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술과 예술 사이에서의 고뇌, 마술사 이은결
최연소 마술사란 타이틀부터 우리나라 최초로 세계대회 우승에 이은 수많은 수상 경력까지, 이은결의 행보는 현존하는 마술사들의 기준이 되어왔다. 근래에 많은 젊은 마술사들이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개척한 길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런데 이런 위치가 한창 명성을 즐기고 있어야 할 32살의 마술사를 너무 일찍 심각한 고뇌 속으로 밀어넣고 말았다. “저를 보고 마술사로 나선 후배들이 저마다의 세계를 구축하려는
모습을 보면서 문득 ‘나의 공연이 정말 고스란히 내 것일까?’ 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결국 저 역시 세계적인 대가들의 공연을 차용하고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마술을 벗어나 그 이상의 무엇인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낀 것입니다.” 이은결은 카메라 조작 마술로 최초의 SF 영화 장르를 개척한 ‘조르주 멜리에스’와 탈출 마술 장르를 창조하여 억압받는 민중을 표현하려 했던 ‘후디니’를 언급했다. 마술사로 시작하여 새로운 장르의 무대를 개척한 것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만의 고유함을 찾으려는 창조적인 예술가로서의 길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소모적인 마술을 거부하고 영원한 예술을 고민하기 시작한 이 젊은 마술사의 진짜 마술이 어떤 것일지, 그의 두 손에서 눈을 뗄 수가 없을 것 같다.
1인자 처음으로 신세대 마술사란 타이틀을 얻은 이은결은 우리나라 최초로 국제대회에 나가 1등상을 거머쥐었다. 이후 각종 세계대회에서 수상한 그는 우리나라 최초로 마술에 다양한 음악과 스토리, 퍼포먼스를 도입하여 우리나라 마술의 새 시대를 열었다.
10,000가지 16살 때부터 마술을 시작한 이은결이 수많은 마술 기술을 익혔다. 그러나 서로 다른 마술이 결합하여 새로운 마술을 창조하는 그에게 있어 가짓수는 1만 가지 이상이 될 수도 있다고 한다.
(왼쪽) 시대가 요구하는 테일러의 자격, 카마치아 강신명
2007년 문을 연 수제 양복점, 카마치아가 불과 7년 만에 명성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기존 양복점들의 저가 전략에서 탈피하여 최고급 원단을 사용하고, 모든 공정을 수공으로 만들어 최고의 수제 양복을 지향했기 때문이다. “수제 정장이 너무 좋아 20대 때부터 찾아다녔는데 막상 좋은 수제 정장을 구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기술 좋은 장인들이 많은 것을 고려하면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카마치아 정장이 특별한 이유는 또 하나 있다. 젊은 테일러답게 최신 트렌드 디자인을 적용한다는 점이다. “이어야 할 전통이 있고, 따라가야 할 시대적 요구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두 가지를 모두 수용할 수 있어야 수제 정장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600명 핸드메이드의 가치는 단골 고객의 수에 달렸다. 연예인과 방송인들이 애용하는 브랜드로도 유명해진 카마치아의 단골 고객은 현재 600여 명에 이른다.
4주 카마치아 정장은 90% 이상이 핸드메이드로 이뤄지며, 두 번의 피팅 과정이 있어 고객이 두 번 매장을 방문해야 하기에 보통 4주가 걸린다. 가격은 100~500만원까지 다양하다.
(오른쪽) 국가대표를 키워내는 요리사, 조리명인 박동연
박동연 조리명인은 호텔 보조에서부터 시작해 조리명인에 오르기까지 22년 동안 주방을 지켜왔다. 그리고 지난해부터 우리나라 요리 국가대표 팀을 지도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팀을 이끌고 나가 5개의 메달을 획득했다. “요리에는 기교와 센스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앞서 기본이 중요합니다. 기본을 배우기 전에 요리 경험이 있는 사람들도 있는데, 국제대회에 나가면 결국 기본기부터 배운 학생들이 더 좋은 성적을 거둡니다.” 국가대표 감독은 2년만 할 수 있다. 올해까지 선수들을 지도한 다음에 그도 현업으로 돌아가게 된다. “요리사로서 더 많은 경력을 쌓아야겠지요. 하지만 때가 되면 제 요리로 사람들을 즐겁게 한 경험을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눌 생각입니다. 그게 후배 요리사들에게 제가 마지막으로 보여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10명 조리명인은 100만 명 이상의 조리사들이 가입해 있는 한국조리사회에서 경력은 물론 후진 양성에 힘을 써 국내 조리발전을 위해 이바지한 조리사들에게 내리는 명예다. 2006년 1호 명인이 탄생한 후 현재 10명에게 명예가 주어졌다.
500가지 22년간 해외와 국내에서 활동하며 이탈리아와 프랑스 요리 등의 서양요리를 익힌 박동연 명인이 만들 수 있는 요리 종류는 500여 가지에 이른다.
위대한 예술을 되살리는 즐거움, 미술 복원사 김주삼
김주삼 소장은 서양화와 조형물 복원에서 우리나라 최고 권위자다. 지금까지 그의 손을 거쳐간 작품은 국내 작가뿐 아니라 마티스나 피카소, 샤갈 같은 거장들의 작품까지 수백, 수천 점에 이른다. “대학생 때는 화학을 전공했지요. 그래서 파리 대학에 들어가서는 부족한 미술 분야를 보충해야 했습니다. 반대로 우리나라 미술 전공자들에게도 걸림돌이 있습니다. 복원에 쓰일 재료를 사용하기 위해 화학을 알아야 하는데, 말만 나와도 고개를 흔들더군요.” 지칠 법도 했을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김주삼 소장이 복원사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이유가 있다.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리고 감상하는 것을 좋아했던 저에게 예술품을 복원하는 것은 더없이 즐거운 일입니다. 세계적인 작품을 가까이 볼 수 있고, 그 속에서 당시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읽을 수 있으니까요.” 금세 수리할 수 있는 작품도 가능하면 긴 시간을 할애한다는 김 소장은 많은 작품을 보기보다는 작품 한 점 한 점의 완벽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제 개인의 명예도 달린 일이지만, 작품의 예술적 가치 때문에 더욱 중요합니다. 한 번 복원이 잘못된 작품은 영원히 그 가치를 잃을 수도 있으니까요.”
35세 대학 졸업 후 파리에서 7년간 공부하고 돌아와 첫 직장인 호암 미술관에 취직했을 때 김주삼 소장의 나이. 상대적으로 상당히 늦은 취업이었으나 복원사가 전무하다시피 했던 당시에 그는 어느 예술 거장 못지않은 대우를 받았다.
3달 작품의 크기에 상관없이 손상 정도에 따라 복원 기간은 짧게는 하루, 이틀에서 길게는 세 달까지도 걸린다.
(왼쪽) 한눈에 척 알아맞추는 ‘발’도사, 송림제화 임명형
우리나라 수제화의 산실인 송림제화의 3대 대표, 임명형 사장. 취업 준비를 하던 젊은 시절, 밤샘하는 아버지를 대신해 가게에 나간 것이 계기가 되어 가업을 잇게 된 그는 가죽 무두질과 망치질부터 시작해 지금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한때 사양 산업이었던 분야에 그가 투신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은 아버지가 만든 수제화를 신고 감사해 하는 고객들의 웃음 때문이었다고 한다. “사양 산업이라고들 했지만 좋아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절대 망하지 않겠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벌써 20년이 흘렀다. 그 긴 세월동안 그는 신발 장인을 뛰어넘어 ‘발’도사가 되었다. “이제는 발만 보면 한눈에 그 사람이 어떤 병력이 있는지 알아맞춥니다. 심지어 성격도 알 수 있을 정도지요, 하하하!”
7일 성인 남성 수제화의 경우 7~10일 정도에 한 켤레가 완성된다. 평균 30만원대에서 시작하지만 고급 가죽을 사용하거나 특수화의 경우에는 수백 만원 이상까지 될 수 있다.
3,000명 80년 전통의 송림제화는 고객들조차 대를 이어 찾는 곳이다. 1년간 송림제화를 찾는 고객은 평균 2,000~3,000명에 이른다.
(오른쪽) 아프지 않게 살살 고쳐주는 약손, 정동병원 김창우
관절내시경 수술의 권위자인 김창우 원장은 일부러 신분을 밝히지 않고 병원 진료를 받으러 간 적이 있었다고 한다. 환자의 심정을 이해하고 싶어서였다. “기다리는 동안 머리로는 의사들을 이해하면서도 속마음은 다른 환자들처럼 짜증이 났습니다. 환자들 입장에서 살펴봐야 함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김 원장 정도의 경력이면 수술 중에 미세한 차이까지도 손으로 느낄 수 있다고 한다. 그 감각으로 환자들이 최대한 통증을 느끼지 않게 치료하고 싶은 게 그의 마음이다. 최근 이슈가 된 ‘수면운동요법’도 그런 마음으로 개발한 치료법이다. “기존 방법으로 오십견 환자들을 치료하면 치료 내내 너무 고통스러워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다들 웃으면서 나가십니다. 그럴 때면 제가 의사 노릇을 제대로 한 것 같아 더없이 뿌듯해집니다.”
100,000명 김창우 원장이 2004년 정동병원을 개원한 후 내원한 환자 수. 이 중 절반 정도가 김창우 원장 손을 거쳤다.
20분 다른 수술에 비하면 관절 수술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김창우 원장은 보통 2시간 정도 걸리는 수술을 1시간 20분 정도에, 1시간 정도 걸리는 내시경 수술은 20분이면 해낸다.
천재적 감성에서 폭발하는 스트로크, 기타리스트 박주원
지난해 한상원, 최희선, 김도균, 김태원, 유병열, 손무현, 이현석 등 기라성 같은 기타리스트들이 참여한 게리 무어 헌정 공연에 이제 갓 30세를 넘어선 박주원이 있었다. <집시의 시간>이란 앨범 한 장으로 이름 대신 ‘집시 기타’라는 명성이 자자한 바로 그 장본인이었다. 박주원은 9살 때 기타를 시작했다. “다른 악기들은 금방 ‘도레미파솔라시도’ 소리를 낼 수가 있는데 기타는 아무리 해도 소리가 안 나더라고요. 오기가 생기기도 했고, 쉽지 않다는 점에 매력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서른 살이 되기 전에 그의 실력은 이미 소문나기 시작했고, 결국 제대하자마자 임재범 밴드에 들어가게 된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많은 가수들의 공연과 앨범 작업에 참여하면서 명성을 쌓을 수 있었으며, 지난해에는 2집이 1집 이상의 성공까지 거두게 된다. 앞선 세대들에 비하면 상당한 성공이며 빠른 행보는 아닐까? 대답은 그의 강력한 스트로크 주법만큼이나 명확했다. “주변에서는
빠른 성공이라며 ‘겸손’하라는 말을 듣곤 합니다. 하지만 기타로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는 저는 빠르다고 느끼지 않아요. 음악 같은 예술 세계에서 빠르고 느림의 기준이 있던가요? 욕을 먹어도 어쩔 수 없죠. 저는 제가 가야 할 길만을 바라보고 갈 뿐입니다.”
24년 올해 33살에 불과하지만 박주원의 기타 경력은 무려 24년이다. 클래식 기타로 시작하여 통기타와 일렉트릭 기타를 거쳤으며, 우리나라에 전무했던 집시 기타 주법은 배울 곳이 없어 거의 인터넷 독학으로 익혔다.
20대 집시 기타로 유명해졌지만, 박주원의 목표는 모든 장르 기타를 연주하는 것이다. 다양한 주법을 구사하는 그는 종종 장인들에게 기타를 선물로 받는데, 갯수가 20대가 넘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