도 안 받고 결혼을 하셨다니 ‘세상에 가장 존경스러운 분’이라며 무료진료를 열심히 도와주셨다.
1984년 생명이 졸업하던 해에 충북 청주 청원에서 시범적으로 한방 의료보험을 해보았으니 한방 의료보험 전국으로 확대를 해달라고 청원하는 대한한의사협회의 비상대책위원회에자진 참여하여 일을 하게 되었다. 전국 시도 한의사회와 연합으로 정부에 요청하는 시위와 청원서 제출 등을 준비회의를 경성대 삼정학회 출신 4명을 주축으로 10여명이 결성되었다. 한의사협회와 긴밀한 협조를 이루며 성명서를 만들어 정부 요로에 보내고 전국 회원들을 서울시내 L호텔로 모이게 하여 결의대회를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결혼 한지 6개월도 안 된 신혼 때임에도 불구하고 일은 저녁 7시에 모이면 보통 새벽 4-5시에 끝나 집에 들어갈 때는 담장을 넘어서 들어가기 일쑤였다. 월급은 타서 대학원 등록금을 마련하랴 월세를 내랴, 정기적금을 부으랴, 생활하기가 빠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