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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천교회 부설 청동학교의 설립과 의의
1) 교회 부설 학교 설립
한국의 근대교육은 기독교에 의하여 전래되고 발전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울이나 지방, 어디서나 교회가 있는 곳이면 근대 교육이 함께 이루어졌다.
이러한 예는 충북도 예외가 아니었다. 교회로 찾아드는 사람들은 대부분 기독교의 진리를 깨닫고, 그것을 따르는 사람들이지만, 교회를 찾는 사람들 중에는 기독교가 새로운 힘이 있어 보여, 그 힘을 의지하여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다시 세워보려는 기대감에서 교회를 찾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하여 교회에서는 복음을 전함과 더불어 지역민들에게 의식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
서울에서 민노아학당(현 경신중고등하교)을 운영하며 교육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던 민노아 선교사는 교회 부설 사립학교를 세워 교육에 진력하였다. 그는 청주읍교회(1904)를 세우고, 청주를 중심으로 동, 서, 남, 북에 각각 사립학교를 설립하였다. 먼저 청주읍내에서 김태희, 방흥근, 김원배 등이 경영하던 광남학교를 인수하여 청남학교(淸南學校, 교장 계군)라는 이름으로 청주읍교회에 설립(1904)하였고, 청주 신대리의 신대교회에 청서학교(淸西學校, 교장 오천보), 묵방리의 묵방교회에 청북학교(淸北學校, 교장 안경연), 청천교회에 청동학교(淸東學校, 교장 이종호)라는 기독교 학교를 설립하였다. 이들 학교는 민노아 목사 등 선교사들이 관계하면서 근대적 교육의 기틀을 마련하며 각 지역의 문맹 퇴치와 생활개선, 그리고 민족교육과 근대 의식의 고양에 앞장서나갔다.
2) 이종호에 의해 청천면 선평리에 청동학교 설립
선평교회(현 청천교회)가 민족사의 흐름과 개화운동의 시세를 따라 전통 수구세력이 강한 청천 땅에 일찍이 청동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의 기초를 다졌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강한 유교적 전통의 영향으로 서당 교육이 성하던 이곳에 기독교를 통하여 신식교육을 시작함으로써 지역민들은 새로운 시대의 변화 물결을 느끼게 되었다.
이로 인해 뜻이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지금껏 길들여 온 봉건적 의식과 낡은 구습의 생활에 무엇인가 반성과 새로운 자각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자각들이 교회를 세운 신앙인들에게 싹 터 올라 마침내 배움의 터전인 청동학교가 세워진 것이다.
청천에 학교를 세운 이종호의 가슴속에는 학교 건립에 대한 열정이 뜨거웠다. 산골의 가난한 어린이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안겨다 준다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일이겠지만 더욱 중요한 사실은 나라의 부흥과 민족독립의 길이 바로 ‘배움’에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이것은 자연 청동학교의 설립이념과 교육목표가 되었던 것이다.
청동학교는 이렇다 할 교재도 선생도 따로 없었다. 주일학교에 모이는 아이들을 우선적으로 삼아 성경이야기를 들려주었고, 한글(국어), 산수, 지리, 물리, 체육, 수신 등의 과목을 가르쳤다. 이런 현상은 기독교 학교의 일반적인 모습이었으나 그중에서도 성경과 한글이 중요한 과목이었다. 그것은 교회 부설학교는 성경말씀과 신앙교육을 중요시하였기 때문이다.
당시의 학생들 중에는 길게 머리를 땋은 머슴애들만이 아니라 학령기를 이미 훨씬 넘어 장가를 들어 상투를 맨 어른 학생들도 더러 있는 것은 일반적인 사례였다.
안타깝게도 청천교회의 설립 취지나 교육 목표, 구체적인 교육 상황을 보여주는 자료들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1909년에 충청북도 관찰도에서 발간한 『한국 충청북도 일반』이라는 일본어판 책이 1996년에 충북개발연구원(원장 나기정)을 통하여 번역되어 출판되었는데, 그 책의 224쪽에 도내 종교 계통의 사립학교 현황이 나와 있어 일부 상황을 엿 볼 수 있다.
학교명 | 소재지 | 설립자 | 교장명 | 학과목 | 수업연한 | 교원수 | 학생수 | 경비예산 | 설립일 |
사립청남학교 | 청주군 동주내면 동주내동 | 민노아 | 계군 | 예수교 보통과 | 7년 | 3명 | 49명 | 900,000 | 1909.8. 1 |
사립청신학교 | 청주군동주내면 금천동 | 민노아 | 계군 | 예수교 보통과 | 4년 | 1 | 25 | 192,000 | 1909. 8. 7 |
사립청서학교 | 청주군 서강내일면 신대동 | 민노아 | 오천보 | 예수교 보통과 | 4년 | 1 | 15 | 120,000 | 1909. 8. 7 |
사립청동소학교 | 청주군 청천면 강좌동 | 민노아 | 이종호 | 예수교 보통과 | 4년 | 1 | 12 | 64,940 | 1909. 8. 7 |
사립청북소학교 | 청주군 산외일면 묵방동 | 민노아 | 안경연 | 예수교 보통과 | 4년 | 1 | 25 | 64,940 | 1909. 8. 7 |
사립돈신남소학교 | 괴산군일도면 서부리 | 민노아 | 김주현 | 예수교 일어보통과 | 6년 | 2 | 30 | 156,000 | 1909. 8. 1 |
사립종고성교회 신명학교 | 진천군 | 부하 (府下) | 단아덕 | 예수교 보통과 | 4년 | 1 | 22 | 300,000 | 1909. 4. 1 |
합계 | 7개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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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 178 | 1,876,9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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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내 종교학교 설립현황>
이를 보면, 충청북도에 장로교회의 학교가 6개, 성공회의 학교가 1개, 총 7개의 종교계(기독교) 학교가 있으며, 여기에 178명의 학생들이 재학하고 있었다.
청주선교부에서 세운 학교가 청주를 중심으로 청동(청천), 청서(신대), 청남(청주읍). 청북학교(묵방)가 있었고 여학교로 청신여학교가 있었으며 괴산에 돈신학교가 있다. 그리고 진천 성공회 부설 학교로 신명학교가 있다. 이들은 모두 충북의 근대교육의 선구적 역할을 한 선교계 사립학교들로서 지역의 근대문화 형성의 밑바탕이 되었다.
청동학교는 위치가 청주군 청천면 ‘강좌동’으로 나와 있다. 설립자는 민노아 선교사, 교장은 이종호, 학과목은 예수교 보통과, 수업연한은 4년, 교원수는 1명, 학생수는 12명, 학교 운영 경비예산은 64,940원, 설립연월일은 1909년 8월 7일로 되어 있다.
청동학교 소재지가 청천면 ‘강좌동’으로 나와 있는데 이것은 잘 못된 기록이다. 일본어 원본에도 ‘姜佐洞’(강좌동)으로 되어 있으나, 이것은 교회 및 청동학교가 위치한 마을, ‘선좌동(善佐洞)’의 오기이다. 이기 과정에서 선좌동(善佐洞)의 ‘善(선)’자를 ‘姜(강)’자로 잘 못 옮겨 적은데서 발생한 단순 오류라 생각된다. 오늘날의 선평리는 당시의 선좌동과 평리가 합쳐져서 생긴 이름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3) 설립자는 이종호이나 공식 등록에는 민노아 선교사 이름으로
실제로 학교 설립자는 이종호이나 등록서에는 민노아 선교사로 되어 있다. 이런 현상은 청남학교, 청북학교, 청서학교도 마찬가지 현상으로, 설립자가 모두 민노아로 되어 있다. 각 교회 부속학교의 설립자가 실제로는 한국 사람이지만, 충북선교의 대부, 민노아 선교사를 학교 설립자로 등록하였다. 선교부에서는 교회 부속학교들에 대한 재정적 지원과 함께 학교들을 선교부 관리 하에 두어 외풍을 막고자 함이었고, 또한 정식으로 관의 인가를 얻기 위해서는 선교사 명의로 하는 것이 한국인 명의로 하는 것보다 여러 면에서 유리하다는 점도 작용하였던 것이다.
또 한 가지 주목되는 것은 청남학교는 다르지만 청동학교를 비롯하여 청서, 청북학교의 설립일자가 다 같이 1909년 8월 7일로 되어 있다. 이것은 각 학교가 이미 설립되어 있었으나 관으로부터 설립허가를 받기 위해 기관에 등록하여 인정을 받은 날짜가 1909년 8월 7일이라 해석된다. 그러므로 학교가 실제로 설립된 날은 그 이전인 것이다.
3) 1916년 전후에 청동학교가 문을 닫다.
청동학교는 언제 설립되었으며 언제까지 계속되었을까?
1906년에 교회가 설립되었으니 1907년 경 학교가 설립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얘기할 수 있는 것은 교회 설립에 깊이 관계한 민노아 선교사는 일찍이 서울에서 교육선교의 경력을 가진 목사이다. 한국에 도착한 그 이듬해인 1893년에 예수교학당(서울 경신중고등학교의 전신) 3대 교장에 취임하고 학교 이름을 민노아 학당이라 하면서 육영사업에 헌신하였던 것이다. 얼마 후 민노아 학당이 폐교되자, 그는 1904년에 청주에 내려와 청주읍교회(현 청주제일교회)를 세우고 동시에 학교 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청남학교(1904)를 세운 교육가이기도 하다.
그는 충북 선교 초기, 1906년에 청천교회와 묵방교회가 세워지자 교육 선교를 구상하며 청주군에 있는 동, 서, 남, 북의 4개 교회에 학교 설립을 구상하여 교육 사업을 서둘렀다. 청주읍교회에 청남학교, 이미 세워진 신대교회에 청서학교, 묵방교회에 청북학교, 청천교회에 청동학교, 이렇게 청주를 중심으로 4개의 학교를 세웠던 것이다.
그러므로 청동학교의 설립은 교회를 세운 후 청주선교부 민노아 목사의 지원으로 1907년경에 이종호 씨의 자택에서 학생들을 모아 학교를 열었던 것으로 비정(比定)된다. 이로써 청천지역에 종래의 서당체제의 교육에서 근대 교육체계를 도입한 청동학교가 세워진 것이다.
청천지역에 교회의 설립과 학교의 개설을 서두른 것은 이곳을 장차 청주 동편 지역의 선교 거점지로 삼고 주변으로 복음을 확산시켜 나가려는 원대한 포부와 밑그림에서 연유한 것이었다.
그럼 청동학교가 언제까지 존속되었는가하는 문제다. 학교 존속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자료는 미흡하다. 그런 가운데 『청농팔십년사』나 『청농백년사』에 보면, 도립청주농림학교(현 청주농업고등학교)의 제1회(1911년) 입학생 45명에 대하여 출신학교별로 통계를 잡아 놓았는데, 그 가운데 청동학교 출신으로 1명이 나타나 있다. 이를 보면, 적어도 1910년까지는 학교가 존속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후 ‘경충노회록’을 더 천착해보면, 1914년 노회록에는 충청도 지역에 소학교가 4개, 학생수 총 21명으로 나와 있다. 1915년 6월 『경기충청노회 제8회 노회록』의 통계표에는 충청지구 동편 지역의 학교 난에 소학교 1개가 나타나 있다.
| 소학교 | 소학교 학생수 |
청주읍 | 2 | 49 |
청주남편 | - | - |
청주북편 | 1 | 40 |
청주동편 | 1 | 32 |
*충청지구 학교 수(1915. 6)
이곳 청주 동편 지역의 소학교 하나는 청동학교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 때 학생은 32명이었다.
그런데 1916년 6월, 제10회 노회록의 통계표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 충청지구 학교 수(1916. 6)
| 소학교 | 소학교 학생수 |
청주북편 | 1 | 29 |
청주남편 | 1 | 28 |
청주동편 | 0 | 0 |
위의 표에서 볼 수 있듯이 1916년 통계 자료에는 청주동편지역의 학교 수를 표기하는 난이 공난으로 되어 있어, 이전에 보이던 청주동편의 학교가 보이지 않고 있다. 이후에도 청주동편 지역에 학교가 있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고 있다.
1915년에는 청동지역에 학교가 보이나, 1916년 6월 통계표에는 보이지 않은 것으로 보아, 청동학교는 1916년을 전후로 하여 문을 닫은 것으로 여겨진다.
청동학교가 문을 닫게 된 배경은 이렇다.
첫째, 계속된 일제의 교육압박이다. 일제는 1910년에 국권을 침탈하고, 이어 1911년 8월에 전문 30조로 된 「조선교육령」을 발표하였다. 이 법령은 각급학교(보통학교, 고등보통학교, 여자고등학교, 실업학교, 사립학교)의 교육규칙과 학교 관제들에 관한 규정이었다. 이 법령의 주 핵심 내용은 조선인에 대한 교육은 일본제국에 충량(忠良)한 국민으로 교육하는 것이고, 일본어를 보급하는 것이며 조선에는 대학을 설치하지 않고 필요하면 실업기능의 교육만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나아가 11월 1일의 「사립학교규칙」 등을 발표하면서 사립학교를 통제하며 기독교 학교를 옥죄기 시작하였다. 주요 내용은 총독의 권한에 관한 것으로, 학교의 설립과 유지, 교원의 인사, 교과서 선택, 교육과정 운영 등 학교 운영의 전반적인 사항은 총독의 허가를 받도록 한 것이다. 이것은 만약 ‘법령을 위반하거나 안녕 질서를 문란하게 하는 경우 또는 풍속을 어지럽게 하는 경우’에는 총독부가 학교를 폐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일제는〈사립학교규칙〉으로 기독교 사립학교를 규제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그렇지만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된 사립학교를 통제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종교와 교육의 분리라는 교육 방침을 완전히 관철하지는 못하였다.
이에 일제는 보다 강화된 교육 법령을 준비하였다. 곧 일제는 종교계 학교를 탄압하기 위해 1915년 3월 24일에 「개정 사립학교규칙」(총독부령 제24호)을 공포하였다. 개정된 규칙의 요점은 ‘종교와 교육의 분리’, ‘교원 자격의 강화’였다. 종교와 교육의 분리라는 교육 방침을 표방하면서 사립학교에서의 행해지는 종교 교육 및 종교 의식을 금지하였다. 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고 기도 훈련을 시키는 일을 금하는 일제의 압박은 학교 운영에 걸림돌이 되었다.
둘째, 재정의 어려움이었다. 학교를 운영하는데 있어서 교사 월급과 기초 경비는 선교부의 재정적 지원을 받았으나 나머지 운영비는 교회 자체에서 부담하는 체제였다. 그렇기에 어려운 농촌경제에서 학교를 원활히 운영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곧 재정의 어려움도 봉착하였다. 양관 및 소민병원 건립과 운영에 많은 재정이 투여됨으로 인하여 청주선교부에서는 변비(邊鄙) 지역에 있는 청동학교에까지 교육 재정 지원이 조달되지 못한 것도 한 원인이었다.
셋째,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교회 영수이며 학교장으로 활동하던 이종호 교장이 교회를 떠나게 되자, 어려움을 겪던 청동학교는 더 이상 지탱하기가 어려워 1916년 전후에 문을 닫고 말았다고 해석된다.
4) 청동학교가 가지는 의의
구한말 개화기의 열풍을 타고 새로운 문물과 제도 및 기관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종래의 한문교육 중심인 서당 체제를 탈피한 청천지역의 근대적인 학교, 청동학교가 1907년에 교회 부설로 세워졌고, 1909년에 정식인가를 받아 근대 교육과정을 교육하며 복음과 교육 계몽을 추진해 나갔으나, 일제의 압박, 열악한 재정, 지역의 변비성(邊鄙性) 등으로 1916년 전후에 폐교된 것으로 보인다.
초기의 어려운 재정 상황과 일제의 간섭을 극복하며 어렵게 유지하여 오던 청동학교가 1916년 전후로 폐쇄되고 말았으나, 이는 문맹퇴치와 근대 의식을 고양하며 서당체제를 탈피한 청천 지역 근대 교육의 효시란 점에서, 그리고 훗날 청천공립보통학교(1921) 출현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점에서 지역사적으로 큰 의의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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